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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22 왕피천, 울진-삼척 자전거 여행 1
왕피천에 가고 싶어서 6월부터 기회를 엿봤지만 번번이 취소했다. 비 안 오는 주말에 가려고 계획을 짰는데, 주말마다 비가 왔다. 2개월 동안 그 모양이다가 8월 휴가철이 겹치면서 가고 싶어도 차에서 보낼 시간이 무서워 접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나 혼자 가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 가기로 했다. 혼자 가면 가볍다.

8월 14일 이사하는 집 공사가 나흘 일정으로 잡혀 있어 며칠 동안 거처가 없다. 수완좋은 아내가 거처를 마련했지만 내친 김에 여행이나 가자고  마음 먹었다. 아침에 잔금을 치르고 점심에 사무실로 돌아왔다. 저녁 무렵 출발할 생각이었지만 퇴근시간대에 자전거 끌고 지하철 타는 것은 양심없는 짓이고, 그렇다고 자전거 타고 사무실에서 동서울 터미널까지 가려니 초장부터 이 더위에 땀으로 샤워하고 버스에서 땀냄새 풀풀 풍기기 뭣하다.

그래서 일찌감치 출발했다. 16:40, 사무실에서 자전거를 챙겨 지하철을 타고 동서울 터미널로 향했다. 환승역인 신도림역으로는 자전거를 끌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아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7호선 지하철을 갈아탔다. 뚝섬유원지역에서 내려 동서울 터미널까지 자전거를 몰았다. 휴가철 막바지에 무더위가 겹쳐 피서가려는 사람들로 터미널이 징그럽게 버글버글하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18:56 차를 탔다. 버스는 삼척을 거쳐 울진으로 내려갔다. 가는 내내 쉴 새 없이 떠드는 관광객들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23:26 울진 도착. 자전거를 몰고 텅 빈 국도를 따라 강 건너편의 찜질방으로 찾아갔다. 왕피천 찜질방은 문을 닫았다. 한숨 한 번 쉬고, 다시 읍내로 돌아와 5년 전에 묵었던 명성 찜질방으로 향했다. 울진 친환경 농업 엑스포 기간 중이라 사람들이 많다. 배개 하나 달랑 베고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여행자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앉아 여행정보를 교환하지 않을 뿐, 찜질방이 어떤 면에서는 유스호스텔이나 도미토리보다 낫다. 찜질방이 한국식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장기간 해외여행을 해보지 않아 날개가 부러진 기분이다.

7시 무렵 깨어 샤워하고 자전거를 점검했다. 저번 주말에 약 5시간에 걸쳐 물세척하고 기름칠한 보람이 있어 구동부에서 소리가 별로 나지 않는다. 잘 정비된 자전거는 주행 중 타이어 스레드가 아스팔트에 접지하면서 나는 찰진 고무 마찰음 밖에 나지 않는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정비가 썩 잘 되어 있어 만족스럽다. 반면 술과 스트레스로 찌든 몸은 그렇지 않다.

편의점에서 도시락과 삼각김밥을 아침으로 먹고 읍내를 배회하며 트래킹 때 먹을 점심꺼리를 장만했다. 버스 터미널 부근을 지나가다 보니 왠 중국집이 아침 영업을 하는 것 같다. 괴이한데? 조그마한 읍내를 두어 바퀴 돌다가 아무래도 트래킹 중에 배낭이 젖을 것 같아 수퍼에 다시 들러 비닐 봉투를 얻었다. 인근에서 야영하던 사람들이 아침꺼리를 장만하러  자다 깬 얼굴로 수퍼 안을 좀비처럼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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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 출발. 읍내를 벗어나 망양 해수욕장 방면으로 달렸다. 안개가 짙게 깔려 강 건너편이 보이지 않는다. 망양 해수욕장도 사정은 마찬가지.

해도 안 난 아침인데 멸 킬로미터 달리지 않고도 땀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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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양정으로 오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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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팔경 중 제 1경으로 칭송받는 망양정. 현판은 대체 어디 갔을까? 아저씨들이 망양정 앞의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나무를 잘라내고 있었다. 무더위에 이런데서 술 마시고 놀던 선비들이 어쩐지 가엾어 보였다. 바위에 제 이름과 싯귀를 새기는 등 자연 파괴를 일삼으며 계곡에 발 담그고 시원하게 노는게 낫지 않나?
 
안개 속에 가려진 망양 해수욕장과 별 볼 일 없는 망양정을 지나쳐 산포리 쪽으로 남행. 동해안 위쪽과 달리 인적이 드물어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간혹 민박 집과 이 나라의 금수강산을 사정없이 조져놓는데 열을 올리는 펜션들이 눈에 띄긴 하지만 그 수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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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대바위... 옆으로 동해안에서 늘 보던 철조망. 길이 조용하고 아름답다. 자전거 하이킹하기에 딱이다.

해변을 따라 있는 캠핑장에 플랭카드가 걸려 있다. 해병제대 군인들이 독도 수호를 다짐하며 울진 앞바다에서 독도까지 특수영법을 사용해 릴레이 수영한다고 한다. 광복절 뉴스에 나오겠군. 저녁때 찜질방에서 아홉시 뉴스를 보니 정말 노해병들이 독도에서 만세를 부르는 뉴스가 나왔다.

산포리 앞바다(옆바다?) 구경을 잘 하고 나서 우회전해 진복리 부근의 울진학생 야영장 옆으로 난 농로를 따라 올라갔다. 특이하게도 흔히보던 다람쥐, 뱀 등의 로드킬과 달리 박쥐가 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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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음리 근처. 보호수 팻말이 붙어있는 멋진 나무 아래 벤치.

큰길 교차로 부근에는 어김없이 길 안내하는 천막이 있다. 울진에서 열리는 친환경농업 엑스포를 안내하는 것 같다. 울진에서 준비를 참 잘해놓은 것 같다. 구름을 헤집고 해가 멀끔히 얼굴을 내밀어서 고갯마루에서 한숨 돌리고 팔 토시를 착용했다.

자전거 탈 때 입는 져지 대신  수영복에 얼마 전에 옥션에서 5천원 주고 구입한 파란 등산복 티셔츠를 걸치고 자전거를 탔다. 쿨맥스 등산복이라 잘 마른다. 수영복은 여차하면 바다나 계곡에 뛰어들 목적으로 입었다. 워낙 편한 복장이라 이러다가 버릇되겠는데? 폼은 안 난다. 그런데, 폼이 밥 먹여주나? 난 아저씨란 말이다.

굳이 GPS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쉽게 성류굴 가는 길을 찾았다.  강변을 휘돌아 성류굴 입구에 다다랐다. 입장료 3천원, 자전거는 굳이 열쇠를 채우지 않고 매표소 앞에 세워두고 메고 있던 배낭은 사물함에 맡기고 좁은 굴 입구로 향했다. 굴에 들어서자 마자 서늘한 냉기가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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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유굴 여기 저기 설치되어 있는 온습도계를 보니 온도는 16.7도, 습도가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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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사 내장 같아 보이는데? 어우 징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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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유굴을 볼 때마다 단테의 신곡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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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H.R. 기거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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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폿 조명을 받고 있는 종유석. 세계 어디서나 나무든 돌이든 남근이나 여근 모양이면 이렇듯이...

성류굴을 나와 농로를 따라 왕피천을 따라갔다. 저수지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울창한 숲 사이로 콸콸 흐르는 물 소리가 들린다. 간혹 좁은 길을 따라 내 자전거를 추월하는 자가용들이 지나갔다. 150m까지 올랐지만 내리막길에서 신나게 내려가긴 좀 무서웠다. 속도를 줄여 구산리 구고동에 다다랐다. 해는 쨍쨍 내리쬐고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32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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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천동까지 자전거를 몰고 가서 왕피천 트래킹을 시작할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날이 워낙 더워서 한시라도 빨리 물에 몸을 담그고 싶어 자전거를 대충 세워두고 자물쇠는 채우지 않은 채(이런 데서 누가 자전거를 훔쳐가겠나?) 왕피천에 발을 담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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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살이 거칠고 매우 빠르다. 언덕에서 볼 때는 별로 깊어 보이지 않았는데 개울에 들어가보니 허리춤까지 물이 찬다. 물살이 빨라 거의 둥둥 떠내려가다시피 하류로 흘러갔다. 간신히 중심잡고 건너편 기슭에 다다랐다. 날이 더워 부러 개울에 뛰어든 탓에 이미 온 몸이 젖고 배낭도 젖었다. 개울 트래킹이니까 일단 담그고 시작해야 속이 편하다. 비닐봉투에 넣은 배낭의 내용물을 꺼내 밀폐 여부를 다시 확인하고 출발.

어제 아침에 회사갈 때 깜빡 잊고 등산 샌달 대신 운동화를 신고 왔다. 몹시 후회된다. 바위가 뾰족뾰족해 신발을 벗을 수는 없고, 발과 신발과의 마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양말도 벗을 수가 없다. 그냥 이대로 개울을 따라 죽 올라가야 한다.


동영상으로 보는 것과 달리 물속에서 중심잡기가 몹시 힘들다. 신발은 죽죽 미끄러지고 물살에도 죽죽 밀린다. 건너편으로 건너려면 두어명이 한 조가 되어 자일을 끌어야 할 판. 동영상 마지막 부근에서는 물이 허리까지 잠겼다. 이건 도저히... 한가하게 동영상 찍을 분위기가 아니라서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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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간쯤 걸어 올라서 상천동 근처의 보에 다다랐다. 오는 동안 두어번 미끄러졌다. 시원하게 물 먹었다. 보 저쪽 편에 자동차를 세워놓고 천막을 친 채 고기를 구워먹는 사람들이 보였다. 하지만 물살 탓에 끄트머리가 붕괴된 저 보를 지나갈 수 없을 것 같다.  평화로운 사진과 달리 무척 으시시하다. 용소까지는 절반 정도 남았다. 차라리 자전거를 몰고 상천동까지 왔더라면 좋았을 껄 그랬나? 이 더위에 직사광선 아래 땀을 비오듯 쏟으면서 자전거 타긴 뭣하고...  그래 이쯤에서 포기하자.

내려오는 길에 배낭을 내려놓고 쉬었다. 온통 젖었다. 뭐 사실 여기까지 오는 길의 절반은 물 속에 푹 잠기다시피 했으니까. 오후 한 시. 점심을 먹으려고 배낭을 열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등산객 한 팀이 올라오는 중. 한 아저씨가 돌아오는 길이냐며, 용소까지 거리를 묻는다. GPS를 흘낏 보니 4km 가량. '여기서 한시간 반 정도 걸으면 용소까지 가고 넉넉 잡아 세시간 반이면 속사마을까지 갈 수 있는데, 여기서 30분 거리에 보가 하나 있어요. 자일은 챙겨오셨어요?' 챙겨왔단다. 이 팀을 따라갈까 하다가.. 돌아올 때 쯤이면 오후 3시가 될텐데, 또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끔찍해져서(아침 8시부터 5시간 동안 자전거 타고 걷고 해서 많이 지쳤다) 역시 관두기로.

점심 먹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다시 개울을 따라 구고동으로 돌아왔다. 오후 2시. 33.7도. 구고동 다리 밑에 젖은 짐을 펴 놓고 산들바람이 부는 다리 밑 그늘로 기어들어가 누웠다.  오후 3시 무렵 깨었다. 별 거 아닌 거 같은데 많이 지쳤다. 이런 저질 체력 같으니라고.

짐을 바리바리 배낭에 쌌다. 배낭은 작년에 지리산 갈 때 산 38리터 짜리인데 3일 산행하기엔 공간이 넉넉치 않아 결국 지리산행 때는 써보지 못했다. 등판이 망사라 자전거 탈 때는 땀이 배이지 않아 아주 좋았다. 계획했던 용소까지 가지 못해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잊어버리자.

오던 길을 거슬러 성류굴 맞은편의 울진 종합 운동장까지 자전거를 신나게 몰았다. 자전거를 모는 내내 울진읍민들이 부러웠다. 읍내에서 조금만 나가면 왕피천이나 불영계곡같은 멋진 계곡이 있고, 읍내를 관통하는 왕피천도 무척 맑아 물놀이 하기 좋았다.

시간이 많이 남아도는데 딱히 할 일도 없어 친환경 농업 엑스포나 구경하러 갔다. 그 행사 때문에 조성한 넓은 엑스포 공원이 왕피천변에 펼쳐져 있다. 그런데 입장료가 무려 12000원이나 한다. 대체 뭐가 이리 비싼가 싶어 팜플렛을 뒤적여 보니, 입장권이 성류굴 무료관람, 불영사 관람 할인권, 백암/덕구온천 할인권, 민물고기 생태체험관 할인권, 엑스포 행사장내 아쿠아리움 무료 관람, 입체영화 무료 관람등을 포함하고 있다.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껄!

어젯밤 뉴스에서 친환경 농업 엑스포 관람자가 백만명을 돌파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보니 과연 그럴만 했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이 즐기기에 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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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원에서 본 시계꽃. 꽃잎이 뒤집혀 있고 시침, 분침, 초침 따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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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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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게.  왕돌초라 불리우는 대륙붕 부근의 돌 섬에 조성된 생태계에서 산다. 왕돌초가 열대바다의 산호초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남획에 의해 고갈된 환경을 되살리기 위해 남해바다에 다량의 인공어초를 설치했는데 성과가 성공적이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울진에도 인공어초를 설치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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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털게, 대게, 왕게들이 바다 밑에 이렇게 떼지어 사는구나. 먹음직스럽다기 보단 징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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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중인 가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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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 공원 앞 왕피천. 건너편은 아침에 안개가 자욱했던 망양 해수욕장.

오후 6시. 대략 2시간쯤 엑스포 구경을 했다. '국제' 라는 접두어를 붙이기는 민망하지만, 행사 기획을 참 잘 했다.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썼다. 백만명 관람도 이해가 간다. 지치고 다리가 아파서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쭈쭈바를 빨아먹었다. 예전에는 자전거 탈 때 설레임을 자주 먹었는데 가격이 1500원으로 올라 먹기 부담스러워 그 대신 800원짜리 빠삐코를 자주 먹었다.

벤치에 놓고왔던 모자를 되찾고 충전을 위해 맡겼던 휴대폰을 되찾았다. 8시 무렵 저녁 행사가 있어(8월 16일이 폐회) 재입장용 스탬프를 팔목에 찍고 울진 시내로 자전거를 몰았다. 주말이라 자전거 가게가 문을 닫아 자전거에 바람을 넣을 데가 마땅치 않다. 아무래도 이대로 끌고 다녀야겠다.

읍내의 만나삼계탕에서 8500원짜리 삼계탕을 시켰다. 양해를 구하고 엑스포에서 산 5천원짜리 오미자와인을 삼계탕에 곁들여 먹었다.  오후 7시. 다시 엑스포 행사장으로 갔다. 행사장은 파장 분위기다. 잘못 알았다. 7시 시작해서 8시 끝나는데 8시에 시작하는 줄 알았다.마지막 행사는 불꽃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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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공연장에서 불꽃놀이를 기다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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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구경한 것은 처음. 왕피천에서 불꽃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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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날레.

어제 묵었던 동명 찜질방 대신 강 건너 명성 찜질방으로 향했다. 엑스포 때문에 사람들이 워낙 몰려 읍내의 모든 숙소가 찼고 찜질방에도 사람들이 바글거릴테니 신발을 잘 챙기란다. 들어와서 30분이 채 안된 열시 반 무렵이 되자 돗대기시장처럼 붐볐다. 새벽까지 잘 자다가 깼다. 다시 잠들었다.

아침 7시 조금 넘어 일어났다. 샤워를 마치고 찜질방을 나왔다. 어제 삼계탕을 든든히 먹었더니 아침 먹긴 뭣하고 바로 출발. 5년 전 동해에서 울진까지 자전거 타고 올 때가 딱 이맘때였다. 날씨도 비슷하다. 한낮에 섭씨 34도. 코스는 동일. 그때와 지금이 어떻게 달라졌나 확인하고 싶어서 왕피천 트래킹과 울진-동해 자전거 주행을 패키지로 묶어서 여행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침부터 히죽히죽 웃었다. 이번에는 잘 될 것이다.

7번 국도를 따라 죽변으로 출발했다. 아직 더위가 들개처럼 몰려오기 전, 햇볕은 갓나고 공기는 선선하다. 해변을 신나게 달려 죽변에 다다렀다. 뭐 그래도 땀 나는 건 마찬가지다.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삼각김밥을 사 먹고 한 숨 돌린 후 죽변항을 돌아 '폭풍속으로' 세트장으로 향했다. 죽변항에 곰치국으로 아침먹을 만한 곳이 있었는데 바보같이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사먹어서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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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속으로'란 드라마의 촬영지. 본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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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지 옆 빽빽한 대나무 숲과 옥빛 바다.

죽변항을 출발해 원자력 전시관 방면으로 향했다. 다음 지도에는 원자력 발전소가 녹지로 나타난다. 그쪽으로 길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역시나, 원자력발전소를 가로지르는 길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다시 되돌아와서 7번 국도와 나란히 이어지는 길을 따라 원자력 전시관에 다다랐다. 잠깐 쉬다가 다시 출발. 다음 목적지는 호산리.

길고 지루한 업힐이 이어지는 동안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땀이 비오듯 쏟아져내렸다. 호산리에 다다르기 전 문닫은 하늘휴게소를 지나 자유수호의 탑 바로 직전에 공터에서 자전거를 세웠다. 고갯마루까지 올라오니까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오르막길 내내 힘들어서 기어비는 거의 1:3, 1:2에서 오락가락했다.

호산리에 다다라 점심을 먹으려고 했는데 도착해보니 10:46 밖에 안 되었다. 그래도 늦으면 밥을 못 먹을테니(5년 전에는 노변에 밥 먹을 곳이 없어서 무척 황당했다) 아직 음식점이 준비가 안 되었단다. 하는 수 없이 물만 얻었다.

오르막길 막바지에서 내려오는 길에 사고가 났다. 노곡 삼거리 앞. 맞은편 차선에서 내려오는 나를 미쳐 보지 못하고 좌회전하다가 자전거와 충돌했다.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만약 피했다면 내려오는 속도 때문에 삼거리 맞은편의 펜스에 자전거를 박고 절벽으로 굴러떨어졌을 것이다. 대신 브레이크를 잡고 좌회전하던 자동차 우측 범퍼를 그대로 박았다.

자전거 속도가 급격히 줄면서 정지했다. 몸이 붕 떠서 반 이상 회전할 때까지 핸들바를 놓지 않았다. 적절하다 싶은 타이밍에 핸들바를 놓고 왼팔을 안쪽으로 휘둘러 공중에서 몸을 돌린 후 왼쪽 어깨부터 아스팔트에 착지했다. 그리고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니까 액션대역처럼 무척 멋지게 2m 짜리 공중제비를 돈 다음 아스팔트에 떨어진 것이다.

자동차를 몰던 아줌마는 넋이 나가서 횡설수설했다. 나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가 다시 쓰러졌다. 차문이 열리면서 조수석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허겁지겁 뛰어온다. 자전거 위치를 확인했다. 범퍼에 부딛혔던 자전거는 내 앞쪽으로 멀리 튕겨 나가 있었다. 아저씨가 나를 일으켜 세우면서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운동신경이 좋아서 크게 안 다친 것 같군요.' 그러게 말이다. 자전거 타고 사고에 대비해 벽을 향해 쏜살같이 달리며 미친놈처럼 치킨런 연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두개골 검사. 집 전화번호를 떠올려 보았다. 기억 안 난다. 아참, 원래 집 전화번호를 기억 못했지. 파이를 12자리까지 외워보았다. 된다. 왼쪽 어깨가 욱씬거렸다. 감각은 다 느껴진다. 무척 더운 날씨고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볼이 간지럽다. 등골은 여전히 서늘하고. 아줌마 운전수는 안절부절하고 있고 아저씨가 나를 부축해 앉혔다. 괜찮아요? 글쎄요. 그점에 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편입니다.

앉아서 사고 경위를 따졌다. 그쪽이 잘못을 인정했다. 아줌마는 당사자인 나보다 정신없어 보인다. 명함을 받고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차 번호를 적었다. 사고 지점을 waypoint로 찍어 두었다. 자전거는 별 탈 없다. 브레이크 와이어가 이탈했고 한쪽 패달이 약간 찌그러졌다. 생각보다 브레이크가 잘 먹은 것 같다. 그래서 큰 사고가 나지 않은 것이다. 살아서 다행이다. 병원에 가자고 아저씨가 말한다. 살았으니까 일단 자전거를 몰고 싶다. 필요하면 연락할테니 먼저 가라고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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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지점. 도로변에 멍하니 앉아 아까 식당에서 얻어온 물을 마셨다. 나중에 돌아와서 GPS 로그를 분석해보니 저 내리막길에서 내려올 때 속도가 44kmh였고 브레이크를 잡아서 속도가 37kmh로 떨어졌다. GPS의 기록 시차를 고려하면 임펙트 순간의 속도는 대략 20~30kmh 쯤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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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및 비정상

삼척까지 35km 남짓 남았다. 어깨가 뻐근하지만 아드레날린 펌프 덕택에 자전거 주행은 비교적 수월했다. 임원을 지나 5년 전에도 쉬었다 갔던 신남 해수욕장 부근에 다다랐다. 예전에 없던 해신당 공원이란게 생겼다. 해신당이 남근 숭배인 것 같다. 날이 무척 더워서 햇볕에 쏘다니긴 좀 그렇고 파라솔 아래에서 800원짜리 빠삐코를 사먹고 다시 출발했다. 배가 슬슬 고파온다.

용화해수욕장을 지나 고갯마루의 작은 공원에서 자전거를 멈추고 그늘 아래 벤치에 누웠다. 옆에서 전라도에서 온 아저씨들이 회를 먹고 있다. 날더러 좀 먹어보겠냐고 묻는다. 대답하려고 일어서다가 갈비뼈가 결렸다. 아프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째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아까 병원 가잘때 갈 껄 그랬나? 아니다. 오기다. 공원 위쪽에 설렁탕 집이 보였다. 식당에 밥이 떨어져서 막국수를 먹었다. 식사가 나올 때까지 근 한 시간을 기다렸다. 주인장은 싱글벙글한다. 밥이 떨어질 정도로 오늘 영업이 잘 되었단다. 하루 장사를 점심 한 때로 다 했다나?

근덕면에 바다로 흘러가는 개울이 있던 것을 기억한다. 이 망할 더위에 지쳐 나가 떨어질 것 같아 시원하고 맑은 개울에 몸을 담그고 싶다. 어제처럼 오늘 복장도 여차하면 물속에 뛰어들려고 수영복과 등산복 차림이다. 개울에 수풀이 우거졌고 수초와 녹색말이 보인다. 아... 5년이 지나는 동안 그 맑았던 물이 이렇게 흐려졌구나. 김이 새서 개울을 지나쳤다. 가다보니 '재동유원지'란 팻말이 보였다. 아이들이 물속에서 첨벙이고 있다. 빙고.

개울 한 가운데를 깊이 파서 위쪽과 아래쪽에 여울을 만들어 물을 고엿다. 그렇게 해서 천연 수영장을 만들어 놓았다. 자맥질 몇 번 하니 살 것 같다. 아까 사고날 때 왼쪽 팔굽 위와 어깨에 상처가 생겼다. 팔 토시에 피가 배었다. 개울물에 상처를 담궈두면 감염이 염려되어 천원 내고 샤워장에서 샤워하고 먼지묻은 옷들을 빨았다. 잔돈으로 빠삐코를 사 먹었다. 아내가 전화했지만 사고 얘기는 하지 않았다. 이 더위에 뭐하는 뻘짓이냐며 어서 돌아오란다. 이 더위가 아니면 안된다. 동해까진 가야겠다.

갈빗대를 비롯해 왼쪽 어깨가 많이 쑤신다.  아무래도 삼척에 들러 진료를 받아야겠다. 지나가다가 경찰서가 보여 삼척에서 응급진료가 가능한 병원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사고처리에 관해 물어보니 당사자간 합의가 안되면 그때해도 늦지 않단다. 보험사에 연락해 진료 청구를 하라고 사고낸 아줌마에게 전화했다. 전화를 안 받는다. 일단 삼척의료원(삼척병원)까지 가보자.

상맹방 해수욕장에서 자동차 전용도로말고 구 7번 국도로 들어가는 길을 찾느라 헤멨다. 겨국 못찾고 자동차 전용도로로 들어가려고 그 입구에 가보니 자전거 여행자가 있다. 군 입대를 앞두고 자전거 여행을 해 보자 해서 경상남도에서부터 죽 올라오는 길이란다. 함께 자동차 전용도로를 올라가 터널을 통과했다. 안 따라오길래 뒤를 돌아보니 자전거를 세웠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펑크가 났단다. 타이어가 참 얇다. 벌써 펑크가 두번 났단다. 능숙학게 펑크를 때운다. 옆에서 도와줬다. 수리 중에 제주도에 꼭 가보라고, 해안도로 일주도 보람있긴 하지만... 성산에서 성판악까지 올라가 서귀포로 내려간 다음 시계 방향으로 해안도로 일주하는 코스를 알려줬다.

어깨가 많이 쑤셔서 먼저 출발했다. 삼척병원에 도착해 응급실에 진료 접수했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뼈는 이상이 없단다. 이런 젠장 근육통인거야? 뼈라도 하나 부러져야 여행경비나 뽑아낼텐데... 사실 사고처리하던가 합의해서 합의금 뜯어낼 수는 있겠지만 양심상 그런 짓은 못 하겠다. 병원에서 한 시간을 보내니 벌써 4시 30분. 동해까지 가려니 왠지 김이 새서 관뒀다. 5년 전에 비해 체력은 훨씬 좋아졌다. 사고만 아니었으면 아마 오늘 강릉까지 갔을 것 같다.

삼척을 빙글빙글 돌며 구경했다. 삼척도 많이 변했다. 동굴 엑스포 타운이란 것이 생겼다. 삼척이 동굴의 도시란다. 낮에 먹은 맛없는 관광지 막국수로는 배가 차지도 않아 롯데리아에서 햄버거와 팥빙수로 배를 채웠다.

18시 동서울행 버스를 탔다. 차가 많이 밀려 서울에 도착하니 23시. 시내주행을 조금 하다가 중랑천 자전거도로로 접어들어 공릉까지 갔다. 치킨과 맥주를 사들고 마누라가 기다리는 임시 거처에 도착했다. 아이를 재우고 맥주를 마셨다. 올해 동해안 자전거 여행도 제대로 끝나지 않았다. 기분이 묘하다.

사고낸 아줌마와 연락이 닿아 진료비와 약값을 받았다. 망가진 패달 값을 받을까 하다가 그냥 수리해서 쓰기로 했다. 미안하고 고맙다며 바닷가에 놀러오란다. 시내 자전거 주행과 마찬가지로 자전거 여행도 살아서 집에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다. 살아서 집에 돌아와 치킨과 맥주를 마시며 아내와 아이가 자는 모습을 봐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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