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탄신일

잡기 2004. 5. 26. 22:58
모처럼 느긋하게 보낸 하루.



자다가 영감이 떠올라 잊기 전에 집에 남아있는 찌꺼지를 활용해 우동을 만들기로 했다. 가츠오부시 국시장국(?), 멸치, 다시마, 새우를 냄비에 넣어 무조건 끓이고, 오뎅을 데친 물에 30분이나 거리를 헤메 간신히 구입한 우동면을 삶고 얼음물에 밀가루를 풀어 쑥갓으로 덴뿌라를 만든 다음, 오뎅, 게맛살(?), 쑥갓, 덴뿌라를 고명으로 얹고 끓인 국물을 부었다. 돈까스도 곁들였다. 맛있게, 배불리 먹었다. 열반한 부처 부럽지 않았다.



고구마를 사와 고구마 튀김을 만들어 간식으로 먹었다. 어떤 식재료에 관해서도 그 누구도 나쁜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을 최근에 깨닫고 흠칫 놀라워 했다. 예를 들면, 고구마는 섬유질을 많이 함유하고 비타민 뭐뭐가 들어간 식품이라고 하지, 고구마는 하등 쓸데 없는 식물이며 인류의 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식재료에 대한 그런 식의 존중이 불가피한 결과의 원인이 된다는 경고가 살짝 곁들여지고 그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먹어대는 당신이야 말로 어리석거나 우둔할 따름이지 않던가? 고구마 튀김은 아삭하니 맛있었다.



우리 부부의 원래 계획은 인근 절집(절간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명칭이 아니라고 하더라)에 들러 대중공양을 챙기고 하루를 느긋하게 보내는 것이었지만, 저녁 때가 되어서야 뒷산(북한산)을 탔다.



야심한 밤에 한 쌍의 무장공비처럼 산에 오르는 것은 뭔가 연인스럽게 수상한 짓을 하기 위함이던가? 여름에 슬며시 기어 올라와 문명과 나 사이에 거리를 두고 맥주 한 잔 하기 딱이다.



부처의 광휘가 느껴지는 절집에 들렀다. 대중공양은 끝난 상태였다. 젠장. 절 하고 나면 집에 가서 김치 볶음밥이나 해먹자. --> 김치볶음밥에 시원한 열무김치를 곁들여 먹고 세속적인 니르바나를 느꼈다.



내공이 심후한 스님들은 공중부양을 하거나, 카퍼필드처럼 순간 이동이 가능하지만 무지한 대중을 현혹할 우려가 있어 잘 보여주지는 않는 것 같다. 신심이 깊은 불자들과 함께 탑돌이 경공술을 펼치는 중.



부처님이 오신 기쁜 날, 이 작은 절에서 불목하니가 날더러 몇 번이냐고 물었다. 숫자 중에서 9를 유난히 좋아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절집은 한국 샤머니즘의 메카, 내지는 한통속이 아닐까? 미사고의 숲처럼 온갖 괴기스러운 것들이 튀어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테서렉트의 그림자를 연상시키는 연등의 초현실적인 입체 형태는... 그리고 술집, 홍등가를 연상케 하는 저 은은한 불빛이 주는 부조리함은...



U.F.O. 숭배 사상의 오리진이기도 했다. 사진 찍을 때마다 짓는 저 V자는 늘, 어린 시절 외계 파충류 여성이 흰쥐를 먹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를 떠오르게 했다. 남자 주인공 이름이 도노반이었던가? V자는 또, '여기 소주 두 병 추가요'를 연상시켰다.

핸드폰으로 찍은 코믹 스트립: 깜빡 잊고, 몇 개월 전에 찍고 나서 정리 안했던 것 창고 방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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