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시다 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안국역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마침 자기가 인사동의 왕이라고 주장하는 거지 아저씨가 담배 한 대 달라길래 소주 한 잔 하자고 꼬셨다. 그가 번 5000원을 빌려 소주 두 병과 안주꺼리를 사와 마셨다. 맛있는 소주가 왔는데 옆에 누워 자고 있는 아저씨는 걷어차도 도무지 일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컵은 없소? 날더러 병나발을 불란 말이오? 제기랄... 하는 수 없이 컵을 사왔다. 날더러 노래를 부르라길래 노래를 불렀더니 지나가던 행인이 이거 마시라면서 콜라를 내려놓고 황급히 사라졌다. 어느 나라에 가서나 거지 취급을 받아왔는데 한국이라고 별 다를 건 없었다. 거지 아저씨는 '자, 이제부터 시작이야'라는 말을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반복했다. 뭐가 시작이에요? 나보다 네 살 많다. 동생, 노래 한 곡 더 불러보쇼. 아저씨나 불러요. 노래를 참 못했다. 내가 노래하면 콜라가 나오지만 그가 노래하면 아무 것도 안 나왔다. 이렇듯이 우리 거지 세계에서도 내공의 차이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