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핀커의 저서가 국내에 여럿 번역되었다. 게을러서 안 읽고 게겼던 것 같다. how the mind works, language instinct, tabula lasa. 이중 빈서판은 작년에 읽은 것 같은데? 남은 두 권은 언제나 읽게 될까... 쥬디스 리치 해리스처럼 싸움닭스럽고 쥬이시, 스파이시한 주제로 글을 쓰는 매우 인상적인 학자 임에도 논란의 와류는 제법 요령있게 피해가는 듯. 어떤 사람의 주장에 따르면 그의 글을 읽으면 똑똑해진단다. DHA가 풍부한 교양과학서랄까.
술을 안 마시는 것은 인생에 대한 중대한 직무유기인 것 같아 일주일에 못해도 한두 차례는 술을 마셨다. 중이염 치료가 더뎠던 것은 뇌물에 찌들은 신경계 내지는 부패한 면역계의 외설스러운 반응이나 지방이 풍부한 안주를 곁들인 술 마시기 등의 바람직하지 못한 식습관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 개중에는 상갓집에 가서 새벽 네 시까지 퍼마시고 출근한 최근 일도 있었다. 그럼 의사들은 잠꼬대처럼 왜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추측컨대 술을 마시는 것은 위장과 간에 무리를 주어 수면중 알콜 분해에 역량을 집중하느라 병균을 죽이고 인체를 재건하는데 열심히 삽질해야 할 세포들이 딴전을 피우는 것을 막기 위해서... 라고 생각했다. 그럴듯하긴 하지만 근거 없다.
2주 동안 병원을 들락거려도 도통 염증이 가시지 않다가(적은 양이지만 술은 마셨다) 갑자기 딴 생각이 들어 병원을 바꿨다. 유크라 정과 알콘시프로바이점이현탁액(퀴놀론계 항균제) 투약 후 약 2시간 만에 염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2주 동안 먹었던 각종 기분 나쁜 소염진통제, 항생제, 위장약 트리오가 아닌, 단 하나의 알약으로 기적같은 치료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그날 밤(11월 2일) 편히 잤다. 의약품 검색은 http://www.kimsonline.co.kr/
의사의 진료행위에 대한 불신은 치료에 전혀 도움이 안 되야 정상인데, 나처럼 위약 효과가 별 의미가 없으며 현대문명, 특히 의학과 생물학에 대한 뿌리깊은 회의를 갖고 있는 사람은 병도 더디게 나을 것 같지만, 사실 그 반대였던 적이 더 많았다.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매일 밤 늦게 자고 하루종일 정신없이 일하는 내가 불가해하게 건강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정신 상태가 가끔 심하게 멀쩡하기 때문. 멀쩡하다고 하긴 뭣하고 명료하다고 해야할지(하얀 눈밭을 에운 검은 숲처럼) 가끔씩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가볍게 한 대 맞은 것처럼(뎅~) 갑자기 의식이 뚜렷해 질 때가 있다고 해야 할지. 하루중 대부분이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런 순간은 짧고 단속적으로 한 두 차례 두서없이 나타날 뿐이다. 그보다는 형편없는 기억력이 생활에 많은 불편을 야기했다. 하여튼 그런 순간이 오면 섭취한 영양분이 삽시간에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비타민이란 괴상한 TV 프로그램에 따르면 건망증은 DHA가 풍부한 삼치로 치료하면 된다.
아니면 똑똑한 채 잘난척하기 좋은 책(이를테면 핀커류)을 몇 권 읽던가.
스푹스는 3기에 들어서 메가리가 없어졌다 심하게 말하면 스파이들이 꼴갑 떨고 있다. 자전거 타기처럼 드라마란 업이 있으면 다운이 있게 마련 -- 영화와 달리 드라마란 것은 원래 너저분할 수 밖에 없게 마련. 덱스터는 2기에 접어들어 자신의 어둠을 드러내는 방법을 서서히 배워가는 중이다. 내게도 덱스터같은 어둠이 있던 시기가 있다. 심연을 뚜러지게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당신을 쳐다본다 고 니체가 말한 적이 있다. 30대 초반까지의 고민과 30대 중반 이후의 고민은, 설령 그것이 프로그래머의 것이건 살인마의 것이건, 질적인 면에서 확연히 다르다. 덱스터가 바로 그 과정을 겪고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자신이 살해한 18구의 시체가 발굴되면서 화면은 빙글빙글 돌아가고 그동안 별고없이 행복하게 살았던 덱스터는 자신의 인생을 강제로 되새김질하게 되었다. 씹은 것 또 씹는 무슨 황소도 아니고, '나는 뭘까?' 참고로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일관적이다.
애매한 정신세계는 단속적인 성장 상태 또는 지지부진한 답보 상태, 이도저도 아닌 상태 등 몇 안되는 state에서 오락가락하는 것 같다. 내가 가끔은 성장했다고 잘난 척 할 처지가 못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나 인간에 관해 그렇게 많이 알아봤자 써먹을 데도 없고 실제로 어떻게 써먹어야 할 지도 모르는 그런 류의 지식을 갈고 닦아봤자 뭐하겠나 싶다. 가끔 당신에 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나 놀래키는 용도? 어떤 면에서는 인간에게는 인간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조씨 아저씨는 평소 저 혼자 일하면서 연락도 안하고 사무실에도 가끔 안 나오는 등 나름대로 자유를 만끽하며 지내다가 사람들이 자기를 왕따 시키는 것 같아 한편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동시에 한편으로 소외되어 화가 치밀어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자기는 소외되어서 기쁘다며 화를 내는 것이다. 그는 그가 응당 받아야 할 대접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아무 쓸모도 없이 버려지거나 웃음꺼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인 듯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조씨 아저씨와 마찬가지로 살아야 할 이유를 늘 오락가락하는 결의와 사회에서의 위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이해와 인정, 감정적 결속(사랑, 신의, 우정 등속) 속에서 굳이 찾아냈다. 그런데 왜 그런 것에 관해 의문을 갖고 다른 것이 있는지 찾아보지는 않으려나? 그런 고민없이 정말 어처구니없게 행복하게 사는 나는 뾰족하게 뭐라고 위로해 줄 수도 없다.
나이가 들면서 주윗 사람들의 고집이 밑도 끝도 없이 늘어나고, 마찬가지로 자존심도 밑도 끝도 없이 커져가면서 머리는 점점 나빠지고 감정적 격앙 등의 정서 반응이 점점 십대스러워지는 모습을 본다.
AR의 Pushing Ice를 10일에 걸쳐 읽고 감상문을 쓰지 않았다. 레널즈는 드디어 하드SF가 아닌 SF를 쓸 수 있게 되었다. 하-드한 묘사의 파격적인 생략과 지저분한 인간관계를 전면에 내세우는 센스, 그러면서도 상대론적 속도로 은하계 저 먼 곳까지의 로-맨틱한 여행(만 오천년이던가? 십만년이던가?), 커다란 드럼통에 은하계에서 긁어 모은(흡사 지나가는 강아지를 쏘세지로 꼬시듯이) 각종 외계인을 수집하여 동물원을 꾸미려는 미스테리한 외계인스럽게 밑도 끝도 없이 장려한 계획, 살아남기 위해 피차 발버둥치는 외계인들 간의 처절하고 궁색한 생존 경쟁, 나노테크는 시시해졌는지 이제는 펨토테크가 대세다! 라마와의 랑데뷰 + 링 월드 + 타우 제로 + 영화 아마겟돈 을 합치면 이런 SF가 나온다. 누가 코치라도 해 준 건지 날이 갈수록 글솜씨가 좋아졌다.
인터뷰 사진은 시끄러운 옆집 노파를 토막 살해 후 입 닦은 모습이었더랬는데...
푸싱 아이스의 책 날개 사진은 한 십년쯤 집에 틀어박혀 가사와 사이버세계에 전념해 온 88세대같은 모습이었다. 레빌레이션 스페이스 시리즈가 끝난 후 우리(?)가 포근하게 느껴왔던(?) 그의 고딕 스타일 우주는 그렇게 끝장난 것이다.
레널즈가 이번에 특별히 가볍게 과학기술을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SF 업계에서 네임벨류는 거의 없지만 위대한 하드SF의 거장답게) 디테일의 일부는 어쩔 수 없이 하드했다. 벨라와 스베틀라나의 역학 관계의 이동 중심추가 무식하고 힘만 쎈 웨일즈 촌뜨기 광부를 모티브로 삼은듯한 얼음청소부인 것은 사실 정해진 수순을 밟을 수 밖에 없는 극 전개를 예상하게 하지만 부담 없으면서도 깔끔한 전개와 결말을 비교적 짧은 500 페이지 가량에 균형있게 배열했다. 아무래도 누군가 그에게 작법 지도를 하던가, 편집 쪽에서 상당한 파워를 가했던가, 레널즈가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쓰자고 정신 차린 것으로 보인다. 엔터테인먼트 면에서나 SF 함량 면에서나, 읽기 좋고 즐거운 소설이었다. 떠오르는 작가의 주특기가 몽땅 거세당하고 나서야 소설은 나오게 되는 것인가? 이런 토크플레이러브스러운...
제임스 호건의 giant series중 첫 권인 inherit the star도 마저 읽었다. 7월에 반쯤 읽다가 말았는데 어느 페이지에서 펼치더라도 상관없이 주욱 읽을 수 있는 정말 희한한(rare) 하드 SF다. 극 초반에 달 표면에서 발견된 5만년전의 인류를 쏙 빼닯은 외계인 시체의 미스테리를 푸는 과학자들의 논쟁을 다룬다. 7월에 더 읽을 맛이 안 났던 것이... 결말이 이렇게 저렇게 날 것이라고 예상해서(너무 뻔히 보여서) 흥미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증거와 논란 주제를 여러 개 나열하고 그걸 짜맞추기 하다보면 피할 수 없는 단일한 결론이 나온다(그리고 그 논란에 부속된 전개가 이 소설의 전부다). 그게 책의 딱 절반에 모두 제시된다. 마지막 한 둘 쯤은 꼬불쳐 두었다가 클라이막스에 써먹었어야 하는데, 이 책은 도대체가 클라이막스란 게 없다.
그러다가 무릅을 탁 쳤다 / 깨달음이 왔다 / 대뇌피질에서 포도당이 왕성하게 소비되는 느낌이 왔다. OSC가 예시하던 하드SF가 바로 이거였구나. 그러니 OSC가 하드SF의 'ㅎ'도 모르는 우물안 개구리 바보 소리 들어도 할 말이 없는거지.
아울러, 김씨 아저씨던가? 호건을 지지리도 글 못쓰는 얼간이라고 놀리던 기억이 난다. 산소가 부족한 우주선, 가니메데 캠프에서 공기 오염 걱정 없이 툭하면 담배를 뻐끔뻐끔 빨아대는 것, 주인공이 지구에 화상 메일을 보내는 극히 촌스러운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외계인의 지구기원설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단체커 교수가 많은 미스테리가 풀린 후 그것을 축하하는 칵테일 파티장에서 인간성을 씹어대는 연설을 멋지게 해 내는 장면이었다. 분위기 정말 cool(썰렁)한 것이, 호건은 '학회SF'라는 소설업계에선 존재해선 안되는 장르를 제대로 개척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고 싶어졌다. 그게, 70년대 소설임에도 별로 촌티가 나지 않았다 -- 학자들 세계는 백만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테니까.
Danchekker가 이렇게 끝맺었다. "Let us go out, then, and claim our inheritance. We belong to a tradition in which the concept of defeat has no meaning. Today the stars and tomorrow the galaxies. No force exists in the Universe that can stop us."
피를 끓게 하는 연설같아 보이겠지만... 천성적인 개망나니 인류가 우주로 나가 무슨 짓을 할런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뿐더러 말려도 소용없다 라는 뜻이다 -- 단체커는 cool할 수밖에 없는 학자기 때문에 인류가 그러다 멸종해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2주 동안 병원을 들락거려도 도통 염증이 가시지 않다가(적은 양이지만 술은 마셨다) 갑자기 딴 생각이 들어 병원을 바꿨다. 유크라 정과 알콘시프로바이점이현탁액(퀴놀론계 항균제) 투약 후 약 2시간 만에 염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2주 동안 먹었던 각종 기분 나쁜 소염진통제, 항생제, 위장약 트리오가 아닌, 단 하나의 알약으로 기적같은 치료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그날 밤(11월 2일) 편히 잤다. 의약품 검색은 http://www.kimsonline.co.kr/
의사의 진료행위에 대한 불신은 치료에 전혀 도움이 안 되야 정상인데, 나처럼 위약 효과가 별 의미가 없으며 현대문명, 특히 의학과 생물학에 대한 뿌리깊은 회의를 갖고 있는 사람은 병도 더디게 나을 것 같지만, 사실 그 반대였던 적이 더 많았다.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매일 밤 늦게 자고 하루종일 정신없이 일하는 내가 불가해하게 건강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정신 상태가 가끔 심하게 멀쩡하기 때문. 멀쩡하다고 하긴 뭣하고 명료하다고 해야할지(하얀 눈밭을 에운 검은 숲처럼) 가끔씩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가볍게 한 대 맞은 것처럼(뎅~) 갑자기 의식이 뚜렷해 질 때가 있다고 해야 할지. 하루중 대부분이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런 순간은 짧고 단속적으로 한 두 차례 두서없이 나타날 뿐이다. 그보다는 형편없는 기억력이 생활에 많은 불편을 야기했다. 하여튼 그런 순간이 오면 섭취한 영양분이 삽시간에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비타민이란 괴상한 TV 프로그램에 따르면 건망증은 DHA가 풍부한 삼치로 치료하면 된다.
아니면 똑똑한 채 잘난척하기 좋은 책(이를테면 핀커류)을 몇 권 읽던가.
스푹스는 3기에 들어서 메가리가 없어졌다 심하게 말하면 스파이들이 꼴갑 떨고 있다. 자전거 타기처럼 드라마란 업이 있으면 다운이 있게 마련 -- 영화와 달리 드라마란 것은 원래 너저분할 수 밖에 없게 마련. 덱스터는 2기에 접어들어 자신의 어둠을 드러내는 방법을 서서히 배워가는 중이다. 내게도 덱스터같은 어둠이 있던 시기가 있다. 심연을 뚜러지게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당신을 쳐다본다 고 니체가 말한 적이 있다. 30대 초반까지의 고민과 30대 중반 이후의 고민은, 설령 그것이 프로그래머의 것이건 살인마의 것이건, 질적인 면에서 확연히 다르다. 덱스터가 바로 그 과정을 겪고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자신이 살해한 18구의 시체가 발굴되면서 화면은 빙글빙글 돌아가고 그동안 별고없이 행복하게 살았던 덱스터는 자신의 인생을 강제로 되새김질하게 되었다. 씹은 것 또 씹는 무슨 황소도 아니고, '나는 뭘까?' 참고로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일관적이다.
애매한 정신세계는 단속적인 성장 상태 또는 지지부진한 답보 상태, 이도저도 아닌 상태 등 몇 안되는 state에서 오락가락하는 것 같다. 내가 가끔은 성장했다고 잘난 척 할 처지가 못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나 인간에 관해 그렇게 많이 알아봤자 써먹을 데도 없고 실제로 어떻게 써먹어야 할 지도 모르는 그런 류의 지식을 갈고 닦아봤자 뭐하겠나 싶다. 가끔 당신에 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나 놀래키는 용도? 어떤 면에서는 인간에게는 인간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조씨 아저씨는 평소 저 혼자 일하면서 연락도 안하고 사무실에도 가끔 안 나오는 등 나름대로 자유를 만끽하며 지내다가 사람들이 자기를 왕따 시키는 것 같아 한편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동시에 한편으로 소외되어 화가 치밀어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자기는 소외되어서 기쁘다며 화를 내는 것이다. 그는 그가 응당 받아야 할 대접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아무 쓸모도 없이 버려지거나 웃음꺼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인 듯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조씨 아저씨와 마찬가지로 살아야 할 이유를 늘 오락가락하는 결의와 사회에서의 위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이해와 인정, 감정적 결속(사랑, 신의, 우정 등속) 속에서 굳이 찾아냈다. 그런데 왜 그런 것에 관해 의문을 갖고 다른 것이 있는지 찾아보지는 않으려나? 그런 고민없이 정말 어처구니없게 행복하게 사는 나는 뾰족하게 뭐라고 위로해 줄 수도 없다.
나이가 들면서 주윗 사람들의 고집이 밑도 끝도 없이 늘어나고, 마찬가지로 자존심도 밑도 끝도 없이 커져가면서 머리는 점점 나빠지고 감정적 격앙 등의 정서 반응이 점점 십대스러워지는 모습을 본다.
AR의 Pushing Ice를 10일에 걸쳐 읽고 감상문을 쓰지 않았다. 레널즈는 드디어 하드SF가 아닌 SF를 쓸 수 있게 되었다. 하-드한 묘사의 파격적인 생략과 지저분한 인간관계를 전면에 내세우는 센스, 그러면서도 상대론적 속도로 은하계 저 먼 곳까지의 로-맨틱한 여행(만 오천년이던가? 십만년이던가?), 커다란 드럼통에 은하계에서 긁어 모은(흡사 지나가는 강아지를 쏘세지로 꼬시듯이) 각종 외계인을 수집하여 동물원을 꾸미려는 미스테리한 외계인스럽게 밑도 끝도 없이 장려한 계획, 살아남기 위해 피차 발버둥치는 외계인들 간의 처절하고 궁색한 생존 경쟁, 나노테크는 시시해졌는지 이제는 펨토테크가 대세다! 라마와의 랑데뷰 + 링 월드 + 타우 제로 + 영화 아마겟돈 을 합치면 이런 SF가 나온다. 누가 코치라도 해 준 건지 날이 갈수록 글솜씨가 좋아졌다.
인터뷰 사진은 시끄러운 옆집 노파를 토막 살해 후 입 닦은 모습이었더랬는데...
푸싱 아이스의 책 날개 사진은 한 십년쯤 집에 틀어박혀 가사와 사이버세계에 전념해 온 88세대같은 모습이었다. 레빌레이션 스페이스 시리즈가 끝난 후 우리(?)가 포근하게 느껴왔던(?) 그의 고딕 스타일 우주는 그렇게 끝장난 것이다.
레널즈가 이번에 특별히 가볍게 과학기술을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SF 업계에서 네임벨류는 거의 없지만 위대한 하드SF의 거장답게) 디테일의 일부는 어쩔 수 없이 하드했다. 벨라와 스베틀라나의 역학 관계의 이동 중심추가 무식하고 힘만 쎈 웨일즈 촌뜨기 광부를 모티브로 삼은듯한 얼음청소부인 것은 사실 정해진 수순을 밟을 수 밖에 없는 극 전개를 예상하게 하지만 부담 없으면서도 깔끔한 전개와 결말을 비교적 짧은 500 페이지 가량에 균형있게 배열했다. 아무래도 누군가 그에게 작법 지도를 하던가, 편집 쪽에서 상당한 파워를 가했던가, 레널즈가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쓰자고 정신 차린 것으로 보인다. 엔터테인먼트 면에서나 SF 함량 면에서나, 읽기 좋고 즐거운 소설이었다. 떠오르는 작가의 주특기가 몽땅 거세당하고 나서야 소설은 나오게 되는 것인가? 이런 토크플레이러브스러운...
제임스 호건의 giant series중 첫 권인 inherit the star도 마저 읽었다. 7월에 반쯤 읽다가 말았는데 어느 페이지에서 펼치더라도 상관없이 주욱 읽을 수 있는 정말 희한한(rare) 하드 SF다. 극 초반에 달 표면에서 발견된 5만년전의 인류를 쏙 빼닯은 외계인 시체의 미스테리를 푸는 과학자들의 논쟁을 다룬다. 7월에 더 읽을 맛이 안 났던 것이... 결말이 이렇게 저렇게 날 것이라고 예상해서(너무 뻔히 보여서) 흥미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증거와 논란 주제를 여러 개 나열하고 그걸 짜맞추기 하다보면 피할 수 없는 단일한 결론이 나온다(그리고 그 논란에 부속된 전개가 이 소설의 전부다). 그게 책의 딱 절반에 모두 제시된다. 마지막 한 둘 쯤은 꼬불쳐 두었다가 클라이막스에 써먹었어야 하는데, 이 책은 도대체가 클라이막스란 게 없다.
그러다가 무릅을 탁 쳤다 / 깨달음이 왔다 / 대뇌피질에서 포도당이 왕성하게 소비되는 느낌이 왔다. OSC가 예시하던 하드SF가 바로 이거였구나. 그러니 OSC가 하드SF의 'ㅎ'도 모르는 우물안 개구리 바보 소리 들어도 할 말이 없는거지.
아울러, 김씨 아저씨던가? 호건을 지지리도 글 못쓰는 얼간이라고 놀리던 기억이 난다. 산소가 부족한 우주선, 가니메데 캠프에서 공기 오염 걱정 없이 툭하면 담배를 뻐끔뻐끔 빨아대는 것, 주인공이 지구에 화상 메일을 보내는 극히 촌스러운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외계인의 지구기원설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단체커 교수가 많은 미스테리가 풀린 후 그것을 축하하는 칵테일 파티장에서 인간성을 씹어대는 연설을 멋지게 해 내는 장면이었다. 분위기 정말 cool(썰렁)한 것이, 호건은 '학회SF'라는 소설업계에선 존재해선 안되는 장르를 제대로 개척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고 싶어졌다. 그게, 70년대 소설임에도 별로 촌티가 나지 않았다 -- 학자들 세계는 백만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테니까.
Danchekker가 이렇게 끝맺었다. "Let us go out, then, and claim our inheritance. We belong to a tradition in which the concept of defeat has no meaning. Today the stars and tomorrow the galaxies. No force exists in the Universe that can stop us."
피를 끓게 하는 연설같아 보이겠지만... 천성적인 개망나니 인류가 우주로 나가 무슨 짓을 할런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뿐더러 말려도 소용없다 라는 뜻이다 -- 단체커는 cool할 수밖에 없는 학자기 때문에 인류가 그러다 멸종해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