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담 시드 데스티니: 염세주의는 사랑 한 방이면 끝장난다? 사랑 한 방에 끝장 날 염세주의는 가짜지. 제대로 된 염세주의자는 바다에서 갓 잡아 뜬 달콤물컹한 회와 끝내주게 얼큰한 매운탕을 먹더라도 자신의 이데아에 한 점 흔들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엿 드셔 건담 시드 데스티니. 45화까지 봤다.

20년 또는, 10년 안에 킬리만자로 꼭대기에 놓여 있는 희안하게 생긴 빙하는 모두 녹아 없어질 것이다. 그 전에 가서 만져볼 수 있으면 좋겠다. 원주민들은 보름달 밤 이과수 폭포에 떠오르는 밤 무지개를 보면 행복해진다고 믿었다. 이과수 폭포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보름달 밤 떠오른 그 무지개를 보았다. 시베리아의 샤먼은 이미 씨가 말랐지만 자작나무 숲속 오두막에서 자다가 신성한 까마귀가 말을 걸어오는 꿈을 꿀 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빨렝게 유적지에서 힌두 코끼리 석상을 발견했던, 사기가 횡행하던 낭만주의 시대를 답습하는 것 같군.

한 시간 가량 자전거를 정비했다. 그리고 새로 가져온 자전거를 정비하는데 추가로 네 시간을 보냈다. 체인, 핸들, 스템, 뒷 디레일러, 앞 디레일러, 브레이크 등 크랭크 암과 BB를 제외한 자전거의 거의 모든 부분을 분해하여 찌든 때를 닦고 녹을 벗기고 기름을 먹이고 다시 조립하여 브레이크를 조정하고 틀어진 앞 핸들도 조정하고 기어 변속까지 마쳤다. 테스트를 해 보니 앞 바퀴가 휘었고 뒷바퀴 축과 카세트가 틀어져 있는데 그건 내 손으로 어찌해 볼 수 없다. 시간이 다 되어 마감했다.

저녁 무렵 출발해서 천안에 도착, 몇 시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새벽에 당진의 장고항으로 향했다. 배를 빌려 낚시하기로 했다. 낚싯배 빌리는데 30만원, 장비와 먹거리 장만하는데 10만원 가량, 최씨 아저씨가 배 빌리는 비용을 부담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회비를 4만원씩 걷었다. 배 낚시는 처음이다.

전날밤 FTV에서 전라남도 어느 섬으로 부사리(?)라는 물고기를 잡으러 떠난 두 낚시꾼을 보여줬는데 이틀 동안 배 타고 돌아다니며 삽질했지만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뭔가 하나 낚기는 낚았다. 지나가는 갈매기가 걸렸다. -_- 그런 일 안 생겼으면 좋겠다.


장고항. 들물이 아직 덜 빠져나간 아침 나절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어 뱃전에 오르기 전에 멀미할까봐 걱정했는데 여행 다니며 갖가지 종류의 배를 타서인지 괜찮다. 조류가 거세다. 종종 낚싯줄이 엉킨다.

미꾸라지 미끼를 써서 추를 매단 타래 낚시인데 어군탐지기가 있어 모니터를 보던 선장이 배를 멈추면 추를 내려 낚다가 끌어올리고 다른 포인트로 이동하는 것이다. 오전 9시까지 한 마리도 낚지 못하다가 (김씨 아저씨는 시작하자 마자 30cm가 넘는 우럭을 낚았다. 어이가 없다) 11시 무렵까지 우럭 세 마리를 낚았다. 각각 20cm, 15cm x 2 가량. 한 번은 큰 놈이 물었는데 미끼와 바늘을 통째로 물고 사라졌다. 아쉽다. 성적이 좋다고 볼 수 없는데 아무래도 깊이를 잘못 잡은 것 같다.

미끼를 물 당시에는 입질이 좀 느껴지다가 잡아당기면 저항없이 그냥 끌려 올라온다. 17m 물 속에서 급작스럽게 끌어올린 우럭은 기압차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지 수조에 쳐넣자 배를 까 뒤집고 거꾸로 헤엄친다. 20m 물속에 있어본 적이 있어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다.

열한 시가 좀 넘어 선장이 회를 뜨기 시작했다. 큰 놈 다섯만 골랐다. 초고추장에 두텁게 썬 회를 한 점 찍어 소주 한 잔 들이키니 살 것 같다. 회 뜨고 남은 머리로 매운탕을 끓여 주는데 맛이 기가 막히다. 소주 몇 병 비우고 배를 빵빵하게 채우고 나니 만사가 귀찮아져 뱃전에 누워 버렸고 낚시고 나발이고 다들 지쳐서 그만 돌아가기로 했다.

소주 한 잔 하고 밥 먹었으면 오늘 일정은 끝난 것이지.


얼음에 담궈두었던 남은 잔챙이들. 맨 윗것이 20cm 가량. 잡은 우럭은 모두 23마리, 30cm 이상 씨알은 무려 다섯 마리나 되었다. 회 떠 먹고 남은 18마리를 어떻게 처분할까 고민 하다가 나를 뺀 셋이 나눠 가져갔다. 난 서울로 올라가야 하고 아이스박스를 가져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입맛을 다셨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꾸준히 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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