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re Only Lonely

잡기 2004. 6. 7. 04:20
가고일은 지나가던 인간을 돌도끼로 때려 잡아 몹시 기뻐하는 오크같은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텅스텐을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슬라이드와 실크 스크린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나 텅스텐은 썩 괜찮은 pda였다. 어쨌거나 기분이 상해서 얼마 전에 자이어71을 자랑하다가 sj33의 저주를 받아 lcd가 박살이 난 이씨 아저씨의 슬픈 사연을 구체적으로 얘기해줬지만 약발이 통하지 않았다. "무상 as기간이 아직도 많이 남았거든요" 당시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액정은 말이야, 무상 as가 안되는 걸로 알고 있어.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겠지. 라고. 그나저나 아직도 pda를 사는 사람들이 있단 말인가? pda는 핸드폰에 완패했다. 완패했고 방향도 그쪽이 아니지만, 내 주변에서 pda 산 사람들은 본전을 뽑고도 남았다. bookwarez에서 챙긴 책들은 평생 봐도 이 책들을 다 읽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굴다리집에서 오랫만에 몇몇 얼굴을 만났다. 한씨 아저씨가 나왔더라면 욕설을 퍼부어주고 싶었는데 때마침 더위 먹고 나오지 않았다. 결혼식에 오지 못해 미안 하다던데 글쎄다, 안 와줘서 기쁘다. 어떤 아저씨 말대로 결혼은 두 번 할 수 있어도 결혼식은 두 번 할 것이 못 된다. 김씨는 날더러, 자기는 하나도 안 취했는데, 하드플래닛에 기사를 써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돈이 안 되는데 왜 쓰나 했지만 요즘 추세가 괘씸하고 술도 취했고 해서 몇 개월은 쑈를 해볼까 하는 심정으로 그러마 대답했다. 자가발전 얘기를 하니 흥미가 있긴 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바닥에서 내 신용은 말 그대로 언더그라운드였는데, 30대 중반의 결혼한 남자가 기댈 언덕은 재테크 밖에 없다. tv에서 낚시 채널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재테크와 메주콩 낚시다. 겟타를 빼니 왠지 죄책감을 느꼈다. 그래도 40대 열혈 궁상은 40대에.

아내가 병아리들 오리엔테이션 중에 가르쳐 줬다는 팁: 트랜짓 할 때 CA(이제 기억났다. 스튜어디스의 올바른 명칭은 cabin assistant)에게 내리기 전에 미리 손님에게 대접한 식사 중 남은 음식 찌꺼지를 달라고 말해두면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는 공항에서의 지루하고 허기진 시간 동안 음식을 챙겨 먹을 수 있다.

기내에서는 니들셋(반짓고리), 카드셋, 두통약, 생리대를 비롯한 각종 상비약, 쉐이드(수면 안대)를 부탁하면 구할 수 있고 화장실에서 화장지와 치약, 일회용 칫솔 따위를 챙길 수 있다. 국적기(라고 불리는 한국인 상대로 삥 뜯어먹고 사는 두 항공사)를 타면 튜브에 들은 고추장이 기내식에 곁들여 나온다. 몇 개 모아두면 쓸모가 있다. 항공기를 탈 때마다 보급받는 심정으로 이것 저것 챙겼다.

보딩패스를 받을 때 자리를 지정할 수 있다면 가능한 앞자리를 얻는 것이 좋다. 착륙할 때 비즈니스 클래스 다음으로 내려 출입국 수속을 빨리할 수 있으니까. 항공기에서 담요 따위를 챙겨 한국 여행자로서 빈티나는 모습만은 제발 보이지 말자는 얘기들이 오가는 것을 여행 사이트에서 본 적이 있었다. 글쎄... 한국보다 잘 벌어먹고 사는 서양 여행자들도 거리낌없이 그 짓을 했다. 가난하고 꾀죄죄한 우리들은 모두 추위에 얼어죽지 않으려고 그것을 망또처럼 두르고 돌아다녀도 하나도 쪽팔려 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만전을 기하는 자신의 영악함을 자랑스러워 했다. 재질이 중요했다. 울, 폴리에스테르, 폴리우레탄, 쿨맥스, 고어택스 따위 소재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다가 한번은 내가 이겼다. 그런데 고어텍스 담요가 정말 있단 말인가? 그렇다쳐도 본 적은 없었고, 내것이 제일 '가볍고' 따뜻했다. 어느 항공사 것인지 기억은 안나지만 그것의 소재는 싸구려 폴라폴리스였다. 터번처럼 두르고 다녔다. 침대에 깔기도 하고 목에 두르기도 했다. 여행중의 내 거지 패션은 특별히 튀는 것이 아닌 이 바닥의 수수함 그 자체였다.

오랫만에 들른 인천 공항의 아시아나 창구에서 아시아나 항공권을 구입하진 않았지만 출/입국 신고서를 프린터로 예쁘장하게 프린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시아나 항공은 통 타 본 적이 없지만 스타 알리안스 때문에 쌓인 마일리지 덕을 보긴 했다.

공항에서는 여전히 내게 길을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할아버지를 한 번 도와드렸고 일본인 배낭여행자들이 종로행 버스를 타도록 도와주었다. 이전까지 시내에서 지하철을 타고 김포공항역에서 내려 인천공항행 셔틀 버스를 타는 것이 가장 저렴하게 공항에 갈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셔틀버스의 운행요금이 4500원에서 6000원으로 뛰었다. 30분 운행에 6000원이라. 교통에 관한 한 사회주의 국가인 한국의 실정에 비춰볼 때 터무니 없다.

아내는 인도로 나들이갔다. 한달 반쯤 후에나 돌아올 것이다. 그녀에게는 일곱 번째 인도행이다. 일이 바쁘게 돌아가지 않고, 시간이 된다면 태국에서 만날까 생각 중.

여행 생각나는군. 기내에서 얻을 수 있는 갖가지 흥미로운 물건들을 비롯해 항공사의 담요의 품질에 관해 노련한 장물아비들처럼 질 좋은 정보를 교환하다가... 과떼말라에 있을 때 어떤 체한 여행자의 손가락 끝을 달군 바늘로 따 주면서 이것이 바로 동양의 신비스러운 침술이라고 얘기했다.

그는 왜 소화계에서 발생한 문제를 손가락 끝에 바늘을 찔러 해결하는가? 라고 물었다. 당연한 의문이다. 경락을 뭐라고 번역해야 할 지 난감해서 pressure point라고 하고, 인체에는 무수한 경락이 있는데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의 분자구조의 중심에는 철 입자가 있고 침은, 아니 바늘은, 피부 밑의 신경 절 부근을 자극해 미세한 전자기 변화를 일으켜 철 원자를 포함한 헤모글로빈의 방향을 정렬시켜 혈류 흐름을 변화시킨다고 말했다. 물론 사기다.

얘기는 좀 더 발전했다. 생물체의 신경계는 신경전달물질을 비롯한 이온의 농도 변화에 따른 세포 내의 화학적 변화와 전기적 변위에 의해 국지적으로 자기 조직화 되고 되먹임질 되는데 그것이 경락이 다른 부위 보다 변화를 심하게 일으키는 이유라고 말했던 것 같다. 호르몬, 체액, 혈류, 이 모든 것들은 인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여러 도관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특히 자율신경계는 외부에서 전달되는 자극에 따라 의지와 무관하게 여러 종류의 호르몬을 방출하는데 이 호르몬이 신경계를 긴장케하고 자극을 주어 인체를 평범한 상태가 아닌 비상 사태로 변화시킨다. 이를테면 팔 다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병사가 자기 진지로 기어갈 힘을 주는 것은 노르에피네프린과 체내에서 자가 생성되는 몰핀 계열이 감각 차단을 일으켜 극심한 고통에 의해 신경계가 오작동하는 것을 방지토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체했을 때 하필 손, 손가락일까? 손가락 끝은 인간의 인지체계에서 촉각에 관한 가장 민감한 부분이다. 촉각을 곤두세운다 라는 표현도 있다. 이곳이 체내에서 가장 큰 신경절인 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신경이 몰려 있다는 것은 두말 하면 잔소리다. 침으로 손가락 끝에 일점의 집중적인 자극을 가하면 인체는 즉각적으로 비상체계로 돌입한다. 중국의술에서는 발바닥도 중요한 부위인데, 발바닥 역시 평상시의 고른 압력 분포에 따른 자극의 변화를 딱히 느끼지 못하다가 침등의 극단적인 일점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하여튼 비상체계 하에서 신경 하나 없어 고통을 가장 둔감하게 느끼는 소화계는 부적당한 소화물 탓에 흔히 양의 되먹임질(포지티브 피드백)에 걸려 인체 스스로 자기 조절한답시고 자가발전하다가 오히려 자멸의 길을 걷는 자율신경계의 오작동을 중단시키고 신경의 모든 방향을 위험이 비롯된 손가락 끝에 집중시킨다. 신경계를 기만한다는 점에서 감기약이 인체를 기만하여 시간을 벌어 면역체계가 바이러스에 방어할 시간을 주는 치료 방식과 다른 점이 없다. 감기약은 인체의 화학적 조성을 변화시킴으로서 알려지지 않은 부작용을 동반하나 침술은 단지 신경계만을 자극할 따름이다.

그 정도면 카프라에 속아넘어갔던 서양인들에게도 충분히 이런 사기가 통했다/검증했다/반복했다/사기 행각은 사뭇 끝이 없었다. 카프라와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전문용어를 써가며 잘 알지도 못하는 인체와 자연의 기작을 주물럭거렸다. 카프라와 내가 다른 점은 나는 굳이 교주 스타일을 흉내낸다거나 실세계에 상존하는 위협과 공포를 도외시하며 평화와 조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 뿐이다. 긴장과 대치의 동역학을 거세한 조화는 하시시 빨고 헤롱거리며 세상이 평화롭다고 주장하는 것만큼 어불성설이다. 당신의 자기만족은 세계를 긍정적으로, 다시 말해 지금보다 덜 멍청한 방향으로 이끌어 본 적 조차 없다. 글쎄다. 굳이 약 빨고 샤픈, 블러, 모자익 등 화상처리를 하여 컬러풀하고 원더풀한 세상을 볼 까닭이 없다. 약 안 해도 충분히 볼 수 있다. 인간의 상상력, 특히 자가발전 모델은 애당초 신경계의 과민반응에 따른 오작동이다. 예술과 정신질환 사이의 상관관계를 굳이 언급해 짜증을 불러 일으킬 이유가 있을까? 이상 정신세계는 말 그대로 이상한 세계를 보게 한다. 하여튼 감기약과 항생제가 몸에 해로운 것을 안다면, 마찬가지로 인체의 화학적 조성을 인위적으로 변화시키는 하시시, 대마초 역시 장기적으로는 좋을 리가 없다는 것 쯤은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약 먹은 돌대가리야, 사실 기대는 안 해. 그렇게 살다가 뒈져버려!)

핸드폰에는 마누라의 사진이 있고 그 밑에 여행자들이 행운을 빌어주며 하던 말이 적혀 있었다. godspeed luke. 여행 중에 만난 어떤 점쟁이 말에 따르면 나에게는 두 개의 이름이 있고 생일이 셋이다. 쪽집게였다. 따라서 사주팔자, 생일별점이 개판으로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바보같아 보이는 점쟁이 말을 믿지 않는 것은 합리적 회의주의자라서이기 보다는, 그저 횡설수설이 웃음꺼리 밖에 되지 않아서인 이유도 있고 내가 그보다 이상 정신세계에 관한 풍부한 실무경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가장 잘 아는 자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고 그들 생각의 총합이 내가 된다. 하드플래닛의 아저씨들 말대로 내가 남들에게 굳이 신용, 정직을 거들먹 거릴 이유는 없다. 그점이 특히 하드플래닛에 기사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게 해주는 훌륭한 핑계였다.

수중에 딱 만원이 남아 택시 탈 형편이 안 되어 이제는 mp3p로 백퍼센트 전용한 pda로부터 들려오는 올드팝스를 들으며 한참 동안 집을 향해 걸었다. 소주만 마셨더니 속이 편해서 좋다. 어둠의 떨거지들 팀의 미덕은 소주를 마신다는, 그것이었다. 굳이 벌이가 시원찮다는 공통점 만은 아니었다. 새벽 한 시, 한적한 거리, 날씨와 바람은 더더욱 좋았다. 아아, 신음하는 지구여, 어서 이 땅에 아열대를.

마누라도 없는 이 자유스러움이 고통스러워 몸부림치며 노래 한 곡 땡길까? J.D. Souther - You're Only Lonely (3:43) 이 시대에 30대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대단한 행운이다. 가사에는 늘 의문이 샘솟았지만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노래 잘하는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고 그들이 누군지 정도는 노력 없이도 떠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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