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가죽 벗기기

잡기 2005. 3. 22. 00:06
터민 짠 - 백반집. 커리 한두 가지 고르면 밥을 포함한 일체의 음식이 자동으로 따라온다. 786 - 할랄 레스토랑. 786은 '자비롭고 은혜로운 신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allah the most beneficient and merciful)'라는 뜻의 아랍어와 비슷하게 생긴 숫자들. 치티, 체티 - 무제한 탈리를 먹을 수 있는 인디언 식당. 읽다가 침흘리면서 감동했다. 음식이 이리도 훌륭하니 이 나라 국민성은 틀림없이 좋을 것이다.

예전부터 교보문고를 마땅찮게 여기는 편인데, 아마존에 주문하려니 제 시간에 받을 수 없을 것 같아 교보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했다. 주말 포함해 나흘 기다렸다. 오늘쯤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출장을 미루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소식이 없다. 아침에 교보문고를 통해 배송현황을 조회해 보니 책은 이미 배송완료된 상태였다. 어? 책을 못 받았는데? 연락도 없고? 교보문고와 현대택배에 전화했다. 기사와 연결해 줄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란다. 나가봐야 해서 시간마다 줄곳 전화질을 했지만 연락이 없다. 8시간이 지났고, 교보와 현대택배의 상담하는 아가씨가 덜덜 떨 정도로 좀 심하게 다그치니까(그 아가씨들이 무슨 죄가 있겠냐만) 오후 다섯시가 다 되어서야 근처 편의점에서 다 떨어진 핸드폰 배터리를 허겁지겁 충전했다는 기사와 통화할 수 있었다. 진작 통화가 되었더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 한권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고 기다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기사놈은 책을 집 옆 창고에 던져놓고 나와 통화하지 않은 채 배송완료되었다고 기록한 것이다. 일에 치여 지난 몇 주 골치가 아팠는데, 오냐, 잘 걸렸다, 간만에 기사놈에게 조리에 맞게 고저장단을 맞춰 욕설을 퍼붓고 나니 의외로 시원했다. 조카들이 보고 있을지 몰라 이 블로그에 욕 안 쓰게 된 지 꽤 오래되었다.

수 개월 전 일; 택시 운전기사는 연세가 꽤 든 할아버지였다. 언제나 그렇지만 경제 얘기하다가 노무현 대통령을 살짝 깨물어 육즙이 흥건히 배어나올 때까지 씹어주고, 시간이 남아 빨갱이들 욕을 하다가(나는 옆에서 맞장구치고) 세월을 거슬러 일제시대 얘기까지 진행되었다.

할아버지는 당시 동네 일본놈들이 쌀을 빼앗아가 먹지 못하고 헐벗었다는데, 어느 집에선가 몰래 먹던 쌀이 발견되어 순사가 본보기로 그 집 아저씨 가죽을 벗기고 소금을 뿌려 길가에 버렸는데, 그 아저씨는 일본놈들 눈치 보느라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햇볕 아래에서 고통스럽게 죽었다고 한다. 죽일 놈들! 하고 분개하면서 혹시 그 순사놈이 한국인 아니었어요? 라고 물으니 그렇단다. 한국놈들이 더 지독했다고 한다. 참 어렵게 살으셨구나 하면서, 나는 보릿고개 얘기와 산에서 나무껍질 벗겨먹던 애기를 실감나게 늘어놓았다(뭐, 다 해봤으니까).

정신나간 젊은 놈 답지 않게 자꾸 맞장구를 치니까(살 날 얼마 안 남은 할아버지한테 꼬치꼬치 따지며 개겨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기분이 상했는지 교통체증으로 차가 잠시 멎었을 때 눈길을 길가로 돌리더니 '혹시 저게 뭔지 알아?' 라고 물었다. '저거요? 음 보리같지는 않고 밀이군요.' 기사 할아버지는 '요즘 젊은 것들은 보리하고 밀도 구분못해' 라는 말씀을 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는지 입을 우물거렸다. '보아하니 나이도 어려보이는데 네 녀석이 보릿고개를, 그리고 우리 세대가 고생한 얘기를 알 턱이 있겠냐, 그저 책에서 읽은 얘길하는 거지, 내가 생생한 경험담을 또 해줄께'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고생을 20세기에 했다.

영양가 없는 고생담은 생략하고, 할아버지와 달리 나는 지금 들판에 잡초가 우거진건지 보리가 자라는 건지도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별로 할 말이 없다. 어차피 전쟁나면 생각없고 날나리같다는 그 젊은 것들하고 나가서 나라 지키겠다고 총질하고 있을텐데 사이라도 좋아야지 괜한 트집 잡을 틈이 있을까? 우리 세대는 나라가 힘을 잃으면, 나라를 빼앗기면 좆된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거의 세뇌교육 수준이라 몸은 미국으로 발르고 싶어도 마음은 바로 총을 잡고 혹성탈출을 꿈꾸는 일본원숭이떼와 맞붙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지면은, 누군가 또 다시 살가죽이 벗겨지고 우리 모두는 나무껍질을 벗겨먹고 살게 될 것이다.

노인네 말씀에 따르면 '아무 생각 없고' 피만 펄펄 끓는 젊은 놈이 다이너마이트를 몸에 칭칭 감고 비장한 눈빛으로 참호 언저리를 쳐다보며 '제가 가겠습니다' 라고 말하면 '너의 희생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도록 하겠다, 뒷일은 맡겨라' 하고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다. 시마네현이 뽀개질뻔한 야당을 단결시키고, 여당과 야당이 한 목소리를 내게 했다. 심지어 이문열마저도 한마디 했다. 그런데 노총은 동참하지 않고 뭐 하고 있나? 못 살겠다며 머리 밀고 배째고 분신하는 것이 주특이잖아? 한,둘쯤은 과감히 불을 땡겨야 '애국'에는 노총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동질감을 주지. 분야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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