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ter solstice

잡기 2006. 3. 10. 21:39
2002년 12월 언젠가 쓴 글. 홈페이지 정리 중 발견. 보고 있자니 오금이 다 저린다. 내가 저렇게 살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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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견문록'을 도마로 쓰거나 찌게 받침으로 쓰고는 했다. 두꺼운 하드커버 동방견문록 완역본은 그 역할로 정말 제격이다. 마침 라마단에 훈자 마을에 도착해 먹을 것이 떨어져, 일주일 내내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동방견문록을 도마 삼아 양파를 썰고 마늘과 당근과 감자를 썰어 국을 끓여 먹었다.

영양 발란스를 고려해 식단의 테마는 매번 달랐다.

* 플레인 야채국.
* 야채 스프 v2.0.
* 감자 보강 야채국.
* 야채국 위드 스페샬 게스트 생강.
* 남은 야채로 팔팔 끓여보는 리벤지 오브 파이날 베지 스튜

그렇게 해서 야채 껍데기를 남긴 채 라마단에서 살아남았다.

옆 구석, 아니 온 사방에서 눈덮인 산들이 매정하게 지켜보고 있다. 거기서 발견한 외국 여행객은 다섯을 넘지 않았다. 좀비같은 일본인 셋, 미친 한국인 둘. 비수기에, 매일 전기가 나가 따뜻한 물이 잘 안 나오고 추워 죽겠는데 2500미터 산중에서 떨면서 음식 만들어 먹는 일은 결코, 낭만적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새벽 세시 이십분, 보름달이 떠오른 가운데 해발 4000미터의 장엄한 흰색 준봉들이 눈부신 별들과 함께(보름달인데도 말이다!) 바로 눈 앞에서 펼쳐보이는 이 지구상의 것 같지 않은 풍경에 관해서는 침을 튀기며 말할 수 있었다. 단 한 음절 짜리 말로: 쾍!

데자부는 언제나 지겹다. 데자부는 글줄 깨나 읽은 녀석들에게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그 데자부 내지는 예지몽에 따르면 나는 언젠가 사막에서 죽을 팔자였다. 그래서 남북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다쉬테 까비르와 다쉬테 루트를 건너기 전에 유언장을 써 두었다. 누군가 호신불을 내게 주었다. 죽지 말라고. 어떤 작자는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다. 죽지 말라고. 낄낄 웃는 사람도 있었다. 안 죽을 꺼라고.

생생한 과학의 시대에 운명론이 밥맛 떨어진다면, 밥맛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함께 걸으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하나 하나 설명해주며 겪은 일화가 있다. 천날의 밤이 흘러 노곤하게 긴장이 풀린 어느날 술자리에서 천천히 얘기할만한 것이었다. 흠. 달콤한 로맨스와 곁들여서? 하여튼 그 빌어먹을 데자부에 따르면, 언젠가 일본인 친구와 눈보라 속을 함께 헤메게 될 것이다.

정말 그랬다. 2002년 12월 13일, 금요일, 해가 질 무렵, 바그다드로 향하는 고대 황금로의 주요 도시 중에 하나인 하마단에서 이름모를 깡촌 어딘가에 있는 알리 사드르 동굴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엄청난 눈보라 때문에 차가 안 와서 하는 수 없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벌판을 걸었다. 흔히 사막이라고 하는 곳이다. 사막에 눈보라라니. 당황스럽잖아.

아침부터 굶었다. 배가 몹시 고팠다. 얼어죽을 지경인데 모리상은 불쑥, 불고기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내 앞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수수깡처럼 지그재그로 걷고 있었다. 맛이 간 것이다. 입이 얼어붙어 한동안 말 못하다가 대꾸했다. 나도 불고기가 먹고 싶어.

여건이 몹시 열악한 관계로 우리는 십 분에 한 마디씩 얘기를 주고 받았다. 하늘도 하얗고 땅도 하얗고 지평선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가로로 세차게 흐르는 눈보라 속에서 한 동안 맛있는 불고기를 생각하며 걸었다. 그러다가 모리상이 갑자기 외쳤다.

비빔밥!

여건이 더더욱 나빠져 가고 있어서 말이 잘 안 나와 고개를 끄떡이며 나도 먹고 싶다는 제스쳐를 처량하게 취하고 맛있는 비빔밥을 생각하며 걸었다. 모리상은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비빔밥 마저 생각해 내다니...

그리고 유리구슬처럼 뻑뻑한 눈알을 굴렸다. 장관이라고도 생각했다. 온통 하얘서 흡사 천당 같았다.

내 눈 앞으로 눈보라의 눈알갱이들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수평으로 피융 하고 연달아 다다다 지나가고 있었다. 바람이 걸리적 거릴데가 없는 허허발판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희안한 일이 벌어진다. 오른쪽 어깨에 눈이 달라붙어 얼음이 되었다. 조금 더 걸으면 괜찮은 동상이 될 것 같다. 겨울에 태백산 눈축제할 때마다 보곤 했던 얼음 동상.

모리상이 회의적인 표정(얼굴이 얼은 관계로 그렇다고 추측했을 따름이지만)을 지으며 말했다; 이 길이 맞는거야?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기랄. 알게 뭐람. 뭐가 제대로 보여야 말이지.

정강이까지 푹푹 파이는 눈 속을 헤집고 반쯤 눈에 파묻힌 민가를 발견해 문을 두들겼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말이 잘 안 나와서 그냥 악악 거리기만 했다. 한국어, 영어는 어떻게 되는데 파르시로 어떻게 말해야 하지? 모리상은 입을 다문 채 부들부들 떨고 있다. 눈보라는 여전했다. 무척 떨리는 상황이다.

눈알이 차가워서 눈알을 굴리면 눈가위가 몹시 시원했다. 발은 이미 젖어서 얼어붙은 상태였다. 그러다가 간신히 지나가는 차에 구조 되었을 때(누군가 마을에서 떠나는 모습을 보고 우리를 뒤쫓아왔다) 모리와 나는 얼굴이 얼어 웃을 수 조차 없었다. 기뻐야 하는 상황이지만 피와 살은 얼어붙어 있었다.

하룻밤 인가에서 신세지며 호구 조사를 하다가 이튿날 미어 터지는 미니버스를 잡아타고(냉방이 끝내줬다) 돌아왔다. 지랄같은 눈보라였다. 버스를 타고 돌아올 때는 눈이 그쳤고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사진 찍을 기분은 아니었다.

하마단에 돌아왔을 때 모리가 묵고 있던 호텔 주인과 내가 묵고 있던 호텔 주인은 경찰에 실종신고를 한 상태였다. 그들은 아침까지 잠을 안 자고 우리를 기다렸다.

우린 정말 좋은 추억꺼리를 갖게 된 거야.

그렇게 말하니까 모리상은 똥 씹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마음의 상처가 깊었던 모양이다. 러시아 속담에 이런 것이 있다; '40도는 술이 아니고 -40도는 기온이 아니고 400킬로미터는 거리도 아니다!' 그래! 허풍쟁이들아! 동-감이다!

이스파한에서 엿새동안 머물며 이맘 모스크만 네 번 들락거렸다. 꽤 많이 갔다고 생각했는데, 모리상은 다섯 번을 들락거렸고, 어떤 한국인은 17번을 들락거렸다. 이스파한에서 만난 사람들은 거의가 페르시안 블루에 맛이 가 있었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뿌듯한 색깔이었다. 이맘 모스크를 견학하던 여중생이 꽃을 선물로 주었다. 한 입에 삼켜도 목구멍이 메이지 않을 것 같은 귀여운 여학생이다. 모스크의 사위를 둘러 보았지만 애석하게도 으슥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네 번이든, 다섯 번이든, 열일곱 번이든 우린 입장료를 안 내고 개구멍으로 들락거려서 다소 떳떳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모리는 건축학도였고 그는 6개월째 세상의 내노라하는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을 둘러보러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구조(?)된 날 밤 우리는 페르세폴리스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그에게 garrison과 건축물의 높이, 아파다나 궁전의 건축 방식, 미완성 문과 신전 바닥을 흐르는 상수도 및 수로 설계, 그리고 거주구와 궁전의 상호 위치에 관해 거의 sf에 가까운 공상스러운 가설들을 늘어놓았다. 아르게 밤에 있는 동안 나는 거진 고고학자가 된 기분으로 지병인 두통이 도질 때까지 고대 도시의 살아있는 모습을 재구성 해보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영역 표시도 할 겸 오줌을 누었다.

페르세폴리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 오줌을 쌌다는 얘기는 아니고... 우리를 감동시켰던 것은 페르세폴리스 보다는 야즈드의 고대 도시나 아르게 밤 같은 편안한 사막 건축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그 역사적 전통. 다시 말해 적어도 신석기 이후 거의 변화가 없었던, 완벽하게 사막 기후에 적응한 건축 양식에 관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카쥬라호의 놀랍고 경이로운 인도 사라센 양식의 생동감 넘치는 신전이나 오르차의 뛰어난 무굴 양식 등 내 생각에 건축학도라면 필수적으로 보아야 할 것들 보다는 돈지랄 마우솔레움인 타즈마할 밖에 보지 못했다. 물론 타즈마할은 모든 무굴 건축 중 단연 돋보이는 뛰어난 건축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오르차에서 라즈마할과 쉬즈마할을 보고 그 안을 둘러보고 담배 한대 빨면서 천천히 시간을 보내다 보면 건축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참 난 건축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오늘은 제과점에서 초콜렛을 사고 견과물을 취급하는 곳에서 피스타치오를 사서 쵸코바를 만들었다. 곤로에 일단 파운드 초콜렛을 녹이고 피스타치오를 까서 섞은 후 영하로 떨어진 창가에 놓아두어 굳혔다. 맛있다.

얼어죽을 지경이다. 호텔에서 곤로를 주었다.

연말연시가 다가오는데 새해 인사랍시고 찍은 동영상은 수년간 산적질을 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산 넘고 물 건넌 사연, 즉 지난한 알리바이를 실토하는 초췌하고 괴상한 모습이었다. 옆구리에 코란까지 끼고.

사나이의 가슴을 끓어오르게 하고 소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무엇인가를 찾아.

lwq (islamic pronounciaion)
in
pers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