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n, fire and drum

잡기 2003. 7. 1. 22:51
누워서 키보드를 두들기는 것에 맛 들인 후 윈도우즈의 '화상 키보드'를 자주 애용했다. 화상 키보드는 장애자용 키보드인 것 같다. 따라서 나는 장애자다. 세상의 따뜻한 온정을 기대해 본다.

Last Exile과 Gunparade March 를 봤다. 후자는 쓰레기였다. 새로운 아톰 시리즈도 보았다. 왜 어린 시절 아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가 싶더만, 아톰은 마징가 제트처럼 거리를 쑥대밭으로 만들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는 착한 로봇은 취향에 안 맞는 것 같다. 아톰은 원자력 엔진을 달고 있었지만, 30대 성인 남자의 최대 관심사인 섹스를 하지 못했다. 장애 로봇이었다.

일요일 아침에 주 컴퓨터의 후지쯔 40GB HDD가 맛이 가서 다소 얼이 빠졌다. 아무런 예고나 징후조차 보이지 않았고, 다만 하드 디스크를 인식하지 못한 채 컴퓨터가 멍청히, 가만히 있었다. 별 수 없이 공황 상태에 빠졌다.

맛이 간 하드 디스크의 A/S를 하려고 전화를 해보니 교환 외에는 방법이 없단다. 그런데 구입 시기가 2년이 넘어 교환은 불가 하며 오늘은 일요일이라 A/S 센터가 문을 열지 않았다고 친절하게 덧붙인다. 어...

그런가?
일요일 아침부터 난데없이 엿 먹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손이 떨려서 한 시간쯤 담배를 자제했다. 그리고 HDD 껍데기 표면에 인쇄된 2001-3월 글자를 2001-8월로 고쳤다. 대성이형에게 보여주니 구분하지 못했다. 그의 눈을 속일 수 있으면 세밀화와 관련이 없는 A/S 센터 직원들의 눈을 속이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일 것이다.

컴퓨터도 맛이 갔고... 그래서 나도 술 먹고 맛이 갔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심하게 수다를 떨었던 것 같다. 부끄럽다.

월요일 아침, 술기운이 아직 안 가셨고 몸에서 열이 많이 났다. 머리가 어질어질 하지만 HDD를 들고 A/S 센터를 찾아갔다. 철도는 파업 중이었다. 후지쯔 A/S 센터 직원에게 하드 디스크를 보여주니 (위조한) 일자를 꼼꼼히 체크하다가 별 말 없이 다른 40GB HDD로 바꿔줬다. 일요일 아침부터 사람 열 받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사기치고 교환하는 대신 8만 7천원 짜리 새로운 HDD를 장만했을 것이다. 하여튼 CR 파트에서 일하는, 괜히 친절한 척 하면서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안되는 아가씨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용산에 간 김에 아이쇼핑을 좀 하고 파워가 포함된 3만원 짜리 값싼 케이스와 7천원 짜리 키보드를 샀다. 블랙 앤 실버. 색깔은 맞췄다. 둘 다 몹시 허접스러워서 살 때 매장 직원이 궁시렁거렸다. 집에 돌아와 순대를 먹으며 칫솔로 부품을 깨끗이 닦고 조립하니 새 컴퓨터 같았다.

어제 하루 동안 임시로 사용했던 상패 케이스에 고스란히 담겨 있던 20GB 짜리 삼성 하드에는 놀라운 자료가 들어 있었다. 6GB 분량의 프로그레시브 락 mp3와 darkeye의 ftp에서 받았던 230MB, 1125개의 SF 전부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정말 놀랍다. 나도 모르는 새에 그것들을 백업받아 놓았던 것이다! 심지어는 '알 수 없는 음악가' 폴더 밑에 '알 수 없는 앨범' 폴더 밑에 알 수 없는 곡들마저 있었다. 그렇다. 백업은 이렇듯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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