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즈버리 로드에서 바라본 홍콩섬의 야경: 내 말이라면 뭐든지 잘 참고 들어주는 여자와 언젠가 한번쯤 다시 가보고 싶은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맥주 한 캔 따고 담배 한 대 물고 물고기가 한 마리도 살지 않는 시끄러운 홍콩만의 어두운 하늘에 펼쳐졌던 불꽃 놀이를 멍하니 쳐다보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생각 없이 사는 덕에 행복의 본질을 알고 있다고 회자되는 물고기에 관해 생각 하다보니 문득 낚시가 하고 싶어졌다. 동향 사람으로, 약간 제정신이 아닌 이외수의 주장에 따르면 낚시란 자기 마음을 낚아 우주에 방생하는 것이라고 한다. 평생 낚시를 해서 물고기를 한 마리도 낚아본 적이 없는 내가 과연 내 마음을 몇 마리나 낚을 수 있을까? 마음들을 낚는데 적합한 미끼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성의 호수 어느 지점에서 어떤 깊이에 찌를 드리워야 제대로 낚을 수 있을까? 적어도 미끼로 사용해 보았던 돈, 예쁜 여자, 아름다운 싯귀, 대칭의 아름다움, 빼어난 기술, 천재적인 영혼의 번쩍임, 불을 뿜어내며 저 먼 우주로 희망을 찾아 날아가는 로켓 등등으로는 낚을 수 없었다. 낚은 다음 방생에도 문제가 있었다. 절대 4도의 어두컴컴한 우주에 마음을 놓아주면 그 즉시 꽁꽁 얼어붙고 말 것이다. 이외수 바보. -_-
'나'에 관한 유일한 전문가인 '내'가 내 마음을 낚을 수 없다면, 타인이 내 마음을 낚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아니다. 그들은 때로 버려진 구두짝이나 눈 먼 마음쯤은 낚았을 것 같다. 아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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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텔을 해지하기로 했다. 12년 동안의 '구질구질한' 천착은 이것으로 끝이다. 잡기 몇 개 이동.
2002-04-07 잡
바보인 척 하다가 바보가 아님이 탄로난 사람들의 말로는 매우 끔찍했다.
악어가 풀장에 반쯤 떠서 건들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어떤 이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거기 있을 권리가 있다. 상어 따위는 쨉도 안되는 최강의 육식동물인 악어가(수륙양용) 마이애미에서 <사회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왜냐하면 악어는 거기 있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철십자훈장이 어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두말 할 것 없이 받으러 갔다. 어? 감독이 페킨파잖아? 영화는 밝고 맑은 소녀들의 합창으로 시작했다. 영화 보다가 맛이 갔다. 역시 샘 페킨파였다. 와일드 번치를 보다가 맛이 간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인상파가 미술계의 콧잔등을 한 방 날려준 충격과 비슷할 것 같다. 인상파의 그림 만큼은 제대로 보고 싶다. 인상파의 그림은 술먹고 거리로 나와 맞닥드린 갑작스러운 강렬한 햇살에 눈물을 글썽이며 바라보았던 세상과 정말 똑같았다.
가이 피어스가 주연한 타임머신이란 영화는 뭘 하자는 영화인지 잘 몰라서 다 보고 나서 파일을 지우고 머리속에서 지웠다. 첫번째 볼 때는 심지어 잠이 들기도 했다. 영화 볼 때마다 '언제나 문제는 여자였다' 류의 신파를 보고 있노라면 심정적으로 공감이 가지만 저런 이상한 해결 방식을 원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스티븐 박스터는 웰즈에 대한 존경심으로 타임 쉽스를 쓴 것 같았는데 웰즈의 증손자인지 하는 감독 작자는 할아버지를 헐리웃에 싸게 팔아 엿 먹인 것만 같다.
'당신은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실존적인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과연 누가 우주선을 탈 수 있는가 라는 얘기를 하면서 한 일본인이 지극히 유창한 영어로 해설했다. 실존적인 충격? 웃기잖아? '우주로 나가기 전 우리 자신 역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스스로에게 질문해 볼 것: 나의 위장은 얼마나 튼튼한가.' 거럼. 저 웃기는 일본인 이론 물리학자는 무척 낯이 익은데... 칼 세이건 이후로 가장 재밌는 작자. 이것 저것 뒤지다가 기억났다. 미치오 가쿠의 책이 워낙 재미있어서 낄낄거리며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 생각이 나서 서점에 선 채 뜬금없이 엘레간트 유니버스를 읽다가 나왔다. 책 제목이 웃겨서였다. 그쪽 책을 읽으면 어쩐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 늘 기분이 상쾌해졌다. 미치오 가쿠가 나오는 다큐멘타리로 돌아가서: 최근에 본 다큐멘터리 중 가장 재미있었다. science frontier 시리즈. 이어지는 인용...
18개월 걸리는 화성 여행은 플라즈마 엔진을 쓸 경우 90일 정도로단축될 수 있는데, 이것은 인류에게 정말 반가운 소식이죠.
동감이다.
90일 동안 바이오 플렉스에서 땀과 오줌을 거른 물을 재활용하는 우주인들은 어떤 사람이 하루에 몇 번 화장실에 가는 지 조차 알게 됩니다. 그들이 90일 동안 같이 사이좋게 지내려면 유머 감각이 필요하지요.
동감이다.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은 재밌다 - 월트 디즈니
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다큐멘터리 속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공통적으로 15년 이내에 외계로부터 생명체의 흔적 또는 생명체를 발견하게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예전의 미치오 가쿠는 약간 미친 것 같은데, 인류의 윤리와 종교, 신학 등 가장 지랄같이 안 변하는 것들이 뒤집힐 것이라고 말했고 사실 그건 그의 작은 소망인 듯 싶다. 뒤집히는 것은 좋은데 인류는 그때쯤 가장 꼴사나운 모습을 현란하게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해 보았다. 나는 sf를 많이 봐서 준비가 철저하기 때문에, 외계인을 만나게 되면 하나도 떨지않고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새로운 성경: 인간의 품에 안긴 갓 태어난 외계 생명체를 보기 위해 세 명의 불칸인이 그들이 귀히 여기는 초광속 엔진을 들고 누추한 실험실을 찾는다. 새로운 세기는 after et, before et로 나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집집마다 이런 팻말도 걸릴 것이다: 개와 외계인은 출입금지. 외계인은 이스라엘 인들의 사리사욕에 의해 처참하게 희생된다. 그들의 동강난 몸뚱이는 라그랑지안 포인트에서 30년 동안 다른 외계인들에 대한 본보기로 아무렇게나 전시된 채 지나가는 우주선에 축구공처럼 이리저리 채인다. 그러다가 지능을 갖춘 분노한 외계 미생물들의 복수에 의해 인류는 거의 멸종하며 그중 극소수가 인류 대이주 계획에 따라 우주 곳곳에 뿔뿔이 흩어진다. 동태였다가 해동된 루크는 지하드를 다짐하며 빅토리녹스 한 자루 쥐고 20명의 쭉쭉빵빵 블론디 특공대와 함께 알파 센타우리에서 인류의 장래를 건 최초의 전투를 시작한다.
lu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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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2-28 페트로스키
일 안하고 주욱 놀면서 여섯 사막과 일곱 바다를 건너다보니 정서적으로 매우 황폐해졌습니다. 예쁜 아가씨들을 봐도 우스꽝스럽기만 하고 알고 있던 사람들은 최근에 모두 외계인으로 밝혀졌습니다.
lu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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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07 오류와 광기
볼륨을 있는 대로 올려 outer limits의 20분 짜리 잡동사니 클래식 the scene of the pale blue를 듣고 갱생했다. 이런 류의 음악은 따뜻하고 빨간 심장에 따뜻하고 빨간 피가 돌게 해 주었다. 심지어 미래에 대한 가열찬 희망 마저 느끼게 해 주었다. 모든 잘 만든 예술 작품들은 거울에 비친 날개를 공통적으로 연상케 했다. 날고 싶다는, 날 수 있다는, 날아봤다는 달콤한 복감적 환상과 혼동, 그리고 세계속으로의 상쾌한 추락을 동반하며.
아마도 제목이 long love letter 였던 것 같다. 매우 못마땅하고 인정하기 싫은 기분나쁜 사실이지만,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단 한 종류의 소설만이 존재했다. 1편에서 그는 얼빵하게 생긴 학생들을 상대로 칠판에 아인슈타인적인 세계선을 그리며 '지금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는 헤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지금을 살아야 한다'고 중얼거리면서 자신이 동경하던 여자에게 다가가는데 갑자기 생긴 모종의 신비스러운 폭발 사고로 그와 그녀와 학교가 통째로 날아갔다. 보다가 입을 쩍 벌렸다. 마음 깊은 곳에서 2편은 안봐도 된다는 모호한 기쁨이 슬금슬금 솟아나왔다. TV 시리즈물 드라마란 그렇게 시작해서 사꾸라 정신으로 끝 맺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다는 어떤 제품이 정말로 가능한가 하는 따위의 논쟁으로 32시간을 보냈다. 성냥개비 모양으로 생겼다. 땅에 꽂으면 30일 후 꽃이 핀다고 한다. 3개월 후에는 딸기를 따먹을 수도 있다고 했다. 제 3차 농업혁명이라고도 했다. 쓰잘데기 없는 꽃이야 그렇다치고, 화분에 성냥개비를 꽂아 놓고 90일 동안 너는 정말 딸기가 될 수 있는거냐? 라는 회의적인 시선으로 뚜러지게 쳐다보고 있는데도 과연 딸기가 생길지는 의문이다. '철학적으로' 그것이 딸기 모양을 하고 딸기 맛이 나는 딸기의 오마쥬 내지는 파스티쉬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시련과 스트레스를 딛고 꿋꿋이 자란 빨갛고 달콤한 딸기를 먹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2시간 동안 모두의 마음을 철저하게 황폐하게 만든 토론을 마친 후, 한 근에 2000원 하는 딸기를 사다 먹었다. 먹으면서 심수봉의 '딸기 밖에 난 몰라'라는 노래를 들었다.
lu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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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31 donde voy...
워낙 단순무식한 국제정세 탓에 자나깨나 부시 생각을 하며 돌아다녔다. 이를테면 다라 시장에서 220달러 짜리 psg-7을 장만해 부시의 목구멍에 강철로 만든 커다란 쿠키를 쳐박아 놓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키득거렸다. 아랍인들과 줄창 만나면서 그들처럼 거칠어졌다.
여성의 날 서울역 청사 앞에서 '유급 생리휴가 쟁취'라는 피켓을 보았다. 직장에서 미혼 여성들이 월차와 생리휴가를 고도로 지능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늘 보아왔다. 이를테면 생리 때는 참고 회사 나오고 월차, 생리 땡겨서 휴일 끼고 한 나흘 벚꽃놀이 간다던지... 옆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노숙자 아저씨가 '난 쟤들 데모하는 걸 두 시간 넘게 지켜보는데 뭘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어. 담배 한대 있음 줘바바' 라고 말했다.
함께 쭈그리고 앉아 뭐라고 말하나 지켜 보았다. 노동 환경 개선, 임금 차별 반대 등등 이었다. 그래도 그날의 하일라이트는 '유급 생리 휴가 쟁취'라고 생각했다. '유급 생리휴가 쟁취' 운운하면서 떠들어대면 벌떡 일어서서 지랄하려고 했다.
해장국 집에서 국 말아 먹고 있을 때 '반미' 시위대에 안 꿀리려고 해병대 복장을 하고 종로에 나가서 미군 철수 반대를 외치고 돌아온 할아버지는 그 식당의 모든 할아버지들한테 칭찬과 격려를 듣고 있었다. 유일하게 '반미'할 것 같아 보이는 젊은 놈이 나 밖에 없어서인지 유독 목소리를 높여가며 요즘 정신나간 젊은 것들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여기서 미국이 세상에 한 짓을 들먹이며 반미를 나발 불면 그 노인네들이 사력을 다해서 살아온 인생에 대한 도전이 된다. 국을 마져 비우고 벌떡 일어나서 장내를 둘러본 후 주인을 찾아 한 마디 했다. 얼마에요?
해장국 맛이 썩 괜찮아서 자주 이용하게 될 것 같은 집이다. 설렁탕집과 해장국집은 할아버지들 입맛이 틀림이 없다. 노인분들이야 그동안 고생하셨으니 하시고 싶은 말 하시면 된다고 봤다. 근심 걱정 없이 남은 나날이나마 행복하게 사시길...
간호사가 참다참다 낄낄낄 웃었다. 이빨은 베트남에서 부러졌구요, 태국에서 템포러리를 박았다가 흔들려서 인도에서 이빨을 했어요. 그러니까 나를 무슨 오지에서 굴러먹다 온 멋모르는 바보 취급을 했다. 치과 현판에는 '서울대'가 의미심장하게 반짝이고 있었고 의사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후진국들의 낙후된 기술 수준을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비웃었다. 치료과정을 지켜보면서 말은 안 했지만 수준이 태국이나 베트남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치과의 시설면에서 베트남을 따라올 곳은 없었다. 최고였다.
'서울대' 간판 있는 곳에서 치료 후 일주일만에 접착제가 떨어져 나갔다. 입에서 피가 줄줄 흐르건 말건 치료를 강행하는 그 무식한 몬도가네 인도에서 조차도 단돈 500원 짜리 시술로 6개월을 버텼는데 보험증 내밀고 3만 5천원을 지불한 치료가 일주일 밖에 가지 않은 것. 수소문해서 그 동네 최고라는 치과를 찾아 온건데 취직도 못하고 빌빌 거리고 있던 시리아의 젊은 견습 치과의사 만한 식견도 없어서 속으로 웃었다.
욕실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세면용, 화장용 도구들을 노려보았다. 일종의 대치상황이었다. 그것들을 건드리지 않고 배낭에서 비누와 치약과 칫솔을 꺼내 샤워를 마쳤다. 내가 여기서 머무는 동안 이렇게 복잡한 것들을 사용했단 말인가? 인생을 허비하면서?
0.1달러 짜리 일회용 면도기 하나로 털이 뽑혀나갈 때까지 한 달 반을 사용했다. 대개는 지저분한 수염이 휘날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비누는 2주에 한 개 사고 치약은 1-2개월에 하나, 칫솔은 8개월 동안 사용했다. 옷장의 옷들 중 2/3를 동네 어귀의 옷 수거함에 던져 넣었다. 짐을 정리해 보니 옷은 트렁크 하나에 모두 들어갔고 '빌어먹을' 책들만 처치곤란한 지경이었다. 떠날 때 팔던가 버리라고 했는데 폼 난다고 버리지 않았다나... 폼이라... 하기야 책은 쓸데없는 호기심과 관성의 버릇 때문에 읽지.
6개월간 코란을 제외하고는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내 평생 처음있는 '사건'이었고 그녀의 말대로... 책에는 삶이 없었다.
2주 내내 소주만 마셨다. 맛있다. 특히나 맛있었던 것은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생각했던 오리지날 진로 소주였다. 사카린 때문에 첫맛이 쓰고 목구멍으로 넘어갈 땐
벼랑에서 비틀거리는 기분이었다. 1도 차이다.
Tish Hinojosa, Donde Voy (어디로 가야하나)어디로 가는 걸까요, 어디로 가야만 하나요? 난 희망을 찾아 가고 있어요 난 혼자서, 외로이 사막을 헤매며 도망쳐 가고 있어요. 하루 이틀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당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어요
좋은 가사다.
돈데 보이~ 돈데 보이~
에스뻬란싸 에쓰 미 데스띠나씨온...
lu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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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4-15 카리브식 파동함수
나침반과 gps가 있다. 따라서 정글에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그것들을 사용하길 꺼렸다. '자기 주장'이 강해진 탓일께다. '자기 주장' 덕택에 실컷 고생한 다음에 나침반을 보았다. 원숭이들이 빽빽한 밀림 속에서 낮고 음산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정착해서 살기에는 상당히 부적합한 곳이었다.
모자를 눌러 쓰고 차가운 비가 내리는 밤거리를 걸었다. 번개가 치고 있었다. 상점 쇼윈도우에서 얼핏 화산이 담긴 엽서를 보았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저 화산은 살아 있냐고. 그렇다고 고개를 끄떡인다. 다시 한번 '자기 주장'을 실험해 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가서 엄청난 비바람 덕택에 혼자 길을 잃고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빨이 닥닥 부디칠 정도로 추워서 분화구에서 불을 쬐다가 간신히 살아서 내려왔다.
거대한 수증기의 벽을 보았다. 세계를 구하는 대신에 자신을 구하기 위해 사악한 결혼 반지를 분화구에 집어던지는 관광 코스로 개발하면 인기가 있지 않을까 싶다. 악천후와 모진 고난과 추위와 산적과 악령 등이 보태지면 고생한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서로 외롭고 심심하다는 이유로 노천 까페에 앉아 하품을 연신 하며 시시껄렁한 얘기를 주고 받았다.
달은 얇은 비웃음을 짓고 있었다. 피차 이름이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얼핏 스쳐가는 단서를 통해서 그의 이름과 나이와 과거 전공을 알고 있었다. 그가 나에 관해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밤하늘로 담배 연기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가고 거리에서 불빛들이 하나 둘씩 사라질 무렵, 내가 로맨스를 두려워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를 마저 비우고 인사 없이 헤어졌다.
아미고들처럼 나 역시 그링고들을 싫어했다. 반미..랄 수 있을까? 17만의 그링고가 부질없이 죽었던 어느 나라의 해안에서 여자가 불을 붙여준 담배를 피우고 그녀가 권하는 싸구려 포도주를 연신 홀짝이며 구명의를 입은 채 바다에 둥둥 떠서 히히덕거리다가 고주망태가 되었다. 물결이 볼기짝을 가볍게 두들겼다. 깨어나라, 깨어나라 하면서. 깔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시아를 떠돌다보면 호흡하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것이 반제국주의같다. 어떤 프랑스년이 인도차이나의 어린시절 불장난을 낭만적으로 각색한 어떤 영화의 무대로 잠깐 나오는 그림 같은 하롱베이에서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시대에 강간 당한 동양의 노란 원숭이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기분이 매우 더러웠다.
제국주의는 철지난 20년 전 유행이지만 적나라한 현실이기도 했다.
그때는 어리고 철이 없어서 예쁜 여자와 하이테크를 신봉했다.
지금은 오래 타는 시가와 마르가리따 한 잔이면 족하다.
입술에 아바나산 시가를 걸치고 우윳빛 마르가리따가 담긴 거대한 젖가슴처럼 생긴 잔을 오른손으로 받친 채, 해변에 비스듬히 누워 넘실거리는 카리브 해와 출렁거리는 여자들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바에서 그 얘기를 자랑스레 하니까 그는 톱에서의 메스꺼운 경험을 말했다. 톱이 뭐지? 지 머신이야. 아항. 그는 8g에서 토하지 않았지만, 술 먹다가 행패 부리고, 토하고, 짤렸다. 그는 아바나산 시가를 사러 거리로 나갔다. 나처럼 마르가리따를 들고 해변에서 시가를 피우고 속을 울렁거리게 하는 지구의 스핀을 느끼며 시간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적도가 머지 않은 아름다운 '여자의 섬'이었다.
싸늘한 맥주와 치즈를 듬뿍 얹은 나쵸가 생각나는 밤이었다. 팔깍지를 하고 침대에 누워 실링 팬이 돌아가는 모습을 우둔하게 쳐다보았다. 살아있다는 것은 무한히 중첩된 우연에 가까웠다. 삶이란 행운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그래서 책들이 우겼다; 그동안 만큼은 눈을 제대로 뜨고 빛과 바람을 즐기라고. 그의 가엾은 견해처럼 책에는 삶이 없었고, 삶의 광경 속에서는 선택받지 못한 고양이 시체들이 매순간 끊임없이 쌓이고 있었다.
lu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