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안 마시기

잡기 2003. 8. 1. 19:25
어제 하루 종일 몸이 뜨거웠다. 샤워를 하고 찬 음료를 들이켜도 홧기가 가시지 않았다. 인삼 동동주였나? 이전에도 유사한 경험을 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블로그 컨퍼런스가 코엑스에서 열렸구나... 어제는 우연찮게도 FeedDemon을 열지 않았다. 뒷풀이에 가서 블로그에 글 올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번 구경해 보는건데.. 아쉽다. 블로거 모임 같은 거 안 하나? 딴 건 몰라도 정말 얼굴 좀 봤으면 좋겠다.

밤에 수박 화채를 만들었고, 먹으면서 '주온'을 봤다. 무서운 영화라던데 조금 있으면 무서운 장면이 나오겠지 하면서 두근두근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기다렸는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 뭐야... 이 녀석들이 지금 사람 놀리는 건가...

몰라도 아는 척, 아는 것은 주구장창 강조, 조금이라도 알만한 것들에는 크리틱해지고 정말 모르는 것들은 얼기설기 주워 모은 잡다한 지식을 끌어들여 추론한 후 회의적이고 잰 체 하다가 들통나면 쾌활한 웃음으로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고작 그런 거였냐고 반문하기. 내 블로그에 잘난 척이 심하다는 말을 들으니 아직 그 짓을 1/10도 채 하지 못해서 억울했다.

크립토노미콘 2권을 거의 다 읽어가고 있다. 이 바닥에서는 마치 본능처럼 익숙한 단어들이 어설프고 힘겹게 각주를 달고 있었다. 심지어는 트랙볼에도 각주가 달려 있었다. 그레이트풀 데쓰에 대한 각주를 보고 뒤로 벌러덩 자빠지면서 미친듯이 웃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번역되기 힘든 전문용어들이 너무 많은 책이기도 했다.

거꾸로 생각해 봤다. 이해할 수도 없는 프랑스 관용어구가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소설을 진정,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기나 한지. 이를테면 크립토노미콘에 나오는 프리킹이란 단어는 어떤 닭질, 삽질, 한 보루의 담배, 48시간 노동, 어질러진 책상, 김빠진 콜라와 식은 서양 빈대떡, 그리고 발견의 기쁨, 드물긴 하지만 인생을 제외한 그 나머지 것들을 몽땅 의미하는 단어일 수도 있다. 닐 스티븐슨은 이 바닥 사람인 양 그런 단어들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브루스 스털링이나 윌리엄 깁슨이 프랑스 철학자 같은 되도 안되는 말을 늘어놓는 또라이로 보일 정도로. 하여튼 크립토노미콘을 맨정신으로 '번역'했다는 사실에는 숙연해졌다.

항공권 이용 마일리지 보러 웹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서울-제주 왕복 항공권을 얻을 수 있다. 항공권을 중심으로 놀러갈 계획을 세워야 예의가 아닐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제주도에서 일주일을 노느니 그 돈으로 타일랜드에 가서 럭셔리하게 노는 편이 백 번 낫다.

손끝으로 코딩 감각이 조금씩 되돌아오고 있다. 생활은 드라마틱하게 단순해졌다. 읽고 코딩하고 밥 먹고 코딩하기. 수박을 파서 블랜더에 얼음과 함께 넣고 갈아 수박 쥬스를 만들어 먹었다. 그래... 이 맛이다. 방콕의 조그만 과일쥬스 가게에서 십밧을 주고 사서 탁자에 앉아 먹던 그 맛.

선배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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