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없는 음식으로 인생이 비참해지기까지야 하겠는가 싶지만, 길가에 앉아 막퐁뒤를 안주삼아 병째 와인을 들이키고 싶은 인간들이 있고 감자탕에 소주를 먹을만한 사람들도 있었다. 음식을 먹을 때 그다지 우아한 편도 아니면서, 아... 빌어먹을 까탈스러움만 남았다.
한나라당에 관련된 기사를 읽고 있노라면 닭장에서 패권을 다투며 홰를 치고 꼬꼬댁거리는 닭들이 생각났다. 사무실에 갈 때 매번 한강을 건넜다. 한강의 낮과 밤은 단순히 넉넉하고 아름다웠다. 맞은편에 보이는, 눈에 거슬리는 국회의사당을 볼 때마다, 한나라당이 의석의 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국회의사당이 폭발하면 썩 괜찮은 불꽃놀이가 되겠구나, 하고 매번 생각했다. 불꽃과 닭털이 무수하게 흩날리지 않을까? 마치 눈처럼, 민들레 홀씨처럼.
영화 City of God, 시우다드 델 데우스는 닭 잡는 것으로 시작해서 닭 잢는 것으로 끝났다. 천진난만하게 총질을 해대는 아이들이 나름대로 인생을 개척해가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상 받아도 될만한 영화지만 피가 너무 많이, 총질이 너무 심해 구역질이 난다는 미국인들의 평가를 보니 부조리함을 느꼈다. 이를테면 특이한 식습관을 가진 안소니 홉킨스가 뇌를 떠먹거나 식사시간에 인간을 통째로 접시에 내어놓고 먹어대는 변태스러운 영화를 만드는 서구에 메스꺼움을 느끼는 편이라서. 어쨌거나, '신비스럽기만한'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깨끗해 보이는 아랍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종류의 문화였다.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새벽 5시. 꿈속에서 파키스탄이 보였다. 인도를 떠나 파키스탄의 국경을 넘을 때부터 인상적인 문화적 격차를 절감했다. 아주 지저분한 나라(인도)에서 포르말린 냄새가 풍기는 병원 복도를 지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국경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투어 가이드를 한다는 유럽인과 얘기했었다. 그는 아시아인의 사기 방법을 모두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떠벌렸다. 라호르의 극장 뒷편에 숙소를 잡았다. 활기찬 밤거리를 지나 괴물생선튀김을 파는 노천 식당에 앉았다. 라마단 바로 직전이었고 식사는 매우 훌륭했다. 숙소에는 세 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한 친구는 시장에서 적어도 30년은 썩은 것 같은 주름 사진기를 사들고 왔고 더벅머리 아가씨에게 챠도르를 씌우고 이란 비자용 사진을 아침 내내 찍고 있었다. 그 아가씨는 이집트의 룩소르에서 다시 만났다. 더벅머리는 나를 오빠라고 불렀고 만도는 그녀를 못 생겼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욕심 많은 아가씨가 잘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피차 정체가 뭔지 서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더벅머리 아가씨는 고생을 참 많이 했다. 약간의 분쟁이 있긴 했지만 여행이 무척 순조로왔던 나에 비하면.
테러 국가 파키스탄의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졌다. 비록 길거리에서 총을 팔고 여자들이 길거리를 함부로 나다닐 수 없어 호모가 우글거리기는 했지만 파키스탄은 자존심이 강하고 경건한 이슬람 국가였다. 사람들은 소박하고 친절했다. 저녁 무렵 스즈끼 뒷좌석에 그들과 끼어 앉아 있을 때 금식이 끝났음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그들은 말없이 나에게 말린 과일을 나눠 주었다. 그들이 음산하게 눈알을 반짝이면서 낄낄 웃으면 나도 낄낄 웃었다. 여자들이 좀 무서워할만한 좀 그런 광경이긴 했다.
라왈핀디에서 알 아잠 호텔에 이틀, 파퓰라 인에서 이틀을 보냈다. 아주 생생하게 기억나서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길깃으로 갔고, 일본인들 몇몇이 길거리를 개처럼 배회하던 카리마바드(훈자 마을)에서 일주일을 라마단과 함께 보냈다. 살구씨는 소화불량과 관련이 깊었지만 무척 추운 관계로 화장실을 들락거리지 않았다. 검은 빙하와 흰 빙하를 걸었고 대상무역의 흔적을 발견했고 위대한 이슬람의 전파를 목격했다. 카리마바드로 가는 길에 본 인상적인 모습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사과 나무 그늘 아래 러그를 깔고 경건한 자세로 메카를 향해 기도하던 수염난 늙은이의 모습. 그림에서나 보던 종류의 광경이었다. 페샤와르의 투어리스트 인에서 애꾸눈 주인에게 부탁해 금박을 입혀놓은 꾸란의 번역본을 구했다. 꾸란은 번역될 수 없는 것이다. 번역된 꾸란은 이미 경전이 아닌, 해설서에 불과하다. 꾸란을 읆조리는 강하면서도 시적인 음율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시장을 헤멨다. 꼬마애가 나에게 잘 구부러진 장식이 멋진 칼을 팔고 싶어했다. 주인장에게 놀림감이 되곳했던 일본 승려를 만났다. 아이처럼 천진난만했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개구리를 접어줬다. 그는 생고집을 부리며 추운 북쪽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추위 때문에 병에 걸릴까봐 걱정스러웠다. 라왈핀디에서 30시간 동안 먼지나는 기차를 타고 사막을 가로질러 퀘타에 도착. 이틀쯤 머물다가 10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이란과의 접경도시 타프탄에 도착. 일본인 둘과 함께 국경을 넘었다. 비스켓 하나도 쪼개먹는 한국인과는 달리 얌체스러운 녀석들이었다. 너무 추워서 국경이 열릴 때까지 햇볕을 쬐며 이란 국경 사무소에 붙어있는 수염난 호메이니 사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보따리 장사를 하는 파키스타니가 말을 걸어왔고 총값 시세에 관해 궁상스러운 대화를 나눴다. 하루하루가 생생하게 기억났다. 심지어는 라호르에서 처음 먹었던 괴물 생선 튀김 맛부터 해를 등지고 덜덜 떨면서 이란 국경으로 걸어가며 입 안에 씹히는 모래를 퉤하고 뱉어냈던 것까지.
자다 깨서 왠 봉창 두들기는 소리냐. 여행에 관해 굳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의료보험증을 만들러 가니 출입국 날짜가 화면에 나타났다. 도서관 회원증의 사진은 퀘타에서 부러 꽃단장하고 찍은 것이었다. 그래서 꿈 속에서 기억을 되짚으며 춥고 덥고 먼지나고 매연이 자욱했던 파키스탄을 다시 여행한 것 같다.
한나라당에 관련된 기사를 읽고 있노라면 닭장에서 패권을 다투며 홰를 치고 꼬꼬댁거리는 닭들이 생각났다. 사무실에 갈 때 매번 한강을 건넜다. 한강의 낮과 밤은 단순히 넉넉하고 아름다웠다. 맞은편에 보이는, 눈에 거슬리는 국회의사당을 볼 때마다, 한나라당이 의석의 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국회의사당이 폭발하면 썩 괜찮은 불꽃놀이가 되겠구나, 하고 매번 생각했다. 불꽃과 닭털이 무수하게 흩날리지 않을까? 마치 눈처럼, 민들레 홀씨처럼.
영화 City of God, 시우다드 델 데우스는 닭 잡는 것으로 시작해서 닭 잢는 것으로 끝났다. 천진난만하게 총질을 해대는 아이들이 나름대로 인생을 개척해가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상 받아도 될만한 영화지만 피가 너무 많이, 총질이 너무 심해 구역질이 난다는 미국인들의 평가를 보니 부조리함을 느꼈다. 이를테면 특이한 식습관을 가진 안소니 홉킨스가 뇌를 떠먹거나 식사시간에 인간을 통째로 접시에 내어놓고 먹어대는 변태스러운 영화를 만드는 서구에 메스꺼움을 느끼는 편이라서. 어쨌거나, '신비스럽기만한'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깨끗해 보이는 아랍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종류의 문화였다.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새벽 5시. 꿈속에서 파키스탄이 보였다. 인도를 떠나 파키스탄의 국경을 넘을 때부터 인상적인 문화적 격차를 절감했다. 아주 지저분한 나라(인도)에서 포르말린 냄새가 풍기는 병원 복도를 지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국경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투어 가이드를 한다는 유럽인과 얘기했었다. 그는 아시아인의 사기 방법을 모두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떠벌렸다. 라호르의 극장 뒷편에 숙소를 잡았다. 활기찬 밤거리를 지나 괴물생선튀김을 파는 노천 식당에 앉았다. 라마단 바로 직전이었고 식사는 매우 훌륭했다. 숙소에는 세 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한 친구는 시장에서 적어도 30년은 썩은 것 같은 주름 사진기를 사들고 왔고 더벅머리 아가씨에게 챠도르를 씌우고 이란 비자용 사진을 아침 내내 찍고 있었다. 그 아가씨는 이집트의 룩소르에서 다시 만났다. 더벅머리는 나를 오빠라고 불렀고 만도는 그녀를 못 생겼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욕심 많은 아가씨가 잘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피차 정체가 뭔지 서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더벅머리 아가씨는 고생을 참 많이 했다. 약간의 분쟁이 있긴 했지만 여행이 무척 순조로왔던 나에 비하면.
테러 국가 파키스탄의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졌다. 비록 길거리에서 총을 팔고 여자들이 길거리를 함부로 나다닐 수 없어 호모가 우글거리기는 했지만 파키스탄은 자존심이 강하고 경건한 이슬람 국가였다. 사람들은 소박하고 친절했다. 저녁 무렵 스즈끼 뒷좌석에 그들과 끼어 앉아 있을 때 금식이 끝났음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그들은 말없이 나에게 말린 과일을 나눠 주었다. 그들이 음산하게 눈알을 반짝이면서 낄낄 웃으면 나도 낄낄 웃었다. 여자들이 좀 무서워할만한 좀 그런 광경이긴 했다.
라왈핀디에서 알 아잠 호텔에 이틀, 파퓰라 인에서 이틀을 보냈다. 아주 생생하게 기억나서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길깃으로 갔고, 일본인들 몇몇이 길거리를 개처럼 배회하던 카리마바드(훈자 마을)에서 일주일을 라마단과 함께 보냈다. 살구씨는 소화불량과 관련이 깊었지만 무척 추운 관계로 화장실을 들락거리지 않았다. 검은 빙하와 흰 빙하를 걸었고 대상무역의 흔적을 발견했고 위대한 이슬람의 전파를 목격했다. 카리마바드로 가는 길에 본 인상적인 모습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사과 나무 그늘 아래 러그를 깔고 경건한 자세로 메카를 향해 기도하던 수염난 늙은이의 모습. 그림에서나 보던 종류의 광경이었다. 페샤와르의 투어리스트 인에서 애꾸눈 주인에게 부탁해 금박을 입혀놓은 꾸란의 번역본을 구했다. 꾸란은 번역될 수 없는 것이다. 번역된 꾸란은 이미 경전이 아닌, 해설서에 불과하다. 꾸란을 읆조리는 강하면서도 시적인 음율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시장을 헤멨다. 꼬마애가 나에게 잘 구부러진 장식이 멋진 칼을 팔고 싶어했다. 주인장에게 놀림감이 되곳했던 일본 승려를 만났다. 아이처럼 천진난만했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개구리를 접어줬다. 그는 생고집을 부리며 추운 북쪽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추위 때문에 병에 걸릴까봐 걱정스러웠다. 라왈핀디에서 30시간 동안 먼지나는 기차를 타고 사막을 가로질러 퀘타에 도착. 이틀쯤 머물다가 10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이란과의 접경도시 타프탄에 도착. 일본인 둘과 함께 국경을 넘었다. 비스켓 하나도 쪼개먹는 한국인과는 달리 얌체스러운 녀석들이었다. 너무 추워서 국경이 열릴 때까지 햇볕을 쬐며 이란 국경 사무소에 붙어있는 수염난 호메이니 사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보따리 장사를 하는 파키스타니가 말을 걸어왔고 총값 시세에 관해 궁상스러운 대화를 나눴다. 하루하루가 생생하게 기억났다. 심지어는 라호르에서 처음 먹었던 괴물 생선 튀김 맛부터 해를 등지고 덜덜 떨면서 이란 국경으로 걸어가며 입 안에 씹히는 모래를 퉤하고 뱉어냈던 것까지.
자다 깨서 왠 봉창 두들기는 소리냐. 여행에 관해 굳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의료보험증을 만들러 가니 출입국 날짜가 화면에 나타났다. 도서관 회원증의 사진은 퀘타에서 부러 꽃단장하고 찍은 것이었다. 그래서 꿈 속에서 기억을 되짚으며 춥고 덥고 먼지나고 매연이 자욱했던 파키스탄을 다시 여행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