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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 2003. 9. 30. 14:54
쿼런틴 표지로 설문조사를 하고 있었다. 표지 그림을 보니... 책을 읽은 느낌이 이렇게 다른건가?

책을 읽을 때 이상한 버릇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의식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적어보는 것은 처음이다. 책을 읽다가 접을 일이 생기면 (이동 중에만 책을 읽는다. 시간이 없어서) 접을 페이지를 무의식적으로 일련의 숫자에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선호하는 페이지 경계는 16, 32, 64, 128, 256, 512. 2의 멱수는 아니지만 잘 잊지 않는 쪽수는 48, 56, 80, 86, 96, 144, 160, 186, 192, 245, 286, 386, 398. 이런 페이지는 비교적 잘 기억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기억하는 숫자에는 일련의 특징이 있었다. 예를 들어 58페이지에서 멈췄다면 58=32+16+8+2 = 64-6 = 0x40 + 2^2 + 2^1. 102페이지는 96+4가 되어 0x60 + 2^2이 된다. 96은 16진수로 0x60이라 그냥 외웠다. 책 페이지를 이리저리 뒤질 때 별로 유용한 테크닉은 결코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이렇게 하면 페이지를 잘 잊어버리지 않았다. 책의 쪽수는 왼편을 기준으로 언제나 2의 배수가 되니까. 어쩌면 머리가 2진수와 16진수에 맞춰 돌아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0x1f=0x20-1=32-1, 이런 것들은 경계 숫자라 별다른 암산 없이도 머리에서 실시간으로 튀어나왔다. 어렸을 적부터 2진수와 16진수를 외우고 다니던 버릇일까? 16=10, 32=20, 48=30, 64=40. 80=50, 전화번호는 0x9c632e0이고 가끔 데이터의 헤더 매직으로 사용하는 숫자는 3405705229(0xcafef00d)다. 어떤 때는 일련의 규칙성을 띤 숫자를 하나 떠올리고 그것을 사이트 암호로 쓰기도 했다.

핸드폰이 꺼진 줄 모르고 이틀 동안 집에 틀어박혀 일본 드라마를 봤다. '파이팅걸'에는 왠 한국인이 나와서 부도덕하고 상식 없는 한국 여성의 전형을 보여줬다. 드라마를 통해서 일본인은 한국인이 대접하는 사람의 면전에 대고 맛없는 음식을 맛 없다고 말하는 악취미를 가졌고, 한국에서는 여성에게 자유가 없다는 류의 비딱한 사고방식을 가질 것 같다. 재미가 없다. 캐릭터는 밥맛 떨어지고 극에서 완급 조절이란 것이 전혀 없다시피 했다. 19세의 소년/소녀가 꿈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며 삽질하는 그저그런 얘기였다. 애들이 예쁘기를 하나, 옷이 예쁘길 하나(주인공들은 옷가게 차렸다가 쓰디쓴 현실 앞에서 망가진다), 스토리가 재밌길 하나, 이걸 참고 본 나 자신이 대단했다.

'야마토 나데시코(요조숙녀?)' 라는 드라마도 봤다. 주인공 여자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는데 가난을 몸서리칠 정도로 싫어한다. 가진 것이라고는 미모 밖에 없는 이 여자는 고등학교(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쿄로 올라가 스튜어디스가 되었다. 돈 많은 남자를 만날 기회가 가장 많은 직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름한 집에서 살며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옷만큼은 기가 막히게 비싼 것을 사서 입고 수많은 미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에 그는, 갑부를 걷어차고 빚을 잔뜩 진 보잘 것 없는 남자를 쫓아간다. 교훈극이랄까? 그녀는 돈 주고 살 수 없는 단 한 가지를 갖고 싶어했는데 그 남자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나? 첫 화에서 그 남자는 미국에서 수학 공부를 하다가 돌아왔다고 하던데 필드상 시상식 사진에 얼굴이 얼핏 등장해서 잠깐 놀랐다. 필드상을 수상한 젊은 수학자가 도쿄로 돌아와 빚더미에 나 앉은 채 생선 배달을 하고 있다? 상당한 리얼리티인걸. 잘못 알았다. 그는 그냥 좌절한 30세 수학자였다. 45분 짜리 11화가 계속 되는 동안 여자는 딱 한 번만 같은 옷을 입었다. 옷 만큼은 충분히 눈요기가 되었다.

맛없는 장어구이를 먹었다. 정말 정말 맛없는 피자를 먹고 울상이 되었다. 이렇게 살아가야 하나? 어찌된 일인지 마음에 쏙 드는 피자나 스파게티를 먹어본 것이 벌써 몇년 전 일인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파스타를 먹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얘네들은 면과 밀가루에 관해서는 어쩌면 중국에 한수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글 안 쓰고 놀기 시작한지 오늘로 딱 6년째 되는 날이다.

게으르면 착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오늘 거리를 걷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정신질환이 심할 때는 페이지의 글자수를 세면서 책을 읽었다. 지금은 다 나은 것 같다.

퍼온 그림: 그릇된 가장, 그릇된 결론. 적당한 그럴듯함.



Alizee, J`en ai marre! 동영상. 이런 걸 보면 여자가 악이란 생각이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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