'Life'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8.11.28 PID 제어 2
  2. 2007.12.29 일름 1
  3. 2007.12.03 개성의 탄생

PID 제어

잡기 2008. 11. 28. 16:45
갑자기 온도 제어계를 구성해야 하는데 딱히 생각나는게 없어 미적분만 사용했다. 무식해서, 백여 년 전부터 잘 알려져 있다는 PID(비례적분미분) 제어 방식을 모르고 있었다. 제어공학과는 인연이 멀고 그저 기억나는 건 라플라시안? PID에 관해 죽 읽어보니 내가 짠 제어 프로그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펌핑 업에서는 반은 PI를 사용했고 안정 구간에서는 게인 스케쥴링을 해서 배율이 약한 PI를 사용했다. 센서 AD 오차를 줄이기 위해(AD 오차 1.25 LSB + 망할 노이즈 24mv) LPF를 사용했다. 우연찮게도 미분 제어는 온도 제어에 알맞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PID 논문 따위를 읽어보니 그간 내가 한 삽질에 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혹시 난 천재일까?).

오버슛 0, 언더슛 0, Tr <2m, Tf<3m, 20-100도 제어, 편차 0.2도라는 그저 어처구니 없는 조건에, 첫 설계서를 보고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난다.  딱 한 달 전이다. PID 제어기의 구현은 비교적 쉽지만 올바른 제어 파라미터 설정이 어려워 '개고생'이 보인다. 일단 만들고 PID 제어기의 과적분 방지를 위한 wind up을 간단히 구현했다.

첫 PI 구간에서는 적분 시간이 30초로 거의 고정되므로 Kp, Kd만 구하면 되는데 Kp는 비례구간의 상방 경직성 에너지 레벨이 변수이고 Ki는 진동을 흡수하기 위한 파라미터.  이렇게 해서 설계하고 테스트 후 현장에서 다시 테스트하자 결과가 엉망으로 나왔다. 아침에 캘리브레이션 해 놓은 다음, 점심 때 테스트한 것과 저녁 때 테스트한 결과가 달랐다.

챔버 내부의 온도가 교란에 민감한 것은 챔버와 외부의 단열이 잘 안된 탓이다. 조그만 챔버의 열 특성을 계산하는 모델 따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챔버 내외부의 온도 차이가 챔버 안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작동 중 동작은 상관없으나 캘리브레이션에서 산출한 최적 제어 파라미터가 매번 조금씩 다르게 나왔다. 이것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그 바닥 기술자들 열에 아홉은 PID 제어를 하지 말란다. SP 별로 온도 프로파일을 떠서 최적 제어 파라미터를 표로 정리해 찾는게 장땡이란다. 시간이 엄청나게 걸리는 작업이고 그런 챔버가 1000개 라면 미친 짓이 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수학 아무리 해봤자 소용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수학을 어설프게 하면 그렇게 된다.  실세계는 카오스다. 그리고 튜닝은 수학이나 알고리즘과는 또 다른 문제다. 온도별 에너지 소비량이 다른 데다가 PID 제어계의 여러 자동 튜닝 알고리즘이 찾는 비례상수나 적분상수 따위가 최적값이 아닌, 적당한 값이기 때문에 어차피 자동 튜닝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Cohen-Coon의 알고리즘은 너무 어그레시브한데다 적용하니 오버슛이 강하게 발생해서 포기. PID 튜닝 관련 논문 중 개중 재미있었던 것은 Sigurd Skogestad가 쓴 Probably the best simple PID tuning rules in the world였다. 물론 그의 룰 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Ziegler?Nichols Method가 낫다. PID는 사실상 퍼지 로직과 거의 유사하다. 가만있자.. 퍼지 로직을 알고리즘 구현에서 마지막으로 사용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 그때 무척 유행했다. -_-
단순화한 PID code
[code] class CPIDControl { var pv; // previous error var iv; // Integral Value var iMax; // integral Maximum var iMin; // integral Minimum var Kp; // Proportional Konstant (Gain) var Ki; // Integral Konstant (Gain) var Kd; // Derivative Konstant (Gain) var Ti; var Td; function CPIDControl(p, i, d, ix, im) { Kp = 1.0; Ki = 0.0; Kd = 0.0; pv = 0.0; iv = 0.0; Ti = 1; iMax = 10000.0; iMin = 0.0; } function setupConst(p, i, d) { Kp = p; Ki = i; Kd = d; tWait = util::tick(); } function resetInt() { pv = 0.0; iv = 0.0; } function setupInt(im, ix) { iMax = ix; iMin = im; } // e : tempSet - tempRead // v : tempRead function update(v, e) { var p = Kp * e; iv += e; if (iv > iMax) iv = iMax; if (iv < iMin) iv = iMin; var i = Ki * (iv / Ti); var d = Kd * (v - pv); pv = v; return p + i + d; } } // read temperature from AD converter function getADTemp() { } // set PWM control value to output function setPWM(v) { } function main() { var cPID = new CPIDControl; var tempSet = 200.0; // set SV while (1) { var tempRead = getADTemp(); // get PV var e = tempSet - tempRead; // get error var cv = cPID.update(tempRead, e); // get control value cv = cv / 100.0; // control value scaling setPWM(cv); } } [/code]
한 달 내내 온도 제어하는 임베디드 어플리케이션 작성하다 보니 온도가 오락가락하고 머리가 어떻게 되서 현재 경제 상황을 잊어버렸다(온도 제어는 어떻게 잘 되었다).

작금의 경제 상황은 딱히 한 마디로 묘사하자면, fear left no room for other emotion쯤? (나야, 그다지 공포스럽게 긴장한 것은 아니지만, 뜻대로 안되서 짜증스럽다) 그래서 '경기침체기 글로벌 투자 전력(Conquer The Crash)'란 책을 읽었다. 2001년 엘리엇 파동 이론으로 곧 도래할 엄청 심각한 디플레이션을 예측한 작자의 글이다.  작금 경제 상황은 한 마디로 신용의 붕괴다. 

작자가 추천해주는 경제 공황 생존법을 요약하자면, 미국 재무부 채권 구입, 공매도 활용, 현금 보유, 금/은 실물 보유, 스위스/싱가폴 은행 계좌 개설 및 스위스/싱가폴 국채 구입이다. 이들 규칙대로 하고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고 세계 금융 시장의 혼돈과 몰락을 즐긴다''.

Donnie Darko
Donnie Darko. SF라고 해야 하나? 양심상 그럴 수는 없지. 왠 토끼가 나타나 지구가 며칠 후 멸망할 꺼라고 알려준다. 그후 도니 다코의 신상 변화. 근간에 본 영화 중, 대단히 감상적이고, 과정이 악몽같고, 끝이 웃기면서도 괴상하고, 여러 장르가 섞여있고, 각기 다른 결말에 대한 해석이 가능한 복합적인 틴에이지물이다. 달리 말해 두 번은 봐야 할 훌륭한 영화다.

테리 프라쳇의 Disc World 시리즈중 호그파더(Hog father)를 EBS에서 자막 입혀 틀어준 적이 있다. 어쩌다 구해서 봤는데, 얼마 전에 보았던 The Colour of Magic보다 상태가 양호해 보인다. 어 영화에 나온 저 양반 테리 프라쳇 아닌가?  호그파더를 책으로 읽은 것 같은데, 언제 읽었고 스토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아, 그때 그랬었지! 하는 꼴이다.

Life

Life
드라마 Life의 별난 검거 장면.

True Blood 1화를 봤다. 뱀파이어가 인간과 어울려 사는 얘기. 뱀파이어 피가 건강에 좋다고, 뱀파이어를 사로 잡아 피를 뽑는 장면이 첫 화에 나온다. 여자애를 심하게 두들겨 패는 장면도 나왔다. 개념 HBO답게 뱀파이어는 물론, 인간 여성도 폭력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True Blood와 함께 Black Books라는 영국 드라마를 봤다. 첫화를 보고 정신없이 웃었다. 생각해 보니 비슷한 코메디물이었던 IT Crowd는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최근 들어 가장 기대되는 문화적(?) 성과인 Europeana Digital Library & Archive, Museum이  시간당 천만회 접근 시도로 사이트가 꾸준히~ 다운되어 12월 중순에 재개장한다는 공지를 내고 열심히 작업 중이다.  무슨 블랙 프라이데이 연말 쇼핑몰에 쳐들어간 게걸스러운 인파도 아니고...

아이를 업고 족두리봉을 거쳐 불광동으로 내려왔다. 마침 아이가 자고 있어서, '오죽 산에 오고 싶었으면 아이를 등에 업고 올까, 아이가 얼마나 고생일까?' 하는 표정으로 지나가던 등산객들이 너도나도 한 마디씩 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가는 아빠는 안중에 없는 듯. 애 업고 암릉을 오르락 내리락 할 때는 신경이 곤두선다.  어떤 코메디 프로그램 격언대로, 해보지 않았으면 얘기도 하지 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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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름

잡기 2007. 12. 29. 02:52
점점 블로그 쓰기가 귀찮아진다.
그러나 ilm, 지식의 추구는 무슬림의 의무다. 2007년의 마지막 글을 쓰자.

자전거 타고 휴전선 넘는다 -- 오오!

2007 대선 득표수와 구글검색결과의 관계 -- 공교롭게도 대선 며칠 전쯤 심심풀이로 링크와 같은(유사한이 아니라 같은) 조사를 했다. 검색 결과가 다른 점이 인상적인데, 내 경우 2위가 정동영이 아니라 이회창이었다.

개발자분들, 패션에 신경쓰고 삽시다! --  시장에서 떨이로 파는 싸구려 옷에 부시시한 얼굴로 돌아다니지만(대부분은 내가 세수를 하건 안 하건 구분하지 못하는 듯) 옷가지와 액새서리, 약간의 개폼등으로 인간의 품격을 계량하는 천박함과 거리가 먼 생활을 오래한 탓에 무시... 개발자가 개발을 잘하면 예수나 부처처럼 뒤통수에서 후광이 은은하게 반짝인다. 여자 사귀기는 좀 힘들지 몰라도 패션 / 스타일 보다 그게 약간 낫지 싶은데...

아내는 여름 내내 주말마다 튀긴 닭과 맥주를 시켜먹는 내 모습에 질린 듯. 겨울에는 간단한 안주꺼리를 만들고 포도주를 한 잔 마시며 밀린 드라마를 보거나 웹질을 했다. 그 모습에도 질렸는지 12시가 넘은 시각에 웅크리고 앉아 양파를 까고 있으니 싫은 소리를 늘어놓는다. 젊은 시절에는 바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여자 꼬시는 재미가 있었지, 결혼하고 부터는 아무런 낙이 없다는 것을 아내가 이해할 리가 없지. 한밤중에 안주꺼리를 만들거나 주말에 통닭을 시켜먹는 궁상이라니... 으쓱. 이게 다 카르마야.

12월 들어 송년회가 잦아 떡이 될 때까지 술에 취할 일이 많았다. 몸을 추스려 보려고 하지만, 마음 먹고 지정사 모임에서 일찍 돌아온 날도 집에 돌아오니 심바와 충언군이 소주병을 비우고 있었다. 심바는 며칠 후 아프리카인지 남미인지로 떠난단다. 이명박이 당선된 그 날 새벽 네 시까지 술을 마셨다. 김씨 아저씨를 본 것이 심바나 충언군을 본 것보다 오래되었지만 술친구로 꼼장어에 소주 한 잔 마시는 허름함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지정사 모임 멤버들과 술로 밤을 샌 적은 드물다. 지정사 모임에서 김씨는 사람들에게 지정사나 만금클럽(내가 이름 짓지 않았다), 쿠키단 따위의 유래를 이야기 했다. 생각해 보니 정말 오래 전 얘기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세트 알데히드로 쩌든 맛간 몸으로 손수 해장국을 끓여 먹었다(아내가 해준 음식은 성의 없이 대충대충 흉내만 내는 종류라 먹으면 역효과가 난다). 12월 19일은 내 인생 최고의 황태 해장국을 끓여 먹은 날이다. 음식을 만드는 다수의 사람들처럼 나 역시 음식점에서 뭔가를 먹으면 음식에 들어간 재료의 배합이나 조리법 따위를 생각한다. 얼마 전에 먹어본 황태 해장국의 재료는 무, 황태, 청양고추 약간, 마늘, 파가 전부였다. 황태를 물에 잠시 불리고 참기름에 버무려 볶은 다음 무를 넣고 잠깐 볶는다. 물을 붓고 팔팔 끓이다가 마늘, 파를 넣고 간 맞추는 것이 전부다. 음식점에서 사먹은 6천원짜리 황태 해장국은 미원이 들어갔다. 집에서 해먹을 때는 황태를 많이 넣으면 미원을 따로 넣지 않아도 된다.

14,16,18,19,21,26. 21일 역시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잤다. 아내가 전화를 걸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6호선을 한 바퀴 돌았다. 삼각지 역에서 출발해 삼각지 역에서 내렸다.  Lost Fleet: Dauntless를 읽다가 잠이 든 모양이다. 하도 술을 마셔대 290p 밖에 안되는 그 책을 읽는데 1주일이나 걸렸다.

김씨에게 Jack Campbell의 책을 두 권 빌렸다. 이제 Lost Fleet의 두번째 권인 Fearless를 약 20p쯤 읽기 시작했다. 무협지류라서 술술 잘 읽히는 편.

내용: 100년 동안 떠돌아다니던 lifepod를 건지고 보니 전설적인 영웅 Black Jack Geary였다. 당시 인류는 Alliance와 Syndicates로 갈려 프라이드와 나와바리 문제로 피튀기게 싸우고 있었는데 기어리를 구한 앨리언스는 때마침 함대가 전멸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동맹은 Syndics를 완샷에 때려부술 수 있는 hypernet key를 훔쳐서 달아나는 길이었다. 기어리는 동태 상태에서 깨자 마자 투항 조건을 협상하러 갔다가 죽은 전 함대 사령관의 유지를 받들어 동맹 함대 뿐만 아니라 하이퍼넷 키를 무사히 집에 보내주는 임무를 수행한다. 그나저나 매번 엘리언스를 읽을 때마다 aliens로 기억된다. -_-

감상: 전설적인 영웅이 제네럴십(또는 리더십)을 회복하는 지난한 과정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밀리활극물로 안 읽어봐도 재밌을게 뻔한 SF. 당연히 일정 정도의 재미는 보장되었다. 경구는 조낸 익숙하고 함대 사령관의 카리스마와 고뇌와 리더십도 조낸 익숙(스타트랙 TNG와 보이저를 보며 자란 세대니까!). 그러나 이탤릭체로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하거나  주변 인물들이 영웅은 이래서 잘났다고 거드는 조낸 짜증나는 말들이 읽을 때마다 거슬린다. 왠만하면 그런 걸로 짜증난다느니 따위 말을 하지 않지만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잊을만하면 찬송가처럼 되풀이되는 얘기로 페이지를 까먹는게 아깝달까. 입 닥치고 전투나 왕창 묘사하지.

기대했던 아광속 함대전(잭 캠벨이 이걸 제대로 묘사한 작가란 평이 있길래)은 딱 한 번 나왔다. 하지만 그놈에 함대전도 적색편이가 어쨌다느니 왕복 6광분 후 acknowledge가 들어왔다느니를 거의 무한 반복하다시피 해서 리듬이 자주 깨진다(작가가 아마추어 티가 풀풀 난다). 흥미로운 것은 20시간 후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상대를 인지하고 그 20시간 동안 서로 조우하기 까지의 긴장을 간단히나마 묘사하거나 하다못해 시도라도 해낸 것. 만화나 애니, 게임 중에 그런 걸 제대로 언급한 것은 내가 본 것 중 이것이 처음이다.

항성계에서 항성을 향해 우현 기준으로 위와 아래를 구분하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3차원 전술을 설명할 때의 이동 벡터가 어색했다. 어떻게 up, down과 앙각, 시간-속도만 가지고 함대의 전개를 지시할 수 있을까... 애리조나 촌뜨기가 미시시피 촌뜨기에게 백년 전의 함대전의 기본 대형을 가르치는 꼴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작가가 '자동계산'이 가능한 컴퓨터의 힘을 개무시한 덕택일까. 우주전에서 기준 좌표를 설정할 때 마치 북극성처럼 3개 이상의 먼 항성을 기준 좌표계의 중심점으로 삼아 전술 전개 방향 지시의 기본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해 보였다. 앨러스태어 레널즈처럼 천문학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의 글은 1대 1 전투씬에서 무기나 우주선의 상대속도를 이해하기 때문에 굳이 잔대가리를 굴리지 않아도 짧은 서술과 묘사 속에 풍부한 지식이 배어있는 힌트를 드러내고 쉽게 이해가 가는 편이지만 캠벨의 우주전은 어딘지 모르게 촌스러워 보였다. 재미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모호하고 불완전하며 아마추어 티가 풀풀 나는게 흡사 은영전 보는 것 같았다. (은영전이 무슨 우주전이냐?) 어쩌면 작가가 지나치게 친절해서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작가에게 SF에 필수적인 자양분이 되는 이공학적 배경이 다소 부족한 것은 아닐까... 의심도 되지만.

그러다보니 리더십과 긴장관계를 시시콜콜 들먹이고(이렇게 말 안 듣는 놈들은 보통 총살이다), 백년 전란 동안 수 많은 우수한 사관을 잃어버려 전술 이해가 부족하다는 핑계꺼리를 만들어냈다. 심지어 함대전의 혁혁한 승리 끝에 얻은 만족스러운 결과에도 불구하고 기어리는 몇 척 안되는 함선을 잃어버린 것으로 쩨쩨하게 인간성/윤리가 실종되었다느니 징글맞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대체 전투에서 잔뼈가 굵은 기어리같은 사람이 뭣하러 그런 소리를 늘어놓는건지 원. 뭐 따지고 보면 막장 모드 아너 해링턴에서도 18세기에나 나올법한 어처구니 없는 선체 충돌 같은 것도 나오지만.

결론: 점프 게이트와 방어 거점(주로 행성과 행성의 위성 거점들)  사이의 시공간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 공간 벡터에서 벌어질 수 있는 전술 전개에다가 보통 0.1c로 움직이는 함선의 상대론적 효과가 전술 포메이션 변형 지연에 끼치는 영향이 박진감 넘치게 전개되리라 기대했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홈월드라는 위대한 게임이나 여러 전투기 시뮬레이션 게임의 영향 탓에 우주전을 비주얼라이즈할 수 있는 독자 개개인의 심상개발이 준 긍정적인 효과 때문이지 싶다. 홈월드 역시 지극히 제한된 체적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투가 주이다보니 상대론적 효과같은 것은 감안하지 않았다. 3차원 우주전은 오직 소설 속에서만 묘사가 가능한, 말하자면 미디어가 차용 불가능한 순수한 문학적 소재일 수 있다.

IMAX 영화인 Fighter Pilot의 한 장면. 조기경보기에서 전투기의 실시간 정보를 받아 업데이트되는 화면. 군 홍보물같아서 김이 새는 다큐지만, 요즘의 구닥다리 기술로도 이런 게 가능하다. 이건 게임이 아니라 실시간 독파이트 화면이다.

Life -- 7,8화까지 재미가 없어서 더 봐야하나 망설이던 라이프에서 주인공이 그가 먹여 살리고 있는 고용인에게 말한다; You are not Robin. What? You're not Robin. (공교롭게도 얼마 전에 배트맨이 되는게 훨 낫다고 이 드라마를 씹었는데 작가도 느끼고 있었나보지 -_-) 10화에서 별 이유없이 느려터진 얘기가 좀 풀리고 11화에서 새로운 전개를 위한 떡밥을 뿌린다. 이 드라마 각본 쓰는 작자는 뭐 하나 제대로 시원스럽게 보여주는 것이 없다,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박씨에게 늘어놓다가 박씨가 한 마디 했다. 미국인들이 주인공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나 같은 한국인이 주인공의 캐릭터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박씨가 말하길, 내가 주인공이 별스럽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아마 없을 꺼라고 한다. 냉철하고 터프하며 다소간의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고 감방에서 수십년간 복역수들과 칼질을 나누면서 선도를 갈고 닦으며 기행을 일삼는 캐릭터가... 음. 그러고보니 전개가 감질나게 느리다고 여겼던 부분들은 주인공의 캐릭터를 개발/연출하느라 시간을 보내던 부분들인 것 같다. 그 장면들을 쓸데없는 군더더기로 여겼다. 말하자면 제작진이나 제작진이 의도한 타깃과 인지모델에서 차이가 나므로 나같은 사람에겐 라이프가 재미있을 이유가 없다는 설명.

납득이 가는 해석이지만 재미없는 영화가 재미가 없는데 (그렇게 많은 시시콜콜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이를테면 얼마 전에 본 D-War는 이래도 저래도 그냥 쓰레기다.

다른 설명도 물론 있다; 별달리 드라마틱한 캐릭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전개의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캐릭터의 특소성이 '인지'되면서 사건 하나 하나가 쏙쏙 이해가 잘 가는 NCIS는 최근 즐겨보게 된 드라마다.
NCIS
FBI를 엿 먹이고 기뻐서 낄낄 웃고 있는 NCIS의 마음씨 좋은 주인공. 정작 NCIS에서 마음에 드는 캐릭터는 자갈밭 굴러가는 목소리를 지닌 goth족 여자 -- 아 데이트 상대로는 꽝이지만 목소리만.

두번째 예: Intacto -- 천운을 타고 난 사람들의 갬블링. 독특한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소재의 운용이 좀 아쉬운 편. 재밌을 뻔 했는데, 밥 먹듯이 오바 하는 일본 드라마 라이어게임(만화책 원작)보다 재미가 없다.

뭐.. 영화나 드라마란게... 어차피 시간 때우기 용으로 보는 것인만큼 2,3기를 넘겨 보더라도 주인공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에 남을만한 것은 캐릭터와 이야기와 이야기 구조 정도인데 업치락 뒷치락 하는 거기서 거기인 헐리웃의 각본 시스템이 만드는 이야기에서 특별히 신선한 점은 느끼지 못했지만 누구나 거론하는 전문직 종사자의 직장 생활이 지닌 특수성만큼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미국 드라마를 몰아 보며 이 세상에 무수히 많은 다양한 직업의 세계를 학습하고 있는 것이다!

예: 웨스트 윙을 4시즌까지 본 덕택에 백악관의 구조를 눈 감고도 알만하다. 스타트랙 덕택에 알파 쿼드런트의 역사와 세력 분포가 이해되고, 수많은 드라마를 통해 대통령, FBI, CIA, NSA를 비롯한 미국의 거의 모든 첩보 기관과 미국 경찰은 하나같이 썩었으며 정부는 인민에게 외계인에 대한 정보를 숨기고 대북정책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으며 심지어 장사를 하려면 마약이 최고다 라는 생계형 정보도 얻을 수 있다.

크리스마스고 해서 4만 9천원 주고 스피커를 구입했다. Sound Device의 S3 Tallboy. 소비자 평가는 영 꽝이었다. VFD 는 작동 안하는 게 정상이라는 불평, 보통은 왼쪽 또는 오른쪽 앰프 칩에서 문제가 생겨 반환하거나 화이트 노이즈, 우퍼 험 노이즈 등 각종 버그가 레포트되었다. 사실 전자제품에 관한 소비자 평가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고, 간혹 보이는 음향평가에서 요점은 모두 잡았기 때문에 모험하는 셈치고 gmarket에서 주문했다.

음향은 포도주 향과 맛 처럼 인지모델 자체가 매우 주관적이라 잘 믿지는 않는 편. 가격대 성능비가 꽤 좋았다. 막귀는 살짝 벗어났지만 에이징처럼 귀찮은 일을 굳이 시간들여 할 이유가 없는 탓에 내 주관적인 평가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우퍼가 비교적 가볍고 고음부는 맑으나 중저음의 다이나믹 레인지가 좀 떨어지는 편. 전반적으로 pc 스피커다 싶은 느낌인데 싸구려 명품이라는 브릿츠 1100보다는 나았고 이전에 쓰던 인켈의 에로이카 스피커셋+디지털 앰프보다 고음부가 청아했으며 비슷한 가격대의 보노보스나 오자키와  선예도 면에선 비슷한 것 같다(사실 용산에서 사운드 디바이스 스피커를 제외한 다수의 스피커를 벤치마크했었다. 그런데 왜 검증도 안된 스피커를 샀냐하면, 그런 정신상태가 내 피, 내 유전자에 프로그램되어 있기 때문).

우퍼가 둔중하지 않아 볼륨을 키워도 실내에서 부담스러운 울림과 진동이 발생하지 않았다. 달리 말하자면 우퍼의 주파수 레인지가 미드 레인지와 약간 걸치는 것 같다. 스피커로써는 그리 좋은 건 아니다. 딱 책상 위에 얹어두고 쓰기 좋은 '그 가격에 그러려니' 스피커다. 생각보다 만족스럽다. 뽑기 운도 좋아 화이트 노이즈가 없다. 아마 소비자 평가 중 절반 가량은 내장 사운드 카드의 그라운드 처리가 잘못되거나 싸구려 부품을 써서 만든 메인 보드의 앰프 출력단에 문제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고 그 절반은 정말 이 스피커에 문제가 있어서 였을 것이다. 이 스피커에 점수를 후하게 메기고 구매를 결정하게 된 동기는 우퍼를 떼어낼 수 있고(집에서 우퍼 울리면 사방에 민폐다. 저음은 도달 거리가 상당히 길다) 앰프가 우퍼와 분리되어 있으며 트위터와 미드렌지 스피커를 담은 인클로저의 크기가 적당해서다.

4.1ch, 5.1ch 등은 충분히 질렸고 너저분한 선 문제나, 질좋은 2ch 스피커가 허접한 4.1ch 스피커 사용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김. S3 Tallboy의 디자인? 스타킹을 씌워놓은 듯한 촌스런 그릴과 앰프의 촌스러움 등등은 나같은 실용주의자가 고민하진 않는 부분. 스피커 장만한다는 전씨에게도 권했다. 이 가격에 이 정도면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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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바 말로는 아이가 내 얼굴을 닮았단다. 1.5살이 되었으니 호불호가 생기고 생떼를 쓴다. 아내는 내가 아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라도 해준다고 여겼다. 내가 365일 육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아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뒀다. 참견한다고 더 좋아질 일도 없다. 그런데 소울아, 나한테 생떼 등의 전략이 통하리라고 생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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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 색감 모두 만족스럽다. 연말인데 어디 갈 데도 없고 술은 좀 사양하고 싶고, 그렇다고 집에만 붙어 있자니 갑갑하고... 애 보기는 힘들고... 또 드라마나 보며 시간 때우게 생겼군. 이번주는 이틀 출근하고 거의 열흘을 논 셈.

연말이니까... 2007 베스트
  • 영화 - Syriana, American Ganster, Eastern Promises
  • 미국 드라마 - Dexter, Sofranos
  • 일본 드라마 - 화려한 일족(마음이 무거워 보다 말았지만), 노다메 칸타빌레
  • 애니메이션 - 선정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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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엄청나게 많은 것을 봤는데 왜 생각나는게 별로 없을까? 이를테면 올해 읽은 책 베스트 10같은... 영화 목록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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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탄생

잡기 2007. 12. 3. 17:34
"론, 어지러운 생각들은 고통으로써 정화시킬 수 있어" -- Life, 크루즈 형사가 정보를 얻기 위해 한 친구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며 한 말. 드라마로 별별 스릴러 물을 다 봤는데, 뇌사 상태의 형사, 외계인 형사, 아버지가 살인마인 형사, 경찰인 의붓 아버지 밑에서 제대로 교육받아 잡히지 않은 살인마, 지랄병에 걸린 형사, 죽은 사람과 얘기할 수 있는 형사, 자폐 형사, 그런데 크루즈 형사는 12년간 누명을 쓰고 복역하다가 무죄가 입증되어 백만장자가 되기에 충분한 합의금과 경찰 뱃지를 받은 형사다. 감방에서 12년 동안 두들겨 맞으면서 선도를 열심히 닦은, 복수심에 불타는 몽테 크리스토 백작 같다. 몽테 크리스토 백작보다는 베트맨이 되는게 백 번 나아 보이는데(복수심을 해소하기 위해 바퀴벌레같은 사회악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는 것이 좋다고 보는 입장에서), 하는 짓이 영 바보같다. 아직 뭔가가 진행되지 않아(8화까지) 좀 더 지켜봐야겠다.
 
"story of life: boy meet girl, boy got to be stupid, then boy and girl stupidly ever after" -- House, 존재감이 희미한 윌슨이란 종양전문의의 새겨들을만한 말씀. 사지 멀쩡한 슈퍼맨, 스파이더맨, 베트맨 등등도 결혼하면 모두 바보가 된다. 그중 많은 수는 목화 짐을 지고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슈퍼) 당나귀나 (슈퍼) 노새이기도 하다.
Dexter Season 2
반면, 덱스터는 요즘 인상을 구기고 다니며 쓸만한 말을 한 마디도 늘어놓지 못했다. 총각임에도.
 
블로그 타이틀을 바꿨다. '알라여,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짐을 주소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오래 전에 알게 된 꾸란의 기도중 일부. 꾸란의 기도문들은 아름답다. '알라께서는 누구에게나 능력 이상의 부담을 지우지 않으셨다' 라는 말은 하여튼 그래서 이슬람 문화권에서 유명하다. 누구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적당한 지옥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신의 뜻이고 신의 자비인데 그 때문에 화가 치밀면 '인샬라' 라고 말하면 된다. 인샬라는 석유로 재벌이 된 쿠웨이트와 사우디 사람들이 애들을 미국 학교에 보냈더니 마약질을 해서 속상하거나 기차를 놓쳤을 때 하는 말이다.

신의 뜻 중에 이스라엘이 지도 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근거없는 주장도 있다.
 
때때로 자기는 지옥에 살지 않거나, 이렇게 행복한 지옥이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실한 사람들이라면 잘 알다시피 댁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댁의 의지와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다. 신의 뜻이고 신의 농간이다. 신실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겸손하게 살다보면 자신이 무의미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무의미한 존재이면서도 무의미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데(그리고 그런 가없는 노력이 생각만큼 쓸모가 없음을 깨닫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지 않다. 모든 노력이 허위로 돌아가고 존재감이 무의미해지는 그곳은 지옥이다. 하여튼 그래서 돌아가시기 직전 노인들의 원망 성취 여부, 또는 삶의 질, 또는 삶의 그간 만족도는 종종 퍼뜨린 자손의 숫자가 되는 것 같다.

소박하지 않은가...
그럼 아이없이 늙어가는 사람들은 생지옥에...?
이럴 때 바로 다목적 경구를 읆는거다.
알라께서는 누구에게나 능력 이상의 짐을 지우지 않으셨다.

하나님도 마찬가지고.

아무튼 유신론자와 무신론자 사이엔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존재한다. 그 반대는 아닌데, 무신론자가 왜 유신론자를 경멸하거나 증오 해야 하는지는 납득하기 어렵다(맨날 유신론자를 놀려대는 나로서도 날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신없이 살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여기면 되지 않을까? 아니다, 장애인, 소수자, 외계인 차별은 본래 생득적인 그루피인 인간(어떤 깃발 아래 뭉쳐 깃발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멸시하고 살인을 깃발의 가치를 빛내는 스포츠처럼 즐기는 종족)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일 지도 모른다.

세상을 냉소함으로써 얼마나 쿨한 놈인지 잘난체 하려는 이유가 아니라면 시도 때도 없이 인간을 경멸하는 질 나쁜 버릇을 버려야 한다? 버릇이 오래고 절망도 그만큼의 연륜을 쌓아왔던 것 같다. 지금은 절망하지 않았다. 골이 텅 비어 아무 생각 없다. 다만 자기통제력이 대단히 강한 종류의 멍청이라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평생 안 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자알 알고 있다. 뜻깊은 멍청함은 그대로 놔두고, 버릇이 된 말투는 차츰 고쳐가야 할 것이다.
차마고도: 순례의 길
차마고도 2편 순례의 길. 하다를 들고 생불의 축복을 받고자 기다리는 사람들. 그렇다, 티벳에는 살아있는 부처들이 차 타고 이 고을 저 고을 돌아다닌다. 티벳에 별로 갈 일이 없다고 여겨 안 가고 버텼는데 스님이 얼마 전 티벳 가서 찍어 온 불상과 탱화를 보고 뻑 갔다.
차마고도: 생명의 차
차마고도 3편 생명의 차. 중국에 있는 천년 묵은 차나무 신. 매년 한해 차농사가 잘 되길 기원하며 제물로 닭을 잡아 바친다. 사람도 돈도 믿을 수 없고 줄곳 떠나가지만 차나무는 대대로 남는다는 그네들 속담이 있는 것 같다. 한국에도 그 비슷한 속담이 있다; 부동산 불패.
 
차마고도: 생명의 차
차마고도 3편 생명의 차. 티벳에서는 주로 중국에서 수입한 싸구려 차로 버터티를 끓여 마신다. 라마가 마시다가 일반에 널리 퍼지게 된 말린 찻잎 때문에 티벳 경제가 파탄났다. 티벳에는 차가 자라지 않고 비타민을 섭취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 티벳이 말을 팔아 차를 사온 그 길이 차마고도다.
 
쥬디스 리치 해리스, '개성의 탄생' -- 책의 전반부에서는 자신의 양육가설에 반대가 심한 학자 한두 명을 골라내 집중적으로 보살피며 사지를 찢어 놓은 다음 도끼로 머리통을 부수고, 잊을만할 때쯤 다시 그 시체를 꺼내 내장을 들짐승 먹이로 던져준다.

정리가 다 된 것 같다고 여길 때쯤 다시 묻어놓은 시체를 파내어 그 썩은 몸을 동네방네 끌고 다니다가 말라 비틀어질 때까지 누벽에 걸어 전시했다. 자신의 가설에 반대하는, 자료도 논증도 부실한 학자의 반박을 듣고 그들을 삼세번 살해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남편과 사이좋게 지내며 손녀딸에게는 한없이 인자한 학자 같다. 심지어 읽으면 DHA가 샘솟는다는 천재 스티븐 핑커와 친한 사이인 것 같다.  처음으로 읽은 해리스의 저서 임에도 흡사 오래 전에 알던 사람처럼 친근감이 들었다.
 
툭하면 '진리는 시간의 딸'이라고 본문에서 느긋하게 말하는(노인네가 자기 가설에나 충실할 것이지) 해리스의 책을 읽은 것은 그래서 커다란 기쁨이다. 해리스의 견해에 상당 부분 공감(?)하고 많은 것들을 배웠다. 오래 전부터 나는 우연찮게도 아이들이 어린 시절 겪은 정서적 장애와 혼란에도 불구하고 별 탈 없이 잘 자라 정상적인 성인이 된다고 우겼다.  또, 유아기의 애착 유형에 관한 글을 읽고 콧방귀를 심하게 뀐 다음 그것을 비난한 적이 있다.

해리스도 그랬다. 확증을 얻고 싶었던 것은 부모의 존재가 아니라 부모의 양육 모델이나 롤플레잉이 아이의 성장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쓸데없이 돈을 안 써도 아이는 이상없이 자랄 수 있다는 점이다(지금까지 아이에게 장난감이라고 사준 것은 지하철에서 산 천원짜리 고무덩이가 전부다).
 
하지만 해리스가 제시한 여러 증거와 정황을 종합해 보건대 아이가 정상적으로 자라려면 peer group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어야 하며, 공부 잘 해서 좋은 대학 나와 시집 잘 가기 위한 (뚜렷하고 합리적인) 목적도 아니면서, 단지 또래와 함께 있어야 발육이 되기 때문에 애들이 많이 드나드는 '학원' 같은 곳에 보내야 한다는 돈 드는 결론이 나온다.
 
사회가 날이 갈수록 야만스러워져 예전과 달리 돈 안 들이고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쉽게 찾아보기 어려워진 것 같다.

소울이 애비는 그 또래 집단이라던가, 완전히 자라기 이전의 소셜 클럽이란 것들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기에 사회화 대신 어둠의 길인 비사회화로 나아갔다. 게다가 제 애비처럼 소울이가 유전자가 시키는 대로 할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 대부분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성의를 가지고 교미와 번식(말하자면 사랑)에 임한다. 소울이도 교미와 번식에 충실하며 별달리 지랄맞은 개성이 느닷없이 발현하지 않길 빌어본다. 아내와 내 유전자만을 생각하면 아이의 장래가 몹시 암울해 보인다.
 
'육아'에 관한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훌륭하고 영롱한 조언을 얻었던 해리스의 책을 읽은 마무리: '개성의 탄생'에서 해리스는 침대에 누워있는 형사 흉내를 내며 가설군의 후보를 하나하나 제거해 나간 다음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리고 검증은 다른 사람 몫으로 남겼다. 아카데믹 고어물 수준이던 전반부와 달리 개성에 관한 그의 책 후반부, 가설에 관한 설명은 재미없다. 그뿐 아니라 쓸데없이 복잡해서 머리가 아프다. 그가 말하길, 앞으로 나올 가설들은 단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해리스 본인 생각에는 책 쓰면서 문제와 경로를 웰 디파인 했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김새는 시시한 결론이었다.  

최근 몇 년간 읽은 육아 관련 서적들에서 얻을만한 것들이 별로 없었다(과학자가 저술한 극소수를 제외한 상당수가 근거 없이 나불대는, 시간 낭비나 하게 만드는 등 언급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들이었다). 해리스 역시 대다수 유아/청소년 대상 실험의 데이터 처리 방식이나 대조군 설정에 상당한 문제가 있음을 그의 책에서 빈번하게 지적한다.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쪽 실험이나 데이터 중 제대로 된 것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을 해리스가 어느 정도 확증해 줬다. 그의 견해가 옳고 지지할만한 근거가 충분하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방법론적 접근 방식이 옳기 때문이다. 합리적 접근 방식이 차근차근 옳다면 인간성도 무척 좋은 것은 당연하다.

책: 번역 품질이 양호하다. 룰도 잘 지켰으며 심지어 기대하지도 않았던 부록으로 한/영 인명 대조표까지 들어 있다. David Rowe를 본문에서는 로위라고 표기하고 인명대조표에는 로 라고 표기했다. 나는 데이빗 로우로 알고 있다. 시시콜콜한 트집을 잡으려는 것은 아니고 인명대조표의 효험이 이렇게 좋더라는 것 뿐. 옮긴이 주석의 위치가 책 읽을 때 시선을 교란해 좀 기분나빴다. 동녁 사이언스,  곽미경의 번역. 곽미경이 폴 블룸의 '데카르트의 아기'도 번역했다. 나이스. 그런데 데카르트의 아기가 '개성의 탄생' 어딘가에서 언급되었던 것 같은데 인명 대조표와 찾아보기에서 찾지 못했다. 유명한 저자라서 당연히 블룸이 있을꺼라고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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