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보드 조립 중. 보드 단가는 장당 천만원 가량. 이런 보드가 수십매 들어간다. 설계 2개월, 조립 1개월, 테스트 3개월. 조립은 이렇게 수동으로 한다. 직원 여섯 명이 만드는 가난한 가내수공업이랄까. 장사가 좀 되서 직원수를 다섯에서 열한 명으로 늘렸다.
챔버 업체와 협의 중. 별별 잡스러운 문제로 한달 내내 고생. 개발 기간 동안 납품 업체의 엔지니어 두 명은 일에 환멸을 느끼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한 명은 푸켓에 간 것이 확인되었는데 다른 한 명은 어디로 튀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먹여 살릴 가족이 있는 30대 중반의 엔지니어들이라 딱히 불러주는 곳도, 갈 곳도 없고 해서 회사에 그냥 붙어 있다.
공장에서 부속품이 어디갔나 찾고 있는 하드웨어 엔지니어들. 날밤 까느라 좀비가 다 되었다. 한 명은 UDT 출신. 잠수복 없이 수중 20미터 잠수 가능. 근간 작살 들고 동해안에서 인어 고기 잡기로 했다.
구질구질한 공장 내부. 맞은 편에서 궁시렁거리고 있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 서울의 IT 업체 사무실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고 까페같은 분위기의 작업 환경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업무시간 중에 메신저질이나 하며 일하지만 '우리'는 빗자루로 쥐를 잡거나 드라이버질에 여념이 없다. 진입장벽이 매우 높아 이쪽 계통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다.
조립이 거의 끝난 장비. 작동시 220V, 500암페어 가량, 전력소모량이 막대하다. 단 한 번의 오작동으로 1억원 날려먹는 것은 우스워서 첫 작업할 때는 식은 땀이 매우 흘렀다.
장비 테스트 중. 테스트 항목은 140가지, 플러스 소프트웨어로 테스트하지 못하는 항목까지 합치면 160여가지. 테스트 자동화에 1년이 넘는 기간이 소여되었으나 아직 개선해야 할 점들이 많이 남아 있다.
지난 5월 삶의 주요 테마. 납품 전 파이널 터치. 클로즈 엔카운터 오브 더 서드 제네레이션 머신. 너 거기 있냐? 나 여기 있다.
트루 폴트 톨러런트, 엑세스 포인트, 하이 어쿠라시 파워, 컨커런트 프로세싱, 플렉시블 존, 핫스와퍼블 슬롯, 셀프 다이그노스틱스, 0.5/2ns 분해능의 오토 스큐, 오토 캘리브레이션 등 다른 업체가 쫓아오려면 머리털 빠지는 개념과 기능을 고생해서(핫 스와퍼블 존 빼고 거의 모든 개념을 내가 설계했다) 넣었지만 장비 단가는 고작 6억. 치열한 최저가격 입찰 경쟁의 결과, 가격 산정의 실패로 길이길이 역사에 남을 장비.
3년 동안 5명의 엔지니어가 설계하고 만들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연구기간의 막바지에 실 매출과 순익이 발생하자 사장님의 얼굴에서 웃음이 결코 가시지 않았지만(3년 만에 제대로 된 첫 매출이다) 내 역할은 그의 춘몽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사장님, 그건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거라서 개념을 알아먹은 똘똘한 엔지니어 두셋 정도면 1년 이내에 따라 잡힐 수 있어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그들이 쫓아올 동안 현재 속도보다 100배 이상 빠른 기계를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급히 광자력 연구소를 만들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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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5일, 우리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종류의 또 다른 장비를 간신히 납기 내에 납품했다. 올 한 해는 이미 만든 것으로 돈벌이 할 궁리를 해야 하므로 그것을 더 진행할 수 없겠지만, 5일 납품한 장비는 향후 3년 동안 회사가 그저 그렇게 살아가느냐 기술력을 바탕으로 시장 상황에 무관하게 꾸준한 매출을 일으키며 장수하느냐를 판가름하는 랜드마크가 될만한 것이다. -- 세계 시장을 독점한 모 업체의 장비를 월등히 뛰어넘는 기계를 앞으로 3년 안에 만드는 것이 현실적인 목표이자 로드맵이다. 샤방한 아이디어들이 있다. 그리고 잘 빠진 기계의 꿈을 꾼다.
걸림돌이라면, 여전히 사람 구하기가 힘들다. 일 년쯤 노력해서 소프트웨어 인력을 간신히 다섯 명 모았다. 아직도 부족한데, 한 명 정도 실력 있는 친구가 있으면 지금의 두 개에서 동시에 3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다. 즉, 3년 후에 할 일을 지금 시작할 수 있다. 회사의 전망이 밝고 월급 밀린 적이 한 차례도 없고 노동 강도가 IT 계통에 비해 비교적 약하며 매년 평균 10%의 연봉 인상에, 매우 도전적이며 모험적인 일을 하고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해줬지만(일만 진행되면 출근 안해도 상관없다) 단지 공장이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사람을 구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중소 지방 소재 기업의 비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