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에 갔다. 몇년 만이라 깜빡 잊고 있었다. 표에 표시된 출발시각은 무시해도 된다는 점을. 차에서 내리자 자극적인 공기 냄새가 났다. 마약 빨듯이 콧속으로 깊이 빨아들였다. 이 공기맛이란... 진짜 공기맛이 나는 공기란... 게다가 더럽게 추웠다. 기억 속의 춘천도, 실존하는 춘천도 늘상 추웠다. 심리적으로 -10도가 제대로 유지되었으므로 머리도 차갑고 심장도 차가웠다. 오버했나?

자다 깨보니 지리가 생경하다. 전화를 걸기 전에 거리를 조금 걸어보기로 했다. 2년 만에 내려왔다. 지나가던 여자가 길을 물었다. 왜 묻지? 나도 모르는데. 내가 모른다는 점을 그는 몰랐다. 그리고 여자들은 항상 길에서 헤메다녔다. 나도 모르지만 어느 도시에 떨어지건 누군가 내게 길을 물었다. 미안한 표정을 짓고 정직하게 모른다고 말할 정도로 철이 들었다. 몸에는 아랍인의 피가 10%, 남아시아인의 피가 30%, 인디안의 피도, 벵골의 피와 몽골의 피와 메스티소의 피 역시, 그리고 투르크 피도 조금쯤 섞여 있었다. 코카서스만 빼고는 다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도 자기정체성 문제로 고민한 적이 없다는 것은 어지간히 뻔뻔해서가 아닐까? 그런데 유럽의 피가 흘러줘야 진정 국제화가 되는 것은 아닐까? 국제화 시대에 발 맞춰 나가는 것은 국지적 최적화 만큼이나 피곤한 일이다. 자기정체성에 관한 진지한 고민: 언젠가는 내가 모르페우스라고 불리울 날도 있을 것이다. '천식은 커녕 무좀 조차 걸리지 않는 지독한 파에드로스', '그대의 꿈을 정녕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 모르페우스', 뭐 그런 식으로. 머리를 한 대 세게 쳤다. '진짜 소박하고 사심 없는 루크' 나 '갸날픈 새마음 루크'가 더 마음에 들었다. 꼴까타(캘커타)에서 '나를 태워 세상을 밝히는 모임'에 속해 있다는 양반을 만났다. 그 모임이 잿더미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 같아 보였지만 '나를 태워 세상을 밝히는 루크'도 일단은 멋있어 보였다. 자기 정체성에 관한 고민이 생각보다 재밌네? 나는 뭘까? 알아서 뭐할까?

청구서적에 들어가 책을 보는 척 했다. 스키즈매트릭스나 안티 아이스나, 아니면 멋진 징조들 같은 책은 자기정체성에 관한 고민보다 재미가 없었다. '진짜 소박하고 사심 없는 루크'는 멋진 징조들이 전혀 웃기지가 않았고 심지어 읽다가 졸기도 했다. 엄마가 책을 고르는 동안 아이가 계단에서 깡총깡총 뛰고 있었다. 연인들이 책을 고른다. 책들은 분류가 잘 되어 있었다. 마음에 꼭 드는 분류였다. 매장 직원은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지금이야 상당히 작고 아담하게 여겨지는 청구서적이 어린 시절 세계의 바깥 경계선이었던 것 같다. 음... 여기서 책을 몇 권이나 훔쳤더라? '세계로부터 지식을 훔치고 꼬불쳐 먹은 후 시치미를 떼고 있는 루크'도 썩 괜찮아 보였다.

거리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니 하오마, 나도 모르게 인사가 튀어 나왔고 그들 역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인삿말을 건넨다. 왜 이렇게 중국인이 많은걸까? 가을연가인지 겨울연가인지 하는 드라마가 성공하면서 찾아온 사람들이란다. 무슨 드라마이길래 중국인들의 심금을 울렸을까? 중국인들에게 충고하고 싶다. 막막하게 안개가 낀 새벽에 음주 상태로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걸어봐야 이 도시의 마술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다고. 그외에는 좆도 아니고. 안개 속을 헤메면서 실핏줄까지 흘러가는 이국의 피와 자기정체성에 관해 고민해 보는 것도 낭만적일 것 같다. 생각해보니까 나는 이기종간 호환성이 뛰어난 제품이지 않을까 싶었다.

애들이 꽥꽥 소리를 지르며 나다니는 거리에서 삼십분을 떨다가 상기형을 만났다. 닭갈비를 먹으러 가잔다. 닭갈비라... 그것도 명동 한복판의 맛 없는 닭갈비집에서?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이 더 좋지 않을까... 을씨년스러운 밤이다. 상기형 집에서 한 잔 더 했다. 보헤미안 랩소디를 틀어놓고 나는 춤을 추었고 두 형은 기생집에 가야 한다며 방바닥에서 육박전을 벌이고 있었다. 십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늘 강아지처럼 싸웠다. 내가 술 먹고 어떻게 된건지 기생집 얘기에 눈알을 반짝였다나? 그럴리가. 대자로 뻗어버린 상기형을 질질 끌고 가 잠자리에 누였다.

깨어보니 해가 지고 있었다. 황당했다. 이외수의 책과 양주병이 굴러다니는 방이었다. 책 제목이 '너를 향해 흔들리는 순간?' 이었다. 그는 자기 책에 어떤 기사를 인용하면서 춘천의 안개가 심각하게 오염되었고 조금만 더 지나면 사람들이 안개에 질식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개속에서 몸부림을 치면서 질식사하는 사람들의 어렴풋한 실루엣을 상상했다. 모세의 불길한 저주처럼 안개는 가가호호로 파고 들어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잠재운다. 거리는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 속이 느글거리는데 쟈스민 차를 마시니 더 느글거렸다. 술 먹은 다음날 쟈스민 차 같을 것을 내오는 것은 그다지 우아하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손가락으로 가르킨다. 저기. 응? 저기, 네가 살던 곳. 응. 내가 살던 곳. (그리고 이 길은 내가 도둑 고양이를 죽여 내장을 꺼내 길바닥에 늘어놓았던 곳) 우리는 택시에서 내리면서 택시 기사에게 공손하게, 잘 먹었습니다 라고 인사했다. 광철이형을 만나 해장국을 먹으러 갔다. 전날 먹은 술 때문에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우리는 멍하니 앉아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다 큰 어른들이 식당에 앉아 입맛을 쩝쩝 다시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은 초현실적이었다.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 해협이 잘 내다 보이는 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 모포를 뒤집어 쓴 채 해협 건너편에서 쏘아올리는 신년맞이 불꽃 놀이를 보았다. 좋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기분이 나아졌다. 이게 백번째 블로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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