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실

잡기 2004. 12. 31. 23:28
컴퓨터를 꺼내놓고 작업하다가 역에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을 듣고 허겁지겁 노트북을 챙겨 내렸다. 내리고 나서야 짐을 기차에 놔두고 내렸다는 것을 알았다. 철도청 전화번호를 알아보려고 114에 수시로 전화를 시도해 봤지만 계속 통화중이고 바깥에서 하는 일에 쫓기다보니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아내에게 전화해서 대신 물건을 찾아달라고 부탁. 20만원 상당의 새로 구매한 물건들이라 잃어버리니 속 쓰리다. 8시간 후: 부산에서 천안역으로 다시 보냈단다.

매번 부주의 탓에 물건을 잃어버리는 이 잘못된 행동 양태를 고쳐야 하는데, 고치기가 쉬운 것이 아니다. 생각난 김에 스티븐 킹의 금연주식회사(Quitters, Inc.)를 뒤적여 찾아 보았다. 역시. 다시 읽어봐도 사업성이 있어 보인다. 저렇게라도 담배를 끊으면 건망증이 나아지지 않을까?

시골에 가니 나를 도회 출신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할머니가 농사 지어봤어요? 라고 물었다. 논에 둥둥 떠 다니는 개구리밥이 기억났다. 삼포의 한 개울에서 처음 보는 그 동네 촌뜨기들이 내가 겁을 집어먹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야유를 퍼부으며 놀렸다. 바위 높이는 대략 6m, 뛰었다. 물속으로 첨벙 떨어졌다. 귀에 물이 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압력을 받으면 울리는 귀 때문에 지금까지 고생하게 되었다.

연말을 예년과 달리 조용히 보내는 중. 크리스마스임에도 SF 모임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모임을 일찌감치 나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러 다녔다. 송년회를 여덟 번쯤 했다. 하루에 두 탕씩 뛰기도 했다. 소주, 이과두, 죽엽청, 더덕술, 맥주를 골고루 섞어 마셨는데도 다음날 멀쩡하게 일어났다. 정신은 멀쩡한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다음 다음날은 완전히 뻗었다. 정신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망년회 중에 함피 아저씨를 만났다. 옛날 춘천에 살 때 같은 우주회 맴버 였는데 만난 적이 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우주회는 비가 오면 모여서 술 마시는 모임이었는데 눈이 올 때도 마시다가, 나중에는 아무 때나 마셨다. 우주회 맴버 중에서 몇몇은 세상을 떠돌아 다니는 Global Nalnari가 되었다.

오랫만에 한가해서 나는 왜 살아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봤다.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자연현상으로 결론지었다. 그 답이 변하지 않으니까,

*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그런데 댁은 왜 살아 있는가?

와 같은 질문은 부질없다. 나는, 주변의 자원을 소비하며 존재하는, 말하자면 자연 현상이 부자연스러워질 때까지 내 탓도 아니고 남 탓도 아니고 그 누구의 이유도 아닌 다만 우연이 무한히 겹쳐진 시공간의 한 지점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진 시공간의 다른 지점으로 알 수 없는 이유 또는 목적(무목적,불가해)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알기 쉽게 저차원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 -> ? -> ? <- ? -> ??

그래프가 저 모양이라서 아직도 시를 읽는 사람들마저 있다.

2004년 12월 31일, 송년회에 지친 나머지 점심 나절부터 저녁 늦게까지 프로그래밍.

2003년 12월 31일, 서울. 전날 먹은 술로 삘리리...

2002년 12월 31일, 이스탄불. 문라이트 팬션 옥상에 올라가 추위에 덜덜 떨면서 장차 아내가 될 여자를 안고 모포를 함께 뒤집어 쓴 채 보스포러스 해협 위에서 벌어지는 신년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내년에는 술 좀 작작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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