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볼품없이 신발장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이름모를 주인들의 구두를 2000원 주고 수선해서 신고 다녔다. 지하철에서 산 1000원 짜리 우산을 부러 수선해서 들고 다니고 남이 신던 중고 구두를 수선해서 신고 다니고 남이 입던 바지를 입고 다니는 이런 모습이 궁상스러울 지는 몰라도 그렇게 살아온 사람더러 생각을... 음. 타인의 입장에 자신을 고려하기 보다는 그 아까운 시간에 다른 사람이 입다가 빨아놓은 팬티를 입어주자!
rss 리더로 블로그라인을 잠시 사용(테스트) 중. 간단한 인터페이스와 클립 기능이 괜찮긴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 기사를 클립할 때 기사를 읽고 클립할 지 말지를 결정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이제나 저제나 일간신문들이 rss를 제공해주기를 기다렸다. 모바일, 유비퀴토스 시대라고 다들 외쳐대지만 정작 그렇게 외치는 언론은 늘 실망스럽고 바보스러운 모습이다. 몇 줄 안 되는 간단한 웹 프로그램이면 rss가 가능한데 말이야. 사주, 편집, 기자, 교열, 영업, 사이트 구축, 관리 까지 혼자서 다 해먹는 시골의 조그만 일인 신문사의 작업은 흥미진진해 보였다. 그들은 게다가 정말 필요한 지역 소식까지 전해주는 소사이어티에서 꼭 필요한 존재로 보였다. '무의미한' 분업화, 전문화는 사람을 확실한 머저리로 만들어 주는 것 같다 -- 신비스러운 오해로 가득한 이상한 기사를 쓰는 기자를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클리앙 사이트가 스폰서를 받았다. 사이트 라우팅을 하는 바람에(사업 주체 사이트의 조횟수 올리기?) 기사 수집이 안된다. 비슷한 문제 제기를 한 사람들이 있어 입을 다물고 있다. 고친다 만다 하는 얘기가 없다. pda 사이트가 rss나 기타 클립 가능한 웹 url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모양이 좀 우습긴 하다.
pda에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정리해야 할텐데 시간이 없다. 가끔 regacy를 했다. 4mb 짜리 파일 하나, 마을에서 한가하게 빙빙 멤돌고 있지만 pda용 치고 썩 잘 만든 rpg 같다. sj33에서는 약간 느리게 작동한다. 만든 작자들은 might & magic 이나 eye of beholder 따위의 게임에 향수를 지닌 이들인 것 같다. 김씨와 손씨, 장씨를 만나니 그들 pda도 컬러화되어 있었다. 어느날 부터인지 그들 모두가 클리에나 텅스텐을 가지고 다녔다. 손씨가 머리를 하늘색으로, 거기에 구름이 송송 떠다니는 모습으로 하고 다니면 꽤 어울릴 것 같아 보였다. 이 세계에서 본 적이 없는 머리 모양인 것 같긴 하다.
서씨 아저씨를 오랫만에 봤다. 잠시 외국에 나갔다 온 새에 하이텔이 없어졌단다. 그러나 알던 이름들을 찾아니기에는 무리가 없었는데, 그들 거의가 egloos.com에 블로그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만들어 놓은 sf 동호회 사람들의 블로그 리스트를 퍼블릭 오픈 해 놓을까 했지만 그들 나름대로는 프라이버시를 유지하고 싶을 것 같다.
구글 뉴스 서비스를 보기 시작. 포괄적(아니면 광범위하다고 해야 할지) 관심사를 다 떠들어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각 분야별 헤드라인 수준. 그러나 플래시, gif 애니메이션이 없는 깔끔한 텍스트 화면은, 흠. 단순하지만 우아한 기술이 내포한 상큼함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국이랑 영아의 자전거로 가는 세상 구경 -- 이씨가 소개해줘서 들어가 봤다. 나하고 모델이 같은 garmin etrax gps를 사용하는 것 같다. gps 구매할 때 세계지도를 구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여행준비물을 보다가 기겁했다. 준비물이 너무 많다. 상당기간 동안 여행을 준비한 사람들인데 그 정성이 놀랍고도 한편으로는 웬지 가엾어 보였다. 내가 나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것과 딱히 다르지 않았다.
사이트에서 인용한 어떤 캐나다인 말대로 한국인은 모험심이 좀 부족한 편이다. 그것을 굳이 흉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서양인들이 모험심이 많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았다. 과연 그럴까? 과연? 저 하늘과 서양인 스스로는 알고 있다. 하여튼, 쓸데없는 모험을 과감하게 배제할 줄도 아는 동양인의 지혜도 배워볼만 하다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돌이켜 보건대 쓸데없는 모험 끝에 부작용으로 남는 것은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에 느끼는 지겨움 뿐이다. 서양인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에 느끼는 상당히 지긋지긋한 권태를 인내하고, 또한 그것을 생산적으로 재해석하여 기쁨으로 돌이키는 동양의 지혜도 배워볼만 하다고 권하고 싶어진다.
farscape, stargate, star trek, andromeda, millenium, harsh realm, angel, 이런 시리즈를 노트북에 넣어두고 출장 갈 때마다 버스나 기차에서 한편씩 봤다. 봐도 봐도 끝이 없다. 극에 등장하는 외계인이 인간하고 워낙 하는 행동이 비슷해 자기중심적인 인간 드라마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언제가 되야 판갤럭틱 채널에서 외계인들에 의한, 외계인들을 위한, 제대로 된 sf 시트콤을 볼 수 있을런지... 그나저나 등장인물이 하나같이 밥맛 떨어지고 설정은 한심하고 이야기는 식상하기 짝이 없고, sf도가 현저하게 낮은 스타게이트의 장수 비결이 궁금하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시리즈가 유지되었던 것은 아닐까? 나같은 sf 프릭을 효과적으로 차단해 군소리가 나오지 않게 만들거나, 역으로 논쟁에서 플레임을 만들 꺼리를 대량으로 제공하여 반사이익을 노리는 전략.
소주 10병에 팔려 내 딸이 된 아이는 세일러복을 입고 완스인어블루문에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에 그동안 가슴은 많이 컸니? 라고 말했다. 아이가 삐친 것 같다. 내 가슴은 예전부터 컸단 말이에요 라고 말하는 듯 하다. 애비의 불찰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여자는 가슴으로 말한다. 아내의 얘기에 따르면 한국에서 판매되는 거의 모든 브라에 뽕이 들었다고 한다. 그랬단 말인가?
김씨는 내가 블로그에 올려놓은 지하철에서의 에피소드가 사실인지 의문을 품었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얘기를 듣고 보고 싶은 것들을 본다. 이야기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구원한 사나이, 이야기의 힘으로 가족을 먹여 살린 이야기, 이야기의 힘으로 수렁에서 건진 내 딸, 이런 것들은 말과 글이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성립하고 나서야 전진할 수 있다고 본다. 말과 글에 그다지 상처를 받아본 적이 없다. 한 인간의 인격이나 사상과 말과 글을 분리하는 편일 것이다. 그러는 편이 여러 모로 편했다. 안 그래도 되는데 편의상 그랬다. 둘을 뒤범벅하면 결과가 늘 골때렸다. 말은 사용법이 까다롭고 대단히 위험하고 휘발성이 강한 것이다.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믿는다, 안다, 두려워했다. 나는 말의 좋은 면을 잘 알지 못한다. 알고 싶다. 알게 되면 주변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화려하고 유창하게.
언빌리버 김씨를 위해 얘기를 더 해 볼까? 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sf컨벤션을 준비하는 동안 그는 픽션을 워낙 잘 지어내는 데다가(본의가 아닌 것 같지만) 대외 신용도가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편이라(그 전후관계는 확실치 않다. 원인을 다른데서 찾고 싶다) 그가 자칫 말 실수를 하다보면 본의 아닌 오해로 인한 피해가 우려되었다. 몇 마디 근거 없고 시답잖은(내가 보기에) 말에 의해 사람들의 생각이 쉽게 바이아스 되는 모습은 충분히 보아왔다. 그래서 왠간해서는 잘 터지지 않는 부비트랩을 설치 했다. 트리거를 두 개 달았다. 트리거를 각각 Cs, Ds라고 칭해두자. Ds가 실제로 폭발을 일으키는 방아쇠가 된다. 방아쇠는 동종 관심사를 공유하는 among them 수풀에 감추어진, 사냥꾼이 설치하고 잊어버린 토끼덫 같은 것이다. 그리고 두 방아쇠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나 거리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 관계가 있지만 비밀이 아님에도 관계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김씨가 A에게 As를 말하면(거의 불가능한 경우다) A는 Bs를 말하게 된다. A는 아무라도 상관없다. Bs를 듣고 김씨가 상상력을 발휘해 또다시 아무라도 상관없는 B에게 어쩌다 우연히 Cs를 말하면 Ds가 나온다. 확신하건대 그럴 확률은 극히 낮다. 베이징에 설치된 덫에 사슴이 걸린 바로 그 시각에 아프리카에서 코끼리가 총에 맞고 쓰러지는, 서로 개연성이 없는 시공간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우연이 겹칠 그런 확률이다. Ds는 그들 사이에서 확산된다. Ds는 어떤 이에게 일종의 확신 -- 결정에 관계된 -- 을 주게 된다. 폭탄 설계는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고 방아쇠를 분산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 일에 나나 x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낼 경로나 흔적이 남지 않았다. 그건 그런 종류의 평범한 말이었는데, 몇 가지 필요한 어나운스를 할 때 문자열을(말을, 언어를, 특정 단어를) 배치하는 것이다. 결코 안 터질 꺼라고 믿었고, 장난삼아 만들었던 그 폭탄이 여행 가서 신나게 놀고 있던 어느 날 한국에서 터졌다. 터키의 괴레메 언덕에서 네스토리우스 파의 땅굴의 허접함에 질렸다가 갑자기 나타난 미친개들에게 쫓기고 있을 때 그 여진이 전해왔다. 폭탄은 실로 효과적이었다. 효과가 대단해서 뒤바꿀 수 없는 인간의 엄숙한 운명을 연상시키기 까지 했다. 운명의 잔인함이란... 안타깝게도 본인이 죽을 때까지 눈치챌 수 없는 운명의 잔인함은 그렇다치고, 절대 터지지 않을 폭탄이 어째서 터지는지 신기했다. 말은 애당초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것이다. 그걸 제대로 다룰 수 없으면 처음부터 발언하지 않는 것이 나아 보인다. 이야기를 믿지 않는 김씨의 건강을 생각하며 픽션을 하나 방금 만들어봤다. 제목은 '당신 삶에 관한 이야기 또는 진인생소사'
pda로 테드 치앙의 언더스탠드를 읽는다. 소설을 읽는 나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생각은 거기서 멎었다.
rss 리더로 블로그라인을 잠시 사용(테스트) 중. 간단한 인터페이스와 클립 기능이 괜찮긴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 기사를 클립할 때 기사를 읽고 클립할 지 말지를 결정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이제나 저제나 일간신문들이 rss를 제공해주기를 기다렸다. 모바일, 유비퀴토스 시대라고 다들 외쳐대지만 정작 그렇게 외치는 언론은 늘 실망스럽고 바보스러운 모습이다. 몇 줄 안 되는 간단한 웹 프로그램이면 rss가 가능한데 말이야. 사주, 편집, 기자, 교열, 영업, 사이트 구축, 관리 까지 혼자서 다 해먹는 시골의 조그만 일인 신문사의 작업은 흥미진진해 보였다. 그들은 게다가 정말 필요한 지역 소식까지 전해주는 소사이어티에서 꼭 필요한 존재로 보였다. '무의미한' 분업화, 전문화는 사람을 확실한 머저리로 만들어 주는 것 같다 -- 신비스러운 오해로 가득한 이상한 기사를 쓰는 기자를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클리앙 사이트가 스폰서를 받았다. 사이트 라우팅을 하는 바람에(사업 주체 사이트의 조횟수 올리기?) 기사 수집이 안된다. 비슷한 문제 제기를 한 사람들이 있어 입을 다물고 있다. 고친다 만다 하는 얘기가 없다. pda 사이트가 rss나 기타 클립 가능한 웹 url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모양이 좀 우습긴 하다.
pda에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정리해야 할텐데 시간이 없다. 가끔 regacy를 했다. 4mb 짜리 파일 하나, 마을에서 한가하게 빙빙 멤돌고 있지만 pda용 치고 썩 잘 만든 rpg 같다. sj33에서는 약간 느리게 작동한다. 만든 작자들은 might & magic 이나 eye of beholder 따위의 게임에 향수를 지닌 이들인 것 같다. 김씨와 손씨, 장씨를 만나니 그들 pda도 컬러화되어 있었다. 어느날 부터인지 그들 모두가 클리에나 텅스텐을 가지고 다녔다. 손씨가 머리를 하늘색으로, 거기에 구름이 송송 떠다니는 모습으로 하고 다니면 꽤 어울릴 것 같아 보였다. 이 세계에서 본 적이 없는 머리 모양인 것 같긴 하다.
서씨 아저씨를 오랫만에 봤다. 잠시 외국에 나갔다 온 새에 하이텔이 없어졌단다. 그러나 알던 이름들을 찾아니기에는 무리가 없었는데, 그들 거의가 egloos.com에 블로그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만들어 놓은 sf 동호회 사람들의 블로그 리스트를 퍼블릭 오픈 해 놓을까 했지만 그들 나름대로는 프라이버시를 유지하고 싶을 것 같다.
구글 뉴스 서비스를 보기 시작. 포괄적(아니면 광범위하다고 해야 할지) 관심사를 다 떠들어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각 분야별 헤드라인 수준. 그러나 플래시, gif 애니메이션이 없는 깔끔한 텍스트 화면은, 흠. 단순하지만 우아한 기술이 내포한 상큼함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국이랑 영아의 자전거로 가는 세상 구경 -- 이씨가 소개해줘서 들어가 봤다. 나하고 모델이 같은 garmin etrax gps를 사용하는 것 같다. gps 구매할 때 세계지도를 구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여행준비물을 보다가 기겁했다. 준비물이 너무 많다. 상당기간 동안 여행을 준비한 사람들인데 그 정성이 놀랍고도 한편으로는 웬지 가엾어 보였다. 내가 나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것과 딱히 다르지 않았다.
사이트에서 인용한 어떤 캐나다인 말대로 한국인은 모험심이 좀 부족한 편이다. 그것을 굳이 흉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서양인들이 모험심이 많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았다. 과연 그럴까? 과연? 저 하늘과 서양인 스스로는 알고 있다. 하여튼, 쓸데없는 모험을 과감하게 배제할 줄도 아는 동양인의 지혜도 배워볼만 하다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돌이켜 보건대 쓸데없는 모험 끝에 부작용으로 남는 것은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에 느끼는 지겨움 뿐이다. 서양인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에 느끼는 상당히 지긋지긋한 권태를 인내하고, 또한 그것을 생산적으로 재해석하여 기쁨으로 돌이키는 동양의 지혜도 배워볼만 하다고 권하고 싶어진다.
farscape, stargate, star trek, andromeda, millenium, harsh realm, angel, 이런 시리즈를 노트북에 넣어두고 출장 갈 때마다 버스나 기차에서 한편씩 봤다. 봐도 봐도 끝이 없다. 극에 등장하는 외계인이 인간하고 워낙 하는 행동이 비슷해 자기중심적인 인간 드라마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언제가 되야 판갤럭틱 채널에서 외계인들에 의한, 외계인들을 위한, 제대로 된 sf 시트콤을 볼 수 있을런지... 그나저나 등장인물이 하나같이 밥맛 떨어지고 설정은 한심하고 이야기는 식상하기 짝이 없고, sf도가 현저하게 낮은 스타게이트의 장수 비결이 궁금하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시리즈가 유지되었던 것은 아닐까? 나같은 sf 프릭을 효과적으로 차단해 군소리가 나오지 않게 만들거나, 역으로 논쟁에서 플레임을 만들 꺼리를 대량으로 제공하여 반사이익을 노리는 전략.
소주 10병에 팔려 내 딸이 된 아이는 세일러복을 입고 완스인어블루문에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에 그동안 가슴은 많이 컸니? 라고 말했다. 아이가 삐친 것 같다. 내 가슴은 예전부터 컸단 말이에요 라고 말하는 듯 하다. 애비의 불찰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여자는 가슴으로 말한다. 아내의 얘기에 따르면 한국에서 판매되는 거의 모든 브라에 뽕이 들었다고 한다. 그랬단 말인가?
김씨는 내가 블로그에 올려놓은 지하철에서의 에피소드가 사실인지 의문을 품었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얘기를 듣고 보고 싶은 것들을 본다. 이야기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구원한 사나이, 이야기의 힘으로 가족을 먹여 살린 이야기, 이야기의 힘으로 수렁에서 건진 내 딸, 이런 것들은 말과 글이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성립하고 나서야 전진할 수 있다고 본다. 말과 글에 그다지 상처를 받아본 적이 없다. 한 인간의 인격이나 사상과 말과 글을 분리하는 편일 것이다. 그러는 편이 여러 모로 편했다. 안 그래도 되는데 편의상 그랬다. 둘을 뒤범벅하면 결과가 늘 골때렸다. 말은 사용법이 까다롭고 대단히 위험하고 휘발성이 강한 것이다.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믿는다, 안다, 두려워했다. 나는 말의 좋은 면을 잘 알지 못한다. 알고 싶다. 알게 되면 주변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화려하고 유창하게.
언빌리버 김씨를 위해 얘기를 더 해 볼까? 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sf컨벤션을 준비하는 동안 그는 픽션을 워낙 잘 지어내는 데다가(본의가 아닌 것 같지만) 대외 신용도가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편이라(그 전후관계는 확실치 않다. 원인을 다른데서 찾고 싶다) 그가 자칫 말 실수를 하다보면 본의 아닌 오해로 인한 피해가 우려되었다. 몇 마디 근거 없고 시답잖은(내가 보기에) 말에 의해 사람들의 생각이 쉽게 바이아스 되는 모습은 충분히 보아왔다. 그래서 왠간해서는 잘 터지지 않는 부비트랩을 설치 했다. 트리거를 두 개 달았다. 트리거를 각각 Cs, Ds라고 칭해두자. Ds가 실제로 폭발을 일으키는 방아쇠가 된다. 방아쇠는 동종 관심사를 공유하는 among them 수풀에 감추어진, 사냥꾼이 설치하고 잊어버린 토끼덫 같은 것이다. 그리고 두 방아쇠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나 거리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 관계가 있지만 비밀이 아님에도 관계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김씨가 A에게 As를 말하면(거의 불가능한 경우다) A는 Bs를 말하게 된다. A는 아무라도 상관없다. Bs를 듣고 김씨가 상상력을 발휘해 또다시 아무라도 상관없는 B에게 어쩌다 우연히 Cs를 말하면 Ds가 나온다. 확신하건대 그럴 확률은 극히 낮다. 베이징에 설치된 덫에 사슴이 걸린 바로 그 시각에 아프리카에서 코끼리가 총에 맞고 쓰러지는, 서로 개연성이 없는 시공간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우연이 겹칠 그런 확률이다. Ds는 그들 사이에서 확산된다. Ds는 어떤 이에게 일종의 확신 -- 결정에 관계된 -- 을 주게 된다. 폭탄 설계는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고 방아쇠를 분산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 일에 나나 x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낼 경로나 흔적이 남지 않았다. 그건 그런 종류의 평범한 말이었는데, 몇 가지 필요한 어나운스를 할 때 문자열을(말을, 언어를, 특정 단어를) 배치하는 것이다. 결코 안 터질 꺼라고 믿었고, 장난삼아 만들었던 그 폭탄이 여행 가서 신나게 놀고 있던 어느 날 한국에서 터졌다. 터키의 괴레메 언덕에서 네스토리우스 파의 땅굴의 허접함에 질렸다가 갑자기 나타난 미친개들에게 쫓기고 있을 때 그 여진이 전해왔다. 폭탄은 실로 효과적이었다. 효과가 대단해서 뒤바꿀 수 없는 인간의 엄숙한 운명을 연상시키기 까지 했다. 운명의 잔인함이란... 안타깝게도 본인이 죽을 때까지 눈치챌 수 없는 운명의 잔인함은 그렇다치고, 절대 터지지 않을 폭탄이 어째서 터지는지 신기했다. 말은 애당초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것이다. 그걸 제대로 다룰 수 없으면 처음부터 발언하지 않는 것이 나아 보인다. 이야기를 믿지 않는 김씨의 건강을 생각하며 픽션을 하나 방금 만들어봤다. 제목은 '당신 삶에 관한 이야기 또는 진인생소사'
pda로 테드 치앙의 언더스탠드를 읽는다. 소설을 읽는 나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생각은 거기서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