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친구들 중 심바는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내일 남미로 간다. 부럽다. 지금 생각에 그곳에 있을 때 좀 더 방탕하게 놀았어야 했다. 그 며칠 전, 술먹고 뻗기 전날, 충언씨는 파타고니아가 자기 인생에서 꼭 한 번 다시 가보고 싶은 장소라고 거듭 강조했다. 몇몇 남미 여행자들로부터 장엄한 모레노 빙하에 관한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파타고니아에 관히 알고 있는 것은 오직 그것 밖에 없었고 아는 것이 그것 밖에 없으니 파키스탄에서 빙하 트래킹하던 것이 생각나 뭣하러 빙하는 또 보러 가나 뭐 그런 생각으로 칠레를 아예 여행 경로에서 빼버렸다. 실수였다. 다른 것이 있었다.

파타고니아에 관해 뒷조사를 해보니(그래봤자 도서관에서 내셔널 지오그래피 과월호를 뒤적여보는 정도지만) 아니, 이런, 사나이의 피를 끓게 만드는 정직한 깡촌이 있었단 말인가? 내셔널 지오그리피의 기사 중 특히나 도발적이엇던 것은 파타고니아 지역을 위성 사진으로 찍은 후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워 130킬로그램의 식량과 gps, 그리고 카누를 들고 트래킹을 한 것이었다. 멋지다. 책상머리에 앉아 볼펜처럼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일만 죽어라고 하는 내게 황량한 벌판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이 도무지 왜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사회 부적응에 대한 긍정적 반발이 아닐까? 강조하지만 교미와 번식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투쟁과는 하등 관련이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짬뽕을 만들어 먹고 싶었다. 어젯밤에 아내와 집에서 냉장고에 남아있던 돼지 주물럭으로 소주 한 잔 했다. 도서관에서 부실한 식사를 한 탓에 오늘은 유난히 실존적인 부조리함을 느꼈다. 아내와 결혼한 후로 냉장고에 왠간한 재료는 다 있어서 뭘 만들어 먹기가 편하다. 면발 만드는 것은 관뒀다. 퀀텀 그래프 이론에 의해, 면발까지 창조할만한, 또는 만들어진 면발과 내가 동시에 편재하며 연결될 시공간이 부족했다. 공상과학스러운 개소리는 그만하고, 하여튼, 만들기 귀찮아서 관두기로 하고 수퍼에서 샀다. 재료비가 그래서 천 원 들었다.



고춧가루를 기름에 볶아 걸러내어 바알간 고추기름을 얻고 거기에 마늘과 파를 넣어 볶아 기름에 향이 배이게 한 다음, 냉장고에 있는 여러가지 야채(호박, 당근, 양파, 표고 버섯, 붉은 고추)를 넣고 볶았다. 매워서 눈물이 찔끔 거렸다. 한편에서는 전에 조리하다 남은 치킨 스톡 다이스의 반 토막으로 닭 육수를 만들고 그 안에 조개와 다시다를 넣고 끓이다가 다시다와 조개를 건졌다. 담백한 치킨 스톡 덕택에 그동안 지긋지긋했던 멸치 육수와는 안녕이다. 조갯살을 발라내서 오징어 썰어놓은 것, 새우 등과 함께 프라이팬에 넣고 고춧가루 듬뿍, 후추를 약간 넣고 다시 볶았다. 야채가 사각사각 익을 무렵 닭육수를 확 부어 팔팔 끓이면서 간을 보고 부추를 약간 썰어 넣었다. 한편, 면을 삶아 채에 바쳐 물기를 빼고 그릇에 담아 놓았다.

끓고 있는 짬뽕 국물을 부어 완성. 18분 걸렸다. 담백하다. 간이 완벽하게 맞았다. 몹시 매워서 땀을 뻘뻘 흘리며 먹었다.

아쉬운 점; 면은 만들었어야 했다. 수퍼에서 사먹는 것은 맛이 없다. 짬뽕은 자취생이나 여행 중에도 고춧가루, 갖은 야채, 생 오징어 정도면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인데 여행자들이 의외로 잘 해먹지 않는 것 같다. 얼큰한 고향 맛으로 원기를 회복하고 근육에서 뽀드득 소리가 나게 할 수 있을텐데 말이야.

여행지에서 냄비 하나로 짬뽕 해먹기 또는 남미 여행 중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들어먹던 방법: 시장에서 야채를 종류별로 하나씩 쪼잔하게 구매(물론 상인에게 욕을 좀 먹겠지만 철판 깔면 된다), 냄비에 고춧가루와 식용유를 일대일로 넣고 볶은 다음 화장지에 걸려 고추기름을 얻고 거기에 마늘을 두세등분한 것과 파는 없을테니 대신 레몬그라스나 양파, 생강, 코리안더 따위 향기 나는 식물들을 짓이겨 넣어 기름과 함께 볶아 향을 내고 빅토리녹스 만능칼로 대충 야채(피망, 양배추, 당근, 양파, 무 등 아무거나 많을수록 좋다)를 서걱서걱 썰어 고추가루와 설탕(고추가루가 한국처럼 단맛이 안 나니까), 미원 따위 조미료를 넣고 볶다가 오징어나 홍합 등이 있으면 대충 잘라 넣고 물을 부어 끓이면 된다.



땀을 냈으니 식혀야지. 수박을 썰어 검은 씨를 대충 빼내 블랜더에 넣고 연유 조금, 설탕 왕창, 얼음을 넣고 갈았다. 뼛속까지 시원하다. 이름하여 태국식 땡모(수박)쥬스. 맛없는 수박을 맛있게 먹는 법. 자꾸 해 보니까 날이 갈수록 솜씨가 좋아졌다.

신분증 사본 등 신분 증명을 위한 서류를 팩스로 보내야 하는데 팩시밀리를 쓸만한 곳이 뾰족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앗참 그렇지! 내가 아끼는 단종 모델 노트북, 이제는 영문 o자와 숫자 1자까지 망가진 채 고통스럽게 연명하고 있는 살아있는 고물, 리브레또 L1에는 팩스모뎀이 내장되어 있다. 그리고 windows xp 설치 cd에는 팩스 지원 소프트웨어(팩스 프린터 및 팩스 콘솔)가 포함되어 있다. 시험해 보니 쓸만했다. 팩스 송신과 수신이 다 된다.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길거리에서 polham이란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는 학생을 한 번 더 쳐다보게 된다. 신문에서 부시보다 케리가 당선되길 원하는 한국인이 70% 가량 된다는 기사를 읽었다.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영화를 봤다. 홍감독 영화를 안 볼 꺼라고 다짐하면서도 또 봤다. 여전히 차도가 안 보인다. 이 양반의 영화 주인공들은 여전히 메스꺼워 보이는 어떤 부류의 인간들의 삶에 대한 변명같다. 홍상수 영화가 아무 것도 보여주는 것이 없지만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얘기로 몇 페이지를 써대는 비평가들에게 사뭇 존경심이 든다. 딴지일보에서 지민호 감독을 인터뷰했다. 지민호 감독은 밀리터리 SF를 만들고 있단다. 편대단편 (38:36) 감상평: 할 말 없다. 수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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