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버스터2

잡기 2005. 10. 27. 23:06
렉쳐는 온라인으로 3시간쯤 하고(가기 귀찮아서) 인턴들에게 xml database를 만들고 sql parser를 만들어 엑세스하는 과제를 내 줬다. 렉쳐 동안 CFG와 EBNF, 렉시칼 아날라이저나 시맨틱 아날라이저 간의 관계 같은 기본적인 지식을 가르쳤다. 한씨 아저씨는 타깃의 spec과 requirement를 보고(이런 걸 다 문서로 만들어 제공할 뿐더러 과제 결과 제출하면 어노테이션도 해주고 손수 짜는 시범도 보여준다. 얼마나 친절한가?) 저런 과제를 내주는 것이 잔인하다고 한다. 글쎄다. 한씨 말로는 4년제 대학 나와서 컴파일러 이론을 배우고 그걸 '간단하게, 가벼운 마음으로'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사람이면 '인재'라고 한다. 그럼 내 주변엔 인재가 널렸다. 웃기는 소리.

그의 말을 듣고 나서 생각한 바가 있어 인턴들에게, '간단하게', '가벼운 마음으로' 과제를 해 보라고 말했다. 예, 라고 대꾸한다. 흐뭇하다.

얼마나 어려울 지 시간을 내서 짜보니 두 시간 정도 걸렸다. 프로그래밍을 처음 시작하는 친구들이니 넉넉하게 50배 잡아서 100시간, 그러니까 5일 정도 시간을 줬다. 과제에 매달리다 보면 다이어트도 되고 한국의 정치경제적 현실도 잊고 도 닦는 기분이 들어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아무튼 좋을 것 같다. '나는 소울 푸드가 한국의 음식인 줄 알았어요. 한국의 수도가 소울이잖아요. 하나도 안 웃기나봐요?' 라는 대사가 생각난다.

한씨 아저씨에게 말했다; 그 친구들이 프로그래밍이 재밌대.
하하 웃는다. 비록 텍스트로 전해지는 웃음이지만 커다란 챔버에서 메아리치는 것처럼 공허하게 들렸다. 연습 게임 끝나고 현업에 투입되어 식은 땀이 줄줄 흐르는 상황이 되면 잘 견딜 수 있을까? 나처럼 한 십 년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신경세포가 무뎌져 절망이나 슬픔 같은 정서적 감응이 서서히 사라지는 일종의 환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슬픔은 쿨하게 냉동시켜 두기로 하고...

"굉장하군..."
"저것이 바로 토플레스의 힘!!"
"언니 굉장해요!"

가이낙스 20주년 기념으로 만들었다는 '톱을 노려라! 건버스터2'. 하는 짓을 보니 이 놈들은 아직 건버스터 정신을 잊지 않았다. 뻑간다.


노노상은 이렇게 노력과 곤조로 우주괴수를 쪼갠다. 우리 인턴들이 보고 배웠으면 싶다.

아내는 9만 9천원짜리 태국 항공권이 나왔다고 말했다. 치앙마이에 가서 아무 생각없이 gps만 들고 며칠 트래킹 하다보면 머리 속에서 똥물처럼 출렁이는 생각들이 사라질 것 같은데, 표가 매진되었다. 어떤 블로그에서 본 문구다; 어떤 시인이 말하길, 30대는 새장 문을 열어놓아도 날지 못하는 주금류라고 한다.

아까 소울 푸드 운운한 말은 dead like me라는 드라마에서 본 것 같다. 내가 아는 소울 푸드는 조상의 시체를 뜯어먹고 그의 육신과 영혼을 내 안에 두는 종류 하나 뿐이다. 앱솔루션 갭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돼지 스콜피오는 어깨의 전갈 문신을 지우고 새로 태어났다. 레몽트르는 그를 미스터 핑크라고 불렀다. 볼요바도 죽고 스케이드도 죽고 레몽뜨르도 죽고 앙뜨와네트도 죽었다. 아무튼 주인공 비슷한 것들은 모두 죽었다-죽였다. 레빌레이션 스페이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다들 멋있게 죽어갔다. 타르시스의 백정은 도살당했지만 그의 죽음은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한(그리고 인류를 구하기 위한) 숭고한 자기희생이었다. 마지막 남은 미스터 핑크 역시 숯불 바베큐나 돼지갈비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앱솔루션 갭의 플롯이 시시하다지만, 일을 마치고 지평선을 향해 돼지답게 아장아장 걷다가 픽 쓰러져 죽었다. 그가 생전에 즐겨 말하길, 돼지는 돼지가 해야 할 일을 한다. 그 말이 무척 마음에 와 닿는다. 나는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다.

내 몸무게는 현재 64.7kg, 생각을 많이 해서 체량을 상당히 잃었다. 돼지고기만이 몸과 영혼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다. 앱솔루션 갭을 본 이후로는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돼지고기가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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