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비자

잡기 2005. 10. 14. 00:24
리마나 멕시코시티로 가려면 두 가지 길이 있다.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뉴욕등의 미국을 경유하는 방법과 벤쿠버를 경유해 들어가는 방법. 후자는 전자에 비해 항공권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고 심하면 50만원 이상 차이가 난다. 그러나 미국을 경유하려면 미국 비자가 있어야 한다. TWOV(transit without visa)가 없어진지 오래되어서 제3국을 향하기 위한 경유지로 미국의 한 도시를 선택하더라도, 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궁리 끝에 아내가 미국 비자를 만들기로 했다. 비자피 100달러면 적어도 50만원을 절약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아내는 대략 5년 동안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느라 장기간 무직 상태고 본의 아니게 이 집안의 '기둥'인 나 역시(아내더러 호주하라니까 귀찮단다. 그래서 귀찮은 것은 내가 다 하고 자기는 재밌는 것만 하고 다닌다) 제대로 된 직장 없이 4년이 흘렀다. 사업자 등록을 하지 않았고 별다른 직장도 없는 셈이니 비자 받기가 어려울 꺼라고 주변에서 말들 한다.

안 어려워. 라고 생각했다.

안 어려우니까 아내 비자 서류는 대부분 내가 준비했다. 소득금액 증명원이나 각종 세금 납부 증명, 통장 사본 따위들, 인터넷을 여기저기 뒤적이고, 그리고 있지도 않은 프리랜서 계약서까지 만들어줬다. 계약서는 하나도 빼먹지 않고 꼼꼼하게 작성했다. '계약은 2년 단위로 갱신되며 특별히 명시하지 않는 한 계약은 자동 연장된다. '을'(나)은 2개월 이상 댓가를 지급받지 못하면 갑(회사)과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있다. 을은 일주일에 1회 이상 갑의 회사를 방문하여야 하나 강제사항은 아니다. 을은 갑에게 보고할 의무가 없다. 을은 갑과의 계약과는 별개로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을은 놀고 싶으면 놀아도 된다. 기타 등등...'

그 계약서는 내가 작성했다. 저런걸 막힘없이 줄줄 써 내다니... 가끔은 내가 프리랜서만 하기엔 아까운 인재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계약서가 없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싶어서 갑과 을이 각각 한 통 씩 가지고 있어야 하는 계약서는 없애 버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분통이 터졌다. 말이 프리랜서지 어디 마음대로 놀러다닐 수가 없잖아?

아내는 며칠 전 인터뷰를 받았는데, 그 양키 영사는 내가 정성 들여 준비한 서류는 쳐다보지도 않고 깡그리 무시한 채, 몇 가지 시시한 질문만 던지고 10년 짜리 비자를 닭모이 던지듯이 그냥 내줬다. 갑근세 내는 제대로 된 직장조차 다니지 않는 남편을 두었고, 그야말로 생날날이인 아내 또는 짝퉁 하우스와이프 또는 불량주부가 미국 비자를 거저 먹었다는 소식은 아마도 아내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줬을 것이다. 미국에 가고 싶어서 그러는게 아니고, 남미갈 때 경비 절약 차원에서.

영사가 물었다: 왜 남편하고 같이 가지 않아요?
아내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남편은 돈 벌어야죠.

암...

자전거를 몰고 야경 보러 강변에 나갔다. 인라인을 타던 어떤 아줌마가 다가와 자전거가 비싸 보인다고 말하며 이것저것 물어본다. 싸구려에요. 그저 티벳 하늘을 품고 있는 내 마음마저 싸구려가 아니길 바랄 뿐. 연습 삼아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바람이 많이 불어서 볼만한 풍경이 없다. t mode 0.33초, f4.8, 노출보정 +1, iso 200, 화이트밸런스 자동, 3배줌, 그리고 손삼각대. 10/22, 10/29 한강고수부지에서 벌어지는 세계불꽃축제에서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있을까? 돈이나 벌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