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왔다. 백화수복 사다가 전자렌지에 덥혀 마셨다. 알딸딸하다.
'믿어. 희망이 있기에 기적이 일어나는 거야' -- 그래서 믿는 도끼도 다시 보는 내 인생에 기적이 한 번도 없는 거였군. 희망은 또 뭐야? 먹는거야?
좋다는 피카사 쓰다가 불편해서 지웠다. 그림외 정보를 편하게 직접 다룰 수 있는 인터페이스가 없고(JPEG는 그림 자체에 코멘트를 삽입할 수 있다. 사운드나 아예 장문을 기록할 수도 있다) 만화책 볼 일 없는 사람들이 추억과 앨범을 '뽀대나게' 관리하는 데나 쓰는 프로그램같다. 컴퓨터에 뭔가를 지시했을 때 즉각적인 반응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하루에 다루는 텍스트나 이미지 따위가 얼마인데 화장품을 쳐바른 '코스메틱 프로그램' 따위로 시간을 소비해야 하나? 피카사의 인터페이스 역시 그런 면에서 형편없다. 세간의 평은 좋은데, 내가 보기엔 구리다. 요즘 보는 만화책들:
강철의연금술사 11
더 파이팅 70
도시로올시다 5
따끈따끈 베이커리 17
아스피린 7
얼라이브 6
클레이모어 7
트윈스피카 6
홀리랜드 8
호문쿨루스 6
플루토 2
노다메 칸타빌레 13
갓핸드테루 24
간츠 217화
드라이브 10
식객 7
데스노트 11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아는 만화는 피안도, 간츠, 클레이모어, 데스노트 등이다. 몇몇 보고 싶은 SF 만화는 만화방에나 가야 볼 수 있을 것 같다. 통 구할 수가 없었다. 레어 폐인 동산이나 마이너 왕따 지옥에 있겠지. 피안도는 작화부터 스토리까지 회가 거듭될 수록 뱃대기에 기름 끼는 것이 눈에 보이는 만화라서 읽기를 중단했다. 왠만하면 만화 연재 중단하지. 헝그리 베타 테스트 정신이 부족해.
'지구 정복 결사' 모임에 갔다. 어떤 면에서는 케로로 중사와 정서적 연대를 공유하는 사람들인 것 같기도 하고, 개중 자기는 SF 팬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오리발을 선뜻 내미는 사람들의 모임인 것 같기도 했다. 유씨에 따르면 '맛대결 지구탐험대'일 가능성도 있다.
이씨 아저씨와 프로젝트 방법론에 관해 열을 올리며 얘기하다가 앞선 일행을 놓쳤다. 또 다른 이씨 아저씨는 게임 회사 이야기라는 만화책을 들고 나타났다. 딱히 애정을 둘 데가 없어서 '여전히 회사로 가야 하는 인간들'의 얘기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할 소재를 다룬다.
양서 '호에로 펜'을 빌려준 이씨 아저씨와 책임 설계'론'과 아이디어의 기술적 분석에 관한 얘기를 더 할까 했는데(안개 낀 사르갓소에서 등대를 찾는 꼴이다), 인생의 다방면에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길을 잃고 헤메는 처지라 그러지 못했다. 마침 테쓰 아저씨가 정량적 해석에 관한 얘기를 아스님과 하고 있었다. 불편한 일이지만 1+1이 2가 되지 못하는 세계와 그렇게 되어야 하는 세계(람다산법에 의해 λ f x. f (f x)) 알아먹기 쉽게 풀면 S is successor, a = b if and only if S(a) = S(b). 0 := {}, 1 := S(0) = {0}, 2 := { 0, { 0 } } 나머지는 알아서)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이 꽤 오래전 일이다. 예전에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며 내가 해석하는 '세계 현상'에 두루 쓰일 수 있는 정식을 구현했다. 1+1 = 2x10^n. 악몽은 가시지 않았다. 정식화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보통' 사람이 1+1을 얘기할 때는 연산자 과적을 의미한다. 뭐 어쨌거나, 그 '의미'를 알아도 의미가 '지시하는 바'에 언제나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수학자가 아닌 대개 누군가에게 정량화와 정식화를 얘기할 때 수치와 덧셈 연산자는 문맥을 통한 지시자가 되기 때문이다. 지시자는 그 자신의 합목적성을 충족시킬 때까지 간구되는 (또는 공명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1+1 에는 따라서 답이 없다. 이성적(인체), 사회적, 문화적 '문맥'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문맥은 그 시대가 공통 규범하는 *합리성*을 말하는 것이지 과학적 인식체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정량화는 그래서 과학적 사고방식의 기본적인 요소일 뿐 그것이 과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문맥에 상응하는 부당한 논거에 의한 추리지.
그럼 역으로 말해 문맥만 맞으면 뭐든지 허용될 수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 처세다. 나는 악령과 함께 댄스 스텝을 행복하게 밟는 사회 속에서 주거한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세계-내-자신을 증명할 일목요연하고 확고부동한 체계를 스스로 체연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그런 경우가 있으면 알려달라. 남은 인생 동안 꼭 보고 싶은 바다니까.
드래곤 사쿠라: '주입식 이외의 교육이 무얼 할 수 있겠나!' 제 5화의 제목은 이랬다; '울지마라. 네 인생이다'
불쌍한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고(또는 테스 아저씨 말에 따르면 '아수라 백작'이 되었다고) 울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뭐 행복하면 된거지.
연애의 목적: 사귀었던 여자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 뿐이다. '피타고라스의 바지'라는 책에서는 '도대체 70년대 성차별 금지법이 나오고 사반세기가 지났음에도 여성은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차별 받고 있다니 저엉말 한심하기 그지없다' 라고 말했다. 저자는 이성적(합리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가 좀... 다르다는 것을 구분하지 않았다.
존경하는 아인슈타인이 그래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인간으로서는 형편없는 작자였고 그의 가정사가 비극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자신의 마음도 무겁다고 말한다. <-- 보시다시피. (상대성 이론과 행복한 가정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상대적인 건가?) 그가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달달 외웠다면 30대 이후 수십년이 지나 그가 죽을 때까지 하라는 연구는 안하고(성과가 없었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심심할 때 깽깽이를 켜고 가족을 내팽개친 채 산발한 머리와 맨발로 돌아다니며 낼름 혓바닥 내미는 사진이나 찍었다는 것은 더더욱 마음을 무겁게 했을 것이다. 이런 거지같은 주장을 보는 내 마음도 무겁다.
마음이 무거웠던 저자는 신의 입자라 불리는 힉스 입자를 찾기 위해 초거대 입자 가속기를 만들어 입자 탐색(집나간 미아 찾기 범 입자물리학 운동)에 열을 올리며 과학을 제의로서 신성시하는 과학자들의 애티튜드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으며 차별 철폐의 개안적 사고는 그곳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여성 과학자들이 끼면 과학문화가 달라진다라... 뭐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희망'찬 미래를 보여줄 수는 없고? 일부분 공감하지만 지난 30여년 동안 눈에 띄는 성과 없이 11차원 줄넘기나 하면서 SF틱하게 막나가는 양자역학이 여성에게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 같다.
그가 미주알 고주알 억울한 사연이라고 늘어놓는 여류 과학자들의 얘기는 30년 전의 것이었다. 여자애들이 그렇게 거리낌 없이 찌질스러운 주장을 하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하지 싶다. 찌질스럽지 못해서가 아니라, 상황을 그 자신과 거리낌없이 고립시킬 수 있는 나이브한 천연덕스러움 말이야. 피치못할 사정으로 개마초가 되서 참 미안해지지. 오직,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울린 여자 수를 손 꼽아 봤다. 손가락이 모자라서 관뒀다.
연애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고, 1+1의 복잡성에는 미치지 못하나 여자가 슬쩍 낀 관계의 복잡성을 나타내는 내 나름의 수식이 있다; n(n-1)/2 approx. n^2 어...? 그런데 그런 식이 정말로 존재했다. 이더넷의 창시자가 만든 네트웍의 법칙이라나? 팔로 알토에서 이더넷 만든 작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한심한 네트웍을 만들어서 팔아먹었나... 궁금했다. 똥고집이었다. 그 똥고집이 에테르넷이라는 '물리'적인 미디엄을 통해 세계를 석권한 기술적 우점종이 된 과정은, 호모 사피엔스가 세계를 말아먹은 어이없는 상황과 지나치게 흡사하다.
아무튼 어린 여자애들이 놀다가 하는 심한 얘기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너랑 절교야' '미친년'이나 '개같은 년' '씨발년' 등속의 욕설은 그에 비하면 고작 감탄사 밖에 되지 않는다. 그걸 꽤 오랫동안 재미있어 했는데, 시대가 바뀌니 욕설은 감탄사 나열로 한심하게 바뀐 것 같다. 시대가 그렇게 바뀌었어도 우아함을 잃지 않은 나는 '피타고라스의 바지'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너랑 절교야!
제이양이 상 받은 기념으로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한 턱 쏘아서 즐겁게 마셨다. 고마운 김에 그의 출품작을 정성껏 읽었다. 그래픽 노블을 지향하는 것인가? 그림이 글에 떠밀려 질질 끌려다니는 인상이다. 작화의 공간적 상상력이 영 꽝이군.
주인공이 다리가 부러졌을 때 '그래 이제 지구상에서 중력을 지탱해 줄 다리가 없어졌으니 남은 두 팔을 열심히 퍼덕여 자력갱생으로 무중력의 우주를 헤엄쳐 나가야 하는 당위성을 스스로에게 납득할 결정적 계기가 되었군' 하고 무릅을 탁 쳤으나, 주인공은 한가할 때 바둑이나 두면서 3개국어 열나 공부해서 우주에 갔다 온다. 무시하자는 건 아니고, 아, 언어학습의 중요성은 이 만화를 참고. 그냥 갔다 왔다. 믿음과 희망으로 충만한 명랑 범생 성공기다.
... 그리고 우주에 자신이 위치할 거점을 찾는다는 탐색의 연대기다. 내 인생, 그러니까 정열의 초절정 패턴 연대기와 흡사하다. 궁금해서 우주류가 무엇인지 찾아봤다. 상상과 달랐다. 압도적인 외계 흰돌 군단이 개떼처럼 목성 외곽에서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면 목성을 내폭시켜 오르트 검은 돌 졸개들을 전개해 적을 물리친다거나 백돌 검돌이 난해하게 소용돌이치는 두 은하단이 맞짱을 뜨는 신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생각만 해도 골이 아파오는 3차원 바둑도 아니었다. 이렇게 멋진 가젯을 주인공의 소녀틱한 감상주의를 거들기 위한 목적으로만 사용한 것이 아깝다.
전반적인 인상은 습작 수준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인물의 몸뚱이와 정신세계를 난도질하여 뼈와 살점과 피가 튀긴 옷을 입고 수술실을 나와 히죽히죽 웃으면서 '수술이 끝났습니다' 라고 말하는 변태 외과의적인 각오는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각오 없어도 돈은 된다.
이런 정신으로...
도서관에 갈 때는 산을 넘어 갔다. 책을 낑낑 메고 산을 넘어 도서관에 가서 반납하고 새 책들을 빌려 다시 산을 넘어왔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책을 이렇게 쉽게 빌릴 수는 없는거야', 자신을 채찍질할 겸 부러 좋은 길 놔두고 이렇게 힘들게 왔다갔다 하는데, 회원님은 대출기한을 넘겨서 책을 대여해 갈 수 없다는 말을 하면 쓸쓸해진다. 요즘은 한 달에 3-4권 읽기 바쁘다. 시리즈 물을 네 개나 해치우고 만화책으로 폭식을 하다보니, 직사각형 안에 배열된 재미없는 글자 조합을 보면 졸음이 밀려왔다.
'믿어. 희망이 있기에 기적이 일어나는 거야' -- 그래서 믿는 도끼도 다시 보는 내 인생에 기적이 한 번도 없는 거였군. 희망은 또 뭐야? 먹는거야?
좋다는 피카사 쓰다가 불편해서 지웠다. 그림외 정보를 편하게 직접 다룰 수 있는 인터페이스가 없고(JPEG는 그림 자체에 코멘트를 삽입할 수 있다. 사운드나 아예 장문을 기록할 수도 있다) 만화책 볼 일 없는 사람들이 추억과 앨범을 '뽀대나게' 관리하는 데나 쓰는 프로그램같다. 컴퓨터에 뭔가를 지시했을 때 즉각적인 반응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하루에 다루는 텍스트나 이미지 따위가 얼마인데 화장품을 쳐바른 '코스메틱 프로그램' 따위로 시간을 소비해야 하나? 피카사의 인터페이스 역시 그런 면에서 형편없다. 세간의 평은 좋은데, 내가 보기엔 구리다. 요즘 보는 만화책들:
강철의연금술사 11
더 파이팅 70
도시로올시다 5
따끈따끈 베이커리 17
아스피린 7
얼라이브 6
클레이모어 7
트윈스피카 6
홀리랜드 8
호문쿨루스 6
플루토 2
노다메 칸타빌레 13
갓핸드테루 24
간츠 217화
드라이브 10
식객 7
데스노트 11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아는 만화는 피안도, 간츠, 클레이모어, 데스노트 등이다. 몇몇 보고 싶은 SF 만화는 만화방에나 가야 볼 수 있을 것 같다. 통 구할 수가 없었다. 레어 폐인 동산이나 마이너 왕따 지옥에 있겠지. 피안도는 작화부터 스토리까지 회가 거듭될 수록 뱃대기에 기름 끼는 것이 눈에 보이는 만화라서 읽기를 중단했다. 왠만하면 만화 연재 중단하지. 헝그리 베타 테스트 정신이 부족해.
'지구 정복 결사' 모임에 갔다. 어떤 면에서는 케로로 중사와 정서적 연대를 공유하는 사람들인 것 같기도 하고, 개중 자기는 SF 팬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오리발을 선뜻 내미는 사람들의 모임인 것 같기도 했다. 유씨에 따르면 '맛대결 지구탐험대'일 가능성도 있다.
이씨 아저씨와 프로젝트 방법론에 관해 열을 올리며 얘기하다가 앞선 일행을 놓쳤다. 또 다른 이씨 아저씨는 게임 회사 이야기라는 만화책을 들고 나타났다. 딱히 애정을 둘 데가 없어서 '여전히 회사로 가야 하는 인간들'의 얘기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할 소재를 다룬다.
양서 '호에로 펜'을 빌려준 이씨 아저씨와 책임 설계'론'과 아이디어의 기술적 분석에 관한 얘기를 더 할까 했는데(안개 낀 사르갓소에서 등대를 찾는 꼴이다), 인생의 다방면에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길을 잃고 헤메는 처지라 그러지 못했다. 마침 테쓰 아저씨가 정량적 해석에 관한 얘기를 아스님과 하고 있었다. 불편한 일이지만 1+1이 2가 되지 못하는 세계와 그렇게 되어야 하는 세계(람다산법에 의해 λ f x. f (f x)) 알아먹기 쉽게 풀면 S is successor, a = b if and only if S(a) = S(b). 0 := {}, 1 := S(0) = {0}, 2 := { 0, { 0 } } 나머지는 알아서)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이 꽤 오래전 일이다. 예전에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며 내가 해석하는 '세계 현상'에 두루 쓰일 수 있는 정식을 구현했다. 1+1 = 2x10^n. 악몽은 가시지 않았다. 정식화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보통' 사람이 1+1을 얘기할 때는 연산자 과적을 의미한다. 뭐 어쨌거나, 그 '의미'를 알아도 의미가 '지시하는 바'에 언제나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수학자가 아닌 대개 누군가에게 정량화와 정식화를 얘기할 때 수치와 덧셈 연산자는 문맥을 통한 지시자가 되기 때문이다. 지시자는 그 자신의 합목적성을 충족시킬 때까지 간구되는 (또는 공명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1+1 에는 따라서 답이 없다. 이성적(인체), 사회적, 문화적 '문맥'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문맥은 그 시대가 공통 규범하는 *합리성*을 말하는 것이지 과학적 인식체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정량화는 그래서 과학적 사고방식의 기본적인 요소일 뿐 그것이 과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문맥에 상응하는 부당한 논거에 의한 추리지.
그럼 역으로 말해 문맥만 맞으면 뭐든지 허용될 수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 처세다. 나는 악령과 함께 댄스 스텝을 행복하게 밟는 사회 속에서 주거한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세계-내-자신을 증명할 일목요연하고 확고부동한 체계를 스스로 체연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그런 경우가 있으면 알려달라. 남은 인생 동안 꼭 보고 싶은 바다니까.
드래곤 사쿠라: '주입식 이외의 교육이 무얼 할 수 있겠나!' 제 5화의 제목은 이랬다; '울지마라. 네 인생이다'
불쌍한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고(또는 테스 아저씨 말에 따르면 '아수라 백작'이 되었다고) 울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뭐 행복하면 된거지.
연애의 목적: 사귀었던 여자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 뿐이다. '피타고라스의 바지'라는 책에서는 '도대체 70년대 성차별 금지법이 나오고 사반세기가 지났음에도 여성은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차별 받고 있다니 저엉말 한심하기 그지없다' 라고 말했다. 저자는 이성적(합리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가 좀... 다르다는 것을 구분하지 않았다.
존경하는 아인슈타인이 그래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인간으로서는 형편없는 작자였고 그의 가정사가 비극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자신의 마음도 무겁다고 말한다. <-- 보시다시피. (상대성 이론과 행복한 가정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상대적인 건가?) 그가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달달 외웠다면 30대 이후 수십년이 지나 그가 죽을 때까지 하라는 연구는 안하고(성과가 없었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심심할 때 깽깽이를 켜고 가족을 내팽개친 채 산발한 머리와 맨발로 돌아다니며 낼름 혓바닥 내미는 사진이나 찍었다는 것은 더더욱 마음을 무겁게 했을 것이다. 이런 거지같은 주장을 보는 내 마음도 무겁다.
마음이 무거웠던 저자는 신의 입자라 불리는 힉스 입자를 찾기 위해 초거대 입자 가속기를 만들어 입자 탐색(집나간 미아 찾기 범 입자물리학 운동)에 열을 올리며 과학을 제의로서 신성시하는 과학자들의 애티튜드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으며 차별 철폐의 개안적 사고는 그곳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여성 과학자들이 끼면 과학문화가 달라진다라... 뭐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희망'찬 미래를 보여줄 수는 없고? 일부분 공감하지만 지난 30여년 동안 눈에 띄는 성과 없이 11차원 줄넘기나 하면서 SF틱하게 막나가는 양자역학이 여성에게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 같다.
그가 미주알 고주알 억울한 사연이라고 늘어놓는 여류 과학자들의 얘기는 30년 전의 것이었다. 여자애들이 그렇게 거리낌 없이 찌질스러운 주장을 하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하지 싶다. 찌질스럽지 못해서가 아니라, 상황을 그 자신과 거리낌없이 고립시킬 수 있는 나이브한 천연덕스러움 말이야. 피치못할 사정으로 개마초가 되서 참 미안해지지. 오직,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울린 여자 수를 손 꼽아 봤다. 손가락이 모자라서 관뒀다.
연애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고, 1+1의 복잡성에는 미치지 못하나 여자가 슬쩍 낀 관계의 복잡성을 나타내는 내 나름의 수식이 있다; n(n-1)/2 approx. n^2 어...? 그런데 그런 식이 정말로 존재했다. 이더넷의 창시자가 만든 네트웍의 법칙이라나? 팔로 알토에서 이더넷 만든 작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한심한 네트웍을 만들어서 팔아먹었나... 궁금했다. 똥고집이었다. 그 똥고집이 에테르넷이라는 '물리'적인 미디엄을 통해 세계를 석권한 기술적 우점종이 된 과정은, 호모 사피엔스가 세계를 말아먹은 어이없는 상황과 지나치게 흡사하다.
아무튼 어린 여자애들이 놀다가 하는 심한 얘기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너랑 절교야' '미친년'이나 '개같은 년' '씨발년' 등속의 욕설은 그에 비하면 고작 감탄사 밖에 되지 않는다. 그걸 꽤 오랫동안 재미있어 했는데, 시대가 바뀌니 욕설은 감탄사 나열로 한심하게 바뀐 것 같다. 시대가 그렇게 바뀌었어도 우아함을 잃지 않은 나는 '피타고라스의 바지'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너랑 절교야!
제이양이 상 받은 기념으로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한 턱 쏘아서 즐겁게 마셨다. 고마운 김에 그의 출품작을 정성껏 읽었다. 그래픽 노블을 지향하는 것인가? 그림이 글에 떠밀려 질질 끌려다니는 인상이다. 작화의 공간적 상상력이 영 꽝이군.
주인공이 다리가 부러졌을 때 '그래 이제 지구상에서 중력을 지탱해 줄 다리가 없어졌으니 남은 두 팔을 열심히 퍼덕여 자력갱생으로 무중력의 우주를 헤엄쳐 나가야 하는 당위성을 스스로에게 납득할 결정적 계기가 되었군' 하고 무릅을 탁 쳤으나, 주인공은 한가할 때 바둑이나 두면서 3개국어 열나 공부해서 우주에 갔다 온다. 무시하자는 건 아니고, 아, 언어학습의 중요성은 이 만화를 참고. 그냥 갔다 왔다. 믿음과 희망으로 충만한 명랑 범생 성공기다.
... 그리고 우주에 자신이 위치할 거점을 찾는다는 탐색의 연대기다. 내 인생, 그러니까 정열의 초절정 패턴 연대기와 흡사하다. 궁금해서 우주류가 무엇인지 찾아봤다. 상상과 달랐다. 압도적인 외계 흰돌 군단이 개떼처럼 목성 외곽에서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면 목성을 내폭시켜 오르트 검은 돌 졸개들을 전개해 적을 물리친다거나 백돌 검돌이 난해하게 소용돌이치는 두 은하단이 맞짱을 뜨는 신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생각만 해도 골이 아파오는 3차원 바둑도 아니었다. 이렇게 멋진 가젯을 주인공의 소녀틱한 감상주의를 거들기 위한 목적으로만 사용한 것이 아깝다.
전반적인 인상은 습작 수준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인물의 몸뚱이와 정신세계를 난도질하여 뼈와 살점과 피가 튀긴 옷을 입고 수술실을 나와 히죽히죽 웃으면서 '수술이 끝났습니다' 라고 말하는 변태 외과의적인 각오는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각오 없어도 돈은 된다.
이런 느낌으로....
이런 정신으로...
도서관에 갈 때는 산을 넘어 갔다. 책을 낑낑 메고 산을 넘어 도서관에 가서 반납하고 새 책들을 빌려 다시 산을 넘어왔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책을 이렇게 쉽게 빌릴 수는 없는거야', 자신을 채찍질할 겸 부러 좋은 길 놔두고 이렇게 힘들게 왔다갔다 하는데, 회원님은 대출기한을 넘겨서 책을 대여해 갈 수 없다는 말을 하면 쓸쓸해진다. 요즘은 한 달에 3-4권 읽기 바쁘다. 시리즈 물을 네 개나 해치우고 만화책으로 폭식을 하다보니, 직사각형 안에 배열된 재미없는 글자 조합을 보면 졸음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