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irky charm

잡기 2006. 4. 9. 03:43
날씨가 꽤 좋은 것 같더만 한강변에 가보니 황사 때문에 강 건너편이 보이지 않았다. 먼지를 뒤집어썼다. 오랫만에 자전거를 타보니 기어 변속 와이어와 브레이크 와이어의 텐션이 느슨해졌다. 타이어 공기압도 떨어진 것 같고... 다섯 시간 동안 75km를 주행했는데 차체는 물론 입고 있는 옷의 주름마다 황사가 두껍게 내려 앉았다. 가끔 멈춰서 그것들을 털었지만, 맞바람에 묻어오는 것이라 털어도 털어도 끝이 없다. 화창한 토요일인데(아... 아닌가?)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모바일폰으로 '재난방송'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언제나 한창 재난을 실감나게 당하고 있는 중에 오는 메시지라서 도움이 된 적은 없다. 집에 돌아와 뉴스를 보니 오늘이 최악의 황사였단다. 샤워하고 집에 찾아온 후배(아침에 통화할 때 오늘은 자전거 타기 정말 딱 좋은 날씨라고 말한 장본인)와 마누라와 함께 고기를 구워 e mart에 들러 사온 7500원 짜리 칠레산 포도주와 함께 먹고 마셨다.

할머니는 지난 겨울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개나리와 백목련이 마악 꽃을 피울 때쯤 마른 가지에 마지막 남은 잎새처럼 앙상한 모습을 한 할멈이 난간에 기대어 작년 가을의 그 쾡한 표정으로 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살아 있다. 매년 돋아나는 새싹같지는 않지만. 노인들은 봄에 잘 떠난다. 견디시길.

입구가 단 하나고 지하철이 편도 운행하는 독바위역은 서울시에서 가장 깊은 지하에 위치해 있다. 미국이 원폭을 떨궈 서울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독바위역 만큼은 안전할 정도다. 지하 6층이라 에스컬레이터만 12기인데 에스컬레이터 수리를 일년 내내 하는 것 같다. 출장 때문에 역에 가면 낯익은 기술자가 특히 자주 고장나는 특정 에스컬레이터를 수리하고 있다. 그는 난간에 기대어 에스컬레이터의 계단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곤 했다. 1년째 그러고 있다.

세상에는 해결이 아주 어려운 문제가 있다. 1년이 넘어도 해결이 안되는 문제. 그런데 1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해결이 어려운 문제는 기계보다는 사람 쪽에 더 많은 것 같다. 프랑스는 '우리는 크리넥스가 아니다'라고 울부짖은 100만여명의 떼거리가 데모하던데, 대부분의 경영자들은 인간을 다른 많은 resource와 마찬가지로 disposable 하다고 가정한다 -- '당신들은 휴지쪼가리처럼 언제든 내다 버릴 수 있다' 같은 말하기 거북한 욕설은 영어나 프랑스어로 쓰면 참 어울릴 것 같다.

처음으로 이공계 CEO 숫자가 상경계를 넘었다.

거래처 직원은 일하다 말고 잠적했다. 사표를 내던지고 떠났지만 회사는 받으려 하지 않았다. 모 사의 까다로운 요구 조건을 맞춰주다가 일에 환멸을 느끼고 태국으로 달아난 것이다. 그 케이스가 한 번 더 있었다. 그 모사는 내가 일해주는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지랄'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닭대가리라서 회의석상에서 쌍욕으로 된 비를 맞아도 왜 저 지랄인지 잘 이해가 안가(의문부호가 머리통 주변에 만개한다) 일하다 말고 도망가지 않았다. 왜 달아나? 심지어 대들기도 한다.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부리로 머리를 마구 쫀다.

우스꽝스럽게 고된 출장에서 돌아오는 '본좌'를 위해 아내가 고추장 돼지 불고기를 준비했다. 배불리 먹으면서 후덕을 베풀었다 -- 노자 도덕경을 늘어놓았다. 아내에게는 특별히 붓다의 정신세계와 이슬람의 의미, 심지어 예술 감상법 따위를 가르쳤지만 별 관심은 없어 보인다. 얼마전에 제 잘난척뿐인 도덕경을 심지어 방송으로 강변하기도 했던(그걸 제대로 된 강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도올선생은 최근 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노무현을 개새끼라고 말했다 -- 도올의 소원은 십년 똥을 시원하게 싸는 것이었다. 자신을 자수성가한 동양학의 대가라고 울부짖는 그의 모습은 언제 봐도 귀엽다. 재밌었고 도올의 최근 저작을 몇 권 읽었다. 안 좋다.

응. 우리 애들 때 교과서에 나오는 중국의 사상철학 중 도덕경 바로 그거.. 잊어먹었지? 노자가 말한 핵심은 무위자연인데 말이야, 무위자연의 위자는 꾸밈을 얘기하는거야. 그래서 무위는 꾸밈이 없다는 거고 자연은 환경운동가들이 말하는 자연이 아니라 존재하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고. 그래서 악한 놈은 악한 놈대로 꾸밈없이(그놈이 선한척하면 위선), 착한 놈이 악한 짓하면 그것도 무위가 아니라고. 사회인이란 것은 무위자연하는데 에로가 많은 것이라고.

에로가 많은 것은 인간이 인간을 대할 때 느끼는 일정한 고정관념 탓도 컸다. 뜻대로 안되니까. 인간을 대할 때 고정관념이 없다고 자부하지만 자신없다. 며칠 수염을 안 깎았더니 날더러 인상이 터프해 보인단다. 바빠서 안 깎은 것이고, 코믹 캐릭터가 터프해봤자 우스꽝스러움은 달라지지 않았다. 김과장은 언제나 회의장에 '가끔' 마실가듯 나타나는 말끔한 나를 보고 정체가 의심스럽다는 차원에서 정선생이라고 불렀다. 비아냥이지. 다들 망가지고 있는데 왜 나는 안 망가졌나 궁금해 했다. 그는 수염을 기르고 인상 더러워진 나를 처음 봤다. 놀랍지도 않은 일이지만 정도령이나 정도사, 새롭게 출현한 '정선생'은 개새끼라고 불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김'선생'은 좋아하는 타잎의 인간이다. 하여튼 내가 심혈을 기울여 '무위자연'하면 보통은 상황이 나빠진다.

러셀이 자신을 불가지론자라고 말했을 때 그가 죽을 때까지 도가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서양 양반들은 동양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단정적이다. 제대로 번역된 책도 없다. 그럼에도 러셀만큼은 좋아했다. 좋게 말해 방법론이고 아무리 나빠도 방편에 불과한 방법론적 회의의 '선택가능'한 돌파구는 불가지론 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러셀만큼 고민하지 않고 e mart에서 쇼핑하듯이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잡아 자신을 불가지론자라고 우기는 사람들을 대체로 평범한 개새끼라고 생각했다. 나는 '무위자연' 노선이라서 굳이 불가지론자가 안되도 된다. 그래서 모르는 것에 가설과 현학, 그러니까 비증명과 입증 가능성 따위를 전건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노자의 도덕경은 삶이란 다양한 양태 중 모종의 슬립스트림을 규정하는 희안하게 상세한 프로토콜이란 점에서(내 '느낌'에) 어린 시절 대단히 충격적인 저작이었다. 거기다가 현명함을 뽐내는 세계에 대한 일종의 전방위적 경고를 표현한다. 현명함을 뽐내는 세계는 내 현명함이 다른 사람의 현명함을 실험하고 평가하고 비교하는 장소, 시간대이다. 흡사 21세기 지식정보사회의 위험성을 예언한 것 같달까? 토플러나 나이스빗들이 열광했던 이런 세계가 실은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기 딱 좋은 것이라고. 그리고 성인은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이 있는데, 중요하지는 않다. 그쯤 해두고, 집에서 술 한잔 하면서 아내에게 무위자연과 사장과 사주와 이사와 CEO, 그리고 법인의 의미를 가르쳤다. 아내는 그쪽으로 아는게 없어 나보다 '무위자연'을 훨씬 잘 했다.

포도주와 소주를 섞어 마셨고, 황사에 시달리며 여섯시간을 나돌아 다녔더니 피곤해서 일찌감치 잠들었다. 노트북 자판으로 이 글을 두들기다가 그대로 뻗은 것이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어두운 강당의 좁은 탁자에 올라가 각목에 턱을 괘고 어떤 여자한테 무슨 말인가를 했다. 세계가 변화하고 있다고 말한 것 같다. 그런 말로 잘난척해서 나를 아주 싫어하는 여자애와 함께 프로그램을 짜야 한다.

다음날 아침에 우리는 소주병 두 개가 주둥이가 깨진 채 한가하게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하늘에 날아다니는 다른 하나는 사파이어가 달린 깃털인데 안간힘을 써서 그것이 어떤 학교에서 학생이 만든 비행기처럼 보이도록 애를 썼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내가 최근에 본 변화들을 이야기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에 관한 연설을 했다.

빅뱅 이후 이 세계를 구성하는 자연의 기본적인 상수들이 다른 우주와 연결된 우주의 변방에서 변형되거나 파괴되고 있으며(그렉 이건의 어떤 단편 내용을 베꼈다) 예전에는 변경에서 일어나던 것이 전이 속도가 매우 빨라 최근 이 우주에 침투했고 그것이 현실세계에서 익숙한 형태의 물질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걸 조사해야 하는데 패터닝에 최적화된 인류 문명 최고의 자산인 기호 패턴 언어를 이용한 프로그래밍이 가장 적합하다고. 그리고 그 여자를 쳐다봤다. 눈을 깜빡이며 나를 쳐다본다. 넘어왔다. 그 꿈은 비록 황당무개한 것일지언정 여자를 설득하는 것과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같은 매력과 마법임을 시연한 것이다.

잠에서 깨어 콜록거리는 아내에게 도덕경에 버금가는 또 다른 가르침을 줬다. 방안에 떠돌아다니는 미세 먼지를 없애려면 가습기를 틀어 작은 물방울이 먼지를 포획하여 땅바닥에 떨어지게 하면 된다고. 새벽에 깨어 이 시간에 블로그를 마저 끄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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