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음식 솜씨

잡기 2005. 8. 10. 22:11
아내는 아까 터키 갔다. '공식' 일정은 15일. 기왕 나가는 김에 여기저기 몇 개월쯤 돌아다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면 자기를 보고 싶어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고 하는 것과 같은 뜻이 된다. 슬기롭게 대처했다.

a. 마누라는 예전에 남들 앞에서 내가 자신을 마누라 라고 호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와이프'라는 말은 결혼 후 사용한 적 없다. 마누라가 '아내'보다 훌륭한 뜻을 갖고 있다고 말해도 믿지 않더만 역사를 공부하는 누나가 술자리에서 마누라의 어원을 설명해 주고 나서야 입을 닫았다. 그 때까지 내 입으로는 마누라가 아내보다 왜 나은지 말하지 않고 그것도 모르냐고 비웃었다. b. 영화 보고 새벽 두 시쯤 집으로 걸어오면서 방금 본 버그 투성이 동막골에 관해 얘기하다가 오필리아와 나르시서스 얘기를 슬슬 했더니 내가 햄릿과 그리스의 (바보스러운 그 민간) 설화를 잘못 알고 있다며 웹으로 검색해 보자고 해서 그렇게 했다. 내가 맞았다. c. 하루는 초밥에 와사비와 간장을 어디에 찍어 먹는가 하는 문제로 티격태격했다. 아내는 다음 날 열심히 웹을 검색해서 메신저로 '초밥 제대로 먹는 법' url을 날려줬다. 내가 틀렸다.

세 가지 일화의 공통점은, 제 남편에게 권위나 믿음이 심하게 부족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내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콧방귀를 뀌었다.

결혼하고 2년이 되어 간다. 날이 갈수록 내 칼질이나 음식 솜씨는 나아지고 있지만 아내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술에 취한 다음 날 아침 숙취로 골이 땡겨도 쓰린 배를 움켜쥐고 아내가 차려 주기 전에 '서둘러' 발딱 일어나 북어국을 끓였다. 시원한 북어국 한 사발 먹고 자면 개운하다. 아내의 음식 솜씨는 변화가 없다(아내는 자신의 음식 솜씨가 '평범한 수준'은 된다고 믿었다) -- 나아지거나 나빠지지 않았다. 그나마 밥 만큼은 잘 했는데, 그날 날씨나 기분에 따라 그것도 오락가락했다. 댁 음식에는 정성이 없어서 그래. 딸깍, 밥 한 공기 깔끔하게 비우고 숟가락을 내려 놓으며 말하면, 아내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밥하고 설겆이 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닌데(보통 일이다) 그걸 해 주고 싶어하는 자기 마음을 몰라주고 맛 없다고 꾸준히 투덜거리는 남편 때문에 열 받겠지? 암.

아내가 아는 결혼한 여자들 얘기를 이것저것 들어보니 제 남편한테 꼬박꼬박 밥상 차려주는 여자가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다. '가사가 즐겁다면 즐겁게 하면 되고,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하면 그만이지, 뭐하러 욕 먹어가면서, 말년에 억울해질 것이 틀림없는 가사노동이랍시고 하나?' 라고 말하면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들은 대개 기분 나빠 한다. 남편이 무뇌아 바보라서 고생하는 아내들이 꽤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내 아내와 같은 사람은 그저 그런 가치중립적 사실과 별 볼 일 없는 사실 관계의 평가로부터 상처를 입는, 스스로의 말대로 '평범한'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 나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또라이'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들린다. 아내나 누구든 날더러 그냥 또라이라고 말해도 화나거나 자존심 상한다거나 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재현한 원인이 내 자신인 바에야.

미역국, 콩나물국, 북어국, 김치찌게, 된장찌게 등 평범한 음식을 좋아한다. 수 년 동안 trial and error method를 적용해 본 결과 콩나물국은 간단하면서도 이상하게 맛 내기가 힘들었던 음식이다. 콩나물 잘 씻어 냄비에 넣고 소금 치고 끓여 한 숨 죽이고 식혔다가 물 붓고 끓이다가 파, 마늘 넣고 소금간 맞추면 끝나는,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단순한 음식이건만! 맑은 콩나물국이 잘 되면 거기에 고춧가루를 조금 뿌리거나, 숨죽일 때 좋은 천일염을 쓰거나, 멸치 대가리 등속으로 국물을 우려 김치와 함께 넣어 김치콩나물국을 만드는 등 여러 시리즈가 가능하다. 정확히 어떤 과정을 밟아왔길래 내가 콩나물국을 잘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타이밍 탓인 듯 싶다.

아내가 만든 수상한 콩나물국이 맛이 없다고 하면 그건 그저 '취향' 문제일 따름이며, 내가 몹시 까탈스럽게 군다고 핀잔을 준 후, 내가 한 콩나물국은 맛이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 부부에겐 맛에 관해 서로 적대적인 모르모트가 각자 하나씩 있는 셈이다. 이런 경우에는 상대 것이 맛이 없다고 끝까지 우기는 편이 승리를 거머쥐는데, 아내는 장구한 진화의 역사 속에서 아마도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진화에 관한 우스개: 현생 인류, 그러니까 당신과 나는 강한 생존압 속에서 끝까지 살아 남은 승리자들의 후손이다. 다른 관점: 음식점에서 음식이 맛없다고 계속 주장하다 보면 사회적으로 그와 함께 외식에 나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그 자신에게 이익을 줄 지도 모르는 동인이 점점 작아진다. 따라서 먹을 기회를 확대하려면 맛 없는 음식이라도 맛있게 먹어주고, 맛있다고 말하는 것이 낫다. (그 이상한 관점에서 보자면 내게 가장 큰 인센티브가 되는 경우는 나만 알고 맛있게 배불리 먹는 것이지 '먹을 기회의 확대'는 아닌 것 같다)


돼지갈비에 새우를 함께 구워 먹는 것이 아내의 '취향'이다.


돼지갈비에 새우처럼, 여행자들과 함께 돌아다니는 것도 아내의 '취향'이다. 인도, 자이푸르.

북어국도 콩나물국처럼 쉬우면서도 맛내기가 어려운 음식인지 모르겠다. 최소한 아내가 만드는 북어국에서는 a. 북어맛이 안 나거나, b. 호박 비린내가 나거나, c. 난데없이 멸치맛이 난다. 북어를 잠깐 물에 불리고 참기름에 볶은 다음 물 붓고 냉장고에 있는 야채 중 마음에 드는 것들을 썰어 붓고 끓이면 끝이다. 주로 호박, 감자, 양파, 청고추, 홍고추 등 냉장고에 자투리로 돌아다니는 흔한 야채를 사용하는데 양념은 후추가루 아주 약간, 고춧가루 약간 넣고 적당히 끓이다가 두부 있으면 넣고 파, 마늘을 넣고 약불에서 10여분 정도 끓인다. 계란 풀어 넣을 때도 있고 계란 안 넣어도 맛있다. 요즘은 나의 자랑스러운 북어국 만큼은 왠간한 업소에서 만들어 파는 것보다 낫다고 자부한다.

이렇게 해서 북어국과 콩나물국을 어렵게 개척했다.

미식가가 아니다(라고 말하면 냉소하는 몇몇이 있긴 하겠군). 해먹는 음식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내는 생야채를 아주 좋아하고, 조미료를 싫어하고, 밀가루 음식 중에서도 튀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생선을 뺀 갑각류 해산물을 좋아하고, 초밥을 즐기고, 맵고 얼큰한 음식을 즐기고(청양고추를 날 것으로 씹어도 눈물 한 방울 안 나온다) 들짐승 고기를 별로 즐기지 않는다.

심지어 개고기도 안 먹었다.

'취향'이 그 모양이니 6개월 가량 함께 여행하는 동안, 그나마 작은 사람이 살이 쏙 빠지고 얼굴에 기미가 끼고 광대가 튀어나온 채 더위에 비실거렸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에어컨이 갖춰지고 비교적 위생적인 레스토랑을 부러 찾아다니기도 했다 -- 아내의 만족도는 낮았다. 레스토랑으로도 안 되어 게스트 하우스 주방을 빌려 아내에게 밥과 국을 만들어 먹이기도 했다. 고향 음식을 그리워하며 인도로 도망치는 네팔 난민처럼 바싹 말라가는 모습을 눈뜨고 못 보았다.

반면 나는 이란에서 먹은 노린내가 심한 양골 샌드위치 빼고는(썩은 듯) 거의 모든 종류의 음식, 그러니까 박쥐고기,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들짐승의 고환, 바퀴벌레 튀김도 흥미진진하게 잘 먹었다. 나름대로 맛이 있었다. 심지어 시장통 한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자동차 먼지를 뒤집어 쓰고 파리가 들끓는 위생상태가 몹시 의심스러운 음식이나, 기름과 모래 먼지들이 둥둥 떠다니는 물 마저도 잘 먹고 잘 마셨다. 참고로 원효는 편식을 극복하고 나서 불교사에 길이 빛나는 걸작을 남겼다.

아무튼 뭔가를 잘해 보려면 꾸준히 관찰하고 학습하고 노력해야 한다. <-- 이 교조적이고 밥맛 떨어지는 말은 희한하게도 항상 톱니바퀴 물린듯 옳게 작동한다. 나는 노력했고 아내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고만장해서 잘난 척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닌, 그저 그뿐이다.

진실은 음식에 있다. 제 남편의 굳은 믿음은, 음식이 맛 없으면 성질이 드러워진다는 것이다. 내가 바로 가장 가까운 증거지. 암. 좀 더 확장하자면, 음식이 맛이 없으면 Intelligent design이나 핵이나 천동설이나 이라크 침공이나 무기소지 합법 같은 것이 받아 들여지는 똥오줌 못가리는 국민들이 우글거리는 미국 같은 변태 국가가 된다. 나라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서 활력 넘치는 서민 생활의 기본이랄 수 있는 네 가지 국 만큼은 심혈을 기울여 팔팔 끓여보길 기대한다.

그리하여 남편은 아내를 믿고, 아내는 남편을 믿고, 노력과 끈기로 갖은 편견과 고난, 특히 '취향'을 극복해 내고, 한 걸음 한 걸음씩 우리 앞에 펼쳐진 무한한 맛의 세계를 개척해 나아가 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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