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여행'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8.22 왕피천, 울진-삼척 자전거 여행 1
  2. 2009.06.15 안면도-선유도 자전거 여행 1
왕피천에 가고 싶어서 6월부터 기회를 엿봤지만 번번이 취소했다. 비 안 오는 주말에 가려고 계획을 짰는데, 주말마다 비가 왔다. 2개월 동안 그 모양이다가 8월 휴가철이 겹치면서 가고 싶어도 차에서 보낼 시간이 무서워 접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나 혼자 가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 가기로 했다. 혼자 가면 가볍다.

8월 14일 이사하는 집 공사가 나흘 일정으로 잡혀 있어 며칠 동안 거처가 없다. 수완좋은 아내가 거처를 마련했지만 내친 김에 여행이나 가자고  마음 먹었다. 아침에 잔금을 치르고 점심에 사무실로 돌아왔다. 저녁 무렵 출발할 생각이었지만 퇴근시간대에 자전거 끌고 지하철 타는 것은 양심없는 짓이고, 그렇다고 자전거 타고 사무실에서 동서울 터미널까지 가려니 초장부터 이 더위에 땀으로 샤워하고 버스에서 땀냄새 풀풀 풍기기 뭣하다.

그래서 일찌감치 출발했다. 16:40, 사무실에서 자전거를 챙겨 지하철을 타고 동서울 터미널로 향했다. 환승역인 신도림역으로는 자전거를 끌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아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7호선 지하철을 갈아탔다. 뚝섬유원지역에서 내려 동서울 터미널까지 자전거를 몰았다. 휴가철 막바지에 무더위가 겹쳐 피서가려는 사람들로 터미널이 징그럽게 버글버글하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18:56 차를 탔다. 버스는 삼척을 거쳐 울진으로 내려갔다. 가는 내내 쉴 새 없이 떠드는 관광객들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23:26 울진 도착. 자전거를 몰고 텅 빈 국도를 따라 강 건너편의 찜질방으로 찾아갔다. 왕피천 찜질방은 문을 닫았다. 한숨 한 번 쉬고, 다시 읍내로 돌아와 5년 전에 묵었던 명성 찜질방으로 향했다. 울진 친환경 농업 엑스포 기간 중이라 사람들이 많다. 배개 하나 달랑 베고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여행자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앉아 여행정보를 교환하지 않을 뿐, 찜질방이 어떤 면에서는 유스호스텔이나 도미토리보다 낫다. 찜질방이 한국식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장기간 해외여행을 해보지 않아 날개가 부러진 기분이다.

7시 무렵 깨어 샤워하고 자전거를 점검했다. 저번 주말에 약 5시간에 걸쳐 물세척하고 기름칠한 보람이 있어 구동부에서 소리가 별로 나지 않는다. 잘 정비된 자전거는 주행 중 타이어 스레드가 아스팔트에 접지하면서 나는 찰진 고무 마찰음 밖에 나지 않는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정비가 썩 잘 되어 있어 만족스럽다. 반면 술과 스트레스로 찌든 몸은 그렇지 않다.

편의점에서 도시락과 삼각김밥을 아침으로 먹고 읍내를 배회하며 트래킹 때 먹을 점심꺼리를 장만했다. 버스 터미널 부근을 지나가다 보니 왠 중국집이 아침 영업을 하는 것 같다. 괴이한데? 조그마한 읍내를 두어 바퀴 돌다가 아무래도 트래킹 중에 배낭이 젖을 것 같아 수퍼에 다시 들러 비닐 봉투를 얻었다. 인근에서 야영하던 사람들이 아침꺼리를 장만하러  자다 깬 얼굴로 수퍼 안을 좀비처럼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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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 출발. 읍내를 벗어나 망양 해수욕장 방면으로 달렸다. 안개가 짙게 깔려 강 건너편이 보이지 않는다. 망양 해수욕장도 사정은 마찬가지.

해도 안 난 아침인데 멸 킬로미터 달리지 않고도 땀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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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양정으로 오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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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팔경 중 제 1경으로 칭송받는 망양정. 현판은 대체 어디 갔을까? 아저씨들이 망양정 앞의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나무를 잘라내고 있었다. 무더위에 이런데서 술 마시고 놀던 선비들이 어쩐지 가엾어 보였다. 바위에 제 이름과 싯귀를 새기는 등 자연 파괴를 일삼으며 계곡에 발 담그고 시원하게 노는게 낫지 않나?
 
안개 속에 가려진 망양 해수욕장과 별 볼 일 없는 망양정을 지나쳐 산포리 쪽으로 남행. 동해안 위쪽과 달리 인적이 드물어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간혹 민박 집과 이 나라의 금수강산을 사정없이 조져놓는데 열을 올리는 펜션들이 눈에 띄긴 하지만 그 수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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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대바위... 옆으로 동해안에서 늘 보던 철조망. 길이 조용하고 아름답다. 자전거 하이킹하기에 딱이다.

해변을 따라 있는 캠핑장에 플랭카드가 걸려 있다. 해병제대 군인들이 독도 수호를 다짐하며 울진 앞바다에서 독도까지 특수영법을 사용해 릴레이 수영한다고 한다. 광복절 뉴스에 나오겠군. 저녁때 찜질방에서 아홉시 뉴스를 보니 정말 노해병들이 독도에서 만세를 부르는 뉴스가 나왔다.

산포리 앞바다(옆바다?) 구경을 잘 하고 나서 우회전해 진복리 부근의 울진학생 야영장 옆으로 난 농로를 따라 올라갔다. 특이하게도 흔히보던 다람쥐, 뱀 등의 로드킬과 달리 박쥐가 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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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음리 근처. 보호수 팻말이 붙어있는 멋진 나무 아래 벤치.

큰길 교차로 부근에는 어김없이 길 안내하는 천막이 있다. 울진에서 열리는 친환경농업 엑스포를 안내하는 것 같다. 울진에서 준비를 참 잘해놓은 것 같다. 구름을 헤집고 해가 멀끔히 얼굴을 내밀어서 고갯마루에서 한숨 돌리고 팔 토시를 착용했다.

자전거 탈 때 입는 져지 대신  수영복에 얼마 전에 옥션에서 5천원 주고 구입한 파란 등산복 티셔츠를 걸치고 자전거를 탔다. 쿨맥스 등산복이라 잘 마른다. 수영복은 여차하면 바다나 계곡에 뛰어들 목적으로 입었다. 워낙 편한 복장이라 이러다가 버릇되겠는데? 폼은 안 난다. 그런데, 폼이 밥 먹여주나? 난 아저씨란 말이다.

굳이 GPS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쉽게 성류굴 가는 길을 찾았다.  강변을 휘돌아 성류굴 입구에 다다랐다. 입장료 3천원, 자전거는 굳이 열쇠를 채우지 않고 매표소 앞에 세워두고 메고 있던 배낭은 사물함에 맡기고 좁은 굴 입구로 향했다. 굴에 들어서자 마자 서늘한 냉기가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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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유굴 여기 저기 설치되어 있는 온습도계를 보니 온도는 16.7도, 습도가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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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사 내장 같아 보이는데? 어우 징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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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유굴을 볼 때마다 단테의 신곡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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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H.R. 기거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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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폿 조명을 받고 있는 종유석. 세계 어디서나 나무든 돌이든 남근이나 여근 모양이면 이렇듯이...

성류굴을 나와 농로를 따라 왕피천을 따라갔다. 저수지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울창한 숲 사이로 콸콸 흐르는 물 소리가 들린다. 간혹 좁은 길을 따라 내 자전거를 추월하는 자가용들이 지나갔다. 150m까지 올랐지만 내리막길에서 신나게 내려가긴 좀 무서웠다. 속도를 줄여 구산리 구고동에 다다랐다. 해는 쨍쨍 내리쬐고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32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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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천동까지 자전거를 몰고 가서 왕피천 트래킹을 시작할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날이 워낙 더워서 한시라도 빨리 물에 몸을 담그고 싶어 자전거를 대충 세워두고 자물쇠는 채우지 않은 채(이런 데서 누가 자전거를 훔쳐가겠나?) 왕피천에 발을 담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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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살이 거칠고 매우 빠르다. 언덕에서 볼 때는 별로 깊어 보이지 않았는데 개울에 들어가보니 허리춤까지 물이 찬다. 물살이 빨라 거의 둥둥 떠내려가다시피 하류로 흘러갔다. 간신히 중심잡고 건너편 기슭에 다다랐다. 날이 더워 부러 개울에 뛰어든 탓에 이미 온 몸이 젖고 배낭도 젖었다. 개울 트래킹이니까 일단 담그고 시작해야 속이 편하다. 비닐봉투에 넣은 배낭의 내용물을 꺼내 밀폐 여부를 다시 확인하고 출발.

어제 아침에 회사갈 때 깜빡 잊고 등산 샌달 대신 운동화를 신고 왔다. 몹시 후회된다. 바위가 뾰족뾰족해 신발을 벗을 수는 없고, 발과 신발과의 마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양말도 벗을 수가 없다. 그냥 이대로 개울을 따라 죽 올라가야 한다.


동영상으로 보는 것과 달리 물속에서 중심잡기가 몹시 힘들다. 신발은 죽죽 미끄러지고 물살에도 죽죽 밀린다. 건너편으로 건너려면 두어명이 한 조가 되어 자일을 끌어야 할 판. 동영상 마지막 부근에서는 물이 허리까지 잠겼다. 이건 도저히... 한가하게 동영상 찍을 분위기가 아니라서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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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간쯤 걸어 올라서 상천동 근처의 보에 다다랐다. 오는 동안 두어번 미끄러졌다. 시원하게 물 먹었다. 보 저쪽 편에 자동차를 세워놓고 천막을 친 채 고기를 구워먹는 사람들이 보였다. 하지만 물살 탓에 끄트머리가 붕괴된 저 보를 지나갈 수 없을 것 같다.  평화로운 사진과 달리 무척 으시시하다. 용소까지는 절반 정도 남았다. 차라리 자전거를 몰고 상천동까지 왔더라면 좋았을 껄 그랬나? 이 더위에 직사광선 아래 땀을 비오듯 쏟으면서 자전거 타긴 뭣하고...  그래 이쯤에서 포기하자.

내려오는 길에 배낭을 내려놓고 쉬었다. 온통 젖었다. 뭐 사실 여기까지 오는 길의 절반은 물 속에 푹 잠기다시피 했으니까. 오후 한 시. 점심을 먹으려고 배낭을 열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등산객 한 팀이 올라오는 중. 한 아저씨가 돌아오는 길이냐며, 용소까지 거리를 묻는다. GPS를 흘낏 보니 4km 가량. '여기서 한시간 반 정도 걸으면 용소까지 가고 넉넉 잡아 세시간 반이면 속사마을까지 갈 수 있는데, 여기서 30분 거리에 보가 하나 있어요. 자일은 챙겨오셨어요?' 챙겨왔단다. 이 팀을 따라갈까 하다가.. 돌아올 때 쯤이면 오후 3시가 될텐데, 또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끔찍해져서(아침 8시부터 5시간 동안 자전거 타고 걷고 해서 많이 지쳤다) 역시 관두기로.

점심 먹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다시 개울을 따라 구고동으로 돌아왔다. 오후 2시. 33.7도. 구고동 다리 밑에 젖은 짐을 펴 놓고 산들바람이 부는 다리 밑 그늘로 기어들어가 누웠다.  오후 3시 무렵 깨었다. 별 거 아닌 거 같은데 많이 지쳤다. 이런 저질 체력 같으니라고.

짐을 바리바리 배낭에 쌌다. 배낭은 작년에 지리산 갈 때 산 38리터 짜리인데 3일 산행하기엔 공간이 넉넉치 않아 결국 지리산행 때는 써보지 못했다. 등판이 망사라 자전거 탈 때는 땀이 배이지 않아 아주 좋았다. 계획했던 용소까지 가지 못해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잊어버리자.

오던 길을 거슬러 성류굴 맞은편의 울진 종합 운동장까지 자전거를 신나게 몰았다. 자전거를 모는 내내 울진읍민들이 부러웠다. 읍내에서 조금만 나가면 왕피천이나 불영계곡같은 멋진 계곡이 있고, 읍내를 관통하는 왕피천도 무척 맑아 물놀이 하기 좋았다.

시간이 많이 남아도는데 딱히 할 일도 없어 친환경 농업 엑스포나 구경하러 갔다. 그 행사 때문에 조성한 넓은 엑스포 공원이 왕피천변에 펼쳐져 있다. 그런데 입장료가 무려 12000원이나 한다. 대체 뭐가 이리 비싼가 싶어 팜플렛을 뒤적여 보니, 입장권이 성류굴 무료관람, 불영사 관람 할인권, 백암/덕구온천 할인권, 민물고기 생태체험관 할인권, 엑스포 행사장내 아쿠아리움 무료 관람, 입체영화 무료 관람등을 포함하고 있다.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껄!

어젯밤 뉴스에서 친환경 농업 엑스포 관람자가 백만명을 돌파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보니 과연 그럴만 했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이 즐기기에 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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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원에서 본 시계꽃. 꽃잎이 뒤집혀 있고 시침, 분침, 초침 따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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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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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게.  왕돌초라 불리우는 대륙붕 부근의 돌 섬에 조성된 생태계에서 산다. 왕돌초가 열대바다의 산호초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남획에 의해 고갈된 환경을 되살리기 위해 남해바다에 다량의 인공어초를 설치했는데 성과가 성공적이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울진에도 인공어초를 설치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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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털게, 대게, 왕게들이 바다 밑에 이렇게 떼지어 사는구나. 먹음직스럽다기 보단 징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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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중인 가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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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 공원 앞 왕피천. 건너편은 아침에 안개가 자욱했던 망양 해수욕장.

오후 6시. 대략 2시간쯤 엑스포 구경을 했다. '국제' 라는 접두어를 붙이기는 민망하지만, 행사 기획을 참 잘 했다.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썼다. 백만명 관람도 이해가 간다. 지치고 다리가 아파서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쭈쭈바를 빨아먹었다. 예전에는 자전거 탈 때 설레임을 자주 먹었는데 가격이 1500원으로 올라 먹기 부담스러워 그 대신 800원짜리 빠삐코를 자주 먹었다.

벤치에 놓고왔던 모자를 되찾고 충전을 위해 맡겼던 휴대폰을 되찾았다. 8시 무렵 저녁 행사가 있어(8월 16일이 폐회) 재입장용 스탬프를 팔목에 찍고 울진 시내로 자전거를 몰았다. 주말이라 자전거 가게가 문을 닫아 자전거에 바람을 넣을 데가 마땅치 않다. 아무래도 이대로 끌고 다녀야겠다.

읍내의 만나삼계탕에서 8500원짜리 삼계탕을 시켰다. 양해를 구하고 엑스포에서 산 5천원짜리 오미자와인을 삼계탕에 곁들여 먹었다.  오후 7시. 다시 엑스포 행사장으로 갔다. 행사장은 파장 분위기다. 잘못 알았다. 7시 시작해서 8시 끝나는데 8시에 시작하는 줄 알았다.마지막 행사는 불꽃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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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공연장에서 불꽃놀이를 기다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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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구경한 것은 처음. 왕피천에서 불꽃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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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날레.

어제 묵었던 동명 찜질방 대신 강 건너 명성 찜질방으로 향했다. 엑스포 때문에 사람들이 워낙 몰려 읍내의 모든 숙소가 찼고 찜질방에도 사람들이 바글거릴테니 신발을 잘 챙기란다. 들어와서 30분이 채 안된 열시 반 무렵이 되자 돗대기시장처럼 붐볐다. 새벽까지 잘 자다가 깼다. 다시 잠들었다.

아침 7시 조금 넘어 일어났다. 샤워를 마치고 찜질방을 나왔다. 어제 삼계탕을 든든히 먹었더니 아침 먹긴 뭣하고 바로 출발. 5년 전 동해에서 울진까지 자전거 타고 올 때가 딱 이맘때였다. 날씨도 비슷하다. 한낮에 섭씨 34도. 코스는 동일. 그때와 지금이 어떻게 달라졌나 확인하고 싶어서 왕피천 트래킹과 울진-동해 자전거 주행을 패키지로 묶어서 여행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침부터 히죽히죽 웃었다. 이번에는 잘 될 것이다.

7번 국도를 따라 죽변으로 출발했다. 아직 더위가 들개처럼 몰려오기 전, 햇볕은 갓나고 공기는 선선하다. 해변을 신나게 달려 죽변에 다다렀다. 뭐 그래도 땀 나는 건 마찬가지다.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삼각김밥을 사 먹고 한 숨 돌린 후 죽변항을 돌아 '폭풍속으로' 세트장으로 향했다. 죽변항에 곰치국으로 아침먹을 만한 곳이 있었는데 바보같이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사먹어서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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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속으로'란 드라마의 촬영지. 본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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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지 옆 빽빽한 대나무 숲과 옥빛 바다.

죽변항을 출발해 원자력 전시관 방면으로 향했다. 다음 지도에는 원자력 발전소가 녹지로 나타난다. 그쪽으로 길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역시나, 원자력발전소를 가로지르는 길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다시 되돌아와서 7번 국도와 나란히 이어지는 길을 따라 원자력 전시관에 다다랐다. 잠깐 쉬다가 다시 출발. 다음 목적지는 호산리.

길고 지루한 업힐이 이어지는 동안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땀이 비오듯 쏟아져내렸다. 호산리에 다다르기 전 문닫은 하늘휴게소를 지나 자유수호의 탑 바로 직전에 공터에서 자전거를 세웠다. 고갯마루까지 올라오니까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오르막길 내내 힘들어서 기어비는 거의 1:3, 1:2에서 오락가락했다.

호산리에 다다라 점심을 먹으려고 했는데 도착해보니 10:46 밖에 안 되었다. 그래도 늦으면 밥을 못 먹을테니(5년 전에는 노변에 밥 먹을 곳이 없어서 무척 황당했다) 아직 음식점이 준비가 안 되었단다. 하는 수 없이 물만 얻었다.

오르막길 막바지에서 내려오는 길에 사고가 났다. 노곡 삼거리 앞. 맞은편 차선에서 내려오는 나를 미쳐 보지 못하고 좌회전하다가 자전거와 충돌했다.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만약 피했다면 내려오는 속도 때문에 삼거리 맞은편의 펜스에 자전거를 박고 절벽으로 굴러떨어졌을 것이다. 대신 브레이크를 잡고 좌회전하던 자동차 우측 범퍼를 그대로 박았다.

자전거 속도가 급격히 줄면서 정지했다. 몸이 붕 떠서 반 이상 회전할 때까지 핸들바를 놓지 않았다. 적절하다 싶은 타이밍에 핸들바를 놓고 왼팔을 안쪽으로 휘둘러 공중에서 몸을 돌린 후 왼쪽 어깨부터 아스팔트에 착지했다. 그리고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니까 액션대역처럼 무척 멋지게 2m 짜리 공중제비를 돈 다음 아스팔트에 떨어진 것이다.

자동차를 몰던 아줌마는 넋이 나가서 횡설수설했다. 나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가 다시 쓰러졌다. 차문이 열리면서 조수석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허겁지겁 뛰어온다. 자전거 위치를 확인했다. 범퍼에 부딛혔던 자전거는 내 앞쪽으로 멀리 튕겨 나가 있었다. 아저씨가 나를 일으켜 세우면서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운동신경이 좋아서 크게 안 다친 것 같군요.' 그러게 말이다. 자전거 타고 사고에 대비해 벽을 향해 쏜살같이 달리며 미친놈처럼 치킨런 연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두개골 검사. 집 전화번호를 떠올려 보았다. 기억 안 난다. 아참, 원래 집 전화번호를 기억 못했지. 파이를 12자리까지 외워보았다. 된다. 왼쪽 어깨가 욱씬거렸다. 감각은 다 느껴진다. 무척 더운 날씨고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볼이 간지럽다. 등골은 여전히 서늘하고. 아줌마 운전수는 안절부절하고 있고 아저씨가 나를 부축해 앉혔다. 괜찮아요? 글쎄요. 그점에 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편입니다.

앉아서 사고 경위를 따졌다. 그쪽이 잘못을 인정했다. 아줌마는 당사자인 나보다 정신없어 보인다. 명함을 받고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차 번호를 적었다. 사고 지점을 waypoint로 찍어 두었다. 자전거는 별 탈 없다. 브레이크 와이어가 이탈했고 한쪽 패달이 약간 찌그러졌다. 생각보다 브레이크가 잘 먹은 것 같다. 그래서 큰 사고가 나지 않은 것이다. 살아서 다행이다. 병원에 가자고 아저씨가 말한다. 살았으니까 일단 자전거를 몰고 싶다. 필요하면 연락할테니 먼저 가라고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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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지점. 도로변에 멍하니 앉아 아까 식당에서 얻어온 물을 마셨다. 나중에 돌아와서 GPS 로그를 분석해보니 저 내리막길에서 내려올 때 속도가 44kmh였고 브레이크를 잡아서 속도가 37kmh로 떨어졌다. GPS의 기록 시차를 고려하면 임펙트 순간의 속도는 대략 20~30kmh 쯤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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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및 비정상

삼척까지 35km 남짓 남았다. 어깨가 뻐근하지만 아드레날린 펌프 덕택에 자전거 주행은 비교적 수월했다. 임원을 지나 5년 전에도 쉬었다 갔던 신남 해수욕장 부근에 다다랐다. 예전에 없던 해신당 공원이란게 생겼다. 해신당이 남근 숭배인 것 같다. 날이 무척 더워서 햇볕에 쏘다니긴 좀 그렇고 파라솔 아래에서 800원짜리 빠삐코를 사먹고 다시 출발했다. 배가 슬슬 고파온다.

용화해수욕장을 지나 고갯마루의 작은 공원에서 자전거를 멈추고 그늘 아래 벤치에 누웠다. 옆에서 전라도에서 온 아저씨들이 회를 먹고 있다. 날더러 좀 먹어보겠냐고 묻는다. 대답하려고 일어서다가 갈비뼈가 결렸다. 아프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째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아까 병원 가잘때 갈 껄 그랬나? 아니다. 오기다. 공원 위쪽에 설렁탕 집이 보였다. 식당에 밥이 떨어져서 막국수를 먹었다. 식사가 나올 때까지 근 한 시간을 기다렸다. 주인장은 싱글벙글한다. 밥이 떨어질 정도로 오늘 영업이 잘 되었단다. 하루 장사를 점심 한 때로 다 했다나?

근덕면에 바다로 흘러가는 개울이 있던 것을 기억한다. 이 망할 더위에 지쳐 나가 떨어질 것 같아 시원하고 맑은 개울에 몸을 담그고 싶다. 어제처럼 오늘 복장도 여차하면 물속에 뛰어들려고 수영복과 등산복 차림이다. 개울에 수풀이 우거졌고 수초와 녹색말이 보인다. 아... 5년이 지나는 동안 그 맑았던 물이 이렇게 흐려졌구나. 김이 새서 개울을 지나쳤다. 가다보니 '재동유원지'란 팻말이 보였다. 아이들이 물속에서 첨벙이고 있다. 빙고.

개울 한 가운데를 깊이 파서 위쪽과 아래쪽에 여울을 만들어 물을 고엿다. 그렇게 해서 천연 수영장을 만들어 놓았다. 자맥질 몇 번 하니 살 것 같다. 아까 사고날 때 왼쪽 팔굽 위와 어깨에 상처가 생겼다. 팔 토시에 피가 배었다. 개울물에 상처를 담궈두면 감염이 염려되어 천원 내고 샤워장에서 샤워하고 먼지묻은 옷들을 빨았다. 잔돈으로 빠삐코를 사 먹었다. 아내가 전화했지만 사고 얘기는 하지 않았다. 이 더위에 뭐하는 뻘짓이냐며 어서 돌아오란다. 이 더위가 아니면 안된다. 동해까진 가야겠다.

갈빗대를 비롯해 왼쪽 어깨가 많이 쑤신다.  아무래도 삼척에 들러 진료를 받아야겠다. 지나가다가 경찰서가 보여 삼척에서 응급진료가 가능한 병원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사고처리에 관해 물어보니 당사자간 합의가 안되면 그때해도 늦지 않단다. 보험사에 연락해 진료 청구를 하라고 사고낸 아줌마에게 전화했다. 전화를 안 받는다. 일단 삼척의료원(삼척병원)까지 가보자.

상맹방 해수욕장에서 자동차 전용도로말고 구 7번 국도로 들어가는 길을 찾느라 헤멨다. 겨국 못찾고 자동차 전용도로로 들어가려고 그 입구에 가보니 자전거 여행자가 있다. 군 입대를 앞두고 자전거 여행을 해 보자 해서 경상남도에서부터 죽 올라오는 길이란다. 함께 자동차 전용도로를 올라가 터널을 통과했다. 안 따라오길래 뒤를 돌아보니 자전거를 세웠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펑크가 났단다. 타이어가 참 얇다. 벌써 펑크가 두번 났단다. 능숙학게 펑크를 때운다. 옆에서 도와줬다. 수리 중에 제주도에 꼭 가보라고, 해안도로 일주도 보람있긴 하지만... 성산에서 성판악까지 올라가 서귀포로 내려간 다음 시계 방향으로 해안도로 일주하는 코스를 알려줬다.

어깨가 많이 쑤셔서 먼저 출발했다. 삼척병원에 도착해 응급실에 진료 접수했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뼈는 이상이 없단다. 이런 젠장 근육통인거야? 뼈라도 하나 부러져야 여행경비나 뽑아낼텐데... 사실 사고처리하던가 합의해서 합의금 뜯어낼 수는 있겠지만 양심상 그런 짓은 못 하겠다. 병원에서 한 시간을 보내니 벌써 4시 30분. 동해까지 가려니 왠지 김이 새서 관뒀다. 5년 전에 비해 체력은 훨씬 좋아졌다. 사고만 아니었으면 아마 오늘 강릉까지 갔을 것 같다.

삼척을 빙글빙글 돌며 구경했다. 삼척도 많이 변했다. 동굴 엑스포 타운이란 것이 생겼다. 삼척이 동굴의 도시란다. 낮에 먹은 맛없는 관광지 막국수로는 배가 차지도 않아 롯데리아에서 햄버거와 팥빙수로 배를 채웠다.

18시 동서울행 버스를 탔다. 차가 많이 밀려 서울에 도착하니 23시. 시내주행을 조금 하다가 중랑천 자전거도로로 접어들어 공릉까지 갔다. 치킨과 맥주를 사들고 마누라가 기다리는 임시 거처에 도착했다. 아이를 재우고 맥주를 마셨다. 올해 동해안 자전거 여행도 제대로 끝나지 않았다. 기분이 묘하다.

사고낸 아줌마와 연락이 닿아 진료비와 약값을 받았다. 망가진 패달 값을 받을까 하다가 그냥 수리해서 쓰기로 했다. 미안하고 고맙다며 바닷가에 놀러오란다. 시내 자전거 주행과 마찬가지로 자전거 여행도 살아서 집에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다. 살아서 집에 돌아와 치킨과 맥주를 마시며 아내와 아이가 자는 모습을 봐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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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2 ~ 2009/06/14 사이 서산에서 군산까지 자전거 여행을 했다.

금요일 저녁 출발. 서산가는 막차가 19:45. 사무실에서 17:30에 나와 집에 들러 후다닥 준비하고 반포의 센트럴 터미널까지 자전거를 몰고 갔다. 늦을까봐 30kmh대로 자전거를 몰았다. 오랫만에 자전거를 타서인지 터미널에 도착할 즈음에는 다리가 뻑뻑했다. 저녁 삼아 라면을 후루룩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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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빌딩. 2009-6-16 해지기 바로 전.

21:20분 일반버스를 탔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옆자리 아줌마가 삼각김밥을 하나 나눠준다. 사양했다. 서산에 도착하니 23:30. 저녁때 먹은 라면 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배가 고파 시내에서 찜질방으로 가는 길에 치킨에 맥주 한 잔 할만한 곳을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는다. 보석 사우나 찜질방에 자전거를 놔두고 찜질방 옆 편의점에서 캔맥주 하나 마셨다. 담배도 한 대 피웠다. 그 와중에 주머니에서 지갑을 떨궜다. 영수증 챙기려고 주머니 뒤지다가 알았다. 하마터면 지갑을 잃어버릴 뻔 했다. 자전거를 잘 갈무리 해두고 찜질방으로 들어갔다.

날이 흐릴 꺼라더니 쨍쨍하기만 하다. 8:00에 일어나 대충 샤워하고 담배 한 대 피우고 9:00에 출발. 원래 계획은 평택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서 평택부터 안면도를 거쳐 군산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이었는데 거의 쉬지 않고 160km를 달려야 해서 부담스러워 서산 출발로 정했다. 태안이나 당진에서 숙박하지 않은 것은 서산에서 안면도 쪽으로 가는 길목에 굴밥집이 몰려 있어서다. 안면도에 들어가기 전, 그리고, 나가서 밥을 먹을 생각이다. 흔히 말하는 island price에 뭘 사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어젯밤에 오랫만에 무리해서 달려서인지 다리가 묵직한게 불안하다. 아침부터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22km를 달려 서산 A-B지구 방조제를 건넜다. 아침부터 가방을 맨 등짝에 땀이 흥건하다. 방조제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식당들이 보인다. 당암리굴밥집에서 굴해장국을 시켰다. 반찬 예닐곱가지와 콩나물 해장국에 굴을 잔뜩 넣어 주고, 공기밥이 아닌 돌솥밥을 지어 주는데 꽤 맛있다. 꼭 전라도 음식 먹는 기분. 이렇게 맛있는 줄 알았으면 만 원짜리 굴영양돌솥밥을 시켜먹을 껄 그랬나?

그런데 어제 서산에 온 후로 가게나 식당에서 만난 사람들이 모두 조선족이었다. 중국에서 보던 조선족과는 달리 한국의 식당에서 보는 조선족에 대한 인상이 좋은 편이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 당암리굴밥집 식당 주인에게 음식이 맛있다고, 가게 이름을 널리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리지? 사진 한 장 안 찍었는데. 웹질해서 찾았다. 남면 당암리 1-1. 041-674-1446. 영양굴밥 10000원, 굴해장국 6000원. 생각대로 역시 이미 알려진 맛집이다.

갓길이 별로 없는 649번 지방도를 따라 달렸다. 대부분 평지라 견딜만했다. 서산에서 AB방조제까지 고개가 셋 있는데 고저차가 50m 가량이라 우아한 주행이 가능하다. 볼만한 것은 없다. 길을 따라가다가 청살모 로드킬은 무려 다섯 번이나 봤다. 승용차가 논길 옆 진창에 코를 쳐박고 있는 모습도 봤다. 그러고보니 변산반도 자전거 여행 때도 승용차가 박혀 있는 걸 본 것 같다. 차체가 망가지거나,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이게 혹시 길조인가?

649번 지방도를 타다가 77번 국도와 만나 우회전해서 안면 대교를 건넜다. 도로가 널찍하고 갓길도 잘 되어 있어 주행이 편하다. 백사장 해수욕장으로 들어가는 길로 난 해안도로를 타고 갔다. 다리를 건너면서 오른편으로 바다가 어렴풋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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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 해수욕장에 들러 해변을 거닐며 잠시 쉬었다. 바닷바람이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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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른 모래사장에 간간이 사람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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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빠진 진흙처럼 고운 뻘모래 위로 조개들이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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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충들의 꿈지럭거리며 뻘에 새겨놓은 그들만의 나스카라인. 그래! 얘들아 내가 지켜보고 있단다.

아직 해수욕장 개장 전이라 사람은 거의 없지만 해수욕장 앞 매점에서는 관광지 가격으로 물건을 파는지 뭔가를 사서 나온 아저씨가 물건값이 어처구니가 없다며 일행에게 투덜거린다. 안면대교가 있건 없건 안면도는 섬이니까. 관광지 섬의 경제 시스템은 좀 유별나니까. 발에 물을 묻히긴 이른 시각이라 꽃지 해수욕장까지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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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벗어나 해수욕장을 잇는 비포장길을 신나게 달렸다. 그늘이 적당히 드리워져 별로 덥지 않다. 오른편으로 바다를 보며 달리니 상쾌하다. 도요 해수욕장과 밧개 해수욕장을 지나 해발 50m짜리 저 앞에 보이는 야트막한 고개를 넘자 방포 해수욕장이 나타났다.

딱히 쉴만한 그늘이 없어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잠깐 쉬고 방포항으로 갔다. 방포항에는 조개, 굴 따위를 따는 무수한 사람들이 해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안면도 꽃 축제가 끝난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꽃 축제장 철책 너머로  꽃이 잔뜩 피어 있다. 지나가는 시민을 위해 꽃축제장을 그냥 열어 놓으면 안되나? 돈은 벌만큼 벌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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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포 해수욕장. 역시 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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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포항 뻘에서 조개를 줍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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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지 해수욕장 말단에 있는 롯데 오션캐슬에 도착. 해변에 내려가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아직은 물이 차가워서인지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햇살은 따갑고 서풍은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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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한테 보여주면 좋아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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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캐슬의 해변가 흔들의자에 앉아 잠깐 쉬면서 해변을 구경했다. 대천행 배편 시각을 알아보려고 영목항 페리 터미널에 전화했다. 요점은, 배편이 14:20에 있으며 주말에는 사람들이 몰려서 선착순으로 배표를 주는데, 언제 마감될지 모른다. 전화예약은 안된단다. 얼마나 일찍 가야 배표를 구할 수 있냐고 물으니, 그건 자기도 모르니 알아서 하란다. 친절도 하시다. 어영 부영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자전거를 몰다보니 지금 시각은 12:00, 영목항까지 남은 거리는 20km 가량. 1시간 반 동안 달리면 13:30에 도착하는데, 배표를 구할 수 있을까?

젓산으로 묵직한 다리를 끌고(거의 한 달 반 동안 자전거를 안 탔다. 타봤자 아이 짐칸 안장에 태우고 찬찬히 몬 것이 고작이니 다리에 알이 배기는 건 시간 문제다) 하는 수 없이 영목항까지 달리기로 했다. 끝없는 팬션들을 지나치며 영목항에 도착하니 13:35이다. 허겁지겁 배표를 구하려고 들어가보니, 왠걸, 널널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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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0 출발 예정인 영목-대천간 페리는 14:40쯤 출발. 한 시간쯤 멍하니 부두에 앉아 오가는 고깃배를 구경하며 배를 기다렸다. 안면도에서 사먹은 것은 700원짜리 아이스크림 하나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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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끼떼처럼 관광유람선을 졸졸 따라가며 새우깡을 기대하는 갈매기들.

영목항 올 때까지 64.5km를 달렸는데 다리가 뻣뻣해서 군산까지 달릴 수 있을지 걱정된다. 배 안에 누워 30분쯤 자다가 깨어보니 대천항에 거의 다다랐다. 15:40분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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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항. 어 밋밋해.

대천항 앞에 있는 GS25 편의점에서는 도시락을 팔지 않았다. 대천항을 빠져 나오자마자 나타난 고개를 넘었다. 대천 해수욕장 앞 분수공원의 편의점에서도 도시락을 팔지 않았다. 해수욕장 구경을 하다가 해변 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몰았다. 배가 고파서 힘이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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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 해수욕장. 노변에 레게바, 고고바만 있으면 파타야 같겠는 걸?

대천 해수욕장 거의 끝나는 지점에 있는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사먹으려 했더니 무수한 외국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왠 외국인이 이렇게 많지? 롯데리아 아래에 있는 패밀리마트에서 제육덮밥 도시락과 포도쥬스를 3천원에 샀다. 전자렌지에 도시락을 데우고 있는데 옆에서 물건을 사는 외국인이 종업원이 예쁘다며 수작을 건다. 종업원은 영어를 모르는 척 한다. 편의점 앞 파라솔에서 도시락을 까먹었다. 왠지 처량하다. 편의점 도시락을 처음 먹어 보는데, 딱 그 가격에 걸맞는 품질이다. 경기불황 탓에 도시락이 인기라는데, 이게 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거지? 경기불황이면 입맛도 떨어지나? 밥은 썩 품질이 좋은데 반찬이라고 붙어있는 제육과 볶은 김치는 여름 날씨에 상하지 않게 하려고 별별 걸 집어넣은 듯한 괴이한 맛. 아, 다시 먹으라면 못 먹겠다.

밥 먹고 16:10 쯤 군산을 향해 출발했다. 군산까지 대략 70km인데, 1시간에 20km씩 꾸준히 달리면 해지기 전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지? 대충 관광이나 하면서 천천히 달리려고 했는데...

날이 더워 가방을 등에 메고 있자니 땀이 흥건히 배어서 가방을 짐칸에 묶었다. 아침부터 별로 안 한가하게 달리기만 한 탓에 김이 새서 사진 찍기도 귀찮아졌다. 무작정 달리자. 죽도를 지나치고 독산 해수욕장도 들르지 않고 지나쳤다.

외국 여기저기를 다닌 탓인지, 아니면 어린 시절 원없이 즐겼던 동해의 질 좋은 모래 해변 탓인지,저번 변산반도 때와 마찬가지로 안면도의 해변은 그저 그랬다. 돈 주고 그런 허름한(?) 곳에 가서 섬이랍시고 주야로 일 없이 돈을 뜯긴다는 것이 사실 이해하기 어렵다. 아니 머리로 이해는 한다. 낭만과 꿈과 환상이 머리 속에만 머무는 관념이 아니라 시장에서 실거래되는 상품이니까.

그나마 자연 환경(?)이 해수욕장 같아 보이는 것은 대천 해수욕장 정도였다. 아무래도 워낙 좋은 해변만 봐서인지 다른 것들은 성에 안 찬다. 하지만 여름에 대천 해수욕장을 찾는 것은 미어터지는 인파 때문에 대략 정신나간 일처럼 보인다. 노련한 상인들이 어떻게든 등을 벗겨 먹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관광지다 보니 오고 싶은 생각은 안 드는 곳이다. 차라리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라도 태국 해변에 가서 맛있는 음식과 저렴한 맥주를 편하게 즐기겠다.

장안 해수욕장과 춘장대 해수욕장을 들러가는 루트를 짰지만 해수욕장에 실망감이 커서 더 봐서 뭐하겠냐 싶어 가던 길을 돌아 논밭을 가로지르는 비포장길을 따라 갔다. 차라리 이 길이 훨씬 났다. 엉망진창으로 난개발해 놓은 관광지의 팬션들과 끝없이 이어지는 별 특색없는 해산물 식당들을 안 봐도 되니까. 시골주민이 뻔히 쳐다보면 연쇄살인범처럼 히죽 웃어주며 지나칠 수 있으니까. 서해안에 와서 해산물을 안 먹은 것을 후회하냐고? 천만에~

주욱 해안도로를 따라 갔다. 서풍이 계속 불어 자전거 주행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관광지가 끝나자 주행이 한결 즐거웠다. 비록 짧은 구간이지만 오른편에 해변을 끼고 소나무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평탄한 일차선 도로가 아름답다. 하지만 아이스크림 사먹을 가게 하나 안 보였다.  서천을 지나 장항에 이르자 이제 거의 다 왔구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배가 고프다. 물은 다 떨어졌다.

장항은 입구부터 시내까지 줄곳 황량했다. 장항항에서는 포장마차를 열어 해산물을 싸게 파는 모양이다. 장항항을 지나쳤다. 들러서 하다못해 갑오징어 안주에 소주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군산에 가서 저녁으로 우렁쌈밥을 먹고, 군산 해변에 즐비할 것만 같은 포장마차에서 술 한잔 기울이자고 마음 먹었다.

금강하구둑을 건널 때 쯤엔 파김치가 되었다. 대천항서부터 62km를 달렸다. 오늘 아침부터 133km를 달렸다.  금강하구둑을 건너, 탐조대 부근의 우렁쌈밥 식당(강촌마을식당이던가?)에 도착한 시각이 19:35분이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혼자 먹기 미안한 식당이지만 일인분을 주문해도 한 상 가득 차려준다. 쌈야채에 밥과 우렁쌈장을 얹고 꽁치 한 점 얹어 쌈을 해먹으니 목구멍으로 한없이 술술 넘어간다. 정신없이 먹었다. 우렁무침에 우렁쌈장과 우렁된장찌게에 꽁치를 준다. 가끔 서울서도 이렇게 맛있는 꽁치를 먹을 때가 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이런 걸 매일 먹고 사니까 심성도 고울 것 같다. 식당은 많이 허름하지만 밑반찬 하나하나도 빠지지 않고 맛있다.

배불리 먹고 식당을 나오니 20:10분. 어두컴컴한 해안도로를 따라 시내로 슬슬 주행했다. 내일 안면도 가기 전에 쇼핑을 해야 해서 emart에 들렀다. 내가 사는 동네의 emart는 날도둑놈들 같은데(타깃 고객층을 정해 그들의 가격민감도가 높은 일부 품목만 싸게 팔고 나머지는 비싸게 팔아먹는 수작질로 emart의 구매합산액이 재래시장은 커녕, 동네 수퍼만도 못할 때가 많다. 따라서 난 꼭 필요한 공산품 구매나 피치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대형할인점에 가지 않는 편)  군산 emart는 정말 할인을 한다. 막 장보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다. 물건을 들고 계산대에서 봉투 구입을 망설이니까 종이봉투를 드릴께요 하면서 알아서 건네준다. 종이봉투는 무료란다. 아, 그러고보니 대형 할인마트에서 종이봉투는 무료로 제공하게 되어 있는데, 말하지 않으면 주지 않고 종이봉투 무료라는 것을 선전하지 않는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기억이 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동네 대형할인마트는 딱 재수없고 계산 빠른 서울놈들 답게 장사를 너무 얍삽하게 잘 한다.

군산 시가지가 그리 크지 않다. 게다가 주행계획 짠다고 군산 시가 지도를 이틀쯤 뚜러지게 노려본 탓인지 밤 늦은 시각임에도 어디가 어디인지 대뜸 알아먹겠다. 하지만 포장마차가 보이지 않는다.

회 한 접시에 맥주 한 잔 할 수 있을까 싶어 해망동의 횟집타운으로 향했다. 21:30이 넘어서인지 횟집 대부분이 문을 닫았고 그 유명한 군산횟집만 광휘를 흩날리고 있었다. 횟집 들어가긴 뭣하고... 간단히 회 한 접시 먹을만한데가 없을까? 하지만 군산횟집과 몇몇 횟집을 제외하고 해망동 해변도로는 불이 꺼진 채 을씨년하다. 다시 시내로 발길을 돌렸다.

시내 중심가의 젊은이 거리에도 어디 노변에 앉아 맥주 한 잔 하기 적당한 곳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릴없이 시내를 배회하다가 피곤하기도 해서 (벌써 주행거리가 160km를 넘었다) 찜질방을 찾았다. 패밀리 스파는 망했는지 불이 꺼져 있어 금강레저타운으로 향했다. 찜질방을 찾아둔 후, 편의점에서 500ml짜리 캔맥주 한 병을 사서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냥 장항에서 갑오징어에 소주 한 잔 할 껄 그랬나? 그러면 맛있는 우렁쌈장은 영영 못 먹게 되는 거구나.

찜질방이 워낙 시끄러워 12시쯤 잠에서 깼다. 장소를 바꿔 사우나 수면실에 가서 잠자리를 청했다. 어떤 아저씨가 한 시간 반 내내 기침을 한다. 다시 잠에서 깨어 이번에는 찜질방 수면실로 갔다. 애들이 새벽 4시까지 게임을 하고 떠들어서 새벽녁까지 제대로 잠을 못 잤다. 애들한테 꽥 소리도 질러봤지만 한창 날뛸 나이인 개구장이들에게 소용이 있을리 없고. 대체 수면실을 시끄러운 게임실 옆에 만들어놓는 미친 센스는 어느 머리에서 나온 거야?

아침에 눈을 떠보니 8:30. 잔 것 같지가 않아 몸이 찌뿌둥하다. 잠을 설친 탓에 8:00 배를 타고 선유도 가는 계획은 물 건너갔다. 기운을 북돋을 겸, 아침이나 잘 먹자고 어젯밤에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본 횟집타운 입구에 있는 해장국집(시원복집 이던가?)으로 갔다. 원래는 해장국 거리에 있는 일해옥에서 진한 전주식 콩나물 해장국을 먹을 생각이었지만 이왕 먹을 꺼 좀 더 잘 먹어보자 싶어 부러 갔다. 목표는 매생이굴순두부, 가끔 매생이국을 먹고 싶을 때가 있는데, 매생이를 사다가 집에서 끓여 먹으면 번번이 실패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뜨거운 매생이국을 호호 불어 먹다보니 이상하다. 국을 헤집어 보았다. 눈 씻고 봐도 굴이 없다. 주인 아줌마에게 말하니,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안하고 굴을 물에 삶아 탁자에 놓고 간다. 매생이국에 그걸 부어 먹는데 굴 맛이 하나도 안 난다. 어제 아침 서산에서 먹은 굴해장국은 꽤 맛있었는데... 같은 냉동 굴이라도 이렇게 다르다니... 이건 뭐...
그래도 꾸역꾸역 배는 채웠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공단의 너른 길을 따라 군산항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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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짓고 있는 듯한 군산 산업단지의 어떤 공장. 군산 관광 팜플렛에는 군산 산업단지도 어엿한 관광지로 나온다. 산업시찰단 말고 일반인도 공장 견학이 가능하다는 뜻일까? 당면해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여자들이야 공장 가면 구질구질한 환경에 먼지나 억수로 날리며 볼 것 없다고들 하지만, 거대한 기계가 무시무시한 파워로 작동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시간낭비라고 생각진 않았다.

10:20분에 쾌속페리표를 끊었다. 관광버스를 타고 온 아저씨들이 자전거에 관심을 보였다. 서산에서부터 주욱 내려오면서 만난 사람들이 내 자전거가 값비싼 것인 줄 안다. 여기저기 고장나서 손을 봐주지 않으면 끊임없이 징징 앵앵 비명을 지르는 유사 MTB인데.

11:55 안면도 도착. 호객하는 삐끼를 보자 흐뭇하다. 마치 인도에 온 것 같다. 하지만 아무도 나한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쫄쫄이 바지 입고 자전거 타고 와서 그런 것 같다. 관심을 안 보여주니 조금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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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 명사십리도 옛말이다. 지나가는 카트에 귀동냥을 해 보니, 이 모래는 관광철을 앞두고 2주 전에 퍼다 놓은 것이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기 뿐만이 아니라 이 것이 바로 대한한국 모든 해변의 현실입니다' 라고 말한다. 동해안도 그렇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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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돌 해수욕장. 어우 썰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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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욕장과 망주봉. 매년 수백톤의 모래가 유실되는 플로리다 해안도 모래를 해변에 퍼 나르는데,  상당한 예산을 쏟아붓는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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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장하는 모양을 한 소망이 이루어지는 등대. 그럴듯한데? 이왕 이렇게 만들었으면 관광객들 사진찍기 좋게 손바닥 직교 방향으로 방파제를 조금 연장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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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물이 얼마나 빠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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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도와 선유도를 잇는 다리 위에서 바라본 정경. 낚시배다. 어떤 아줌마가 '고기 많이 잡았어요?' 하고 소리치니까, '안 가르쳐주지!' 라고 말한다. 흘낏 지나가다 어떤 낚시꾼 아저씨의 휴대폰 통화내용을 들었다. '우럭이 그냥 막 잡혀!!!'.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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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도 가는 길에 바라본 망주봉과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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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면 풍광이 썩 괜찮지만, 썰물 때라 바닷물은 똥물 수준. 도저히 다리 담구고 물장구치면서 놀 엄두가 안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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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왜 찍었지? 갈매기야 뭐라고 말 좀 해다오. 

선유도는 아름답지만 멀리 볼 때나 그렇고... 해변은 별로...

큰 섬이라 그런지 한전에서 발전기를 설치해 놓았다. 해수 담수화 시설도 있다. 이왕이면 태양광 발전 플랜트도 만들어 놓으면 좋을 껄. 고군산군도에서 새만금 방파제까지 거리가 얼마되지 않는다. 곧 있으면 새만금 방조제와 붙어있는 신시도에서 무녀도/선유도 사이를 왕복하는 배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안면도나 선유도에 와서 느낀 점은, 두 섬이 고려할만한 가치가 있는 옵션이 되기에도 멋쩍을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섬들이다 정도? 또는, 이런데 와서 별 잔 정이 느껴지지 않는(타협 불가능한) 바가지에 시달리느니, 사활을 걸고 관광 사업에 매달려 바가지를 조직적으로 뿌리 뽑은 제주도에 가는게 낫다.

두 섬에서 관광객을 상대하는 장사꾼들의 악명이 특히 높았다. 나야 삐끼 천지인 곳들을 워낙 돌아다니다 보니 그런 것에는 가치 중립적이다. 장사꾼의 악명은 이유없이 확대 과장되는 것이 보통이고 사람들이 제 돈 들여 부러 관광지를 찾아와서 갈망하는 것은 좋은 서비스와 사람 냄새나는 친절과 환대인데, 그 환상이 깨지면 악다구니만 남는 것이지 싶다.

섬 사람들 인심이 박해진 것이 어디 섬사람들이 원래 악당이라서 그랬겠는가 하겠지만 이건 마치 '경제학 콘서트'에서 중고차 시장에 왜 좋은 차가 안 나오는지 설명하던 부분과 같아 보인다 -- 시설이나 서비스가 가격에 비해 현저하게 질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아니 미친듯이) 섬을 찾아오기 때문에 공급과 정보를 쥔 측이 주도권을 가지게 되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서비스와 제품으로 이윤을 최대화하려고 시도한다.

수요가 줄어도 이 현상은 거듭 반복된다. 예를 들자면, 성수기에는 수요가 충분해 얼마든지 관광객을 뜯어 먹고, 비수기에는 비수기니까 관광객 한 명을 끝까지 정성스럽게 삥 뜯어 먹는다. 비수기에 숙소 가격은 떨어지지만 음식료 및 서비스 가격은 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가격은 그대로고 음식료/서비스의 품질만 오락가락한다. 내키는 대로 해주면 그만이니까. 정보와 서비스의 공급을 쥔 쪽은 이쪽이니까. 서비스 프로바이더로서 점점 노련해진 섬 주민들이 간혹 생색이라도 내면 수요자는 양질의 서비스에 기뻐 날뛰지만 사실은 조삼모사다. 비용이 결국 같으니까. 선유도의 민박집은 어느 집이나 '수퍼, 낚시배 출항, 자전거 대여, 그런데 바지락 캐는 호미는 공짜' 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야말로 마음을 다잡는(옥죄는) 완스톱 토탈 솔루션인데 섬 주민이 노련해졌다는 증거라고  본다.

선유도와 안면도는 그 점에서 조금 다르다. 가격에 비해 질이 떨어지는 숙박시설이 있는 선유도와 달리 안면도는 육지와 연결되어 있고 길도 뻥뻥 잘 뚫린 비교적 큰 섬이라 차를 몰고 얼마든지 섬에 들락거릴 수 있으므로 공급자가 '토탈솔루션'으로 정보의 독과점을 통해 가격협상력의 우위를 가지기 어렵다. 그래서 팬션만 죽어라고 발달했다. 언제든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을 매료시키려면 숙박시설의 품질을 높이는 수 밖에 방법이 없기 때문이지 싶다.

선유도가 자전거 타기 좋은 섬이라고? 아니, 선유도에서 자전거 하이킹은 꼭 해볼만한 액티비티라고? 글쎄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두 발로 걸어서 세 섬을 오락가락하기 불편하니까 자전거 대여가 사업이 된 것이다. 수요가 공급을 견인한 것이지 공급이 친환경 어쩌구로 계획적으로 자전거를 미리 도입한 것 같지 않다. 자전거 도로나 자전거 통행에 필요한 편의시설의 질이 낮은 것이 그 반증이다. 해수욕장 부근을 제외하고, 울퉁불퉁 대충 만들다 만 콘크리트 도로에 해안의 아름다운 풍광이 잡목숲으로 가려져 있다. 아래 동영상 보면 느낌이 올 것이다.

안전 펜스는 설치되어 있다. 오른쪽 잡목숲을 잘라내고 길가로 나무숲 터널을 만들어 놓으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자전거 하이킹 코스가 된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땡볕이 내리쬐는 밋밋한 시골길이 되어 버렸다.

현명한 소비자라면 관광 산업이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부질없는 환상과 타협하지 말고, 적당한 가격에 질 좋은 풍광과 풍광을 더더욱 감칠맛나게 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즐기기 위해 , 쓸모있는 정보를 얻어 나은 대안을 찾던가, 기대 수준을 낮춰야 할 것이다. 난 너무너무 현명해서 가끔은 즐거운 관광이란 대의명분을 잊고 멍청해진 나머지 이런 섬에서 식사 한 끼, 맥주 한 잔 조차 하지 않은 채 무더위에 수도승처럼 자전거 타고 뺑뺑이를 돈다.

섬에서 서비스를 사지 않으니 마음 편하고 좋다. 시시한 서울 강변로 달리는 것보다 배경을 바꿔 바다를 보며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는게 즐겁고 기쁘다. 만족스럽다.

여기저기 자전거로 돌아다니다가 더 돌아다녀봤자 볕만 따갑고 재미는 없을 것 같아 대장도의 장자봉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왠지 전망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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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봉 오르는 길. 전망이 그럴듯하다. 나는 회 먹고 하룻밤 즐겁게 보내러 온 것이 아니라,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며 이런 것을 보고 싶어 왔다. 어디 가서 이런 걸 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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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메바위는 나무숲에 가려 잘 안 보이고...  멀리 모래 퍼다 부은 해변이 어렴풋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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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봉 정상에서 바라본 장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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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기타등등 고군산군도. 아... 시원스럽다.

야트막한 산이지만 오르니 힘들다. 등산객들이 꽤 많다. 대부분 전라도 사람들이다. 전망은 아주 좋다. 선유도의 모든 산에 올라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지만, 주말은 다 끝나가고 나는 아침 배를 놓쳤다.

어제 군산시내 Emart에서 구입한 빵과 오미자주, 쵸코바 따위를 점심으로 먹었다. 선유도에 들어와서도 워낙 현명한(?) 소비자이다 보니 풍광은 즐겨도 선유도에서 뭘 사먹을 생각은 없었다. 샤니 런치팩 블루베리&밀크는 emart 가격이 980원 밖에 안하는데 열량이 무려 330kcal나 된다. 국순당에서 나온 오미자주도 맛이 그럴듯 하다. 바닷바람을 쐬면서 정상에서 아름다운 섬 풍경을 바라보며 호젓하게 점심을 먹고 약주를 곁들이니 살짝 알딸딸한게 꽤 기분이 좋다. 정상에 올라온 사람들과 기분좋게 인사를 주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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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나 샤니 런치팩 블루베리&밀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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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순당 명작 오미자 포터블 버전(75ml). 14도로 그리 달지 않으면서 맛있다. 양이 딱 포도주 반 잔 분량인데, 오미자 와인이라 불러주마. 집에 잔뜩 쌓아놓고 하루에 한 병씩 가볍게 마시고 싶다. 별 안주가 필요없다.

점심 먹고 느긋하게 산을 내려왔다.  볕이 강하지만 해풍 덕에 크게 더운줄 모르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바람이 안 부는 곳은 무척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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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장에 줄 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관광카트. 삐끼 아저씨 말에 따르면 선유도의 70%가 산악이라서 자전거 몰고 다니기는 힘들고(헛소리!) 오토바이도 좋긴 하지만(시간당 3만원? ), 카트를 타면 관광 안내를 받으며 즐겁게 섬을 돌아다닐 수 있단다. 선유도, 장자도, 무녀도를 걸어서 다니기는 힘들고, 적어도 자전거(시간당 3천원)나 오토바이는 타야할 듯. 선유도 및 인근 섬을 다합쳐 도로 길이는 약 22km.

14:40 선착장으로 돌아와 돌아가는 배편을 알아봤다. 15:30 옥도페리가 출발한다. 날 더운데 자전거 몰고 돌아다니려니 지친다. 표 산 다음 남는 시간에 무녀도 둘러보려던 것은 관뒀다. 가봤자 서해 똥썰물 밖에, 별 것 없을 것 같다. 군산항 배편을 구입한 다음 근처 수퍼에서 8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뭍 수퍼보다 백원 비싸고 할인마트보다 55% 비싸다.

앉아서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구경했다. 주말에는 관광유람선 타고 오는 것이 정기배편을 타고 오락가락하는 것보다 나아보인다. 군산에서 떠나는 관광유람선은 군산항이 아니라 군산회타운 근처의 유람선 선착장에서 오고가는 것 같은데(지나가다 얼핏 보았다) 단체 손님만 받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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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 선착장 주변은 온통 이런 패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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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장 근처에서 조개/바지락을 낚아 끌고 오는 몹시 실용적으로 보이는 배. 어마어마한 조개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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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배는 더 실용적인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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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페리에서 바라본 낚시꾼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한국의 바닷가에서 낚시꾼은 ubiquitous한 존재인데, 도저히 존재할 것 같지 않은 곳에서조차 종종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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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산업단지에서 맥없이 돌고 있는 풍력 발전기. 참 기운 없어 보인다.

GPS 전지가 거의 닳았다. OSM에서 작업하려고 페리 루트를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GPS를 계속 켜 두었다.  앉을 자리가 없어 바람 맞으며 선상 난간에 기대 무미건조하게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새만금 방파제가 보인다. 요즘은 군산시와 인근 시가 새만금 간척지를 두고 땅따먹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17:00 군산항 도착. 스트래칭 하다가 무릎이 뱃전에 부딫혀 까졌다. 피 봤다.

바람을 등지고 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해망굴을 통과. 일제시대에 뚫은 터널인 듯. 대마도에서 보곳하던 종류다. 해망굴 옆으로 월명공원 입구가 있었다. 올라갈까 하다가 관뒀다. 일단 배가 고파서 밥부터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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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망굴 맞은 편 미장원.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미장원을 운영하셨을까? 미장원 안에서 할머니가 마늘을 까고 있다. 손으로 쓴 글씨가 힘있고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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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망굴. 일제시대때 일본군이 판 땅굴. 장항에서 해변도로를 따라 군산까지 오면서 느낀 거지만 군산항이 항구로서 정말 끝내주는 것 같다. 항구가 너무 끝내줘서 일제의 수탈 사업에 조금도 차질이 없었을 것 같다.

근처 편의점에서 AA 2개들이 건전지를 구입해 GPS에 갈아 넣었다. 무려 2550원이나 한다. 어쩔 수 없이 전지를 사야 했지만, 환경에 좋지 않은데다 비싸서, 건전지 사 쓰는 것은 어느 모로 봐도 바보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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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션에서 76000원에 판매하는 이런 풍력 발전기를 자전거에 달 수는 있는데, 값도 비쌀 뿐더러 실용적일지 의문. 사진을 무단 복제하면 안되지만 장사에 도움되는 것이니 이해해 주겠지 -- 옥션에서 '풍력발전기'로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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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rt 건너편 철로변에 늘어선 집들. 집 맞은편은 화장실이라고 하더라. 야밤에는 나름 스릴 넘치는 볼일이 될 지도. 남들 사는 모습 찍는게 미안하다. 레바논에 있을 때 건물에 난 총탄 자국을 호들갑을 떨며 구경하는 관광객과 달리 사진 찍는 것을 다소 불편하게 여겼다. 사진 폭력 뿐만 아니라 사진으로 '강조'된 풍광도 좋아하지 않았다. 블로그 사진으로 보는 음식 사진에 대개의 경우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차라리 공기중에 촐싹거리며 나풀거리는 언어를 믿고 말지. 풍광이 충분히 아름다우면 빛으로 환상을 빚어내지 않아도, 보기에 썩 좋다.

군산 오기 전에 군산에 가면 간장게장 백반을 3000원에 먹을 수 있다는 말도 안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호기심이 동해 부러 찾아본 집이 청기와아구찜집이다. 자전거로 그 지점을 찍고 찾아갔다. 일요일이라 군산 시내가 한가하다. 옷집이 몰려있는 시내 중심가에만 젊은이들이 돌아다녔다. 올해 유행한다는 치마바지를 입고 다니는 여자애들도 눈에 띄었다. 지역 사회 인프라 확충은 별로라도 옷 유행만큼은 어느 지방 도시나 거의 광속이지 싶다.

주택가에 위치한 청기와아구찜집 근처에는 생선구이 파는 고궁식당과, 진미식당을 비롯한 군산 3대 백반집이 모여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청기와아구찜집에 들어가서 혼자 3000원짜리 게장백반을 시켜 먹는게 미안하지만, 일인분이라도 서비스가 잘 나오면 정말 괜찮은 집인 거다. 3천원 짜리 치고는 많이 푸짐하지만 간장게장은 그저 그랬다. 되려 된장국이 맛있다. 게장에 밥 비벼먹고 된장국을 뜨는둥 마는둥 하며 적당히 먹고 나왔다.

버스 시간이 여유가 있어 일제 시대에 지어진 건물 몇 개를 구경했다. 마음 같아서는 해망굴이든 히로쓰 저택이든 구군산세관이든 다 밀어버렸으면 좋겠다 싶었다. 내가 비록 집 없는 설움, 나라 없는 설움을 직접 경험하진 못했지만 나를 비롯한 후세가 영혼을 잃었던 일제 시대를 기억하기 위해 그것들은 보전되어야 마땅하다.

저녁을 먹었음에도 배가 고프다.  군산회타운 근처의 유명 식당인 쌍화반점에 들러 짬뽕을 주문했다. 면발이 여늬 중국집과 다르다. 잔맛없이 생생하달까? 다른 해산물은 일체 없고 야채와 싱싱하고 쫄깃한 바지락만으로 낸 빨간 국물맛도 특이하다. 조미료가 없다. 무척 담백한 맛이 난다. 별로 맵지도 짜지도 않은 짬뽕이 마음에 든다. 다 먹고 보니 바지락이 산을 이뤘다. 짬뽕이 아니라 매운 바지락 쫄깃 칼국수랄까. 썩 괜찮은 식사였다.

아이 줄 앙금빵이나 사갈까 싶어 60년 동안 가게를 운영했다는, 유명 빵집인 이성당에 들렀으나 일요일이라서인지 문을 닫았다. 시내를 빈둥거리며 자전거를 몰고 돌아다니다가 고속 터미널에서 서울행 버스표를 샀다.

19.40 출발. 천안 근처와 기흥 부근에서 잠시 막히고 3시간이 걸려 서울에 도착. 22:40분 자전거 몰고 집에 갈 생각을 하니 아득해서 자전거를 들고 지하철에 올랐다. 승객들이 많으면 자전거를 지하철에 싣기가 죄스러웠을 것이다. 집에 도착하니 23:20, 아내에게 미리 전화해 치킨과 생맥주를 시켜놓았다. 샤워하고 그것들을 먹고 마셨다.

군산에 가면, 군산맛집이란 곳에 들러 서울에서 보통보다 조금 잘 하고 저렴한 식당에서 먹는 것 보다는, 차라리 횟집에 들러 화끈하고 배 터지게 먹는게 나아 보인다 -- 혼자 주행하다 보니 제대로 된 횟집에서 먹기는 뭣하다. 8층짜리 휘황찬란한 군산횟집의 일 층 전체가 광활한 수족관이었다. 그렇게 큰 수족관이 있는 식당은 처음 봤다. 그래서 '군산횟집'이구나. 그래서 군산에는 군산횟집이 있는 거구나. 회타운의 실비집은 아마 '다찌집'인 것 같다. 그런데도 가보고 싶은데 혼자라는게 이럴 때 참 아쉽다.

GPS에 최근 작업한 지도를 넣고 다녔는데 쓸모없는 행정구역 이름이 너무 잘 보이고 쓸모있을 POI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개선이 필요하다. 등고선과 도로 데이터는 잘 맞았다. draw order가 잘못 되어 지형도가 다 나타난 다음에야 도로와 경로가 보인 것이 아쉽다.

주행 데이터:

집->센트럴터미널: 22km
서산->찜질방: 4km
찜질방->안면도 입구 굴밥집: 22.5km
굴밥집->안면도 영목항: 42km
대천항->군산: 62.4km
군산시내: 16.3km
안면도: 15.5km
군산시내: 20.5km
총 216.3km.

주행경로 중 어려운 곳이 없다. 고저차는 50m 이내이고(거의 평지), 북->남으로 이동 중 꾸준한 서풍 때문에 바람의 영향이 적었다. 대부분 갓길이 별로 없는 1차선 국도를 주행했다. 지방도  구간 대부분에서 차가 별로 다니지 않아 비록 갓길이 적어도 교통 흐름에 크게 방해되지 않았을 것이다(희망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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