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을 기다리는 하얀 개는 정신이 맑고 배고픈 내면을 지니고 있으나 좌절하지 않는다.' 연초에 본, 앞 뒤 사정없이 지껄이는 사주가 꽤 괴상했다. 어느 날 카트에 실려나오는 딤섬들처럼 다양한 감정 중에서 우울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내 지랄병은 우울증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좌절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으로 생겨난 불치병 같은 것이다. 울화병은 매우 길고 복잡한 자기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단 것들을 먹어 혈당치를 증가시키면 이 불쌍한 머리통이 조금쯤 더 기억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내에게 연애 전력을 설명했지만 그가 이해할 꺼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첫눈에 반했다. 늘 그랬다. 첫눈에 그 여자와 내가 잘 될지 아니면 전혀 상관없는 각자만의 노선을 걷게 될 것인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오늘이 되건 수 년이 흐르건 우리가 다시 만나면 관계가 맺어질 것이란 점, 그들의 눈 뒷편으로 요동치는 감정이 보이기도 했다. 여자애들의 눈 뒷편에서는 참 재밌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백이면 백, 아주 백치같은 여자가 아니면(그런 여자들이 있다는 것이 전혀 놀랍지 않은 세상이다보니) 일종의 웨이팅 시스템이 작동했다. 결혼한 다음부터는 여자애들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어쨌든 그런 짐승같은 감각 때문에 항상 사귀던 여자애를 울렸다. 특이하고 경멸스러운 '재능'이긴 하지만, 여자애들은 그들의 지성과 나이를 먹어가면서 습득하는 자가통제의 마력을 십분 고려해도 쉽게 상처받고 망가지기 일쑤인 가엾은, 대상화되기에 부족한 동물이었다. 여자애들은 그들이 지닌 짐승같은 감각으로 내가 관계나 언어에 의해 상처받거나 그들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종류의 짐승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신시켰다. 마찬가지로 경멸스러운 재능이었다. 아직도 비행기가 베르누이의 정리 때문에 양력을 얻어 둥둥 떠다닌다고 학교에서 애들 상대로 사기 치는 것처럼,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 과학은 여성의 대뇌에 주름이 좀 덜 잡혔다는 얘기를 싹 빼버리거나 지능에 관해서 만큼은 사기를 치는 것 같다.
1995년 처음으로 홈페이지를 만들 때, 그때 만든 첫 페이지가 육자진언과 에머랄드 타블렛이었다. 올해 처음 읽은 책은 코엘료의 연금술사다. '자아의 신화'를 쫓아가는 양치기에 관한 얘기다. 그는 그것을 연금술, 자아의 신화 등등으로 불렀는데, 동양에서는 도닦기라고 한다. 결말부가 어영부영 넘어가 심심했다. 개나 소나 떠들어대는 전 단계 말고, 코엘료는 그 다음 수순으로 벌어지는 아주 심각하고 전형적인 사건들, 이를테면 마음 속에 보석을 가지게 된 남자가 그것 때문에 울화병이 생겨 황폐한 삶을 살아가거나 보석이 지껄이는 무의미한 소음에 완전히 미쳐버려 직장 생활을 하게 되는 얘기는 안 했다. 사내의 지지부진한 삶은 색채가 결여되어 소설가가 흥미를 잃었거나, 심하게 비아냥거리자면 소설가가 그런 삶에 관해 모르고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그래서 소위 문학에 좋은 감정을 가지기 어려웠다. 신랄하게 말해서 인간의 살 냄새와 사랑의 이름으로 적당히 후려치고 안주한 실패한 병신들의 자기만족에 겨운 계몽적 자전 같으니까. 이 먼지처럼 하찮고 보잘 것 없은 인간의 삶을 그나마 보람차게 만들어 주는 단 한 가지 그럴듯한 가능성은 진화다.
내 마음 속의 보석은 '네 몸은 더 이상 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옛날에 말한 적이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그 비웃음을 끈질기게 무시하고 깡으로 술을 마셨는데, 몸으로 전해지는 고통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 어째서 내 몸을 변화시키려는 것일까. 21세기에 적응하기 위해? 울화병은 더 심해졌다. 어젯밤에는 얼마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아침에 비틀거리며 일어나 사우나 갔다가... 거의 쓰러질 뻔 했다. 패배를 인정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작년 여름에 라면을 끓여먹으려고 작은 양은 냄비를 샀다. 브로콜리를 데칠 때도 쓸모가 있었다. 시금치를 삶기 위해 그것보다 큰 양은 냄비를 찌는듯한 여름에 하나 더 샀다. 겨울은 무와 시금치의 계절이다. 요즘의 무가 참 맛있다.
잘 익은 김치와 찬밥이 남아 있다. 수타면. 쫄깃쫄깃한 면발은 대적할 상대가 없을 듯. 당근은 괜히 넣은 것 같다.
계란은 뜨거운 국물에 살짝 익혀, 노른자를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한 입에 꿀꺽.
남은 김치를 투입해 국물을 빨갛게 만들어 찬밥을 말아먹으니 시원하다. 도통한 기분이다.
아내에게 연애 전력을 설명했지만 그가 이해할 꺼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첫눈에 반했다. 늘 그랬다. 첫눈에 그 여자와 내가 잘 될지 아니면 전혀 상관없는 각자만의 노선을 걷게 될 것인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오늘이 되건 수 년이 흐르건 우리가 다시 만나면 관계가 맺어질 것이란 점, 그들의 눈 뒷편으로 요동치는 감정이 보이기도 했다. 여자애들의 눈 뒷편에서는 참 재밌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백이면 백, 아주 백치같은 여자가 아니면(그런 여자들이 있다는 것이 전혀 놀랍지 않은 세상이다보니) 일종의 웨이팅 시스템이 작동했다. 결혼한 다음부터는 여자애들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어쨌든 그런 짐승같은 감각 때문에 항상 사귀던 여자애를 울렸다. 특이하고 경멸스러운 '재능'이긴 하지만, 여자애들은 그들의 지성과 나이를 먹어가면서 습득하는 자가통제의 마력을 십분 고려해도 쉽게 상처받고 망가지기 일쑤인 가엾은, 대상화되기에 부족한 동물이었다. 여자애들은 그들이 지닌 짐승같은 감각으로 내가 관계나 언어에 의해 상처받거나 그들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종류의 짐승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신시켰다. 마찬가지로 경멸스러운 재능이었다. 아직도 비행기가 베르누이의 정리 때문에 양력을 얻어 둥둥 떠다닌다고 학교에서 애들 상대로 사기 치는 것처럼,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 과학은 여성의 대뇌에 주름이 좀 덜 잡혔다는 얘기를 싹 빼버리거나 지능에 관해서 만큼은 사기를 치는 것 같다.
1995년 처음으로 홈페이지를 만들 때, 그때 만든 첫 페이지가 육자진언과 에머랄드 타블렛이었다. 올해 처음 읽은 책은 코엘료의 연금술사다. '자아의 신화'를 쫓아가는 양치기에 관한 얘기다. 그는 그것을 연금술, 자아의 신화 등등으로 불렀는데, 동양에서는 도닦기라고 한다. 결말부가 어영부영 넘어가 심심했다. 개나 소나 떠들어대는 전 단계 말고, 코엘료는 그 다음 수순으로 벌어지는 아주 심각하고 전형적인 사건들, 이를테면 마음 속에 보석을 가지게 된 남자가 그것 때문에 울화병이 생겨 황폐한 삶을 살아가거나 보석이 지껄이는 무의미한 소음에 완전히 미쳐버려 직장 생활을 하게 되는 얘기는 안 했다. 사내의 지지부진한 삶은 색채가 결여되어 소설가가 흥미를 잃었거나, 심하게 비아냥거리자면 소설가가 그런 삶에 관해 모르고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그래서 소위 문학에 좋은 감정을 가지기 어려웠다. 신랄하게 말해서 인간의 살 냄새와 사랑의 이름으로 적당히 후려치고 안주한 실패한 병신들의 자기만족에 겨운 계몽적 자전 같으니까. 이 먼지처럼 하찮고 보잘 것 없은 인간의 삶을 그나마 보람차게 만들어 주는 단 한 가지 그럴듯한 가능성은 진화다.
내 마음 속의 보석은 '네 몸은 더 이상 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옛날에 말한 적이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그 비웃음을 끈질기게 무시하고 깡으로 술을 마셨는데, 몸으로 전해지는 고통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 어째서 내 몸을 변화시키려는 것일까. 21세기에 적응하기 위해? 울화병은 더 심해졌다. 어젯밤에는 얼마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아침에 비틀거리며 일어나 사우나 갔다가... 거의 쓰러질 뻔 했다. 패배를 인정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작년 여름에 라면을 끓여먹으려고 작은 양은 냄비를 샀다. 브로콜리를 데칠 때도 쓸모가 있었다. 시금치를 삶기 위해 그것보다 큰 양은 냄비를 찌는듯한 여름에 하나 더 샀다. 겨울은 무와 시금치의 계절이다. 요즘의 무가 참 맛있다.
잘 익은 김치와 찬밥이 남아 있다. 수타면. 쫄깃쫄깃한 면발은 대적할 상대가 없을 듯. 당근은 괜히 넣은 것 같다.
계란은 뜨거운 국물에 살짝 익혀, 노른자를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한 입에 꿀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