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네테스

잡기 2004. 4. 26. 02:57
longest journey의 수중 퍼즐에서 막혀 한참을 헤메다가 게임부머에서 워크스루를 뒤져 간신히 해결했다. 이런 좋은 사이트가 있었다니... 무엇보다도 머리가 딸렸고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도 약했다. 일은 해야겠고 일 하다가 자꾸 생각이 나서 찹터 10 이후부터는 막히는 것이 있으면 무조건 워크스루에 의존했다. 정확히 15분 만에 세 찹터를 주마간산격으로 지나갔고 만사가 순조롭게 처리되는 시시껄렁한 엔딩을 보았다. TLJ의 대사 시스템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예전 어드벤쳐 게임은 잘못된 대사 한 마디로 그에 상응하는 값비싼 댓가를 치렀다. TLJ에서는 무슨 댓구/질문을 하던(게다가 참 착하게 말해서 신경을 돋군다) 게임은 게임대로 흘러갔다. 주인공이 죽을 리가 없는 그 플롯은 대체로 기분이 상하는 것이었다. 순서대로 움직여 몇 가지 해결책만 찾으면 되었다. 이김에 사이베리아, 사이베리아2를 다운 받았는데 할까 말까 생각중이다. 평가를 보니 tlj가 20세기 마지막 걸작 어드벤쳐라면 사이베리아는 21세기를 여는 어드벤쳐란다. 그런데 어떤 점 때문에 걸작이란 말일까? 궁금하군. 99.9%의 게임이 쓰레기인데 개중 좀 괜찮다는 게임을 걸작이라고 하는걸까? 아니면 하향 평준화가 될대로 되어 버린(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게임들이라 적당히만 갖추면 걸작이 되는걸까? 게임은 여전히 소설, 그것도 잘 만든 소설을 못 쫓아오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데...

얼음과 불의 노래: JRR 마틴이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0년까지 9부작으로 완결하겠다며 갖은 늑장을 부리고 있는 이 판타지는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모든 판타지에 대한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재검토하게 만들어 주셨다. 얼음과 불의 노래 만큼 지저분하고 메스꺼운 기사들이 등장하는 소설도 없었고, 등장하는 거의 모든 여성 캐릭터가 씨앗이나 받는 암캐로 출연하는 소설도 없었다. (아마 일천한 판타지 경험 탓이겠지만) 그래서 판타지에서 항상 부족하게 느꼈던, 어떤 부분들을 퍼즐의 조각을 맞추듯이 채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얼음과 불의 노래를 앰버 시리즈에 비견하기도 하는 모양인데 앰버 시리즈에서 보이던 느끼함(일종의 메스꺼움) 같은 것이 안 보여 아주 좋았다. 해가 갈수록 젤라즈니는 밥맛 떨어진다. 마음에 드는 캐릭터는 자이메와 산도르다. 성정이 변한 탓인지 밑바닥에서 꿋꿋이 기어 올라가는 놈들보다는 추락하고 망가지고, 시궁창에 굴러 다니면서 버텨내는 놈들이 반갑다. 하여튼 소설에서는 거의 모든 캐릭터들이 말 그대로, 망가졌다. 예외가 있다면 길고 가늘게 사는 재수없는 놈들과 대너리스 정도다. 마틴이 티리온에게 보이는 변태스러운 애정이 잘 이해가 안가지만 대너리스는 왜? 그녀는 왜 망가뜨리지 않는 것일까? 진행속도가 염장 지를 정도로 느리고 캐릭터가 너무 많아 태반의 하찮은 귀족들의 이름을 기억할 수 조차 없다. 3부가 말 그대로 갑자기 끝나 버려 맘 상했다. 원서로라도 4부를 읽어보려니 아직 안 나왔다. -_-

플라네테스: 만화책으로 나온 것을 3권까지 보고 여행을 갔다. 우주 관련 코믹 중에서 가장 재미있다면 재미있는 것이다. 우주는 사랑으로 넘쳐야 마땅하고, 우주비행사도 샐러리맨이라는 '진중한' 깨달음을 준 만화책이었다. 정크SF에서 이원님이 쓴 글을 보고 pdbox에서 26편을 이틀에 걸쳐 다운 받았다. 26편까지 보고 나니, 어, 이거 만화책으로 다 본 내용이네? 만화책이 낫잖아?

그 와중에 사무실에서 작업하던 하드 디스크가 날아갔다. 당황스러웠다. 멀쩡한 하드 디스크가 날아가다니... 작업하던 소스는 백업을 늘 받아두니까 별 문제가 없었지만... 때마침 컴파일러를 업데이트하고 대단히 많은 양의 코드를 새로 작성하여 테스트를 남겨둔 참이라 한 두 가지 버그를 잡기 위해 순전히 펜과 종이만 사용해서 갖가지 가설 내지는 억측을 만들고 디버깅 했다. 옛날 옛적 모니터가 없고 키보드만 달랑 달려 있는 타이프라이터 콘솔에서 작업하던 시절 생각이 났는데, 약 한 시간, 나름대로 끔찍한 시간이었다.

코드 프리징은 딱 두 번 밖에 안 했다.

하드 디스크가 날아가 금요일 저녁을 공쳤다. 하는 수 없이 하드 디스크를 가방에 넣었다. 집에 가서 고쳐야 할 것이다. 저녁에 황가와 아내를 만나 어떤 조그만 바에서 맥주를 마셨다. 60대 할아버지와 30-40대로 보이는 손님들이 알음알음으로 찾아온다는 곳인데 손님들 사이에 의가 상할 염려 때문인지 정치 얘기를 일절 하지 않는 할아버지들이 좋았고, 우리들더러 20대를 보니 풋풋해서 좋단다. 풋풋하단 말인가? 아아... 우리중 누구도 우리가 30대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드문 단결력이었다. 아저씨들과 마담 누나가 각각 한 차례씩 술을 사줬다. 진실을 매몰차게 외면하면, 이 바닥의 풋풋함에는 즐거운 보상이 따르는 것 같다.

플라네테스: 내가 만약 목성에 가겠다고 핏발 선 눈으로 우기면 아마도 아내가 따라 나설 것이다. 나 혼자 좋은 곳에 가서 혼자만 재미 보는 꼴은 못 봐준다는 맨탈리티다. 아내에게 사주고 싶은 라디오는 쿠바 AM 채널과 단파 꾸란 방송 마저 들리는 멀티밴드 라디오지, GaAs FET를 부적절하게 낭비하는 명품 라디오는 아니다. 아내는 라디오보다는 거대 쿠션을 선물로 사달라고 하는데, 내가 말 안들으면 대신 두들겨 팰 뭔가가 필요한 것 같다. 곰곰히 저울질해보니 그 편이 훨씬 단가가 싸게 먹히고 실용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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