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ter of indifference

잡기 2006. 5. 11. 00:57
전영혁의 음악세계가 2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로 음악세계의 팬들을 방송국에 초청해 공연을 한다고 했다. 한 달 전쯤의 얘기인데 방송국에서는 좌석이 빌 것을 염려해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단체표를 미리 나눠줬다. 음악세계의 팬들이 적을꺼라고 과소평가한 것인데, 실제로는 좌석을 다 채울 정도의 사람들이 참석 신청을 했다고 한다. 단체표를 미리 뿌려두어 정작 팬들의 상당수는 기념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그때 참가 신청을 했는데 초청장을 받지 못했다. 씁쓸해서 입맛을 다셨다.

방송사 대신, 별 잘못을 하지 않았던 기념행사 준비위원회에서 미안했던지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20주년 기념 팜플렛을 나눠줬다. 소포로 받았지만 거들떠 보지 않았다. 기실 따지고 보면 음악세계가 20년을 넘게 이어왔지만 밤 한 시, 두 시에 하는 변두리 지방 방송 프로그램(또는 미얀마에서 듣는 voice of america나 청각장애인 전용 프로그램?)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지 싶다. 십 년 전 이 나라에서 대놓고 다른 건 시시하고 재미없어서 못 읽겠고 SF'만' 읽는다고 하면 반쯤 또라이 취급하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사정이 그러니까 입맛이 쓴 것이다.

기회만 있으면 자전거 타러 나가니 책 읽을 시간이 통 없다. 어쩌면 잘된 일이다. 자전거를 타면 머리가 멍 해져서 무위자연에 좀 더 가까워지고 현빈 -- 무릉도원이 눈 앞에 펼쳐진 듯한 기분이 드니까.

며칠 전 자전거를 타다가 날이 어두워져서 가보지 못한 길을 가기로 했다. 지도를 더듬어 보니 산자락을 끼고 달리는 길이다. trackmaker로 route를 만들었다. 북한산성 입구 - 송추계곡 입구 - 온릉 - 곡릉 - 지축 - 구파발 코스. 코스가 마음에 든다. 약 두 시간 반이 걸리는 적당한 길이의, 난이도가 평이한 코스인 것 같다. 집까지 2km를 남겨놓고 시간이 많이 남아 난지도 공원으로 갔다.


 날씨가 아주 좋아 20여 킬로 떨어진 곳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비온 뒤 날이 개어 하늘이 정말 파랗다. 날이 풀린 후로 인파로 바글바글한 한강변 도로는 가급적 피하고 싶은 곳이 되어 간다.


 돌아오는 길에 구글 어스의 지형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지 알아보려고 gps로 좌표를 잡고 사진을 찍었다. 구글 어스에서 바라본 모습. 고동색 줄은 자전거 주행 경로의 gps track log


 같은 지점에서 찍은 사진. 실제 사진과 구글 어스의 지표면이 달라 실망. 아예 다르다. 구글 어스가 이 모양이라면 어떻게 대단한 인기를 끌 수 있었지? 의아하군.

돌아와서 gps의 주행기록과 맵 매칭을 해보니 꺽어지는 곳을 지나쳤다. 공사현장이라 길이 없을꺼라고 지레 짐작하고 직진해 버린 것이다. 어째 너무 길이 평이하더라니... 아쉽다.

2002년 이란에서 gps를 구입한 후 틈틈이 찍어 두었던 도시의 좌표 정보 파일을 찾아 trackmaker 포맷으로 변환하고, 그것을 다시 구글 어스로 입력하여(트랙메이커는 garmin gps 좌표 정보를 kmz 또는 kml 파일로 변환하여 구글 어스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으로 넘긴다) 돌아다녔던 지역의 위성 사진을 살펴보았다. 의외로 결과가 놀라웠다.


2003년 중남미 여행의 시작점인 티후아나의 구글 위성 사진. 사진을 보자마자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샌디에고에서 트램을 타고 종착점에서 내려 걸어서 국경을 통과하여(빨간색 아령처럼 생긴 것) 우왕좌왕 헤메다가 우락부락한 스트립바 삐끼들의 도움으로 우측으로 돌아 버스 터미널까지 갔다. 버스 터미널에서 오후 6시쯤 Los Mochis행 버스표를 끊고 이십여분 버스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gps로 좌표를 찍어둔 곳이 바로 저 노란 점이다!

그럼 그렇지. 구글 어스와 gps가 결합해야 막강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한국의 지도 프로그램 그 어느 것도 38선을 넘어선 북한의 도시에 관한 자그마한 지리 정보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구글 어스로는 북한을 볼 수 있다. 평양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트램 코스를 따라 시내를 배회하고 임진각 너머의 도로를 따라 개성 시가지를 자유로운 새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북한은 물론이고 이 세상 어디든 가보지 못한 곳을 갈 수 있다.


라오스의 방비엥. 해상도가 좋지는 않았지만 저것을 확대해 흐릿한 위성 사진을 보자마자 자그마하고 포근한 촌락인 방비엥의 시가지 모습을 머리 속에서 재구성할 수 있었다. 화면 중앙의 저 지점을 확대하면 '세계의 끝' 까페(the end of the world cafe/restaurant)에서 30여 미터 떨어진 도로가 나타난다.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난 곳이다. 아내는 내가 그 길을 지나갈 때 동행하던 한국인들과 잡담하면서 내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내기를 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인은 물론 현지인이 아닌 외국인 여행자와 개들은 거들떠 보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는 한 여행자를 부러 만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주욱 그럴 것 같다(전갈좌, A형은 원래 그렇다). 아내가 물었다. '한국인이죠?' 멈칫 하고 뒤돌아서서 까닥 인사하고 가던 길을 갔다. 바로 저 지점이었다. 그 후로 아내는 내 뒤를 몇 년 동안 졸졸 쫓아다니며 구애했다. :)


파키스탄의 north frontera(outpost?) 지역. 길깃-카리마바드-파수-소스트를 경유하는 카라코럼 하이웨이는 파키스탄과 중국을 연결한다. 저 곳은 훈자 마을이 있는 곳이다. 5-6천 미터의 웅장한 산맥들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오아시스같은 마을.


구글 어스의 내비게이션을 적당히 조절해 훈자 마을의 게스트 하우스 부근 위치에서 남쪽을 바라본 모습


실제 사진. 어? 이건 거의 비슷하네?


심심해서 올라갔다가 죽도록 개고생만 하고 내려왔던 과떼말라의 안띠구아 부근에 있는 빠까야 화산(2495m). 등반은 노란 점이 있는 1893m에서 시작했다. 나는 저 지점을 기억한다. 혹시라도 조난을 당하면 저 지점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버릇처럼 좌표를 찍었다.


이건 그나마 올라가는 길에(제정신일 때) 찍은 사진. 능선을 따라 분화구까지 올라가는 것인데, 그 날은 분위기가 몹시 안 좋아서 죽을 뻔 했다. 억수로 쏟아지는 비와 빗물이 증발하여 발생한 엄청난 수증기 때문에 분화구 가장자리에서 따뜻한 바위를 껴안고 추위와 강풍을 버텼다. 혼자였고, 길을 잃었는데 gps가 작동하지 않아 야성의 감각만으로 gps를 찍은 지점으로 돌아왔다. -_-

하루 종일 구글 어스로 여행했던 도시와 유적지를 찾아 다녔다. 위성사진을 보고 gps로 찍은 좌표를 보니 그때 어떤 이유로 좌표를 기록했는지 마치 사진처럼 즉각 떠오르는 것이 놀랍다.

여러 가지로 테스트 해 본 결과, google earth, gps track maker의 결합으로 새로운 가능성과 신세계가 열렸다. kml및 kmz 파일을 적당히 우려내는 작은 프로그램을 짜면 이 나라 저 나라에 거주하는 지역주민이나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는 여행자들이 남겨놓은 수많은 좌표를 gps에 담아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자들이 남겨놓은 수많은 좌표에는 식당, 숙소, 버스 터미널, 유적지, 박물관, 뷰포인트 따위의 쓸모있는 정보가 담겨 있다. 심심할 땐 남극도 가보고.


오늘 주행코스 중 연신내역 부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멈춰 주차장에 잔차를 세우고(노란선이 끊긴 부분) 바로 옆 롯데 수퍼에서 저녁에 해먹을 스파게티를 위해 면과 베이컨을 샀다. 이 부근의 위성 사진은 비교적 잘 일치했다.

오늘은 엊그제 실패한 곡릉 코스를 제대로 찾아갔다. 코스가 썩 괜찮다. 업/다운힐이 쉴 새 없이 반복되고 계곡을 따라 곡릉천이 흐른다. 집에서 시작하여 한 바퀴 도는데 2시간 30분, 경치가 괜찮고 공기 맑아서 자전거로 운동하러 왔다 갔다 하기에 알맞다. 다만 유원지라서 여름 휴가철에는 차들로 붐빌 듯.

구글 어스를 제대로 울궈먹을 방법을 천천히 궁리해봐야 할 듯. 흠. 구글의 이 놈들, 장사할 여지는 아주 확실하게 남겨 놓았군. 여러 면에서 짱구 굴린 티가 확연하잖아? 그 생각에 귀여워서 히죽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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