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pective

잡기 2003. 7. 30. 16:32
틈틈이 CSI 3기를 봤다. 밥 먹을 때와 잠자기 전에 한두 편씩. 오로지 일만 죽어라고 하는 CSI 팀은 무식하게 범인을 때려잡는 강력계 형사를 상대적으로 바보처럼 보이게 했다. CSI 팀의 삶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밤낮으로 면봉을 들고 DNA를 채취하고 혈흔을 쫓으면서 일을 했다.

청각을 잃어가는 그리섬 팀장은 난장이를 만나고, SM 사업을 하는 여자를 만났다. 너구리같이 생긴 그리섬이 후자 같은 매력적인 여자를 만나는 것을 부럽게 생각했다. 그리섬이 아는 척 했다. SM의 세계에서는 복종하는 자가 지배한다죠? 신비스러운 세계다. 여자는 웃지 않았다. 웃지 않는 여자와는 사귀지 말라는 얘기를 어렸을 적에 들었다. 지금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웃음이 안 나오는 세계니까 뭔가는 웃어야 균형이 맞을 것 같다. 그리섬은 그 여자와 사귀지 않았다. 여자는 추락한 신뢰와 품위를 유지하려고 그리섬을 향해 몇 마디를 조잘거린다. 세상에서 제일 가엾은 것은 품위와 사랑을 동시에 잃은 여자들이다. 그리섬은 나쁘지 않다. 그는 익숙한 룰에 복종했다.

CSI에서 가장 인생이 복잡한 캐릭터, 그리고 가장 잘 생긴 캐릭터는 배추머리 흑인이었다. 동기가 주어지기만 하면 언제든지 해서는 안되는 짓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굴 많이 닮았다.

일하지 않고 놀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에피소드와 농담꺼리를 만들어내는 딜레탕트에게 매력을 느낀 적이 없던 것 같다. 이를테면 한량에게, 또는 어떤 세대를 풍미하는 불필요한 절망감 내지는 시야 단축이 일종의 엘레강스가 되는 양 삶을 웃음꺼리로 만드는 몇몇 종자의 특이성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듯이. 단순성은 반드시 복잡성과 맞닿은 지점에서 작용해야 할 것이다. 복잡성의 층적 궤적은 확실히 성격의 다면성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방식이다. 그것의... 아름다움은 대칭성의 확산, 질서의 건너편, 카오스의 바다를 떠도는 섬, 불길한 적란운이 떠 있는 지평선 따위를 생각나게 했다. 아참, 생각은 안 했다.

CSI의 인물들을 곰곰히 살펴보다가... 한 방 먹었다. 착각하고 있었다. 이들의 성격과 개성이 깊이 있고 다면적이라기 보다는 표면적인 질감과 풍성한 볼륨감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럼, 어디서 부터 착각이 비롯되었을까? 시청자가 지겨워 할까 봐서인지 연출의 리듬감, 완급 조절을 잘 해 나갔다. 매 에피소드마다 다양하게 죽은 시체들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밥 먹으면서 내장이 길바닥에 널린 시체를 보거나 뇌수가 졸졸 흐르는 모습을 보았다.

과학과 이성의 뒷받침으로 매번 우여곡절 끝에 정의가 실현되었다. 물론 리얼리티의 미명하에 정의가 실현되어서는 안되는 케이스가 있었고 그래서 도마뱀의 뇌가 가끔 변칙을 부렸다. 사건은 병렬적으로 진행되면서 두뇌를 쉬지 않게 만들었다. 하지만 CSI는 두뇌를 써가면서 보는 드라마는 아니었다. 세련된 연출이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마음 속에 투영하는데 방해가 된 것 같다. 아니 착각을 유도했다. 캐릭터는 여전히 책에서만 발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착각인 것 같다.

대체 지금 책을 몇 권이나 읽고 있는 거지... 점점 내성적으로 변해가잖아?

삭막해라.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밤 11시가 넘었다. 지하철을 두 번 잘못 탔고 지갑을 안 가지고 나갔다. 비가 오다가 말았다. 가로등 밑에서 크립토노미콘을 읽었고 그간의 피로가 갑자기 몰려와 CSI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창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흔들리면서... 세계는 옳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꿈속에서 깃털을 쥐고 있었다. 깃털에는 일사천리라고 적혀 있었다. 머리를 깎고 패러 글라이딩을 하고 싶어한다는 뜻이었다. 정말이지... 어째서 꿈이 직관적으로 해석되는 것일까... 미치겠군. 신비감이 없잖아.

'제인 에어 납치사건'의 스토리를 보고 나서 어... 하고 말았다. 아는 책이다. 깔깔 웃는 소리와 함께 줄거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읽어 봐야 겠구나... 빌릴 수 있으면 더 좋은데... 책값이 비싸서 책을 사는 것이 꺼려진다. 책값이 비싸면 점점 내성적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창 밖으로 매미가 울었다. 함께 술을 안 마시거나 연락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안부를 전할까? 잘 지내고 있고, 체중이 차츰 늘어가고 뱃살이 나오고 있다고? 적응 안되는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이유없이 열심히 일한다는 점. 그러면서 그들의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개성이 부리는 기괴한 변덕을 구경할 수 있었구요. 마음의 여유가 없어 만나기가 힘드네요. 안부 끝.

p.s. 가난이 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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