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그래서는 안되는데, 일찍 일어났다. 배편은 오후 1:30에 있고 일어난 시각은 7:00am이었다. 남은 시간 동안 노트북 가지고 장난치다가 클리에에 꽂아두었던 렉사 128MB 메모리 스틱을 망가뜨렸다. 포맷을 해야겠는데 인식이 안되니 똥줄이 탔다. 포기했다. 방콕 가서 고치자. 소니는 역시 소니스럽다.
피피섬의 세븐 일레븐 앞에서 만난 친구는 가슴에 한자 세 글자를 문신으로 새겨 놓았다. 그게 무슨 글자인지 아느냐고 물어보니 놀랍게도 서양인스럽지 않게 선, 의, 애를 제대로 설명한다. 뭐하는 친구일까 의문은 생기지 않았다. 한눈에 태국에서 굴러먹은 히피... 라고 나왔다.
배에 올랐다. 그는 나하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배 꼭대기 '선텐하는 서양인들'을 교묘하게 피한 좋은 자리, 말하자면, 여행 노하우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상석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우리는 뜬금없이 브라흐마에 관해 얘기했다. 브라흐마는 힌두교에서 가장 인기없는(을) 신인데 우주를 만든 것 외에 그가 딱히 한 일이 없다. 우주를 만든 행위조차 별로 감동적이거나 영웅적이지 않았다. 한무더기의 쓰레기를 생산한 것이 기뻐해야 할 일이라도 되나? 히피가 내 의견에 공감해줘서 기뻤다. 그는 개구리같은 자세로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눈알을 이리저리 히번뜩이고 있었다.
'다빈치 코드' 상권을 다 읽었다. 베스트셀러용으로 제작한 소설인듯 싶은데 내용이 3류스럽고 번역은 꽤나 버벅거렸는데,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비슷한 역자들을 생각해보니 비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모르겠으면 차라리 영어 병기를 해 놔라.
크라비의 선착장은 기억하고 있던 그 모습이 아니다. 선착장이 시 외곽에 위치해 있는데 그 위치가 어디인지 몰라 난감하다. 배에서 뒤늦게 나오는 바람에 썽태우는 이미 떠난 상태고 배에서 내린 찌꺼지들을 어딘가로 날라주고 왕창 뜯어먹을 심산으로 보이는 몇 안되는 삐끼들이 가격 담합을 끝낸 후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크라비 타운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아니, 여기가 대체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다. 어... 여기가 어딜까. 택시에 30밧을 주면서 내심 속이 쓰렸지만 크라비타운으로 들어섰다.
300밧 짜리 여행자 버스를 거절한 채 버스 터미널에서 에어컨 2등 버스를 황가에게 경험시켜 주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어컨 2등 버스는 일반버스보다 한 등급 위로, 고장이 극히 적고 길 한 가운데서 연료가 떨어져 세워야 하는 일반버스처럼 차가 퍼지거나 뒤에서 밀어야 할 일이 없어 보이는 고급 버스다. 여행사에서 예약하면 300밧에 카오산까지 갈 수 있음에도, 380여밧을 주고 게다가 방콕의 남부 터미널에서 시내 버스를 타야 카오산에 도착하는 귀찮은 코스를 선택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그리고 남는 시간 동안 별로 관광지스럽지 않은 순박함이 아직은 조금쯤 남아있는 크라비를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내 뜻과는 상관없이 타운의 어떤 인터넷 까페에서 주인장에게 마우스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컴퓨터를 손봐 주었다. 그래서 out of time. 썽태우를 타고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나서야 황가가 내일모레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말하자면 크라비에 오래전부터 하루쯤은 묵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푸켓이나 파타야와는 달리 이곳에는 그나마 순진한 사람들이 살았고 인사라도 할라치면 수줍어서 어쩔 줄 모르는 여자애들도 있었다. 그 재미에 여행하는데 말이다.
섬에 있는 동안 섬 개미들이 내 몸을 물어뜯어 알러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미산이 침투해 부풀어 오른 조그만 몽우리가 서서히 몸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다. 개미에게 물리면 항상 일어나는 현상이다. 옛날에 섬에 있을때 같은 숙소에 묵고 있던 녀석이 말하길, 가끔 sweet body가 있는데 개미들이 그런 사람들에게 꼬인다는... 달콤해? 약을 사먹어야 겠는데, 크라비 타운에서 이러저런 이유로 시간을 지체하다보니 약국 찾아갈 시간이 없다. 어쨌건 가지고 있던 약을 몇 알 삼켰고 그래서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크라비 타운에서 방콕으로. 열두시간 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도착, 30번 버스를 타고 카오산에 도착. '정글뉴스'를 찾아 파아팃 거리 건너편으로... 새벽의 카오산은 굴러 다니는 송장도 안 보이고 의외로 얌전했다. 죽집이 사라져서 기분이 비참했다. 서양인 둘이 밤새 술을 쳐먹고 비틀거리다가 건널목에서 말을 걸어온다. 한국의 붐붐걸들은 리얼리 썩스라고 말한다. 동감이라 고개를 끄떡이다. 한국의 여자들이 외국인들에게 따먹히든 말든 어린 시절에 느끼던 분노와 증오심은 사라졌다.
정글 뉴스 게스트하우스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키가 바깥에 있으니 문을 열고 들어와 쉬고 있으란다. 주변은 주택가로 조용하다. 여덟시 조금 넘어 체크인.
짐을 내려놓고 카오산으로. 해가 떠오르면서 갓 생긴 시장통이 활기를 더해간다. 하지만 옷 가게들은 아직 문을 덜 열어 바지를 살 수 없다. 빠통 해변의 토니 리조트에 혁대를 두고 왔다. 반바지는 혁대가 없으면 지퍼가 자꾸 열리고 그렇잖아도 다 낡아 더 입고 다닐 수 없어 버렸다.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작은 바지 빼고는 입을 옷이 없어 그후 하루종일 시내에서 수영복을 입고 돌아다녔다. 수영복 만이 내가 가진 유일하게 제대로 된 옷인 셈.
약국에서 zirtec을 사고 인터넷을 한 시간쯤 하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황가의 피부에서 발진이 생겨 지르텍을 먹였다. 샤워하고 '다빈치 코드'를 마저 읽었다. so what? 소설에 묻고 싶은 질문이다. 왠 얼간이가 이것저것 억지로 짜맞춰 써놓은 시시껄렁한 소설 같아 뵌다. 퍼즐 대부분이 따분하기 그지 없는 것들. so what? 베르베르의 '뇌'에게도 묻고 싶은 질문이다. 잘 쓰지도 못하고, 재미 없는 소설인데 베르베르가 썼기 때문에 잘 팔리는 것일까?
한두 시간 쯤 자고 일어나 15번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갔다. 가는 길에 길이 막혀 버스에서 내렸다. 마침 내린 곳이 Jim Tomson's house 앞이었다. 내린 김에 들렀다. 짐 톰슨은 실크 수입상인데 어느날 행방불명되었다. 미수금을 갚지 않으려고 토낀 것은 아닐까 싶다. 그에 관한 몇가지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별 관심없다.
아내에게 주려고 코끼리 그림이 있는 480밧 짜리 연분홍색 실크 스카프를 샀다. 썩 괜찮은 제품들이 눈에 띄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정작 관광해야 할 톰슨의 집은 입장료가 100밧 씩이나 해서 들어가지 않았다.
피피에서 제비집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황가가 제비집과 샥스핀을 먹고 싶단다. 별 맛이 없음을 미리 경고했다. 걸어서 학생들이 우글거리는 싸얌까지 갔다. 싸얌의 한 중국식 레스토랑(scala restaurant)에서 무려 800밧이나 하는 샥스핀과 500밧에 종지 하나 달랑 나오는 제비집을 시켜 먹었다. 맛있냐고 물으니 맛있단다. 내가 먹어본 샥스핀 중 지느러미의 양이 가장 많았다. 게살과 계란, 녹말가루로 적당히 얼버무려 양을 늘려놓지도 않았다. 제비집은 그저 그랬다. 제비집이 쥐꼬리 만큼 밖에 없다. 후루룩 쩝쩝 먹어치우고 한끼 식사로 1300밧이라는 거금을 카드로 긁었다. 그다지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먹을 일도 없을 것이다.
황가가 말했다. 다음 식당은 어디에요? 그래 오늘, 내일은 맛따라 길따라 하기로 했다. 뿌 팟뽕 까리(fried crab with curry)를 먹여주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실롬까지 슬슬 걸어갔다. 뿌 팟뽕 까리를 방콕에서 가장 맛있게 한다는 somboon seafood는 오후 4시부터 11시까지 밖에 영업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
한 시간 동안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노점상에서 만들어준 10밧 짜리 차갑고 맛있는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솜씨가 예술이다.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빵 속에 넣어 팔고 있다. 고소한 바베큐 냄새가 거리에 진동했다. 그런것들을 먹고 싶지만 뿌 팟뽕 가리를 먹기 위해 한 시간을 넘게 걸어왔으니, 참자. 최고급 식당 중 하나인 부사라쿰이 근처에 있다. 그곳에 수영복 입고 입장이 가능할지 늘 궁금했다.
실롬까지 가는 길에 소니 간판이 보여 무작정 들어가 메모리를 포맷해 달라고 부탁했다. 클리에에서 정상적으로 인식한다. 기쁘다. 거리에서 이것저것 사 먹었다. 거리음식이 레스토랑에서 비싼 돈 주고 먹는 음식들보다 항상 맛있었다.
오후 4시를 3분 남겨놓고 솜분식당에 들어갔다. 뿌 팟뽕 까리 두 접시와 작은 밥, 그리고 맥주를 시켜 통통하게 살이 오른 게를 즐겼다. 이런 저런 기회 때문에 먹어봤지만 이렇게 살이 토실한 게는 처음 봤다. 커리가 너무 진해 게 맛을 압도하지도 않았고 양념과 잘 어울렸다. 생각해보니 상하이 게 요리 스타일이다. 기름이 워낙 많아 끝맛은 약간 느끼한 편. 황가가 말하길, 여자들이 좋아하겠다고. 너가 여자 마음을 알아? 라고 쏘아 붙였다. 절대 모를껄 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난 알지 라고 생각했다.
15번 버스를 타고 카오산 로드까지 가는데 1시간 20분이 걸렸다. 태국이 경제난으로 위기에 처한 후 서민들이 신분과시용으로 구매했던 자가용을 다 팔아버려 교통체증이 완화되었다던데, 경제 사정이 나아져서 이 사람들이 다시 신분 과시에 열을 올리는 것일까?
숙소로 돌아와 한국인 여행객들과 얘기를 하며 꼬치에 맥주를 마셨다. 69년생 아저씨는 날더러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리는 타잎인 듯 하여 생섬(럼주)를 권하지 않았다고 미안해했다. 그가 제대로 본 것이다. 사람보다는 생섬에 관심이 더 많았다.
게스트하우스 복도에서 연주씨가 남긴 메시지를 보았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열두 시가 조금 넘어 잠들었다.
7/6
아침에 에어컨 룸으로 방을 옮겼다. 황가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자기와 여행 다닐 때는 죽어라고 팬룸만 가더니 중얼중얼... 내 방은 2층 W2, 보라색 침대시트, 큼지막한 창틀, 베란다, 시원한 에어컨이 특히 마음에 든다. 겁먹은 고양이가 베란다의 귀퉁이에서 얼굴만 살며시 내민 채 쳐다보고 있었다. 푸른 눈.
511번 에어컨 버스를 타고 수쿰윗으로 향했다. 날도 더운데 움직이는 일이 귀찮다. 방콕병 증세가 나타난 것 같다.
수쿰윗 쏘이 23을 주욱 올라가면 유명한 베트남 식당인 Le Dalat이 나온다. 그 맞은 편이 Baan Kanita, 2001년, 2003년 태국 요리 부문 베스트로 선정된 식당. 길 하나 건너 쏘이 24에는 명성이 하늘을 찌를 것 같긴 하지만 쥐꼬리만한 음식이 나오는 레몬 그라스가 있다. 레몬 그라스를 가느니 골목 귀퉁이의 꼬치집에서 꼬치를 200개 사 먹고 만다. 세트 메뉴 가격은 2년전 그대로 380밧이었다. 맥주 한 병에 잘 먹고 배를 채웠다. 보기 드문 종류의 소박하지만 기품있고 은근한 맛, 그래서 다시 찾은 곳이지만 태국 음식하면 이 집 음식이 떠올랐다.
TAT 부스에 대고 영어를 정말 유창하게 늘어놓는 아가씨에게 이 근처(쏘이 23)에서 가장 좋은(best) 타이 마사지 가게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니 타임 스퀘어 지하를 가르쳐 준다. 타임 스퀘어 지하에 있는 맛사지 가게의 이름은 'best thai massage'였다. -_-;
황가가 오일 맛사지를 받는 동안 나는 이층의 한국인 사장님이 만든듯한 인터넷 까페에 앉아 이렇게 로그를 작성중. 이제 나가자. 나가서 바지를 사자. 수영복을 입고 며칠째 벌건 대낮의 시내를 활보했다. 좀 아닌 것 같다.
그래서는 안되는데, 일찍 일어났다. 배편은 오후 1:30에 있고 일어난 시각은 7:00am이었다. 남은 시간 동안 노트북 가지고 장난치다가 클리에에 꽂아두었던 렉사 128MB 메모리 스틱을 망가뜨렸다. 포맷을 해야겠는데 인식이 안되니 똥줄이 탔다. 포기했다. 방콕 가서 고치자. 소니는 역시 소니스럽다.
피피섬의 세븐 일레븐 앞에서 만난 친구는 가슴에 한자 세 글자를 문신으로 새겨 놓았다. 그게 무슨 글자인지 아느냐고 물어보니 놀랍게도 서양인스럽지 않게 선, 의, 애를 제대로 설명한다. 뭐하는 친구일까 의문은 생기지 않았다. 한눈에 태국에서 굴러먹은 히피... 라고 나왔다.
배에 올랐다. 그는 나하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배 꼭대기 '선텐하는 서양인들'을 교묘하게 피한 좋은 자리, 말하자면, 여행 노하우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상석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우리는 뜬금없이 브라흐마에 관해 얘기했다. 브라흐마는 힌두교에서 가장 인기없는(을) 신인데 우주를 만든 것 외에 그가 딱히 한 일이 없다. 우주를 만든 행위조차 별로 감동적이거나 영웅적이지 않았다. 한무더기의 쓰레기를 생산한 것이 기뻐해야 할 일이라도 되나? 히피가 내 의견에 공감해줘서 기뻤다. 그는 개구리같은 자세로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눈알을 이리저리 히번뜩이고 있었다.
'다빈치 코드' 상권을 다 읽었다. 베스트셀러용으로 제작한 소설인듯 싶은데 내용이 3류스럽고 번역은 꽤나 버벅거렸는데,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비슷한 역자들을 생각해보니 비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모르겠으면 차라리 영어 병기를 해 놔라.
크라비의 선착장은 기억하고 있던 그 모습이 아니다. 선착장이 시 외곽에 위치해 있는데 그 위치가 어디인지 몰라 난감하다. 배에서 뒤늦게 나오는 바람에 썽태우는 이미 떠난 상태고 배에서 내린 찌꺼지들을 어딘가로 날라주고 왕창 뜯어먹을 심산으로 보이는 몇 안되는 삐끼들이 가격 담합을 끝낸 후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크라비 타운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아니, 여기가 대체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다. 어... 여기가 어딜까. 택시에 30밧을 주면서 내심 속이 쓰렸지만 크라비타운으로 들어섰다.
300밧 짜리 여행자 버스를 거절한 채 버스 터미널에서 에어컨 2등 버스를 황가에게 경험시켜 주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어컨 2등 버스는 일반버스보다 한 등급 위로, 고장이 극히 적고 길 한 가운데서 연료가 떨어져 세워야 하는 일반버스처럼 차가 퍼지거나 뒤에서 밀어야 할 일이 없어 보이는 고급 버스다. 여행사에서 예약하면 300밧에 카오산까지 갈 수 있음에도, 380여밧을 주고 게다가 방콕의 남부 터미널에서 시내 버스를 타야 카오산에 도착하는 귀찮은 코스를 선택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그리고 남는 시간 동안 별로 관광지스럽지 않은 순박함이 아직은 조금쯤 남아있는 크라비를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내 뜻과는 상관없이 타운의 어떤 인터넷 까페에서 주인장에게 마우스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컴퓨터를 손봐 주었다. 그래서 out of time. 썽태우를 타고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나서야 황가가 내일모레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말하자면 크라비에 오래전부터 하루쯤은 묵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푸켓이나 파타야와는 달리 이곳에는 그나마 순진한 사람들이 살았고 인사라도 할라치면 수줍어서 어쩔 줄 모르는 여자애들도 있었다. 그 재미에 여행하는데 말이다.
섬에 있는 동안 섬 개미들이 내 몸을 물어뜯어 알러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미산이 침투해 부풀어 오른 조그만 몽우리가 서서히 몸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다. 개미에게 물리면 항상 일어나는 현상이다. 옛날에 섬에 있을때 같은 숙소에 묵고 있던 녀석이 말하길, 가끔 sweet body가 있는데 개미들이 그런 사람들에게 꼬인다는... 달콤해? 약을 사먹어야 겠는데, 크라비 타운에서 이러저런 이유로 시간을 지체하다보니 약국 찾아갈 시간이 없다. 어쨌건 가지고 있던 약을 몇 알 삼켰고 그래서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크라비 타운에서 방콕으로. 열두시간 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도착, 30번 버스를 타고 카오산에 도착. '정글뉴스'를 찾아 파아팃 거리 건너편으로... 새벽의 카오산은 굴러 다니는 송장도 안 보이고 의외로 얌전했다. 죽집이 사라져서 기분이 비참했다. 서양인 둘이 밤새 술을 쳐먹고 비틀거리다가 건널목에서 말을 걸어온다. 한국의 붐붐걸들은 리얼리 썩스라고 말한다. 동감이라 고개를 끄떡이다. 한국의 여자들이 외국인들에게 따먹히든 말든 어린 시절에 느끼던 분노와 증오심은 사라졌다.
정글 뉴스 게스트하우스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키가 바깥에 있으니 문을 열고 들어와 쉬고 있으란다. 주변은 주택가로 조용하다. 여덟시 조금 넘어 체크인.
짐을 내려놓고 카오산으로. 해가 떠오르면서 갓 생긴 시장통이 활기를 더해간다. 하지만 옷 가게들은 아직 문을 덜 열어 바지를 살 수 없다. 빠통 해변의 토니 리조트에 혁대를 두고 왔다. 반바지는 혁대가 없으면 지퍼가 자꾸 열리고 그렇잖아도 다 낡아 더 입고 다닐 수 없어 버렸다.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작은 바지 빼고는 입을 옷이 없어 그후 하루종일 시내에서 수영복을 입고 돌아다녔다. 수영복 만이 내가 가진 유일하게 제대로 된 옷인 셈.
약국에서 zirtec을 사고 인터넷을 한 시간쯤 하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황가의 피부에서 발진이 생겨 지르텍을 먹였다. 샤워하고 '다빈치 코드'를 마저 읽었다. so what? 소설에 묻고 싶은 질문이다. 왠 얼간이가 이것저것 억지로 짜맞춰 써놓은 시시껄렁한 소설 같아 뵌다. 퍼즐 대부분이 따분하기 그지 없는 것들. so what? 베르베르의 '뇌'에게도 묻고 싶은 질문이다. 잘 쓰지도 못하고, 재미 없는 소설인데 베르베르가 썼기 때문에 잘 팔리는 것일까?
한두 시간 쯤 자고 일어나 15번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갔다. 가는 길에 길이 막혀 버스에서 내렸다. 마침 내린 곳이 Jim Tomson's house 앞이었다. 내린 김에 들렀다. 짐 톰슨은 실크 수입상인데 어느날 행방불명되었다. 미수금을 갚지 않으려고 토낀 것은 아닐까 싶다. 그에 관한 몇가지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별 관심없다.
아내에게 주려고 코끼리 그림이 있는 480밧 짜리 연분홍색 실크 스카프를 샀다. 썩 괜찮은 제품들이 눈에 띄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정작 관광해야 할 톰슨의 집은 입장료가 100밧 씩이나 해서 들어가지 않았다.
피피에서 제비집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황가가 제비집과 샥스핀을 먹고 싶단다. 별 맛이 없음을 미리 경고했다. 걸어서 학생들이 우글거리는 싸얌까지 갔다. 싸얌의 한 중국식 레스토랑(scala restaurant)에서 무려 800밧이나 하는 샥스핀과 500밧에 종지 하나 달랑 나오는 제비집을 시켜 먹었다. 맛있냐고 물으니 맛있단다. 내가 먹어본 샥스핀 중 지느러미의 양이 가장 많았다. 게살과 계란, 녹말가루로 적당히 얼버무려 양을 늘려놓지도 않았다. 제비집은 그저 그랬다. 제비집이 쥐꼬리 만큼 밖에 없다. 후루룩 쩝쩝 먹어치우고 한끼 식사로 1300밧이라는 거금을 카드로 긁었다. 그다지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먹을 일도 없을 것이다.
황가가 말했다. 다음 식당은 어디에요? 그래 오늘, 내일은 맛따라 길따라 하기로 했다. 뿌 팟뽕 까리(fried crab with curry)를 먹여주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실롬까지 슬슬 걸어갔다. 뿌 팟뽕 까리를 방콕에서 가장 맛있게 한다는 somboon seafood는 오후 4시부터 11시까지 밖에 영업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
한 시간 동안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노점상에서 만들어준 10밧 짜리 차갑고 맛있는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솜씨가 예술이다.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빵 속에 넣어 팔고 있다. 고소한 바베큐 냄새가 거리에 진동했다. 그런것들을 먹고 싶지만 뿌 팟뽕 가리를 먹기 위해 한 시간을 넘게 걸어왔으니, 참자. 최고급 식당 중 하나인 부사라쿰이 근처에 있다. 그곳에 수영복 입고 입장이 가능할지 늘 궁금했다.
실롬까지 가는 길에 소니 간판이 보여 무작정 들어가 메모리를 포맷해 달라고 부탁했다. 클리에에서 정상적으로 인식한다. 기쁘다. 거리에서 이것저것 사 먹었다. 거리음식이 레스토랑에서 비싼 돈 주고 먹는 음식들보다 항상 맛있었다.
오후 4시를 3분 남겨놓고 솜분식당에 들어갔다. 뿌 팟뽕 까리 두 접시와 작은 밥, 그리고 맥주를 시켜 통통하게 살이 오른 게를 즐겼다. 이런 저런 기회 때문에 먹어봤지만 이렇게 살이 토실한 게는 처음 봤다. 커리가 너무 진해 게 맛을 압도하지도 않았고 양념과 잘 어울렸다. 생각해보니 상하이 게 요리 스타일이다. 기름이 워낙 많아 끝맛은 약간 느끼한 편. 황가가 말하길, 여자들이 좋아하겠다고. 너가 여자 마음을 알아? 라고 쏘아 붙였다. 절대 모를껄 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난 알지 라고 생각했다.
15번 버스를 타고 카오산 로드까지 가는데 1시간 20분이 걸렸다. 태국이 경제난으로 위기에 처한 후 서민들이 신분과시용으로 구매했던 자가용을 다 팔아버려 교통체증이 완화되었다던데, 경제 사정이 나아져서 이 사람들이 다시 신분 과시에 열을 올리는 것일까?
숙소로 돌아와 한국인 여행객들과 얘기를 하며 꼬치에 맥주를 마셨다. 69년생 아저씨는 날더러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리는 타잎인 듯 하여 생섬(럼주)를 권하지 않았다고 미안해했다. 그가 제대로 본 것이다. 사람보다는 생섬에 관심이 더 많았다.
게스트하우스 복도에서 연주씨가 남긴 메시지를 보았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열두 시가 조금 넘어 잠들었다.
7/6
아침에 에어컨 룸으로 방을 옮겼다. 황가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자기와 여행 다닐 때는 죽어라고 팬룸만 가더니 중얼중얼... 내 방은 2층 W2, 보라색 침대시트, 큼지막한 창틀, 베란다, 시원한 에어컨이 특히 마음에 든다. 겁먹은 고양이가 베란다의 귀퉁이에서 얼굴만 살며시 내민 채 쳐다보고 있었다. 푸른 눈.
511번 에어컨 버스를 타고 수쿰윗으로 향했다. 날도 더운데 움직이는 일이 귀찮다. 방콕병 증세가 나타난 것 같다.
수쿰윗 쏘이 23을 주욱 올라가면 유명한 베트남 식당인 Le Dalat이 나온다. 그 맞은 편이 Baan Kanita, 2001년, 2003년 태국 요리 부문 베스트로 선정된 식당. 길 하나 건너 쏘이 24에는 명성이 하늘을 찌를 것 같긴 하지만 쥐꼬리만한 음식이 나오는 레몬 그라스가 있다. 레몬 그라스를 가느니 골목 귀퉁이의 꼬치집에서 꼬치를 200개 사 먹고 만다. 세트 메뉴 가격은 2년전 그대로 380밧이었다. 맥주 한 병에 잘 먹고 배를 채웠다. 보기 드문 종류의 소박하지만 기품있고 은근한 맛, 그래서 다시 찾은 곳이지만 태국 음식하면 이 집 음식이 떠올랐다.
TAT 부스에 대고 영어를 정말 유창하게 늘어놓는 아가씨에게 이 근처(쏘이 23)에서 가장 좋은(best) 타이 마사지 가게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니 타임 스퀘어 지하를 가르쳐 준다. 타임 스퀘어 지하에 있는 맛사지 가게의 이름은 'best thai massage'였다. -_-;
황가가 오일 맛사지를 받는 동안 나는 이층의 한국인 사장님이 만든듯한 인터넷 까페에 앉아 이렇게 로그를 작성중. 이제 나가자. 나가서 바지를 사자. 수영복을 입고 며칠째 벌건 대낮의 시내를 활보했다. 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