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menti si, momenti no

잡기 2003. 9. 17. 02:20
생각날 때 블로그질을 하자. 최근 통 무심했군.

추석 전에 선배와 집 근처에서 술 마시러 갔다. 스물넷쯤 되어 보이는 친구가 술자리에서 자기 여자친구와 술에 취해 비벼대는 모습이 상당히 안타까웠는지 선배가 몹시 심하게 시비를 걸었다. 녀석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있다가 작업이 완료되자 우리가 마시는 자리에 와서 얼굴이 벌개진 채, 뭐라고 그랬어? 엉? 뭐라고 그랬냐고. 하면서 시비를 걸었다. 선배가 헛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선수쳤다. 너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야. 그만 입 다물고 싸움 나기 전에 네 자리로 돌아가. 순순이 돌아간다. 그래서 희안하게 생각했다. 희안해서 오래오래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왜 갔을까. 맞짱 뜰 것이지.

다음날 아침에 어젯밤 무슨 일 있었어? 하고 선배가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어젯밤 맛이 간 것이다. 아무 일 없었어. 라고 대꾸했다. 그 선배와 술을 마실 때면 눈가에 멍이 들거나 발바닥이 찢어지거나 손가락이 부러지는 일들이 생겼다. 그에 비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지. 대낮에 선글래스를 안 써도 되니까 기뻤다. 선글래스를 썼더라도 기뻤을 것이다. 요즘 정서적으로 집 나간 가출소년 같고... 무엇보다도 운동부족이니깐.

케이 팩스. 지금 보고 있는 영화. 케빈 스페이시가 당신네 지구 별은 생각보다 눈이 부시네요 라고 말한다. 선글래스를 안 벗어서 체포되었다. 웃는다. LA 컨피덴셜에서의 케빈 스페이시는 노벨화학상 수상감이었다. 그는 멋졌다. 배우들 모두 멋졌다. 연출 죽였다. 원작 죽였다.

성격 검사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 싶으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지만, 정작 성격을 알기 위해 질문에 진실한 대답을 하려고 하면 진실한 대답이 불가능 한 멍청하거나, 야비한 질문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여러 종류의 성격 테스트에 등장하는 이런 질문: 나는 타인의 행동으로부터 기분이 변하지 않는다(상하지 않는다). 내가 정말 타인의 행동으로부터 기분이 상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 질문에는 예스나 노라고 답할 수 없다. 이 질문에는 스코프가, 문맥이 주어져야 한다. 암시적인 가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샤론이 오늘은 30명쯤 팔레스타인 머리를 날려버리겠다 라고 말했다고 치자. 타인의 행동으로부터 기분이 안 상하는 사람이니까 샤론이 무슨 짓을 하건 평소와 다를 것이 없다. 이번에는 기분이 상한다고 치자. 다섯살짜리 꼬마가 날더러 자기 사리사욕만 챙기는 나쁜 놈이라고 말한다. 기분이 상해야 할 것이다. 친구가 날더러 사리사욕만 챙기는 나쁜 놈이라고 말한다. 사실이므로 사실과 감정을 매우 우수한 성능으로 분해하는 평소의 나라면 기분이 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샤론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서 감정이 안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 질문은 형태를 바꾸어 여러 번 반복된다. 내가 쥐냐? 엉?

Juanes가 남미 그래미를 석권했다. 가장 좋아하던 Mala Gente라는 곡으로 최우수 락 음악상 4개를 싹쓸이했다. 깐꾼에서는 토끼들이 사방으로 달아났다. 농부가 자살했다. 별 감흥은 없었다. 그 동네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것 같다.

살인의 추억을 봤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친구가 왜 기차에 받혀 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갑갑한 80년대에 울화가 치밀어야 할 영화일까? 과연. 살며시 들여다본 터널 끝의 과거. 지구를 지켜라(?) 라는 영화 였던가? 미친놈의 말을 안 믿어서 지구가 망했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사람들이 미친놈에게 관심을 두지 않아 씁쓸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것이었다. 환경 보호 안 하면 지구가 망한댄다. 망할 것 같다. 뭐 그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지난 150년 동안 인류가 묵묵히 정성들여 오염시켜 놓은 환경이지만, 베수비오급 화산은 단 이틀만에 그 짓을 해낼 수 있었다. 즐비한 시체들과 함께. 예를 들어 화석연료의 소비를 하지 않아도(우라늄, 석유 따위) 지구에서 생산되는 에너지 총량이 방출되는 에너지 총량보다 많다면 엄청난 태풍이 2030년경 지구를 휩쓰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이게 아마 피터 해밀턴의 소설에 나오는 얘기일께다. 동남아에서 30만명의 사람들이 목성반점같은 거대한 태풍에 휩쓸려 본의 아니게 승천하게 되는. 잘 기억이 안 났다. 피터 해밀턴의 소설은 총 쏘는 장면에서 종종 쿨해지고는 했다. 최근 수년동안 본 소설중 쿨한 것들은 손에 꼽을만큼 적었다. 지구가 망하건 말건 땅바닥에 엎드려 먹이감을 기다리는 구르카 저격수가 결코 만만하게 보지 않은 주인공이 나왔던 크리시. LA 컨피덴셜, 20세기말 하드보일드 편집증의 금자탑. 그러고보니 두어주쯤 전에 블랙 다알리아 사건의 범인이 자기 아버지였노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나타나 떠들썩했던 것 같은데...

매미도 갔는데 한잔 해야지? 좋지. 전화해서 나오라고 해. 아무렴. 그러고 두 시간 동안 연락이 없었다. 어디서 몇 시에 만나자는 얘기를 피차 안했다. 전화를 걸어 횡설수설 하다가 또... 약속시간을 안 잡았다. '학문의 즐거움'을 거리에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다 읽을 때까지 나는 내가 어디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이상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연세랑에 가서 새로 나온 가면 라이더 스피릿을 읽었다. YMCA 뒷편의 순대집에 가자길래 고개를 젓고 간만에 경북집에 갔다. 맛집이랍시고 이것저것 광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새 맛이 간 것일까? 순대맛은 변함없었다. 그는 죽어라고 자기가 데이트하게 될 여자 얘기를 늘어 놓았다. 일주일에 두 명이라... 날더러 어떻게 처신해야 하냐고 묻는다. 맨날 여자들한테 희롱 당하며 기구하게 사는 놈한테 뭐 물을 것이 있을까. 듣고 싶은 말이 뭐야? 무서워서 잡아먹을 것도 아니면서. 술집에서 눈알이 예쁘다고 말한 여자가 있었다. 굳이 면전에서 말해 뭘 어쩌겠다는건가. 댁이 내 눈 안에 담겨있지 않은데 어째서 그 눈이 예쁘다는 건가요. 의문이지요. 그녀는 내 맥주를 가로채 다 마시고 주변에 강력한 저기압을 형성한 후, 나갔다. 시시껄렁한 수사학에 농락당하는 것은 비단 여자들뿐만은 아니겠지만.

난데없이 집에 온 거북이는 일주일 동안 밥을 안 줬는데도 살아 있다. 일주일 전 그 자세로 목만 넣었다 뺐다 하고 있다. 정력이 대단한데? 나보다 오래 살 것 같다.

머리 깍으러 가는 길에 살짝 옆길로 새서 도서관에 들렀다. 집에서 300m 거리에 놓여 있는데 그동안 무심했다. 공사하다가 말았는지 외장은 콘크리트 벽 그대로였다. 아닌가? 저것도 그 망할 현대예술? 어쨌건 수수했다. 분위기가 썩 좋다. 안내 데스크 아가씨의 눈을 노려보면서 저벅저벅 걸어가다가 그녀가 기대반, 의문반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확인하고 홱 돌아서서 입구로 들어갔다. 회원증을 만들려니 사진이 한장 필요하다. 으쓱. 다음 기회에. 정기간행물 열람실에서 과학과 사상 여름호를 보았다. 특집은 원자력 발전에 관한 것이었다. 체르노빌 사망자수 50명, 시민단체인지 환경단체인지의... 1만 5천명이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방사능 피폭의 위험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은 몇 가지 통계로 무의미해졌다. 그 다음은 폐기물 처리 시설에 관한 논란. 사람들이 원전의 위험에 대해 느끼는 태도를 수감 위험(percieved risk)이라고 불렀다. 쿨하군. 그런데... 퍼시브드 리스크라,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어디서 들었더라.

해외여행 하면서 영어 많이 늘었겠네? 제가요? 아니요, 거기서 쓴 영어는 밥줘 정도 였어요. 근데 왜요? 밥 사줄려고. 호텔 로비에서 염소 수염을 한 남자를 만났다. 너도 나도 명함을 건네오는 세 명의 사장은 입 다물고 있는 나를 보고 다 안다는 표정을 지은 채 제각각 자기가 통역을 자처하겠다고 나섰다. 염소 수염은 악수를 하면서 내 손이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내가 왜 실리콘벨리 염소 수염떼를 만나야 하는지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장님들이 안되는 영어로 쩔쩔 매는 것이 안타까워 하는 수 없이 염소 수염과 대화했다. 두 시간 동안 영어로 줄줄 떠들어대니까 사장님들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어 잘 하네? 아까 말했잖아요. 밥줘 정도는 할 수 있다구요. 그런데 밥줘가 영어로 뭔지 생각이 안나서 골치가 아팠다. 염소 수염은 나같은 싸구려 잡동사니와는 비교가 안되는 값비싼 기술자였다. 차이가 컸다. 그들은 극진한 호위를 받으며 이 호텔에 들어섰고, 나는 왜, 어딜 가는지도 모른 채 밥 준다길래 질질 끌려와 어떤 빌어먹을 기술에 관해 다 안다는 듯이 떠들었다. 염소 수염의 손가락이 으스러지도록 꽉 쥐어 악수를 하고 나왔다. 그의 악수는, 손아귀에 너무 힘을 줘서 팔목이 떨리는, 논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종류의 것이었다. 내 갸날픈 손은 남미에서 맥주병을 잡고 상대의 뒤통수를 때리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힘차게.

밥은 챙겨 먹었다.

시연. demo or die. 그동안 작업 성과를 보여줬다. 조사장은 프롬프트에서 l자와 s자를 두드리고 잠시 망설인 후 엔터키를 힘차게 눌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볼 건 다 봤다는 듯이. 휘청였다. 빈혈끼가... 보드의 설계 스펙을 임베디드의 전문가라는 김소장님에게 넘겨줬다. 윤씨 아저씨는 핀 맵을 만들다말고 인터페이스 로직 전체를 3.3v로 수정하겠다고 말해서 매우 기뻤다. 거럼.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아직까지 5볼트야? 속도도 안 나오고.

재미없는 얘기 하나 해줄까? 어... 안 해도 되는데... 일본의 어떤 실없는 과학자들이 연구를 했다는데, 잘 생긴 놈들은 안 그런 놈들보다 연봉이 평균 10% 높대. 일 잘하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고. 아저씨 하고 내가 이렇게 거지같이 사는 데는 다 그런 이유가 있는거지. 참고로 말하지만, 좆데이 기사야. 그는 내 말을 다 듣고 나서, 느닷없이 말 울음소리를 냈다. 많이 놀랬다. 가을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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