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가난

잡기 2004. 1. 7. 01:36
겸손함은 스스로 학습하고 깨달아야 아는 것이다. 누가 몇 마디 한다고, 책에서 읽었다고 아는 것은 아니고.

악당으로 지내면 품위가 유지되고 생활비가 적게 들 뿐더러 여자애들을 사귀기에도 좋다. 악당인 동안에는 이유없이 싫어지는 사람도 없고 인간 관계는 사막처럼 깨끗했다.

착하지도 않고 악당도 아닌 사람은 양 쪽의 호소 또는 논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갈대처럼 흔들리는 것 같다. 세상을 보잘 것 없고, 무질서하고, 지옥처럼 재밌게 만드는 사람들은 그래서 착한 자도 악한 자도 아닌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악한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본 붉은 돼지는 지루했다. 배경이 되었던 '장소'를 부러워 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장소에서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가 되겠다'고 말하는 돼지를 통구이 바베큐 해 먹으면 맛있을 것 같았다.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수함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지하상가등 각 이동통신사의 대리점이 몰려있는 곳에서는‘휴대전화기 공짜’라는 선전 문구를 수없이 볼 수 있다' 라고 했지만, 안 보였다. 혹시 약정할인제를 의미하는 것일까? 번호이동성 때문에 단말기 가격이 내린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단말기에서 정확하게 뭘 바라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인지 단말기 구매에 돈을 쓰기가 어려웠다. 검소한 편이라서 많은 기능을 바라지 않지만 정리나 해 보자.

* 카메라 - 필요없다.
* MMS - 카메라가 필요없으니 역시 필요없다.
* 40/64화음 - 필요없어 보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유용해 보이기도 했다. 전화 받기 싫은 곳에서 걸려온 전화의 벨소리를 좋아하는 음악으로 설정해 놓으면 전화가 걸려 오는 동안 아름다운 선율을 즐길 수 있을 테니까.
* PIMS 기능 - usb로 전화번호부를 동기시켜야 하는데, 그걸 import/export할 방법이 있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usb 케이블은 별도로 구입하는 듯.
* IR - pda 대신 서브노트북을 들고 다니므로 IR 동기화를 사용할 기회는 아마도 없을 것.
* 자바 가상 머신 - 딱히 써 먹을 구석이 안 보인다.
* 무선랜 - 있으면 좋겠지만 그 비좁은 화면에서 뭘 할 수 있을지. 노.
* 로케이션 알람 - 있으면 좋겠다. 내가 아는 모빌폰 중 이 기능을 가진 것은 없다.
* gps - 필요한 것은 위도, 경도, 고도. odo meter, 스피드 메터 정도.
* 나침반 - 메카를 가르키는 나침반을 내장한 모빌폰이 있는 걸로 아는데...
* usb memory - 남는 메모리에 인증 키와 몇몇 문서 정도는 가지고 다니게.
* pda - 필요없다. 조그만 액정에서 뭘 한다고...

며칠 전 yopy3700+무선랜 중고가 30만원에 올라온 적이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금쪽 같은 기회였지만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냈다. 내가 정말 핸드폰에 바라는 것은 mysql과 웹 서버를 운영할 수 있는 yopy류의 pda폰이 아니라 전화를 받고 전화를 하고 시계가 제대로 보이는 것이다. 내 핸드폰은 지금 그 세 가지가 잘 안 된다.

최근 내 모빌폰은 지나가는 전파를 가로채 스스로 업그레이드 했다. 샤워 중에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를 듣고 뛰쳐 나오면 이미 자기가 받은 후 끊어버렸다. '조금 있다가 다시 해 주세요'라고 한 마디만 해 줬더라면 그렇게 물방울을 뚝뚝 흘리면서 허무하지는 않을 것이다. 수신목록에 전화번호가 남아야 하지만 그것 마저도 감쪽같이 지워 버렸다. 내가 전화를 걸면 자기 멋대로 끊었다. 나름대로 통화료를 걱정해 주는 것 같았다.

임포스터를 봤다. 필립 케이 딕의 신비주의에 그닥 관심이 없는 탓인지 딕의 소설을 재밌게 읽어본 적이 없다. 딕은 죽어라고 정체성 문제를 건드리지만 한국인은(아니면 나만?) 구조적으로 시끄러운 나라 태생이라 자기 정체성에 관해 고민할 시간이 없거나, 심각한 문제가 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싶었다. 극적인 영화에서처럼 복선과 미스테리의 소재로 삼기에는 부적합해 보였다. 어릴 때는 어린 시절 나름으로 혼자 내버려두는 사람이 없었고 청소년기에는 뭔가 신나는 일을 찾아 왜 그랬나 싶을 정도로 자발적으로 떼거지로 몰려 다녔고 나이 들어선 일 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건 팝업 창으로 띄워 되돌아볼 수 있는 영속적이고 친근하고 자기치유적인 과거의 풍경이 있고 그 사이를 동앗줄처럼 꽁꽁 엮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기 정체성에 관한 고민은 친근한 사람이 없거나 아무 때나 불러낼 수 있는 이가 없는 사람이 하는 고민이 아닐까 싶었다. 기분이 몹시 꿀꿀하고 정서적으로 심하게 시장기를 느낄 때 옆에서 밥을 사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라면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흠. 그럴 때는 책을 읽으면 된다.

정체성은 그렇다치고 이 세계TM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일 정도는 해 봤다. 하나 예를 들자면, 인류의 50%가 가난TM과 기아TM에 시달리고 그것을 책이나 TV가 아닌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행복하게 살아가야 하는가 따위. 아랍에서 대답을 배웠다. 인샬라. 인샬라의 댓구도 배웠다. 마샬라.

인류의 제반 문제에 관한 해법은 간단하다. 기회를 빼앗지 않으면 된다.

며칠째 밤마다 농심 튀김우동 컵라면을 먹었다. 오늘은 포트에 남아있는 둥글레차를 다시 끓여 넣고 먹었다. 면이 전보다 부드러워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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