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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3.04.19 Chichicastenango
  2. 2003.04.17 San Pedro la Laguna 1
  3. 2003.04.16 Pickpocket 1
  4. 2003.04.14 lost in the volcano 3
  5. 2003.04.12 Antigua
  6. 2003.04.11 Tikal Ruinas
  7. 2003.04.11 to Guatemala 2
  8. 2003.04.10 Nightscene 2
  9. 2003.04.09 Banana Republic
  10. 2003.04.08 Isla Mujeres 2
  11. 2003.04.06 Chichen Itza, Cancun 1
  12. 2003.04.05 Uxmal
  13. 2003.04.04 Merida
  14. 2003.04.03 Palenque 2
  15. 2003.04.02 Palenque
  16. 2003.04.01 kindness 2
  17. 2003.03.30 San Cristobal de las Casas 2
  18. 2003.03.28 시간 보내기
  19. 2003.03.27 eve at Zocalo
  20. 2003.03.26 Oaxaca
  21. 2003.03.25 Teotihuacan 1
  22. 2003.03.24 라 꾸까라챠
  23. 2003.03.23 Mexico City
  24. 2003.03.21 San Miguel De Allende 2
  25. 2003.03.20 개구리의 도시
  26. 2003.03.19 ...!
  27. 2003.03.18 relexed air
  28. 2003.03.17 touchdown Mexico
  29. 2003.03.13 in L.A. 1
  30. 2003.03.12 여행준비 4
San Pedro -> Panajachel -> Solora -> Los Cuentros -> Chichicastenango

새벽 5시에 아담이 시계를 돌려준다고 깨웠다. 그 차림으로 가면 힘들텐데? 괜찮아. 면 바지와 면 티셔츠 한장만 걸치고 어깨를 움츠린 채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길로 휘청휘청 걸어간다. 아담 덕택에 오랫만에 아름다운 새벽을 구경했다. 온갖 새들이 포근한 안개 속에서 지저귀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한기가 스며들어 방으로 기어 들어가 10시까지 잤다.

Darien Gap을 통과하는 꿈을 꾸었다. 파나마와 콜럼비아 사이의 전설적인 정글 속에서 나는 총을 들고 사방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여행 내내 다리앤 갭을 통과하는 공상을 했다. 어젯밤 아담과 그것에 관해 얘기했다. 그는 꿈도 꾸지 말라고 한다. 몇몇 사람들이 시도했다가 실종자 리스트에 올라갔고 자기도 하려고 했지만 안전에 들이는 비용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만사를 싸다 비싸다로 구분짓는 것은 나와 비슷했다. 그가 경제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면 나는 심각하게 저렴한 표정을 짓는 편이었다. 다리앤 갭을 통과한 사람이 있긴 있었다고 한다. 파나마 시티에서 간혹 정신병자들이 팀을 이루어 길잡이 내지는 총잡이를 고용하고 대략 일주일 동안 트럭과 보트를 이용해서. 요리용 바나나를 잔뜩 짊어지고... 다리앤 갭 통과는 돈들인 개죽음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썩 괜찮았던 산 뻬드로를 떠난다. 선착장에 우두커니 앉아 보트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보트가 화산에 둘러싸인, 놀랍도록 잔잔한 호수를 시속 40km로 달린다. 보트가 멈추었을 때 밑을 볼 수 있었다. 바닥에는 수초가 깔려 있었고 기포가 방울방울 올라왔다. 어쩌면 클레오파트라 배쓰처럼 밑바닥에서 물이 스며 올라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gps를 켜놓고 있으니 옆에 앉은 서양인 둘이 gps가 왜 필요한가 서로 옥신각신 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다큐멘터리 제작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과떼말라에 온 걸 보니 그 직업이 여간 고생스러운 것이 아닐듯 싶었다. 한 친구는 손가락 세 개가 없었다. 그는 동네 마약상처럼 거의 멸종해가는 히피였다.

치치행 직행 버스는 사람이 워낙 없어 취소되었다. 택시를 타겠냐고? 배시시 웃었다. 물어물어 미어 터지는 닭장차를 두 번 갈아탔다. 로스 엔꾸엔뜨로스에서는 버스가 안 보여 트럭 뒷편에 배낭을 던져 놓고 앉았다. 혼자 화물칸에 기대어 전후좌우로 흔들리며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렸다. 신선한 공기와 햇살을 마음껏 만끽했다. 닭장차보다 분위기가 좋다. 해발 2300미터의 산지에 위치한 치치카스떼낭고에 도착. 목요일 시장을 보러 왔다. 거리가 한산한데?

할 일이 딱히 없어서인지 길거리에는 대낮부터 술 먹고 맛이 가서 개처럼 뒹굴고 있는 마야의 후손들이 곳곳에 보였다. 시장은 철저하게 간강지화 되어 있었다. 다만 원주민들이 우글거렸다. 규모는 멕시코에 비해 작았다. 망고 장수마저 외국인을 등쳐 먹겠다는데 한 치의 후회나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 양반에게 제 가격에 산 것을 들고가 보여 주면서 희롱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혼자 다니다 보니까 외로워서... 갑자기 최고의 여행지에서 최악의 여행지로 굴러 떨어진 듯하지만, 다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 별다른 유감은 없다. 그런 관광지가 어디 한두 군데였던가?

마야의 창세 신화를 담은 Popul Vuh가 우연히 발견 되었다는 Santo Tomas에 들렀으나 뽀뿔 부가 거기 있을 리가 만무하다는 점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뽀뿔 부를 알게 된 것은 대략 15년전 쯤 된다. 동명의 프로그레시브 락 그룹이 있다. 대신, 러그를 파는 아낙네들과 돈을 달라는 아이들에게 둘러 싸였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숙소 삐끼를 따돌리고 싼 값에 숙소를 잡아 이틀을 편안히 묵을 예정이었으나 2시간 만에 관광을 끝내고는 허무해졌다. 갈 곳이 더 없다 -- 박물관에는 갈 생각이 없다. 그곳에 묵는 한국인은 내가 처음이라며 매니저가 신기해 하는데, 이틀에서 하루만 묵고 하루치 방값을 돌려줄 수 없냐고 애원하니까 징그럽게 웃으며 안 된다고 막무가네다. 그러고는 할 일이 있다며 황급히 자리를 뜬다. 어휴, 숙소가 마음에 들어 이틀치를 선불한 내가 바보지. 숙소의 종업원들은 나를 '코리아'라고 불렀다. "코리아, 세마나 산타야. 와서 보라구." "코리아, 하루 더 묵길 잘했지?" "코리아, 식당은 윗집이 괜찮아." 코리아, 코리아... 무슨 여자 이름 같다.

양지 바른 테라스에 앉아 벼룩에 물린 상처를 바늘로 찔러 피를 냈다. 닭장차를 타다가 옆 사람에게서 옮긴 것 같은데?

기기들이 점점 맛이 가기 시작한다. 돌연 PDA가 먹통이다. 리셋이 되는 바람에 프로그램들이 날아갔다. 설상가상으로 이럴 경우를 대비해 준비한 플래시 모듈 역시 고장 나서 프로그램을 설치할 수 없다. 인터넷으로 중남미 지역에서 pda 악세사리 구할 데를 알아봤지만 없다. 별 대책이 없어 한숨이 나왔다. 포스떼 레스딴떼로 부쳐 달랄까? 워낙 기억력이 형편없어서 pda를 사용할 수 없으면 괴롭다.

거리의 가게들은 세마나 산타와 이스터 때문에 대부분 문을 닫았다. 일주일 동안 노는 것이다. 아침부터 주변 마을에서 사람들이 꾸역꾸역 교회 앞으로 모여들더니 오후 무렵에는 바글바글하다. 세마나 산타 준비로 하루종일을 보내더니 두 시간쯤 행진. 생전에도 수난을 많이 당한 예수를 비롯한 여러 성자들이 매일 거리를 쏘다니느라 몹시 피곤해 보였다.


숙소 뒷편에서 바라본 Semana Santa 행진

여행자들이 없다. 다들 세마나 산타 때문에 안띠구아에 있는 것일까? 치치는 그렇다치고 어렵게 찾아온 이 숙소는 정말 괜찮은데. 여행자들이 없어 거리에서 장사하는 아줌마들과 거지들, 주정뱅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시내를 한 바퀴 산책하고 숙소의 테라스에 앉아 멍하니 아무도 없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지는 않았다. 다만, 거리의 불빛이 약해 슬며서 걸어가는 사람들의 윤곽이 마치 공포영화에 나오는 씬 같달까.

과떼말라 여행이 끝나가면서 왠지 모를 쓸쓸함이 찾아왔다. 해가 졌다. 별들이 소박하게 반짝였다.

배가 고파 거리에서 따꼬를 사서 먹었다. 거리에서 나를 '꼬레아'라고 부르는 녀석이 있었다. 소문 한번 빠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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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는 미국 처녀다. 에스빠뇰을 공부하고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친구와 여행을 시작했다. 멕시코 여행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과떼말라에 와 있단다. 그녀는 계획이 전혀 없다. 무뇌아인 줄 알았는데 내 가이드북을 쳐다보길래 빌려줬더니 게걸스럽게 읽는다. 마약 하는 친구들은 밥맛이라고 흉을 보고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자기 방에서 친구와 빈둥댄다. 그녀의 친구는 돌부처처럼 말이 없다.

그녀는 나처럼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부엌에 있던 각종 소스들이 사라져서 아침부터 우리는 조금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나는 레스토랑에서 '설탕'을 냅킨에 조금 덜어 가져왔다고 말하며, 여행을 오래하다 보면 이런 꽁수가 생긴다고 은근히 자랑했다. 그녀는 자기 방에서 비닐 봉투를 가져와 봉투에 담긴 살사 칠리를 천진하게 보여준다. 허거덕. 액체를? 그녀는 치밀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레스토랑을 방문하는 준비된 고수였다...

엘레나는 여행자들을 만나거나, 풀밭에서 다른 미국인들처럼 요가에 몰두하거나, 파티씬에 휩쓸리지 않은 채, 정말 아무 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낸다. 한 마디로 여행자들 사이에서 흔히 보는 시간이 한 없이 느리게 흘러가거나 아예 정지된 놈팽이였다. 그렇다고 여행을 통해서 현지인과의 각별한 우정을 기대한다거나 모험과 로맨스를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며 쿨함을 과시했다.

첫 여행이라는데, 장기 여행자의 노련미가 철철 풍겼다. 장기여행자들이야 만사가 시들하기 그지없다. 뭘 봐도 그게 그거같은 돌덩이인데... 가 증세다. 장기 여행자가 말하는 모험이란, 기껏해야 삐끼에게 당해 고생하거나(삐끼도 바보는 아니라서 몹시 경제적인 표정을 짓고 돌아다니는 나같은 놈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주머니를 몽땅 털리거나, 비자 문제로 국경에서 오도가도 못하거나, 화산 꼭대기에서 폭풍을 만나 오들오들 떠는 종류의 것으로, 별로 낭만적이지 못하면서 오랫동안 쓸데없이 두뇌의 소중한 메모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아무 탈 없이 정신적으로 고양되는 진국인 것보다 많았다. 로맨스? 우리는 각자 같은 목적지에서 같은 시간에 만나 삶을 맛보다가 어느 순간 잡고 있는 손을 뿌리치고, 자다가 깨어 후회한다. 어쨌거나 엘레나는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나에 비해 어른스럽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저 경지에 도달하려면 여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어떻게 아무 것도 안 하고 하루 종일 앉아서 야채나 과일을 오물거릴 수 있을까. 저중심 설계 탓일까?

그런 사람이 게스트 하우스에 한 명 더 있다. 나이 70 먹은 과떼말라 노인이다. 그는 한밤중에 불을 꺼 놓고 방 앞 의자에 멍하니 앉아 지나가는 닭이나 개를 뚜러지게 바라보고는 했다. 심지어 사람도 닭 보듯이 뚜러지게 쳐다보았다. 그 나이에 이르면 닭이나 사람이나 비슷해지는 걸까? 하지만 닭은 인사를 하지 않는다.

그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서 의자에 앉아 있고는 했다. 하루에 칫솔질을 세 번하고 세수도 세 번 했다. 나와 엘레나가 음식을 해 먹는 광경을 보고 고무된 나머지, 이제는 그 노인도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음식 만드는 과정은 장인의 솜씨를 담은 한 편의 장편 다큐멘터리였다. 단순한 야채 스프를 만드는데 무려 3시간이 걸렸다. 재료를 씻고 써는데 2시간 반이 걸렸다. 그는 시간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최고의 장기여행자였다.

날이 흐려서 마당에서 움직이는 것들이 많지 않았다. 뭔가 움직이는 것들이 없어 볼거리가 떨어져 살아갈 희망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 모를 노인과 나는 하루에 여섯 차례 인사를 주고 받았다. 에스빠뇰을 잘 모르는 관계로 노인과 무슨 대화를 하기는 어려웠다. 어쩌다가 눈길이 마주치게 되면, 아침이면 아침 인사, 점심에는 점심 인사, 저녁에는 저녁 인사를 나눴다. 오늘은 꼬모 에스따? (how are you?)라는 에스빠뇰을 익혔기 때문에 그와의 대화가 어제보다 윤택했다. 내가 부에나 따르데스(good afternoon)하면 그가 부에나 따르데스 라고 답했다. 내가 다시 꼬모 에스따? 라고 하면 그는 비엔, 그라시아스 아미고(fine, thanks my friend)라고 말했고, 그가 꼬모 에스따? 라고 물으면 나는 비엔 그라시아스 라고 대꾸했다. 그는 흡족한듯이 다시 닭들을 쳐다보고 나는 히히 웃고 새로운 에스빠뇰을 찾아 보았다.

이제 Que Soy? 라는 에스빠뇰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돌아갈 날이 머지않은 노인과의 대화에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고 무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꿰 쏘이?' 는 아마도 '나는 누구인가?' 내지는 '나는 뭔가?' 라는 뜻일께다. 안띠구아의 거리를 지나가는 한 청년이 그 문장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오늘은 동네에 짱 박혀 사는 서양 마약 장수가 커미션이나 벌어보자고 음산하게 생긴 서양인을 한 명 데리고 왔다. 게스트 하우스에 막 도착한 그가 한 첫 질문은, 부엌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한 동안 부엌과 주방기구를 정성스레 살피며 무엇을 해 먹을지 골몰하다가 눈썹을 찌푸리며 비관적인 표정을 지었다. 옷 차림새를 보니 작정하고 찾아온 장기여행자 같다.

그의 이름은 아담이다. '애덤'이라고 하는 걸 보니 그링고구나. 표정이 왜 저 모양일까 싶었다. 그래서 세면대에 가서 내 표정을 살펴 보았다. 내 표정이 아담하고 많이 비슷했다. 아랍에서 표정이 굳은 후로 별로 풀리지 않았다. 특히 눈꼬리가 조금 반항적인데, Que Tu?(넌 뭔가?) 라고 묻는 듯이 건방졌다.

아담과 함께 한가하게 보름달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조용히, 화장실이 어디있냐고 물었다. 부디 아름다운 보름달과는 아무 상관없는 질문이기를 바랬다. 한때 나는 태양이 250와트 짜리 할로겐 전구이고 보름달은 15와트 탄소 전구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각박하게 살았다. 이제는 안다. 달은 대기가 없는 황량한 곳일 뿐이고 달을 쳐다보는 내 시선이 백만배는 아름다우며 그건 몰지각함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사람은 바보스러울 때라야 행복해진다. 따라서 사람은 영원히 행복할 수 있다. 그 바보스러운 상태를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바보스러움은 (부질없는) 열정과 결합했을 때 인간이 가진 가장 부도덕하고 매력적인 것이 된다. 그 바보스러움은 아담과 내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화장실에 갔다온 그는 음산한 표정으로, 내일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날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알람시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표정을 보고 있으면 내일 아침이 세계 멸망의 그날인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다른 미국인들과 정신 상태가 달랐다. 코맹맹이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는 이미 남미에서 많이 굴러먹었다. 볼리비아에 꼭 가야 한다면서 하던 말을 흐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유 노? 잇츠 라이크 인디아 한다. 대체 볼리비아에 뭐가 있길래 만나는 사람마다 볼리비아 하면 감격부터 하는 것일까... 혁명 정신에 몰지각한 볼리비아에서 게바라가 손목이 잘리고 비참하게 죽지 않았던가?

그는 여행 내내 본의 아니게 나처럼 독실한 수도승이 되어 있는 상태인 것 같았다. 다른 미친 미국인들과 달리 엘레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엘레나에게 한 첫 마디가, 여기가 샤워실이군 이었고 엘레나는 별 꼴이야 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설겆이에 열중했다. 수도승처럼 생긴 사람들은 여자들에게 무시당하기 때문에 더더욱 수도승의 길로 정진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는 샤워실을 몹시 비관적인 표정으로 살핀 후 입을 다물었다. 아무 하고도 말을 하지 않고 식당에 혼자 앉아 식사하는 서양 남자 여행자를 많이 보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오래토록 식당에 앉아 있지 않았다. 밥 먹으면 바로 일어섰다. 어디 딱히 갈 데도 없으면서 갈 데가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서두른다. 사람들과의 화학반응을 신경쓰지 않거나 못하는 것은 나를 포함한 거게 남자 (수도승) 여행자들의 공통점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에게 차고 있던 손목 시계를 빌려주었다. 마약 장수가 데려와서 마약하는 녀석인 줄 지레 짐작한 것이 미안했다.

혹시나 해서 그에게 이곳 게스트 하우스가 하룻밤에 20퀘찰이라고 넌지시 말하니까 알람시계가 없음을 밝힐 때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표정을 지었다. 마약 장수한테 주는 커미션을 포함해서 방값을 좀 많이 지불한 모양이다. 자존심 때문에 자기가 묵고 있는 방값을 끝끝내 말하지 않는 여행자들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낙천적이며 인생을 즐길 줄 안다는 듯한 말투로 종종, 10꿰찰 더 주고 배쓰가 포함된 아늑한 방에서 안락하게 묵는 것이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는 방보다 낫지 않아요? 라고 말하는데, 그럼 나는, 그럼요. 그깟 10꿰찰(1.5달러)이 얼마나 대단한 돈이라고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없지요. 라고 대꾸했다. 언제나 그 게임의 승자일 수 없기에 내가 한 말은 비웃음이나 조소가 아니었고 사실 그대로였다.

음산한 아담은 별 말 없이 앉아 오랜 기간 간경련에 시달린 듯한 비극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방문을 열어 놓은 적이 없었다. 창문도 꼭꼭 닫아 걸었다. 마당에 앉아 있을 때도 그랬다. 그래서 그가 안에 있는지 없는지는 창틈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으로나 알 수 있었다.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보름달을 보고 화장실이 생각나는 자폐증 환자 같은 미국인은 처음 보았다. 멕시칸 마초같이 껄렁대는 녀석들은 무진장 많았고 그게 아니더라도 무언가 중얼거리거나 떠벌리거나 친절한 척 하거나 상황에 쫄았다는 티를 안 내려고 시시껄렁한 위트를 꼭 빼놓지 않고 사용하는 미국인은 많이 보았다.

말 나온 김에, 미국인이 웃기는 점 중에 하나가 무척 약은 척 하면서 사기는 다 당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카우시우스하고 컨시우스하고 프래그마틱 한 체 하는 것은 어쩌면 미국에 사는 백인의 국민성 내지는 자기 정체성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런 편인데(얼웨이즈 노우 더 얼터너티브 웨이), 나보다 정도가 심해서 옆에서 보면 좀 안쓰럽다.

투어 하다가 가이드한테 팁 좀 주자고 뭔가 그럴듯한 제안을 해서 기쁜듯한 표정을 짓는 놈이 개중 제일 증오스럽다. 하여튼 미국인들이 아담처럼 뭘 묻기 전에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으면 좋겠다.

묵묵히 바퀴벌레를 입에 물고 있는듯한 아담은 과떼말라에서 한 달 정도 보낼 예정이었는데 의외로 가볼만한 곳이 없더라고 말했다. 그는 마야 유적지의 이끼 낀 돌덩이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오리지날 장기 여행자였다. 아스카 관광은 어땠는지 물었다. 가격은 그럭저럭 적당한데 비행시간이 짧다. 그렇다고 걸을 수는 없고 운운. 우주인에 관한 견해라도? 긴 답변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짧다. 모르겠다. 잉카 트레일에 관해 묻자, 투어리스틱해서 재미없고 비싸다고 말했다. 어디가 좋아? 온두라스 해변. 싸다. 끝내준다. 열 댓마디가 찬사 일색이었다. 특히 싸다는 점이 요점이었다. 이 친구, 비록 표정은 꽝이지만 무언가 유용한 정보를 말할 줄 아는 친구같다. 아.. 다시 카리브해가 생각났다.

게스트 하우스에 있는 모든 투숙객들은, 아마도 담배를 안 피우는 아담도 앞으로 포함될 것 같은데, 음식을 만들 때 가스레인지의 불을 켜기 위해 여행자 중 유일하게 라이터를 갖고 있는 나에게 라이터를 빌리러 왔다. 엘레나에게 내 이름은 인디안 식으로 '머나먼 동쪽에서 불을 가지고 온 자'라고 말했다. 인디오 아줌마처럼 복스럽게 가슴을 흔들면서 웃는다.

이렇게 해서, 네 명의 여행자가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앉아 인사를 주고 받고, 하나 밖에 없는 화장실 차례를 기다리게 되었다. 나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난다.

인류에게 주어진 환경은 그것과 어울리거나 그것을 극복하거나 심지어 그것으로부터 소외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냥 경계없이 주마간산격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지능이 있는 한, 필요한 만큼 울궈 먹으면 될 것 같다.

아띠뜰란 호수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이 마을에 몰려드는 관광객들에 부응한 개발욕을 막을 수 있는, 환경을 생각할 줄 아는 '지성인'의 주장은, 각박한 환경 내지는 현실 속에서 대낮에 일 없이 울어대는 미친 닭들의 울음소리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일 없이 벽에 기대 졸고있는 주민들은 돈에는 크게 욕심이 없어 보였다 -- 주님이 있었다. 오히려 이 마을에 흘러 들어와 정착해서 살고 있는 서양인들이 서양인들을 상대로 장사 잘 하면서 건물 층수를 나날이 올리고 있었다.

산 뻬드로에는 식민지풍의 예쁘장한 건물이 없다. 계획없이 무절제하게 지었는데, 한 마디로 하드보일드했다. 어두컴컴한 맨콘크리트 건물 속에서 걸어나온 전형적인 인디오 복장의 아줌마가 주저없이 호숫가에 세제를 풀어 빨래를 하고 아이들의 목욕을 시켰다. 그 물을 퍼다가 음식을 만들고 식용수로 썼다. 경찰은 경찰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버스는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차례차례 도시에서 온 짐들을 내리고, 아침마다 장이 열리고 거리에는 쓰레기가 넘쳤다. 그럼 난 여기서 환경 걱정은 집어치우고 뭘 해야 하지? 요가를 하던가, 카누를 타던가, 말을 타던가, 화산 트래킹을 하던가, 쏠라 파워로 데운 호수물에서 목욕을 하던가. 아니면 마리화나를 피우던가? 음... 그냥 일없이 시간을 죽였다.

콘크리트 벽에 써 있는 글자들: Dios es amor 또는 Dios te ama. 미루어 짐작컨대 '신은 사랑이시다'. Jesus mi mejor amigo. '예수는 나의 가장 친한 벗'. 거리에는 요란한 개신교 찬송가가 하루 종일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을에 개신교도가 꽤 많은 것 같다. 이런 저런 교회에서 아침 저녁으로 집회가 열린다.

담벼락에 기대앉은 젊은 인디오는 외국인들에게 그라스를 팔고 있었다. 그에게도 주님이 있었다. 경찰이 다가오자 갑자기 어투가 미묘하게 바뀌면서 악세사리 장사꾼으로 돌변하여 내게 해마 목걸이를 쥐어주며 영어로 그 정교한 기교와 오리지널리티를 유창하게 설명한다. 마리화나를 피우는 인디오 개신교도의 52배속 접신이라든가 현격한 영혼의 상승이 기대된다. 진심으로, 영적인 면에서나, 재정적인 면에서나 하나님의 축복이 깃들길 바랬다.

과떼말라에 온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레스토랑에서 식사해 본 것이 손에 꼽을 정도라 죄책감이 들어 삐노끼오라는 이탈리아 '관광' 식당에서 라자냐를 주문했다. 무려 25꿰찰이나 했는데, 예상했던 대로 무늬만 라자냐였다. 시장 골목에서 계산이 서툴러 한참을 곰곰히 생각해야만 하고, 그러고도 번번이 셈이 틀리는 할머니와 옥신각신 하면서 야채를 사서 저녁을 해 먹는 편이 나았다. 할머니는 낄낄낄 웃으면서 어제처럼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했다. 마치 어린애 같다.

인터넷 가게 주인이 2꿰찰을 이유없이 할인해 주었다. 어제 사진 찍어줘서 그런가? 주민들은 멕시코에 있을 때보다 현저하게 아미고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조금 있으면 떠날 나라이지만 사람들이 기분 좋은 나라다. 그런데 남들 다 좋다는 안띠구아는 별로 좋은 줄을 모르겠다. 하지만 산 뻬드로는 좋다. 그냥 좋다. 세월이 흐르면 여기도 변할 것이다. 너무 늦지 않게 온 것을 행운이랄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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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pocket

여행기/Guatemala 2003. 4. 16. 15:54
미국의 침공으로 바그다드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박물관에 있던 수메르 유물들이 몽땅 털렸다는 뉴스를 보고 억장이 무너졌다. 그나저나 부시는 게임 이론 대로 움직이는 장난감 같다.

공원에 앉아 감사하게 내리쬐는 햇빛으로 가이드북을 말렸다. 떡이 된 책이 제대로 살아날 것 같지는 않다. 옷들은 다 빨아서 말렸지만 신발은 대책이 없다. 덕지덕지 묻은 검은 화산탄 가루를 털어냈다. 털어도 털어도 어디서 기어 나오는지 끝이 없다.

거리를 할 일 없이 헤메다 보니 5인조 밴드가 광장에서 악기를 팔면서 연주와 노래를 하고 있었다. 사진 찍는 것을 잊었다.

왜 xp에서 뉴스를 다운받을 때면 한없이 느려지는가 싶더만, joc web spider 3.43에 버그가 있는 것 같았다. 3.50을 사용하니 잘 작동한다.

밥해먹고 나니 밤에 할 일이 없어 밴드 소리를 좇아 교회를 방문. 교회 안팍으로 엄청난 인파가 몰려 있었다. 교회의 제단 장식이 무엇에 소용되는가 싶더니만 어이없게도 그것을 배경으로 빛과 소리의 쇼가 진행되는 중이다. 교회의 높은 천정과 기둥 사이에서 강력하고 장엄한(때로 닭살 돋는 비장한 나레이션과 함께) 사운드가 울려 퍼지자 교회가 전혀 다르게 보였다. 벤허의 테마와... 이름을 알 수 없는 교향곡들, 심지어 스타워즈의 테마까지 흘러 나왔다. -_-; 일요일의 대단원을 보기 위해 토요일 쯤에 안티구아로 돌아올까? 숙소가 있긴 할까?

옆방 꼬마가 깨워 일어났다. 전날 밤 삶아둔 계란 두 개와 망고와 오이와 3일째 먹고 있는 3리터짜리 쥬스로 아침을 때웠다. 빠나하첼에 가야하는데... 젖은 후 안 마르고 여전히 걸레같은 가이드북을 살펴봐도 몇 시간 걸린다던지 하는 정보가 없다. 벌써 10시. 되는 대로 짐을 싸서 일단 버스 터미널로 나갔다. 마침 출발하는 차를 타고 치말떼낭고에 도착.

뙤약볕 아래서 30분을 기다려도 빠나하첼행 버스가 오지 않는다. 에스빠뇰이 좀 되는 것 같은 서양 여자애 둘은 기다리다 지쳐서 대절 봉고에 오른다. 나도 탈까 하다가 비싸 보여서 망설였다. 마침 오고 있는 산 뻬드로행 버스를 타도 되겠다 싶었다. 아띠뜰란 호수 근처니까. 입구는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이었다. 하. 이런 버스 오르는 것은 자신있지.

버스에 막 오르려는데 누군가 앞 주머니를 건드렸다. 지갑을 슬며시 꺼내려는 것이 느껴진다. 지퍼 내리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손을 잡으려니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간다. 타이밍도 그렇고, 솜씨가 프로다. 감격이다. 닭장차에 아비규환에 소매치기까지, 꿈꾸던 그림같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감격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다. 서둘러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누군지 알 수 없다. 어떤 새끼인지 잡아서 족쳐야 할텐데... 버스가 막 떠나려고 한다. 발이 공중에 떴다. 버스가 언제올지 기약이 없어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냥 올라탔다.

닭장 차에는 더 이상 사람을 실을 수가 없을 정도로 미어 터졌다. 홰를 치는 닭들도 몇 마리 보인다. 여행자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형형색색의 로컬리들 뿐이다. 너무 기쁘다. 이런 차를 타야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과테말라 온 후부터는 줄곳 닭장차였다. 말 그대로 chicken bus, 미국에서 수입해 온, 유치원 애들이 타고 다니는 다 낡은 '노란색' 버스의 좌석에는 어른 둘이 앉을 자리 밖에 안 되지만 한 좌석에 셋이 앉았다. 한 사람은 엉덩이를 반만 걸치는 것이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은 날더러 닭장차를 견딜 수 있겠냐고 걱정스러운 듯이 묻기도 했다. 돈 조금 더 들이면 편하게 갈 수 있는데 사서 고생하는 것이 바보스러운가 보다.

사람이 너무 많아 배낭을 잡고 한 시간 반을 서서 갔다. 가끔 차장이 소리를 지르면 서있는 승객들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경찰이 과적 차량을 단속하는 것이다. 외국인이 자기들처럼 곧잘 하니까 재미있는지 낄낄 웃는다. 우둘두둘한 길을 달리는 동안 이빨이 와다닥 부딛친다. 커브를 돌 때는 한줄의 일곱 명이 동시에 쏠렸다. 재밌다.

올더스 헉슬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라고 극찬해 마지 않던 아띠뜰란 호수 lago atitlan에 도착했다. 3시간 걸렸다. 오는 중에 화산 분진과 가스로 숲과 마을이 자욱하게 덮여있는 멋진 광경을 보았다. 어떻게 보면 준 재난상태 같기도 하다. 화산이 한번 폭발해줘야 잊지 못할 추억이 될텐데...

그런데 내릴 때 모자를 버스에 두고 내렸다. 소매치기는 안 당하면서 왜 매번 모자만 죽실나게 잃어 버리는 것일까...

몇군데 들러봤지만 숙소가 꽉 찼다. 고생길이 열렸다. 계획에 없던 도시에 오고, 소매치기를 못 잡고, 특히 모자를 잃어버려서 짜증이 났다. 한창 공사 중인 hospedaje에 물어보니 방이 있단다. 살았다. 숙소가 만족스럽다. 넓은 마당이 있고 처마가 있고 빨래줄이 걸려 있고 부엌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특히 너른 마당이 마음에 든다.

하릴없이 호숫가를 배회했다. 물이 검어서 호수에서 빨래를 하며 호수를 오염시키는 아줌마들을 저주했는데, 자세히 보니 바닥에 검고 잘디잘은 화산탄이 깔려 있었다. 물은 매우 깨끗했다. 이런 호수는 사람 손이 닿지않는 몽골 같은 곳에나 있을 성 싶다.


아띠뜰란 호수. 해발 1530m

해가 지기 전에 뭔가 만들어 먹으려고 시장에 들러 야채를 샀다. 오늘 요리는... 음... 오에코돈? 시도해보자. 쌀과 야채를 넣고 일단 끓였다. 뜸을 들일 무렵 밥 위에 계란을 풀어서 얹었다. 거기에 케첩과 살사 칠리를 얹으니 맛이 그럴듯 하다. 그 이상한 음식을 오에코돈이라고 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알 바 아니다. 1.5퀘찰(250원)에 배불리 한끼를 해결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밤이 되자 희미한 하늘 위로 보름달이 떠올랐다. 풀문 파티로 정신없는 '서양 여행자 거리'를 제끼고 조용한 호숫가를 돌다가 숙소의 내 방 앞에 의자와 탁자를 끌어와 앉아 달을 쳐다 보았다. 산 빼드로에 장기체류자들이 많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여러 화산에 둘러쌓인 깨끗한 호수가 있고 풀벌레 소리와 동네의 패권을 다투는 개들의 소란스러운 소음이 들리는 아름다운 곳이다. 아침에 동네를 거닐어보니 꼬리가 잘린 개들이 종종 눈에 띄어 간밤의 치열한 격전을 떠오르게 했다.

카약을 빌리려고 여기저기 헤메다가 포기했다. 뭐, 안 타도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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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까야 화산에 갔다 온 후 정신적 충격이 대단해서 하루 더 안띠구아에서 느긋하게 지내기로 했다.

엊그제 끝내주게 맛있는 초우멘을 만들었지만 정작 자랑하고 싶었던 중국 여자애는 체크아웃하고 나가 버렸다. 그래서 2인분을 배불리 먹었다. 게스트 하우스는 텅 비었고 어제, 오늘 내린 비로 빨래는 걸레가 되었다.

이번이 세번째인가? 전에 만났던 한국인을 다시 봤다. INGUAT 관광청 추천 시티 투어 코스를 함께 슬슬 걸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한국인이 아는 척을 했다. 광장에 멍하니 함께 앉아 하품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감동한 것 같았다. 그날 하루 쓴 돈이 숙박비를 포함해서 10불이 채 안 되었으니까. 나? 난 6불 썼다. 난 밥을 해 먹으니까.

어제 빠까야 화산에 갔다왔다. 조난 비슷한 상황에서 고생을 하다 왔기 때문에 돌아오자 마자 뻗었다.

오후 1시쯤 12명이 투어차를 타고 출발했다. 오후 2시 화산 아랫 마을에 도착. 대략 4킬로미터를 올라가는 산길. 고도차는 740m. 어림잡은 예상 등반 시간은 2시간 정도였으나 미국인들이 워낙 굼떠서 거리의 반에 해당하는 본격적인 화산지대로 들어가는데 1시간 30분이 걸렸다. 오후 3시 반. 답답해서 미국인들과 가이드를 제끼고 앞서갔다.

빠른 걸음으로 거의 뛰다시피해서 앞서가던 경비대 마저 추월했다. 비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메케한 아황산 가스 냄새가 풍겼고 풍향이 수시로 바뀌었다. 비구름 속을 통과할 무렵 차갑고 두꺼운 빗줄기가 사정없이 떨어져 내렸다.

경사는 45도 가량, 비바람 뿐이면 별 문제 아니지만 비가 분화구에 떨어지면서 대량의 수증기가 발생하여 가시권이 3미터 이내였다. 잘게 부서진 화산탄이 발목에 푹푹 잠기면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살갗이 따끔거리고 온몸을 휘청이게 만드는 강한 비바람 때문에 잔자갈들이 비탈을 구르면서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오기가 생겼다.


비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빠까야 화산 오르막길. 포기하고 돌아갔어야 했다. 이후로는 사진을 찍을 상황이 아니었다. 살기 바빠서... -_-;

정상에 도착. 손목시계를 쳐다보니 불을 켜도 시각이 안 보인다. 아황산가스 때문에 목구멍이 다소 쓰리다. 물과 결합하면 이것들은 체내에서 황산이 된다. 빗물이 바위에 닿을 때마다 치익치익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분화구 주변에는 거대한 수증기의 벽이 형성되어 있었다. 아무 것도 제대로 안 보이고 비바람이 심해서 분화구 안쪽에 기대 앉았다. 추워서 손이 곱고 이빨이 닥닥거리지만 대조적으로 발밑과 엉덩이는 매우 뜨겁다.

일행이 도착하길 30분쯤 기다렸지만 정상에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다. 시계를 문지르고 품에 넣고 잘 쳐다보니 4시 50분. 해는 5시 30분에 진다. 팬티 속까지 젖었다. 모자 주변으로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바람과 수증기가 뒤죽박죽 되어 길이 보이지 않는다. 상황이 안 좋다.

올라 오는 길에 능선의 대략적인 방향을 파악했고 거리도 대충 알고 있다. 봉우리는 대략 300미터 가량. 그 후 이어지는 능선은 1킬로쯤 남서쪽. 풍향은 남동. 발밑은... 보이지 않는다. 재수없다. 바람 방향이 바뀌면 좋으련만. 목이 슬슬 아파온다. 오래 있으면 위험해질 것 같다. 냄새나는 아황산가스 뿐만 아니라 목을 탁탁 막히게 하는 이산화탄소도 있었다. 그보다는 당장 추워서 견딜 수가 없다.

미끌거리는 발밑을 조심하기만 하면 15분이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손이 곱아 신발끈을 조이는데 애를 먹었다. 뜨거운 화산암을 쥐고 있다가 신발끈을 맸다. 조난이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고작 2500미터짜리 조그만 봉우리라고 방심한 것이다.

해가 지기 전에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저 미친듯한 비바람과 수증기 속을 통과하는 것이 겁난다. 갈짓자로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옷과 신발은 이미 화산탄 부스러기로 뒤범벅되어 시꺼멓다. 미끄러졌다. 되는대로 손을 뻗어 화산탄을 잡았다. 맥없이 부러진다. 손바닥에 감각이 없다. 잔자갈과 함께 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스키 타는 것 같아서 신나긴 했다.

유령 같은 그림자 둘을 보았다. 우리팀, 몽카 블랑카 소속의 두 독일인 연인이 오도가도 못하고 공포스러운 표정으로 떨고 있었다. 일행과 떨어져 조난당한 것 같다. 따라오라니까 선뜻 발길을 떼지 않는다. 걱정하지 말아라. 나한테 gps리시버가 있다. 남자가 고개를 끄떡였다. 반팔에 샌들 차림으로 온 여자는 겁에 질려 있었다. 지친 것 같다. 골치 아픈데... 여자들은 저중심 설계로 제조되어서 내리막길에서는 쥐약이다. 특히나 힘이 빠져 있을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잖아도 엊그제 띠깔에서 어떤 아줌마가 15미터 계단을 굴러내려 이빨이 다 깨지고 두개골 일부가 함몰되고 피범벅이 된 채 기억상실증에 걸려 유적지 일부가 폐쇄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작 2500미터 라길래 물을 들고 오지 않았고 담배 피우면서 올라왔다. 비바람 속에서 강풍이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자 희미하게 능선의 거무스레한 윤곽이 보인다. 한숨을 쉬었다. 길을 찾았다.

300미터쯤 내려오자 비바람이 잦아 들었다. 남자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자 앞에서 자존심이 상한 것 같다. 조그만 동양 남자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남자는 비에 젖은 시궁쥐처럼 떨고 있었다. 내 꼴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자에게 나머지 일행이 어디있냐고 물었다. 모른다. 그럼 그들은 올라오지 않은건가? 뛰어 내려갔다. 20분 정도 걸려 마을에 도착했다. 몽카 블랑카 팀원들은 모두 무사했다.

우습게도 정상에 올라간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상에서 천사들이 날개를 손질하는 모습을 본 것은 나 밖에 없었다. 분화구에 사악한 절대반지를 버리고 세상을 구했지만 아무도 몰라주게 되었다.

입구 화장실에서 양말을 빨고 신발에 묻은 흙을 대충 털었다. 옷을 짜고 싶지만 그럴 형편이 안 되었다. 사람들이 떨고 있다가 독일인 연인이 도착하자 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올라 안띠구아로 돌아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바보짓을 했다. 내가 한 치명적인 바보짓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1. 오버트라우저를 가져가지 않았다. 가져갔으면 비바람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게 분화구에서 용암을 구경했을 것이다. 오버 트라우저가 없어서 물에 쩔은 쥐새끼같은 꼴로 돌아다녀 체면을 구겼다.

2. 껌을 안 샀다. 껌을 씹으면 날씨가 개판이건 말건 호연지기가 생기고 기분이 즐거워진다.

3. 무엇보다도, 날계란을 안 가져왔다. 계란을 뜨거운 바위 틈에서 익혀 맛있게 먹는 것이야말로 화산 여행의 묘미다. 그런데 분화구 곁에 쭈그리고 앉아 열기를 쬐면서 배가 고파 살구와 망고를 먹었다. 화산에서 살구와 망고라니... 알만한 사람이 그런 무식한 짓을 한 것이다.

이런 용서할 수 없는 실수를 했기 때문에 조난은 필연적이었다. 이번 산행을 반성의 기회로 삼자.

국립공원 입장료 25꿰찰을 내려고 50꿰찰 짜리 지폐를 주니 70꿰찰을 건네준다. 잔돈이 신선하고 감동적이었다. 인도보다 0을 먼저 발명하는 등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바 있는 마야 후손의 믿을만한 계산법이고, 다들 정신적 충격을 받은 상태라서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를 일으키면 안될 것 같아 얌전히 낼름 집어 삼켰다.

오락가락 하는 정신에 인터넷으로 뉴스를 다운 받고 밥을 해 먹은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숙소에 도착하니 9시. 1500미터 고지에서 딱 라면에 말아먹을 분량만 인디카 쌀을 씻어 알맞은 정도로 찰기와 윤기가 지게 밥을 짓는 것은 예술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라면은 또 어떻고? 이제 처음 보는 라면으로도 기본적으로 삼양 라면 맛을 낼 수 있다. 어떤 거지같은 면발도 쫄깃쫄깃하게 되살릴 수 있다. 매운 라면 국물과 밥. 꼭 그렇게 먹어야 추위로 얼어붙은 몸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폰지가 물을 빨아 들이듯이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해치웠다. 찬바람 맞으며 고생하다가 뜨겁고 얼큰한 국물을 들이키니 살맛이 났다. 야채와 탄수화물이 풍부한 진정한 구휼식품이었다.

칫솔질과 간단한 세수만 하고 따뜻한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아아... 좋다.

아침에는 갑자기 영양보충 하고 싶어져서 스테이크를 해 먹었다. 며칠 전에 멕시칸 스타일로 스테이크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바닥에 마늘을 깔고 고기를 얹은 후 양파 등을 넣고 지지면서 맥주를 때때로 붓는다. 소금과 후추로 적당히 간을 맞췄다. 당근을 넣고 지지다가 계란을 얹자 먹음직스러운 등심 스테이크가 완성되었다. 맥주 때문에 맛이 좀 썼다. 설탕을 좀 넣을껄 그랬나? 그래도 처음 만들어 본 스테이크 치고는 맛이 훌륭했다. 다음번에 할 때는 붉은 와인을 쓸 것이다. 육즙을 은근히 우려내는 것이 테크닉인 것 같다.


프라이팬에서 덜다가 계란이 뭉개져 모양이 망가졌지만 맛있는 스테이크. :)

돈을 좀 찾고 스노클과 옷가지를 우편으로 한국에 부쳤다. 우편료가 비싸다. 5일치 경비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돈을 더 찾아야 하나.

"노스웨스트항공은 이달 15일 정오 온라인(www.nwa.com/kr)상에서 부산발 LA 또는 샌프란시스코행 89만원짜리 왕복 항공권을 39만원에 할인판매하는 행사를 벌인다고 11일 밝혔다." -- 새삼스럽게 왜 이렇게 운이 안 따라주는 것일까 하고 울부짖기도 뭣하다.

"국민의 값진 세금을 이런 편집증적인 일에 써도 된다고 언제 국민의 동의를 얻었는지도 묻고 싶다. 언론이 정부를 감시하는 게 정상인데 우리는 정부가 언론을 감시하겠다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 -- 2003.4.12 조선일보 사설. 어차피 영문 모를테고, 말문이 주욱 막혔으면 좋겠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 리오리엔트, 이산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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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gua

여행기/Guatemala 2003. 4. 12. 19:14
인터넷 까페에서 옆에 앉아있던 그링고가 내가 사진 올린 것을 점검하고 있으니까 url을 가르쳐 달란다. 나갈 때까지 사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찍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슬며시 감췄다. 쪽 팔렸다.

사진을 잘 찍겠다는 욕심이 사라졌다. 일부는 입장시간 제한 때문이다. 아침 일찍이나 오후 늦게까지 문을 여는 곳이 드물다. 인도라면 가능했다. 오직 인도에서만 가능한 것 같다.


스타워즈의 어떤 씬이 띠깔의 이 광경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었다. Great Pyramid에서 바라본 이 사진을 아주 잘 찍는 방법을 알고 있긴 했다.

해는 5시 45분에 맞은편 지평선에서 뜬다. 해가 뜨기 20분 전에 사이트에 도착한다. 숲속에서 안개가 피어오를 것이다. 지평선 부근은 핑크빛을 띄고 먼 하늘은 푸르게 빛날 것이다. 화면을 네 부분으로 대충 나누고 지평선을 3/5 위치에 둔 다음 근경과 원경, 핑크빛과 푸른빛 사이에 피라밋 대가리를 위치시킨다. 그러려면 저 사진처럼 꼭대기에서 찍을 것이 아니라 피라밋에서 열계단쯤 내려온 후 카메라를 약간 아래로 내리는 기분으로 찍으면 될 것 같다. 해가 뜨려고 할 때쯤 빛은 지평선과 근경 사이를 수평으로 달린다. 해가 거의 질 무렵도 마찬가지다. 석양 무렵이 아침보다 낫지 않은 것은 정글에 깔리는 안개 때문이다. 안개가 숲을 반쯤 가리면 띠깔 유적지는 지구가 아닌 곳이 될 것 같다. 달이 아주 밝은 날 해가 바로 질때쯤. 음 이건 일년중 며칠 기회가 없겠군. 예전에 이란에서 터키로 넘어올 때 아라랏산을 보고 맛이 간 적이 있었다. 해가 질 무렵 아랫동이는 어둠 속에 잠기고 꼭대기는 날카로운 황금색으로 반짝였다. 그때는 멋진 광경에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하지만 스무장이 넘는 사진 중 단 한 장도 제대로 찍힌 것이 없어서... 울었다.

띠깔보다 멋있는 광경이 있을까? 있다. 인도 함피다. 띠깔 유적지가 20km^2나 되는 '거대' 유적지라지만 함피의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엄청난 유적 규모와 비교하면 세발의 피다. 함피의 비자야나가르 유적지는 거의 공짜면서 건축물의 아름다움은 띠깔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또 있다. 지금까지 내가 돌아본 유적지 중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인도 카쥬라호의 서부 유적군이고 단일 건축물로는 인도의 마두라이에 있는 미낙쉬 신전이다. 미낙쉬 신전에서 넋이 빠져서 사진 찍는 것을 잊었다. 규모와 아름다움 양자를 다 말하려면 앙코르와트 뿐이다. 세상의 어떤 유적지도 보는데 적어도 3일이 걸리는 곳은 앙코르와트 말고는 없다.

섣불리 단정짓지 말고, 다 보고 나서 얘기 하라고 말할 개제가 아니다. 주요 고대 문명은 잉카를 제외하고 다 봤으니까. 잉카의 사이트는 크기나 아름다움에서 상기한 사이트보다 나을 수가 없다. 시니컬하게 말해서 마야/아즈텍/잉카 문명이 주목받는 이유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선구 문명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나마 미국/유럽인들이 '안심하고' 갈 수 있는 유적지이기 때문인 것 같다.

게스트 하우스를 찾느라 한 시간을 거리에서 헤멨다. 이 삐끼, 저 삐끼를 전전했지만 방값이 비교적 비싸다. 왜 그런가 싶더니만 세마나 산타라는 그리스도 수난극이 다음주 중에 안띠구아에서 벌어질 예정. 전세계에서 가장 정교하다는 축제인데(관광청 팜플렛을 보니) 시작되자 마자 다른 도시로 뜰 생각이다. 지금 묵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고 축제 덕택에 숙소 잡기가 어려워서 애 먹은 생각을 하면...

부엌을 사용할 수 있다길래 오랫만에 뭔가를 만들어보려고 애썼다. 그런데 뭘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습관적으로 밥을 얹어놓고, 야채를 썰고, 볶다가, 밥이 다 익어서 야채 볶는데 그냥 부었다. 국이라도 하나 만들어야 겠기에 야채를 잘게 썰어 소금 약간 넣고 끓이다가 계란을 붓고 저으면서 거품은 건졌다. 게스트 하우스에 묵고 있는 무진장 시끄러운 중국 처녀가 괜히 시비를 걸었지만 개무시하고 묵묵히 만들었다. 남이사 '복잡하고 손이 가는' 요리를 만들어 먹던 말던 신경쓰지 말고 얼른 나가서 관광이나 잘하란 말이야. 자기가 권한 옥수수를 안 먹으니까 '점잔을 빼면서' 심통 부리는 것 같다. 음. 다 만들어놓은 음식은 고양이조차 거들떠보지 않았다. 삐깐떼(매운 야채 절임)와 곁들여 먹으니 무척 맛있다. 저녁에는 '광둥 스타일 정통 초우면 컴패티블 푸드'을 만들어서 중국 여자애를 한코 죽이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수퍼마켓에서 Salsa Soya 소스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Salsa란, 재료가 뭐든 간에 '무조건 맛있다'는 뜻이다.


정식 요리 명칭: backpacker's 'really' gut-filling fried rice with unstable quatum mechanical probablity

화산에 가려니 아침 6시에 출발한단다. 또 새벽인가? 좀 쉬어야겠다. 화산에 갈 생각이 없었는데 활화산이라는 소리를 해서 갑자기 마음이 동했다. 가능하면 투어 안하고 호젓하게 혼자 올라가고 싶은데... 산적들을 만나서 산생활의 고충을 들어보고 도네이션도 좀 하고...

띠깔 유적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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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kal Ruinas

여행기/Guatemala 2003. 4. 11. 17:47
환경이 훌륭함에도 대마는 한 포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 땅에서 대마가 핍박받고 있다는 증거다.

오늘도 새벽 4시에 일어났다. 덥다길래 일찍 가면 덜 덥겠거니 싶었는데, 아니다. 빨빨 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들한테나 더울 것 같다. 새벽 바람에 '떨면서' 짐을 싸서 호텔에 맡기고 띠깔 유적지행 차를 탔다. 새벽 6시에서 저녁 4시까지 10시간 가까이 띠깔 유적지에서 개겼다. 뭐 사진을 찍는다거나 마야 문명의 미스테리에 관한 뭔가 중요한 실마리를 잡으려고 두리번 거렸다기 보다는... 싸 가지고 간 두 끼 분량의 도시락을 천천히 먹거나 모기에 뜯기면서 밀림 속을 거닐거나(헤메거나) 유적의 제단에 누워 잠을 자는데 시간을 보냈다. 제단은 의외로 포근했다.

띠깔 유적지는 띠깔 국립공원 한복판에 있었다. 빨렝게에서 그렇게 해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원없이 밀림을 헤메다녔다. 밀림 속에 혹시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유적지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없었다.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야생동물을 부지기수로 만났을 뿐이다. 아쉽게도 이번에도 쌍안경을 구하지 못했다. 쌍안경으로 야생동물을 관찰하기에는 끝내주는 곳이다. 바나나 한 조각이나 빵 한 조각에 혈안이 된 녀석들이 우글거렸다. 유적지 곳곳에 뜻은 잘 모르겠지만 comida, anima 란 단어 따위가 들어간 에스빠뇰 게시판이 있다. 미루어 짐작컨대 동물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뜻인 것 같다. 하지만 밥 먹을 때마다 아장아장 기어와 옆에서 밥 달라고 쳐다보는데.. 안 주기가 뭣했다.


길을 잃고 정글 속을 헤메다가...

마야 유적에 워낙 흥미를 잃어서 이젠 뭘 봐도 그저 그렇지만(아시아에 비하면 엄청 단순한 인간들인 것 같다) 사원 양식을 대충은 구분할 수 있었다. 이건 떼오띠와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군. 이게 이거보다 앞서 지은 것 같은데? 등등 혼잣말을 중얼거릴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지금까지 들러본 박물관 덕택이다. 멕시코에 비하면 유적 관리는 엉망임에도 입장료는 동등한 수준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공교롭게도 추측이 대충 맞았다. 끔찍한 가뭄이 이어지는 동안 피지배층이 사제 계급을 대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천문 관측은 점점 덜 중요해지고 달력은 잊혀지고 사제들은 권력을 잃었다. // 중간계급이 없었던 마야 사회에서 지배층의 붕괴는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야기했을 것 같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이라는 두 계급 구조 밖에 없었다는 점이 아주 신기하다. 어떻게 그런 사회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가 의문이다. 그럼 상거래로 돈을 버는 상인들 역시 지배층이었다는 말인가? 세금을 징수하는 관료도 지배층이고, 기술과 학문을 유지하는 사람들이야 사제들이었을 것 같지만. . 마야 제국(?)이 순식간에 붕괴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일 것 같다. 그걸 제국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신석기 동굴 씨족 원시인들의 자위행위지.

세력 확장이 없었고 계급갈등이나 권력의 분배 문제가 별로 없고 인디오들 전부가 교육을 받지 못해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고 다른 대륙과 긴밀한 무역을 하지 않아 우물 안 개구리였고 청동기도 없었고 세상에 그 흔해빠진 사랑의 시조차 기록에 남은 것이 없고 두 말 할 것도 없이 학문이나 기술의 전승도 없고 어둠의 일곱 신과 싸우는 태양신을 돕기 위해 인신공양이나 드리고 앉아 왕의 '신전'을 건설하는데 몰두해 있었다면 이 문명은 망해도 싸고 망해야 한다고 봤다.

마야 유적과 마야 유적지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AD 12~18세기 무렵까지 '찬란하게 이어졌다는' 마야 문명이 의외로 초라하고 한심하다는 것. 뭐가 찬란하다는 것인가. 대체 뭐가? 그 시기에 건너편 땅덩어리에 살고 있는 다른 문명권은 마야에 비하면 1000년은 족히 앞서 있었다. 마야 문명이 그럴듯하고 신비스러워 보이는 것은 새로운 문명을 발견한 고고학자들 눈에나 그렇게 보일 뿐이지, 정체된 문명, 정체된 사회, 내부적으로 소통조차 없었던....

너무 심하게 말했나? 흠. 박물관에 가서 친히 둘러보라. 그 시절까지 꾀죄죄한 토기들과 천 쪼가리들, 개나 소나 만들 수 있는 금세공품 밖에 안 보인다. '문화'가 실종되었고 '발명'과 '발견'이 없다. 도시에 수로를 만들었다지만 하천의 관계 시설을 만들지 않았다. 하천을 제어하면 대규모 농경이 가능함에도 대규모 농경을 하지 않은 것 같다. 식량창고가 있기나 했을까? 정글에 불 지르고 화전을 계속 하면서 움직여 다녔는데 그건 지극히 원시적인 농경이다. 열대다 보니 천문관측기술이 농경에 도움이 된 적은 없을 것이다. ·"$%"·$%"·$

남쪽 유적지의 따뜻한 바위에 누워 있다가 선잠에서 깨어보니 벌써 오후 4시. 사방에서 원숭이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해가 지고 있다. 유적지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차를 타고 산타 엘레나에 도착하니 오후 5시. 어젯밤 삐끼가 말해준 중국 음식점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양 많고 싸다길래... 그런데 음식점이 아니라 디스코텍이다. 왜 음식점 이름이 mi disco일까 궁금했었다. 중국인으로 보이는 주인에게 물으니 음식을 판단다. 메뉴판을 갖다준다. 음식점 맞군. 쵸우면과 맥주를 시켰다. 중국인이 운영하니까 정통 초우면을 먹을 수 있을 꺼라 내심 기대했는데 국적불명의 이상한 음식이 나왔다. 어떤 음식이든 칠리 소스를 뿌리면 맛있어지기 때문에 왕창 뿌렸다. ...... 짬뽕맛이 났다.

피곤하지만 과떼말라 시티에 갔다가 바로 안띠구아로 움직였다. 며칠째 제대로 잠을 못 잤다. 유적지에서 자고 유적지에서 세수하고 움직이는 형편. 차 시간이 많이 남아 광장에서 애들 농구하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플로레스나 안띠구아나 짐작대로 관광도시였다. 차 타고 오면서 안띠구아에서 일주일쯤 스페인어를 배워볼까 생각하다가 문득. 스페인어를 배워서 여행하려면 아랍에서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스페인어를 알게 되면 중남미인들과 아주 재미있게 놀 수 있다는데 그건 아랍도 마찬가지였다. 여행하러 왔지 스페인어 배우려고 온 것이 아니고, 다른 데에서는 하지 않았는데 왜 굳이 중남미에서는 하려는가... 하는 반성을 했다. 앞으로도 줄기차게 어려움이 이어지겠지만, 끝까지 게기자. 음... 그래도 치치까스떼낭고의 분위기가 정 좋으면 더 머물기 위해서라도 하는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까?

안띠구아에 도착하자 마자 커다란 화산이 눈에 들어왔다. 피곤해서 세 시간쯤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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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Guatemala

여행기/Guatemala 2003. 4. 11. 11:05
출발은 여섯시인데 다섯시부터 깨우고 지랄이다. 왜들 이리 부지런을 떠는가. 피곤해 죽겠는데. 샤워를 하려고 수도꼭지를 돌리니 물이 안 나온다. 머리가 젖은 채로 잤더니 심하게 뻗쳤는데... 하는 수 없이 피같은 미네랄 워터를 조금씩 부어가며 칫솔질과 세수를 했다. 250ml 밖에 안 썼다. 리셉션에서는 미네랄 워터로 세수했다니까 웃고 지랄이다. -_-; 잠이 덜 깨 거리를 나서니 마치 베트남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멕시코가 잘 사는 이유는(값비싼 여행지가 된 이유는) 이런 사소한 것들에 있는 것 같다. 부지런함.

비가 온다. 우기가 시작된 것 같다. 비가 아주 심하게 왔다. 잤다. 깼다. 멕시코 이민국에서 출국 수속을 마쳤다. 유속이 아주 빠른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강이 아무래도 멕시코와 과테말라의 국경을 가르고 있는 것 같다. 맥주캔이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강물 곳곳에는 작은 소가 형성되었다.

썰렁한 강 건너편에 도착하니 거기가 과테말라 이민국이란다. 내 비자를 굉장히 유심히 쳐다본다. 패스포트를 이리저리 넘겨본다. 코리아? 씨.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래봤자 어쩌겠냐. 비자 받았으면 그만이지.

과테말라행 편도 투어행을 잡길 아주 잘했다. 혼자서 빨렝게에서 이런 저런 교통수단을 알아보고 새벽 네시부터 차를 두 번 갈아타고 배를 타러 온 미국인은 사공이 건네주지 않으려 해서 반쯤 얼이 빠져 있었다. 투어팀은 강을 건넜지만 그는 300뻬소를 주고도 배에 사람이 찰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간신히 보트를 타고 다시 버스를 타기 위해 50꿰찰을 지불한다. 그가 소요한 총 경비는 400뻬소 가량, 투어가격은 250뻬소. 나같으면 보트 가격을 협상해서 100뻬소만 주겠다. 안 받으면 안 간다. 미쳤냐? 25분 배 타는데 무슨 비행기 타는 것도 아니고 300뻬소 씩이나 주게. 하여튼 가이드북의 괴이한 헛소리를 믿었더라면 고생할 뻔 했다.


국경을 넘어, 과테말라 이민국 앞.


아이들이 마을 공터에서 축구하고 있다. 떼거지로 몰려들어 인사를 한다. 서양것들은 애들을 애써 무시한다. 귀여운 것들, 인사성도 바르지. 누군가 갑자기 군바리식 경례를 했다. 답례를 하자 다들... 경례를... 왠지... 인도 깡촌이나 라오스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과떼말라에 오길 잘했다. 굉장히 친근감이 들게 생긴 고물차를 타고 역시 친근하기 짝이 없는 비포장도로를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달린다. 이렇게 차가 심하게 흔들려야 관절과 근육이 골고루 움직여 뻐근해지지가 않는다. 비포장도로와 똥차가 그래서 좋다. 친근감이 팍팍 우러나오는 소들이 마치 차를 처음 보기라도 하는듯이 화들짝 놀래 길에서 도망친다. 그리고...

화전을 보았다. 정글 곳곳에서 마른 불꽃과 연기가 치솟았다. 이것이야말로... 마야 역사 3000년 동안 변치 않았던 바로 그 농작법! 오오... 아. 감탄할 일은 아니지. 메소아메리카 문명권은 어쩐 일인지 청동기가 없었다. 청동기 문화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알래스카로 넘어간 후 갈라파고스처럼 고립된 것일까? 고립은 그렇다치고, 동광맥에서 불 한번 지펴보지 않았단 말인가? 이렇게 축복받은 땅에서.

국경을 건너자마자 이렇게 달라지다니. 재밌다. 25년 전에 과떼말라를 방문한 늙은 미국인 부부가 버스에 타고 있었다. 직업을 묻진 않았지만 고고학자 처럼 보인다. 마야 유적만 죽실나게 돌아다녔는지 모르는게 없다. 아는 게 없어서 질문할 것도 없었다. 그냥 어떻게 해서 마야력이 그렇게 정확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는지 아냐고 물으니 실실 웃으면서 자기는 모른다고 대꾸했다.

플로레스에서 내렸다. 국경에서 환전하지 않았다. 환율이 나쁘니까. 플로레스에 도착한 것이 4시, 은행은 문을 닫았다. 2시 반에 도착해야 할 차가 사람이 덜 찼다고 안 가고 개기니까 네시가 되서 도착한 것이다. 과테말라 돈이 없어서 숙소를 잡을 수가 없다. 게다가 배고프고 더위에 지쳐 갈증 나는데. 여기 저기 물어 인터넷 가게에서 환전. 다섯시. 가이드북의 숙소 정보는 믿을 수가 없어서 땀나게 동네를 돌아다니며 싼 숙소를 찾아보았다. 40꿰찰 이하의 숙소는 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무시했다. 과테말라는 인도같은 곳이다. 있다. 있을 것이다. 다섯시 반 간신히 체크인. 30꿰찰, 약 4불 가량. 숙소는 인도의 감방같이 생긴 그런 곳이었다. 길에서 만난 저렴하게 생긴 일본인에게 숙소 정보를 물으니 20불 짜리에 묵으면서 아주 만족한다고 말한다. 나와는 레벨이 다른 사람이었다. 해브 펀 하고 돌아섰다.

잘 사는 멕시코와 달리 과테말라 사람들은 인간 냄새가 난다. 헤헤 잘 웃고. 수도인 과테말라 시티가 위험한 곳이니 가지 말고 안띠구아로 바로 가란다. 고개를 끄떡였지만 가야 한다. 그에게 한국이 대체 어디 붙어있는지 지도를 그려 가르쳐 주었다. 자기들 땅보다 좁은 땅덩이에 4500만이 산다니까 몹시 놀란다. 과떼말라 총 인구가 2천만이란다. 알지. 잘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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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ghtscene

여행기/Mexico 2003. 4. 10. 10:25
칠레가 무비자 국가가 된 것을 말 그대로 '천진난만'하게 좋아했다.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상(FTA)이 곧 있을 예정이었다.

호텔이 무덥고 답답해서 밤거리로 나섰다. 노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핥아 먹었다. 맥주를 먹고 싶지만 뻬소화가 거의 바닥났다.

광장에는 갓 구운 빵을 구워 파는 상인들과 가죽 제품을 수공하는 공인들이 책상 하나만 들여놓고 작업중이다. 일 없이 깔깔대며 웃는 젊은이들이 광장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가족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 하루 일과를 끝마치고 광장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런닝셔츠 차림의 인부들, 과일이나 따말레나 따꼬스나 아구아 데 오차따를 팔고 있는 행상, 그리고 나무 사이로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매일밤 광장에서 보는 풍경인데도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할일 없는 여행자들도 광장에 나처럼 멍하니 앉아 있어야 할텐데 오늘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먼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였다. 어젯밤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비에 젖은 아스팔트를 보았다. 우기가 시작되려나 보다.

정작 중요하고 재밌는 순간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가라폰의 수정처럼 맑은 스노클링 포인트에서도, 대낮의 열기를 피해 나무그늘에 앉아 땀을 식히고 앉아 있을 때에도, 아니면 타이티섬을 주제로 한 고갱의 그림같은 밤의 낭만이 지금 내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는데도. 밀림의 고색창연한 유적지에서 울부짖는 원숭이들을 찍지 않았다. 빛과 구름의 기묘한 변화로 시시각각 변해가는 아도비를 쳐 박아 놓은 그 웅장한 건축물의 번쩍이는 모습도, 아름다운 퀘찰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마르코스의 모습도, 선주민들의 화려한 복식도 마찬가지고. 이런 광경들이 훗날 힘들고 괴로울 때 다시 생각날까? 그럴 리가 없다. 난 잊어 버리는 일이 전문인 새대가리다. 훗날 기억나는 인상이란 스스로 조작한 왠지 천당스러운 이미지 뿐일 듯.

내일 새벽에 떠난다.
바나나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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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ana Republic

여행기/Mexico 2003. 4. 9. 05:26
아끼느라 애를 썼지만 섬에서 이틀 쓴 돈이 80$ 가량 되었다. 멕시코에서 펑펑 쓰는 돈을 생각하면 500$이 아까워서 안 간 이라크 생각이 절로 났다. 미국의 침략군이 바그다드를 부수고 있어서 더더욱 속이 쓰렸다. 이제 다시는 옛 바그다드를 볼 수 없을 것만 같다.

깐꾼으로 돌아가는 느린 페리는 15n$ 밖에 안 했다. 1시간 45분 후에 출발. 45분 소여. 느린 걸 타도 되지만 버스 터미널에서 버스 시각을 확인해 보지 않아 일단 빠른 페리를 탔다. 35n$, 25분 소여. 바보.

가는 길에 카리브해의 연초록색 물결을 바라보았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러고보니까... 물이 별로 안 짰다.


7.30pm 빨렝게행 차표를 끊고나니 할 일이 없다. 배낭을 맡기고 끝내주는 카리브 연안에서 여자들 몸매나 구경할까.. 하다가 짐 맡기는 데 7시간에 35n$, 허그덕. 남은 돈이 얼마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뙤약볕에서 배낭을 짊어지고 싼 식당을 찾아 방황하다가 가장 싼 메뉴를 주문해서 식탁에 있는 것들을 남김없이 다 먹고 시간이 펑펑 남아 인터넷 좀 쓰다가 버스 터미널로 돌아왔다. 6.30pm 빨렝게행 버스, 차장에게 타도 되냐고 물으니 타란다. 한시간 일찍 도착하면 빨렝게에서 바로 과테말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밤 늦게 메리다에 잠시 섰다. 5분간 정차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알아들은 나 자신이 신기했다. 서당개 삼년이면... 이런 생각할 때가 아니지. 재빨리 버스를 뛰쳐나가 터미널을 지나쳐 편의점에서 4.5n$짜리 컵라면을 샀다. 뜨거운 물이 없다. 급한 대로 찬 물을 붓고 전자렌지에 넣고 초조하게 3분을 기다렸다가 떠나려는 버스를 가까스로 탔다. 컵라면을 후루룩 들이켰다. 맛있다. 배가 고파서 더더군다나.

아침에 도착하자마자 플로레스행 투어편부터 알아봤다. 투어 아니면 '미친' 가이드북이 설명한, 해골 복잡하고 돈은 돈대로 드는 이상한 코스를 택해야 한다. 아쉽게도 내일 아침 6시에 출발한단다. 돈을 세어 보았다. 한푼이라도 아껴야 한다... 투어비와 숙박비를 빼면 50n$가 남았다. 값싼 식사 한끼하고 내일 먹을 먹이를 구하면 딱 떨어진다. 바나나를 잔뜩 사자. 바나나는 영양가가 풍부하지. 배도 부르고. 핫핫핫.

그러다가 빨렝게 유적이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50n$이면 입장권과 왕복 차비를 합친 것보다 1n$이 많다. 여차저차해서 사정하면 1n$쯤은 깎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니까 그러면 밥을 못 먹는구나... 바보. 밥값을 조금 아껴서 10n$만 인터넷에 쓰기로 했다.

갈 시간이다. 과떼말라가 예전에 악명높은 'banana republic'이었지. 바나나를 사서 숙소에 돌아가 과떼말라의 루트나 잡으며 여행지에 관한 꿈을 꾸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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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la Mujeres

여행기/Mexico 2003. 4. 8. 04:43
옷가게에서 반바지를 살 때 50% 밖에 깎지 못했다. 오래 여행하고도 이 모양이다.

해변에서 면 팬티만 입고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와 음부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난 어떤 토플리스 걸을 쳐다보았다. 뚜러지게 그 부위만 쳐다보왔다. 여자가 다가와 뺨을 때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랍에 있다가 헐리웃의 거리에서 판매하는 변태용 란제리를 보고 화들짝 놀랐고,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동양 여성이 해변에서 상체를 벗은 모습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왜 그럴까. 혹시... 크기가 비교되서?

카리브해는 명성 그대로였다. 태국의 여러 해변을 돌아봤지만 이런 데는 없었다. 특히 가라폰 리조트. garaffon 리조트에서 오랫만에 스노클링을 했다. 물결은 겁이 날 정도였지만 산호초 사이에서 움직이는 형형색색의 물고기를 쫓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라이프 자켓을 입었음에도 50-80cm 높이의 파도가 수시로 목젓까지 넘실거려 공포스러웠다. 발 밑은 12미터 깊이의 너무나 맑은 바다속. 파도에 휩쓸릴 일은 없겠지만 산호초에 부디치며 그걸로 끝장이다. 일렁이는 파도와 적나라하게 밑바닥이 드러난 바다가 무서웠다. 일본인 남녀가 바다를 처량하게 바라보더니, 스노클링은 안하고 그냥 돌아간다. 걔들도 무서운가 보다. 장비 대여료가 비싼데... 입장료와 스노클링 장비 대여한 것만도 30달러 정도여서 허걱했다.

싸들고 간 도시락을 까 먹었다. 오렌지와 튀긴 또르띠야. 왠지 처량하고 청승 맞았다. 유원지에 놀러온 멕시칸들은 15달러나 하는 입장료와 10 달러나 하는 장비 대여료를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내고서 채 한 시간도 안되어 다 놀았다고 돌아간다. 30달라가 아까워서 무료시설을 악착같이 이용했다. 리조트를 나올 때는 스노클을 기념으로 줬다. 의외의 기쁨이긴 한데, 들고 다니기가 영...

스노클링 한다고 파도 속에서 무의미하게 허우적 거리다가 해먹에 누웠다. 평소에는 읽지도 않는 가장 재미없는 소설을 읽었다. 그래야 잠이 잘 왔다. 눈부신 햇살과 바람이 야자수를 움직였다. 깨보니 하늘이 붉다. 가라폰에 놀러왔던 사람들은 다 돌아간 것 같다. 터벅터벅 20분을 걸어서 버스를 기다려 타고 숙소 근처로 돌아왔다. 살이 노릇노릇하게 탔다. 오이를 사다가 intensive skin care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드리프트 다이브가 유명하다는데 다이브샵들이 문을 닫아 가격조차 물어보지 못했다. 대신 해변에서 죽여주게 잘 빠진 여자를 보았다. 와...

벨리스를 경유해(이런 나라가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과떼말라로 들어가려면 돈이 꽤 많이 들었다. 제대로 점검해보지 않은 탓이다. 가이드북에는 되는 것처럼 적혀 있었지만 믿을 수가 없다. 가이드 북 보고 계획을 짜다가 책을 확 집어 던지고 싶어졌다. 횡설수설 하고 있다. 8시에 배가 떠난다는데 6시에 출발해서 4시간 후에 도착하는 버스를 타라니. 정신이 나간건가? 경로가 하도 복잡해서 머리가 아프다. 새벽 4시부터 시간에 쫓기면서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툭하면 제 시간보다 일찍 떠나는 배를 타고(배를 놓치면 모터보트 운전수에게 부탁해 그 배를 쫓아 가란다) 그렇게 국경을 건넌다? 국경을 건너도 어느 것 하나 버스 시간이 맞질 않았다. 나흘에 걸쳐 잠도 못 자고 쓸데없는 개고생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총 경비가 싸지도 않다. 이쪽 루트는 포기했다.

테러 공포: 떼죽음에 대한 미국식 히스테리. 슬럼가에 살고 있는 흑인들보다 더 무서워 보인다. 누군가는 으슥한 거리에서 총을 맞겠지만 내가 조심하면 안 당하던 상황과는 다르니까. 랩과 테이프, 마이크로웨이브와 항생연고가 그들의 대책이었다 -- 미국 여행자가 괴기스러운 얘기를 들려주었다. 자신이 편지를 받으면 마이크로웨이브로 살균한 후 개봉한다는 것이었다. 왠간한 미생물은 다 죽는다고 한다. 사실 그것도 의심스러워 양 손에 항생연고를 듬뿍 바른다나. 그전까지만 해도 안전장치를 제거한 전자렌지에 시끄러운 옆집 개나 고양이, 때로는 자기 머리를 넣고 폭발시키는 아이디어가 가장 신선했었다.

뉴스를 보니 미국시민들은 생화학무기 테러를 조기 경보할 수 있는 식물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그동안 뭘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감마선 복사가 시작되기 10분 전에 그것을 감지한 후 한국어로 말해주는 영특한 유전자 조작 바퀴벌레라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정 안되면 핵폭발을 '기'로 막을 수 있는 애국 기공사라도 키워야지 않을까 싶다. 만나는 녀석마다 북핵 문제를 떠들어서 골치가 아프다.

길을 가다가 아미고에게 담배 한 대만 달라고 했다. 자기는 마리화나 밖에 안 피운다고 주장했다. 살테니까 꺼내보라고 말했다. 질이 나쁘면 소비자 보호원에 신고할 생각이었다. :) 경찰이 반쯤은 정신이상자 무리였다. 왠간하면 감방에 쳐박아놓고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팬 후 벌금을 뜯어낸 다음 무혐의로 풀어준단다. 사설 경호원들은 더 심했다. 그들은 산탄총을 자기 애인처럼 사랑했다. 옆구리에는 폼으로 정글칼을 차고 시가전을 한다는 자세로 민간인을 밀쳤다. 하지만 천진한 외국인이 담배 한 대 달라면 줬다. 아마 내가 여자였으면 담배 뿐만이 아니고 몸과 마음을 다 바쳤을 것이다. 그럼 담배와, 몸과, 마음을 날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맥주에 레몬즙과 소금이면 족했다. 이제는 비웃을 수 있다. 데낄라 마실 때 잔에 소금테를 두르고 안주로 레몬을 먹는다고? 세상이 바뀐 줄 모르는 촌뜨기들이나 하는 짓이지. 피식, 콧방귀를 끼고, 맥주에 레몬즙을 짜 넣고 소금을 타서 잘 저어 마셨다. 이게 2000년도 스타일이다. 스타일은 그렇다치고 맛이 좀 얼얼하다.

갑자기 마르코스를 만나보고 싶다. 복면을 뒤집어 쓴 그의 사진을 산 끄리스또발의 버스 터미널에서 우연히 보았다. 내 나이 또래였다. 그는 혁명가였다. 나는 백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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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 SARS 걸린 사람들이 없는게 고추와 마늘 때문 아닌가? 워낙 독한 사람들이니... 마늘이 먹고 싶다. 돼지고기 먹을 때마다 마늘 생각이 나고는 했다. 어젯밤 햄버거를 먹을 때도 절인 고추가 없었더라면 다 먹지 못했을 것이다.

늦게 일어났다. 늦게 잤으니까. 급한 김에 노점 음식을 두 차례 허겁지겁 먹고 뱃속을 미리 물로 가득 채웠다. Chichen Itza로 가는 2등 버스표를 끊었다. 에어컨을 켜도 버스 안은 무더웠다. 입장료 87뻬소(8$). 무시무시하다. 그 돈을 다 내는 멕시코인들도 무시무시했다. 정글을 뚫고 유적지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런 시도를 할 생각을 못 한 것은 입장권이 두 개이기 때문인데... 하나는 손목에 채우는 것이었다. 우스말의 입장권도 마찬가지였는데 한 서양인은 요행을 바라고 우스말의 입장권을 달고 다녔지만 치첸이사의 입장권과 색깔이 달랐다. 사방에는 큰 눈이 부리부리한 유적지 관리인들이 깔려 있었다. 참, 어렵다.

열대에 오니까 짐 무게가 1.5배는 더 나가는 것 같다. 오후의 햇살은 기세등등했다. 삼십분도 안되 팔과 목덜미가 타들어갔다. 바람이 불어줬지만 열풍이라 땀을 식히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유적을 관람하면서 위안이 되었던 것은 옷을 거의 안 입은 굉장한 미녀가 남자들을 이끌고 유적지를 종횡무진 누비는 모습을 시종일관 볼 수 있었던 점이었다. 음... 그런 여자를 졸졸 따라다니는 여러 메뚜기같은 남자들 중에 하나가 되었다. 유적의 보전 상태가 훌륭했지만 여자들의 모습은 더더욱 훌륭했다. 어느새 마야 유적지에 꽃이 잔뜩 피었다. 뜨겁고 강렬한 햇살이 여자들의 옷을 벗겼다. 사실 안 입은 것만 못했다. 입장료가 하나도 안 아까왔다. 그러고보니까 발기가 안되는 늙은이들이 햇볕 정책을 싫어했던 것 같다.


El Castillo. 보고 뻑 가다.

멕시코 사진 다섯번째


유적지를 돌고 나온 시각이 4시. 버스 정류장 앞에는 배낭여행자로 보이는 친구들이 잔뜩 있었지만 Cancun행 2등 버스를 타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어? 이상한데? 한번 들러볼까 했던 발라볼리드 근처를 지나친다. 발라볼리드에서 5km 가량 떨어진 멕시코 교도소를 지나쳤다. 그 교도소의 수감자들이 만들어 교도소가 판매하는 해먹은 우수한 품질을 자랑한다던데... 들를 껄 그랬나.. 왠지 아쉽다. 유카탄 시골은 인도의 촌락처럼 허름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탓일 것이다.

지평선 위로 해가 졌지만 여전히 정글 사이로 뱀처럼 가늘게 뻗어있는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손님이 나 밖에 없었다. 맞은편으로 아주 가끔 차가 한 대씩 지나쳤다. 분위기가 영 을씨년스러워 잘못 탄 것인줄 알았지만 운전수가 맞단다. 검은 아가리를 쫙 벌리고 있는 울창한 정글을 버스가 미친듯이 달려갔다. 촌락의 불빛조차 안 보인다. 저녁 9시쯤 되어서야 깐꾼에 도착했다. 안도감에 담배를 연거푸 빨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바글거리는 유스호스텔에 짐을 내려놓았다. 멕시코에 온 후로 유스호스텔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그만 방에 침대를 여덟 개쯤 들여놓아 비좁아 터진데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사방에서 부스럭거려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우스말에서 보았던 한국인을 다시 보았다.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 아가씨였다. 어쩌면 과테말라에서도 다시 보게 될지 모르겠다. 맥주 한 잔 하고 도미토리로 기어가 샤워만 간신히 하고 눈을 붙였다.

호스텔에서 아침이랍시고 주는 것이 몇 안되는 빵쪼가리 달랑 그것 뿐이다. 배가 고파서 편의점에서 라면을 사 먹었다. 국물은 고춧가루가 잔뜩 들은 '한국맛'이지만 면발이 영 꽝이었다. 물어물어 이슬라 무헤레스로 가는 배를 탔다. 별 도움이 안되는 가이드북을 제끼고 숙소를 전전하며 가격을 맞춰봤지만 150뻬소 이하의 싱글은 더 이상 없는 듯 했다. 섬에 들어왔으니 이제 나갈 때까지 본의 아니게 탐욕스러워진 상어들에게 뜯어 먹히는 일만 남았다. 아미고 삐끼가 맥주 사달라고 조른다. 망할 놈, 니가 사주면 덧나냐? 여기도 형광등이 나갔다. 매니저와 함께 형광등을 갈았다. -_-

마돈나가 노래했던 '라 이슬라 보니따'가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임을 어느날 갑자기 알게 되었다. 이슬라 무헤레스의 무헤레스는 화장실에서 많이 본 단어였다. 무헤레스는 여자라는 뜻인데, 여자 화장실에 몇번 들락거린 후로는 절대로 잊지 않게 되었다. 에스빠뇰로 남자는 뭔지 모르겠다. '남자'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슬라 무헤레스, 여자의 섬. 1500년에 대량 출토된 Ixchel 여신의 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이름 때문에 뜯어먹힐 각오를 하고 섬에 들어왔다.

하얀 백사장과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카리브해의 해변이 시원스럽다. 해변을 걸었다. 여기저기 가슴을 축 늘어뜨린 채 자고 있는 서양 여자들이 보였다. 봐도 그저 그랬다. 하도 많이 봐서... 랄까. 그것도 보니따 스러운 것만. 80뻬소 짜리 아바나산 시가를 물고 30 뻬소나 하는 마르가리따를 홀짝이며 60뻬소 짜리 비치 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카리브해에 가면 꼭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간간이 물속에 들어가거나 살을 태우며 잤다. 더 태우는 것은 끔찍해서 파라솔 아래에서 편히 누워 있다가 해가 떨어질 무렵 자리에서 일어섰다.


Isla Mujeres의 북부 해변

놀랍게도 깐꾼이나 이슬라 무헤레스나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꽤 되었다. 무심결에 튀어나오는 영어를 알아듣는다. 하긴, 분위기가 미국인들 휴양지나 다름없어 보였다. 휴양지이므로 맥주 한병 살 때도 허걱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섬 휴양지라도 빈틈은 있게 마련이다. 섬에 살고 있는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 가게들이 있을테니까. 태국에서도 섬에서 지역주민들이 애용하는 식당으로 근근이 살아남았다. 태국의 해변 만한 곳은 지구상에 없을 것 같다.

해변의 마야 유적지인 뚤룸에는 가지 않기로 했다. 입장료가 무섭다. 그래도 멕시코 내의 중요한 마야 유적지는 다 본 셈이고(Mayapan을 안 갔지만) 내가 마야 문명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않음을 확인했다. 서점에서 이 지역의 문명에 관한 책을 잠시 읽다가 내려놓은 것과 무관하지 않을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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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xmal

여행기/Mexico 2003. 4. 5. 12:57
형광등이 나갔다. 수리하려고 불렀다. 언어가 안 되니까 수화를 사용했다. 형광등이 너무 높은 곳에 달려 있어 우리는 아주 단순한 문제로 추상적이고 애매한 대화를 나눴다. 일단은 현상을, 그 다음에 원인을, 그리고 해결 모색을 위한 방법을 탐구하는... 마치... 천정에 걸려있는 바나나를 따먹기 위해서는 궤짝이 몇 개나 필요할까 라는 문제로 골치를 썩이는 원숭이들처럼.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이런 '표준화된 절차'나 '공통 관심사'가 아니라면 나와 지배인 사이에 대화가 통할 전망은 없어 보인다. 최근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은 그래서 habla inbgles?(do you speak english?)와 no entiendo(can't understand) 그리고 no habla espanol(i can't speak spanish)였다.

언어가 안 통해도 외국인 아줌마와 30분 대화한 것 만으로 그 집안 내력을 파악하는 한국 여자를 보고 기가 막혔던 기억이 났다. 여자들은 인간관계를 삶의 핵심적인 요소로 파악하는 것 같다. 아줌마 둘이 모이면 그들이 보유한 전력을 상대방에게 노출시키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그들 사이의 원순적인 공통 관심사이기 때문인 것 같다.

우스말 Uxmal 유적지로 가는 길에 에스파뇰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한국인을 만나 동행했다. 그에게 세계를 간다 멕시코와 중미편을 빌려 보았다. 숙소 정보는 영 떡이었지만 깨알같은 글자로 1200페이지나 하는 내 가이드 보다 유적을 설명하는 수준이 나았다. 세계를 간다 번역판을 읽고 여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리는 얘기는 아니고, 정말 그렇게 부실한 정보로도 여행 잘 해 나가는 것이 신기하다. 여행을 11개월째 하고 있지만 그들이 나보다 훨씬 여행을 잘 하는 것 같다.

우스말 유적에 관해 그다지 아는 것이 없어 돌덩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분위기를 즐겼다. 360도 사방으로 정글이 지평선까지 뻗어 있었다. 빨렝게를 본 경험을 바탕으로 단언컨대 우스말 유적이 한 수 위였다. 어쩌면 마야 유적에 관해 얘기할 때 사용하는 용어인 전고전주의와 후고전주의의 차이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 유적의 규모는 비교적 작았다. 작은 유적인데 87뻬소나 받아 먹었다. 그러고도 가장 중요하고 정말 정말 멋지게 생겨 반드시 기어 올라가봐야 될 것처럼 생긴 마법사의 신전(soothsayer니까 예언자쯤?)에 기어 올라가지 못하게 막았다. 인류의 공동 유산인데, 계단이 가파라서 누군가 기어오르다가 떨어져 죽었건 말건 왜 못 들어가게 하냔 말이냐. 왜 호기심을 키워놓고 본전 생각이 나서 관광 수입에 혈안이 된 멕시코 정부를 저주하게 만드냔 말이다. 음. 흥분했군. 빨렝게에서도 기록의 신전에 못 올라갔는데...


마법사의 신전 Mexico 사진 4번째 페이지


마법사의 신전이라고 누가 적어놨는지 모르겠다. 예언자가 맞을 것이다. 예언자도 아니고 사제가 맞을 것 같다. 정글 한 복판에 혼자서 고고하게 서있는 그 신전 꼭대기에서 누군가가 천체의 흐름을 읽고 정확한 달력을 제작했을텐데 그건 최고위 사제들만이 가진 고급 정보에 속하는 것일께다. 고급 정보? 그러고보니 당시에 몇 년 마다 중미 전역의 사제들이 모여 일자 수정에 관한 역법 회의를 했다는 말도 본 것 같다. 그런데 마야인들이 정밀한 달력을 제작하게 된 이유가 짐작이 안 간다. 치아빠스를 비롯한 유카탄 반도의 마야 문명의 전통적인 농경법은 대규모 경작을 하지도 않았고 날씨, 기후와 유달리 깊은 관계를 지니지 않았다. 정글에 불 지르고 땅 파서 옥수수알 심어 놓으면 잘 자랐으니까. 기거나 날거나 걸어다니는 단백질 수집도 용이한 편이고. 일년에 겨우 0.0002일의 오차 밖에 없는 초정밀 달력을 만들어야 했던 이유는 그들의 역법 체계에서 52년 마다 한번씩 세계가 바뀐다는 말도 안되는 개뻥을 사제들이 민간인에게 강요하기 위해서 였을까? 아무리 신앙심이 견고한 사람이라도 52년이 지났음에도 어제와 오늘이 같음을 알텐데 그런 뻥이 통할 리가 없다. 하지만 52년마다 짓던 신전과 문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해간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자연현상의 경이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을 예측할 수 있는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사제의 능력에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분되지 않을 테니까? 어쨌거나 답답한 마야 학자들이 결국 외계인론으로 얘기를 몰고 가는 것이 수긍이 간다. 게다가 낭만적이잖아.

사제들의 '횡포'(구체적으로 어떤 횡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배자는 늘 포악했으니까)에 저항하는 유카탄 반도의 마야인들이 수천년부터 그들의 피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지독한 혁명 유전자 덕택에 사제 계급을 싹 쓸이하고 스스로 분서갱유를 시도하여 찬란했던 마야 문명이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춘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야인들이 계급사회를 이루었고 당시 로마에서나 있었던 매우 훌륭한 관계수로 시스템을 운영했으면 빨렝게 유적에서는 steam bath의 흔적마저 있었다. 돌을 달구고 그 위에 물을 뿌려 증기탕을 만들었다. 그러니 로마가 최고인줄 알았던 우물 안 개구리 제국주의자들이 경악할 수 밖에 없었을테지.

마야 문명이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현지인과 친해진 어떤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되었었다는 글을 읽었다. 원주민은 그들이 신성시하는 채색화를 고고학자에게 보여주었는데 그때까지 바위에 새겨진 글자는 있었지만 문서로 남겨진 기록이 없었는데 이집트의 꽃게 기어가는 듯한 회화와 동일한 마야 회화를 보았다는 얘기. 그레이엄 헨콕이던가? 신의 지문? 별로 내키진 않지만 초고대문명이라는 매력적인 가설을 만들었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헨콕 못지않게 '과학'과 '경이'를 빌미로 사기치는 한국의 어떤 집단 때문에 영 정은 안 가는 편이지만.

만일 그들이 정말로 정밀한 달력을 만들기 위한 천체 관측을 할 수 있으려면 몇 가지 필수적인 기구나 지식이 필요하다. 삼각법이나 삼각법과 대등한 원의 성질에 관한 지식, 육분의, 기본적인 천문도, 무엇보다도 시계. 0.0002일의 오차를 가진 달력을 만들었다는 얘기는 많이 봤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서 오차가 그것 밖에 안 나오는지 설명하는 글은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세차운동까지 알고 있거나 지동설과 비슷한 천문관을 가지고 있었을텐데, 그런데 왜 유적지에서는 마야의 전설에 등장하는 뱀 대가리와 새 대가리는 그렇게 많으면서 별들이 신성하게 반짝이는 부조는 없는가. 아... 금성 사원은 있구나. 하지만... 하다못해 점성학이라도... 그리고 수 체계는 물론이고 계산 체계와 측정 도구가 있어야 할텐데 마야 유적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에서 황금으로 수를 놓은 멋지게 생긴 천구도나 천문관측기구는 본 적이 없다. 서기 600년경의 아랍세계에는 있었다. 기껏해야 왜 털없는 짐승의 이름을 털있는 짐승인 것처럼 써놨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알고보니 춘분때 생기는 그림자 모양이 그 짐승의 털모양이었다는 류의 얘기로 마야인들이 얼마나 영악했는가를 설명하는 기괴한 글이나 있고... 시간을 들여서 조사해 볼 필요를 느꼈다. 생각보다 대단치도 않은 건축물과 얼마 안되는 기록으로 어떻게 그들의 수학이랄지 산법이 나왔는지. 인도보다 먼저 0을 발명했다... 계산도 했는가? 그들은 분수를 사용하지 않았다는데? 무리수도 알았을까? 별 기록이 없는데 혹시 어디서 '발명'된 낭만적인 얘기들 아닐까? 혹시 스톤헨지류의 지어낸 이야기들? 스톤 헨지에 외삽해 놓은 자료가 그 돌무더기보다 더 많듯이... 돌덩이를 쪼개는 도구가 돌덩이 밖에 없던 작자들이 어떻게 해서 산법을 개발했는가?

마치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외계인설로 몰고 가는 것 같군. 외계인들이 2000년 후면 완전히 부스러지는 환경친화적이고 멋진 전자시계와 계산기를 줬다.

아니면 치사하게도 지들만 사용하고 노예로 멋대로 부려먹다가 재미가 없어서 떠났다. 음. 미솔하를 보러 간 것도 사실 프레데터가 그런 비슷한 류의 주제를 가지고 만든 흥미 만점의 sf액션 스릴러였기 때문이다.

수만 년 동안 지구는 외계인들의 레저용 사냥터였다. 하지만 무분별한 학살을 지양하려고 지구의 유카탄 반도 지역만 자유 수렵구로 지정해 놓았다. 그래서 외계인들은 유카탄 반도의 마야인들을 사냥하고 살을 발라내 뼈를 수집하여 서재에 걸어두었다. 지구에서의 짧지만 흥미로웠던 휴가을 되새기면서 눈가위가 뻥뚫린 신기하게 생긴 동물의 두개골을 바라보며 흐뭇해 하는 것이다. 마야인들이 워낙 미개한 나머지 위험이 없는 일방적인 사냥 내지는 학살의 재미가 시들해질 무렵, 일부 사냥꾼들은 마야인들에게 한시적으로 도구를 쥐어주고 사냥의 재미를 높였는데 몇 차례 사고가 생긴 후 외계정부가 그런 일을 자행한 불법 사냥꾼들을 적발해 엄벌에 처하고 유카탄 수렵구를 영구히 폐쇄했다. 외계인들이 떠난 후에도 마야인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혀 52년 마다 거주지를 옮겼다. 아니 충분히 정착해 살 수 있었음에도 정글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쫓기는 생활을 했다. 그리고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뚜러지게 쳐다보며 외계인들이 쳐들어 오는가를 감시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의 문명과 삶은 전적으로 이렇게 하늘을 목이 부러져라 관찰하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었다. 잉카 제국이 있었던 나스카 평원은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외계인들의 휴양지 였기 때문에 학살을 모면했으며 비행장을 건설하여 멀리서 휴가 온 외계인들을 맞았다. 외계인은 두 종족이었다. 하나는 퀘찰이라 불리던 새 모양의 날개가 달린 종족이었고 다른 하나는 뱀 모양을 한 파충류였다. 뱀 모양을 한 외계인은 지구의 고대 인류를 발전시키는데 흥미가 있었지만, 새 종족은 지구 환경 보호 차원에서 그것을 적극 말리고 있었다. 뱀 종족은 마야인들에게 공공연하게 무기를 쥐어 주기도 했다. 훗날 환경보호자들이 승리하고 조류는 미화가 되어 천사가 되었으며 뱀은 미개한 지구인들에게 악마로 불리웠다. 그들은 전세계 모든 문명권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신화적인 상징이 되었다. 심지어 멕시코 국기는 이들 두 외계 종족의 정치적 분쟁을 상징하는 그림을 국기에 새겨 놓기도 했다.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 였던 마야인들은 그들을 소름끼치도록 생생하게 묘사했다. 박물관에 가면 그들의 모습을 지금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두개골 수집을 본 딴 마야인들의 토착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우하하하!

메리다 시내에서 네 번이나 인터넷 까페에 들렀다가 컴퓨터들이 부적절해서 돌아섰다. 다섯번째 가게에서 사용을 마치고 나오니 한 시간에 20뻬소란다. 주위를 둘러 보았다. 무심코 호텔에 들어와서 인터넷을 사용했던 것이다. 한 시간에 12뻬소씩 하는 인터넷 까페를 놔두고 왜 이런 곳에 들어왔을까... 소름이 끼쳤다.

새벽 세시가 되어서야 모기에 뜯기면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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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ida

여행기/Mexico 2003. 4. 4. 11:08
체크아웃 하려고 내려와보니 주인이 없다. 짐을 맡기고 나가봐야 하는데... 한 시간쯤 멍하니 기다리다가 더 늦으면 안될 것 같아 나왔다. 버스 터미널에서 Merida행 표를 끊고 짐 보관소에 배낭을 맡기니 10시간에 30n$. 눈물이 나왔다. Misol-Ha로 가려고 콜렉티보를 알아보러 땀나게 돌아다녔다. 아직 12시 이전이라 그런지 투어 차량 밖에 없었다. 미솔하 편도가 30n$, 왕복이 60, 투어 티켓이 2군데 포함해서 100. 고작 30분 밖에 안 걸리는 곳에 있는데 30이라니... 그렇게 한 시간을 돌아다니니 지쳤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다. Misol-Ha와 Agua Azul을 가는 투어 버스를 탔다. 담합이라도 한 것인지 가격이 다 똑같다.

미솔하에서 30분 쯤 꽤나 멋진, 시원스런 폭포 구경을 했다. 어디가 프레데터를 찍은 부분인지 모르겠다. 아구아 아술로 향했다. 졸립다. 봉고는 40킬로만 넘으면 항공기 뜨는 소음이 났다. 투어에 참가한 사람은 나를 포함해 남매 지간이라는 두 캐나다 여자애들 뿐이었다. 둘 다 유창한 에스빠뇰과 프랑스 어를 하지만 의외로 영어는 더듬 거렸다. 그중 동생은 영 수줍어서 말도 안 하고 있었다. 내일 과떼말라의 띠깔로 간다고 말했다.


아구아 아술에서 캐나다 여자애들은 물놀이하고 있는데 수영팬티가 없어서 물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얼쩡거렸다. 혼자 라면 어떻게 그냥 들어가겠지만 여자애들 보는 앞에서 민망하게 쇼는 못하겠다. 물이 드러워서 못 들어가겠다고 우겼다. 베트남의 한 도미토리에 두고 운 수영팬티가 간절하게 생각났다.

미솔하의 폭포만 보려고 했는데 아구아 아술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미솔하 폭포는 30분, 아구아 아술에서 4시간을 머무는 투어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 돌아오는 길에 멕시코 친구를 태웠다. 워낙 손님이 없어서 운전수가 태운다고 했을 때 별 반대가 없었다. 그는 배낭 하나 달랑 매고 멕시코를 횡단하고 있었다. 에스빠뇰을 기차게 잘하는 두 캐나다 여자애들이 간간이 통역해 주었지만 언어 차이로 인한 상대적인 소외감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멕시코 친구를 보니 젊은 시절 아르헨티나를 여행했던 체 게바라가 생각났다. 저 친구도 수년 후 혁명가가 될지 모를 일이다. 음. 물론 체 게바라처럼 아름다운 얼굴과 뛰어난 머리... 가 뒷받침 되어야 겠지만...

아구아 아술의 폭포 옆에서 빈둥거리는 동안 향후 일정을 궁리했다. 빨리 움직이고 싶다. 하지만 몸이 따라줄지 모르겠다. 빨렝게 유적이 자꾸 눈에 아른거렸다. 다시 가봐도 괜찮을 곳 같다.

버스 시간은 밤 11시 45분. 투어가 오후 6시에 끝나 6시간 동안 할 일이 없다. 할 일이 없으니까 통 안가던 바에 들어가 맥주를 홀짝이며 시간을 보냈다. 바람은 선선하게 불어오고 신나고 요란한 멕시칸 음악이 흘러 나왔다. 손님은 없었다. 거리에서 가게들이 하나둘 씩 문을 닫는 모습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몽사몽에 깨어 메리다에 도착. 첫번째 호텔을 찾았으나 문을 닫았다. "See you in Winter Season!" 터덜터덜 걸어 두번째 게스트 하우스를 잡고 샤워하고 우스말에 갈 계획을 세웠다. 찬란하고 뜨거운 유카탄의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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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enque

여행기/Mexico 2003. 4. 3. 10:34
마야 유적지로 간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 얼른 세수를 마치고 막 출발하려는 꼴렉티보를 손짓해서 세우고 잠시 기다리라고 소리친 후(모멘또! 모멘또!) 바나나를 사서 올라탔다. 기분 좋은 아침이다. 햇살은 깔끔했고 날은 덥지도 춥지도 않다. 여행자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꼴렉티보에 탄 사람은 나와 아줌마 한 명 뿐이다. 매표소에서 학생인데 할인 좀 해달라고 해봤지만 나쇼날 nacional 이라고 생글생글 웃을 뿐. 멕시코 국내 학생증이 아니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입구에 그 유명한 석관 부조의 모조가 전시되어 있었다. 우주선을 타고 날아가는 죽은 왕의 모습이 새겨진 부조로, 마야 문명을 아주 신비롭게 각색하는 사람들의 주 테마 중에 하나. 진짜를 봐야지 아무렴 하고 무시하고 지나갔다가, 후회했다. 유적지는 물론이고 박물관에도 원본을 전시하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무척 기대했는데. templo inscripcion에도 줄을 둘러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아. 가장 중요한 신전인데... 문 닫을 시간 쯤에 관리인에게 싸바싸바하면 살짝 들어가게 해 준다고 가이드북에 적혀 있었다. ...... 그냥 말지.

유적지는 정글 한 복판에 있었다. 단체 관광객 몇 팀 정도가 소란스러웠을 뿐 대체로 평화스러워서 왕의 무덤에 앉아 싸들고 온 바나나와 망고를 펼치고, 바나나와 망고를 까먹고 행복해진 나무늘보처럼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유적지 위로 매가 날고 있었다. 저 멀리 아득한 정글 너머로 지평선이 보인다. 궁전에서 30분, 그리고 태양의 신전에서 일없이 한 시간을 보냈다. 울창한 밀림이 그늘을 드리우고 시원한 바람이 사이사이를 샅샅이 지나갔다. 좋다.


Temple of the Cross, 내 앞으로 정글 속에 푹 파묻힌 궁전이 보인다

중앙 광장의 궁전을 중심으로 한 구조물들은 그렇다치고 정글 곳곳에 오솔길을 따라 널려있는 유적지를 돌아다닐 때는 기분이 그럴듯 했다. 마침 사람도 없었고, 있는 사람들이라봐야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메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마야의 후손들'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기도 했다. 이 아줌마는 구르포 에이로, 저 할아버지들은 구르포 비로, 미국인 팀은 지옥으로. :)

망원경을 들고와 정글 속에서 요사스럽게 울고 있는 열대의 새들을 관찰하는 프랑스인들이 있었다. 나도 보고 싶은데... 뭔가 열심히 프랑스어로 논쟁을 벌이는 중이라 끼지도 못하고... 종종 망원경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앗. 그러고보니 망원경이 있으면 망원렌즈를 안달아도 되는 것 아닌가? 망원경의 접안 렌즈에 카메라를 바짝 대고 찍으면 되잖아. 음. 아니군. 상이 많이 흔들리겠구나. 내 것 하고 똑같은 gps를 들고 유적지를 헤메는 사람도 있었다. 그냥 야생의 감각과 개코로 길을 찾았다.

정글 속에서 뭔가가 자꾸 목덜미와 팔등을 물어 간질간질하다. 모기 같지는 않고, 대체 뭘까. 떡대좋은 아줌마가 긁지 말라며 사래질을 한다. 뭐라뭐라 그러는데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냇물에 얼굴을 씻었다. 석회수? 위를 쳐다보니 정말로 석회기둥들이... 그랬구나. 유적지의 건물들은 거친 석회암으로 지어진 것들이었다. 지붕은 A-beam형태로 높고 뾰족한데 벽면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일직선의 환기 시스템을 구성했다. 사실 잘 지었다고는 죽어도 말 못할 건축이었다. 건물의 사면으로 짐작컨대 복도를 따라 긴 그늘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 같다. 석관이 소장된 무덤터는 사방이 꽉 막혀 있어 무덥고 습기가 가득 차 있었다.

박물관에 도착하니 벌써 두 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소녀에게 저 데드 마스크의 소재가 뭐냐고 물었다. 비취인지 옥인지 모르겠다. 그녀는 옥이라고 했다. 마침 그녀의 애인으로 보이는 작자가 나타나서 슬며시 꼬리를 접고 마야 문자들을 쳐다보러 갔다. 유적지에서 너무 시간을 보낸 것이 아쉽다. 한 시간쯤 박물관에서 발견된 부장품을 둘러 보다가 박물관 앞에서 꼴렉티보를 타고 시내로 귀환. 거리를 뒤져 20페소 짜리 menu del dia(오늘의 메뉴)를 잘 먹고 아주 흐뭇해졌다. 우유같은 음료수의 이름이 hochata라는 것을 드디어 알았다.

고생 끝에 windows 2000/xp용 한글 IME를 다운 받았다. 용량이 무려 11메가. 여섯 번이나 끊기고 2시간이 걸렸다. 위성 링크라지만 속도는 느리고 가격은 비싼 편. 이럴 줄 알았으면 산 끄리스또발에서 게으름 피우지 말고 얼른 받아두는 건데. 이제 어떤 운영체계에서도 한글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우어어! 단, USB 포트가 있어야 한다. 우어어! 그런데 한글 쓸 수 있으면 뭘 하지? 딱히 할 일이 없잖아? 우어어어어!!

사진을 200장쯤 찍었다. 그중 몇 장을 버려야 할까 생각하다가 많이 지웠다. 유적의 돌덩이들이야 어디가든 사정을 모르면 다 비슷비슷해 보인다. 사진을 정리해야 하는데 박물관에서 본 것들 때문에 머리속이 뒤죽박죽 되어 어디부터 시작할 지 난감하네...

어제 먹은 맛있는 빵집에서 빵을 여덟 개 샀는데 어제보다 더 싸게 받는다. 웃는다. 그 옆집에서 우유와 담배를 샀다. 200짜리 지폐를 건네니까 30뻬소라면서 아저씨가 50뻬소 짜리 네 장과 15뻬소를 건네 주었다. 200-30=215? 묵묵히 잔돈을 받아들고 시급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요즘 머리가 굳어서 뺄셈이 잘 안된다.

식당에서도 그렇고 거리에서 만난 '아미고들'이 어깨를 두들기며 지나간다. 오늘 무슨 날인가? 외국인에게 친절해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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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enque

여행기/Mexico 2003. 4. 2. 06:17
비가 오는 길을 모자만 쓰고 반팔로 닭살이 돋은 채 추적추적 걸어갔다. 거리에서 반팔로 돌아다니는 미친놈은 나 밖에 없었다. 광장에서 데모가 벌어지고 있었다. 담배를 물었다. 춥다.

멕시코의 190번 국도, 따빠출라에서 산 끄리스또발 데 라스 까사스 까지 이어지는, 푸른 구름이 솟아나던 오르막 길. 186번 국도, 산 끄리스또발에서 빨렝게로, 5시간 동안 2230미터를 서서히 정글로 추락해 가는 아름다운 코스. 이 근처의 폭포에서 프레데터를 찍었다. 춥긴 하지만 안개 속에 싸인 정글이 아름다웠다.

옆에 앉은 캐나다 할머니는 자기 친구들이 멕시코 여행을 하는 자기를 몹시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혼자 메리다로 향하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멕시코에서, 아니 어쩌면 이 지구상에서 가장 맛있는 따꼬스를 맛 볼 수 있는 곳이 산 미구엘 데 아옌데라고 말했다. '그걸 먹고 감동과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라고 말하고 싶은데 영어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냥 뻐킹 굿이라고 할까? 옆에 앉은 멕시코 여자는 에스빠뇰로 뭐라고 말하다가 우리 둘이 이해를 못하니까 간단히, 따꼬스, 치아빠스, 굿 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다음 휴게소에서 컵라면을 샀다. 버스 안에서 호호 입김을 불어가며 정말 맛있게 먹었다. 왠지 약올리는 것 같았다. 안개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얼어 죽을 지경인데도 버스에서는 에어컨을 끄지 않았다. 옆에서는 컵라면을 맛있게, 오래오래 먹고 있었다. 그 옆에서 하나 남은 오이를 불쌍하게 깍아 먹었다. 결심했다. 나도 반드시 컵라면을 먹을테다.

데스꾸엔또! 데스꾸엔또 포르 화보르! 방값을 깍아 달라는... 요지부동이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되묻는다. 꼬레아? 동족에게 자부심이 느껴졌다. 한국인은 어디가나 게시판에 걸려있는 정액을 무시하고 나 처럼 깎으며 다니고 있을 생각을 하니까. 거리를 걷는 도중 얼핏 까페에서 지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두 명의 한국인을 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종종 그런 지친 표정을 보았다. 뭐가 문제일까? 아무튼 건승을 기원했다. 난 밥을 먹으러 가야 하는 관계로...

밥을 먹어야겠는데... 다시 미친척하고 가이드북에서 'highly recommand'하는 'seriously cheap and good' 음식점을 찾았다. 역시 실패였다. 가이드북을 믿고 간 음식점마다 실패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추측해 보았다. 비싼 곳은 실패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끼에 5불 이상을 줘야 한다. 이상하게 생긴 스파게티가 나왔다. 칠리 소스를 잔뜩 뿌리고 후추와 소금을 쳐서 먹었다. 그제서야 음식 같았다. 메인디시는 꿰사디야스인데 고기를 안 쓰고 햄을 썼다. 소스를 한 가지만 줬다. 레몬을 주지 않았다. 용서가 안된다. 부르르 떨었다. 가만, 이 가이드북... 영국에서 만든거지? 그랬었군. 이해가 간다. 부질없는 짓 그만하고 앞으로는 다리품을 팔아 '가이드 북에 안 나오는, 멕시칸들이 가는 음식점을 찾아서 배를 든든하게 채울 수 있는 3코스 정식이나 먹어야겠다.

음식점마다 desayunos라는 것을 팔고 있었다. 오고 갈 때마다 봤는데 언젠가는 먹어야지 하고 있다가 오늘에야 데싸유노스가 무엇인지 알았다. breakfast라는 뜻이었다. 바보.

망고와 빵을 샀다. 빵 맛이 훌륭하다. 내일 점심인데 그냥 다 먹어 버렸다. 거리에서 일본인 3명을 보았다. 일본인 3명, 한국인 2명이 있으니까 비로소 빨렝게가 관광지 같아 보였다. 그러고보니 혼자 돌아다니는 여행자들이 극히 드물다.

무척 덥다는 빨렝게 역시 춥다. 빨렝게가 chol어로 fortification place라는 뜻이라고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팜플렛에 적혀 있었다. 내 노트에는 '빨렝게에서 모기 조심'이라고 적혀 있었다. 모기들은 얼어 죽은 것 같다.

볼리비아에서 산사태로 700명이 죽었다. 어떻게 산사태가 나서 일주일간의 미국군 전쟁 사망자보다도 더 많이 죽을 수가 있지? 볼리비아에 꼭 가고 싶다. 비단 전세계 여행자들이 하나같이 썸스업을 하는 장소이기 때문만은 아니고, 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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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dness

여행기/Mexico 2003. 4. 1. 09:39
골목의 벽에 종종 적혀 있는 에스빠뇰:

* Bush terrorista! 흠... 부시는 테러리스트다?
* No a la guerra en iraq. 'guerra'는 전쟁. 추측해 보건대 이라크 전쟁 반대 라는 뜻인 듯.
* llama tu mama. 'tu mama'는 your mother이니까, 이건 필시 무지 심한 욕인 것 같다. 써먹어야지~

그란데 왜 라 꾸까라차가 바뀌벌레인 술 몰라술까? 조금만 생각하미엔 알 쑤 있었는데... cockroach가 바뀌벌레니까. 까사 블랑까 casa blanca.. 위떼 호우쎄 white house. 까사 네그로 casa negro... 블라끄 호우쎄 black house. 쎄르베싸 도스 에뀌쓰 cerveza dos equis... 도우블레 에뀌스 비르 double x beer? 벽보와 깐빤을 보면써 오늘도 간딴히 에스빠뇰을 공부앴다.

Sci-fi author Cory Doctorow recently received a lot of attention for releasing his first novel, Down and Out in the Magic Kingdom, as a free download. The book has been downloaded more than 75,000 times and been the subject of stories and reviews in newspapers all over the world ...

흠. 코리 닥터로우가 누굴까. 소설은 재미있을까.

하루종일 안개비/가랑비가 내렸다. 이 비를 누가 뭐라고 부르던데 알아 들을 수가 없으니 잊어버렸다. 모자를 쓰고 천천히 광장으로 걸어갔다. 광장에 사람이 없는 모습을 보는 것은 멕시코로 들어와서 처음 보았다.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워낙 할 일이 없어 표라도 예매할까 해서... 매표원이 묻는다. @#%#$!$#$%? 빨렝께. @%##@$ㅆ@#!$@#!$!#? 음... 마냐나... 디에스 띠엔떼. ^^%&$%%$^? 오첸따? 오케이. 놈브레? 씨. 이렇게 아주 능숙한 에스파뇰로 버스표를 끊었다.

에스파뇰 공부를 하나도 안 했다. 이제 1에서 10까지 알아들울 수 있게 되었고 그 수준으로 상대가 무슨 얘기를 하던 어깨를 으쓱한 후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상대는 한 1분쯤 떠들고 나서 하하 웃고는 어깨를 두드리고 아미고, 비엔 비아헤! 하고 사라졌다. 그가 가랑비에 관해 무슨 얘기를 했는데 잊어 버렸다. 그다지 친절하지는 않지만 자존심 강하고 착한 사람들이다.

점심을 먹었다. 패스트푸드 점이라지만 이걸 과연 패스트푸드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생고기에 양념을 발라 철판에 굽고 치즈를 녹이고 토마토와 당근을 썰고 빵을 굽고 베이컨을 굽고 계란 지단을 만들고 차곡차곡 얹어 10분 만에 갖다 주었다. 이름은 그냥 '스페샬'이었다. 이건 패스트 푸드가 아니다. 날재료를 처음부터 가공했으니까. 그래서 신음이 나왔다. 설렁탕은 패스트푸드일까 아닐까? 이런 저런 이유로 패스트푸드 라는데 한 표. 앞으로는 패스트푸드라면 이를 갈면서 설렁탕을 먹는 사람을 보면 비웃어줄테다.

다시 비를 맞으며 인터넷 까페에 갔다. 한 시간에 5뻬소. San Cristobal de las Casas는 멕시코에서 이제껏 인터넷을 사용한 곳 중 가장 싼 도시. 그래서 2시간을 넘게 사용하면서도 부담이 없다. 다음에서 latinamerica 까페와 5불 생활자 까페에서 정보를 수집했다. 꾸바로 들어가는 100불 짜리 왕복 선박표를 깐꾼에서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꾸바에 대한 무라까미 류 식의 낭만이 내게는 없다. 그냥 까스뜨로의 장기 독재 집권으로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이고 교육수준이 워낙 높아서 대학을 졸업했지만 할 일이 없어 거리에 나가 창녀가 된 여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정도. 꾸바에 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숙박비만 최소한 하룻밤에 15불 이상이며 먹이를 구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점 등등등 이었다. 무라까미 류의 소설을 읽다가 재미가 없어서 집어던진 기억이 큰 도움이 되었다. 적당히 그럴듯하게 포장한 감상주의가 싫다. 내가 감상주의자니까. 꾸바는 제끼기로 했다. 꾸바에 관해 또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꾸바는 중미에도 남미에도 속하지 않는 나라인 것 같다는 점. foot print mexico and central america와 lonely planet south america(shoestring series) 어디에도 cuba라는 나라는 없었다. 그럼 꾸바야, 너는 뭐냐? 스꾸바냐?

칠레가 2003년 3월 1일부로 무비자 국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보았다. 일단 급한 대로 별 이유 없이 만세!를 외치고, 잔머리를 굴려 어떻게 일정을 짜야지 칠레까지 갈 수 있을까 곰곰히 궁리해 보았다. 아니, 머리 속에서 지도와 경로를 그렸다. 빨렌께, 아구아 아술, 미솔헤 2일, 메리다, 우스말, 치첸 이싸 3일, 깐꾼과 이슬라 무헤레스에서 3일, 체뚜말 1일 하면 멕시코 일정을 바쁘게 끝낼 수 있다. 벨리스를 경유해 플로레스, 띠깔 포함해서 2일, 과떼말라 시티에서 빈둥거리며 2일, 안띠구아/치치까쓰떼낭고 3일, 다시 과떼말라 시티에서 싼 싸바도르로, 온두라스를 어떻게든 제끼고 니까라과로. 그 다음에 막막해졌다. 계획이 없으니까. 19일 소여. 니까라과, 꼬스따리까, 빠나마를 10일 이내에 통과하면 꼴룸비아는 앞으로 딱 한 달 후에 도착하게 된다. 4월 말. 오예. 5월 1일, 보고따에서 일정을 시작해서 꼴룸비아, 에꽈도르, 뻬루, 볼리비아, 칠레를 한달 안에 돈다? 정신 나갔군.

계획을 짜지 않았다.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여행자를 만나도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숙소야 그냥 알아서 되는대로 찾아가고 아무 거나 먹고 볼거리 라고 가이드북에 적힌 것들 조금 보면 하루 일정 끝이다. 귀찮아서 에스빠뇰 공부를 하지 않았다. 지금은 영어도, 한국어도, 스페인어도 모두 엉망진창이다. 가끔은 아랍어가 튀어 나와서 어이가 없었다. 인사할 때 살람 알레이꿈이라고 벌써 몇번째인지. 아랍 생각이 자꾸 났다. 이란, 시리아 따위의 나라가 그립다. 이라크에 안 간 것도 후회가 되었다. 전쟁으로 바그다드가 쑥밭이 되었을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500불 아끼지 말고 갔다올 것을...

이렇게 되는대로 여행하게 된 배경에는 아마도 아랍의 무슬림에 대한 인상이 지나치게 좋게 머리 속에 남아있기 때문이지 싶다. 그들을 별 이유없이 좋아했다. 사막 한 복판에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에서 조그만 점이 내쪽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숨을 헉헉 거리며 달려온 꾀죄죄한 거지 소년이었다. 그는 그 먼 거리를 뛰어와서 날더러 자기 식구들 천막에 가서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말했다. 차 한 잔 하고 가라는 말을 하려고 사막을 가로질러 여기까지 뛰어오다니. 찢어지게 가난한 주제에. 흥. 시리아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십자군 성을 늦게 까지 둘러보느라 버스가 모두 끊겼단다. 택시를 타야 할 꺼라고 했지만 웃기지 말라고, 왜 벌건 대낮에 버스가 끊기냐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기다렸다. 내 옆에 한 청년이 서성였다. 너도 버스를 기다리냐고 물으니 대충 그렇단다. 버스는 안 왔다. 청년이 뭐라고 택시에 대고 말하니까 웃는다. 택시가 몇 대 지나갔고 한 대가 섰다. 청년과 내가 막 우기자 간신히 쉐어드 택시가 되어 1/20 가격으로 값싸게 돌아갈 수 있어 기뻤다. 청년 쪽을 돌아보고 너도 얼른 타라고 손짓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 녀석은 내가 택시를 안 잡자 택시 드라이버를 설득해 그 택시를 쉐어드 택시로 만들어주고 그게 제대로 될 때까지 지 할 일도 안하고 거리에서 날 돕고 있었던 것이다. 말이 통해야 내가 그 사정을 알지! 고맙고 또 미안하잖아 임마! 레바논의 바알벡에서도 사정이 비슷했다. 이란에서는 정도가 심해 몹시 귀찮았다. 아니 이슬람 국가 전체가 그 모양이었다. 그런 족속들이 사는 나라가 미국의 침공을 받고 있으니 밤마다 인터넷으로 다운받은 뉴스를 붙들고 전황을 아니 피해를 지켜보게 된다.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인간방패로 간 사람들은 전쟁에 의해 다치고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아프겠지만, 무슬림들의 이방인에 대한 한 없는 친절을 경험해 보았을까? 그치들이 기독교인들과 유태인들과 수천년 동안 사이좋게 지낸다는 사실을 알까? 그저 자존심이 강하고 독립적인 사람들이라 미국이 힘이 강하건 개긴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그들 역시 나와 같은 경험을 하길 바랬다. 들은 바로는 내가 여행한 나라들의 친절은 약과라고 했다. 예멘과 이라크, 미국이 엄청나게 싫어하는 이 두 국가를, 친절의 축(axis of kindness)이라고 해야겠지.

친절한 나라들에는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무슬림 국가 특히 아랍세계의 무슬림 국가는 그것이 문화와 전통과 맞물려 있어 그 친절함이 상대적으로 거대해 보이게 마련이지만, 친절한 나라들은 대체로 가난하다는 것, 그래서 소위 인간 냄새가 난다는 점.

멕시코는 잘 사는 동네라서 '친절력'이 조금 시들한 감이 있었다. 인간성이 그나마 남아있는 곳을 가려면 비자비가 얼마가 들더라도 값싼 곳으로 가야할 것 같다. 시급히 과떼말라로 직행해서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돌아다녀야지 싶다.

날이 흐리고 거리는 일요일이라 을씨년 스럽고 비 맞으면서 걸었더니 추워서 이가 닥닥 떨리고... 중동에서도 떨면서 다녔는데 여기까지 와서 긴팔 입고 덜덜 떨면서 다닐 줄이야... 북위 12도의 열대 임에도 해발 2200m에 날 흐리고 비까지 오니 밤에는 침낭을 뒤집어 쓰고 잤다.

맥주나 한 잔 할까 했는데 오늘은 수퍼에서 술을 안 파는 날인가? 손님들이 술병을 들고 오면 노 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왜 안파는겨. 슬프잖아. 에스빠뇰을 알아야 어제는 팔았는데 오늘은 왜 안 파는지 묻기라도 하지. 지난 16일 동안 멕시칸 중 영어를 말하는 사람을 딱 두 명 봤다. 비슷했던 이란에서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그나마 영어를 알아 들었는데, 여기서는 게스트 하우스 주인들이 하나같이 에스빠뇰을 유창하게 내뱉었다. 그래서 하비따시온 리브레? 우노 노체, 꾸안또 꾸에스따 포르 노체? 데스꾸엔또 포르 화보르~ 소이 에스뚜디엔떼~ 정도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잠은 자야 할 것 아닌가... 3개월 동안 닭살 돋게 에스빠뇰을 사용할 생각을 하니... 으윽... 영어 좀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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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xaca -> Tapachula -> San Cristobal de las Casas. 24hrs.

미국 참전 병사 중 멕시코계가 2명 사망해서 난리도 아니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멕시코가 유엔 안보리 차기 이사국이라는 것. 멕시코는 자원과 산물이 풍부하고, 석유도 나고, 3000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문화적 전통을 자랑하고, 엄청나게 넓은 땅에, 혁명도 성공시킨 나라에다가 자부심과 자존심도 강한 나라니(일부 주장에 따르면 스페인의 식민지 점령 당시의 노예근성이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비판하지만 국력이 막강하니 그런 것쯤은 이미 극복했으리라 본다) 미국이 멕시코 땅을 먹은 일을 잊지 않았고 반전 반미도 만만치 않다.

여행중 본 박물관 중 '최고'에 속하는 산토 도밍고 문화센터에서 참으로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특히 추장 머리 장식을 달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상과 최후의 만찬은 압권이었다.

따빠출라로 향했다. 저녁에 출발해 아침에 도착. 어리버리한 정신 상태로 과떼말라 영사관을 찾아갔으나 이사. 물어물어 끝까지 고집부려서 택시 안타고 걸어갔다. 어이없게도 버스 터미널에서 바로 두 블럭 뒤였다. 아침부터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한 시간 반을 걸어 과떼말라 국기가 휘날리는 영사관에 도착. 이미 귀소문으로 들었던 것처럼 따뜻한 환대와 함께 즉시 비자를 발급해 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아니다. 여권을 한참 훌터보더니 파키스탄, 이란, 시리아, 요르단을 줄줄이 들쳐 보이면서 꼬치꼬치 그들 나라에 방문한 목적이 무엇인지 묻더니 여권을 들고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안되겠다는 것이다. 어? 이건 무슨 소리여? 30분 동안 영사관과 직원들을 설득하고 애원했다. 미국 비자를 보여주면서 내가 미국 비자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나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엿먹을) 그렇게 까다롭고 엄격한 미국에서도 비자를 받았다. (엿먹을) 자, 내 재산 증명서와 회사 명함과 크레딧 카드가 여기 있다. (엿먹을) 내가 아랍 국가를 방문한 것은 순전히 관광 목적이었으며 이집트를 육로로 가려면 그 길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랍 형제들에게 미안하다...) 얼마나 머물길 원하냐고 물었다. 기회다! 60일! 왜냐하면 60일은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난 60일 짜리를 받아야 한다. 쿠바에 갔다와야 하니까! 갔다오면 사랑하는 과테말라에 며칠 밖에 있지 못한다. 시리아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이 인간들 정말 독했다. 영어를 알아들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에스파뇰로 물었고 개중 몇 안 되는 단어를 간신히 알아들어 힘겹게 대답했다. 정말로 60일 짜리를 받고 싶으냐?(에스파뇰로) 그렇다(영어로). 그럼 돈을 더 내야 하는데(에스파뇰로. 알아듣지 못했다). 무조건 고개를 끄떡였다. 50불이다. 원래 가격은 25불이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좋다. 50불 내겠다. 그래서 60일짜리 과테말라 비자를 받아들고 뿌듯한 기분으로 영사관 문을 나오며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모두 그라시아스(고맙다)! 라고 인사했다. 심지어 경비원과 청소부 아줌마한테도.

비자 받는데 시간을 너무 소비해서 산 끄리스또발 데 라스 까싸스로 가는 버스를 놓쳤다. 왜 나는 비자 받을 때마다 경우가 지랄스러운지 모르겠다. 이제사 얘기지만 LA 공항에 입국할 때도 아랍 비자들 때문에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하마터면 2차 입국 심사를 받으러 갈 뻔 했다. 2차 입국 심사란 입국심사대를 나와 조그만 사무실로 들어가 경찰(또는 FBI) 입회하에 심문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어디선가 이것에 관해 읽은 기억이 났었다. 내가 한국에 돌아가 왕복 항공권을 한국에서 받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내 미국 체류 기간은 3월 12일 입국해서 6개월 간으로, 2003년 9월 11일에 끝난다. 그거 보고 한참을 웃었다. 여행자들에게 그걸 보여주면 아주 재미있어 했다. 프랑스 친구는 날더러, 2주년 기념 불꽃놀이는 못 보고 떠나서 아쉽겠네? 라며 가시돋힌 농담을 했다. 911 2주년 기념 아랍권의 보복 테러를 말한다. 3일 만에 미국을 빠져 나왔는데 여전히 잘했다고 생각했다.

싼 끄리스또발로 가는 길은 무척 아름다웠다. 가는 길에 희안한 구름을 보았다. 내 평생에 푸른색 구름은 처음 본다. 푸른색 적란운이란 것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오! 치아빠스! 치아빠스에서 1994년 민중봉기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민중봉기의 주역인 게릴라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그의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멕시코판 체 게바라라는 소리를 듣던 작자였다. 폭스가 다수당을 물리치고 멕시코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 폭스는 정부군과 싸우던 그에게 화해 제스쳐를 취했고 그는 임대버스를 타고 치아빠스에서 멕시코 시티까지 행진했다. 그리고 대통령 궁이 있는 멕시코 시티의 쏘나 로싸에서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연설했다. 그때부터 성공적인 무혈 시민혁명이 발생했던 치아빠스에 관한 꿈을 꾸었고 언젠가 한번은 꼭 가보리라고 다짐했다. 오늘 6년 전의 소원을 이뤘다. 싼 끄리스또발로 가는 버스에서 치아빠스를 보았다. 마치 한국의 시골을 연상시키는 모습, 식민지 양식의 건물이 즐비한 지배세력이 사는 멕시코 북부가 아닌 가난한 멕시코 촌락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렇게 해서 버스로 19시간을 달리고, 배낭을 짊어진 채 어제 오늘 합쳐서 3시간을 걸어 파김치가 된 상태로, 숙소를 잡고 밥을 먹고 인터넷 샵을 네 군데나 전전해서야 간신히 인터넷을 사용하고 지금은 빈둥거리며 놀고 있다. 여기 볼꺼리 라는 것이 소위 토착민들, 아시아에서라면 소수민족이라고 해야겠지만 여기서는 그 수가 워낙 많아 소수민족이라고는 할 수 없는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자기 문화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 토착민들인데, 안 보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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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보내기

여행기/Mexico 2003. 3. 28. 07:28
몬떼 알반. 싸뽀떼까 문명? 처음에는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문명 이름에 당황스러웠다. 그점에서는 떼오띠와깐도 만만치 않았다. 고작 아는 것이라고는 아스떼까, 마야, 잉카 뿐이었으니까. 싸뽀떼까 문명은 떼오띠와깐과 마찬가지로 축구장 문명이었다. 엄청나게 넓은 광장과 광장을 에워싸고 있는 요새같은 건물들과 관람석처럼 보이는 수많은 가파른 계단, 사면들. 떼오띠와깐이 인류 멸망을 막기 위해 인신공양을 하고 처녀 가죽을 벗겨 뒤집어 쓰고 다녔다면, 싸뽀떼까는 적을 발가 벗기고 자지를 잘라 능욕을 안겨주는 문명이었다. 그에 비하면 단군과 홍익인간은 가련할 정도로 '착했다'. 하지만, 상고시대 유적이라고는 산꼭대기에 초라한 돌무더기 밖에 남은 것이 없지만 인간을 압도하고 권력과 권위를 강요하던 이런 문명에 비하면 백배는 나아 보인다. 남아 있는 폐허의 웅장함이란 것이 뭐 대단한 것인가.

몬떼 알반 관람은 2시간 이내에 끝났다. 박물관을 두번 둘러보고 안되는 스패니쉬를 거의 해독하다시피 해서 발굴된 유물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시내에 내려오자 마자 300불을 환전했다. 12일 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300불 이상을 소비했다. 식당에서 밥 먹고 엽서를 보냈다. 오후 내내 광장 근처에서 빈둥거리다가(그 반은 맛있는 식당을 찾아 다니는데 소비했지만) 인터넷만 두 시간을 사용하고 또 광장에서 공연 구경하다가 먹고 마시고... 참 팔자 좋다. 오늘은 바람이 참 시원했다. 내일은 시내 박물관을 돌 생각이다.

산토 도밍고 문화센터(박물관)을 돌았다. 입장료 37뻬소가 아깝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멕시코 시티에서 멕시코 내국인 학생증을 만들어둘 껄 후회하고 있다. 내국인 학생증을 제시하면 모든 박물관, 유적지가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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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 at Zocalo

여행기/Mexico 2003. 3. 27. 08:18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연예인들: 신해철, 김종진, 언니네 이발관, 시나위, 자우림, 신성우, 송백경, 휘성, 부활, 트렌스픽션, 체리필터, 나비효과 ... 그리고 노브레인이 있었다. 노 브레인 조차도 파병이 잘못 되었다는 것쯤은 안다. :)

여태까지 멕시코에서 보았던 그 어느 성당보다도 삐까번쩍한 산토 도밍고에서 내려오는 길에 보기 드물게 쫙 빠진 멕시칸 미녀가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34-24-30쯤? 그 뒤를 느끼한 표정으로 쫓아가는 미국인 젊은이가 있었다. 가관도 아니었다. 날개만 안 돋았다 뿐이지 천사를 바라보는 표정, 천사를 열렬히 쫓아가는 표정이었다. 그 친구 표정이 워낙 느끼해서 가던 길을 멈추고 황급히 콜라를 한 병 사서 입을 헹궜다. 아, 인간의 얼굴에서 저런 표정이 나오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멕시코 거리 이름에는 유난히 날짜를 상기시키는 것들이 많았다. 5 de mayo(5월 5일), 5 de febrero, 16 de septiembre, 기타 등등... 그리고 20 de novembre. 얘들이 뭘 좀 알긴 아는구나 싶어 흐뭇했다. 11월 20일이 뭐하는 기념일인지 찾아 보니 은근히 기대하던 바대로 혁명 기념일. 덕택에 멕시코 혁명기념일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저녁 6시마다 공연이 있었다. 할일없이 길을 걷다가 불쑥 들어간 곳이 와하까 문화국인지 하는 곳이었는데 두툼한 일주일 간의 행사 일정이 적힌 팜플렛을 건네준다. 와하까 시립 교향악단이 쏘깔로에서 연주회를 했는데 시트라우스와 바그너의 멕시코 버전이 이렇게 요란하구나 싶었다. 주로 관악기들이 지랄했다. 개중 리까르도 까스뜨로의 음악이 좀 들을만 했다. 내일은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다는데 글쎄... 그건 또 얼마나 '열정적'일런지 기대가 된다. 이 모든 멕시코 전역에서 펼쳐지는 2주 동안의 행사가 고작 봄이 오는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 멕시칸... 징하다 너희들. 그래! 그렇게 무슨 이유를 갖다 붙여서라도 날마다 즐겁게 살아야지 아무렴!!


쏘깔로 광장 옆 까페에서 맥주 한 병 시켜놓고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거리를 구경할 때 새삼 느끼는 바가 있었다. 6시면 일과를 마치고 칼같이 퇴근해서 저녁을 즐기는 멕시칸들. 거리에 즐비한 근사한 바와 레스토랑들. 아름답고 로맨틱하고 재밌는 저녁이라는 것. 이런 곳은 혼자 올 곳이 못 된다는 것.

웃겼다. 하루 생활비 대략 20~25$ 가량. 예쁘고 산뜻한 볼거리들. 구미 당기는 맛있는 음식. 잘 발달한 관광 시스템 등등 매력적인 여건임에도 국내에 멕시코 관련 정보가 별로 없다. 멕시코 시티에만 교민이 2만이 넘게 살고, 지나가다가 짜장면집 하고 사우나하고 당구장 까지 봤는데도, 멕시코가 한국에 덜 알려져 있었다. 터키의 그 초라하고 시시껄렁한 헬레니즘/로만 유적을 보느니 멕시코에 와서 낮에는 유적 관람하고 밤에는 맥주 마시며 즐기는 것이 훨씬 나아 보인다. 이들의 문화유산은 수천년째 살아 움직이고 있지만 내가 본 터키와 이집트는 박제화된 유물 관광의 전형이었다. 여기 미술관에서는 심지어 하루에 한번씩은 현지인들을 상대로 그림 하나를 잡고서 이 그림을 어떻게 그렸으며 왜 이렇게 그렸는가를 설명하는 시간을 갖는다. 멕시코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보면서 말 그대로 문화적으로 상당히 엘러건트한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공연이 끝났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치즈를 듬뿍 얹은 바삭바삭하고 매콤한 나쵸스와 시원한 떼까떼 맥주 두 병을 사와서 침대에 누워 먹고 마셨다. 점심에 부페 먹고 시장통에서 말레 뽀요라는 음식을 먹고(짜장면 소스 같은 것에 닭과 밥을 비벼서 또르띠야에 얹어 칠리 소스를 뿌려먹는) 간간이 따꼬스를 간식으로 먹고 이런 저런 먹거리들을 하루종일 먹어대고 나서 침대에 누우니 발가락 하나 까딱이기도 싫다. 밤새도록 시끌벅적한 유스호스텔에서 선잠을 자느니 두 배나 비싸고 깨끗하고 전망 좋은 '독방'으로 옮기길 잘했다. 그래봤자 옆 호스텔의 깔끔한 도미토리하고 가격이 같다.

누워서 방 천정을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치켜 들고 사위를 둘러보았다.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방 전체가 연분홍색이다. 침대는 더블이고. 앞에 세면대가 보인다. 그 옆에 작은 탁자와 의자, 그리고 거울이 놓여 잇다. 멕시코 시티의 허름한 호텔에 있는 동안 밤새도록 숨가뿐 신음소리가 들려왔는데 여기도 혹시... 얘들은 밤에 할짓 하면서 옆 방에 누가 있던 신경쓰지 않는 것 같던데. 자세를 바꿔서 더블 침대에 비딱하게 누워 침대를 꽉 채웠다.

그런데 로맨스 안 생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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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xaca

여행기/Mexico 2003. 3. 26. 05:01
나름대로 재미있게 돌아다니려고 애 많이 쓰고 있다. 엊그제 눈물을 흘리며 먹은 닭 때문에 설사가 났다. 아무래도 2-3일 동안 안 팔린 것을 계속 튀긴 듯.

어젯밤에 와하까 도착. 50페소 짜리 싸구려 숙소인데, 아우틀렛이 없어 노트북을 살펴볼 수가 없었다. 몬떼 알반 정보가 거기 다 있는데... 버스에서 만난 페트릭과 쥬느비에브의 주장에 따라 비싼 택시를 타고 시내까지 온 것이다. 혼자 였더라면 버스를 탔을텐데... 광장 까페에 앉아 맥주 한 잔 마시면서 내일 할 일을 궁리했다.

아침. 새로 옮긴 숙소에도 아우틀렛이 없었다. 부드득 이를 갈고 시장에 가서 리셉터클을 샀다. 형광등을 빼내고 거기에 새로산 리셉터클을 달아 전기를 끌어다 쓸 것이다. 숙소의 게시판에는 숙소 안에서 빨래는 물론 전기도 끌어다 써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었다. 왜들 이러나... 그런다고 빨래를 안 하고 전기를 안 끌어 쓸 것도 아닌데... 100페소 짜리 숙소인데 이번에는 좀 마음에 들었다. 100 페소 짜리 숙소를 잡고 46페소짜리 부페를 먹고... 누가 봐도 배낭여행자 같아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

위키 업데이트. 이젠 이 먼 타국에서도 마음대로 전자상거래를 하고 홈페이지를 업데이트하고... 아... 이제야 드디어 디지탈 트래블 '방법론'을 완성시킨 셈인가?

쥬느비에브의 주장에 따르면 멕시코의 퍼시픽 쪽 해변은 별 볼일이 없단다. 그녀는 거기서 2개월 동안 살을 태워 멕시코인처럼 변해 있었다. 그봐라... 내 말이 맞지. 태평양 쪽 해변은 좋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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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otihuacan

여행기/Mexico 2003. 3. 25. 03:02
속상하게도 아침 일찍 일어났다. 하는 수 없이 떼오띠화깐을 보러갔다. 땡볕 아래서 걸으니 짜증이 솔솔 나기 시작했다. 태양 신전에 올라가니 하늘에 활짝 팔을 벌리고 '기'를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망은 달의 신전이 더 좋았다. 아스떼까인들이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52(4x13)년마다 지구가 망한대나 뭐라나 해서 지구 멸망을 막아보려고 인신공양을 했다. 한번은 2만명의 포로들의 펄떡펄떡 뛰는 심장을 꺼내기도 한 것 같다. 그렇다. 지구 멸망을 막으려면 지구상 전 동식물계의 두통거리인 인류를 없애기만 하면 된다. 이집트의 지어놓고 올라가지도 못하게 해 놓은, 지들 말로는 발전된 형태의 피라밋보다 떼오띠화깐 것은 올라갈 수 있어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다만, 계단에 워낙 사람들이 많아 거진 경사가 45도 가량 되는 사면을 기어 올라갔다가 기어 내려와야 했다. 일요일이면 입장료가 무료라는 것을 노렸는데 입구에서 돈을 받아 슬펐다. 태양 신전 꼭대기의 정수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북위 19.69, 서경 98.84, 해발 2363m, 오차 +-4m 지점이었다. 정확히 4시간만에 관광 끝냈다. 더워서 박물관은 제끼고 바로 버스 타고 돌아왔다. 옆에 앉아있던 아줌마가 자꾸 비비적거려서 몹시 괴로웠다. 말도 못 하고...


지하철 탈 때마다 묘한 기분을 느꼈다. 지하철 바퀴가 고무 타이어여서 소음이 심하지 않은 것은 좋은데(하지만 왜 하필 고무 타이어를 썼을까. 승차감이 영 꽝인데), 집전자를 아래 철로 상에 배치해 놓아 다소 위험스러웠다. 아무래도 건설 경비를 줄이려고 천정에 달아놓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이 정말 멕시코적인 것인지, 아니면 멕시코의 지하철을 수주한 외국인 업체의 어리석은 발상인지 궁금했다. 지하철에 소매치기가 횡행한다고 해서 호기심에 여기저기를 왔다갔다 했지만 별다른 위험이나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음료수와 물을 2리터 이상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호텔 근처에서 먹지 뭐 하면서 방심하고 있다가 오늘이 일요일이라 가게들이 몽땅 문을 닫아 낭패를 당했다. 눈물을 흘리면서 닭 반 마리와 콜라로 때웠다.

심혈을 기울여 웹 사이트와 가이드북을 면밀히 검토해 본 끝에 아까뿔꼬와 뿌에르또 에스꼰디도는 제끼기로 했다. 태국이나 필리핀에 싸고 좋은 해변들이 많다. 7달러면 태국에서 굉장히 럭셔리한 해변 방갈로를 얻을 수 있는데 여기선 시장통의 꽤죄죄한 도미토리에서 7~8달러를 주고 묵으면서 구질구질하게 지내야 된다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러 사이트에서 중남미에 관한 환상적인, 감상적인 여행기들을 여러번 읽어보면서 내가 지금 여행하는 현실을 비춰보면 이 사람들 다른 나라는 안 가본 건가?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일고는 했다. 이런 동네에서 잘 살아 남으려면 박물관과 유적들이나 챙기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보았다.

맘 같아서는 움직일 때마다 돈 나가는 소리가 절그럭 거리는 멕시코를 어서 빨리 지나가고 싶은데, 워낙 땅덩이가 넓고 볼 것들이 광대하게 흩어져 있어서 앞으로 2주는 더 보내야 할 것 같다. 이다지도 빨리 움직이고, 왠간하면 안 보고 지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천안문 광장 다음으로 크다는 소깔로 광장은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다. 이전 여의도 광장이 더 컸달까? 하여튼 거기서 오늘은 락 밴드가 제대로 잘 하지도 못하면서 지랄하고 있었고 청중 중에서 일부 몰지각한 청소년들이 맥주를 몰래 마시다 경찰에 걸려 한동안 소란이 일었다. 공공장소에서 음주는 즉결인 것 같은데? 어째서 한국은 대낮에 공원에서 소주병 까도 잡아가지 않는 것일까.

전쟁 때문에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아야 정상일 것 같은데 오늘은 과일가게를 찾으려고 한동안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지만 과일쥬스 한 잔 마시고 말았다...

와하까로 떠나기 전 사진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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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꾸까라챠

여행기/Mexico 2003. 3. 24. 07:29
'라 꾸까라챠'가 에스파뇰로 '바퀴벌레'였구나... 라 쿠카라차~ 라 쿠카라차~ 아름다운 그 모습~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피라미데스는 내일 보러가기로 했다. 내일도 늦게 일어나면 그냥 안 가고 말자고 생각했다. 대신 박물관만 세 군데를 돌았다. 박물관이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봐야할 지 갑갑하다. 거리를 아름다운 보라빛으로 물들인 하까란다 꽃나무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날씨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현대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바깥으로 나오니 다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지난 일주일간 하루에 30-40킬로미터(6-8시간)는 걷다보니 지난 2-3개월 동안 운동을 안 한 탓인지 다리가 몹시 아팠다. 숙소로 돌아갈까 하다가 오로쓰꼬와 리베라의 그림을 더 보고 싶어 진통제를 한 알 삼켰다.

리베라 미술관에서 신음처럼 나이스를 연발하고 있을 때 자기도 나이스하다고 생각한다며 말을 붙여오는 친구가 있었다. 속으로 내 나이스함은 너의 나이스함보다 우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식 억양을 사용해서 반가웠지만 국적은 모르겠고(묻질 않았으니) 자기는 홍콩에서 3년쯤 살았는데 홍콩이 무지 좋았더라며 중국에 흡수된 이후로 사정이 어떻냐고 나한테 물었다. 홍콩이야 뭐... 대다수가 만다린을 열나게 배워 본토의 그 괴상한 공산주의(ridiculous communism)에 적응해 잘 살고 있다고 대꾸했다. 그랬더니 자기는 멕시코에 넘어와서 온갖 사기를 다 당해서 멕시코에 정이 떨어진다면서 자기가 이 500ml짜리 미네랄 워터를 얼마주고 샀는지 아냐고 물었다. 관심 밖이라서 가만히 있으니까 자기는 최근에 정가가 5페소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멕시코인들은 그걸 8페소에 판다고 개탄했다. 이건 왠 뚱딴지 같은 소리냐? 난 500ml 짜리 물을 4페소 이상 줘 본 적이 없는데? 자기는 인도에도 갔다왔고 태국에서도 몇 개월 있었다면서 이런 넘들은 처음 본다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중얼거리더라... 이해가 안 갔다. 관광지나 터미널에서 정가보다 비싸게 파는 일은 있었지만 멕시코인들이 사기를 친 적은 없었다. 멕시코에 넘어온 후부터 난 협상을 아예 안했다. 파는 음식이나 물건 가격을 가게 앞에 다 써붙여 놓았으니까. 아참 그와 헤어지면서 생각난 건데 내가 홍콩인인줄 알았나 보다. 세상에는 꼭 이상하게 당하는 녀석들이 있게 마련이다. 거짓말 하는 것 같지는 않고... 지금도 거리를 헤메면서 사기 당하고 있을 그... 착하게 생긴 녀석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싼 인터넷 까페를 찾다가 흘러흘러 소나 로사까지 왔다. 전쟁 소식이 궁금해서 미치겠다. 한 시간에 10페소 하는 곳을 보고 다리도 아프고 해서 더 이상 찾지 않고 들어왔다. DSL을 사용해서 인지 인터넷 속도는 환상적이다. 400kb/sec 정도 나오니 파일 전송이 순식간이네?

서울 수퍼에 들러 미역이라도 장만할까 하다가 이젠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대신 부페집에 들어가서 69페소(6.1 USD)짜리 거나한 점심을 먹었다. 얘넨 저녁 만찬은 없고 점심을 아주 잘 먹는 편이라 하루종일 돌아다니다가 저녁에 거나하게 식사를 하려면 좀 난감해지곤 했다. 아마 저녁은 간단히 먹고 디스코나 바에서 술을 걸치는 듯. 부페에 500cc 맥주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두잔째를 따라 주려고 했지만 워낙 배가 불러서 입맛을 다시며 거절했다. 대체 어디가서 6불 주고 멕시칸 스타일의 요리들, 무제한의 빵과 또르띠야에 스프에 7가지 고기 요리와 6가지 소스와 갖은 야채, 거기에 과일과 푸딩과 심지어 맥주를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대답해봐라 배낭 여행자야. 음. 태국이 있었군. 태국에서 10불에 태국 최고라는 요리사가 만들어 준 음식을 먹었다. 태국이나 베트남 음식이 맛있다는 것을 여행 몇 개월 하고 나니까 알게 되었다. 하지만 베트남은 음식값 가지고 장난을 쳐서 재수없는 족속들이다. 음식 가지고 장난 치는 놈들이 제일 증오스럽다.

따꼬스는 음식이 참 재미있고 종류도 각양각색이다. 가판에서 파는 것조차 바로(!) 불고기를 해서 즉석해서 잘게 썰어 또르띠야(옥수수 전병 같은 것)에 얹어 준다. 거기에 양파와 토마토 채 썬 것을 얹고 이런 저런 소스를 뿌리고 멕시코의 거의 모든 음식에 쓰이는 듯한 레몬즙을 뿌리고 손으로 말아 한 입 배어 문다. 담백한 육즙과 시큼한 시트릭산 그리고 매콤한 소스가 입안에서 뒤섞인다. 부드러운 고기와 뽀드득한 야채가 입안에서 함께 씹힐 때는...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입가심으로 고추 절임을 집어 먹으면 입안이 화하고 개운해진다. 하루에 한번은 꼭 먹게 만들었다. 이런 것을 한국에서는 만원 돈 주고 그 적은 양에 입만 다시다가 말고는 했는데... 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멕시코 음식을 먹게 될까? 하나에 300원 하는 것을 거진 2000원에 파는데? 입 다물고 많이 먹어두자. 그나저나 멕시코시티의 가판은 다른 도시보다 좀 맛이 떨어지는 듯... 마이스가 질긴 것이 옥수수 뿐만 아니라 뭔가 부재료를 섞은 것 같다.

이슬람 세계에서 내가 그들의 형제였다면, 멕시코에서 나는 그들의 친구(amigo)다. 형제들 일이 무척 걱정된다. 친구들이 반전 시위를 하고 있지만...

거리에서 반전 시위가 있었다. 무진장 복잡한 도로에서 1-2백명도 아니고 수천 명이 떼거지로 몰려 나와 교통체증을 불러 일으켰다. 구호를 보고 오늘 또 하나 에스파뇰 단어을 배웠다. Guerra는 전쟁이고 Ley는 정의다. 엊그제 대통령궁에서 본 눈 먼 정의의 여신이 떠오른다. 그나저나 이 동네 소칼로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거리 구석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연주하는 밴드와 매일 벌어지는 별별 공연들, 이벤트들, 할머니나 할아버지나 10대 애들처럼 환호하고 춤을 추고 있었다. 아... 정말 시끄럽고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이다.

미국의 서부와 동부에 사는 사람들이 정서가 다르다고 주장하는 동부 미국인이 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반전을 주장하는 일부 서부의 철없는 히피들이 뉴욕을 한번 방문해 보면 왜 이라크를 공격해야 하는가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 새롭게 출현한 미국 돌대가리다. 그의 주장은 그러니까, 알 쿠에다와 이라크의 실질적인 연결고리가 있거나 이라크가 잠재적인 테러국가라서 내비두면 안된다는 것일테고, 시민의 슬픔과 분노의 희생양으로 이라크를 공격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뜻이 되는건가? 내 형제나, 친구들 중에 저런 미국인같은 돌대가리는 없는 것 같다.

그나저나 이 중요한 시기에 바티칸은 예나 지금이나 전쟁이 유감스럽다느니 하는 따위의 안타까운 성명만 발표해 대고 있어서 눈쌀을 찌푸리게 했다. 어서 신비에 싸인 바티칸 소속 비밀 결사단을 풀어야 하지 않나.

오전 11시30분께 암만의 알 후세이니 사원에서 예배를 마친 시민들은 알 하시미 거리를 점거하고 10여분간 “미국은 우리의 적” “바그다드여 영원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어... 암만에 있을 때 숙소가 바로 알 후세이니 사원 앞이었는데... 이집트 얘기도 나왔다. 메이단 타흐리르 주변에 반전 시위 군중이 운집했었다는... 내가 경험하는 한 아랍 국가 중에서 국민들이 미국을 가장 싫어하는 나라가 이집트다. 거진 북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집트는 석유가 나지않아 마음껏 반전,반미를 부르짖어도 된다.

멕시코에 와서 데낄라 한 잔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 영... 하지만 백두산보다 높은 고도 2240미터의 세계 최대의 메트로폴리탄에서 그렇잖아도 잘 안 마시는 물을 하루에 거진 2리터나 마셔대고 있는데(엄청나게 건조하다) 술까지 마시면 이렇게 미친듯이 움직이다가 뻗을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멕시코 시티를 여행하는 중요한 룰은 가급적 담배를 피우지 말 것과 실외에서 격렬한 운동을 삼가할 것 둘이다. 고도가 고도지만 엄청난 대기오염 때문이다. 담배를 빨다보면 확실히 몸이 축나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럽다.

아스떼까 문명에 관해 공부 좀 했다. 박물관에 가서 쪽팔리게 뭔지도 모르고 멍하니 쳐다본다거나 유적지에서 돌덩이나 걷어 차는 신세는 면해야 겠다. 아스떼까가 그리 대단한 문명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차라리 거진 중국 수준의 대륙적 성향을 가지고 자신의 문화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멕시칸들이 존경스럽다. 한 도시에 이렇게나 많은 박물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나 그런 박물관이 정말로 살아있는 장소로 꾸며져 있다는 점 등등이. 미국식 서부영화에 의해 길들여졌던, 멍청하고 게을러터진 멕시칸의 이미지는 이미 작살났다. 이 나라에는 수준높은 예술가들이 있고 혁명으로 나라를 바꾸는 열정이 있고 가난해도 자존심 하나는 끝내주게 쎈 사람들이 외국인한테 사기 안 치고 구걸해도 몸이 성한 한 뭔가 쑈를 꼭 해서 벌이를 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박물관에 제발 영어로 토를 달아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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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xico City

여행기/Mexico 2003. 3. 23. 06:00
빨래하다 걸리면 50 USD를 벌금으로 내야 한다고 숙소 곳곳에 적혀 있었다. 하루에 대여섯 시간은 기본으로 걷는데 양말과 속옷은 빨아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생까고 빨래 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했다는 불길한 소식을 들었다. 광장에서 벌어지는 평화 시위에 미국에서 관광 온 노인네들과 함께 참석했다. 생전 처음으로 이런 류의 시위에 자발적으로 참가해 본다. 촛불 따위를 들고 전쟁에 희생된 어린이들을 위해 2분간 묵념 해보기도 처음이다. 진심으로 평화를 기원하는 양심의 발로 때문은 아니고, 저녁인데 볼거리는 다 봤고, 배도 부르고 딱히 할 일이 없어서였다.

메모 - 이강주, 캥거루를 위하여. 만화책.

아직 더럽게 빠른 에스파뇰에 적응이 안된다. 언어에 영 잼병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어떻게 일주일이 지나도 이 모양일까 좀 한심했다. 숫자도 다섯까지 밖에 못 세고... 먹고 이동하고 자고 하는데는 별 문제는 없었다.

할 말이 없어져 가는 현상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광범위한 지식을 쌓아왔음에도 정작 입을 열면 '헬로' 한 다음에는 입이 막혔다.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이 계속 안녕히 잘 지내길 바라면서 자리를 떠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음. 어제 만난 일본인과는 꽤 오래 얘기했던 것 같다. 한 시간쯤? 뉴욕에 살고 있다던데 무척 외로운가 보다. 나한테 말을 다 거는 걸 보니. 옆에서 자고 있던 두 미국인 호모 친구들하고는 '헬로'까지만 했다. 오늘은 부시가 이라크를 공격했을지도 모르는 지경인데 지미 헨드릭스가 구닥다리라서 시대에 안 맞는다고 주장하는 미국인의 얘기를 멀거니 들어줬다. 지미 헨드릭스를 구닥다리로 치부할 수 있는 사람이 미국인이라는 점이 새삼스럽거나, 공교롭지는 않았다. 그럴 배짱이 있는 녀석들은 대개 미국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러니까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는 닭대가리가 태어나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나라인 것이다. 그 옆에는 지미 핸드릭스가 구닥다리가 아니라며 당신(지미 핸드릭스가 구닥다리라고 주장하는 작자)의 사이콜로지가 의심스럽다고 주장하는 미국인 여성이 있었다. 그런 걸 논쟁꺼리라고 떠들어대는 바보들이 태어나서 양육되는 나라가 미국인 것이다. 그나마 괜찮은 미국인들도 있다고? 음... 소수의 괜찮은 미국인들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고, 부시만 닭대가리라는 주장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미국 전체가 그렇다는 얘기고, 그 점에서는 당분간(한 30년?) 생각이 바뀔 것 같지가 않다. 심지어 멕시코의 어느 한가한 관광지에서 미국인들과 평화 시위를 함께 하고 있음에도, 그들이 자기가 부시를 뽑지 않았다고 주장하거나 당장 부시를 사임시켜야 한다며 목청을 높여도 그렇다. 현재의 미국인들은 부시를 사임시키고 싶어하지 않으며, 전쟁 반대가 53%라는 뻥을 믿지도 않는다. 보편적인 미국은 하고많은 반전운동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침공을, 부시를 지지하는 것 같다.

평화 시위에 참석한 동양인은 어떤 일본인 여성과 나 뿐이었다. 그녀는 무척 예쁘게 생겨서 딱히 구경할 만한 것이 없었던 나에게 좋은 피사체가 되어 주었는데, '헬로'라고 말하고 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씁쓸히 돌아서야 하는 최근 형편상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음. 전통적인 미국의 동맹이었던 멕시코는 이번에 미국의 협력 요청을 거절한 반면(반전 반미), 일본과 한국은 미국을 지원하는 30개국 가운데 끼어 있다는 사실이(참전 용미) 왠지 나라 떠나서 여행하는 사람에게 초라하고 쪽 팔리게 느껴졌다. 내가 만일 지금 중동에 있었더라면 이슬람 형제들에게 뭐라고 구차스럽게 변명을 늘어놓아야 하나 난감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슬람 형제들도 후세인이 또라이라는 점에는 공감하고 있었고 이라크 일은 귀찮아서 신경쓰지도 않는 편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당사자일지도 모르는데도 반전운동을 하지 않았다. 웃기지 않는가? 그들은 물론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아니다. 내가 뽑은, 또는 뽑으려고 했거나 국민의 각의로 선출된 대통령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 섭섭한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우리는 왜 이렇게 미국 앞에 비굴해야 하나. 여하튼 다양한 감정을 느꼈는데 한 일분쯤 이런저런 감정을 느끼고 그만 두었다. 기분 좋고 '평화로운' 저녁에 할 짓이 못된다. 그래서 또 밥 먹고 샤워하고 브라질 친구와 멕시코 친구와 노닥거렸다. 그들은 게스트 하우스를 나가서 새벽 4시까지 살사를 추다가 돌아와서 말 그대로 뻗었다. 밥도 안 먹고. 어떻게 밥도 안 먹고 밤새도록 춤을 춰댈 수 있는지... 이 나라의 무궁한 저력 앞에서는 도무지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한겨레, 중앙, 오마이뉴스, 뉴스위크, 뉴욕타임즈, 와이어드. 조선일보는 늘 마지막으로 읽었다. 다 읽고난 후 마지막으로 조선일보를 보면 여러 모로 신선했다. 그리고 이런 기괴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잘 이용해서 이익을 볼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도 했다. 앞으로 변화한 나 자신에게 적응하려면 조선일보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데에서 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어쩔 수 없이 닭대가리, 돌대가리, 머저리가 되어 가는 것은 자연의 순리다. 일부는 자신은 아니라면서 끝까지 저항하지만, 그 자신을 좀 더 닭대가리같아 보이게 치장하는 역할을 하는 정도다. 인풋에 대한 소화력은 떨어지고 타성에 젖어 생활에 쫓기게 되고 호기심과 정열은 사그라들고 이런 모든 현상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뇌세포의 자살이 있고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니까. 늙은이들의 닭질을 비웃던 내가 늙어가고 있으니, 한동안은 스스로를 조롱하느라 바쁠 것 같다. 마치 조선일보를 욕하듯이. 흐흥...

돈을 달라고 구걸하는 거지도 있지만, 기타 하나 들고 노래를 부르면서 구걸하는 마리아치도 꽤 되는 것 같다. 노래를 잘 불러서 하는 수 없이 2페소를 건네주었다. 노래를 잘 하는데야... 왠간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러 갔다. 메히꼬 시티(시우다드 데 메히꼬가 맞다!)에 도착하니 지금까지 돌아봤던 멕시코의 도시들과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삭막하달까.

지하철 역에 들어서자 각 역을 상징하는 아이콘들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문맹자들을 위한 배려인 것 같다. 환승 역에는 처음 보는 종류의 프랙탈 사진들이 복도를 따라 진열되어 있었다. 복도의 한 부분은 전기가 나갔는지 어두컴컴했다. 지나가보니 천정에 별자리를 그려놓은 곳이다. 지나가는 동안 즐거웠다. 그러면서 시시껄렁한 한국의 지하철 '벽화'들이 생각났다.

멕시코 시티에는 일종의 집단적 히스테리가 존재했다. 어느 가게를 가던, 아주 작은 가게라도 탈출구를 가리키는 표식판이 있었다. 그간의 끔찍스러운 지진이 이들의 정신상태에 끼친 영향이 대단한 것 같다.

성당 둘과 정부 관사에서 보쉬 Bosch를 연상시키는 리베라 Rivera의 '멕시코 전근대사를 주제로 한 혁명화'를 구경했다. 멋지다. 조금 있으면 리베라의 연인이었던 Frida Kahlo의 영화가 극장에 걸릴텐데... 헐리웃의 유명 여배우들 사이에서 그 역을 맡으려고 경쟁이 치열했다던데... 근처의 꼬요아깐에 가면 그녀의 연인에 대한 신경질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구경할 수 있다던데... 갈까말까... 하지만 리베라의 그림 보다는 과달라하라에서 보았던 오로스꼬 Orozco의 그림이 더 내 취향에 맞았다. 어쨌거나 두 화가 모두 재밌는 색깔들, 이를테면 서구 예술에 찌들어버린 동태눈으로 보았을 때, 색감이 매우 신선하고 강렬하다. 왜 프랑스에는 가면서 멕시코에는 예술 하러 오지 않는 것일까. 평생 예술 할 분위기가 팍팍 느껴지는 곳인데... 음식도 맵고 맛있고...

박물관에 들어가려니 입장권을 사라고 독촉했다. 거의 반사작용이 되어 버렸는데 '소이 에스뚜디엔떼' i'm a student라고 말하니까 아무 말 없이 그냥 들여 보내주었다. 알고보니 가이드북에는 입장료가 적혀 있었고 학생 할인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더 뒤져보니 학생 할인이 언급된 곳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땡 잡았다! 경험상, ISIC가 있으면 박물관은 무조건 무료였다! 세상에 이런 멋진 나라가 존재한다.

어쨌거나 들어간 박물관이 Templo Mayor였는데 사전 정보 없이 들어갔다가 비참한 기분이 들어 허겁지겁 나왔다. 아즈텍 문명에 관한 대단한 규모의 박물관이었고 보다가 기가 질려서 나왔다. 스스로가 쪽 팔렸다. 아즈텍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 공짜로 들어가서 너무 미안했다. 관련 유적군을 다 돌고나서, 공부도 좀 하고 나서 봐야지 이해가 가는 장소였다. 죄책감마저 느껴진다. 유럽사는 달달 외면서도 아시아 문화권과 아메리카 문화권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이... 아무리 생각없이 하는 여행이라지만 그들에게 다소간의 예절은 갖춰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시쯤 소나 로사 Zona Rosa를 찾아 헤멨다. 장미의 지역? 핑크빛 구역? 이름이 왜 그 모양인지 가자마자 알았다. 내 취향에는 안 맞는 동네다. 멕시코나 미국의 부자들이 엘레강스를 즐기는 곳 쯤? '서울 수퍼'가 눈에 띄었다. 멕시코에 교포가 엄청나게 많이 산다던데 한국인은 꼬리조차 구경해 본 적이 없다. 8시쯤 돌아올 때는 거리가 텅텅 비었다. 마치 LA의 기분나쁜 밤거리를 연상시켰다. 드문드문 거지같은 차림의 일없는 애들이 거리에 서서 지나가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밤에 한가하게 나돌아 다닐만한 분위기는 아닌 듯 싶다. gps에 만사를 맡겨 놓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건 길을 잃어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1시간 20분 쯤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어제, 그제 왜 애들이 거리를 할보하며 축제를 벌였고, 오늘 밤 광장에서 왜 축제가 벌어지는지 알았다. 3월 20일이 춘분이다. 봄이 오는 것을 축하하는 축제다. 미국인과 얘기하다가(대체 여긴 왜 이렇게 미국인이 많은 거야!) 그가 equinox(춘분)를 이해하지 못해서(게다가 만나는 놈마다 하나같이 무식하다, 심지어 엊그제 뉴욕에 산다는 일본애는 돈 끼호떼나 세르반떼스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개나 소나 다 아는데...) 한참 곰곰히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궁리했다. 그러다가 생각난 것, 그러니까 춘분은 말이야... 해가 정동(90)에서 떠서 정서(270)로 지면서 해가 떠 있는 시간과 해가 없는 시간이 각각 12시간이 되는 일년에 두 번 있는 천문학적인 이벤트를 말하는거야. 피라밋과 아즈텍의 피라미데스나 여러 고대 건축물 이를테면 스톤헨지나 한국의 첨성대 같은 것들은 춘분 때 정확하게 그 한 사면이 빛을 받도록 되어있지! 아...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히게 설명 잘했다. 농경술과 춘분의 관계에 관한 얘기를 하려다가 단어가 막혀서 더 설명할 수 없었다. 농경술과 천문학의 관계, 즉 문명의 태동과 천문학의 관계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잘난 척 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건축물을 지을 때 equinox와 solstice에 맞게 지은 것을 고대인의 대단한 지혜 운운 하던데, 뭐가 지혜인지 모르겠다.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일관성을 찾아내는 것은 지혜가 아니고 그냥 과학이라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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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여행기를 두 편 읽었다. 여행하는 동안 저런 종류의 여행기는 쓰지 말아야지 재삼 다짐하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을까? 흠... 잘 살 수 있다. 이전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들에게 잘해줘봤자 별로 돌아오는 것 없이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애인이나 어머니 정도에게나 잘해주면 그만이다.

거리를 헤메며 쓸만한 바를 찾아봤지만 시끄럽거나 어두침침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내키지 않는다. 거리에서 마리아치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들으며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하루 종일 바람을 맞아 입술이 트고 피부가 일어섰다. 자리를 떠서 조금 걷다가 뭔가 주머니가 허전해서 뒤져 보았다. 지갑이 없다. 원래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가니 지갑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침. 체크아웃. 거리 어딘가에서 산 미구엘 데 아옌데로 떠나는 버스가 있을 것 같았지만... 없었다. 거리에는 어제처럼 애들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고 길이 막혀 버스를 1시간 후에야 탈 수 있었다. 계산해 보니 지난 1주일 동안 200달러 가량을 썼다. 유일한 호사가 평균보다 40% 비싼 버스를 딱 한 번 탄 것 뿐인데?

역시 똥같은 가이드북 때문에 대체 숙소가 어디 붙어있는건가 고민하다가 관광안내소에서 도움을 받았다. 국제 학생증을 내밀고 할인해달라고 하니 해준다는 것이 0.5$였다. 산 미구엘 데 아옌데는... 대체 멕시칸들은 이렇게 긴 이름의 도시를 어떻게 줄여서 부르고 있을까... 과나후아또 보다 덜 현대화 되어 있고 더 규모가 작았다. 예술학교가 예쁘게 생겼다. 애당초 구경만 하고 멕시코 시티로 바로 갈 생각이었지만 시간대가 애매해 하루 머물기로 했다. 숙소에서 추천받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대낮부터 맥주를 한 잔 했더니 알딸딸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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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뜨거운 물로 샤워. 때가 밀린다. 도미토리에는 아무도 없다. 완전 싱글룸이다. 이 아름다운 중세 (껍데기) 도시의 밤 하늘에 99% 찬 달이 떠올랐다. 두근두근...

각종 바에서 쿵작거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발코니를 열어 놓았더니 취한 목소리의 한국어가 들려왔다. 반가운 마음에 꼬리를 흔들며 발코니로 달려 나갔다가 한 떼거지의 한국인들, 특히 여자들을 보고 기가 죽어서 슬며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마도 어학연수 온 학생들이 뭉쳐서 술 한 잔 한 것 같아 보인다. 그냥 나그네의 고독을 씹기로 했다.

빛과 바람과 별들만 찾는 곳에 안온히 며칠 쉬고 싶다 -- xxx

내가 지금 그 비슷한 곳에 있긴 하다. 빛과 바람과 관광객들만 찾는 곳이니까. 그나저나 저런 걸 시라고 쓰는 작가도 있는 것 같다. 누군가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어는 1943년에 죽었다. 1943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한국어가 뒈졌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삐삘라 언덕에 올라갔다. 영 실망스러운 도시 전경이다. 직접 걸을 때는 이국적이고 멋졌지만 전경은 꽝이랄까... 뮤제오 모미아스까지 걸어갔다. 미라를 무더기로 쌓아놨는데 임산부들 배가 꺼진 상태로 곶감처럼 말려 놓은 모습이 웃기고 나란히 앉아있는 애들도 웃겼다. 남 시체 보고 웃으면 안되는데 웃음 밖에 안 나온다. 뗌쁠로 라스 발렌시아노를 보러 한 시간을 기어 올라갔다. 차로 내려올 때는 5분 밖에 안 걸렸다. 무제오 이코노그래휘꼬에 들렀다가 숙소로 돌아와 잠시 쉬는 중. 싸고 마음에 드는 게스트하우스가 있으면 며칠 더 쉬다 가려고 했건만 보이지 않았다.

오늘 식사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2.3$ 가량에 4 가지 음식에 음료수, 그리고 입가심으로 푸딩까지 나왔다. 배가 불러서 더 이상 먹지 못할 지경이 되어 음식을 남겼다.

위키, blog 재조직. 사진 업로드. 작품 사진이 아니고, 메모리가 아까워서 화질이 더 떨어지더라도 사진을 좀 더 압축했다. 사진을 이미 1600장 이상 찍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기억 속에서는 더 많은 사진이 있는 것 같다. 아마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지웠는데 머리 속에는 남아 있는 것 같다.

Back to Iraq 2.0 노트북과 위성전화기를 들고 이라크로 들어가서 bLogging을 하겠다는데... 이 친구 왠지 마음에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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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기/Mexico 2003. 3. 19. 12:32
Los Mochis -> Guadalajara -> Guanajuato. 22hrs.

멕시코에는 세 종류의 시간대가 존재했다. 티후아나는 바자 캘리포니아의 GMT-8, 로스 모치스 부근은 -7, 그리고 과나후아또는 -6. 모치스에서 버스가 왜 안 오냐며 이 사람 저 사람 괴롭히다가 그 동안 시각을 안 맞추어 한 시간 일찍 와서 뻘짓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떠나는 마당에 인터넷 주인은 한 시간 이용하면 십분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쿠폰을 은근히 건네주며 빙글빙글 웃는다. 숙소 녀석도 청소하다 말고 내 얼굴을 쳐다보며 빙글빙글 웃고, 숙소 밑의 토플리스 바의 기도 녀석도 빙글빙글 웃었다.

교통비와 숙박비가 워낙 펑펑 나가서 앞으로 주로 밤차를 이용하게 될 것 같다. 단지 한 시간 늦잠을 잤다는 이유로 마사뜰란행을 포기하고 과달라하라로 가기로 했다.

과달라하라에 아침에 도착하자 마자 짐을 버스 터미널에 맡기고 쎈트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차가 오지 않았다. 같이 버스를 기다리던 멕시칸과 눈이 맞아서 난 영어로 떠들고, 그는 에스파뇰로 떠들었지만 어떻게 잘 되서 택시를 타고 10킬로미터를 싸게 달렸다. 어떻게든 대화가 된다는 것이 매우 신기했다.

시내에 볼거리가 몰려 있어 편했다. 박물관 3, 성당 4, 광장 3, 관공서 빌딩 2, 고풍스러운 18세기 극장 하나, 이렇게 돌아다녔는데 입장료를 한 푼도 받지 않아서 놀라웠다.

관공서 빌딩의 계단에 그려진 어떤 화가의 30m짜리 벽화를 보고 입이 쩍 벌어졌다. 이렇게 멋진 색채의 혼합은 처음 본다. 붉은 갈색의 폭풍, 물어물어 화가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 두었다. 그 화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마티스가 생각났다.

이 빌어먹을 가이드북은 버스 번호만 적어놓고 버스를 어디서 타는지 안 적어 놨다. '버스 터미널'이 에스파뇰로 뭔지 몰라 거리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봤지만 아무도 모른다. 맞는 버스 번호인 것 같아 잡아 타고 운전수에게 꼭 버스 터미널에 내려 달라고 부탁했건만, 버스는 엉뚱한 곳을 달리다가 생판 이상한 깡촌에 도착했다.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는 40분 후.

사람들이 몰려들어 나를 쳐다보면서 무슨 말이라도 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수줍어서 말도 못 걸고 내 얼굴만 쳐다보면서... 누군가 'hello'라고 말할 수 있는 친구를 데리고 왔다. 내가 질문을 하고 그가 간신히 대답을 하면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었다. 내가 묻는 말에 그가 곧잘 영어로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아... 깡촌... -_-

10분쯤 그짓을 했지만 박수치고 휘파람 부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더 묻고 싶은 것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아무도 날 볼 사람이 없는 곳에 오면 하게 되는 이상한 짓거리들을 조금 했다. 아무도 안 보니까... 한 녀석을 붙잡아 서로 등을 맞대고 열 발자국 걸어간 다음에 뒤로 돌아 빵 쏘면 누가 더 멋있는 폼으로 죽는 연기를 하나... 마을의 청년들과 일대일로 서부식 결투를 벌였다. -_-

그짓으로 30분을 보내고 나니 선인장만 횡하니 서 있는 그곳에서 드디어 버스가 출발했다. 버스 터미날을 쎈뜨랄 데 아우토부세스 Central De Autobuses 라고 부르는 것 같다. 망할 놈에 가이드북에는 그런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정보를 적어놓지 않았다. 에스파뇰 모르면 죽으란 말이냐?

과나후아또 행 버스는 이루 말할데 없이 럭셔리 했다. 이렇게 럭셔리한 버스는 처음 타 봤다. 하긴 이제껏 시간당 30페소로 계산했는데 이번에는 시간당 60페소로 계산해야 했다. 4시간에 256페소(25$)가 나와 기가 질려 버렸다. 어쩌나, 버스 터미널의 길이가 2-3킬로미터고 모듈이 6개나 있고 거기에 있는 버스 사무실이 100개가 넘고 그중 열 군데 이상을 배낭 메고 표를 구하러 다니다가 기진맥진해 버렸고 시간은 자꾸만 가고 있는데...

그래서 과나후아또에 저녁에 도착했다. 터널을 지나서 위로 기어 올라가니까 도시 중심부였다! 오오... 유네스코는 그래서인지 아예 도시 전체를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해 버렸다. 그나저나 이 빌어먹을 가이드북에는 싼 숙소가 딱 한 군데만 지도에 표시되어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숙소는 종종 사람들이 몰려 방을 잡기가 힘들다고 적혀 있었다. 왠걸, 들어가니 일본인 둘 밖에 없었다. 지난 5일 동안 여행자라곤 지금 본 일본인 둘이 전부다.

광장 벤치에 앉아 옥수수와 콜라를 먹었다. 아무 것도 안해도 흐뭇하다. 어쩌면 여기서 며칠 퍼져 있을 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면 만족한다. 배도 부르고... 더 먹고 싶어도 배가 차서 먹지 못한 적은 중국 여행 할 때 빼고 이번이 두번째다.

그나저나 과달라하라에서 부터 주욱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곳에는 혼자 와서는 안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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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exed air

여행기/Mexico 2003. 3. 18. 05:46
2003.3.16

고작 이틀 여행한 미국에 관한 단상: LA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려면 조그만 기계에 지폐나 크레딧 카드를 넣고 지극히 제한된 기능을 사용할 수 있었다. USB 포트는 물론이고 cd-rom이나 플로피를 엑세스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브라우저는 말 그대로 브라우징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유로운 나라인 것 같지만 이런 식으로 무슨 무슨 룰이다 규칙이다 원칙이다 해서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 불편한 부분이 많았다. 자유롭다는 것 하나를 위해 사회적으로 지켜야 할 의무가 많다는 점에서 미국이 한국보다 나은 점을 모르겠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썩 마음에 들지 몰라도 내게는 이래저래 정 떨어지는 나라다.

우유를 마셨다. 팩 겉포장에는 소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염소젖 맛이 났다. 동네에서 벌어진 애들 축제를 구경했다. 이 동네에는 그런 것 외에 볼거리가 아무 것도 없었다. 애들 축제라서 부모들은 히주그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기억났다. 말레이지아의 타이핑(태평)이 이랬다. 그저 빈둥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던 곳.

식사는 매번 감동적이었다. 2 USD 안팎에 뭔지 모르는 음식과 콜라를 먹었다. 먹다가 감격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음식이 맛있는 것일까. 옥수수 가루로 만들어 딱딱하게 튀기거나 찐 베이스에 고기와 야채를 듬뿍 얹고 거기에 고추 소스를 듬뿍 뿌린다. 모든 음식이 그런 모양이다. 그 두께가 한 입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컸다. 곁들여 먹는 고추와 오이 절임 맛은 환상적이었다. 따뜻한 그것을 씹다가 반쯤 얼은 콜라를 들이키면 목구멍부터 위장이 상쾌해진다. 이름이 뭘까? 무수한 종류의 또르띠야 중 하나같다. 너무 잘 먹어서 벌써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중동에서 앙상하게 말라가던 시절이 생각나 목이 메였다.

멕시코에서는 실내에 들어서면 모자를 벗는 것이 일종의 예절이다. 번번이 예절을 잊었다.

맥주를 마시고 싶은데... 맥주는 보통 식스팩으로 팔았다. 수퍼에서 여섯개들이가 43페소, 그러니까 4$ 미만. 여섯개를 다 먹어치울 수는 없고 한 두개만 사먹으려니 그게 문제다. 코로나 따위 흔해 빠진 것 말고... 떼까떼 Tecate를 먹고 싶다. 보자마자 그놈이 맛있어 보였는데 알고보니 한국의 카스 같은 '국민' 맥주였다.

아침에는 안개가 끼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에 형언할 수 없으리만치 멋진 달이 떠 올랐다. 대낮의 하늘 색깔은 말 그대로 라피스 라즐리 였다. 이렇게 멋진 하늘과 이렇게 멋진 달을 보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배짱이처럼 살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멕시칸은 의외로 부지런했다. 게을러터진 동남아의 못되먹은 남자새끼들, 여자들에게만 일을 시키고 탱자탱자 노는 녀석들과는 조금 달랐다. 하여튼 동남아에서 제일 보기 싫은 모습이 남자들이 일은 안하고 그늘에 자빠져 시간을 죽이며 술과 마약에 쩔어서 쉽게 돈을 벌려고 잔대가리 굴리는 모습이다. 그렇게보면 일과 여가와 삶을 사랑하는 멕시칸이 어쩐지 삶을 제대로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대낮부터 바에 쳐박혀 술을 퍼 마시는 녀석들이 있다. 흠... 온지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 많은건가?

멕시코 여행은 만만치가 않다. 이동비와 숙박비가 장난이 아니다. 이 추세라면 한달에 700달러는 우습게 나갈 것 같다. 한번 이동에 3-40 USD가 날아갔다. 달리 말해 한꺼번에 왕창 움직이고 짱 박혀서 유스 호스텔을 전전해야 할 것 같다. 일단 멕시코시티에 가면 유적지에서 엄청나게 할인을 받을 수 있는 멕시코 국내 학생증을 만들어야겠다.

인터넷으로 아주 많은 일들을 처리 했다. 이제 경로가 슬슬 잡힌다. 로스 모치스는 쿠퍼 캐년으로 가는 입구이자 출구다. 쿠퍼 캐년으로 가는 기차길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정평이 나 있다. 기차는 연착하기 일쑤고 끄릴에서 묵는 하룻밤은 평생 잊지못할 추억이 된다나... 평생에 딱 한번 밖에 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땅인데 가봐야 하지 않을까? 하다가... 피곤해서 안 가기로 했다. 세계 최고, 세계 유일에는 신물이 넘어온다.

깐꾼에서 쿠바의 아바나를 왕복하는 티켓을 230$ 내외에 구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쿠바에 갈 수 있을 것 같다. 기쁘다.

오수연, 이라크 파견 문인. 2년 간의 인도 생활을 바탕으로 '부엌'이란 작품을 냈다.

오늘밤에도 마리아치의 쌩음악이 아랫층에서 흥겹게 들려온다. 해가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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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chdown Mexico

여행기/Mexico 2003. 3. 17. 08:08
2003.3.10

황열병 주사를 맞으러 인천공항에 갔다. 주사를 놓는 사람은 오랫만에 보는 프로페셔널이었다. 그래서 주사 맞으러 가라고 일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얘기했다. 황열병 주사는 10년 동안 유효하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광견병 주사를 맞고 온 줄 알고 있었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만나는 사람들이었다. 음... 나도 걱정이긴 하다.

2003.3.12 서울 -> 인천 -> 나리타 -> LA -> 헐리웃. 22시간.

밤에 술 마시디가 아침 일찍 일어나 허겁지겁 짐을 쌌다. 김포공항까지 지하철로 가고 거기서 인천 국제공항행 버스를 탔다. 인천공항까지 가장 싸게 갈 수 있는 방법이다. 출근하는 직장인 틈에 끼어 배낭을 메고 가는 기분이 묘하다. 그들중 몇몇은 내 배낭을 보고 기분이 싱숭생숭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들이 열심히 일해줘야 나도 여행이 깨소금맛이 날 것 같다.

탑 항공 출장사무소에서 항공권을 받아보니, 6개월 오픈이어야 할 항공권이 3개월 오픈이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따지고 싶었지만 비행기 출발까지 한 시간 밖에 안 남았다. 입국 수속을 해야 한다. 항공사에 가서 오픈으로 되어 있는 날짜를 고정했다. 6월 6일 6시 비행기를 달라고 했지만 없단다. 6월 6일 12시 LAX -> NRT -> ICN 표를 준다. 기분이 매우 엿 같았다.

공항세가 만원인데 3만원을 찾아 2만원으로 뭔가 보람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이를테면 배를 채운다던가... 하지만 300ml짜리 코카콜라를 4000원에 팔아먹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고심 끝에 담배 한 보루와 자일리톨을 샀다. 나리따 공항에서 4시간쯤 시간을 죽였다. 면세점에서 살만한 것들을 눈여겨 보았지만 쓸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배가 몹시 고파서 680엔 짜리 라면을 카드로 긁어 먹었다. 오사카보다 맛이 없다. 화장실에서 롤화장지를 하나 슬쩍 했다. 허겁지겁 짐을 싸느라 못 챙긴 것. 다시 비행기 탑승. 지금까지 내가 타봤던 장거리 비행기중 가장 후진 비행기였다. 어떻게 태평양을 횡단하는데 좌석에 LCD도 안 붙어있고 화장실에 칫솔이 없단 말인가.

2003.3.12 -- 날짜 변경선을 지났기 때문에 하루를 벌다. 사실은 하루를 번다는 것을 깜빡 했다. 표 끊을 때 하루를 당겼어야 했다.

LA 공항에서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일없이 한 시간을 까먹었다. 가이드북의 지도는 스케일이 안 나와 있었다. 물어 물어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잔돈이 없어 민폐를 끼치면서 헐리웃에 도착했다. 체크인 하려니 무조건 기본이 2박 이란다. 1박에 16$. 이러면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데... 어쩔 수 없다.

패스트푸드는 별로 내키지 않아서 여행하는 동안 맥도날드 따위를 찾지 않았는데 미국에 오니 사정이 바뀌어서, 패스트푸드가 거의 그들 주식에 가까웠고 다른 음식들은 비싸서 어쩔 수 없이 햄버거, 조각 피자 따위로 끼니를 때웠다. 레스토랑에는 '저희 식당은 서빙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라고 벽에 적혀 있었다. '셀프 서비스'라고 적어놨더라면 어감이 더 좋았을텐데...

엄청나게 큰 사이언톨로지 빌딩 앞에서 날더러 무료 성격 검사를 하라고 꼬셨다. 테스트 안해봐도 결과가 뻔할 것으로 짐작된다. 설문 문항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정신분열, 신경증, 편집증 운운하는 소리는 듣지 않을 수도 있었다. 건물 규모로 짐작컨대, 사이언톨로지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 만큼 훌륭해 보였다.

헐리웃 스타의 거리를 이틀 동안 여덟 번은 왕복했을 것이다. 그 동안 별들의 방향이 제각각 다른 이유에 관해 쓸데없이 골머리를 썩였다. 헐리웃 블루바드는 동에서 서로 뻗어있다. 불루바드는 동-서를 연결하고 에비뉴는 남-북을 잇는 큰 도로를 지칭하는 것 같다. 상징적인 도식에 따라 별의 방향이 동에서 서로 향해 있으면 사망한 유명 연애인을 나타내고, 서에서 동으로 향한 것들은 아직 살아있는 연애인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추정했다. 다리가 없는 어떤 아저씨가 길을 돌며 스타들의 이름에 매일 광을 내고 있었다. 별들은 헐리웃 불루바드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북을 잇는 도로에도 있었다. 새로 나타난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 북쪽(죽음의 자리)을 향한 것이 사망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만족하며 걷다가 아놀드 슈와제네거의 별자리가 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갖가지 경우의 수를 조합해 보았지만 별들의 모서리 위치가 왜 다른가는 알 수 없었다.

Mann's Chinese Theatre에서 Daredevil을 관람. 매우 훌륭한(세계 최고의 시설이라니까) 돌비 디지탈 사운드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신파조로 질질 늘어지고 있었다. 극장 안에는 나를 포함해 오직 다섯 명 만이 그 영화를 보고 있었다. 학생할인이 되는 줄 모르고 일반표를 10$나 주고 끊어서 속이 쓰렸다. 헐리웃의 유서깊은 극장에서 헐리웃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2003.3.13

LA 지하철은 표 검사를 하지 않았다. 코리아타운에 들러 마른 미역을 사려고 했는데 어디가 어디인지 헤메다가 종국에는 6km를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이럴 때는 GPS가 큰 힘이 되어준다. 덕택에 비버리힐즈 블루바드와 멜로즈 스트릿의 부자 동네부터 중류층의 집 모양까지 두루 관람했다. 곳곳에서 영화를 찍고 있었다.

Hollywood public library의 수준은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도서관을 찾는 가지각색의 사람들과 도서관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왠지 감동적이었다. 한국에서는 도서관 대신에 책방에서 돈 주고 만화책이나 잡지를 빌려보고들 있을텐데... 그러고보니 도서관을 확충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고 시민의식이 그 정도의 두께를 지녀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을 들렀다. 두 번 모두 인터넷을 사용하기 위해서 였지만, 잡지도 보고 SF도 뒤적였다. 분위기가 좋다. 관광지에 여행 와서 이틀 내내 도서관에 짱박혀 있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멕시코는 물론이고 중미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관계로(한국에 있던 2주 동안 낮에는 영화를 보고 밤에는술을 마셨다) 밤이면 호스텔에 짱박혀 '나머지 공부'를 했다. 일본인 몇명과 친해졌다. 뭐니뭐니해도 일본인들은 한국인과 정서가 맞는다. 그래서 음식을 얻어 먹었다. 호스텔의 위치가 환상적이다. 바로 밑에 와인샵이 있으니까. 하지만 호스텔에서 장기 때리고 있는 작자들은 왠일인지 99센트짜리 싸구려 와인 '댓병'만 마셨고, 맛이 영 똥 같아서 술판에 안 끼니까 이 호스텔에서는 술을 안 마시면 나가줘야 한다는 우스개를 들었다. 그 동안 술은 전혀 못한다고 사기쳤다. 녀석들은 물론 그 사기를 믿지 않았다. 친해진 몇 명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런 싸구려 마시다보면 몸이 망가진다... 한 방에 있던 멕시코 녀석은 완전히 고주망태가 되어 밤새도록 웩웩 대더니 다음날 아침에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한 방 사람들은 모두 잠을 설쳤는데... 그러다가 안 사실이지만 호스텔 주인이 한국인이었다. 하여튼 밤마다 술판이 벌어지는, 분위기 죽이게 막 나가는 호스텔이었다.

2003.3.14 LA -> San Diego -> Tijuana -> Los Mochis. 30시간.

호스텔에서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산 디에고로 향했다. 안 가본 녀석들조차 멕시코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해가 안 간다. 그레이하운드는 그동안 들었던 명성에 비하면, 웃기는 버스였다. 티켓에 내 이름을 잘못 적어 놓았다. 그래도 아무 문제 없었다. 왜냐하면 티켓 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까. 2번 타는 동안 제시간에 출발한 적이 없었고 보안검사랍시고 짐을 몽땅 뜯어내 검사했다. 심지어는 지들 버스에서는 좌석 배정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어디에서나 '권리' 얘기를 보면 신경질이 났다. 먼저 온 놈이 좋은 자리 골라타라는 것이다. 그레이하운드는 차가 없는 가난뱅이, 히스패닉, 흑인, 노약자, 그리고 비행기가 무서워서 못 타는 사람들이 타는 것이다. 내 경우에 꼭 들어 맞았다.

태평양을 끼고 달렸다. 에너하임(디즈니랜드)을 지나고 La Jolla를 지났다. 멕시칸 에스파뇰을 좀 알게 되니까 La Jolla가 라 졸라로 발음되지 않고 라 호야로 발음된다는 것쯤은 알게 되었다. 멕시코 루트를 거의 결정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멕시코에 2주는 있어야 한다. 엄청나게 큰 나라다. ... 그리고 남미를 포기해야 한다. 속이 아련하게 쓰려왔다. 컬럼비아까지 안 가고 니카라과나 과테말라에서 페루로 직행하는 방법이 있긴 했다. 그러나 중미를 반쪽 내고 비용을 더 들이느니 중미만이라도 제대로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중미 3개월도 짧다. 그동안 중남미에 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버스 오른편으로 시퍼런 태평양이 하염없이 펼쳐져 있었다.

샌디에고는 멋진 도시다. 이렇게 멋진 도시는 처음 봤다. 멋지긴 한데 게스트북이 영 꽝이라서(이건 여행 초짜나 만드는 종류의 책이다) 인포센터를 찾아 멕시코 대사관 위치를 물어야 했다. 찾아가니 문을 닫았단다. 잠긴 문을 두들겨봐도 응답이 없다. 안에서만 열 수 있는 문. 누군가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닫히는 문을 나꿔채고 고개를 자라 목처럼 디밀어 투어리스트 카드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물어보니 월요일에 오란다. 잠깐만 시간 내주면 안되냐니까 그게 시간이 많이 걸린단다. 그러면서 토요일, 일요일은 문을 안 연다나? 오늘이 금요일인데... 투어리스트 카드 없으면 멕시코 여행 못한다. 월요일까지 기다리면 3박, 최소한 100$이 일없이 깨진다. 후유... 100불이 깨져도 받아야지 어쩌겠나.

멋진 거리를 낙망한 채 걸어서 호스텔에 찾아가니 예약을 안했고, 또, 방이 꽉 차서 숙박할 수 없단다. 샌디에고의 모든 호스텔이 그랬다. 상황이 이럴진대... 사용할 수 있는 옵션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오션 비치 호스텔로 가보라며 친절하게 전화까지 해 주었다. 그에게 지금 국경을 넘을 수 있냐고 물으니 멕시코 영사관에 가서 어플리케이션을 작성한 후 투어리스트 카드를 받아야 한단다. 그건 월요일에나 가능한데? 벌써 오후 4시. 무거운 배낭을 메고 2시간을 넘게 걸었는데 쉬지도 못하고... 혹시나 해서 멕시코 영사관에 전화질 두 번, 자동 응답기가 받는다. 지난 3일 동안, 미국 사람들이 참 친절하긴 한데 '그들을 귀찮게 할 권리가 없기 때문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이를 갈다가, 되던 안 되던 국경에 가서 졸라 보기로 했다. 안되면 다시 샌디에고로 돌아와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 3일 머무르기로 하고 아름다운 트롤리를 탔다. 안 되면 밤 9시가 넘어서야 숙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악운의 연속이다. 별것이 다 사람 고생시키는구나 하고 시발시발 거렸다. 한떼의 경찰관들이 차안에 올라와 표 검사를 했다. 1시간쯤 지나 멕시코 국경에 도착.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물어물어 멕시코 이민사무실을 찾았다. 국경 구조가 이상하게 생겨서 끝내 미국 이민 사무소에 들르지 못했고 출국 스탬프를 찍지 못했다.

허무하게도 멕시코 이민국에서 투어리스트 카드를 바로 발급받을 수 있었다. 가이드북, 호스텔 주인, 투어리스트 오피스 사무관, 심지어는 멕시코 영사관 직원까지, 모두 잘못 알고 있었다. 국경에서 그냥 발급받을 수 있다! 180일 짜리를 받으려고 옥신각신 하다가 내 미국 체류가 11월에 끝난다며(6개월짜리) 90일짜리를 주려고 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개기면서 우겼더라면 180일 짜리도 가능할 것 같았지만(180일 짜리를 얻기 위해 멕시코를 정말로 사랑할 마음의 준비까지 되어 있었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오후 6시. 국경을 나오면서 환전하고 근처에 즐비한 토플리스 바의 삐끼들과 환담하고(이렇게 인상 드러우면서 친절한 삐끼들은 처음 봤다) 물어 물어 다운타운으로 가다가 마음이 바뀌어 900km 떨어진 Los Mochis행 버스에 올랐다. 그후 19시간 동안 타코스 하나 먹은 것 빼고는 쫄쫄 굶었다. 의자가 푹신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집채만한 선인장들이 도로 양쪽에 늘어서 있었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본 것이라고는 작살처럼 내리꽂는 햇살과... 오직 선인장 뿐이었다. 샌 디에고가 자꾸 눈에 밟혔다. 그렇게 좋아보이는 도시에서 하루도 있어보지 못했다. 버스는 일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2003.3.15 3pm

이런 적이 없었는데, 모치스에서 한참 길을 헤메고 나서야 게스트하우스를 찾았다. 가이드북(이번 것은 제대로 된 것이지만)의 주장에 따르면 멕시코의 버스 터미널은 배낭 여행자를 엿 먹이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혼란스럽단다. 이해가 간다. 이 조그만 도시에 버스 터미널만 여섯 개가 있고, 나는 내가 어느 터미널에 내린 것인지 30분 동안 거리를 헤메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여하튼 게스트하우스는 토플리스 바 위층이다. 환상적이다. 두 말 없이 체크인 했다. 달러로 환산해서 9.5$ 가량. 싱글룸 without bath. 번번이 입구를 헷갈려 토플리스 바로 들어가다가 멈칫했다. 김유신이 된 기분이다.

싸다는 멕시코지만 미국 물가의 1/2 수준이다. 인터넷 1$/hr. 우유 0.8$, 물 500ml 0.3$. 타코스+샐러드+소다 2$. 여러 면에서 보건대 멕시코는 터키보다 잘 살았다. 그 점이 놀라웠다. 그동안 멕시코에 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중동인 처럼 친절하고 왠지 재미있었다. 인상을 쓰고 있다가도 낄낄 대고, 점잖은 척 하다가도 낄낄 대며 장난을 쳤다. 아무나 보고 아미고(친구)라고 불렀다. 아미고, 화장실이 어디야? 다섯 블럭 떨어져 있는데 내 택시를 타고 가지 그래, 아미고? 아미고, 나는 돈을 사랑해.

멕시코에 오자마자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을 했다. 오렌지를 샀다. 1킬로그램에 0.3$. 한국에 있던 2주 동안, 오렌지가 무척 먹고 싶었지만 비싸서 못 먹었다. 오렌지 쥬스가 아니라, 까 먹기가 귀찮은 오렌지가 먹고 싶었다. 아... 그런데 저녁 바람이 불자, 바에서 마리아치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밴드가락이 흘러 나왔다. 게스트 하우스에는 나 말고 투숙객이 아무도 없다. 다들 밑층이 밤새 시끄러워서 돈을 조금 더 주더라도 다른 곳에 가는 모양인데, 이렇게 바에서 '아미고들'이 연주하는 음악 소리를 무료로 들을 수 있는 곳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코로나 맥주 한잔? 오늘은 피곤해서 그만 자련다.

2003.3.16

자다 깼다. 아침 6시. 거리에 안개가 잔뜩 끼어 있다. 꿈을 꾸었다. 깨었을 때는 내가 한국에 있는 것으로 잠시 착각했다. 많이 피곤했나 보다. 어깨가 많이 뻐근하다. 얼굴이 벌써 새까맣게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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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A.

여행기/USA 2003. 3. 13. 08:38
Wonderful. after twelve hours on the air, I'm now in L.A. here's LA public library located on the center of Hollywood. they have free internet kiosk but there's no way to use korean or do something else. even i can't set encoding mode when i read korean email. how nicely strictly configured machine. so i said Wonderful. i'm not trying to be cynical, i really mean it.

it tooks 2 hours from airport to hollywood because my fucking guidebook has very poor map and guidance. if i knew where's Greyhound bus depot in Hollywood, i may going to San Diego today and then going to Mexico tomorrow. but simply late now. i'm now engineering most optimistic route before going to Mexico. i have reason to do......

when i was in Inchon airport, i was very disappointed because travel agency gave me air ticket valid only 3 months. she didn't carefully listened my word when i order ticket. so she thought me need ticket valid until June, not 6 months. even worst, they didn't send me air ticket to my home so i didn't know that till arrive at airport, before departure. i coudn't sleep well in the plane. some people enjoy this news... i'm not. :(

this is my second visit of hollywood. not much changed from several years ago. i saw a silly guy try to clean up winona rider's pedestrial cooper signs on the street. je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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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준비

잡기 2003. 3. 12. 02:16
동대문을 뒤졌지만 쓸만한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싸지도 않고. 연신내 지하철 역 지하에서 보았던 가방들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 듯. 동대문에서 허탕치고 연신내 역에서 가방을 샀다. 인라인을 타는 작자들이 쓰는 종류의 가방인데 튼튼하고 실용적으로 만들었다.

앞으로 8시간 가량 남은 셈인가? 떠나기 전날 후다닥 짐을 싸는 것은 여전한 듯. 그 대신에 지난 2주 동안 술 마셨다. 음... 그래서 비행기 타고 가는 동안 루트를 짜기로 했다. 졸거나 자지 않기만을 빌 뿐이다. 지금은 LA 공항에서 숙소 가는 길도 모른다. 똥 싸다 말고 미국에 가는 것 같아 뒤가 찝찝하다.

결국 사려다가 못산 책들:
336609. [도서]잉카속으로
276940. [도서]라틴 문화 여행: 배낭 여행의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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