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한국의 젖줄, 미국의 막강한 경쟁력, 기녀집이 맛사지 가게라며 버젓이 길거리에서 영업하는 나라, 돈이 장땡인 나라, 대인, 영웅은 커녕 소인배만 우글거리던 나라, 발꼬랑내와 떡머리가 아주 인상 깊었던 나라, 쭉쭉빵빵이 즐비한 나라, 대 중국은 세계적으로 욕을 먹을 지언정 소수민족을 통합하는 영약한 전략만큼은 가히 예술적이라 할 수 있었다.
베이징에서 몽골로 들어가는 기차를 타고 한 시간에 40위엔 하는 '초원에서 말 달리기' 놀이는 수지타산이 안 맞았다. 고작 한 시간 타고 어떻게 호방한 대륙 기질을 일깨울 수 있을까. 관광용 멘트, 개소리지.
그래서 L.E.가 언젠가 말했던 중국 서북부 깡촌으로 기어 올라갔다. 사실은 광둥 지방에 가서 중국 음식을 배터지게 먹을 생각이었지만 안양에서 만난 중국 아가씨가 중국 최고의 절경은 구채구라고 주장했다. 두말없이 경로를 바꿨다.
말 한 마디 안 통하는 가운데, 한 중국인의 도움으로 구채구에서 호화로운 3성급 호텔에 하룻밤 저렴하게 묵고 길을 잃고 헤메다가 구채구 내의 티베탄 숙소에서 하룻밤 더 묵었다. 중국영화에서 그곳을 본 적이 있었다. 와호장룡의 배경으로 나왔던 곳이었다. 어쨌든 더럽게 추워서 얼어죽을 지경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송판에 들렀다. 목적지다. 도착하자 마자 정말 무협지에서나 볼성 싶은 광경을 보았다. 말들이 성문을 지나 다그닥 다그닥 길거리 한복판을 가로질러 갔다.
사진 왼편에 보이는 하얀 건물에서 하룻밤 묵었다. 그 맞은편에 오스트레일리아 여자와 결혼해 호스 트래킹을 한다는 가게가 있었다. 그 집에 들렀더니 대뜸 아이스 마운틴 트래킹을 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상당히 추워 보였지만, 나머지 '투어'는 숲속을 천천히 돌아다니는 것이라 재미가 없어 보였다. 아이스 마운틴 트래킹 신청서에 사인했다. 하루에 80위엔 꼴로, 세끼 식사와 잠자리, 그리고 종일토록 말 달리는 코스였다. 나오는 입구에서 이스라엘리가 아는 척을 했다. 그와 얘기하다가 내가 스노우 마운틴에 간다니까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거기 아무도 안 가는데? 걱정 말라고 그를 다독였다.
새벽에 벌벌 떨면서 기다렸다. 사전 정보가 없어 비를 피할 옷가지 정도만 챙겼다. 대략 2-30명 정도 되는 사람이 호스 트래킹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에 배낭을 통째로 들고 갔다. 음식도 상당히 많이 준비한 것 같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처음 타보는 말이라 자세가 영 불편했다.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들과 함께 5분쯤 시내를 달리다가 갈림길이 나타났다. 어? 나만 빼고 다들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그렇게 해서 나흘 동안 가이드와 나, 둘이 아이스 마운틴 트래킹을 시작했다. 그는 영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 말은 세 마리였고 한 마리의 등에 나흘 동안 먹을 식량을 실어 놓았다.
그가 말 엉덩이를 걷어차자 말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재밌어 보여서 말 옆구리를 박차로 찌르고 잔가지를 꺾어 엉덩이를 때렸다. 한 손으로 안장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 고삐를 쥐고 있었다. 고삐를 이리저리 틀어봤지만 말은 제멋대로 달렸다. 순전히 지 멋대로 왔다리 갔다리 했다. 몇번 인가 떨어질 뻔 해서 식은땀이 흘렀지만 용케 중심을 잡았다. 가파른 비탈길을 굽이굽이 올라갔다. 첫날은 순조롭게 끝났다. 해발 2000미터 가량?
캠프 사이트에 당도해 천막을 치고 음식을 준비했다. 속으로, 이건 관광상품이야. 고생이란 있을 수 없어. 라고 생각했다. 가이드의 눈치를 보아하니 너무 일찍 도착한 것 같다. 오후 두 시 였다. 밤이 되자 기온이 현저하게 떨어져 장작불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덜덜 떨면서 잠이 들었다.
아침에 냇가에서 세수를 하려니 뼛 속까지 시원했다. 정상에서 눈이 녹은 물이 시내를 이룬 것이다. 갑자기 내린 비로 물이 불어 여차하면 세수하다가 발을 삐끗해 떠내려 갈 것 같았다. 결심했다. 세수... 이젠 하지 말자.
온 몸에 말 냄새가 배어 더 이상 말똥 냄새가 나지 않았다. 말에게는 백수(white beast)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후 나흘 동안 내가 백수에게 한 말은 전부 욕지기 뿐이었다.
첫날, 이놈이 백수다. 어쨌거나, 누가 날더러 백마 타 봤냐고 물으면,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꾸할 수 있다.
갑자기 길이 가파라지고 한나절이 되어도 기온이 오르지 않았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태양빛은 강렬했고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급격히 체온을 떨궜다. 얼굴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추워서 오금을 펼 수가 없었다. 가이드가 비가 올 것 같다는 시늉을 하며 속도를 내려고 백수의 엉덩이를 자꾸 걷어찼다. 성질이 나서 무진장 겁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껏 달렸다. 경사가 적어도 40도 가량은 되는 커다란 산맥의 산허리에 15cm 폭의 길 사이를 정신없이 달렸다. 왼편으로는 끝이 까마득하게 보이는 낭떠러지였다.
광경은 이루 말할데 없이 공포스러웠다. 조금만 삐끗하면 말 잔등에서 떨어져 추락할 것 같았다. 가이드는 내 발이 등자에 너무 깊이 박혀 있는 것을 우려했다. 생각해보니 말에서 떨어질 때 등자에 발이 걸려 있으면 발목이 쉽게 부러질 것 같았다. 고삐를 양 손으로 잡고 그것도 모자라 안장 손잡이를 함께 잡은 채 몹시 볼썽 사나운 모습으로 벌벌 떨면서 절벽을 지나갔다.
그날도 너무 일찍 캠핑 사이트에 도착했다. 말 타는 것이 점점 무서워져서 도저히 안되겠기에 걱정하는 가이드를 캠프에 남겨두고 말을 몰았다. 연습이라도 좀 해볼 요량이었다.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면서. 얼어죽겠는데 말은 뜻대로 안 움직이고 절벽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할 때마다 더럭 겁이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파곤죽이 되어 캠프로 돌아와서 어제와 같은 식사를 했다. 밀가루 반 포대, 쌀 주머니 하나, 오이 스무개, 호박 몇개, 찻잎, 이게 식재료의 전부였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함께 밤이 찾아왔다. 장작을 더 때려고 도끼를 들고 설치는 내 모습이 가이드 눈에는 몹시 가련하게 보인 것 같았다.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쳤다. 그래서 장작으로 쓸만한 나무가 없었다. 도끼를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생나무를 찍었다. 설상가상으로 고산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해 머리가 아프고 구역질이 치밀었다. 생나무 연기에 거의 훈제되다 시피 하고 머리는 아파죽겠고 음식은 쌀죽과 밀가루 빵 뿐이고 장작불 곁을 떠나면 입김이 얼어붙었다.
가이드에게 돌아가자고 사정했지만 그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강을 따라 한참 가다보면 조그만 마을이 있다고 손짓발짓으로 가르쳐 주었다. 말 타고 강을 따라 삼십분쯤 달렸다. 뭐라도 먹고 싶었다. 가게에서 주인장이 권해주는 맥주를 들이켰다. 가게에 맥주를 보관하기 위한 냉장고는 필요없었다. 맥주에는 살얼음이 끼어 있었으니까. 맥주를 몇 병 사서 주머니에 우겨놓고 지나가는 동네 아줌마한테 생 닭을 한 마리 사서 전속력으로 캠프로 달렸다. 맥주다! 기쁨에 겨워서. 뜨거운 물에 닭을 담궜다가 꺼내 털을 뽑고 장작불에 구운 다음 가이드와 함께 히히덕거리며 찌그러진 양철 그릇에 맥주를 따라 주거니 받거니 마셨다. 구워먹은 닭 때문에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비가 온다... 죽겠군.
머리는 아프고, 추워 죽겠고, 정강이 사이는 쑤시고, 밤새 뒤척였다. 아침부터 머리가 아파 타들어가는 목구멍으로 두통약을 두 알 삼켰다. 간밤의 비로 텐트와 침구 전부가 물에 젖었다. 텐트는 방수가 아니었다. 텐트를 걷으려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거웠다.
아침 메뉴는 변함없었다. 한 조각만 먹어도 목이 메이는 밀가루 빵을 꾸역꾸역 삼켰다. 이거라도 안 먹으면 허기져서 쓰러진다. 어제는 오이 볶음, 오이 국, 호박국 이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오이찜이 나왔다. 점심 메뉴가 기대된다. 오이튀김이었으면 좋겠다.
백수에게 짐을 얹고 출발 준비를 했다. 짐 무게 때문에 휘청거린다. 간밤의 비로 손가락이 얼어붙어서 고삐를 제대로 잡기가 힘들었다. 다시 가랑비가 왔다가 햇볕이 쨍쨍 내리 쬐었다. 구름은 거센 바람 때문에 신속하게 움직였다. 오버 트라우저를 벗어 후드를 머리에 덮어 쓰고 소매를 묶어 망토처럼 걸쳤다. 선글래스를 끼었다. 보는 이도 없겠다, 앰버의 왕자처럼 망토를 걸치고 헬라이딩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3일째가 되니 백수한테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백수는 피골이 상접한 흰색 말이었다. 이제는 한손으로 고삐를 쥐었고 남은 한 손으로 칼을 쥐었다. 칼? 어젯밤 불가에 앉아 도끼로 나무를 갈아서 길다랗고 두꺼운 회초리를 하나 만들었다. 이틀 동안 나를 우습게 보고 말 안 듣는 백수 새끼가 딴전을 피우면 가차없이 휘둘렀다.
오르막길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내리막길에서는 말이 발이 꼬여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떨어지면 끝장이다. 절벽 밑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는데 30분은 족히 걸릴 것 같다. 시체는 아마 너덜너덜하겠지? 배가 터져서 대장이 길죽하게 뻗어나와 다시 온 몸을 칭칭 감고? 따라서 비지땀을 흘리면서 죽을 똥 말 똥 기어 올라가는 백수에게 무자비하게 굴었다. 덕택에 평지에서는 시속 5-60킬로미터의 속도로 쾌속 질주가 가능했다. 말 그대로, 망토를 휘날리면서.
3일째도 너무 일찍 도착했다. 아침 6시에 출발해서 2시간 만에. 가이드가 손짓 발짓으로 정상에 가보겠냐고 물었다. 댁은? 자기는 안 간단다. 말을 타고 산 비탈을 힘겹게 힘겹게 올라갔다. 백수는 제트 추진 방구를 뀌면서 없는 힘을 보탰다. 그놈은 아무데나 똥을 쌌다. 길은 맞게 올라온 것일까?
눈밭이 나타났다. 고도는 3000m쯤 되는 것 같다. 산 꼭대기에서 눈을 움켜 쥐었다. 눈덮인 산자락이 발 밑에 깔려 있었다. 도저히 인간이 살만한 곳은 아닌 것 같다. 톨킨의 소설에나 나올법한 광경이었다. 여태까지 개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백수가 비지땀을 흘리며 푸르럭거렸다. 놈의 몸에서 올라온 김은 즉각 바람에 휩쓸렸다. 망토가 펄럭였다. 막대기를 치켜들고 힘차게 소리 질렀다. 우어어어!!
내려오는 길에 먹구름이 삽시간에 끼더니 엄청난 우박이 쏟아졌다. 엄지 손가락 만한 우박이 사정없이 내리 꽂혔다. 백수는 히히힝 거리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우박에 맞으니 어깨와 머리가 되게 아팠다. 우박에 맞으니까 도심에서 머리를 싸메고 하던 여러 실존적인 고민들이 상당히 부질없어 보였다.
우박에 맞아 죽고 싶지 않아 마구 달리다가 근처에 보이는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으로 급히 피신했다. 나무를 얽기섥기 엮어 지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장작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눈알을 반짝였다. 따뜻하다... 산막의 늙은이가 야크차를 권했다. 야크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시종 낄낄거리다가 알았다는 듯이 뒷참을 뒤적여 자랑스럽게 술을 꺼내 들었다.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 목구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어, 좋은데? 담배를 나눠 피우고 독주를 마시며 우박이 멎기를 기다렸다. 술을 좀 과하게 마셨다. 우박이 잦아들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난롯가에 떨어지며 치직치직 소리를 냈다.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초가집의 이가 들끓는 늙은이와 껴안고 기분좋게 헤어졌다.
오이 볶음을 아홉끼나 먹으니까 헛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밤하늘의 별들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선명하게 반짝였다. 그 사이로 거친 바람이 가느다란 선을 그리며 살갖을 찢어놓을 듯이 지나갔다. 마치 대기 중에 마녀가 떠돌며 생명을 희롱하는 것 같았다. 3일 동안 숲속에서 일을 봤다. 화장지가 없어서 나뭇잎으로 닦았다. 의외로 잘 닦였다.
나흘째, 백수의 잔등에 올라탔다. 자세가 나왔다. 말 엉덩이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에 맞춰 엉덩이가 앞뒤로 흔들렸다. 마치 섹스하는 것 같았다. 한 손으로 고삐를 쥐고 말 잔등에서 밥을 먹었다. 폭 15센티의 말 한마리가 간신히 지나갈 절벽길에도 콧방귀를 뀌었다. 말을 타고 천천히 걸어갈 때면 형식적으로 고삐를 쥐고 있었을 뿐이다. 처음의 공포감은 사라졌다.
돌아가는 길이다.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산을 내려올수록 바람이 따뜻했다. 훈풍이 온 몸을 포근하게 감쌌다. 형형색색의 옷을 차려입고 깔깔거리며 웃는 소수민족의 마을을 지나고 물방울을 튀기면서 시냇물을 건너고 낙엽이 켜켜이 쌓인 숲속을 지나고 먼지를 흩날리며 민둥산을 거쳤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쫓아오는 가이드는 나보다 백 배는 말을 잘 타니까. 돌아오는 길은 순식간이었다. 말에 익숙해진 탓도 있었다.
오전이 끝날 무렵 도시로 돌아왔다. 가이드는 히죽히죽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말을 반납하고 트래킹 사무실에 가니 주인장 역시 히죽히죽 웃으며 날더러 '말을 무척 잘 탄다'고 가이드가 말했단다. 어억? 그건 또 뭔 소리여? 분석: 가이드는 내가 말을 잘 타는 줄 알고 있는대로 속도를 높인 것이었다.
숙소에 뜨거운 물이 안 나와 물어물어 뜨거운 물로 샤워할 수 있는 가게에서 몸을 녹이고 시내에서 맛있는 삼겹살덮밥(이름을 잊어버렸다)을 원없이 퍼먹고 푹 잤다. 다음날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는 버스를 탔다. 말은 타고싶은 만큼 탔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뭘 봤는지 모르겠다.
베이징에서 몽골로 들어가는 기차를 타고 한 시간에 40위엔 하는 '초원에서 말 달리기' 놀이는 수지타산이 안 맞았다. 고작 한 시간 타고 어떻게 호방한 대륙 기질을 일깨울 수 있을까. 관광용 멘트, 개소리지.
그래서 L.E.가 언젠가 말했던 중국 서북부 깡촌으로 기어 올라갔다. 사실은 광둥 지방에 가서 중국 음식을 배터지게 먹을 생각이었지만 안양에서 만난 중국 아가씨가 중국 최고의 절경은 구채구라고 주장했다. 두말없이 경로를 바꿨다.
말 한 마디 안 통하는 가운데, 한 중국인의 도움으로 구채구에서 호화로운 3성급 호텔에 하룻밤 저렴하게 묵고 길을 잃고 헤메다가 구채구 내의 티베탄 숙소에서 하룻밤 더 묵었다. 중국영화에서 그곳을 본 적이 있었다. 와호장룡의 배경으로 나왔던 곳이었다. 어쨌든 더럽게 추워서 얼어죽을 지경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송판에 들렀다. 목적지다. 도착하자 마자 정말 무협지에서나 볼성 싶은 광경을 보았다. 말들이 성문을 지나 다그닥 다그닥 길거리 한복판을 가로질러 갔다.
사진 왼편에 보이는 하얀 건물에서 하룻밤 묵었다. 그 맞은편에 오스트레일리아 여자와 결혼해 호스 트래킹을 한다는 가게가 있었다. 그 집에 들렀더니 대뜸 아이스 마운틴 트래킹을 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상당히 추워 보였지만, 나머지 '투어'는 숲속을 천천히 돌아다니는 것이라 재미가 없어 보였다. 아이스 마운틴 트래킹 신청서에 사인했다. 하루에 80위엔 꼴로, 세끼 식사와 잠자리, 그리고 종일토록 말 달리는 코스였다. 나오는 입구에서 이스라엘리가 아는 척을 했다. 그와 얘기하다가 내가 스노우 마운틴에 간다니까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거기 아무도 안 가는데? 걱정 말라고 그를 다독였다.
새벽에 벌벌 떨면서 기다렸다. 사전 정보가 없어 비를 피할 옷가지 정도만 챙겼다. 대략 2-30명 정도 되는 사람이 호스 트래킹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에 배낭을 통째로 들고 갔다. 음식도 상당히 많이 준비한 것 같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처음 타보는 말이라 자세가 영 불편했다.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들과 함께 5분쯤 시내를 달리다가 갈림길이 나타났다. 어? 나만 빼고 다들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그렇게 해서 나흘 동안 가이드와 나, 둘이 아이스 마운틴 트래킹을 시작했다. 그는 영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 말은 세 마리였고 한 마리의 등에 나흘 동안 먹을 식량을 실어 놓았다.
그가 말 엉덩이를 걷어차자 말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재밌어 보여서 말 옆구리를 박차로 찌르고 잔가지를 꺾어 엉덩이를 때렸다. 한 손으로 안장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 고삐를 쥐고 있었다. 고삐를 이리저리 틀어봤지만 말은 제멋대로 달렸다. 순전히 지 멋대로 왔다리 갔다리 했다. 몇번 인가 떨어질 뻔 해서 식은땀이 흘렀지만 용케 중심을 잡았다. 가파른 비탈길을 굽이굽이 올라갔다. 첫날은 순조롭게 끝났다. 해발 2000미터 가량?
캠프 사이트에 당도해 천막을 치고 음식을 준비했다. 속으로, 이건 관광상품이야. 고생이란 있을 수 없어. 라고 생각했다. 가이드의 눈치를 보아하니 너무 일찍 도착한 것 같다. 오후 두 시 였다. 밤이 되자 기온이 현저하게 떨어져 장작불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덜덜 떨면서 잠이 들었다.
아침에 냇가에서 세수를 하려니 뼛 속까지 시원했다. 정상에서 눈이 녹은 물이 시내를 이룬 것이다. 갑자기 내린 비로 물이 불어 여차하면 세수하다가 발을 삐끗해 떠내려 갈 것 같았다. 결심했다. 세수... 이젠 하지 말자.
온 몸에 말 냄새가 배어 더 이상 말똥 냄새가 나지 않았다. 말에게는 백수(white beast)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후 나흘 동안 내가 백수에게 한 말은 전부 욕지기 뿐이었다.
첫날, 이놈이 백수다. 어쨌거나, 누가 날더러 백마 타 봤냐고 물으면,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꾸할 수 있다.
갑자기 길이 가파라지고 한나절이 되어도 기온이 오르지 않았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태양빛은 강렬했고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급격히 체온을 떨궜다. 얼굴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추워서 오금을 펼 수가 없었다. 가이드가 비가 올 것 같다는 시늉을 하며 속도를 내려고 백수의 엉덩이를 자꾸 걷어찼다. 성질이 나서 무진장 겁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껏 달렸다. 경사가 적어도 40도 가량은 되는 커다란 산맥의 산허리에 15cm 폭의 길 사이를 정신없이 달렸다. 왼편으로는 끝이 까마득하게 보이는 낭떠러지였다.
광경은 이루 말할데 없이 공포스러웠다. 조금만 삐끗하면 말 잔등에서 떨어져 추락할 것 같았다. 가이드는 내 발이 등자에 너무 깊이 박혀 있는 것을 우려했다. 생각해보니 말에서 떨어질 때 등자에 발이 걸려 있으면 발목이 쉽게 부러질 것 같았다. 고삐를 양 손으로 잡고 그것도 모자라 안장 손잡이를 함께 잡은 채 몹시 볼썽 사나운 모습으로 벌벌 떨면서 절벽을 지나갔다.
그날도 너무 일찍 캠핑 사이트에 도착했다. 말 타는 것이 점점 무서워져서 도저히 안되겠기에 걱정하는 가이드를 캠프에 남겨두고 말을 몰았다. 연습이라도 좀 해볼 요량이었다.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면서. 얼어죽겠는데 말은 뜻대로 안 움직이고 절벽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할 때마다 더럭 겁이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파곤죽이 되어 캠프로 돌아와서 어제와 같은 식사를 했다. 밀가루 반 포대, 쌀 주머니 하나, 오이 스무개, 호박 몇개, 찻잎, 이게 식재료의 전부였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함께 밤이 찾아왔다. 장작을 더 때려고 도끼를 들고 설치는 내 모습이 가이드 눈에는 몹시 가련하게 보인 것 같았다.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쳤다. 그래서 장작으로 쓸만한 나무가 없었다. 도끼를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생나무를 찍었다. 설상가상으로 고산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해 머리가 아프고 구역질이 치밀었다. 생나무 연기에 거의 훈제되다 시피 하고 머리는 아파죽겠고 음식은 쌀죽과 밀가루 빵 뿐이고 장작불 곁을 떠나면 입김이 얼어붙었다.
가이드에게 돌아가자고 사정했지만 그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강을 따라 한참 가다보면 조그만 마을이 있다고 손짓발짓으로 가르쳐 주었다. 말 타고 강을 따라 삼십분쯤 달렸다. 뭐라도 먹고 싶었다. 가게에서 주인장이 권해주는 맥주를 들이켰다. 가게에 맥주를 보관하기 위한 냉장고는 필요없었다. 맥주에는 살얼음이 끼어 있었으니까. 맥주를 몇 병 사서 주머니에 우겨놓고 지나가는 동네 아줌마한테 생 닭을 한 마리 사서 전속력으로 캠프로 달렸다. 맥주다! 기쁨에 겨워서. 뜨거운 물에 닭을 담궜다가 꺼내 털을 뽑고 장작불에 구운 다음 가이드와 함께 히히덕거리며 찌그러진 양철 그릇에 맥주를 따라 주거니 받거니 마셨다. 구워먹은 닭 때문에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비가 온다... 죽겠군.
머리는 아프고, 추워 죽겠고, 정강이 사이는 쑤시고, 밤새 뒤척였다. 아침부터 머리가 아파 타들어가는 목구멍으로 두통약을 두 알 삼켰다. 간밤의 비로 텐트와 침구 전부가 물에 젖었다. 텐트는 방수가 아니었다. 텐트를 걷으려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거웠다.
아침 메뉴는 변함없었다. 한 조각만 먹어도 목이 메이는 밀가루 빵을 꾸역꾸역 삼켰다. 이거라도 안 먹으면 허기져서 쓰러진다. 어제는 오이 볶음, 오이 국, 호박국 이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오이찜이 나왔다. 점심 메뉴가 기대된다. 오이튀김이었으면 좋겠다.
백수에게 짐을 얹고 출발 준비를 했다. 짐 무게 때문에 휘청거린다. 간밤의 비로 손가락이 얼어붙어서 고삐를 제대로 잡기가 힘들었다. 다시 가랑비가 왔다가 햇볕이 쨍쨍 내리 쬐었다. 구름은 거센 바람 때문에 신속하게 움직였다. 오버 트라우저를 벗어 후드를 머리에 덮어 쓰고 소매를 묶어 망토처럼 걸쳤다. 선글래스를 끼었다. 보는 이도 없겠다, 앰버의 왕자처럼 망토를 걸치고 헬라이딩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3일째가 되니 백수한테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백수는 피골이 상접한 흰색 말이었다. 이제는 한손으로 고삐를 쥐었고 남은 한 손으로 칼을 쥐었다. 칼? 어젯밤 불가에 앉아 도끼로 나무를 갈아서 길다랗고 두꺼운 회초리를 하나 만들었다. 이틀 동안 나를 우습게 보고 말 안 듣는 백수 새끼가 딴전을 피우면 가차없이 휘둘렀다.
오르막길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내리막길에서는 말이 발이 꼬여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떨어지면 끝장이다. 절벽 밑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는데 30분은 족히 걸릴 것 같다. 시체는 아마 너덜너덜하겠지? 배가 터져서 대장이 길죽하게 뻗어나와 다시 온 몸을 칭칭 감고? 따라서 비지땀을 흘리면서 죽을 똥 말 똥 기어 올라가는 백수에게 무자비하게 굴었다. 덕택에 평지에서는 시속 5-60킬로미터의 속도로 쾌속 질주가 가능했다. 말 그대로, 망토를 휘날리면서.
3일째도 너무 일찍 도착했다. 아침 6시에 출발해서 2시간 만에. 가이드가 손짓 발짓으로 정상에 가보겠냐고 물었다. 댁은? 자기는 안 간단다. 말을 타고 산 비탈을 힘겹게 힘겹게 올라갔다. 백수는 제트 추진 방구를 뀌면서 없는 힘을 보탰다. 그놈은 아무데나 똥을 쌌다. 길은 맞게 올라온 것일까?
눈밭이 나타났다. 고도는 3000m쯤 되는 것 같다. 산 꼭대기에서 눈을 움켜 쥐었다. 눈덮인 산자락이 발 밑에 깔려 있었다. 도저히 인간이 살만한 곳은 아닌 것 같다. 톨킨의 소설에나 나올법한 광경이었다. 여태까지 개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백수가 비지땀을 흘리며 푸르럭거렸다. 놈의 몸에서 올라온 김은 즉각 바람에 휩쓸렸다. 망토가 펄럭였다. 막대기를 치켜들고 힘차게 소리 질렀다. 우어어어!!
내려오는 길에 먹구름이 삽시간에 끼더니 엄청난 우박이 쏟아졌다. 엄지 손가락 만한 우박이 사정없이 내리 꽂혔다. 백수는 히히힝 거리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우박에 맞으니 어깨와 머리가 되게 아팠다. 우박에 맞으니까 도심에서 머리를 싸메고 하던 여러 실존적인 고민들이 상당히 부질없어 보였다.
우박에 맞아 죽고 싶지 않아 마구 달리다가 근처에 보이는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으로 급히 피신했다. 나무를 얽기섥기 엮어 지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장작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눈알을 반짝였다. 따뜻하다... 산막의 늙은이가 야크차를 권했다. 야크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시종 낄낄거리다가 알았다는 듯이 뒷참을 뒤적여 자랑스럽게 술을 꺼내 들었다.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 목구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어, 좋은데? 담배를 나눠 피우고 독주를 마시며 우박이 멎기를 기다렸다. 술을 좀 과하게 마셨다. 우박이 잦아들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난롯가에 떨어지며 치직치직 소리를 냈다.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초가집의 이가 들끓는 늙은이와 껴안고 기분좋게 헤어졌다.
오이 볶음을 아홉끼나 먹으니까 헛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밤하늘의 별들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선명하게 반짝였다. 그 사이로 거친 바람이 가느다란 선을 그리며 살갖을 찢어놓을 듯이 지나갔다. 마치 대기 중에 마녀가 떠돌며 생명을 희롱하는 것 같았다. 3일 동안 숲속에서 일을 봤다. 화장지가 없어서 나뭇잎으로 닦았다. 의외로 잘 닦였다.
나흘째, 백수의 잔등에 올라탔다. 자세가 나왔다. 말 엉덩이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에 맞춰 엉덩이가 앞뒤로 흔들렸다. 마치 섹스하는 것 같았다. 한 손으로 고삐를 쥐고 말 잔등에서 밥을 먹었다. 폭 15센티의 말 한마리가 간신히 지나갈 절벽길에도 콧방귀를 뀌었다. 말을 타고 천천히 걸어갈 때면 형식적으로 고삐를 쥐고 있었을 뿐이다. 처음의 공포감은 사라졌다.
돌아가는 길이다.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산을 내려올수록 바람이 따뜻했다. 훈풍이 온 몸을 포근하게 감쌌다. 형형색색의 옷을 차려입고 깔깔거리며 웃는 소수민족의 마을을 지나고 물방울을 튀기면서 시냇물을 건너고 낙엽이 켜켜이 쌓인 숲속을 지나고 먼지를 흩날리며 민둥산을 거쳤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쫓아오는 가이드는 나보다 백 배는 말을 잘 타니까. 돌아오는 길은 순식간이었다. 말에 익숙해진 탓도 있었다.
오전이 끝날 무렵 도시로 돌아왔다. 가이드는 히죽히죽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말을 반납하고 트래킹 사무실에 가니 주인장 역시 히죽히죽 웃으며 날더러 '말을 무척 잘 탄다'고 가이드가 말했단다. 어억? 그건 또 뭔 소리여? 분석: 가이드는 내가 말을 잘 타는 줄 알고 있는대로 속도를 높인 것이었다.
숙소에 뜨거운 물이 안 나와 물어물어 뜨거운 물로 샤워할 수 있는 가게에서 몸을 녹이고 시내에서 맛있는 삼겹살덮밥(이름을 잊어버렸다)을 원없이 퍼먹고 푹 잤다. 다음날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는 버스를 탔다. 말은 타고싶은 만큼 탔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뭘 봤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