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와 확장

잡기 2003. 9. 4. 02:03
영등포역 롯데리아에 앉아 감자튀김을 먹으며 블로그를 작성 중.

앞에 있는 여자가 뚜러지게 내 얼굴을 쳐다본다. 마치 어디서 본 적이 있지만 말 걸기는 두렵다는 듯이. 왜 쳐다봐? 잘 생긴 놈 처음 봐?
흥.

불스는 이런 얘기를 했다; 몽골에 가서 양 열다섯 마리로 신부를 얻어 한국에 데려올 것이다. 그는 그녀가 애 하나만 낳아주면 무슨 짓을 하든 신경쓰지 않을 것이고 일정 기간이 지나 그녀가 이혼하겠다고 말하면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라며 쾌히 이혼해 줄 것이다. 애당초 애가 필요해서 결혼한 것이다. 애는 낳자마자 고아원이나 무료 보육 시설에 보낸다.

일곱 살쯤 되어 아이가 말귀를 알아들을 때 쯤 되면 보육시설에서 데려온다. 데려와서 적절한 교육을 해서 앵벌이로 내보낸다. 집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동안 그가 밥값은 해야 하니까.

사교육을 실시한다. 집에서 교육하고 학교도 내보내지만 학원에 가고 싶으면 자기가 벌은 돈으로 알아서 간다. 그가 원한다면 앵벌이 프로그래밍을 가르친다. 대학에 가고 싶으면 자기가 벌어서 간다. 집을 나간다고? 그럴 수도 있겠지.

불스는 따뜻한 가정을 만들 꺼라고 말했다. 아이가 비정한 사회 속에서 힘겨운 앵벌이를 끝내고 돌아와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집을. 앵벌이한 것은 50대 50으로 나누고 그중 불스가 얻는 50의 50%를 아이의 장래를 위해 적립한다. 18세가 되면 그것을 독립자금으로 돌려줄 것이다. 경제 사정이 안 좋으면 안 돌려줄 수도 있다.

나머지 50%는 하숙비로 받는다. 아이가 집을 나가고 싶어 한다던가, 아니면 집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인가는 아이의 뜻대로 될 것이다. 방목이라고 한다.

그가 말하는 동안 내내 웃었다. 가족 관계의 해체와 확장이란 얘기가 나오니 그의 얘기부터 떠올랐다. 그의 이상한 가족에게 사랑이 없다고? 나는 그 녀석을 15년 동안 형제처럼 알고 지냈다. 그는 가족을 사랑할 것이다. 방법이 좀 이상해서 그렇지.

헤체에 관한 인용: 네덜란드와 프랑스에서는 동성애자 '가족'도 민법 차원에서 동등한 권리를 확보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보면 우리는 아직도 까마득한 야만 상태에 있고, 오히려 가족의 해체를 더욱 가속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야만스럽기 때문에 가족의 해체를 더더욱 가속화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네덜란드나 프랑스 사람들처럼 덜 야만스러워진다.

같은 글에서 확장에 관한 인용: ... 가족은 이제 혈연이나 이성(異性)적 부부 또는 같은 성씨 중심의 집단이 아니라 친밀성 중심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하루에 십팔시간 동안 함께 먹고 함께 지내고 남은 시간 동안 함께 자는 것을 십팔년 동안 했던 동료들이 부모보다 더 가깝고 친밀한 것은 사실이다. 집에 잠깐 들렀다 올께요 라고 말하며 살았던 시절도 있었다. 일종의 가족과 유사한 공동체지만 그렇다고 나는 그것을 가족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무리 친밀성 중심의 관계를 가졌다 하더라도 가족보다 가까운 사이, 가족같은 사이라고 말하지 '가족'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비록 가족이 '진정한 의미에서 '해체' 되는 한이 있어도 가족과 가족이었던 것과 가족이 아닌 것 쯤을 구분하는데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가족의 개념을 확장하면 그들 역시 가족이 될 것처럼 말했다. 함께 하루에 18시간씩을 보낸 직장 동료를 가족이라고 부르고 싶은 생각은 앞으로도 없다. 댁이나 많이 하세요. 저는 아닙니다.

웹을 돌아다니다가 한 살 짜리 내 아이를 그 아이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 가족이라고 우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번에 새로 배웠다. 나는 죽어라고 민주화, 개인화, 자유화 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아이도 마찬가지고.

-*-

피곤한 삽질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마저 작성. 색온도 7300K의 차가운 모니터 앞에서.

수구꼴통들의 의견이 갖잖아서 호주제를 반대한다? <-- 그동안 배운 소중한 '상식'은 수구꼴통의 생각을 바꾸려면 비공개 사석에서 면면을 맞대고 얘기를 아주 많이 해야 하고(그들이 좋아하는 방식) 그렇다고 내 얘기가 옳다고 여긴 적도 없었고, 잘 안 먹혀 들어가면 꾸준히 괴롭히면서 그가 저 세상에 갈 때까지 흥분하지 말고 차분히 기다리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아쉬운 것이 많고 자기들이 수구꼴통이라 불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어떤 때는 설득 당하고 싶어 하면서도 장난을 즐긴다. 때로 그저 대화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수구꼴통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하여튼 여러 모로 좋다. 옛날 얘기도 듣고,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생각을 바꿀 이유가 없고, 도움은 도움대로 받고. 수구꼴통이 갖잖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할아버지한테 박통이 뭘 잘못했는가를 그들의 '정서에 맞게'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설득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보았고, 꼴통에 신선한 바람을 넣어준 그런 사람들을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1:1로 한 사람씩 '조지는' 것이 취향에 맞는다. 수구꼴통은 공개된 자리에서 개쪽을 주는 방식으로는 원하는 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들이 또라이는 아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동시대에서 삽질하는 보잘 것 없고 초라한, 말하자면 바람 속의 먼지 같은 인간이다.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지도 그렇다고 찬성하지도 않는다. 단지 여자애들이 불편하다길래 불편하면 바꿔야지. 하고 동조하는 편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내가 민주화, 개인화, 자유화 되면(지금처럼 하고 싶은 것만 할 것이다) 장래의 아내는 나를 자기 생각만 하는 야비한 놈, 결혼은 왜 했니? 라고 말할 것 같다. 하지만 그녀가 개인화, 자유화 되기를 바라고 개인화, 자유화에 발 맞춰가야 할 형편이라면 주저없이 그러라고 할 것이다. 혹시나 어떤 피치못할 이유로 이혼을 원한다면 이혼해 줄 것이고 아이를 데려가고 싶어하면 위자료를 줄 것이다. 그리고 아내 더러 야비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고작 듣게 되는 소리가 무정하다는 것이라도.

어떤 개새끼(남자)가 날더러 나쁜 놈이라고 하면 욕설을 퍼붓고 면상을 한대 갈겨주고 주욱 나쁜 놈이 되면 그만이지만(때로는 재밌으니까) 여자들에게 더 이상 나쁜 놈 소리를 듣고 싶은 생각이 없다. 여자애들 주장에 따르면 나는 기득권자이고 법적, 사회적, 제도적으로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한다. 거기다가 자유로운 개인주의자이기까지 하니 더 바랄 것이 없지 않느냐고 묻는다. 비웃음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며 더 바랄 나위가 없다고 말한다.

이대로 계속 강력한 법적, 사회적, 제도적 지원을 받으며 자유로운 개인주의자로 살고 싶고, 법적, 사회적, 제도적 지원이 미비하거나, 기득권이 사라져도 주욱 자유로운 개인주의자로 살아갈 수도 있다. 사실 법적, 사회적, 제도적으로 내가 뭔가를 지원받았다는 점은 미지수고 기득권자의 권리를 행사한 적도 없지만 그래도 자유로운 개인주의자였던 것 같다.

법적, 제도적, 사회적 지원과 기득권을 애당초 가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애석해야 하나? 아니다.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줘서 좋다. 여성계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게 전 사회에 걸쳐 스며들어 있다고도 말했다. 내가 버스를 탈 때 어쩌면 법적, 사회적 제도적 지원을 은연 중에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주장은 꽤 재미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희롱할 때도 써먹었다. 소주 한 잔에는 가부장적 권위와 여성에 대한 법적, 사회적, 제도적, 조직적 탄압이 스며들어 있다. 호적 등본에도, 설탕 한 봉지에도, 여성의 직장내 처우에도, 영화에서 터미네이터가 남성 화장실의 서서쏴 변기로 여자 터미네이터를 심하게 후려치는 장면에도, history라는 말에도, Ms를 써야 하는 이유에도, 담배 광고에도, 과학기술사에도, 유곽의 존재에도, 어쩌면 리눅스 커널 코드에도.

리눅스 커널을 임베디드 보드에 올려 돌렸다. 절반이 끝났다. 불평등과 모순, 법적, 제도적, 사회적, 조직적 탄압은 커널 코드에 존재하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않을 것이다.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다. 어쩌면 존재할 지도 모른다. 존재한다. 리눅스 커널 코드에 '여성계'의 입장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커널 코드에 여성계의 입장이 고려되면 수행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지고 꼴도 보기 싫은 매우 지저분한 코드가 될 지도 모른다.

JTAG 케이블을 7만원 씩이나 받고 파는 걸 보고 좀... 부품값만 4000원 정도. 그냥 만들자. 만들겠다니까 만들지 말란다. 왜요? 시간낭비니까.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이 시간낭비였다.

식당과 사무실에서 각각 추석 선물을 줬다. 양말 한 켤레와 과자 한 상자였다.

소호 사무실 2인실을 잡았다. 월세 안 내도 좋으니까 들어오란다. 수도승들이 게송에 전념할만한 작은 공간이다. 흰색 회벽, 깔끔한 회의실, 각종 사무집기, 2개의 랜 케이블. 빈 책상. 의자 두 개. 거기에 내 자리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얼핏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에 조사장이 옛날 얘길 했다. 기억나나? 하면서. 뭐가요? 옛날 옛날에 너 인터넷 해킹하면서 돌아다닌 거. 언제적 얘긴데요? 모자익이 나오기 전에. 그러고 보니 웹 이전부터 인터넷을 사용했던 것 같다. 패킷 어셈블리를 조작하고 라우팅을 위조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일대를 돌아다니는 나를 보고 그 아저씨는 미국도 아니고(화이트샌드 미사일 기지였을 것이다. 매번 거기를 통해 들어갔고 거기서 수년간 이상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 해커들을 만났다) 왜 하필이면 그런 곳을 밤을 새워 돌아 다니는지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단다.

기억이 잘... 그때 기억이라고는 상용이형과 타넨바움의 미닉스의 문제점에 관해 핏대를 올리며 마구 퍼 마시면서 떠들어 대곤 했던 것 정도. 그는 미시간에 가서 os를 더 공부했고 나는 화가 나서 그가 돌아오면 확실하게 엿 먹이려고 os를 남몰래 공부했다. 그때 대한이가 있었다. 대한이는 프로그래밍은 별로 였지만 여자를 기차게 잘 꼬셔서 항상 질투심을 느꼈다. 애 였고 늘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활활 타올랐다. 기억이 잘 안났다. 안 났으면 좋겠다. 제발.

제발 그만 해줘.
나는 너의 인형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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