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w your hair

잡기 2006. 11. 27. 19:25
지하철 타고 출퇴근 하면서(왕복 3.5hrs) 책 보는 것이 어느 정도 지겨워져 한 동안은 휴대폰에 영화를 담아놓고 드라마, 시리즈물, 애니메이션 등등 영양가가 다소 떨어지는 것들을 보았다. 이제는 지하철에서 노트북 펼쳐놓고 일하는 것도 익숙해져 가는 길에 pt 자료 하나 만들고 오는 길에는 프로그래밍을 했다. 지하철 타고 다니면서 별 짓 다하다 보니 많이 뻔뻔해진 것 같다. 한번은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면서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춤선생으로 나와 불량학생들을 교화하는 영화를 노트북으로 봤는데, 왼편의 할아버지와 오른편의 아가씨 둘과 함께 봤다. 정말 함께 봤다. 내릴 때 무척 아쉬워들 하더라.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을까?…“있긴 한데,많이 못사” -- 돈, 여자, 명성 등과 하등 상관없는 인생을 너무 오래 살아서 판단이 안 된다. 행복할 때라고는 뭔가 즐거운 자극을 받아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 뿐이었던 것 같다. 어제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긍정적인 상상을 했다.

ISO 9001 인증 때문에 회사에서 문서 정리 요청이 들어왔다. 한주간 문서를 정리했다. 지난 3년 동안 개발, 미팅 자료, 개발 제안서, 설계서, 매뉴얼 따위를 모아보니 대략 230MB 가량의 순수한 문서가 나왔다. 소스, 소스 버전 컨트롤 데이터, 버그 트래킹 로그, 메인티넌스 리포트 따위를 다 합치면 기가 분량이 될 것 같다. 사실 나 자신이 이렇게나 많은 문서를 만들었을 줄 상상 하지 못했다.

ISO 교육하는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문서는 형식을, 기록은 문서에 뭔가를 끄적여놓은 것을 말했다. 따라서 나는 문서를 만든 것이 아니라 기록을 만든 것이다.

아저씨 말은 무시하고, 가장 오래된 '문서'가 2003년 7월 것인데 그때 3개월에 걸쳐 설계 작업만 한 것이 있다. 이번에 개정하려고 살펴보니 거의 고칠 것이 없어서 황당했다. 어찌나 설계를 잘해 놨던지... 다시 생각해 보니 설계에 많은 시간을 들이면 나중에 가서 이리저리 고칠 것이 없다. 그 설계서를 바탕으로 여덟 대의 장비가 설계되는 동안 수정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서 정리가 끝나서 3년 동안의 프로젝트를 정리했다. 3년 동안 소프트웨어 팀은 다섯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제외하고 모두 성공했다. 성공->이익 창출 및 다음 장비 수주에 기여. 2006년 11월의 마지막 날 전략 미팅에서 다섯 가지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3시간 분량의 자료인데 시간 관계상(미팅은 무슨 얼어죽을 미팅, 밥이나 거하게 먹자 회식이 있었으므로) 1시간 30분 동안 분당 600단어를 말하는 기염을 토했다. 호응도가 좋고 질문 안 받아도 되고 데모할 때 항상 발생하는 희안한 에러들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어서 요즘은 pt로 데모 할 때 동영상을 일부분 사용했다.

미팅의 호응도가 좋아 SW 팀 전 직원에게 LCD 모니터를 사주기로 회식자리에서 사장님의 약속을 받아냈다. 아무래도 소스를 봐야 하는 관계로 명암비가 훌륭한 2000:1 짜리를 골랐다. 개발로 심신이 피곤해지면 다운받은 '환상의 커플'를 보며 안구 경직을 풀어줘야 하므로 반드시 응답속도 5ms 짜리 와이드 모니터가 되었다. 사무실에 가습기도 하나 필요했다.

내년 장비 납품 성사를 대비해(90%의 확률) 팀원들에게 이 셋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 유급 휴가 (말레이지아의 내가 가고 싶었던 한 섬으로. 경비는 회사에서 지급)
* 장비 업그레이드 (코어2 듀오로 컴퓨터 교체)
* 보너스 지급

팀원들은 긴가민가 하면서 유급 휴가와 보너스 사이에서 고민했다. 한 친구는 계산상 보너스(현금지급)이 여러 면에서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납득할 수 없다. 나 같으면 좀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뻥을 치고 3개를 모두 해 달라고 할 것이다. 사지선다형 세대인지라 그중 하나만 골라야 되는 줄 알고 있었다.

납득이 안가는 이상한 이유에서 과장인 주제에 바란 적도 없는 임원(?)인 관계로 내게는 보너스도 없고 새 장비도 없다. 임원이라는 이상한 이유 때문에(아무도 내가 임원인지도 모른다) 가을에 지급된 꽤 상당한 양의 보너스 역시 받지 못해 입맛을 다셨다. 심지어 직원도 아닌데 그 회사 과장이다. 회사 사람들은 내가 블로그질을 하고 한가한 시간에 스타트랙이나 SF 등을 보거나, 논쟁꺼리를 찾아 여기저기 악풀을 달며 돌아다니는 (개념은 안드로메다로, 리플은 삼천포로!) 2ch 찌질이 비슷한 족속이라는 것도 모른다. 내 신분과 본질을 감춘 채, 회사와의 부적절한 관계는 3년 넘게 지속되었다.

신규 사업을 진행하려면 최소한 3명의 인력이 더 필요하고 그 준비를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힘들어서 별로 내키지 않는다. 어제 술을 많이 먹고 사장님 댁에서 잤다. 하루 종일 골골 거렸다. 마누라가 처가에 갔다가 올라오는 날이라 오늘은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역으로 마중나갔다. 회사라니...

스스로 시시하게 살기로 맘 먹은 이상 불평하지 말자.
쪼다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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