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ps

잡기 2003. 12. 27. 16:10
사건없이 냉정하게 하루가 지나갔다. 집에서 허겁지겁 나와 점심을 때워야겠기에 커다란 마트에 들러 '진짜 딸기 우유'와 '100% 오렌지 쥬스'를 집었다. 빵을 사려고 빵집에 들러 금액을 치르고 미로같은 가게 안을 이리저리 헤메다니다 길을 잃었다. 빙산처럼 여기 저기 좌초된 아줌마들 사이를 귀신같이 피해 나온것 까지는 좋은데 어느새 계산대를 지나 가게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돈을 못 냈다. 후회해도 소용없다. 지난 일은 잊어버리자.

세 종류의 막걸리를 섞어서 먹었더니 머리가 아팠다. 24일 저녁 거리에는 안개가 깔렸다. 안개 속에서 연인 유령들이 오락가락했다. 25일 저녁에는 술을 마셨다. 머리에 허연 케잌을 묻힌 채 반 팔 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녔다. 맥주집에서 외로워 보이는 마담과 종업원과 술을 마셨다. 나 같이 별볼일 없는 놈 때문에 자리에 동석한 것은 아니었다. 전화를 안 받아서 황가를 내버려두고 달아났다. 마음 속으로 황가가 마담 누나나 예쁘장한 종업원과 잘 되길 빌어줬다. 23일 저녁에는 술을 마셨다. 22일 저녁에도 아마 술을 마셨을 것이다. 21일부터 주욱 마셨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전에도 줄곳 술을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쿵쿵 거리고 햇살에 눈이 부셨다.

서울역에서 하는 벼룩시장에 갔다. 책을 주니까 이름을 물었다. 파에드로스라고 대꾸했다. 말하자면 행책 사장님을 놀렸다. kbs가 바로 그 앞에서 카메라를 흔들어대는 바람에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몰려 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전날 먹은 술 때문에 머리가 쿵쿵 울리는 시발스러운 상황이라 바로 자리를 떴다.

26일 저녁에 만난 y님은 맛이 가서 내가 여자를 '또' 갈아치웠다고 큰소리로 떠벌리며 즐거워했다. 굳이 번역하자면 루크는 메뚜기, 정말 나쁜 놈이다. 정도? 그러더니 자기가 여자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말했다. 왜 횡설수설 하는 거야. 왠지 그는 여자 문제로 고민이 많아 보였다. 갑자기 선식 따위를 먹고 당치도 않은 다이어트를 하는 걸 보면. 그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데이트를 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에게 홀딱 반할 정도로 예쁘고 타블라 라사 같은 여자와 사귀길 빌어줬다.

파장 분위기에 휩쓸려 나왔다. 인사동의 다른 술집으로 향했다. 가게 문을 걸어놓고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 아가씨는 네팔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주모는 2년 동안 한국에 살았다는 캐나다인이(그는 기자다) 한국 문화에 관해 썰을 푸는 동안 줄곳 논쟁에서 밀리고 있었다. 참견하다가 혀가 꼬여서 말이 잘 안 나왔다. '선(禪)'자를 잘못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글자는 남자와 여자가 붙어서 만사가 잘 되가는 호(好)자 였다. 도대체 어떤 바보가 남자와 여자가 붙어있는 글자를 선으로 가르쳐 줬을까? 선 자야 말로 예술이고 인생이고 어쩌고 저쩌고 떠벌렸다. 틀렸다. '호'자다. 2년 동안 한국에 살더니만 자기가 옳다고 죽어라고 우겨대는 것이 취해서 주정을 부리는 한국인과 똑 같았다. 어휴. 집에 돌아오니 4시가 넘었다.

매일 술이나 마시고 있는 사이에 이란의 밤(Bam)에서 발생한 강진으로 2만여명이 죽었다. 도시 인구의 1/4이 죽었다. 전직 영어교사였던 수염난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도 무너졌을 것이다. 할아범은 한국인을 싫어했다. 할아범은 능력부족으로 나까지 싫어하진 못했다. 그는 이중인격자였고 나는 악당들과 있을 때면 편안함을 느꼈다.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한 저녁에 초인종을 부수고 시치미를 뗐다. 어느날, 지금은 죽었을지도 모르는 그 할아범이 갑자기 재수없다고 느낀 두 한국인 아가씨를 고생스럽게 다른 게스트 하우스로 데려다 주기도 했다. 그중 한 아가씨는 이란 남자들에 대한 심한 불신, 증오심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엉덩이에 손을 댄 놈은 과연 몇 놈이나 되었을까? 그 오아시스 도시에서 대추야자를 처음 봤다. 벽돌에 무언가를 새겨 놓았다. 한창 복원 중이던 밤 성의 일부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지진으로 밤 성도 무너진 것 같다. 밤 성의 귀여운 찻집도, 거리의 케밥 가게도 다 무너졌을 것이다. 뭐 어차피 폐허 였으니까 한번 무너지나 두번 무너지나 매한가지임에도, 아쉬움이 남았다.


기술자, 특히 프로그래머는 뭐 하는 사람인가? 옛날에 봉당 아저씨는 기술자란 문제 해결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공감할 수 있는 정의이고 무엇보다도, 더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프로그래밍, 기구물 설계, 회로 디자인, 자동차 제작 등은 학습을 통해 지식을 얻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세계에서는 누구나(심지어 기술자 마저도 근무 시간 외에는) 하지 못한다. 문제 해결 능력은 두 가지 범주로 구분될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는 문제의 성격을 정의하고 타당한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 문제를 정의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무한히 다양한 해법(구현)이 나온다. 학습하고 선험된 패턴, 논리적 일관성,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기술적 창의력, 집요한 똥고집, 내키지 않지만 굳이 덧붙여야 한다면, 미적 인식, 직관 등등을 사용한다. 두번째는 이미 만들어진 구조물과 구조물을 이루는 뼈대를 해석하는 것이다. 리버스 엔지니어링, 해킹, 디버깅. 순발력, 집중력, 상상력 등등등... 후자는 전자보다 피곤하다. 만일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다면? 받는 보수에 역비례해서 갖은 핑계를 늘어놓고 기간을 무한대로 연장하다가(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용어로 횡설수설하다가), 잘 안 먹혀 들어가면 하는 수 없이 문제를 해결한다. general problem solver로서의 프로그래머는 프로그래밍 뿐만이 아니라 실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문제 해결에도 제한된 도구로 비슷한 경로를 밟아 문제에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그게 문제다.

언젠가 받았던 핸드폰 메시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y님에게 바친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