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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사고

잡기 2007. 10. 4. 13:45
영화에는 국경이 없어도 영화팬에게는 조국이 있다. -- 변희재씨의 돋보이는 생트집.

'금단의 선'을 넘어 북쪽으로 걸어간 노무현 대통령은 배낭여행자들의 오랜 숙원을 이뤘다. 남북분단선을 육로로 건널 수 있으면 유라시아 대륙이 완전히 뚫리는 것이다. 내친 김에 중국, 몽골, 러시아, 유럽까지 기차타고 돌아다니면서 외교활동을 펼쳤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아무리 정치적인 쇼라고 하지만 '금단의 선'을 넘은 그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정치가 미래, 비전, 희망을 보여주는 쇼가 아니라면 얼마나 재미가 없겠나.
 
추분이 지났다. 여름이 갔다. 여름처럼 맥주와 통닭을 먹지는 못할 것이다. 지방이 부족한 닭을 기름에 튀기면 기름옷에 지방이 배인다. 맥주에는 탄수화물이 많다. 따라서 맥주+통닭은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이 골고루 갖춰진 삼위일체 저녁식사다. 통닭에 맥주를 한 잔 하면서 밀린 드라마를 느긋하게 쳐다볼 때는 행복했다.
 
메이드 인 차이나 없이 살아가기 -- 우연한 기회에 본 다큐멘터리. 1부만 보고 2부는 보지 못했으나, 듣자하니 일본 가족은 1주일 만에 포기하고, 미국 가족은 하루인지 이틀만에 포기. 한국 가족은 한 달을 중국 제품 없이 살아남았단다. 중국 제품 없이 살아가기에서 조차 한국인의 우수한 개김성(은근과 끈기)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웃음.
 
10월 1일 자전거 타고 출근하다가 그랜저와 박았다. 손가락 사이에 긁힌 상처 뿐 다친 데는 없는데, 20kmh로 달리다가 골목에서 나와 서 있는 차를 2-3초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보지 못하고 그대로 박아 자동차 앞바퀴 사이에 자전거 바퀴가 끼었고 본넷에 몸뚱이가 부딫히면서 본넷이 일부분 찌그러지고, 범퍼에 긁힌 상처가 남았다. 자전거 앞 바퀴 림이 살짝 휘었다.

비가 살살 내리고 있었다. gps에 찍힌 당시 주행 속도가 20kmh(초당 5.5m)니까, 11m ~ 16m  앞을 보지 않고 진행중 갑자기 나타난 자동차를 발견하고(자동차가 서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급히 브레이크를 잡았으나 늦어서 자동차를 박은 것이다. (내가 자동차를 사지 않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운전중에 딴전을 피우거나 딴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이걸 설득력이 없는 핑계로 여기는 사람들이 참 많다)
 
경찰 불러서 사고처리할까, 하다가 내 잘못이 크고 자동차의 흠집이 그리 크지 않은 수준이라(두 사람 다 놀랐다) 대충 합의하기로 하고 명함 건네준 후 자전거를 타고 회사에 출근. 10월 2일 전화가 왔는데 사고 차량의 견적가가 무려 40여만원 나왔다.
 
2일 밤 퇴근 무렵에 경찰서에서 회사로 전화가 왔단다. 뺑소니 신고가 들어왔단다. 내 명함의 전화번호로 자동차 주인이 전화를 해 봤는데 전화가 안되어 뺑소니 신고를 한 모양인데 이미 연락이 된 상황. 명함의 전화번호가 잘못 찍혀 있었고 휴대폰을 집에 놔두고 출근하지 않아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합의 후 30만원을 물어주기로 했다. 좀 더 까칠하게 나갈 수도 있었지만(자동차-자전거 사고에서 자전거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도로상의 약자 이므로 일정 비율의 쌍방과실로 인정되어 합의가 가능) 내 자신이 그렇게 할 만큼 뻔뻔한 것도 아니고(전방주시 잘 하면서 직선로에서 잘 나가고 있었는데 골목에서 갑자기 차가 튀어나와 브레이크를 잡았으나 제동거리를 확보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박았다고 우기기) 최근 자전거 운행하면서 사고가 잦은 이유가 내 자신의 30만원 짜리 문제임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러다가 사람 치겠다.
 
공교롭게도 기어비를 평소의 2:6에서 3:6으로 업그레이드 하고 28kmh 가량의 평속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최근에 도로에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는데(주행중 케이던스 유지가 아니라 이제는 근력 강화로 바뀌어 가는 듯) 그런 시점에서 난 사고라 뜻깊다.

덕분에 누구나 선망하는 매트릭스 액션도 해봤다. 핸들을 놓지 않았고 브레이크 잡는 순간 뒷바퀴가 들리면서 몸이 공중제비를 한 바퀴 돌아 본넷을 굴러(이때, 어깨로 둥글게 굴려 떨어지는 낙법 센스) 착지 순간 중심을 잃지 않고 체조선수처럼 등짝을 꼿꼿이 편 채 두 발로 서서 10점 만점의 착지에 성공한 것이다. 심지어 자전거도 자동차 바퀴에 끼어 똑바로 섰다. 사고 당시 주위 사람들 말로는 죽을 뻔 한 거 아니냐, 천만 다행이다 라고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사고 순간 우아했다. 만족한다.

최근 사고는 대부분 내 잘못이 크고 상처가 경미하며 PTSD를 남기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 오히려 두어달 전에 자전거 정비하고 나서 멍청한 상태로 천천히 달리다가 그냥 픽 쓰러지면서 손목을 삔 것은 2개월이 지난 지금도 손목에 힘을 주기가 힘든 상태.
 
올해 들어 다섯번째 사고인데, 이쯤 되면 자전거를 타지 말자, 바보같은 자식, 이러면서 PTSSD(post traumatic self-torture stress disorder; 사고 후 자학성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려야 할텐데 되려 정신적 충격이 없는 이유는 뭘까, 장애를 현저히 상회하는 둔함/멍청함 때문이 아닐까 -- 이게 다 개마초 스피릿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사고난 날 밤에도 별다른 정신질환 없이 자전거 타고 집에 돌아왔다. 헤드라이트가 없어 밤길에 제대로 주행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저 잔걱정이라곤 집에서 정비하면서 앞바퀴 휠셋 교정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스포크 렌치로 니플을 조여 스포크 장력을 조절하면 되지 않을까, 많이 휜 것은 아니니 힘이 가해지는 휜 림의 반대편을 조절하면 되겠군 하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도, 한쪽 바퀴의 스레드만 다 닳은 줄 알았는데 양 쪽 바퀴의 스레드가 대부분 닳아 있어 바퀴 표면적이 넓어져 주행 중 부하가 커졌는데 타이어를 갈지 말고 이것을 근력 강화의 기회로 삼는 것이 어떨까, 여기저기 덜컹거리고 망가져 가는 자전거를 이참에 바꾸는 것은 조잔한 기회주의자 처럼 보일꺼야 하는 류의 생각을 했다.
 
사실 산악에서 자전거를 타지 않는 나같은 사람이 장애, 사고 운운하는 것은 자전거 사고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호들갑에 불과하다. 자전거 주행=인력+기술+정비+사고
 
전제: 상처(사고)가 없으면 사람은 성장할 수 없다.
결론: 보다 큰 성장을 위해 정진하자.
부언: 마누라는 자전거 탈 때 이어폰 끼면 자전거를 부셔버리겠다고 위협했다.
,

luke rocuta, causa finita

잡기 2007. 9. 27. 22:18
로버트 조단이 9월 16일 사망했다. 한국에서는 마이너한 작가라 뉴스꺼리도 안되겠지만.

`깐수' 정수일씨 보호관찰 벗는다 -- 이제야 보호관찰을 벗는다. 그래도 축하드린다.
Jasmina Te?anovi?: Korea - South, not North -- 이건 왠 SF?

휴대전화를 진동으로 해 놓고 정수리에 올려 놓은 다음, 그 휴대 전화로 전화를 걸면 전화올 때의 진동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 해보니 정말 그랬다, 흡사 닭대가리가 된 기분이다.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어렵게 읽었다. 책의 소재가 '과학사'인 것을 감안할 때 읽고 건질 것이 없다는 불편함을 꾹 참았다.
웜홀과 여분의 차원, 그리고 양자 컴퓨터의 개념은 우주 전체를 '살아있는 삶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 마틴 리스
살아있는 삶의 현장?
내가 배웠던 모든 교과서는, 모든 것을 식으로 표현하면 명백해진다는 재밌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자신들의 어린 시절에 심사숙고했던 문제들을 보여주는 설명을 해주면 미국 어린이들이 고마워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남성들이 만든 것이다.
고상한 남자들의 바보같은 생각에 저항할 목적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 는 뜻인가?
부시 대통령이 경솔하게 제안했던 유인 화성 탐사 계획은 4,500억 달러의 비용이 필요하고, 탐사선의 우주인들은 모두 목숨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무 설명도 없이 폐기되어버렸다.
'목숨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탐사가 취소되었다니 몹시 한심한 이유네. 미국인들이 자랑하던 그... 정신병, 프론티어 정신은 대체 어디 간거지? 그것 마저 없으면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있긴 한건가? '지구에서 달까지'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마녀사냥은 집어치우고 당장 (달로) 보내주쇼' '로켓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주비행사는 죽을 수도 있는거지' 우주 탐사를 목숨 때문에 관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그래서 1999년 2월 국제천문연합이 명왕성이 행성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던 것은 좋은 소식이다. 우주는 크고 외로운 곳이다. 가능하면 많은 이웃과 함께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랬다. 명왕성이 행성 지위를 그동안 주욱 유지하고 있었던 이유는 '우주가 외로운 곳이라서 이웃이 하나라도 더 있어야 한다고 믿는' 미국 때문이었다. 다행히 국제천문학회는 그런 바보같은 주장에 아랑곳 않고 명왕성의 행성 지위를 박탈했다.
결국 우리는 나이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도 없고, 거리를 알 수 없는 곳에 있는 별들에 둘러싸여서, 우리가 확인도 할 수 없는 물질로 가득 채워진 채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는 물리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우주에 살고 있는 셈이다. ... 우리가 지구마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몇 가지 알아낸 것도 그리 오래 전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말투를 바꾸면 괜찮았을텐데... 옳은 말을 싸가지 없게 한다는 유시민이 생각난다.
인체에는 100만 가지 정도의 단백질이 들어 있고, 그런 단백질 하나하나가 작은 기적이다. 모든 확률 법칙에 따르면 단백질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의 발생을 왜 자꾸 확률 문제로 왈가왈부 하는 것일까? 생겼으면 생긴 거고, 안 생겼으면 안 생긴거지. 생명이 생겨난 기적을 겸손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강박신경증(너나 나는 좆도 아닌 존재다 운운)에서 논리가 출발하니까 그렇겠지. 사실 우주도 좆도 아니다. 우주나 삶의 경이에 관해 거만할 것도 겸손할 것도, 인간중심적 사고의 잣대로 계량할 필요가 없는데 왜 자꾸...
생화학자 크리스티앙 드 뒤브의 말처럼 생명은 "조건이 적당하기만 하면 어느 곳에서나 출현할 수 밖에 없는 물질의 의무적인 발현"이다.
책 여기저기에 저런 재수없는 인용구를 갖다 붙여대는 바람에 부질없이 두꺼운 책을 만들고 뉴턴의 털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주제에(게다가 유머감각은 밑바닥 수준) 매우 건방진 제목을 갖다붙인 빌 브라이슨은 관망자였고, 산업혁명과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달이 여성의 지위 향상을 이룩한 본질적인 원인중 하나였으며, 먹이 사냥 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됨으로써 그 시간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닌텐도 게임을 하거나, 남아도는 힘으로 헬스장에서 다람쥐 쳇바퀴를 돌거나, 평화의 확산에는 아무 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우주론에 관한 사색을 하게 될 시간이 늘어난 것과 아무 상관 없는, 과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신기해하는 것일까?
지의류보다 더 힘들게 사는 생물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애튼버러에 따르면, "지의류는 가장 단순한 수준의 생명이라고 하더라도 그저 자신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감동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생명이라는 것이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생명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계획과 소망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존재라는 스스로의 믿음을 끊임없이 이용하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지의류에게 생명이란 무엇일까? 지의류가 존재하고 싶어하는 충동은 우리만큼 강하거나 어쩌면 더 강할 수도 있다. 만약 내가 숨속의 바위에 붙어서 수십 년을 지내야만 한다면 절망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의류는 그렇지 않다. 거의 모든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이끼류는 자신의 존재를 이어가기 위해서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고, 어떠한 모욕도 참아낸다.
집 근처의 알맞은 지의류를 상대로 갖은 욕설을 퍼부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잘 참아낸다는 뜻이구나. 하필이면 꼭 괴상한 문구를 인용하거나 '잘못된 믿음을 가진 남자들'과의 차별성을 한심한 유머감각을 통해 드러내는 빌 브라이슨의 계집애같은 감상주의에 염증을 느꼈다. 하지만 굳이 욕할 것도 없었다. 그는 그저 '살내음이 나는 과학'에 관한 뭔가를 쓰고 싶었던 거다.
에드워드 O. 윌슨의 '생명의 다양성'에서 우리의 상황을 더 이상 간결할 수 없는 "하나의 지구, 하나의 실험(One planet, one experiment)"이라고 표현했다.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이 엄청난 행운이라는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에서는 에드워드 윌슨을 잡아먹으려고 책 한 권을 부질없이 허비했는데 브라이슨은 윌슨을 인용하며 '삶이 행운이다'라고 에필로그를 맺었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냐?

삶은 기적이다?
삶은 행운이다?

재미가 없다. 5일간의 기나긴 연휴였던 추석 때는 어디 안 가고 집에서 애를 보며 삶의 질을 떨어뜨렸다. 얼마 전에 새로 산 22인치 LCD 모니터의 전원 스위치가 제대로 안 먹는데다 추석 전날부터 고객센터가 전화를 안 받아 장장 5일 동안 예전에 사용하던 조그마한 17인치 LCD 모니터를 보려니 한심해져서, 어쩔 수 없이 모니터를 뜯어 고쳤다가(A/S는 이것으로 물 건너 간 것이다, 본드칠에 납땜질에 부품 하나를 떼는 등등...), 다시 고장나서 또 고쳤다. 그렇게 이틀에 걸쳐 각각 한 시간씩 보냈다. 그래서 삶의 질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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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를 고친 후 집에 들러 붙어 틈틈이 밀린 드라마와 애니를 시청했다. BBC에서 연재하던 Life on Mars의 주인공 샘 타일러. 2기 마지막 편의 마지막 장면. 인상적인 엔딩을 보여준다. 느끼지 못한다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SF(라고도 함) 멜로 경찰물 이라는 독특한 장르 포지션과 양보 없는 매트릭스 존재론적 주제의식(무거움) 그리고 1973년이란 배경이 지닌 시대적 마초성,  연기가 썩 괜찮은 주연, 조연들 때문에 간만에 즐겁게 본 드라마 되겠다. '영국 드라마'이므로 보다가 되도 안되는 농담따먹기를 해서 졸리울 땐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교훈: 삶은 느낌이다(느끼지 못하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명랑애니인 '로켓걸'을 보다가 아, 우주여행의 로망을 제대로 쌈싸먹었구나, 하하 하고 웃었다. '어떤 기계에 앉아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원숭이도 할 수 있다' 라고 고1 여학생을 꼬셔 우주로 보내는 것이다. 프로젝트 리더의 이름은 NASDA다. 3화까지 봤는데 더 재밌어질런지는 의문이지만 더 보기로 했다. 곁들여 애니 '문라잇 마일'을 봤다. 컷 분할/배치(연출)을 제대로 못 한다. 만화는 재미있었는데, 1화를 보다가 더 볼 맛이 안나 접어버렸다. 똥오줌도 못 가리는 건지 걸레같이 편집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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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렌라간. 얼토당토 않은 이유로 싸워대는 애들 열혈물. 가끔 이런 장면도 나와 놀래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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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시 열혈물이므로  일정한(열혈물 스러운) 작화 패턴에서 여지 없이 벗어나질 않았다. 이런 그림을 두고, 멋질뻔 한 그림에 병신같은 로봇이 등장해 깽판쳤다라고 한다. 저 녹색 형광칠해 놓은 꼴 좀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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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사신기. 비용 들인 것에 비해 어딘가 좀 어설픈데... 한국에서 이런 드라마를 만든다니(흡사 D-Wars 같은 영화를 만들어 줘서 애국심이 절로 치밀어 오르는 것처럼) 대견하다.

실은 '베르사이유의 장미' 작가가 태왕사신기의 만화를 그린다길래, 대체 얼마나 재밌길래 드라마도 다 안 끝났는데 만화화 한다는 걸까 궁금해서 봤다. 얼마 전에 모임에서 본 박씨 아저씨 말로는 김씨가 태왕사신기의 노벨라이즈를 했다더라. 김씨가 과연 담덕을 드라마의 저런 느끼남으로 묘사할지 흥미롭다. 연기력 자체가 발랑까진 아이들을 포함해 배역들이 참, 마음에 안 들었지만 무의미한 CG빨이 떨어진 지금부터가 재밌을(제대로 망가질) 지도 몰라 계속 보기로 했다. 5화까지 감상평: 순정만화였군 --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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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CG빨에 큰 관심이 없지만서도, 더 이상 볼 것이 없어 '히로익 에이지'를 찾아 봤다. 작명 센스가 영 아닌 거 같고, 첫 몇 화보고 CG로 떡칠한 그저그런 애니일 꺼라 지레 짐작하고 하품을 열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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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스타크래프트를 베꼈다고 하던데, 10화쯤 나가니 그렇지는 않았다. 이야기는 점점 그럴듯해지고 그래픽스는 점점 더 입을 벌어지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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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란한 그래픽은 몇 차례씩 되돌려 보기도 했다. 뭐 삑사리나 재활용은 없나 세심하게 찾느라고. -_- 메카닉이 참 세련되었고 디테일을 뭉개버리지도 않았다. 이런 애니가 한국에서 과연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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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다소 못생긴 것이 아쉽지만(왠지 아구찜이 생각나는 인상) 보면 볼수록 성질이 돋는 배틀스타 갤럭티카에 비하자면 양호한 세계관이다. 그러고보니 Xebec의 작품 중에는 건담 류의 그 얼빠진(납득도 설득도 안되는) 군국주의 세계관에 쩌들어 우주관이 스토리에 밀려 심하게 왜곡된 것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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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웨이의 멋진 묘사. '별이여, 그들을 이끌어 주소서' 대사 마음에 든다.  초능력 무당 주인공 공주의 비련미 물씬 풍기는 오바에도 불구하고 불가해한 선의로 가득찬 칼 세이건식 우주가, 감상하는 마음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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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종족의 유산. 3D 그래픽은 여전히 장려하다. 애니가 애니답지 않고 점점 영화같아 지는 것 같다. 나는 진골 SF다 라고 주장하는 듯한 연출 수준이 상당하다. 이 정도 연출을 하려면... 이 애니 만든 사람들 잠은 제대로들 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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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우주로 통하는 길. 10차원/11차원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최근 각광 받는 우주론은 inflation 우주(대세)와 m-이론이 묘사하는 진동하는 막(membrain) 우주가 있다. 평행우주(새끼우주)는 하도 미친 생각이라 일부 비주류가 주장하고 있는데, 후자 둘이 각광 받는다고 말하긴 좀 뭣하지만, 아무튼, 이 우주의 특정 지점에서 특정 지점으로 움직일 땐 워프를 하고, 다른 우주로 가는 길은 이렇게 게이트로 만들었다. 최소한 이 애니를 만드는 사람들이 교양과학서 정도는 읽고 있다는 뜻이다. 연출에선 연출로 승부를 하고,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면 뭔가 갖다붙일 것들을 풍부히 활용한다는 점에서.

권력은 지식을 수하로 사용하는데, 시대의 지식인은 민주주의의 확산, 여성 평등, 전쟁의 종식, 공정한 기회의 확대, 세계에 대한 믿음과 희망의 확산, 정보와 지식의 공유, 국가간 갈등의 완화/해소, 폭력에 대한 저항, 환경운동, 다양성의 확대, 정치적 공정함 류의 메스꺼운 위선 등등 매우 좋은 일들을 해주는 나름 유익한 존재들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왜 그들이 똥개라 불리는가와, 지식(무생물?)이 권력(무생물?)과 타협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무엇인가 라는 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고 그걸 이해한 후 돌파구를 찾게 되면 권력의 (반려동물로써) 믹스견이 되지 않고 눈에 띄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짓 다하면서 개마초로 장수할 수 있다. 요즘 대세 내지는 유행이 수구적 민족중심주의, 또는 실용적인 우익 순혈주의 임은 시대적 소명의식을 느끼는 지식인이라면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개그가 나온다;

[펌]일본을 공격한다

Q. 만약 미국이 북한을 한국의 동의 없이 공격한다면 ?
서울시민 : 일본을 공격하겠다.

밑의 그래프

-결과-
북한을 돕겠다 47.6%
미국 편을 들겠다 31.2%
일본을 공격하겠다 21.2%

...................


아니 저 질문에서 뜬금없이 왜 일본을 공격한다는건지..
북한을 돕겠다는 사람이나..미국을 돕겠다는 사람이나..
뭐, 어찌 이해는 되는데.
대체 일본을 공격하겠단 말은 왜 나오는지...

...그래도 뭐, 여기까지는 그냥 이상한 설문조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게 올라오고나서 한 양키가 운을 띄웠습니다.

Q.If you won 10,000,000,000W, would you

a. Buy a nice apartment in Gangnam
b. Emigrate to South Central LA and open a supermarket
c. Attack Japan.

그래서 시작된 것이...

Q.만약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

1. 아구창을 날려버린다
2. 행복을 빌어준다
3. 일본을 공격한다

Q.평행사변형의 넓이가 38.786 ㎠ 이고 . 밑변의 길이가 4.73 cm 라면 높이는 몇 cm 인가 ?

(1) 8.1cm
(2) 8.15 cm
(3) 8.2 cm
(4) 8.25 cm
(5) 일본을 공격한다.

Q.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1. 엄마가 좋다.
2. 아빠가 좋다.
3. 일본을 공격한다.

국왕 : 용사여. 마왕으로부터 상처입은 나의 딸을 부디 되살려 주게나.

- 예
- 아니오
- 일본을 공격한다

(연예 시뮬레이션)오빠.. 나 오늘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1) 아버님 어머님이 걱정하실테니 어서 복귀 찍으셔야지요
(2) 좋아 오늘은 우리들의 날이야
(3) 난 널.. 난 널.. (와락)
(4) 나와함께 일본을 공격하지 않을래 ?

- 2009년 서울을 배경으로 연쇄폭탄 테러범의 무차별 폭탄테러에 맞서는 서울시경 경찰특공대 폭발물제거팀의 활약을 그린 액션영화가 개봉되어 흥행성공을 거둔다. 아래는 그 액션영화의 클라이막스 중 한 장면에 나오는 배우들의 대사 중 일부이다.

"박현우 순경, 폭탄은 발견했나?"

"팀장님, 환기구 아래에 마지막 폭탄이 있었습니다. 폭탄 모양새를 보니 블루-3 타입의 폭탄입니다. 해체방법을 알려주십시오!"

"블루-3 타입이라고? 침착하고 잘 들어, 그 폭탄은 파란 상자 모양으로 되어서 뚜껑 오른쪽 시계 밑에 전선 회로가 위치해 있을 거야."

"맞습니다! 시계 밑에 빨간 선과 파란 선이 있습니다!"

"좋아. 그 회로를 발견했으면 이제 자네가 선택할 문제네. 빨간 선을 자르던지, 파란 선을 자르던지, 아니면 일본을 공격하게. 어떤 걸 선택하겠나?"


- 2009년 서울의 Web 2.0 전문 회사를 배경으로 웹 디자이너와 PHP 프로그래머 남녀 사이의 삼각관계를 그린 러브코미디 영화가 개봉되어 흥행성공을 거둔다. (중략)

"오빠, 이제 선택해. 저 여자야 나야? 아니면 일본을 공격할 거야?"

-각 나라별로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는 방법.

미국 : 첨단기술로 코끼리가 들어갈 수 있는 냉장고를 만든 다음 윈도를 설치하여 오류발생으로 코끼리를 넣는데 실패한다.

영국 : 여왕이 영연방 국가들을 방문하며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어달라고 호소한다.

독일 : 한치의 오차도 없이 코끼리가 들어가는 가정용 사이즈 냉장고를 설계하지만 미국의 요청으로 생산계획이 중지된다.

러시아 : 정부가 냉장고에 코끼리가 들어갔음을 발표한다. 사실여부를 취재하던 기자들이 실종된다.

일본 : [SOD]신인Debut! 나오미, 냉장고 안에서 코끼리와 극렬 퍽 20연발!.avi

한국 : 코끼리가 냉장고에 들어갈 때까지 일본을 공격한다.

Q . 이성계가 사대주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 이성계가 당시 정권을 잡으려면 당시 정권 즉 왕에 반대하는 인물을 규합해야 했으므로 일본을 공격한다

Q . 그 여자의 선택 . KBS 2TV 월 - 토 아침 9 시 방송 , 서유정 / 유태웅 / 박민호 / 차서원 출연
└ 인간의 선택 중 가장 중요하고도 고민스러운 선택은 결혼일 것이다 . 결혼만큼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건 없기 때문에 일본을 공격한다

Q . 그렇다면 Umehara Daigo 氏 에게 여쭙겠습니다 .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하단 중킥 캔슬을 노릴 생각을 하셨는지요?
└ 상대방은 블로킹을 포기하고 가드를 굳힌 상태이므로 2 ? ( 하단 또는 중단 ) 으로 가야 했기에 일본을 공격했습니다.

나얼짱님께서 1:1 대화신청을 요청하셨습니다.
신청에 응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일본을 공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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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 마시기

잡기 2007. 9. 17. 09:23
자전거 바퀴에서 소리가 심하게 났다. 여름내내 온도에 따른 팽창 정도를 감안해 바퀴에 바람을 조금 덜 넣었는데 가을이 되면서 주행할 때면 바람이 덜 들어간 바퀴가 주저앉아 스레드가 아스팔트에 폭넓게 닿아 요란한 소리가 나게 된 것이다. 그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며칠 전 출근 길에 바퀴를 살펴보니  스레드가 많이 닳았다. 타이어 교체 시기가 된 것 같다. 일단 바퀴가 딱딱해질 정도로 바람을 꽉 채워넣어 소리를 줄였다.

공기가 빠지면 지면과 타이어 사이의 마찰 면적이 커져 주행이 버겁게 된다. 마찰 면적은 마찰력과 상관없다. 마찰 면적이 넒어지면 마찰력이 커지는 이유는, 마찰 때 발생하는 열이 타이어를 녹여 전체 마찰면의 응착력을 높이기 때문이다. 마찰 면적은 마찰력과 상관없는데, 마찰 면적이 넓으면 마찰력이 커지는 것이다 -_-

꿈은 신경 회로의 잡음과 찌꺼지를 제거하기 위한 자발적 정화 메카니즘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름답고 불가능한 환상과 얼토당토 않은 스토리가 말하자면 '잡음과 찌꺼지'인 것이다. 비교적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꿈을 연재 만화처럼 꾸는 나같은 사람에게 꿈이 잠재적 욕망의 해소가 맞다. 성적 욕망이 아니라, 합리성의 타이트한 결계를 빠져나오고 싶어하는 적당한 그럴듯함만을 갖춘 이야기들, 말하자면 자작극, 이성의 빛이 미처 닿지 않아 쌓여만가는 어둠의 총 질량을 감소시키 위한.

요즘 꿈에선 매운찜용 닭처럼 도마 위에서 사지절단 당하는 각종 인간과 mc로 만들어지는 이상한 공산품들이 단연 돋보였다. 희대의 걸작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 꿈들이 무의식의 성적 욕구를 상징화한 것이라고 했을 때, 그 책을 읽던 어린이/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욕구 또는 욕망 중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나,깨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비전에 대한 욕망이다. 어린 시절 일찌감치 그걸 알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것도 알았다. 외설스럽게도, 무함마드처럼 꿈을 통해 비전과 어둠을 보게 된 것이다. 그걸 어떤 책에서 오줌 마시기 라고 말했다. 비유적인 표현인데, 자기 똥 먹기 보다는 표현이 덜 폭력적이지 않나? 게다가 오줌 마시기가 건강에 좋다는 myth는 꾸준히 인기가 있어왔다.

아내는 머리를 밀은 후로 희희락락이다. 알고 지내던 스님을 모셔 면도날로 머리털을 모두 제거하고 나서 기분이 좋아 싱글벙글 웃었다. 스님은 전날밤 날더러 아내 머리를 깍아도 괜찮냐고 물었다. 외모 따위를 평생 신경 써본 적도 없는 탓에 못생긴 여자더러 못생겼다고 말하는데 그다지 거리낌이 없었다 -- 올바른 평을 원한다면 그에 합당한 평을 들을 자격을 갖추던가 상대가 워낙 싸가지가 없어야 한다. 아내는 만족했고 아내가 만족하므로 나도 만족했다.

과거 아내가 나와 사귈 흑심을 품은 이유는 내가 '똑똑해 보여서' 였다.  결혼하고 보니 그렇지 않아 불만이 많다. 잘못 알고 있다. 법과 질서, 정의와 도덕 등 이 세계-사회 체계를 이루는 위대한 형평성과(자유,평등 그리고 민주주의 만세!) 제약조건을 제거할 경우, 말하자면 이 세계가 어둠으로 가득차면 운석의 도움이 없이도 백악기의 포유류가 어떻게 진화사상 먹이사슬의 최고위층에 속하게 되었는지를 재현해 줄 자신이 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새벽 하늘의 찬란한 루시퍼처럼 명석하다고 할 수 있다. 시민사회가 자발적인 합의 아래 생산성을 담보로 시스템에 깊고 폭넓게 편재한 폭력을 유연화시킨 그간의 과정은 대단히 인상적인 '진보'였다. 물론 진보가 이루어지기 전부터 인류는 교미와 번식을 장려하는 연가를 즐겨왔다.

인류의 꾸준한 영속성을 답보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50억중 49억 이상은 종교에 귀의한 자를 포함해 강인간주의가 유의미하다는 희안한 견해를 갖고 있다(삶은 기적이고, 우주는 여섯 개의 우연히 완벽하게 들어맞는 상수에 의해 생명체에게 적합하도록 창조되었다,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인본주의와 타협한 과학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에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류의 자기모순적인 견해를 자기 입으로 얘기할 때 (양심이 있는 한) 사견임을 밝히는 것이다 -- 과학은 너무 연약해서 견해를 가지기 힘들다.

하여튼, 별일 없는 한 삶은 신의 부재를 절로 짐작케 되는(그 반대로서도 논증이 불가능하므로 논박되지 않아 참이 되는) 기적이다. 게다가 자기 기만, 자기 모순, 자기 합리화, 아이러니 등  자기 오줌을 마시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 같다.

출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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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우주

잡기 2007. 9. 12. 16:37
홍보 자료 하나 대충 만들어 달래서 대충? 대충 하면 안되지, 그 정신상태로 며칠 내내 비디오를 만들었다. 기밀자료들도 많고, 그러다보니 자료가 거의 없어 머리가 아팠다. 달랑 디지탈 카메라 하나 들고 8분이 넘는, 나름 열혈 비디오를 만들었다(제목이 burning life, 첫곡은 chariot of fire, 마지막 곡은 kiss of fire. 등장하는 장비는 burn in tester. 불,불,불). 마누라에게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주는 역할도 했다. 사실 주변에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아내는 비디오가 구리다고 평가했다. 특히 음악이 구리단다. 자막 만들다가 너무 힘들어서 자막 만드는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하여튼 넌더리가 나서 이제 그만 하련다.

 

Just like a torch you set my soul within me burning. I must go on along the road, no returning. And though it burns me, it turns me into ashes... My whole world crashes, without your kiss of fire

책을 서너권 더 읽고, 도서관에서 미치오 가쿠의 '평행우주'를 빌렸다. 대략 1년 동안 도서관에 갈 때마다 대출 신청을 하려던 책을 이제야 손에 쥐었다. 예전에 '아인슈타인을 넘어서'는 일찌감치 절판되었고(누구에게 빌려줬는지 잊어버렸다), '초공간'을 무척 재밌게 읽었다. SF 친화력이 매우 높은 물리학자로 종종 SF를 그의 책에 인용하거나, SF 같은 이론을 일반교양 수준에서 쓸데없이 이상한 비유없이 간략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솜씨가 뛰어나 알만한 내용을 재독해도 유머가 곁들인 감칠맛이 좋아 졸립지 않다. 종종 칼 세이건의 후계자로 비유되기도 하는 듯.

신입사원이 연봉협상은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묻는다. '회사가 당신에게 절대 맨입에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과 유사한 제목) 같은 처세술 책을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긴 사측에서 직원을 평가하는 방법은 때로 째째하고 지저분하기 까지 해서 기여도나 업무수행능력 따위를 객관적으로 평가한다기 보단 얼마나 상급자에게 충성도가 높은가, 얼마나 성실해 보이는가(성실한 것과 성실해 보이는 것은 다른 문제), 출퇴근은 잘 하는가? 같은 것도 무시못할 변수다. 업무 수행 평가는 비교적 좋았지만(주로 연구개발이다 보니) 대인관계에 항상 문제가 있었고 출퇴근을 내키는 대로 한 탓에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는 나같은 사람에게 연봉협상에 관해 물어봤자 도움이 될 리가...

그런데 며칠 후 사장님이 연봉협상에 참고할 팀원들의 직능평가서를 달라고 말했다. 이런 문서 작성하는 것은 정말 오랫만이다. 항목 분류로 업무 이해력, 적응력, 할당량, 수행능력, 업무 성실성, 상호작업 및 협동, 개발 능력, 생산성 기여, 문서화, 체계 순응, 대외 서비스, 교육, 시간외 근무, 학습 참여 따위를 넣고 가점요소는 그저 그런 것들을 넣고 감점 요소에 업무외 사적 활동과 출퇴근, 지시 불응, 초과 경비 지출, 개발일정 지체 등의 항목을 넣고 거창한 스코어보드를 만들고 점수를 메겨보니, 아, 나는 참 마음씨 좋은 중간 관리자구나 싶었다. 특별히 편애하지는 않았는데 한 친구의 점수가 유난히 높았다. 사장님에게 연봉 10% 인상과 인센티브 제시를 메모로 남겼다. 나머지는 물가 상승율 수준. 내 연봉은 동결이다. 더 받을 이유도 없고, 더 받은 만큼 마누라, 애 내팽개치고 일하고 싶지 않다.

연봉이 꾸준히 상승하면 복리 효과가 생겨 매년 10%씩 상승한다고 보면 2500만원 받는 신입사원이 7년차면 연봉이 5300만원이 된다. 능력있으면 실제로 그보다는 속도가 빠르다. 그래서 연봉협상을 꼭 해야 하고, 제대로 미친듯이 일해야 하고, 자기가 한 일을  인정해주는 회사를 찾아다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협상 할 때 맨 몸으로 가서 대충 때우겠다는 생각은 버리라고 충고해줬다.

이명박은 법인세를 인하한다, 부동산 세제를 완화한다, 대운하 건설한다, 친북좌파 운운, 남북회담을 '원칙적으로 찬성'한다느니(찬성이면 찬성이고 반대면 반대지, 별 견해도 없으면서 '원칙적'은 또 뭐지?)  류의  말을 줄줄이 늘어 놓아 흡사 정신병자 같아 보였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겠지? 성장통을 겪고 있는 정신병자가 대통령이 되는 셈인가? 재밌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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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울티마툼

잡기 2007. 8. 30. 01:13
웬델 베리의 '삶은 기적이다' 를 읽다가 심란해지고 말았다. 저자 스스로 과학에 문외한임을 밝혔고, 에드워드 윌슨의 Consilience 에 문제가 좀 있다고 하지만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작가와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기분이 우울해져서 책을 더 이상 읽지 못하겠다. 그의 대부분 견해는 논박이 가능하지만 무슨 소용이겠나... 그게 정말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심슨 더 무비에서 바트(던가?)가 이렇게 외쳤다; life well spent!!

자기기만.

'삶은 기적이다' 때문에 이상한 상처를 입어(저자의 주장이, 소수에 불과한 건강한 회의주의자가 아닌, 인류 일반이 과학을 바라보는 시각(과학은 오만하다)과 다르지 않다는 것 때문에) 한 동안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할 것 같다.  정말 대미지가 크다. 그래서 책을 접어두고 영화와 애니메이션만 줄창 봤다.

약자를 위해 싸우는 것은 짜증난다. 누구나 한번은 해 봤을텐데, 요령은 엮이기 전에 재빨리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다. -- Burn Notice

간만에 건진 미국 드라마. 번 노티스 1화를 보고 재밌을 것 같아서 9화까지 다운받아 줄창 봤다. 한 마디 얘기도 없이 짤린 스파이가 마이애미 해변에서 약간 머리가 돈 전 여자 친구와 그를 FBI에 팔아넘긴 친구, 그리고 항상 어디가 아픈 엄마, 문제아 동생과 함께 궁상스럽게 먹고 사는 얘기다. 그 와중에 자기가 대체 왜 짤렸는지 조사하기 위해 애쓴다. 주인공의 스파이 시절 써먹던 '기술'은 흥미로왔고 보고 배울 점이 많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발 이 미친 여자 좀 어떻게 해 줘! -- 주인공의 전 여자친구에게 하는 말. 매력적인 아가씨다.

본 울티메이텀 -- 재밌다. 본 씨리즈 완결판으로써 손색이 없다... 라고 생각했는데, 추후 두 편을 더 제작한단다. 멧 데이먼이 출연하는 영화는 본 울티메이텀을 포함해 최근 세 편을 연달아 보았다. 오션스 써틴(2편에 비해 반전의 묘미가 약함), 그리고 Good.Sheepherd. 멧 데이먼은 입 다물고 액션만 해야 영화가 산다. 소재가 좋아보였던 굿 쉐퍼드는 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본 시리즈가 멧 데이먼을 구원했다.

듀얼코어에서는 컴파일 시간이 1/2로 주는 것을 확인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토요일 오후, 회사에 가는 대신  용산에 가서 부품을 구입했다. 2005년 10월 20일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한 후 거의 2년이 된 셈이다. 계산해 보니 용량이나 성능을 2배로 향상시키는데 꼭 1/2만큼의 비용이 든다.

AMD 애슬론64-X2 브리즈번 BE-2350 79000
E5MEMORY EK DDR2 1G PC2-6400 RED x 2 76000
ASRock Alive NF7G-HD720P 에즈윈 58000
WD SATA2 320G (7200/16M) WD3200KS 정품 75000
288000

흠. 엑셀에 쇼핑 목록을 정리해 놓은 것을 복사해오니 url까지 그대로 긁어오네? tattertools가 의외로 편하군. 다나와 최저가보다 2천원 비싸게 한 매장에서 부품을 모두 구매했다. 좀 더 저렴한 유니텍 보드를 살까 하다가 유니텍 홈페이지에 가보니 A/S에 대한 원성이 자자해 포기했다. 나도 유니텍의 악명높은 A/S에 몇번인가 경험이 있다.

적어도 6개월동안 업그레이드를 미뤘는데 새로 조립하는 컴퓨터는 사무실에서 일할 때 사용할 것이다. 더 값싼 브리즈번 4000을 사려다가 BE-2350을 샀다. 65nm 공정에 TDP가 45W로 65W짜리 브리즈번 4000보다 소비전력이 작고 발열도 적다. 브리즈번4000을 저전압으로 동작시키면 2350과 다르지 않다는 말들이 있다. 글쎄다.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 부품을 구입한 용산의 나진상가에 있는 한 매장에 젊은 연인이 찾아와 램을 교체해달라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매장 주인은 쩔쩔 맸다. 램 모듈을 보니 cap 3개가 일렬로 납땜이 들린 채 부러져 있었다. 사용자가 모듈 삽입할 때 실수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부러질 리가 없지만,  그래서 언성을 높이는게 꽤 우습게 여겨졌지만, 아무 말하지 않았다. 연인이 갖은 엄포를 놓으며 매장을 떠난 후 주인은 인상을 구긴 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전자상가는 금연구역인데, 담배를 피우다가 상우회에 걸리면 벌금을 문다. 50만원이던가?

두 연인같은 개싸가지에게도 삶은 기적이다.

집에 있는 250GB의 SATA2 HDD를 새로 구입한 320GB로 교체하기 위해 Acronis True Image를 사용하여 disk cloning을 했다. 디스크 크기가 달라도 파티션 복제가 가능했다. 대략 1시간 걸려서 HDD를 통째로 복사하고 새 HDD로 부팅을 확인한 후, 새로 구입한 보드에 이전에 사용하던 250GB HDD를 달고 windows xp sp2 black edition을 다시 설치했다. 아크로니스 트루 이미지와 블랙 에디션의 도움으로 교체 및 설치는 3시간만에 끝났다. 그 동안  크림 스파게티를 만들고 와인 한 잔 곁들여 식사를 하며 노트북으로 플래시 고든을 봤다. 며칠 혼자 밥먹으니 참 구질구질하다.

어젯밤 백형에게 오랫만에 전화가 왔다. 애 돌잔치가 언제냐고 묻는다. 돌 잔치는 하지 않고, 그보다 마누라를 몇 대 때렸더니 처가로 도망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농담했다. '여전하군' 이라고 대꾸한다. 여전하다니? 성질 더럽게 마누라를 두들겨 패야 평소대로 건강하게 잘 지낸다는 뜻인가? 예전처럼 사람들의 심장에 칼을 꽂고 비틀어대야 여전한걸까?

가까운 친지들과 애 돌잔치를 하긴 했다. 아내가 한식당에 친지를 불러모으고 돌상을 차려놓은 다음 나를 불렀다. 내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비꺽이건, 마누라는 마누라의 실천의지가 있는 것이다. 아이는 돈을 잡고 흔들다가 집어 던지고 연필을 집어 들었다.

돌 잔치 안했다고 이래저래 욕을 들어먹었다.
소울아, 네 삶은 기적이 아니다. 자연사다.
아빠는 자연사에 굳이 미주알 고주알 축하를 늘어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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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로

잡기 2007. 8. 25. 12:25
종합소득세를 엄청 내고 나니 어이 상실. 한 달 새 끊임없이 밀어 닥치는 여러 악재와 무더위로 기분은 다운되고 그야말로 급핀치에 몰린 것 같은데 간신히 버티는 이유는 이 우주에 편재하는 나선력(spiral power) 때문이지 싶다. 그렌 라간 22화를 보고 맛이 갔다. 작화품질이 고르고 음악 좋고, 스토리 무난하다. 가이낙스가 간만에 작품 하나 만들었다. 그야말로 수습이 안되게 막가는 이 극화의 결말이 슬슬 걱정될 지경이다. 이게 일요일 8:30am 애들 보는 만화라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사람과 짐승의 두 가지 길이
비틀려 만나는 나선도
어제의 적으로 운명을 깨부수고
내일의 길을 이 손으로 붙잡는다!
숙명합체 그렌라간!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거냐!!!

22화에 등장하는 위의 문구에 심오한 영감을 얻어 맥주 마시다 말고 사장님에게는 M&A와 ODM을 제안했다. '어제의 적으로 운명을 깨부수고.. 숙명합체를 이뤄 내일을 도모한다' 뭐 그런 의지... 기업활동은 그 자체로 놀이문화 열혈인 것이다!

좌우구분도 잘 안되고 권력을 얻자는 건지 이름을 남기자고 발버둥을 치는 것인지 뚜렷한 비전과 희망이 없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실망할 것은 없지만 가끔 가다가, 말 잘하고 내 마음에 꼭 맞는 좌익, 그저 똥오줌 못 가린다는 차원에서가 아닌 사민주의를 지지할 이유가 있는 지능과, 죽어서 1억을 남기는 우익 보험 류도 이제 한국에서 나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 정치권을 욕하기 앞서, 스무디 킹은 이렇게 말했다; be good to youself

사무실 직원들과 민주적으로 합의해 문국현에게 몰빵하기로 했다. 목표는 4일 근무다!!!
 
소울이는 남들 얼굴을 뚜러지게 쳐다보거나, 제흥에 겨워 춤을 추는 것 외에 뚜렷한 지적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의 숙명이 뭔지 모르는 것 같다. 발달의 뚜렷한 징후는 두 차례 밖에 보지 못했다(아니면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던가)
부모님의 안색을 살피는 것이 아이의 숙명이다. -- 미야베 미유키,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미유키의 전 4권에 달하는 '브레이브 스토리'를 읽었는데 대체 뭘 읽었나 지금은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그런 면에서 참 인상적인 소설이다.

술집에서 D-war 얘기중, 군중심리의 동조 현상에 관한 얘기가 나와(한 밤중에 귀뚜라미가 찌질찌질  동조를 맞춰 우는 것이나 반딧불이의 깜빡임 따위) 스티븐 스트로가츠의 '싱크'를 찾아 읽었다. 과학교양서라기 보다는 수필에 가까웠다. 정작 중요한 얘기는 300여개에 달하는 레퍼런스를 미주로 달아놓고 자신에게 영향을 준 과학자(또는 지인)의 소개와 연구 내용을 줄줄이 늘어놓다가 마지막 장에는 그들의 근황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여지없이 '일반인'의 수준에 지나치게 집착하다가 수식이나 그래프로 설명하면 몹시 간단한 것을 장황한 말로 늘어놓으니 읽다가 두 번쯤 졸기도 했다.  저자가 자신의 인생을 뒤바꾸는 경험을 이렇게 서술했다;

.... 흥분해서 윈프리에게 편지를 썼다. 어디로 가야 수리생물학 대학원 과정을 밟을 수 있는지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2주일 후 퍼듀 대학 주소가 찍힌 편지를 받았을 때 내 심장은 빠르게 고동쳤다. 윈프리의 친필 답장이었다.

스티븐 스트로가츠: 물론, 당연히 내게 와야만 하네.

꿈이 실현된 것이다. 그때쯤 윈프리는 나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생물학부에 있었다. 그리고 생물학 석사 학위는 내 계획에 없었다. 나는 수학 전공이 아닌가. 그러면 여름방학 때 일을 같이 하면 어떨까? 그래서 가능성을 물어보는 수줍은 편지를 보냈다. 2주 후 답장이 왔다.

자네의 1981년 12월 1일 편지를 받은 지 5분 후

친애하는 스티븐
이번 주 내게 돈이 한 뭉치 떨어졌다네. 그래서 여름방학 일자리는 오케이네. 급여를 줄 수 있네...
내 실험실은 공간이 널찍하다네. 멋진 주변 기기를 다양하게 장착한 애플 컴퓨터도 두 대 있네. 연구할 주제는 위상수학일세. 자보틴스키 수프의 3차원으로 꼬이고 매듭이 있는 파동의 수수께끼를 연구하는 걸세. 그리고 야간 아르바이트로는 이 파동을 심장 근육에 적용하는 문제를 연구할 걸세(심장마비 돌연사에 대한 내 논문이 내년 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지에 실릴 걸세. 그걸 보면 이해가 될 것으로 믿네). 이런 분야들을 자네와 공동으로 연구하게 되면 정말로 기쁘겠네. 우리는 서로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걸세.
자네가 이 제안을 거절하기 전에는 다른 누구에게도 자네에게 여름 일자리를 제공하라고 부추기지 않을 작정이네. 부디 거절하지 말기를 바라네.

감정에 이끌려서, 아서 윈프리

1982년 여름 윈프리의 여구실에 도착했을 때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코네티컷 주에서 인디애너 주까지 대륙을 횡단하는 여행에 아버지가 함께 따라왔다.

연구실은 조용했다. 대학원생이나 박사 후 과정 연구원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예상하고 있었다. 이전에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알게 된 것이다. 나 말고 함께 일할 연구자가 있냐는 질문에 윈프리는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다른 학생들이나 공동 연구자의 이야기를 꾸며낼 수도 있을 걸세.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아무도 없다네. 아마도 내가 관계를 형성하기에는 너무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지도 모르지. 몸에서 냄새가 나는 건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내 연구실의 인구밀도는 1일세. 동첨할 사람은 자네가 유일하네. 이런 사살이 나에 대한 자네의 신뢰감을 저하시키는가?"

이공계식의 처절함과 인간미가 철철 넘치는 이런 내용 때문에 정작 보고 싶었던 동조에 관한 중요한 내용들은 주마간산 격이다. 역자도 한 몫했다. 이런 대목;

캘리포니아 공대의 신경과학자 크리스토프 코크와 프랜시스 크릭이 최근 발표한 공동 논문 '내부의 좀비'를 보자. "의식은 뉴런들이 1000분의 1초 수준에서 동조 발화하는 것을 수반한다. 이에 비해(뉴런들의 1000분의 1초 수준 동조와: 옮긴이) 관련되지 않은 발화는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뇌 속에 그 특별한 윙윙 소리(의식을 말한다: 옮긴이)를 발생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이 이들의 추론이다.  ... 자기 자신의 의식, 스스로의 자기 인식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를 표현할 단어를 나는 지금 더듬거리며 찾고 있다. 수많은 물 분자와 단백질과 지질,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이 망할 놈의 물건이 스스로를 인식하고 나를 마주 쳐다보고 (거울 속에서: 옮긴이) 있다. ... 만일 의식이 어떤 종류의 신경 동조의 부산물이라면, 그렇다면 동조에 대해 단지 생각하는 것만도 동조 자체의 엄청난 활동(1000분의 1초 단위의 분주한 동조의 연속: 옮긴이)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므로.

387p가 되어서야 역자는 갑자기 친절해지기로 결심했는지 문맥을 이해하는데 그다지 쓸모가 없는 역자주를 여럿 달아 놓았다.  옮긴이의 말에는 '변명과 제안'이 적혀 있다.

사회과학을 전공한 자로서 자연과학 분야의, 그것도 비교적 전문적인 교양서를 옮긴데 대해 변명을 하고 싶다... 옮기는 과정에서 역자의 과학적 소양이 총체적으로 점검당하는 기분이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분야별 전문 용어를 제대로 따르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으리란 우려가 남는다.

최선을 다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다지 전문적인 과학교양서는 아니다. 하지만 스트로가츠의 오락가락 하는 문장이 정제되지 않고 남아 역자도 오락가락해서 책의 문맥 파악하는데 애를 먹은 것도 사실이다. 후기에 적어놓은 역자의 우려와 달리 나는 작자만큼이나 그 책을 소개하고 번역한 역자를 대접해준다. 책을 고르는 안목, 책을 감동적으로 읽고 번역해야겠다는 결심(인류애지 뭐겠나?), 번역은 잘 안되었지만 과학교양(또는 마땅히 일반 상식)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등등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재밌게 읽은 책이면 같은 역자의 책을 찾아본다. 후기 인지 변명인지를 읽은 후  지속적으로 그 분야 내지는 과학교양에 관심이 있는지 살펴보려고 그가 번역한 책들을 인터넷 서점에서 뒤져보았다. 역자는 지금까지 두 권의 책을 번역했다. 평가는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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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문국현이 대선 출사표를 던졌다. 대선이 재밌어졌다. 문국현씨, 당신 찍을꺼요. 댁 집안은 HP 분위기가 나서 좋아했음. 물론 떨어지겠지만!

엠파스의 '많이 본 기사'에는 순, 연애인의 구질구질한 사생활 얘기 뿐이다. 기사를 보는 놈들이  한심하다고 생각. 많이 본 기사니까 싸잡야 욕하는 꼴이 된다. 쓰잘데기 없는 일로 자기 재능의 70% 이상을 낭비하는게 인간이고, 인류가 개발한 가장 위대한 놀이가 가십이다 보니... 이건 욕도 아니다.

pdanotes.net이던가?의 클리핑 사이트는 사라졌다. 뉴스룸을 약간 확장해 Naver New Clipping 사이트를 만들었다. php를 스케줄 걸어두고 기사를 일정 시간에만 수집하는 것은 방법을 몰라 관뒀다. 한 번쯤은 제대로 php를 배워봐야 할텐데...  한가해서 할 일 없을때나 해 보자. 그러다가 문득, 저런 거 소스 공개해 두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를테면 MT 3.2에서 태터툴즈 1.1.3인지로 아티클 변환하는 소스나 자기 구미에 맞게 뉴스 클리핑 사이트를 꾸미고 싶은데 만사가 귀찮은 프로그래머라든지... 그러다가 문득, 귀찮더라도 자기 힘으로 어떻게들 하겠지. 라고 생각했다.

마누라가 컴퓨터를 날려먹어서 윈도우즈를 새로 설치했다. 어떻게 웹 서핑과 메시징만 사용하는데 파워 서플라이가 망가질 수 있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용산 전자상가는 일요일 오후에 문을 열지 않았고, 용산전자상가 앞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에서 만오천짜리 싸구려 전원장치를 사 왔다. 날이 많이 덥다.

일요일 하루종일 윈도우즈 설치에 애를 먹었다. 이 블로그보다 오래된 SoundTrack DS-XG 754 사운드 카드 드라이버만 설치하면 윈도우즈가 다운되었다.  뭔가 이상했다. 그 동안 잘 써오던 것인데 왜 말썽을? 더위 먹었나? 미심쩍인 것이 있어 밤 12시가 넘어서야 사운드 카드의 엣지를 지우개로 닦은 후 슬롯에 삽입하자 더 이상 윈도우즈가 다운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도 지우개는 전자 엔지니어의 필수 아이템인 것이다. -_-

우르술라 르귄의 '로캐넌의 세계'와 '환영의 도시'를 출퇴근 길에 읽었다. '유배행성'인지 하는 것은 도서관에 아직 없어 빌리지 못했다. 누군가는 헤인 시리즈 전권을 도서관에 비치하고픈 욕망이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다보면...

기나긴 유사장마 때문에 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 그러니 책을 죽어라 읽게 된다. 로캐넌의 행성에서 건질만한 문구는 '당신의 적들이 자식없이 죽기를' 정도. 두 책 모두 재미있었다. 환영의 도시: '생선과 손님은 사흘이 지나면 냄새가 나게 마련. 잘 가게', '믿음이나 희망이나 본질은 같다. 마음이 다른 마음들과, 세계와, 그리고 시간과 맺어야만 하는 관계들'

생선... 운운 하는 얘기는 어딘가에서 본 듯한 문장이다. 아마도 세익스피어일 것 같다. 르귄이 머리가 어떻게 되서 제대로 번역이 안되는 노자를 읆는 걸 보니 히죽 웃음이 나오기도.

대니 보일의 썬샤인을 이제서야 봤다. 사소한 실수 몇 가지 제외하고 오랫만에 재밌게 본 SF영화다.  영화감독들이 대부분 닭대가리 같아 보여서, 예술은 잘 할 지 모르지만 머리들은 나빠보였다. 메이저로 뜰만한 영화는 아니지만 박씨 아저씨가 가끔 하는 SF상영회에서 상영할만 했다. 아마 대다수의 SF팬들이 놓친 영화일 것이다.

최근에는 Master of Science Fiction의 첫 작품(Clean Escape)를 봤는데, 진부하고 무거운 주제가 워낙 고전적이라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무겁고 고전적인 것에 걸맞는 '깨끗한 결말'이 나오지 않았다. 원작자나 시나리오 작가는 나름대로 잔대가리를 충분히 굴렸다고 생각할 것 같다. 나 같으면 시치포스의 영원한 형벌과 보편적인 인간성을 씨줄날줄처럼 교차했을 것이다. 평이하고 재미없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머리는 좋은 것 같은 심형래 감독이 SF영화도 만들었나? 저얼때 그럴 사람이 아닌데... 농담이고, SF가 한 마디로 정의되고 수습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충무로든 심형래든 SF의 컨셉을 그렇게 잡고 있으면 그런가 보다, 그걸로 끝내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가르치려 들며 주절주절 늘어놓다가 깔끔하게 마무리가 안되는 꼴사나움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말수가 적은 편이 낫지.
진중권 비난한다고 반박하는 글을 보고 든 생각이라곤(영화에 들이댄 잣대가 잘못되었다... 류는 진화가 좀 진행된 먼 미래의 얘기고), 1. 전국민이 일 년에 책 두 권 제대로 안 볼 정도로 대따 무식한데다 2. 토론을 주먹질과 억하심정, 하소연, 푸념, 허가받은 개소리, 뜬금없는 헛소리로 알다보니 3. 논거 한두 개 잡고 늘어져 가볍게 말장난 하는 진중권에게조차 깨질 것 뻔한 부실한 체력으로 4. 욱하는 심정에 5. 먹이사냥에 나선 들개떼처럼 달려드는게 참... 네티즌이란 것들이 글이나 또 잘 쓰면 모르겠는데 글도 못써서 온 사방에 찌질찌질 찌질링... 심지어는 이 기사, 진중권―네티즌 맞장떴다… “논쟁없는 폭력”VS“싸잡아 비판이 더 문제” -- '첨삭 지도'같은 것도 받아 토론에 참석한다.
그러자 네티즌 패널 collin은 "디워에 서사 구조가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다"며 "심 감독의 의도는 영화를 보고 나서 해석이 가능하므로 넓은 의미로 서사가 포함돼 있다"고 반박했다.
그런걸 궤변이라고 합니다 -_-

아무튼 저럴 땐 '역시 다이나믹 코리아! 홧팅!'이라고 해줘야 하나. 한국만 그런 건 아니고, 흡사 인간성의 보편적인 특질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변치않는 찌질기백은 사막과 태평양을 가로지르고 국경을 초월한 전세계적인 보편 현상이긴 하다. 일종의 지구적 공감대 내지는 생체 전자기 상호유도 작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낸시 크래스 글 잘 읽었다는 어떤 포스팅에 어떤 골수페미년이 헛소리를 늘어놓으니까 게시판이 뒤집혀서 장난아니게 다구리질을 하다가 뜬금없이 무슬림 얘기로 새버려서(다 같이 짜장면 시켜먹기로 했는데 꼭 설렁탕 먹고 싶다는 녀석 있는 꼴로 설렁탕은 어디가 맛있다고 뜬금없이 성질 부리는 것) 어쩜 이 작자들은 십 년 세월에도 불구하고 무개념이 상팔자라고 굳세게 믿고 있는 걸까.. 인류에게 진정 발전이란 없는 것일까... 21세기가 왜 이렇게 걸레같을까... 애들은 굶어죽고 로켓은 아직도 안 날아가고..

Animated Soul (16:30) 41MB
이건 뭐... windows xp 버전이 달라서인지 windows movie maker에서 편집파일을 불러오면 몇초도 안되 곧잘 죽어버리니, 만들고 나서 다시 편집할 수가 없어, 맞춤법이 틀린 파일을 열어놓게 되어 마음이 무겁다. 마누라를 위해 아이 돌 기념 16분 짜리 비디오를 시간날 때 만들었다. 애들이 생일에 미역국을 먹는 것은 제 엄마가 애 젖 먹이려고 미역국을 몇 개월씩 먹었던 그 괴로움을 맛보라는 뜻이라고 한다.

세월이 좋아져서 그런 고생하는 임산부, 엄마는 없어졌고, 백일 이라던가 돌이란게 특별한 의미가 없다. 엄마는 말하길 '그래도 아이의 첫번째 생일인데 축하해줘야지!' 인과의 연쇄고리를 통해 삶의 타당성을, 삶의 위대함을 재현하는 것을... 관두자. 내가 틀렸다. 그래도 돌잔치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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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tion

잡기 2007. 8. 8. 03:04
Movable Type에서 Tattertools로 블로그 툴을 바꿨다. 태터툴즈가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 인터페이스를 강요한다. euc-kr에서 utf-8로의 변화로써 늦긴 했지만 발전적(?)이다. 무버블타잎이나 태터툴즈나 뭔가 좀 해보려면 코딩을 해야 한다. 태터툴즈의 코딩량이 상대적으로 눈에 띄게 적은 편이다. 올초부터 블로그 툴을 바꾸려고 했는데, 무버블타잎의 아티클을 변환하는 것이 번거러워 미뤘다.

며칠전 다운 받은 태터툴즈 1.1.3은 백업 파일을 xml로 저장하기 때문에 무버블 타잎으로부터 변환이 손쉬웠다. 여행기와 잡기를 편의상 통합했다. 지저분한 태터툴즈 로고, 스킨 로고, CC 로고 등등은 제거했다. 손쉬운 작업(?)인데 하루가 꼬박 걸렸다.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워낙 블로그를 폐쇄적으로 운영해 왔다. 이 블로그는 자비출판된 공개 일기장과 다르지 않다. 문득 안네 프랑크나 빨강머리 앤이 생각난다. 주접을 떨어대는 앤에게 혐오감을 느꼈던 어린 시절도 기억난다.

괄약근에 힘주면 혈압이 오른다. 는 얘기는 술자리에서 자주 나오던 얘기였다. 그것으로 군대 면제받을 수 있다는 얘기. 그런데 그거 하다 걸린 녀석들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읽었다.

 

'살아서는 돈 벌어오고, 죽어서는 보험금을 남기라' 는, 몹시 강렬한 메시지를 남기는 보험사 광고.

재테크 차원에서 저축보험에 들었다. 보장내역은 신경쓰지 않았다. 저축보험은 복리 저축의 효과가 있고, '죽어서 보험금'을 남기는, 사랑의 힘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훌륭한 애비가 될 수 있다. 교육비 상승률 연 7%를 감안하면 아이가 대학갈 때쯤 해서 대략 4년간 8000만원 가량이 학비로 필요하다. 아이를 무척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의 독립심을 키워주기 위해 학비 지원은 없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연구결과도 있다; 사랑은 건강에 해롭다.  합리적으로 연구결과나 세상을 믿지 못하고 살기란 여간 힘든게 아니다. 태어나기 싫었는데... 살아가기 싫었는데... 사랑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고 훌쩍여봤자 이미 늦은 것이지만.

시세이도 샴푸 선전을 보다가 어디서 본 여자앤데 싶어 뒤져보니, 허니와 클로버, 훌라걸의 아오이 유우. 귀여워서 기억하고 있었다. 훌라걸은 묘하게 한국적인 분위기가 난다 싶더만 감독이 재일한국인이다. 훌라걸의 사투리가 강원도 정선 사투리랑 비슷해서 괴기스러웠다. 영화가 재미있었던가? 그게... 잘 모르겠다. 개마초(open macho)를 표방한 이후 허니와 클로버 같은 영화는 이해가 안 간다.  이런 것도 이해가 안 갔다;
... 여성들은 이런 부분에서 취향이 맞으면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라도 같이 살 수 있는 것이다.

시어머니 왈, "처자식 버리고 증발하는 아들을 키운 것은 나다, 내 탓이다, 사토코, 미안하다." 그렇게 사과하는 동시에 노부오를 매섭게 비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덜 되먹은 놈 같으니, 하면서. 화를 내기 시작하면 사과로 끝내고, 사과하기 시작하면 화를 내면서 끝냈다. 할머니가 감정을 발산하는 양상을 두고, 전에 고교생이던 쓰요시는, "그건 그냥 할머니의 취미에요. 거의 사는 보람이라고 할 수 있죠." 라고 말한 적이 있다. -- 미야베 미유키, 이유

미야베 미유키의 장광설을 좀 더 읽고 싶었는데 도서관에는 그의 책 거의 전부가 대출중이다. 뭐...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이번 여름에는 일본 추리소설을 읽어볼까? 라고 생각한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정보 소스가 박광규씨니까 그 양반이라면 재미없는 책을 설마 소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레몬'과 '환야'도 읽었다. 환야는 '백야'를 먼저 읽어야 아구가 맞을 것 같은데 대출중이다. 둘 다 재미있다. 레몬은 의아한 부분이 많았고 처녀생식에 관해 좀 더 치밀하게 묘사했으면 했는데, 히가시노가 과학 스릴러를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 보다. 환야는 팜므 파탈 소설의 전형성을 그대로 보인다. 주인공 얼간이 남자가 조작되다가(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다가) 결국 쓴웃음을 지은 채 자멸하는. 악녀 치고 머리좋은 여자는 없다는 고래의 진리가 잘 반영되어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여자는 본래 선악의 구분이 없는 존재다. 그래서 마음만 맞으면 절대 그럴 것 같지 않은 여여, 남녀가 공존할 수 있다.

하여튼, 미야베 미유키의 책들이 거의 다 대출중이라 하는 수 없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쿄 기담집'을 빌렸다. 글빨은 있지만 엉성하고 재미없는(입맛만 다시게 되는) 이야기에 실망이다.  so what? (그래서?)라고 물으면 하루키는 why not?(안될 껀 뭔데?) 라고 지껄일 것 같다. 글에 구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상표를 줄줄이 나열하거나 시답잖은 얘기로 심지어 글을 출판까지 하는 그의 괴상한 취미도 여전했다. 하루키 글을 읽으면 일본인들은 원래 이리도 소심한가 싶다. 아니다, 문학이 원래 소심한 장광설인 것이다.

도서관에서 책 빌려 나오는 길에 분실물 보관함을 흘낏 보았더니 저번주에 잃어버린 가방이 버젓이 놓여 있다. 사무실에 가서 분실물을 찾으러 왔다고 하니 이 사람, 저 사람 말이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다가 정확히 12시 30분에 열쇠(를 가진 사람)가 도착하니 그때까지 기다려 달란다. 출근해야 되요, 라고 말하며 시계를 보니 11시 30분이다. 요즘 새벽까지 잠을 못 자서 출근이 늦다. 출근이 늦으니 퇴근도 늦다.

새벽에는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를 보았다. 실사를 만화와 똑같이 만들어 놓았다. 이틀 동안 새벽에 잠 안 자고 다운받은 드라마를 시청했다. 하하 자주 웃었다.

만화보다 나은 점은 줄기차게 어디선가 자주 듣던 클래식들이 줄줄이 튀어나온다는 점이랄까? 이를테면 Brahms, Symphony No. 1 in C minor op.68 (13:15)은 출근길 지하철에 앉아 책을 펼칠 때 흔히 시작하는 이른바,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은) '아침을 여는 음악'이다. Beethoven, Symphony No. 7 in A Major Op.92(13:31) 는 자전거를 타는 어느 시점에서 들려온다. 10대 시절에는 후까시가 왕창 잡힌 베토벤을 좋아했다.

'노다메 칸타빌레'는 썩 괜찮은 음악 드라마다. 원작이 원래 재밌다. 연주실력이 좋아서 유명 지휘자, 유명 레코드의 더빙인 줄 알았는데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오케스트레이션을 실제로 녹화했다는 얘길 듣고 신선했다. 제대로 하는군. 흔한 시쳇말로, 음악계는 천재들의 무덤이다.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그 주제가 여러 차례 변주된다.

오케스트레이션이라... 동시에 귀로 구분할 수 있는 악기 수는 기껏해야 6-7개 정도 뿐이다. 어린 시절에 클래식, 특히 교향곡을 많이 들은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락과 헤비메탈이 쉬웠다. 락, 특히 프로그레시브 락은 대단했다 -- 온갖 (짜증도 가끔 나는) 음악적 실험을 눈도 한 번 안 깜빡이고 그야말로 미친듯이 시도한다. 요즘은 박상철, 무조건(3:36)이나 강진, 땡벌(3:11), MC몽, 아이스크림(3:36) 같은 최신가요도 디저트처럼 곁들였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특급사랑이야~~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당신이 부르면 달려갈꺼야, 무조건 달려갈꺼야.
짜짜라 짜라짜짜 짜짜짜

동-서남북 어디에서도 나-란 얼간이는 없다고-
그래도 너 하나만 사랑한다고-
쉽게 녹아버린 니 마음 상-처받은 엠씨몽
사랑은 아아아아이스크림

여기저기 전방위적인 '무조건'과 '아이스크림'은 여행을 연상케 한다. 노랫가사에 땡벌은 왜 나오는건지 뜬금없다. 들어보면 결국 찌질스런 사랑타령이지만. 뭄바이의 도미토리에서 만난 이란 출신의 치과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아이스크림이다. 녹아버리기 전에 낼름 먹을 것. 인생도, 사랑도 아이스크림인거다. 언젠가는 녹는다. mp3p에는 지난 8개월 이상 클래식만 저장해서 들었다. 기분 전환을 위해 한동안 드림 씨어터 앨범 전집을 관람할 생각.

세금논란, 사학 비리, 이랜드 사태, 아프간 피랍 등 가히 한국예수교의 수난 시대인 듯. 이랜드 사태와 관련해서 '파견의 품격'라는 일본 드라마를 소개받았다. 파견없이는 회사가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니 정사원과 파견사원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사이좋게 지내자. 는게 요점인 것 같다. 첫 화에서 정사원과 파견사원의 연봉을 줄줄이 보여주면서 자본사회의 품격을 제대로 보여주는가 싶더만 회가 거듭될수록 사연많은 슈퍼걸의 고뇌와 인덕으로 회귀하는 것 같다. 드라마가 좀 더 천박하게 각을 세우길 바랬달까? 사회문제의 평범한 귀결인, 첨예한 대립과 피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총인의 에너지를 소비한 후 정전 후 소강상태나 냉전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아무도 각자의 사정과 입장을 양보하지 않는 것이 소위 엿먹을 인지상정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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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norance is poor execuse

잡기 2007. 8. 6. 23:59
괴수영화 전문 매니아로서 '디워'를 평가한다 -- 특히 이 말이 감동적이다; '괴수영화는 기술 선진국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이다. 기술 후진국은 오로지 시나리오로만 승부한다' -- 그러게 말이다. 수많은 평을 상대화해보니, D-war는 '아나콘다'나 '킹콩'보다 재미있을 것 같다.

선교사들이 납치된 이후로 정부 욕하는 글은 거의 못 본 것 같다. 테러 위험이 있는 줄 알았으면 아프간 정부에 양해를 구해 입국을 금지시켰더라면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문제였다. 술자리에서 정치적으로 선교사들이 죽는 편이 더 많은 리스크를 떠안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다. 테러리스트와 타협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현실적으로 탈레반을 상대로 제제나 보복을 가할 수 없다. 구호/봉사활동이 앞으로 입을 타격을 생각해보면 정말 우울해진다.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나누어준다고 세계가 사정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한 사람 구하기 위해 들이는 시간과 돈이면 그 지역 사람들 수만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 그들은 그저 운이 없어서 납치된 것 뿐이다. 방학을 맞은 초딩처럼 그런 사람들이 '죽는게 낫다'고 말한 것이 후회스럽다.

Garmin eTrex Vista HCx의 평이 비교적 좋은 편. 사소한 버그가 좀 있는 정도(WAAS off)인데 업뎃용 소프트웨어가 나와줄 것이다. 흥미롭게도 SiRF III보다 수신율이 낫다는 평을 듣는 MTK의 32채널 gps 모듈을 사용한다. 실내에서도 3-4개의 위성이 잡힌단다(경악). 기대했던 갈릴레오 위성 지원은 안하기로 했다. 미국의 gps보다 10배 이상의 정밀도로 설계된 갈릴레오 위성이 계획대로 2012년까지 궤도에 뜰 지도 의문이다.

다운받은 매뉴얼을 읽다보니 재미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SD 카드의 여분 용량에 매일 매일의 트랙로그가 자동으로 기록된다. gpx 포맷이라 여러 어플리케이션 프로그램에서 사용 가능하다. 그렇다면 여행 기간에 상관없이 사진과 트랙로그의 동기를 맞출 수 있다. gpx 포맷은 파일 크기가 큰 편이라(xml text) 장기간의 여행에는 부적합하지만...

일본 자전거/모터 바이크 여행자들의 성서나 마찬가지라는 mapple의 디지털 버전인 700MB 짜리 super mapple digital을 대략 일주일에 걸쳐 어둠의 경로로 천천히 다운받았다.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여행하는 수많은 한국인 자전거 여행자들의 여행기를 읽어보니 한결같이 중간에 길을 헤멨다. 이 지도만 있으면 길을 헤메는 것이 불가능하다.

관세청 웹페이지를 뒤져보았다. gps는 8526.92 (무선측정장치)에 해당하기도 하고 8526.91-9000 (자동차 내비게이션 시스템), 8471.30(PDA등의 자동 자료처리 기계)에 해당하기도 한다. 관세율이 모두 다른데 8471.30으로 분류되면 무관세가 가능하다. gps의 입력장치, 처리장치, 출력장치(lcd)를 감안하건데 8471.30의 기타 장치로 분류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불친절한 관세청 웹페이지는 그러나, 8%에 상당하는 '기본세율' 이란 것이 국가간 교역관세에 더해지는 것인지에 관한 설명을 하지 않은 것 같다(못 찾았던가). 250$ 미만의 기기를 수입해올 때는 무관세가 적용된다는데(전에는 100$로 알고 있었는데 바뀐건가?) 부가세 10%와 '기본세율' 8%, 우송료 60$ 가량을 감안하면 Garmin eTrex Vista HCx(250$ 가량) 구매 비용은 대략 33만원 수준. 원가에 10만원이 더 붙는다? 허걱!

gift 표시해서 관세 안 물고 수입하면 28만원 가량. 출시된지 며칠 밖에 안되어 기기 단가의 디스카운트는 고려할 수 없으므로 일본 여행을 당장 갈 것이 아닌 이상 gps를 지금 사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garmin의 정식 수입판매처인 네베상사에서는 60CSx를 110만원에 판매한다. 한국 디지털 지형도(11만원)와 도로지도(5만원)을 합친 것인데, 순수한 기기 단가는 94만원. ebay에서는 330$(대략 31만원)에 판매하는데 우송료 60$을 합치면 대략 37만원 가량. 국내 판매가격이 무려 2.5배.

네베상사가 하는 일은 기기의 한글화(별 의미없음)와 애프터서비스 정도? 초기불량 없으면 기기에 고장이 발생할 가능성이 극히 적은 튼튼함이 가민 gps의 장점이므로 별 의미 없음. 수요가 적어 가격이 그 모양인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저 가격은 좀... 네베상사가 지금 가격의 절반 정도로만 판매하고 마케팅, 영업을 좀 열심히 한다면 달리기 좋아하는 사람들과 자전거 속도계 시장 말아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garmin의 forerunner 시리즈나 etrex 시리즈는 그만한 포텐셜을 가지고 있다. 달리 말해 시장 개척을 제대로 안 하면서 그 단가의 상당 부분을 구매자에게 부담시키는 것은 예전 한국 애플처럼 망하기 딱 좋은 방향이다.

여행할 때 들고다닐 소형 컴퓨터로, 곧 출시 예정인 ASUS eee가 상당히 쓸모있어 보인다. 막 굴리며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은 200$ 미만의 완전한 컴퓨터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주중에 한두차례 출근길 자전거 주행을 했다. 책을 읽으려면 건강을 포기해야 한다. '책이란 건 너무 많이 읽으면 좋을 게 하나도 없어. 여자는 시집을 늦게 가고 남자는 근성이 없어지거든.' -- 미야베 미유키, 마술은 속삭인다. 에서. 같은 책에 이런 귀절도 있다. '구사카, 난 유전을 믿지 않는다. 개구리의 자식이 전부 개구리가 된다면, 주위는 온통 개구리투성이라 시끄러워서 견딜 수 없을 거야. 난 평범한 체육 교사라서 어려운 건 잘 모른다' -- 이 세상이 다양성으로 충만한, 다양성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의지와 환상은 체육교사 뿐만이 아니다.

퍼언 시리즈를 발간한 북스피어의 글을 찾아 읽다보니(그래서 미야베 미유키의 글을 읽었다) 번역의 변에 이런 것이 눈에 띄었다. '이렇게 좋은 책을 번역할 기회를 주신 북스피어의 대표님, 편집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다고 이렇게 좋은 분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온다 리쿠의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은 열매'도 읽었다. (거지같은) 소녀 미스테리 판타지는 취향에 안 맞는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책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가방을 잃어버렸다. 평소처럼 100원짜리 동전이 없어 열쇠사물함 위에 가방을 휙 던져놓고 책을 고르고 나와보니 가방이 없어졌다. 그 가방에는 반쯤 피운 담배 한 갑과 라이터, 안경닦이, 휴대폰 이어폰 밖에 없었다. 닳고 닳은 빈 가방을 훔쳐간다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마누라가 스님에게 얻은 그 가방이 그 동안 정말 마음에 들었다. 크기에 비해 대단한 내용적, 수많은 주머니들, 이중 지퍼 때문에 여행할 때 보조가방으로 그만이었는데, 아깝다. 시장에서 좋은 가방을 찾기가 참 어렵다.

마누라, 애한테 잘 보이려고 주말에는 가급적 자전거를 안 탔다. 타봤자 2-3시간 거리의, 바람이나 쐬며 녹슨 근육을 풀어주는 정도였다. 마누라가 불편하다고 이사 가자고 하는데, 부동산에 관해 전혀 아는 것이 없고, 하다못해 내가 한 달에 얼마를 벌어오고 그 돈이 어떻게 분배되고 소비되는지 몰라, 집 장만이나 앞으로 수 년 동안의 중장기 계획을 세우는 것이 마누라 입장에서는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자산과 현금 흐름 경향 쪽은 문서로 정리해두고 시간날 때 보라고 했지만 마누라가 부러 찾아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마누라는 지난 3년간 한 달 평균 생활비가 얼마인지 모르는데, 나는 안다. 나는 일 때문에 바빠서 집 보러 다닐 시간도 없고 집 장만 등등의 장기 계획을 단계적으로 실행하고 검토할 시간이 없다. 집이야 마누라가 편한 것이 좋은데 늘 내 눈치만 봤다. 마누라는 집A와 집B의 장단점을 늘어놓고 집B가 집A보다 왜 나은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자기가 앞으로 살아야 할 집이 이혼했을 때 반타작할 재산이라는 개념이나, 굳이 책임을 져서 욕 먹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그러고 보면 마누라는 직장 생활은 물론 각종 분쟁과 분투, 격렬한 감정과 이성이 오락가락하며 얻을 것(사람), 잃는 것(사람), 지킬 것(사람), 버릴 것(사람), 시간을 들일 것(사람)을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해 본 적이 없다. 공주님 이다.

내가 일없이 종횡사해하던 안드로메다 공주를 구한 것이다!
대략 감개무량.

평지라면 대략 하루에 100~300km를 이동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렴풋이 지금 이 몸으로 그게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일주일 이내? 올 가을에는 바빠질 것 같아 어디 놀러다닐 생각은 접은 상태. 관리자로서 모범을 보여야 하는 처지라 작년 가을부터 꼬박꼬박 출퇴근을 했다. 대체로 웃겼다. 프리랜서인데 출퇴근이라니...

올해도 기계 3-4대 납품하는 정도로 끝날 것 같다. 먹고 살 수는 있지만 몇년 후 먹고 살기 위한 연구비용 조달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라 조금 걱정이 되었다. 가을에 인원을 둘쯤 더 늘리고 작업할당을 조절해서 3개의 조직을 만들어 한 팀은 전방지원, 한 팀은 연구개발, 한 팀은 TFT 하려고 하는데 프로그래밍은 가끔 하거나 멘토링 하는 정도고 요새는 매니징과 문서 작업, 교육 등을 주로 했다.

고집대로 밀어붙이는 탓에 사람들에게 그다지 좋은 소리를 못 듣고 있다. 엊그제는 직원들 10일 정도 교육 보내는 문제로 좌절스런 디베이트를 해야 했다. 한달 전에는 사원들 강제로 휴가계를 쓰게 했다. 이걸 주고 저걸 잃고 저걸 주고 이걸 잃고... 내 월급은 안 올려도 좋으니 직원들 월급이나 올려주세요, 저 친구는 인센티브를 받아야 해요, 앞으로는 지금 현업으로 회사를 먹여살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회사를 먹여 살릴 것입니다, 놀지 않으면 아이디어는 안 나와요, 이런 따위의 말을 진심으로 한다고 해서 회사 및 직원들이 쓸모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반대로 현실과 괴리가 심한 이상을 쫓는 순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란 착각을 하지 않았다. 4명을 교육 보내려고 했는데 2명 밖에 보내지 못한다. 못 가는 친구들에게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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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lica

잡기 2007. 7. 24. 16:55
스파게티는 만들기가 너무 쉬워 사실상 패스트푸드에 속했다. 재료가 올리브유, 마늘, 스파게티면 밖에 필요없는 간단한 요리다. 면은 10분쯤 삶아 채에 받아두고 프라이팬에 올리브유와 으깬 마늘을 넣고 볶아 기름에 마늘향이 배고 마늘이 노란색에서 갈색으로 변할 때쯤 면을 넣고 몇번 뒤집어 준 다음 접시에 덜면 끝이다. 바질 있으면 좀 뿌린다. 그리고 쌀레 에 뻬베. 먹어 본 가장 맛있는 스파게티도 그렇게 만들었다. 묘하게도 번쩍이는 이탈리안 전문 식당이 아닌, 아무거나 다 하는 페루의 아스카의 허름한 레스토랑에서 그걸 먹었다. 인생이 그처럼 단순했으면 좋겠지만.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개종시키러 떠난 한국인들은 붙잡혀서 순교당할 처지에 놓였다. 원리주의에 흠집을 내서 아프간의 이슬람을 내부로부터 붕괴시켜 장기적으로 아프간 인민을 천당에 보내고 아프간에 영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계획은 외계인이나 허구헌날 거울이나 쳐다보며 컴플렉스에 시달려 사는 한국인 아니고는 실행 불가능해 보인다. 예수교 선교 활동이 타국 문화에 대한 침략 내지는 강간과 유사해서 왠만하면 자제하길 바라지만 예수교에서 선교(포교)처럼 중요한 것이 있을까? 선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생각이 조금만 달라도 독랄한 다구리질을 일삼는 한국인들 때문에 사이트 돌아다닐 때마다 눈살을 찌푸렸다 -- 한국인은 원래 정신상태가 이상하기 때문에 한국인 예수교인도 풍토와 정서상 당연히 이상해 보여야 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순교하는 것만은 막았으면 좋겠다. 그간 고국인들이 받은 스트레스를 감안해 볼 때, 누구에게나 만족스러울 것 같은 결론은, 그들이 잔뜩 얻어터져 어디 팔다리 하나 부러져서 돌아오는 것이다.

미팅 15분 전부터 IMAX Amazing Caves를 틀었다. 큰 화면으로 장대한 그랜드캐년에 자일 하나 믿고 매달려 있는 사람이나 언제 녹을지 모르는 북극의 크레바스 틈새를 활보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뇌귀퉁이가 서늘하다. 프로젝트 종료 레포트를 브리핑했다. 많고 많은 프로젝트 경험이 있었지만 보고서 달랑 제출하고 만다던가 연이은 또다른 프로젝트 기획으로 바빠서 제대로 된 발표를 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런 류의 happily ever after는 일생에 몇 안 되는 인생의 경험이다.


미팅이 끝나고 밤새 술을 퍼 마신 후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생각나서 모니터를 새로 장만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용산에서 노트북을 켜고 무선AP를 검색해 인터넛에 접속하고 다나와를 뒤져 가게를 알아본 다음, 통장 잔액을 탈탈 털어 22인치 와이드 LCD를 사들고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나야 집에서 컴퓨터 쓸 일이 거의 없지만, 아내는 책상에서 늘 구부정한 자세로 흐릿한 17인치 모니터를 쳐다봤다.


아내는 사흘동안 애를 데리고 가출했고(바람쐬러 나갔고) 나는 보다시피 자전거를 타고 주말에 인근을 돌아다녔다. 쓰시마 여행 후 근육이 업그레이드된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여행할 때마다 그랬다. 직원이 새 자전거를 세 시간 동안 타고 사무실로 끌고왔다. 거의 조정되어 있지 않은 자전거를 손 봐주면서(대체 헤드셋, 기어가 엉망인 이걸 어떻게 여기까지 비 맞으면서 타고 온거지?) 아... 내가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자전거의 기초를 알려줄 정도로 많은 것을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댓시간 동안 자전거 정비에 관해 알려줬는데 진도가 너무 빨라 알아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알고 있는 지식이 무작정 젓기만 하면 자전거는 간다 정도를 약간 웃도는 수준이지만, 국내에 몇 안 되는 이런 저런 자전거 서적을 읽고 느낀 점은, 자전거의 기초에 관한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설명을 하는 책이 국산 중에는 없는 것 같다는 정도. 역사에 존재하는 여러 위대한 발명품 중에 하나인 자전거가 기껏해야 온갖 감상주의로 치장된 레크레이션 활동 도구로 찬사 좀 받고 자전거의 명쳥 이것저것 설명해 주고 얼른 나가서 자전거를 모는 기쁨을 누려보라는 식이라면... 나같은 사람은 재미가 없어지지. 그 친구가 휴가 여행 갈 때 내 시계와 GPS를 빌려줄 생각이다. 시계에 달린 기압계 사용법 부터 가르쳐줘야겠다. 그 잡동사니 가젯들은 오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산 거지만 어디까지나 레크레이션 도구다. 저번주에는 자전거를 천천히 몰고 가다가 맥없이 자빠졌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 한강로 자전거 도로 주행은 목적의식이나 위기감이 전혀 없으니까.
* 여행도, 운동도, 연습도 아니었으므로.

맥주 한 잔 하면서 와이드 LCD 모니터로 다이하드 4.0을 봤다. 와이드라니.. 팔자좋다. 전작의 궁상마초 스리핏은 흔적기관처럼 퇴화되고, 고생은 전보다 덜했다. 시큰둥했다. 영웅이 되고 싶어서 되나? 어쩌다 보니 아무도 안 하길래 나라도 해야지 하다가 그렇게 된거지. 기준선에 대한 뚜렷한 똥고집 역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계에서는 어쩔 수 없이(내가 할 수 없으므로) 타협하고 살아야 한다는, 노땅들을 위한 잔잔한 가르침을 준다. 영화의 해피엔딩 때문에 시큰둥했던 것 같다. 그건 아니야. 딸년은 엄마한테 가 버리고 해커놈은 NSA에 스카웃 되어 헬기타고 날아가고 자기는 주머니를 뒤져보니 꾸깃꾸깃한 고지서 쪼가리뿐, 집에 갈 택시비가 없어 뻐근한 어깨를 한번 으쓱하며 후줄근하게 내리는 빗속의 빈 도로에서 되지도 않을 히치를 시도하며 똥씹은 표정으로 꺼져가는 꽁초를 물고 있어야지. 절박함이 부족했어. 그래서 엑기스가 빠져 버린 화려한 액션씬이 부질없어 보였다.


최근 보기 시작한 Miracles란 미국 드라마의 주연 Skeet Ulrich. 이미 Jericho를 통해 얼굴을 알고 있다. 표정이 묘해 인상에 남는 연기자. miracles는 과연 액션 판타지 대작이었던 Carnivale을 능가하는 드라마가 될 것인가? 콘스탄틴류 마초물이 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각본가가 주인공을 얼마나 만신창이로 만들어놓을지 기대되는데, 그 반대면 이 드라마는 가뜩이나 짜증나는 기적을 소재로 한 탓에 소똥이 될 수 있다.

dexter 2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crossing jordan을 보기 시작했다. '요단강 건너기'인 줄 알았는데 코믹멜로수사물인 듯(똥같은 엘리 맥빌의 악몽이 되살아 났다). 이 여자는... 딱 레즈들이 좋아할 스타일인데? 4기 진행중인 4400과 heroes의 차이점을 더 이상 모르겠다. 그저 제대로 낚였다...는 심증이 있다. 10년 전에 만들어진 pretender 역시 최근 보기 시작한 드라마. 주인공인 재로드는 뛰어난 시뮬레이터이자 인간 컴퓨터인데 그 좋은 재능으로 이미 벌어진 과거사를 수습해 과거의 사건으로 상처입은 몇 안되는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된 천재다 -- 다시 말해 심각한 두뇌 손상을 입은 것이 틀림없다. 섣부른 재단은 금물.

드라마 만들기: 면을 삶고 소금과 후추로 적당히 간 맞추기가 그렇게 힘들까? 2천년간 만들어 본 레플리카일텐데 어떻게 조리하길래 늘 중국산 짝퉁 같아 보일까?

'중국제품의 장점들' 이란 감탄스러운 글:

▶ 강력접착제 : 급히 떼야 할 일이 생겼을 때 편리함.
▶ 공구세트 : 드라이버가 국산 나사한테 짐. 육각렌치는 동그랗게 변함. 새삼 한국 철강기술의 우수성을 깨닫게 해줌.
▶ 나무젓가락 : 차츰 길이가 짧아지면서 교체 시기를 알려주며 이쑤시개 대용으로 몇 가닥씩 갈라져 나옴. (숟가락 : 설거지를 하다보면 유리겔라가 됨.)
▶ 맥가이버칼 : 맥가이버칼을 수리하다보면 어느새 맥가이버가 됨.
▶ 머그컵 : 손잡이가 떨어져 나가도 컵의 기능을 수행 할 수 있음을 보여줌. (손잡이 2개를 연결하면 하트도 만들 수 있음.)
▶ 면도기 : 감자 칼이 없을 때 유용함.
▶ 밀폐용기 : 김치나 장류를 넣고 뚜껑을 닫아두면 알아서 숨을 쉼.
▶ 방향제 : 모기가 줄어든 느낌이 듦.
▶ 변신로봇 : 부품이 하나 둘 분해돼 아이들의 조립능력을 향상시킴.
▶ 볼펜 : 펜 끝에서 볼(ball)이 분리되어 자신이 볼펜이라는 것을 직접 증명해 보임.
▶ 분무기 : 노즐이 차츰 넓어지면서 물총으로 변신함. (변신로봇 조립하다가 지친 아이들에게 주면 좋아함.)
▶ 손톱깎이 : 발톱깎이는 따로 있음을 알게 됨.
▶ 온도계 : 일년 내내 실내온도를 일정하게 유지시켜 줌.(강추.)
▶ 일회용 방독면 : 아직까지 재활용해본 사람이 없다고 전해 옴.
▶ 지압슬리퍼 : 각질과 굳은살까지 제거해 줌.
▶ 체중계 : 고장의 원인이 자신의 몸무게 때문이라고 자책하여 다이어트를 하게 됨.
▶ 충전기 : 왠지 전기료가 더 들까봐 건전지 사용을 자제하게 됨.
▶ 휴대용 가스렌지 : '폭발방지장착'이라는 문구에 오히려 안전과 생명보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됨.
▶ 연필 : 심이 쏙빠져 교체도 할 수 있음.

사장님이 뭐라 말하길래 쏘아붙였다. 기술자는 '컵에 물이 반씩이나 남았다'거나, '컵에 물이 반 밖에 안 남았다'는 식으로 말하면 안됩니다. '컵에 50ml가 남았다'라고 말하는 버릇을 들여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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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nnable

잡기 2007. 7. 22. 23:38
GPS의 감도와 트랙로그의 길이 때문에 쓰시마 여행 직후 GPS 리시버를 업그레이드하려고 마음먹었다. 지금 가진 것은 중고로 판매하고 새 것 사는데 보태면 될 것 같다. 지금 가지고 있는 eTrex basic과 달리 topo map을 볼 수 있고 대용량 외부 메모리를 이용해 340MB 분량의 25000:1 일본 전도(지형도)를 담고 돌아다니면 획기적으로 쓸만할 것이다. 생각하고 있는 모델은 Garmin의 eTrex Vista HCx. 7월이나 8월쯤에 출시 예정인데 지금은 예약 판매 중. 모델명의 H는 High Sensitivity, 기존 모델(Cx)보다 감도가 상당히 향상되었다고 가민사가 주장했다. 예상가(기대가)는 242$. 얼리 어댑터라 불리는 실험용 더미 또는 인간 마루타들이 사용기 올릴 때까지는 안 산다.

한때, 가칭 '딩동댕 테크놀로지'라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 사업 아이템으로 자전거용 GPS 리시버를 생각한 적이 있다. GPS 모듈이야 시장에 널려있고 일반 건전지 두개로 작동하는 16비트 mcu 하나 박고 흑백 액정 달고 usb 인터페이스를 달고 웨이포인트와 트랙로그 정도 저장하는 단순한 트립 컴퓨터 형태로 만들면 근근이 먹고 살만한 사업 아이템이라고 생각했다. 비접촉식 자전거용 속도계 가격으로 GPS가 가지는 여러 장점들을 이용할 수 있다면 히트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가 머리가 아파서 관뒀다. 기술자지 사업자 체질은 아니라서.

괴물냉채를 먹기로 한 먹자 모임에서 자다가 나온 라모님이 자전거 튜닝 한다길래 이것저것 묻다보니 허브 다이나모 얘기를 들었다. 허브 다이나모는 일종의 자전거 발전기. 내친 김에 웹질해서 스펙 보고 잔머리를 굴려봤다.

6v 3w 가 hub dynamo의 표준인 것 같은데 웹을 여기저기 뒤져보니 최적효율이 70%, 어림잡아서 50%라고 가정하면, 6v 500mA를 계속 공급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6w 이상이 허브 다이나모 때문에 추가로 소요된다고 볼 수 있고... 1kwh = 864kcal니까, 1시간당 5.2kcal, 하루 10시간 주행하면 평소보다 52kcal를 더 섭취해야 한다. 계산이 맞긴 한건가? 하도 오래전에 배운 것들이라. 허브 다이나모를 설치해도 주행에 큰 부담이 될 것 같지 않다.

정전압 레귤레이션 충전회로의 변환 손실, 이런 저런 장치에 의해 추가되는 무게와 전지가 빠짐으로써 감소하는 무게에 따른 에너지 소모량은 아예 빠졌고 위에서 계산한 전력효율이 잘못된 것 같은데 머리 아프니까, 간단하게, 평소 두 끼 먹을 것을 세 끼 먹고 열심히 페달질하면 GPS와 전조등, 후미등의 전력은 충분히 뽑을 수 있을 것 같다.

4w짜리 전조등과 간단한 레귤레이터 정도면 나쁘지 않은 효율을 낼 수 있으나(자전거가 멎으면 전조등이 꺼지는) 이왕 발전기 다는 거 적어도 GPS 정도는 전지 없이 굴려줘야 쓸만하겠다고 생각. GPS 용 충전지와 전조등, 후미등 전지등속을 모두 합치면 대략 500g. 허브 다이나모는 800g 가량. 충전회로와 충전지를 합치면 1kg는 나갈 것 같은데... 편의성은 크게 개선되겠지만 자전거에 덕지덕지 달라붙는 전선류와 기계들을 생각하니 꼭 좋지만도 않고.

그보다는 가격과 시간, 노력이 문제인데, 웹질 해보니 Shimano DH-3N70 dynohub 가 89$ 가량 하는 듯. 벤치마크를 보니 무게나 효율은 528g짜리 슈미츠의 SON 28이 나은 것 같은데 가격이 150$ 가량. 어차피 외국에서 주문해야 하니 주문하는 것만으로도 이래저래 돈이 깨질 것이다.

두번째로, 4W짜리 국산(서울반도체) LED가 있단다. 자전거 동호회 여기저기를 둘러보니 그것으로 튜닝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다. 4W 개조 정보를 주로 올리는 사람이 코난님인데 어쩌다 사진을 보니 행책 사장님이었다. 자출 경력이 꽤 되셨고 싸이클로 이틀만에 서울-부산 주행을 했고 평속이 30kmh를 넘는다니 나보다 잘 탄다. 어쨌거나 전조등은 2W 정도만 나와줘도 감지덕지다.

먹자 모임의 참석자가 다양해서 허브 다이나모처럼 가끔 얻는게 있다. 티벳, 지중해,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곧 독일 갈 사람 등 여기저기 많이들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다. 주최자 김씨는 올들어 밥 먹고 술 마시는 모임에 점점 흥미를 잃어 반대급부로 업무에 비상식적으로 매진하게 된 것 같은데. 한국의 SF를 위해서는 바람직한 현상이지 암. 김씨 아저씨가 얼른 돈 벌어서 요트를 사야 모임이 더 재밌어질텐데. 지금 추세라면 돈이 될만한(인기 있을만한) 여러 작품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pern 시리즈 기획물이 썩 괜찮아 보인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들에게는 필수적인 타월 한 장과 비치팩에 싸 놓은 책 세 권 해서 4만원 가량. 이건 딱 휴가 때 클럽 메드로 동남아 어디 풀빌라에 짱박혀 푹 쉬면서 사나흘 한가하게 읽기 좋게 만든 휴가 전용 기획이다. 항공권+클럽메드+판타지 몇 권 구성은, 격무에 시달리는 오타쿠 엔지니어의 휴가 패키지로 정말 딱이다. 북스피어란 출판사에서 냈는데 당연히 booksphere일 꺼라고 생각했건만 홈페이지가 booksfear였다. 농담인가? 아마도 booksphere.com을 누가 선점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음가가 비슷한 booksfear.com 도메인을 잡은 것 같다. 뭐하는 출판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려 3권을 호탕하게 출간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좋은 출판사지 싶다.

행복한 책읽기는 SF는 그동안 낼만큼 냈으니까 올해는 다른 책들도 내보겠다는 계획인 것 같다. 물론 국산 SF 출간도 이루어질 것 같다. 중소 출판사가 수 년에 걸쳐 별로 돈이 안되는 SF 기획을 지금까지 유지해 온 것만 해도 박수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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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tis incognita

잡기 2007. 7. 17. 01:59
이씨가 추천해 줬는데 잘못 들어 '그랜드나간'으로 검색하니 나타나지 않았다. grand + naga + n이라고 생각했다. '열혈 로봇물'로 웹을 어렵게 검색하니 비슷한 것이 나타났다. 앞으로는 뭘 들으면 글자로 적자. -_- 제대로 된 제목은 '천원돌파 그렌라간' 간만에 가이낙스제 열혈물을 봤다. 그러고보니 그 동안 열혈물은 씨가 말랐던 것이 아닌가? '너를 믿는 나를 믿어' 굉장한 횡설수설을 늘어놓지만, 의지가 있는 한 움직여야 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실낫같은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사변은 인류 역사상 사나이들에게 품질이 보증된 몇 안되는 잠언중 하나다. 애들 만화인데 그 정도의 대사가 나왔다. '너를 믿는 나를 믿어'는 언제든 골로 갈 준비를 갖춘 신념의 사나이들간에 흔히 일어나는 MAD(상호 확증 파괴; mutual assured destruction)를 막을 수 있는 대안이다.

여자애들 역시 상호 확증 파괴의 잔취미를 가지고 있으나 그 영향력은 미미하다. 인류를 쓸어버릴 수 있는 것은 역시 사나이들뿐.

옛날옛날에 영웅본색을 좋아했다. 지킬 것이 없었던 주인공이 땅바닥에 떨어진 밥알을 줏어먹으며 비굴하다가도, 지킬 것이 생기자 갑자기 쌍권총 명사수가 되어 친구를 위해,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지금 봐도 재밌다. 이타적인 행동의 가치는 그야말로 무량했다. 이 문명은 선조의 시체가 남긴 피바다 위에 선 것이다. 비근한 예로 한국을 들자면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과 민주화 투쟁 등 지난한 노도의 시간을 거쳐 이 땅에 무개념이 상팔자라고 믿는듯한 100일녀가 태어나기도 했다. 수백년간의 양적, 질적 희생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댓가라고 할 수 있겠다. 군가산점 폐지에는 찬성하지만 100일녀하고는 이유가 다르다. 이 세상에 공정한 경쟁이 없으며 핸디캡은 필연적이다. 공부와 학습이 유일한 신분상승의 갖잖은 기회일 수 밖에 없어 어쩌다보니 알파걸들이 늘었다지만 남성이 지녀야 하는 핸디캡은 애당초 필연이다. 군가산점이 있건 없건. 어쨌거나 남자아이들은 철밥통 땡땡거리며 사는 것보다는 땅바닥에 떨어진 밥알 줏어먹으며 비굴하지만 위험하게 살았으면 싶다. 평안하고 잔잔한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어지는 남은 찌꺼지들은 여자들이 차지하도록 내버려두자.

처절함과 악다구니 근성 면에서 좀 부족했던 그렌+라간은 그저 먹고살기 위해 땅을 파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두더지소년의 맹활약을 다룬 것인데, 관점을 달리 해서 보면, 흡사 일본의 두더지같은 히키코마리를 위한 절전형 진혼광시곡 같았다. 골방의 천정을 뚫고 나가라. 첫 합체씬은 걸작이다. 비웃는 것은 아니고, 새벽에 의자에서 나동그라질 정도로 웃었다. 그래, 그렇게들 어설프게 의지와 용기만 믿고 정점을 향해 병신 몸으로 달렸다.

그러고 보니 최근 읽은 윌리엄 니얼리의 '혼자 배우는 산악자전거'라는 걸작이 생각난다. 몸에 관한 책이다. '기술적으로 근사하게 나가떨어지는 방법'을 가르치며, 자전거를 타다가 나동그라져 심한 부상을 입은 동료에게 '네 자전거는 이상 없어. 어이, 넌 어때?' 라고 말해주는 품위있는 매너를 가르친다. 훌륭한 라이더가 되려면 그을린 피부, 찰과상과 타박상의 무도회로 점철된 무릎, 최근에 치료한 쇄골, 윗옷에 묻은 진흙, 그리고 못이 박힌 손바닥이 있어야 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라이딩시 항상 광적인 미소를 잊지않는 것이다. 덤으로 산악 자전거를 타면서 이성에게 올바르게 접근하는 방식도 가르친다 '제가 묵는 곳으로 가서 함께 자전거나 광나게 닦아보지 않을래요?'

자전거 주행의 철학적 교훈도 잊지 않았다 '어떤 시련도 그대를 죽이지만 않는다면 그대를 더욱 강하게 단련시킬 것이다 -- 니체' '산악자전거의 단일성은 존재의 단일성에 우선한다 -- 변증법적 유물론' '사색할만한 가치를 지닌 대상들은 새로운 부품과 섹스다'

preface에 '이 책을 사랑하는 홀리에게 바친다'라고 적혀 있는데 아무리봐도 홀리가 옆에 누워 TV보고 있는 마누라같진 않고, 아마도 자전거 이름인 것 같다. 마지막 장에는 원조 열혈이었던 니체의 경구가 말 그대로 선명하게 번쩍였다.

자신을 믿어라! 인생에서 최고의 결실을 거두고 최고의 기쁨을 누리는 비결은 위험하게 사는 것이다.


니체의 저 익숙한 경구를 믿었다. 아동 로봇물인 그렌+라간의 교훈과 정말 똑같지 않은가?

워낙 인쇄상태가 훌륭한 책이라 산악자전거를 타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권해줄만하다. 이런 책을 만나는 것은 큰 기쁨이다. 그래서 내가 쓴 '쓰시마 여행기'를 보고 흥미를 느껴 여름 휴가로 쓰시마를 가겠다는 직원에게 빌려주려고 한다.

그는 엊그제 자전거를 처음 샀다. 그에게 추천해 준 자전거는 알톤의 알로빅스 500과 RCT 마스터 터보였다. 고리를 뜯는 옥션과 달리 gmarket에서는 20만원 미만으로 자전거를 구할 수 있었다. RCT 마스터 터보는 로드 타이어를 단 13kg대 국산 자전거였다. 국민자전거감이다. 불과 몇 년 전에는 꿈도 못꿨을 상당히 괜찮은 스펙의 자전거지만 값비싼 외산 자전거를 선호하는 한국에서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내 자전거는 뒷짐받이를 달지 않은 상태에서 17kg쯤 된다(15kg인줄 알았는데 전자저울로 달아보니 17kg였다). 무거워서 한 손으로 자전거를 들어 어깨에 들쳐메고 석양의 설악산을 오른다던가 하는 로맨틱한 라이딩은 할 수 없다.

자전거 여행을 하겠다는 친구에게 마이크로파이버로 만든 버프가 얼마나 훌륭한 장비인지 시범을 보여줬다. 8천원짜리 버프를 산 지 딱 하루만이다.

주말 오후에는 자전거 정비를 했다. 7월 5일 돌아온 후 부속이 없어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팽개쳐 둔 자전거다. 여행 중 하도 비를 맞아 인기 가수 비가 싫어졌다. 가랑비라도 맞으면 쓰시마의 악몽이 떠올라 평소 취향에 안 맞는 노래들이 여럿 튀어나왔다. 버킷으로 퍼붓는 듯한 빗속이었지만 휴가를 알차게 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꺾이지 않았다. 그 반대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당시에는 선구자의 가르침인 '광적인 미소' 역시 잊지 않았다. 여행기는 직원에게 보여주기 위해 수위를 많이 낮췄지만(최소한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여야 할 것 아닌가?) 그런 여행을 할 때 내가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미친개처럼 싸돌아다닌다는 것쯤은 마누라도 안다.


체인의 늘어난 정도. 처음,중간,끝. 아래의 새 체인과 대비해 한 마디 정도 늘어났다. 아직은 버틸만한 수준인데 좌우로 비틀면 이격이 상당해서 교체하기로 마음먹었다. 체인 2~3회 교체에 스프라켓/체인링을 교체하는 정도니까 앞으로 3년 안에 자전거를 갈아야 한다. 체인+체인링+스프라켓+체인 공구 등속을 합치면 차라리 자전거 한 대 사는 것이 낫다. 내 자전거는 그만큼 싸구려다. 구한말 40kg짜리 짐자전거에 짐을 싯고 어렵게 살았던 선조들과 밥알을 줏어먹던 주윤발을 상상해보자. 요즘 자전거 동호회에서 나이 서른일곱에 직장을 때려치우고 독도에서 제주도까지 전국일주를 하는 양반의 글을 읽는다. 인생을 바꾸겠다는, 무언가 이루어보겠다는, 그것은 용기다.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자동차에 치여 병원 신세를 지고도 계속 자전거를 타고 가겠다는 것도 용기다. 용기는 무모한 의지 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앞 브레이크 패드. 아랫 것은 wear line이 전부 닳아버린 원래 자전거의 브레이크. 윗 것은 3000원에 2조를 판매하는 싸구려 브레이크 패드


윗 것은 한 조에 5000원이나 하는 시마노의 정품 브레이크 패드. 아랫것은 원래 자전거의 다 닳아버린(녹아내린) 뒷 브레이크 패드. 저런 앞/뒤 브레이크 패드로 빗속의 내리막길에서 속된 말로 쌔려 밟았다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쫙 끼쳤다. 하긴 그때는 브레이크 패드는 신경 끄고 타이타닉 호 뱃전에서 바람을 안은 케이트 윈슬랫 같은 자세로 다운힐을 했다. 아무도 없는 길에서 으하하하 광적인 웃음을 머금은 채.


스프라켓을 닦고 새 체인을 장착.


디레일러의 폴리에는 주행중 압력이 거의 가해지지 않는다. 체인의 텐션을 유지하는 정도인데 워낙 깨끗하게 닦아 눈이 부시다. 이 정도면 새것이나 다름없는 거다.


완전 새것은 아니고... 체인링은 닦기가 참 어렵다.


앞 브레이크도 번쩍번쩍


믿음직하게 번쩍이는 새 뒷 브레이크. 진부령 다섯개 정도는 문제없어 보인다. 나는 나를 믿는 너를 믿는 cogitan이다.


정비 다 하고 나니 속이 시원하네.

무려 4시간에 걸쳐 땡볕 아래서 닦고 기름칠하고 조인 정비였지만 자전거는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4시간 동안 바퀴 청소, 스포크 장력 조절, 림 청소, 스프라켓 청소, 체인링 청소, 체인 교체, 뒷 디레일러 청소, 앞 디레일러 청소, 브레이크 패드 교체, 각종 와이어 정비, 앞뒤 디레일러 조정 밖에 하지 못했다. 차체를 닦는 다거나 구동부를 제외한 다른 부분을 손 볼 시간은 없었다. 그 동안 자전거를 정비하느라 구입한 각종 부품과 공구, 시간과 정성을 생각하면 17만원짜리 RCT 마스터 터보를 사는 것이 싸게 먹힌다.

와일드 바이크 사이트의 산악 자전거 주행 동영상을 밤새 쳐다봤다. 풀샥을 장착한 다운힐 자전거는 심장을 쿵쿵 뛰게 한다. 해 보고 싶다. 해 보고 싶다. 산길을 60kmh로 달려보고 싶다. 버니홉은 커녕 스탠딩 조차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자전거 동호회에서 하룻동안 280km를 달리고 자기는 초보자라고 말하는 아저씨의 글을 봤다. 그 양반이 초보면 나는 최근에 감정을 가지게 된 뉴본차일드다. 소울이처럼 말을 배우기 전 소위 천사의 목소리라는 것으로 꽥꽥 기버리시를 주절거리는 수준이다.


소울아, 자세 똑바로 하고 들어. 네가 세계 거울을 이해하게 되면 아빠가 안 맞는 몸뚱이에 머리통을 꽂아 합체하고 아빠의 삶을 이끈 니체의 잠언을 가르쳐 주겠다. 영혼은 iskra, 타오르는 불꽃일 때가 아름답다. 네 아빠가 애들 열혈물을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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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drill

잡기 2007. 7. 9. 17:59
미국에 가서 3개월쯤 일하다 올 생각이 있냐고 묻는다. 갖가지 핑계(처자식이 있고 언어가 안되며 굳이 미국까지 갈 이유가 없다)와 합리적인 이유(사업성 없음, 실은 가기 싫음)를 들어 고사했다. 들춰 볼수록 별 볼 일 없는 미국애들 기술에 들러리 서고 싶지 않다.

기술은 기술이고, 시장성과 시장점유는 기술과 무관한 문제라서 '하찮은 기술'로 경영 판단에 좋지않은 영향을 줄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상당한 리스크(적어도 2인이 앞으로 1년 이상 투입되어 실효를 얻지 못할 높은 가능성)를 안고 밀어붙이는 것에 휩쓸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여튼 영 내키지 않지만 11월쯤 프로토타잎을 만든단다. 스펙도 없이 기계가 미국에서 10월쯤 완성된다는데 소프트웨어는 그럼 남은 한 달 동안 짜라니 이건 거진 인력파견 SI잖아?

첫 해외/자전거/캠핑 여행 테스트를 마쳤다. 쓰시마에서 4박 5일 동안 비 맞으며 돌아다녔다. 제주도의 40%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자전거 여행에는 그만이다. 두 번 자전거로 여행한 제주도보다 만족스럽다. 볼꺼리는 별로 없는 곳이만 경치가 훌륭하다. 비가 많이 옴에도 불구하고 섬이 아름다워 여행 기간 내내 만족스러웠다. 소위 말하는 serene beauty다. 자전거 아니면 누릴 수 없는 종류의 기쁨, 자전거여야지만 느낄 수 있는 종류의 만족감이다. 한국인 단체 여행객들은 볼 것 없고 비가 오는 대마도에서 별 재미 못 봤다.

장기 주행을 위해서는 제대로 된 짐받이(rear rack, and maybe front rack) 장착이 필요하고 자립 정비를 위해 방청제와 구동부에 칠할 오일, 그리고 여분의 브레이크 패드를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할 것 같다. 악천후 덕에 귀중한 정보를 얻었다.

부산에 돌아와서 이 분위기 그대로 국내 캠핑 투어를 계속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만사가 귀찮아 사진과 주행 기록을 정리하고 오겹살에 소주 한 잔 했다. 집에 돌아와 샤워한 후 시체처럼 잤다. 자전거를 내팽개쳐둔 채, 주행 끝나고 바로 정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이 기회에 체인을 갈기로 했다.
블로그 분류에 쓰시마 자전거 여행기. 시대가 시대인지라 앞으로는 디카로 동영상을 찍을 것이다. 홈페이지에 파일크기가 큰 동영상을 올리는 부담도 없고. UCC 사이트 중 youtube, naver service, soapbox 등을 벤치마크 해보니 microsoft의 soapbox의 화질이 가장 나았다. 업로드가 비교적 느린 편이나 업로드 인터페이스는 합리적이다.

후지필름 파인픽스 F11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만한 카메라다. 악천후 -- 하도 비가 많이 와서 버린 사진들이 많지만 6일간 대략 500장의 사진과 네 개의 동영상을 찍었음에도 배터리 잔량이 여전히 full로 나타난다.


Video: 자전거 타고 카메라 들고 찍은 쓰시마 39번 지방도 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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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am 기상. 숙취도 없고 말끔한게 기분이 좋다. 구름 사이로 얼핏 해가 보인다. 스프를 끓여 식빵을 찢어 넣고 아침으로 먹었다. 전에 여행할 때 어떤 여행자한테 배운건데 꿀꿀이 죽같지만 보기와 달리 맛이 그럴듯 하다.

누가 보기 전에 텐트를 걷었다.


론머맨 아저씨가 나타나 오늘 여기서 캠핑할 꺼냐고 묻는다. 이이에. 오늘 오후 부산에 갑니다. 캠핑은 유료라고 말하며 언덕으로 올라가 잔디를 깎기 시작한다. 4.40pm 배가 출항이라 적어도 3pm까지는 시간이 많아 남아 오늘은 한국 전망대에 가볼까 한다. 날이 맑으면 일찍 돌아올 생각이다. 텐트 등속을 화장실 앞 식수대 밑에 감춰두었다.


아침에 보니 해변이 더욱 맑아 보인다. 해수욕에 제격이다. 가벼운 짐만 꾸린 채 9am 출발했다.



아무 생각 없이 패달을 밟다가 '토요 포대 흔적'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발견했다. 비포장 도로로 10분쯤 올라가자 포대가 나타났다. 뭐하는 곳이지?



자전거 전조등을 뽑아 어두컴컴한 미로 같은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포탄 캐리어 같은 것이 보인다. 아, 이즈하라의 하치만구 신사에 있던 폭탄이 혹시 여기 쓰이던 것인가 보구나.


이곳이 설마... 저 정도 규모면 정말 엄청난 포가 있던 자리인데.. 흡사 아발론의 포처럼.


지도를 보니 쓰시마의 이 포대에서 부산과 큐슈 지방 사이의 적 이동을 방어할 목적으로 포대를 세운 것 같다.


포대에 관한 무슨 설명이 있는데, 다른 관광지와 달리 영어나 한글 병기된 설명이 없다. 게다가 일부 문장을 지웠다. 왜 지웠을까. 알아야만 하는 내용일까. 하치만구 신사의 대포알들이 호국의 의지가 담긴 신령한 대포알이었던가? 뭐가 캥기는지 문장을 지운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한국 또는 미국에 적대적인 포대였던 것 같다.

더 생각하지 말자. 조잔하기 그지없는 일본의 금리나 주식시장, 위안부 할머니들이 돌아가실 때까지 면피하며 기다리는 비겁한 일본 정부. 일본인들조차 원숭이라 부르는 아베. 도로에서 보곤하던 아베의 사진들. 눈을 마주치지 않는 일본인들. 비포장 내리막길을 흡사(?) MTB를 타듯이 내려갔다. 비포장 도로에서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전방 주시. 목덜미가 뻗뻗해진다. 자전거와 온 몸이 미친듯이 떨린다. 딴 생각하다가 삐끗하면 바로 자빠링이다.


해안도로를 따라갔다. 한국 전망대로 향하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 길의 끝에는 전복 양식 공장이 있었다. 구경하다가 사진 찍기 뭣해서 나왔다.


거진 자동차 대시보드 콘솔 분위기 물씬 풍기는 '핸들바 콘솔' 지도나 웹 상에 소개된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waypoint가 종종 달라 전복 양식 공장 등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GPS 덕택에 쓰시마 여행이 손쉬웠다. 전조등은 터널 주행시 필요해서 대낮에도 달고 다녔다.

카시오 손목시계(Casio PRG-70V3)는 자기 나침반, 기압계, 시계, 온도계 따위가 포함된 것이다. 터프 솔라 배터리를 사용해 배터리 교환이 필요없는 반영구적인 제품. GPS(110$)보다 더 비싼 17만원짜리. 2005년 2월 여행할 때 사용하려고 구입. 그런데 3일 동안 비를 펑펑 맞았더니 그... 알량한 생활방수가 견디질 못했다. 유리창에 낀 습기는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야 사라졌다. 저렇게 습기가 끼어 있으니 기압계가 엉망으로 작동해 일기 예측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10.30am. 한국전망대 도착. 건자재를 한국에서 공수해와 한국풍으로 꾸몄다는 건물. 다시 휴대폰에 전원을 넣고(안테나가 만땅으로 잡혔다) 아내와 통화를 시도했다. 빙고. 이번에는 된다. 거참 통화 한 번 하기 되게 힘드네.

와니우라 마을의 이팝나무 자생지에서 오락가락했다. 봄에 왔더라면 나무마다 하얗게 핀 꽃들을 구경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맑고 작은 하천에 물고기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고 있다. 이렇게 깨끗하고 맑은 하천이 집 앞에 있는 기분이 어떨까. 참 부럽다. 사진을 찍을까 하다가 말았다.


미우다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VALUE에 들러 점심꺼리를 장만했다. VALUE에서 2007년 7월 7일 무슨 행사를 하나보다. 미신에 사로잡힌 미국인들과 일본인들은 21세기 첫 쓰리세븐 데이를 축하하거나 심지어 결혼까지 한다. 해수욕장에 도착하니 12pm. 날이 뜨거워 바다로 뛰어 들었다. 바다 속에서 자맥질 몇 번 하고 놀다가 텐트 세웠던 장소로 기어 올라와 맥주에 초밥(599엔)을 먹었다. 초밥이 의외로 맛있고 꽤 커서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

샌달에 모래가 잔뜩 묻었다. 등산할 때 신으려고 몇년 전에 산 산악 트래킹용 샌달. 샌달의 특성상 앞 발가락들이 노출되어 산악 트래킹 중 자갈, 돌부리, 날카로운 잔가지나 풀뿌리에 취약하다. 발등을 보호해야 하므로 발등 부위는 두껍게 감싸 놓아 보통 샌달보다 통기성이 떨어진다. 꽤 애매한 제품이다. 그래도 40도 경사의 릿지에서 확실한 접지력을 보장하는 밑창 때문에 여름에 즐겨 신었다.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젊은 남녀가 한다발인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몰려와 해변에서 플랭카드를 들고 기념 사진을 찍는다. 그들은 바닷가에 살짝 발만 담그고 나와 수돗가에서 발을 씻느라 부산을 떨었다.

시원한 기린 생맥주를 마시며 그 부산한 광경을 쳐다 보았했다. 한국인들이 내가 앉아 있는 쪽으로 몰려와 수다를 떤다. 자전거를 흘낏흘낏 쳐다본다. 나는 일본인이므로 아무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수경을 끼고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빵 부스러기를 던지고 물 속을 노려보았지만 고기떼는 몰려오지 않았다. 시각이 시각인지라 물고기가 통 보이지 않는다. 스노클이 있으면 좀 더 깊은 곳까지 갈 수 있겠지만 수영도 못하는 주제에 장비도 없이 만용을 부리지 않았다. 등이 탈까봐 수영복 하의에 티셔츠를 입은 채 물에 들어갔다. 30분쯤 놀고 바깥으로 나오니 한국인들이 떠났다.

수돗가에서 웃옷을 빨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다. 화장실로 들어가 재빨리 수영복을 벗어 세면대에서 빨았다. 자리에 앉아 남은 우롱차를 마시며 음악을 들으며 햇빛을 쬐는 도마뱀처럼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짐을 정리했다. 충전지에 녹이 잔뜩 슬었다. GPS의 자전거 마운트에 부착하는 뒷판은 방수 커버가 안 되어 있어 비맞는 동안 물이 새어 들어 충전지에 녹이 슨 것이다. 다음 번 여행 때는 대책을 세우자.

준비해간 충전지는 enelop 2000mAh 4알, 산요 2300mAh 2알로 완전 충전된 상태가 아닌데도 5일을 충분히 버텨줬다. 마지막 2알의 잔량이 반쯤(1000mAh) 남았다. 하긴 길어봤자 하루 8시간 정도 밖에 주행을 하지 않았으니 전지가 남는 것이 당연.

1pm. 자 이제 쓰시마에서 해 볼 마지막 관광 일정이 남았다. 자전거에 짐을 싣고 해수욕장 위의 캠프장 화장실 옆에 자전거를 숨겼다. 그리고 여권, 지갑, 수건, GPS, 시계 등 귀중품과 수건을 챙겨 캠프장 옆에 있는 나기사노유 온천장으로 향했다.

간혹 도로의 윗쪽에 은빛으로 빛나는 구조물을 보고는 했다. 온천수를 끌어올려 아마도 열병합 발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열병합 발전이 아니라면 다만 온수라도 모아놓았을 것이다. 일본인의 온천에 대한 강한 집착. 그 구조물을 볼 때마다 꼭 온천에 가자고 다짐했다.


나기사노유 온천. 노천 온천. 1pm ~ 9pm 사이 오픈. 온천에 들어가 신발을 벗어 신발함에 넣고 신발함 열쇠를 들고 카운터에 가니 옆의 자판기에서 표를 뽑으란다. 한국인 전용 티켓이 500엔. 사람들이 시야에 없는 동안 살짝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한국의 일반 사우나과 크게 다른 점이 없다. 온탕, 냉탕이 있고...

창 밖으로 시원한 바다 풍경이 펼쳐진다. 저 창문은 단지 방충망이라 바람이 솔솔 들어온다. 오른편에 노천 온천이 있다. 낮에는 주로 노인들이 이용하는 듯.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도 관광 코스로 이곳에 들렀다. 간간이 한국어로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수건을 제공하지 않는 것 같다. 뭐, 그럴 줄 알고 스포츠 타월을 들고간 것이지만. 들어서면서 양 손으로 수건 끄트머리르 잡고 수건을 늘어뜨려 국부를 살짝 가렸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길래 나도 그렇게 했다.

따끈한 거품탕 속에 들어가 근육을 풀었다. SPF 27짜리 썬 블럭 로션을 발랐는데도 의외로 살이 많이 탔다. 적당히 씻고 일본인 할아버지들과 노천 온천에 앉아 바다를 구경했다. 파도 소리, 바람 소리가 들린다. 흐뭇하다.

그런데 캠핑장의 화장실이 오른쪽으로 살짝 보인다. 화장실 옆에 숨겨 세워두웠던 자전거 끄트머리가 보인다. 어? 그럼 저기서도 여기가 다 보이는 거잖아? 여탕은 엄폐가 잘 되어 안 보인다. 일본 만화책에서처럼 남여 노천탕을 대나무로 간단하게 구분지워 놓아 옆 여탕의 대화 소리나 깔깔 대는 웃음소리가 들리거나 하는 일은 없다. 실망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여탕에는 할머니들이 조용히 온천욕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실망할 것 없다.


적당히 씻고 한 시간 반쯤 있다가 온천을 나왔다. 엇, 그런데 GPS를 락커에 두고 왔다. 카운터에 가서 영어할 줄 모른다는 종업원에게 영어로 물어보니 락커 열쇠를 건네준다. 거기 지배인이 GPS를 알아본다. 잠깐 손짓발짓으로 서로 원숭이들처럼 대화하다가 웃으며 헤어졌다. 휴게소에서 야마네코 스티커를 한 장 챙져준다. 자전거 프레임에 붙여 놓으면 괜찮을 것 같다. 자기도 산에 갈 때 GPS를 들고 다닌단다. 첫날 히타카쓰에 떨어져 일정이 틀어지는 바람에 남 쓰시마를 돌지 못한 것이나 아리아케 산에 못 가본 것이 아쉽다. 다른 일본인과 달리 이 친구는 눈을 쳐다보며 말한다. 얼굴이 그을리고 다부진 체격이 스포츠맨이나 조폭 스타일이다. 마음에 든다. 웃쓰! 사요나라~

히타카쓰 항구의 2층에서 노란색 영수증을 탑승권과 교환했다. 3pm. 한 시간이나 남아 할 일은 없고 잔돈은 철렁거리고 해서 시내로 슬슬 자전거를 몰고가 동전을 털어 Life Value 수퍼에서 도시락과 환타를 샀다. 히타카쓰 항구 대기실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마지막까지 도시락을 먹는구나 -_-

환전한 10000엔 + 15000엔 중 남은 돈은 12067엔. 사용한 돈은 12746엔, 정산 중 어디론가 새버린 돈은 187엔(아마 뭔가 사 먹었을 것이다). 사용한 돈 중 숙박비는 단 돈 2000엔, 한화로 15200원. 700엔짜리 방청제 구입 및 온천 500엔을 제외하고 9733엔을 5일 동안 순전히 먹는데 사용했다. 한화로 73970원.


4.10pm. 출국수속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제일 먼저 출국수속을 마쳤다. 출입국장에서는 동작이 빨라야 한다.


4.30pm 배가 출발한다. 인구의 대다수가 노인들이라 노무원들 나이가 지긋하다.


히타카쓰 항 바로 옆은 해상자위대(또는 해안경비대; japan coast guard)의 배가 정박해 있다.


오징어 배가 일찌감치 출항한다. 쓰시마의 특산물 중에 오징어가 있었다.

6.20pm 부산 도착. 입국장에서 짐을 풀어 엑스레이 기기에 통과시키고 자전거는 별도의 문으로 뺀다. 부산항에서 중앙동 역으로 향했다. 자전거를 끌고 지하철 검표기 앞으로 향했다. 검표원 아저씨가 친절하게 문을 열어준다. 장애인석에 자전거를 박아두고 mp3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아! 생각해 보니 집 열쇠가 없다. 아내는 내가 여행 가 있는 동안 처가에 가 있다. 서울에 돌아가면 집에 못 들어간다 -_-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텐트 등속해서 캠핑 장비가 다 있고 일요일까지 3일 남았는데 굳이 집에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부산 터미널에서 바로 울진으로 가서 양양까지 자전거 여행을 계속할까? 7.30pm 노포동 지하철 역에 도착. 부산 터미널의 매표소 앞 시간표를 살펴보았다. 마땅히 갈만한 데가 없다. 게다가 자전거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캠핑하다가 또 비를 맞으면 노래가 심하게 튀어나올 것 같다. 그래 그냥 처가집에 가자. 8.20pm 표를 끊어 대구행 버스를 탔다.

대구에서 장인장모님께 인사드리고 하룻밤 자고 다음날 서울행 버스를 탔다. 남부터미널에 도착. 덥다. 집까지 자전거를 몰고 가 짐을 내팽개쳐두고 간단히 세면만 한 다음 집을 나왔다. 동네 고깃집에 가서 김치 오겹살과 소주를 마셨다. 캬... 좋다. 바로 이거다. 맛있는 도시락이나 맛있는 생맥주로는 절대로 채울 수 없는 것.

주행거리: 315km (쓰시마에서만)
평속: 의미없다. 자전거 주행이 아니라 자전거 여행이다.

GTM Trackmaker file

Google Earth File
여행일정 및 경비내역 

쓰시마의 좋은 점:

* 풍경이 끝내주고 개울, 해변, 숲을 함께 즐길 수 있다.
* 도로가 텅 비다시피 해서 자전거 주행에 최적이다.
* 평균 2km마다 자판기가 널려 있다.
* 요소마다 대형 수퍼가 있어 먹거리 장만이 편하다.
* 맥주가 싼 편. 꿀맛이다.

나쁜 점:

* 사람이 적어 일본인들과의 접촉이 극히 적다
* 이즈하라를 나오면 음식점이 별로 눈에 안띈다.
* 볼꺼리가 별로 없다.

가볼만한 곳(가본 곳이 별로 없어 민망 -_-)

* 이즈하라: 반쇼인, 하치만구 신사
* 히타카쓰: 미우다 해수욕장, 나기사노유 온천
* 39번 지방도, 와타즈미 신사, 토요 포대 흔적

준비물 중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것

* 양말: 맑은 날 샌달을 신었을 때 발가락에 때가 끼거나 타는 걸 막아주고 사고 났을 때 발가락을 일차적으로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죈종일 비가 와서...

* 삼각대: 핸들바에 거치해서 움직이는 동영상을 찍으려 했다. 손에 들고 찍는 것이 더 편하다. 셀카 찍을 때도 써먹으려고 했는데 귀찮았다.

* 여권 복사본: 캠핑장에 등록할 때 여권 복사본을 제출해야 한다던데 무의미했다. 하지만 해외 여행할 때 여권 복사본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여행의 기본 상식.

* 테이프: 케이블 타이와 마찬가지로 거의 만능에 가까운 수리 도구. 찢어진 옷, 비옷, 찢어진 천, 부서진 도구의 고정 등 역할이 광범위. 장기여행 때는 실과 바늘처럼 거의 필수적인 아이템.

* 읽을 책 한 권: 보통 아홉시에 잠들어 아침 일찍 일어나 일정을 시작했으며 무료한 버스, 페리 이동 중 읽으려고 했는데 음악 듣고 지도 보고 계획 짜고 수첩에 메모하고 정산하기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거의 없었다.

* 의약품: 여행 중 필수 의약품은 진통제(두통약), 항생제, 항히스타민제(알러지 약), 반창고(밴드). 항히스타민제가 왜 필요하나 싶겠지만 개미, 진드기 따위에 물려 피부가 가렵고 부어오를 때 이것만큼 효과가 좋은 것이 없다.

없어서 아쉬웠던 것: 방청제, 여분의 브레이크 패드





아소베이 파크에서의 이틀째, 샤워를 마친 후. 여행이란 SF적인 비일상적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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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am 아침 일찍 일어났다. 세면을 하면서 라면을 끓였다. 이번에는 라면에 어제 먹다 남은 어묵 2장과 먹다 남은 김치를 넣고 끓였다. 김치가 달아서 먹기가 좀... 어묵을 다 먹고 면을 2/3쯤 먹다가 화장실 변기에 버렸다. 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코펠을 씻은 후 찻물을 끓여 PET 병에 담았다.

정자 안에서 출발하기 전에 자전거를 손봤다.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출발해야 하나 망설여진다. 오늘은 대략 80km를 이동해야 한다.

어젯밤에 고민을 좀 했다. 밋밋한 382 도로로 가지 말고 첫날처럼 풍광이 아름다운 39번 도로로 가는게 좋지 않을까? 아니다. 그래도 382 도로로 가자. 39번 도로는 이미 가봤다. 382 국도는 가보지 않았다. 선택이 단순했다. 가본 길 보다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가자. 여태까지 그래왔지 않았던가.

어제 하루 비를 못 뿌린 것이 억울했는지 비가 폭포수처럼 펑펑 쏟아져 내렸다. 담배를 물었다. 자전거 체인을 다시 한번 닦았다. 브레이크 이격은 이 정도면 충분히 버틸만 하다. 뭐 이젠 더 조이고 싶어도 조일 수가 없는 한계에 다다랐다. 브레이크를 있는 힘껏 꽉 쥐어도 바퀴가 슬슬 미끄러진다. 그래도 어제 날이 맑았으니 망정이지.

9am. 자판기에서 음료를 하나 뽑아먹고 쏟아지는 빗속에서 출발. 얼씨구 이젠 번개도 치네? 도로에 바짝 붙어 달렸다.


9.20pm. 비가 하도 내려 어제 지나온 쓰시마 패밀리 파크에 잠깐 자전거를 세웠다. 비닐봉투 안에 습기가 차서 지도가 너덜너덜해졌다. QAMM 가방 안쪽에도 물이 고여 있다. 져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은 완전히 젖었다. 지폐가 너덜너덜하다. 가방을 뒤집어 물을 퍼냈다. 농구대가 4개인 이 전천후 운동장은 과연 이용객이 얼마나 될까. 시설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 비가 잦아들길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려고 가방을 뒤져보니, 아차, 아침에 담배를 피우고 정자 난간 위에 담배를 그냥 두고 온 것이 생각난다. 지난 나흘 동안 담배 한갑을 피우고 새로 한 갑을 뜯어 겨우 세 가치 밖에 피우지 못했는데...

다시 출발. 어제와 달리 382 국도만 타고 와서 진행 속도가 무척 빠르다. 충분히 쉬면서도 한 시간이 안되어 미네에 도착했다. 미네 시내를 지나 니타로 향했다. 우비를 입은 채 내리막길에서 상체를 둥글게 구부리는 것이 의외로 브레이크 효과가 있다. 이젠 걱정없다.

아침에 라면을 먹다 말아서인지 배가 출출하다. 10시 조금 넘어 니타에 도착. 도로가 평이하고 커브가 거의 없어 브레이크 잡을 일도 없다. 이 속도라면 12시면 히타카쓰에 도착한다. 니타에서 잠시 멈춰 자판기에서 마일드 세븐 one 100s 1갑을 구입했다. 300엔. 대체 무슨 자판기이길래 마일드 세븐만 30종류가 있는거지?

예전에 오사카에서 럭키 스트라이크를 자판기에서 산 기억이 난다. 그 독하디 독한 담배를 그저 멋으로 피웠다. 근데 라이터가 없다. 자전거 타고 지나가다가 수퍼를 발견하고 들어가 삼각김밥과 삶은 달걀을 샀다. 라이터가 눈에 띄지 않는다. 설마 하면서 주인에게 담배에 불을 붙이는 시늉을 하며 '라이타, 도조' 하니까 라이타를 찾아준다. 캬... 짐작대로 라이타는 일본어 외래어였던 것이다.

신사 앞에서 무려 한화로 천원이나 하는 따뜻한 삼각김밥을 까먹었다. 한국의 삼각김밥에 비하면 맛이 없는 편. 역시 도시락을 사 먹을껄 그랬나? 삶은 달걀을 먹고 물을 몇모금 마신 후 다시 출발.

니타에서 줄곳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오르막길이 끝이 없어 보인다. 왠간한 업힐이라도 자전거의 앞뒤 기어비를 2:2 이하로 내리지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2:1이 되었고 다시 1:2가 되다가 흔히 막장 모드라 일컬어지는 1:1까지 내려왔다. 1:1은 걷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자전거를 타면서 기어비를 3:8, 3:7, 2:6, 2:4, 2:2, 2:1, 1:2, 1:1로 차례로 다운 시프트하고 업시프트는 그 역순으로 했다. 기어비를 제대로 맞춰 하는 것인지 잘 판가름이 안되었는데 남들도 다들 그렇게 하는 것 같다. 3:8에서 최고 속도는 35kmh 가량. 소위 2단 크루즈 기어를 사용하여 주로 평지 주행할 때 사용하는 2:6에서는 보통 25~27kmh 정도가 나왔다. 요즘은 3:6이나 3:7로 넘어가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3:6 정도면 평속 28kmh가 나올 것 같은데 근육이 받쳐주지 않는 것이다. 한 사흘 주행하니까 다리도 많이 피곤해져 젖산이 어느 정도 축적된 것 같다. 일주일에 고작 한 번 타는 정도론 올해에도 한 시간 동안 평속 30kmh를 유지하긴 어려울 것 같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간신히 간신히 최고점에 이르렀다. 해발 136m. 쓰시마에서 이 이상 높은 고도에 다다라 본 적이 없으므로 아마도 이 지점이 쓰시마 도로의 최고점이지 않나 싶다. (무슨 소리. 44번 지방도의 가미자카 공원을 못 가봤고 아유모도시 자연공원도 못 가 보고서 섣불리 말하긴 뭣하지 않나) 하여튼 382번 국도의 최고점은 이 지점이다. 평소라면 북악 스카이웨이의 고도차 200m도 별 걱정없이 올라갈 수 있었겠지만 며칠 동안 업힐, 다운힐을 수백번 반복하다 보니 근피로가 누적되어 고도차 136m에서 안간힘을 쓰다시피 하다가 결국은 정상을 얼마 안 남기고 끌바를 했다. 이제 다운힐이다.

10분쯤 신나게 내려오다 보니 (평속 54kmh) 널찍한 공원이 눈에 띄었다. 미타케 공원이다. 세우자! 끼끼끼긱... 대략 70m를 미끄러져 공원을 지나쳤다. 브레이크 같지도 않은 브레이크. 다시 올라갔다. 공원에 다다르자 마자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5분쯤 멍하니 앉아있으니 비가 잦아 들으면서 관광버스가 눈앞에 멈춰섰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내렸다. 내 자전거 앞을 오락가락 하면서 핸들에 붙어있는 GPS를 보고 속도계니 뭐니 하는 말을 주고 받는다. GPS에요. 그랬더니 한 아저씨가 오, GPS! 베리 굿, 베리 나이스!를 외친다. 아무래도 내가 일본인인 줄 아는 모양. 잘됐다. 말하기도 귀찮은데 입 다물고 있자. 단체 관광객들의 가이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골이 잔뜩 나 있었다. 한 아저씨가 '열 받았나봐' 라고 중얼거린다. 옆에 있던 아저씨가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비 오지. 볼 거 하나도 없지. 뭐 이런 거지같은 섬이 다 있어?'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재미없는 관광지에 놀러와서 재미가 없다고 가이드에게 푸념을 늘어놓은 모양. 쓰시마에 볼 꺼 없다. 자전거가 아니면. 관광버스로는, 여러분들은 절대 볼 수 없는 것이죠.

나도 절대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쓰시마의 리아스식 해안을 카약으로 돌아보는 것. 카약을 못 탄 것이 못내 아쉽다. 쓰시마의 대다수 관광지는 5월의 이팝나무 축제를 제외하고 7,8월의 특정 시기만 성수기다. 심하게는 8월이 약 2주 동안만 성수기다. 카약을 타지 않아보고 쓰시마를 논할 수 없다 -_-

담배 한 대 피우고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아저씨, 아줌마들이 화장실에서 볼 일을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앞자리에 앉아 있는 가이드를 뚜러지게 쳐다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사무적인 표정. 그 여자도 나를 쳐다본다.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벤치에 앉아 자기를 쳐다보는 몰골이 처연한 남자. 씨익 웃었다. 내가 진실과 애정을 담아 웃으면 남들은 '기운내 멍청아'라고 번역했다. 그래서일까? 외면한다.

그러고보니 쓰시마에 와서 일본인들과 얘기할 때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 그들 얼굴을 쳐다보고 대화를 할라치면 고개를 공손하게 수그리거나 시선을 거두었다. 여행 중에는 선글라스를 쓰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쓰면 상대가 내 눈을 볼 수 없고 그럼 대화가 안되니까. 대화가 되려면 눈을 쳐다봐야지. 뚜러지게 쳐다볼 것 까지야 없지만서도.

친절하게 입바른 말을 늘어놓지만 눈을 쳐다보지 않으니 그다지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많은 일본인을 만나 본 적이 없으니 섣불리 단정하기는 힘들다.

애니웨이, 할 일이 있다.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마자 가방을 풀어 코펠을 꺼내고 화장실에서 '이 물은 먹는 물이 아닙니다'라고 적힌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어 코펠에 물을 담았다.


스프를 끓였다. 배 고프고 비를 계속 맞아 춥다. 물도 다 떨어졌다. 먹을 것이라곤 바나나 튀긴 과자 밖에 없는데 입안이 말라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다. 이제 라면도 다 떨어지고.


자전거와 가방으로 바람을 막아 옥수수 스프 두 봉지를 끓였다. 따뜻한 스프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살 것 같다. 후르륵 쩝쩝 입 천정과 혀가 데이는 것도 개의치 않고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비는 여전하지만, 그리고 머리속에서 끊임없이 왕성하게 노래가 샘솟았지만, 기운이 난다. 기운이 나니까 딴 생각이 들었다. 히타카쓰에 일찍 갈 필요가 있나? 관광하자.


미타케 공원 숲길 산책로. 이 길을 죽 따라가면 주차장이 나오고, 주차장부터 산꼭대기까지 숲길이 이어진다. 정말 아름다운 길인데 비가 퍼부어대니 걷기는 좀 무리다. 아쉽지만 되돌아 나왔다.

382 국도를 5-6km쯤 달리다가 오른쪽 샛길로 빠졌다. 버드워칭 공원이 어딘지 모르겠다. 하여튼 쓰시마에는 별로 없다는 논이 주욱 이어지고 곧 해안도로가 나타났다. 해안도로를 따라 사오자키 공원으로 향했다.


해안의 끝에 도달했다. 어? 사오자키 공원이 방금 지나쳐온 자그마한 공원이었나? 그럴리가... 테트라 포트가 널부러진 전형적인 방파제와 전형적인 바닷가 풍경.


조그만 공원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에 충신 박제상에 관해 잘 적혀 있으니 설명은 생략.


해변을 빠져나오는 길에 소철이 늘어서 있는 분위기 좋은 신사를 발견.


어렴풋이 소개서에서 본 기억이 난다. 사오자키 공원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운운. 공원에는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피할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다. 대규모 바베큐 식탁이 줄줄이 있고 아이들 놀이 기구와 작은 해변, 적당한 크기의 공원이 있다.


방향을 틀어 길을 되돌아가 다리를 건넜다. '이국이 보이는 언덕 전망대'로 향하는 길. 역시 비바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마법의 사진. 길이 흡사 제주도를 닮았다. 꾸준한 오르막길. 맞바람에 많이 지쳐서 끌바했다. 비바람에 시달리다 보니 악에 받쳐 노래가 저절로 흘러 나온다.


뭔 꽃인지 모르겠지만 토양의 산성도에 따라 색깔이 흰색, 파란색, 빨간색으로 다양하게 피어 있다. 간혹 미친 노란꽃도 있었다. 토양에 나트륨이나 황이라도 포함된 걸까?


전망대에 다다랐다. 전망대 건너편은 한국이다. 휴대폰을 꺼내 아내에게 전화 통화를 시도했다. 역시 안된다.


셀카 한 장. 해발 103m.
관광은 역시 비바람과 함께 해야 제맛이다.
맥주 한 잔 하고 싶다.


앞으로 가야 할 길. 저 산너머에 '한국전망대'가 있다. 오늘은 한국 전망대에 안간다. 이국이보이는언덕전망대에서 이쿠치하마 해수욕장까지 갔다가 히타카쓰를 거쳐 미우다 해수욕장에 도착하면 오늘 일정은 끝이다. 지금 시각은 1.16pm


이국이 보이는 전망대. 역시 태양전지가 있다. 전력선을 여기까지 끌어쓰지 않고 자가발전을 한다니, 합리적이다.


심지어는 화장실에도 태양전지와 충전지가 있다.


이국이 보이는 전망대 아래 해변.

다시 출발. 커다란 트럭이 자전거를 피해 위험스럽게 추월한다.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전거를 아슬아슬하게 스쳐가며 라이더를 공포로 몰아놓는 그 쏠쏠한 재미를 놓치고 싶어할 트럭 운전수가 어디 있겠나. 일본인의 운전 매너가 훌륭한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자기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상호 믿음이 사회적으로 성립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3pm. 382 국도를 타고 별 볼 일 없는 이쿠치하마 해수욕장을 그냥 지나치다시피 하여 히타카쓰 부근까지 왔다. 히타카쓰에 도착하여 첫 식사, 그러니까 첫 도시락 식사를 하던 바로 그 지점에 다시 도착했다. 근처 VALUE 마트에서 기린 생맥주와 닭 바베큐, 생선가스 덮밥을 사와 궁상스럽게 먹었다.


그렇게 기름칠을 정성스럽게 했건만 종일 폭우를 맞으니 체인이 다소 뻑뻑해졌다. 둘쨋날 방청제/오일 anyway를 구입하지 못했더라면 여행이 과연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비 맞으면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다.


QAMM 가방의 벨크로가 걸핏하면 벗겨져 이틀 전에 한국에서 여행준비할 때 다이소에서 산 천원짜리 튼튼한 실로 고리를 꿰어 묶어 두었다. 이제는 안심하고 울퉁불퉁한 길을 달릴 수 있다.


4.50pm. 니시도마리 해수욕장을 미우다 해수욕장으로 잘못 알아 고개를 갸웃하다가 거의 2km를 더 달려 미우다 해수욕장을 지나쳤다. 다시 되돌아와 자세히 표지판을 살펴보니 고갯마루에 미우다 해수욕장이 있다. 그런데 캠핑장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는 미우다 해수욕장.

짐을 일단 내려놓고 쇼핑하러 갔다. 온 길을 헤멘 것에 비해 고개 하나 넘으니 히타카쓰가 바로 나타났다. 히타카쓰 시내 중심부의 Life Value라는 마켓에서 쇼핑을 하고 살짝 내리는 비를 맞으며 미우다 해수욕장으로 돌아왔다. 해수욕장에는 딱 한 사람이 멍하니 앉아 있다가 사라졌다. 쓰시마에는 왜 이렇게 혼자 노는 사람이 많은 걸까.


아무리 봐도 캠핑장 같지는 않은데. 맞은편 건물은 샤워시설. 오른편 건물은 대체 뭘까. 건물 뒤에는 화장실이 얼핏 보인다. 취사장이나 오토캠핑장이 보이질 않았다.



더 찾아다니기도 귀찮고 어차피 관리인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아 속 편하게 널직한 이곳에 텐트를 쳤다. 분위기가 정말 좋아 보인다.








해변 여기 저기 돌아다녔다. 일본의 청정 해변 100선 중 하나로 손꼽히는 해수욕장이란다. 동굴이 보여 찾아가보니 얕은 동굴에 누군가 변기 뚜껑을 올려 놓았다. 센스 한 번 죽여준다. 작은 자갈을 덮은 산호 시체를 발견. 이건 이 여행의 기념물이다. 아내에게 선물해 주자! 아내는 내가 맨날 길에서 주운 것만 선물해 준다고 불만이 많았다. 길에서 주운 것들 중에도 좋은 것들이 많다. 7pm이 다 되었고 하루종일 비를 맞아 노곤해진데다 바닷물이 차가워 바닷속에 들어가긴 꺼려진다. 물이 참 맑았다. 발만 담그고 해변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작은 해변이다. 작고 쓸쓸한 해변이다. 혼자 와서 깡소주에 오징어 발을 질겅질겅 씹기에 제격이다.


얼씨구? 이건 뭐야? 언덕을 오르니 갑자기 캠핑장이 나타났다. 텐트를 다 쳐놓은 상태니 다시 텐트를 걷어 여기까지 올리기가 귀찮다. 에라 그냥 무시하자. 저녁이나 먹어야지.


오늘은 특별히 와인샵에서 사케 작은 것 한 병 사왔다. 일반 수퍼에서는 술을 못 팔게 되어 있는 것 같은데 VALUE처럼 매장이 크면 매장 한 구석에 술만 따로 파는 매대가 있다. 히타카쓰 시내에는 큰 수퍼가 없어 와인샵이 따로 있다. 알콜 농도 25%.


여행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오늘 만큼은 도시락을 안 먹으려고 했는데 워낙 가격대 성능비가 좋고 마침 550엔 짜리를 100엔 할인해 450엔에 팔고 있어 낼름 집어들었다.

mp3를 들으며 날이 어두워지길 기다렸다. 한 시간쯤 지나 날이 어두워졌다. 술병을 따서 병나발을 불었다. 목구멍부터 위장까지 뜨뜻해진다. 와인샵에서 가장 싼 사케를 샀더니(525엔) 맛은 영 아닌데 그렇다고 큰 병을 사자니 다 마시려면 대책이 안선다. 일단 25% 짜리 술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 내리니 기분이 좋아진다. 도시락을 안주 삼아 천천히 술을 마셨다.

혼자 와서 3일 내내 비를 맞으며 이게 무슨 궁상인가 싶지만 한편으로는 아내와 아이를 데려오지 않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술병을 다 비우고 밥도 다 먹었다. 해변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다. 기둥에 몸을 기대고 알코올에 예민해진 정신을 파고 드는 음악을 들었다. 주로 클래식. 모처럼 히트 가요 백여곡을 mp3에 담아왔지만 들어도 순 사랑타령에 신세한탄이라 재미가 없었다.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술에 취하니 마음 속의 별들이 빛났다. Mendelssohn, Symphony No4 in A major op90, Andante con moto

10.24pm.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섬의 해변에 가면 항상 바람이 바뀌는 때를 기다렸다. 미소가 저절로 떠올랐다. 11pm쯤 잠자리에 들었다. 4am쯤 깼다. 들리는 거라곤 파도소리 뿐. 음료 한 병을 모두 비웠다. 근처 자판기에서 음료를 한 병 뽑아왔다. 해변을 한바퀴 돌고 텐트 안으로 기어 들어가 다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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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am. 새벽에 추워서 깼다. 텐트에서 버너를 켰다. 부러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으면 사진의 EXIF 정보에 타임스탬프가 찍힌다. 집에 돌아가면 EXIF를 보고 시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디카의 또다른 용도를 개발해 낸 것 같아 흐뭇하다.


6.15am. 산 중턱에 해가 떠오르고 까마귀가 힘차게 날아오른다. 어슴프레 아침이 찾아왔다. 비가 안 온다!


6.28am. 아침은 역시 라면으로. 어묵 두 장을 얹어 변화를 주었다. 어묵이 무척 맛있다. 한국에서 처럼 포장용기에 파는 것이 아니라 그날 그날 두부처럼 만들어서 파는 것 같다. 어떤 것들은 가격이 상당하다. 라면을 다 먹고 설겆이를 한 후 코펠에 물을 끓이고 애플 티를 우렸다. 충분히 식은 다음 어제 다 마시고 빈 음료수 병에 담았다. 오늘 마실 물이다. 자전거를 타면 하루에 물을 2리터 이상 마셨다. 사막에서도 물을 거의 안 먹던 내가 그 정도면 보통 사람은 3-4리터 이상은 마셔야 할께다.

캠핑하면서 밥을 지어 먹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쌀은 한 주먹 반 정도가 대충 일인분이다. 한국에서 떠나기 전에 인스탄트 국 몇 개 사고, 천원에 두 봉지씩 파는, 물에 넣어 끓이기만 하면 되는 카레, 짜장 등의 소스를 사가지고 다니면 싼 값에 그럭저럭 다양한 식단을 꾸밀 수 있다. 맨밥에 고추장 비벼먹어도 되고.

여기 마트의 야채 코너에서 양파, 당근 따위를 보았을 때 야채밥을 만들어 먹고 싶어졌다. 야채밥이야 쉽지. 감자나 고구마, 버섯 따위를 쌀과 함께 끓여도 괜찮다. 사실 캠핑 음식은 간단하고 쉽다(하지만 가족, 친구들과 함께 가는 캠핑과 다르다). 카레 짜장 소스는 밥을 지을 때 둘둘 말아 코펠에 함께 넣어두고 밥이 다 되면 개봉해 밥에 부어먹으면 될 정도로 간단하다. 한두 홉 정도의 쌀로 짓는 밥은 평지에서 15~20분이면 조리가 끝난다. 밥 하고 나서 플레이트에 밥을 덜어놓고 밥알이 붙어 있는 상태 그대로 인스턴트 국거리를 넣고 물을 부어 끓인 후 코펠에 밥을 부으면 간단한 국밥이 된다. 아침에 점심에 먹을 계란이나 감자 삶아 두거나 아침에 밥을 넉넉히 한 다음 남은 밥은 소금과 섞어 주먹밥을 만든다.

여행할 때 미역처럼 영양가가 풍부하면서 보관, 이동이 손쉬운 식재료도 없다. 마른 미역 한 봉지면 1-2주 동안 질리게 먹을 수 있다. 야채에 고추장 넣고 그저 끓이기만 하면 되는 고추장 찌게도 있다. 돼지갈비 고추장 볶음은 돼지갈비에 전날 저녁 먹던 소주 좀 붓고 고추장 섞고 단과일 아무거나 으께 넣고 양파, 당근, 마늘 따위를 넣어 몇 시간 잼겨 놓았다가 볶기만 하면 된다. 심지어 리조또도 만들어 먹는데. 이쯤되면 생존을 위해 억지로라도 밥을 꾸역꾸역 먹는 것이 아니라 '럭셔리 서바이벌'이 된다.

그런데 아침부터 라면이나 끓여먹고 있다.

7am. 이 닦고 세면 하고 텐트를 걷었다. 짐을 챙겨놓고 자전거 상태를 살폈다. 어젯밤에 체인에 기름을 듬뿍 먹여두어 체인 상태는 양호하다. 브레이크 패드의 안쪽 허브 나사 위치를 변경해 손아귀로 반쯤 브레이크 레버를 당겼을 때 앞 바퀴가 움직이지 않는 정도의 브레이크 이격을 확보했다.

뒷 브레이크 패드는 너무 닳아 이격을 좁혀도 브레이크가 잘 먹지 않는다. 오늘은 앞 브레이크만 써도 상관없을 것 같다. 뒷 짐받이에 짐을 싣고 체중을 뒤로 옮기면 뒷브레이크를 적게 잡고 앞브레이크를 잡으면 될 것 같다. 잠자가다 꿈속에서 브레이킹에 관해 좀 더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마치 활주로에 착륙하는 비행기에서 파라슈트가 펼쳐져 감속을 하듯이 몸을 활처럼 둥글게 구부려 공기저항을 증대시키면 비슷한 감속 효과가 나지 않을까? 우비를 걸치고 있으면 금상첨화다.

8.30am 관리인 아저씨가 화장실에 들러 짐을 챙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저씨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사요나라'를 외치고 떠났다. 9am. 날이 개이니 기분이 상쾌하다. 신화의 마을까지는 거리가 얼마 안되니 점심 전에 도착할 것이다.


쓰시마는 예전에 왜구들의 전진기지였다. 일부는 쓰시마에 거주하고 일부는 나가사키, 후쿠오카를 비롯한 규슈 지방에 거주하며 중앙 정부의 지배력이 약해져 내외로 곪아터진 조선에 노략질을 일삼았다. 대마도에서 쌀의 재배가 어려워 노략질 말고는 여기 사람들이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쌀이 있어야 초밥을 만들어 먹을 것이 아닌가! 웃음. 쓰시마 주민들은 심하게 말해 생계형 해적들의 후손이다. 쓰시마는 요즘 한국과의 선린우호, 화의와 평화를 가치있는 정책으로 삼았다. 기실 쓰시마는 일본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의 섬이고 쓸만한 부존자원이나 중대한 전략적 가치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다 대부분의 수입을 한국의 관광객을 통해 벌어들이고 있는 것 같아 보여서인지 한국과의 화의와 평화는 의미있는 정책처럼 보인다. (부정적으로 말한 것 같지만 그렇진 않다)


왜구 후손들의 마을이라고 생각하니 풍경이 새삼스럽다. 가난한 어촌 주민들치고는 복지수준이 높다. 이 작은 섬에 병원과 소학교, 중학교 등의 교육시설이 거의 2km마다 있고 문화센터와 편의시설이 온 사방에 널려 있다. 비록 도쿄나 인근 부산 만큼의 생활수준을 유지하지는 못하겠지만 젊은이들이 없어도, 부존자원과 개발여력이 없어도 여생을 부족함없이 살만한 환경이지 싶다. 그게 꼭 일본과 한국의 경제력 차이만큼이겠지?


오징어 배치고는 전등 수가 너무 적어 보이는데? 쓰시마는 낚시꾼들에게도 잘 알려진 곳인듯 하다. 전에 어디서 보니 쓰시마에 가면 하루 배를 빌려 참돔을 수십 마리씩 낚아 본전은 뽑고도 남는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낚시꾼들이 허풍이 좀 센 편이지만). 사장님을 설득해서 쓰시마로 낚시 관광을 오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그런데 젠장 여긴 대체 어디지? 개짖는 소리만 요란한데.


야마네코 조심. 야마네코=산 고양이=삵쾡이. 쓰시마의 천연기념물인 듯 곳곳에서 보이는 표지판. 게들이 도로를 건너다가 납작하게 짜부러진 모습은 많이 봤지만 삵쾡이 시체는 통 보지 못했다. 제한속도 표지판이 있지만 차들이 워낙 느리게 달린다. 도로폭이 좁고 구불구불해 80kmh를 안 넘는 듯. 삵쾡이의 개채수가 100여마리 밖에 안 남았다는 말을 거의 믿지 못하겠다. 야생 고양이들의 대단한 번식력을 감안하면...


길가에 앉아 짐을 정리하는데 꽃밭에 손바닥만한 나비가 앉았다. 앗, 이놈은... 이놈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9.40am. 담배 한 대 피우면서 길가에 앉아 쉬었다. 혹시 비가 올지 몰라 뒷짐은 쓰레기 봉투로 감싸놓았다. 앞가방은 QAMM 사에서 나온 카메라 가방인데 몇 년 전 처음 출시되었을 때 운좋게 할인가로 싸게 구매했다. 핸들이 묵직해져 조향이 잘 안되는 단점과 핸들바에 고정시키는 고리가 바엔드에 안 맞아 별도의 찍찍이를 사용하는데 힘이 약해 충격을 받으면 종종 풀어지는 것, 방수가 안되는 것 빼고는 가방 자체는 훌륭하다.

훌륭한 이유: 비를 맞아도 금새 마른다. 주머니가 많아 물건 관리가 편하다. 내용적이 크다. 만약 뒷 짐받이를 제대로 된 것을 장착하면 뒷 짐받이에도 장착이 가능하다.

QAMM 홈페이지에서 QR 레버에 장착이 가능한 뒷 페니어를 3만5천원에 판매하고 있다. 뒷 짐받이는 자전거를 구매할 당시 구입한, 재질이 알루미늄으로 된 것인데 뒷짐이 무거우면 싯 포스트가 팩 돌아버려 아주 귀찮다. 싯 포스트가 돌아 싯 방향이 틀어지면 양 다리 패달링에 변화가 생겨 엉덩짝 한쪽 근육이 땡긴다. 게다가 10kg 미만의 짐만을 실을 수 있고 충격을 받으면 상하로 흔들려 여러모로 불편했다. 돈 주고 산 게 아까워서 아직 못 버리고 있다.

382에서 샛길로 빠져 고갯길을 오르락 내리락 반복했다. 땀이 뻘뻘 흘러 나왔다. 절벽이 무너져 돌조각들이 도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차량 통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용하지 않는 도로인 것 같다. 빽빽한 삼림 탓에 시야가 도로로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러지 말고 니이(도시이름)을 거쳐 들어올 껄 그랬나? 한참 GPS를 바라보며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다가(GPS에 입력한 적이 없는 소로다) 신화의 마을 입구가 나타났다. 왼쪽은 신화의 마을. 오른쪽은 니이 시내로 향하는 길.


와타즈미 신사에 도착. 신화의 마을은 작은 고개 너머에 있다. 해신을 모시는 신사로 다섯 개의 문중 두개는 밀물 때 물 속에 잠긴다. 쓰시마의 대표적인 관광지.


세번째 문. 일본의 건국신화가 서려있단다. 설화 인용:


하늘의 신 니니기(彌徵藝)의 아들 히고호호데미(彦火火出見)가 잃어버린 형의 낚시 바늘을 찾아 바다를 헤매다가 용궁까지 가게 되어 용왕의 딸 도요다마히메(豊玉姬)와 결혼하여 3년간 지낸 후 낚시 바늘을 찾아 나오게 되었는데 그때 아내는 만삭이어서 같이 뭍으로 나오지 못했다. 며칠 뒤 풍랑을 타고 도요다미히매는 여동생 다마요리히메(豊依姬)를 데리고 남편을 찾아 뭍으로 나와서 바닷가에 손수 집을 짓고 들어가며 남편에게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남편은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이 약속을 어기고 안을 들여다보니 큰 뱀이 괴로워 나뒹구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에 화가 난 도요다마히메는 낳은 아이를 해변에 그대로 버려 둔 채 용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아이가 우가야우기아에스신이고 그 신이 다시 이모벌 되는 다마요리히메와 결혼하여 낳은 사람이 신에서 인격화된 진무텐노(神武天皇)로 일본의 초대 천황이라는 건국신화가 있다.
이곳에는 바다에서부터 도리이(鳥居)가 세워져 신사에 이르고 바닷물이 신사에까지 닿아 있는데 사실은 제사를 지내던 장소로 추정되며 여기에서 내려다보면 바다 가운데까지 도리이가 직선으로 다섯 개가 늘어서 있어 가히 용궁으로 들어가는 길을 연상케도 한다. 현재 와다쓰미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히고호호데미와 도요다마히메로서 하늘과 바다가 영합한 축복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도리이가 우리나라 쪽으로 뻗어 있어 고대 우리나라 사람이 이곳으로 온 것을 신처럼 모시지 않았을까 역사학자들은 추측하기도 한다.
신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도리이 말고도 용비늘이 떨어졌다고 용비늘 비슷한 울툭불툭한 돌이 있는 곳에 종이로 금줄을 만들어 쳐 놓고, 신성시하고 있었고, 손 씻고, 입 씻고 몸을 정결히 하고 들어오라는 바위샘도 꾸며져 있었다.



와타즈미 신사. 다른 각도에서 본 첫번째, 두번째 문. 흡사... 중국 지우자이거우의 호수 한 가운데 있던 정자를 연상시키는 분위기. 바다 속에 신사의 문을 설치한 아이디어가 훌륭하다.


이 여자는 누굴까. 앞에 동전 접시가 놓여있다. 100엔짜리도 눈에 띈다. 욕심이 생겼지만 동전을 집어둘지는 않았다.


선착장에서 셀카. 10.30am. 아소베이 파크에서 여기까지 1시간 30분. 도로가 마르니 타이어 접지력이 좋아져서 내리막에서 브레이크를 잡을 일이 없어 좋았다. 대부분 382 국도를 따라와서 커브가 완만하고 굴곡도 적어 도로는 평이한 수준. 아소베이 파크로부터 쉬지 않고 밟으면 30-40분 이내에 여기 도착이 가능할 것 같다.

옥션에서 각각 14000원씩 주고 산 져지 상/하의는 몹시 쓸모가 있다. 그전까지만 해도 살갗에 찰싹 달라붙는 져지는 민망해서 입기가 꺼려졌는데 져지를 입으니 확실히 편하다. 엉덩이의 두꺼운 패드는 안장으로 전해지는 충격을 흡수해 주고 기저귀처럼 불알을 감싸는 쿨맥스 패드는 열과 땀의 배출이 잘된다.

져지 하의를 입을 때 팬티를 입지 않는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져지를 입기 전에는 쿨맥스 팬티를 입고 그 위에 반바지를 걸쳤는데 아무리 쿨맥스 팬티라지만 한참 자전거를 타고 가면 불알이 척척해지는 찝찝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런 복장을 장시간 착용하면 엉치뼈 부근이 살살 아파온다. 져지의 가격에 거품이 너무 많이 끼어 상하의 한 벌에 보통 10만원은 우습게 나가 하이테크 로우라이프를 추구하는 21세기 테크노거지 생활을 하던 나는 애써 져지를 외면하고 있었다. 대체 져지가 왜 그렇게 비싼 거야? 이유가 없잖아?

한편으로는 자전거를 잘 타지도 못하는데 거진 선수복이나 다름없는 화려한 져지를 입는 것이 왠지 부담스러웠다. 져지를 입으려면 자전거를 잘 타야 한다...는 생각은 한강 강변로에서 자전거를 자주 타면서 사라졌다. 잘 타는 사람들에 비하면 평속 25kmh는 별로 대단한 것이 못되지만(잘 타는 사람들은 30kmh 이상 나온다. 평지 주행 평속 30kmh 란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3년 넘게 타도 그게 안 된다. 평균속도 35kmh 이상이면 자전거 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간이 아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짐승' 취급하는 것 같다) 왠만해서는 그런 '선수복장'을 추월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여겨지는 최근 상황 때문에 '내가 이제 당당하게 1~2kmh의 속도차에 연연하며 져지를 입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든 것도 사실이다.


아까 왜구, 왜구 했는데 왜인들이 고기도 잡고 틈틈히 노략질도 하던 배가 와타즈미 신사에 보관되어 있다. 야.. 말로만 듣던 그 배를 여기서 보게 되는구나... 농담이고, 설화의 주인공을 영접하기 위한 배일 것이다.


와타즈미 신사 내부. 건축 형태도 지진많은 나라치고 좀... 아니지 싶은...


무려 한글로 설명이 나오는 가이드 패널. 오른쪽 상단에 태양광전지가 보인다. '신화의 마을'이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동네라고 말한다.


와타즈미 신사 앞. 신사 앞에 왠 스모장? 신사에 들어가기 전 형식적이나마 스모를 하고 들어가야 한단다. 누구하고? 도깨비하고?

신화의 마을 캠핑장 입구는 쇠사슬로 막혀 있었다. 아무도 없냐고 소리쳤지만 인근 산에 부딫혀 메아리가 되서 돌아올 따름이다. 거참 분위기가 신비스럽기 짝이 없군.

화장실은 있는데 샤워장이 없다. 수도꼭지는 죄다 뽑아놓았다. 즉 물이 나오는 곳은 화장실 뿐이다. 한 30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트럭이 한 대 도착한다. 자판기 음료 캔을 채운 후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황황히 사라진다.

이거야 원. 이 무거운 짐을 끌고 돌아다닐 수도 없고 해서 불필요한 짐을 풀어 상설 텐트 속에 감춰 두었다. 햇볕으로 땀에 절은 얼굴과 팔 다리에 물을 묻히고 간단한 짐만 자전거 뒷짐받이에 묶어둔 채 신화의 마을 캠핑장을 벗어났다. 니이 시내를 관통해 382 국도를 타고 잠깐 내려갔다가 39번 국도로 갈아타 엔쓰지를 거쳐 미네에 들러 미네마치 역사민속자료관 앞에서 오마에하마 공원으로 향한다는 계획. GPS의 경로 트랙백이 가능하므로 굳이 지도를 살펴보며 주행하지 않아도 된다. 햇살이 따갑다. 11.40am 출발.


1.20pm. 48번 지방도에서 미네로 들어서기 전 작은 개울에 멈췄다. 몹시 덥기도 하고 물이 맑아서 잠시 발 담그고 쉬어 가련다. 발만 담궜다가 손도 담궜고 머리도 거꾸로 담구고 에라 모르겠다 급기야 물 속에 온 몸을 담궜다. 우아! 정말 시원하다.

웃통을 벗어 젖히고 물 속에 드러누워 30분쯤 히히덕 거리며 놀았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을 가로지르는 개울이란 이런 것일께다. 자전거를 멈추면 개울이고, 달리면 울창한 숲이고. 고개를 돌리면 바다가 나타나고. 쓰시마 만큼 자전거 여행하기 좋은 곳이 있을까? 있긴 있다. 강원도 홍천에서 인제로 이어진 길. 비록 바다는 없지만 참 호젓하고 좋은 길이다. 언제 시간내서 갔다와야겠다.


판타지 소설에서 야영할 때 토끼고기와 함께 삶아먹을 때 자주 등장하는 야생 양파? 아니면 구근식물의 일종? 토마토와 아스파라거스, 로즈매리, 코리안더 등등. 버터 한 덩이, 치즈 한 덩이, 밀 한 푸대만 들고 동부에서 황금을 찾아 서부를 향해 떠났다가 굶어죽은 사람들이 갑자기 생각난다.

미네에 도착. 니이보다 작은 마을. 아소베이 파크에서 관리인에게 니이에 자전가 가게가 있는지 물었다. 있단다. 미네에는? 미네에는 없을 꺼란다. 신화의 마을에서 니이 시내로 나와 돌아다녀봐도 자전거 가게 비슷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날씨도 맑으니 브레이크 걱정을 잊어 버리자. 타이어 그립이 좋아 헤어핀에서 어느 정도 고속 회전이 가능하다. 그래도 안전 운행.

해안도로가 이어진다. 평지라 자전거가 제법 잘 나간다.


Video: 쓰시마 미네에서 오마에하마공원 주행


작은 터널이 나타났다. 고갯마루에는 언제나 터널이 있었다. 터널이 나타났다는 것은 고갯마루에 이르렀다는 증거다. 흡사 무슨 법칙이라도 되는 양 항상 맞아 떨어져 신기하다. 일본 도로망의 규칙성을 발견한 것이다.

다른 터널과 달리 아주 오래 전에 지은 듯한 이 터널의 분위기가 아주 마음에 든다. 천정에서 빗물이 똑똑 떨어지고 그 소리가 이끝에서 저끝까지 낭랑하게 울렸다. 팅-잉잉, 팅-잉잉, 팅통-팅동-팅동, 팅-잉잉, 아침에 정비를 열심히 해 기름을 잘 먹여놓은 자전거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아늑하고 서늘한 터널, 위험하지 않은 터널 -- 뒤에서 차가 덮칠듯이 달려들어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지 않는 터널. 길지 않지만 짧지도 않아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터널. 천천히 즐기면서 통과했다. 터널이 길고 조명이 어두우면 전조등을 켜야 한다. 맞은 편의 밝은 쪽 때문에 눈 아래에 암맹이 형성되 바닥의 요철이 보이지 않는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량은 자전거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382번 국도도 가끔은 좁아지는 편인데, 이런 지방도나 소도로에서는 터널 폭이 좁아 차 한 대 지나가면 간신히 지전가 한 대 지나갈 여유 밖에 없다.

터널을 통과하고 잠깐 주행하니 다시 해안 도로가 나타났다. 바닷냄새가 물씬 풍긴다. 여기는 쓰시마의 북쪽, 그러니까 한국의 남부 해안과 마주보는 면이다. 아소만이나 쓰시마의 동쪽 해변과 달리 파도가 제법 쳐서 제대로 바다 분위기가 난다.


오마에하마 공원 도착. 야영장. 수도꼭지를 틀어보니 물이 나온다. 오른쪽의 빨간 지붕의 화장실도 정상 작동한다. 관리가 허술한지 잡초가 우거져 있지만 화장실은 깨끗하다. 쓰시마에 와서 느낀 점이지만 화장실 옆에서 자도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화장실 특유의 암모니아 냄새가 없고 깔끔하게 관리가 잘 되어 있다. 일본 여행할 때 공원의 화장실에서 샤워도 하고 화장실 옆에 텐트를 치고 자기도 한다는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구나.


오마에하마 공원 앞 자갈 해변. 바다에서 기어 올라온 갖은 표류물 때문에 해변이 지저분하다. 돌무더기를 쌓아놓은 것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 듯. 바다 앞에 자갈 무덤 쌓아놓고 소원을 비나보지? 해변이 지저분해서 물이 맑은데도 발을 들여놓고 싶은 생각이 싹 가셨다.


자갈밭이라 맨발로 돌아다니긴 힘들어 보인다.


공원을 빠져나와 옆길을 돌아 전망대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도 많고 할 일은 없고. 햇빛이 짱짱하니 오늘은 제대로 관광모드다. 해변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자전거 타고 지나온 길이 잘 보인다. 여기는 해발 80m. 끌바 안하고 여기까지 단숨에 올라오니 숨이 턱에 찬다. 올라오면서 헉헉대는 비디오도 찍었다. 소리가 묘해서 나름 19금이다.


Video: 오마에하마 공원 전망대 향하는 길


야생 조류의 숲 근처에 있는 추모비. 조선에서 오던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거친 조류와 파도에 떼죽음을 당해 이 비를 세웠단다. 별 관심이 없어서 자세히 읽어보지 않았다.


내 관심사는 저 맞은편에 틀림없이 있을 한국땅까지 휴대폰 전파가 닿느냐, 여기서 한국까지 휴대폰이 터지나 마느냐 하는 것이다. 그 동안 휴대폰의 배터리를 아끼려고 꺼 두었는데 켜 보았다. 안테나가 2-3개 잡힌다. 시험삼아 아내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안테나는 잡히는데 신호가 안 간다. 휴대폰을 껐다.


추모비 옆의 NTT docomo 안테나 시설물을 둘러친 철책 문을 향해 무인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아마도 움직임을 감지하여 누군가 시설물 내부로 침입하는 것을 기록하기 위한 것일께다. 그러려면 카메라를 안 보이게 설치해야지 저렇게 뻔히 보이게 설치해 두면 옆으로 돌아 다른 쪽으로 타 넘어 들어가 카메라 선을 뽑아버리면 그만이잖아? 시험 삼아 앞에서 헤벌쭉 웃으며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카메라가 움직임을 감지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나를 쫓는 기색이 없다. 저거 전원은 들어가기나 하는 걸까? 한국의 도로 이곳 저곳에 설치되어 있는 가짜 과속 방지 카메라처럼 순전히 위협용 목업이 아닐까...


일본의 유명한 영화 촬영지였다는 곳. 하! 여기서 저기까지는 고도차가 대략 100m. 내려갔다가 샛빠지게 다시 기어 올라갈 이유가 없으니 관광지고 뭐고 그냥 지나치자! 다운힐에 헤어핀이 많다. 브레이크를 살짝 살짝 잡았다. 소똥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어 어쩔 수 없이 소똥을 밟았다. 소똥이 덜 말라 미끌미끌하다. 물컹거리면서 미끄러지자 머리털이 쭈볏 곤두선다.

이즈하라에 무료 족욕탕이 있는데 못 가봤다. 왠지 마음 아프다. '무료'인데.


어라? 이게 어떻게 된거지? 아까 안 올라가기로 한 길로 올라가야 하잖아? 헉헉 거리면서 올라갔다. 저 반대편에서 신나게 내려왔는데 탄력 한 번 못 받고 처음부터 순 패달질로 그 만큼 올라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을 구경이라도 하고 가는건데 -_- 절로 노래가 나오는군.


3pm. 오우미노사토 해수욕장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피둥피둥 살찐 황소. 흡사 serious sam에 나오는...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지축을 울리며 달려올 것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뭘 먹었길래 저렇게 근육이 우락부락한 것일까. 그러고보니 아까 내가 밟은 소똥이 바로... 황소가 빤히 노려본다. 흡사, 이봐, 거긴 길이 없어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오우미노사토 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길. 경사가 가파르고 계속되는 헤어핀 구간이라 어쩔 수 없이 끌바.


끌바하면서 찍은 오우미노사토 해수욕장의 모습. 해수욕장에 들를 생각은 없고 저 중간에 살짝 보이는 길 모퉁이를 돌면 미네로 가는 길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왠걸. 그 길은 막혔다. 끊겼다. 오우미노사토 해수욕장은 인적이 끊긴지 오래된 탓인지 수풀이 우거져 있고 길이 막다른 골목이다. 어쩔 수 없이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가야 하는데 기어비 1:1로도 숨이 가쁘다. 오르다 말고 생각했다. 빌어먹을. 이렇게 힘들 바엔 해수욕장에서 놀다 가자. 다시 내려왔다.


저 바다 너머는 한국이다. 바닷물이 정말 맑다. 아무도 없는 해수욕장에서 혼자 생쑈를 하며 놀았다. 벌거벗고 물 속에 들어갔다. 뭐 보는 사람도 없으니. 성년이 지난 후 벌거벗고 물놀이를 한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동해의 무릉도원 계곡에서, 중국의 창산에 말 타고 놀러갔을 때, 도미토리의 여자 샤워실에서 모르고 샤워하다가 벌거벗은 여자들과 마주친 정말 인상깊었던 기억 정도? 그래도 사진 찍을 때 아랫도리는 걸쳤다. 동영상도 찍었는데 카메라가 기울어 한참 쇼를 하고 난 후 플레이를 눌러보니 하늘만 찍혀 있었다. 거참. 다시 할 수도 없고.

해변에서 놀다보니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4pm 무렵 개울가에 옷가지를 빨고 힘겹게 끙끙거리며 자전거를 타고 황소와 마주쳤던 곳에 다시 이르렀다. 왠 할아버지가 인사를 한다. 곤니찌와. 곤니찌와라니. 그거 점심 인사인데 저녁에 해도 되는건가? 부에나스 노체스가 무심결에 튀어나왔다. 워낙 이 나라 저 나라 인삿말을 배워 인사할 때면 몹시 헷갈린다. 아주 미치겠다. 옷가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겸면쩍어서 허겁지겁 지나갔다. 어쩐지 저 소새끼가 바닷가에서 나혼자 생쑈한 걸 노인네한테 일러바친 것 같은 쪽팔리는 기분이다. 근처에서 까마귀도 까악까악 울어댔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비가 올 것 같다. 도로는 끊임없는 오르락 내리락이다. 땀이 뻘뻘 흘러 내렸다. 고개 막바지에 이르렀다. 미네까지 쭉 뻗은 내리막. 신나게 내려갔다. 미네에서 쓰시마 패밀리 파크 쪽의 해변 도로를 따라갔다. 하루종일 별로 먹은 것이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니 배가 고프다. 자판기에서 레모네이드와 로얄밀크티로 배를 채웠다. 로얄밀크티는 인도에서 먹던 짜이와 맛이 같았다. 설탕을 덜 탄 듯 싶지만. 그리고 소로로 접어들어 줄곳 해변도로를 달렸다. 평탄해서 꾸준히 시속 25kmh가 나온다.


탄력을 있는 대로 받아 평지에서 속도가 무려 30kmh를 오락가락 한다. 저 멀리 고릴라 두상을 닮았다는 섬이 보인다. 쓰시마에서 석양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데, 유감스럽게도 구름이 많이 끼었고 5pm이니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다. 힘차게 패달을 밟았다.

다시 오르락 내리락, 산 중턱을 싸고 도는 헤어핀 코스가 이어진다. 내리막길에서 고속 주행하다가 맞은편의 차를 보았다. 내쪽에서는 안쪽으로 90도 꺽어지는 코스다. 각을 줄이기 위해 차선 중앙으로 주행하고 있었다. 순간 방심해서 자전거 방향을 튼다는 것이 오른쪽, 그러니까 차쪽으로 틀어버렸다. 한국과 달리 차량의 진행 방향이 도로 왼쪽인데 지난 3일간 익숙해졌다고 믿고 있었지만 의식과 다르게 무의식적으로 평소처럼 도로에서 위험할 때는 오른쪽 구석으로 틀어버린 것이다.

브레이크를 잡았다. 자전거가 지지직 미끄러진다. 자동차도 브레이크를 잡는 것이 보인다. 자동차 왼쪽 본넷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탄력을 회복한 자전거가 왼쪽으로 기울며 자동차와 오른쪽 길 틈새 사이로 지나갔다.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죄송하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지만 참 빌어먹게도 지금 브레이크가 제대로 안 먹는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완벽한 사고 케이스다. 차창을 통해 공포에 질려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아줌마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내가 방금 한 것이 자전거 드리프트다. 솔직히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타이어 타는 냄새만 살짝 맡았다. 희안한 것은 저 드리프트를 맨정신에서는 성공시켜 본 적이 없다. 공포 때문에 근육이 위축되어 브레이크를 너무 일찍 밟던가 너무 늦게 밞아 자전거가 휘청대기 일쑤였다.

뒤늦게 솟구친 아드레날린으로 머리가 멍하다. 내가 미쳤구나. 아아... 터널을 통과했다. 곧 니이 시내가 나타났다. 수퍼에 들러 쇼핑했다. 아직도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하다. 아줌마는 얼마나 놀랬을까? 그 자동차가 조금이라도 속도가 빨랐더라면, 그 자동차가 조금이라도 늦게 브레이크를 밟았더라면 나는 헤드라이트 모서리에 다리를 부딫히면서 (슬로우모션으로) 자전거 차체가 급격하게 왼쪽으로 틀어졌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틀어지면서 몸이 회전하여 한 바퀴 휘리릭 돌고 차체의 왼쪽 유리창에 오른팔을 부딫힌 다음(쾅!) 도로 오른편으로 튕겨 나갔을 것이다.


젤리를 샀다. 100엔이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쳤다. 정신 좀 똑바로 차리고 다니자.


생선까스도 샀다. 이제 주행 중에 mp3 귀에 꽂고 다니지 말자.


밥도 한 공기 샀다. 딴 생각하지 말자. 밥에 집중하자.


내가 정말 죽을라고 환장했지. 꽁치 간장 조림도 샀다.


아사히 생맥주 500ml. 5%, 김치 한 봉지. 김치에 어찌나 설탕을 많이 탔는지 달달해서 먹고 나면 인상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이게 무슨 김치야... 기무치지.


아무도 없는 캠핑장에서 안주, 반찬, 밥, 생맥주를 배불리 먹고 마셨다. 6.20pm.


관리인은 안 오려나 보다. 관리사무소 근처에 차가 한 대 섰다가 내 기척을 느꼈는지 황급히 사라진다. 캠프장에 바로 붙어 있는 일본 정원과 가옥 한켠에 불이 켜졌다. 화장실에도 불이 들어왔다. 비가 올까 염려스러워 정자 안에 텐트를 쳤다. 화장실에서 땀에 절은 져지를 빨았다. 자전거에 기름칠을 다시 했다. 브레이크 패드의 이격을 좀 더 좁혔다. 이제 거의 한계다. 사고 기억은 잊어버리자. 소심해 지면 더 큰 실수를 하게 된다.


7.50pm. 밥과 맥주를 다 먹었다. 원래는 조금 남겨 아침에 라면에 밥 말아먹고 반찬하려던 것인데 긴장하고 흥분한 탓인지 김치 약간을 빼고 그 많은 양의 음식을 남기지 않고 먹었다. 신화의 마을 캠핑장 전경. 뒷쪽에는 아이들 놀이기구와 캠프 파이어장. 화장실 따위가 있다. 오토 캠핑장과 함께 미리 쳐진 천막을 대여하기도 하나 보다. 천막 안에 들어가보니 냄새가 퀴퀴하고 습해서 도저히 안에서 자고 싶은 생각이 안든다. 저 맞은편 끝은 선착장으로 바다와 인접해 있다.

8pm. 해가 완전히 졌다. 개구리 합창 소리가 왼쪽에서 들린다. 오른쪽에는 반딧불이가 깜빡이며 날아다닌다. 반딧불이를 대체 얼마만에 보는거냐... 삭막한 도시 생활이라니... 장작을 몇개 꺼내 캠프 파이어나 해 볼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 먹었다. 돈도 안 내고 캠핑하는 중인데 혹시라도 지나가는 사람의 이목을 끌어 좋을게 뭐 있겠나 싶다.

먹은 것이 별로 없어 그동안 완전 소화가 되었는데 오늘은 3일 만에 화장실에서 큰일을 봤다. 일 보는 동안 모기들이 엉덩이와 불알을 물었다. 거참 긁기 민망한 곳을 물어버리네.

9pm. 텐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날이 비교적 맑아서 인지 별로 춥지 않다. 눈을 붙였다. 12시쯤 깨었다. 가랑비가 내리고 반딧불이가 좀 더 늘었다. 개구리는 우렁차게 울다 말다를 반복한다. 캠핑장을 산책했다. 2am. 폭우 소리에 설핏 잠에서 깨다. 4am. 쏟아지는 빗소리에 다시 잠에서 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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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잠들었는지, 밤에 깼다. 12시. 바람 소리가 요란하다. 곧 이어 쏴아- 비가 오는 소리. 억수로 비가 내린다. 다시 잠들었다. 쏴아- 하는 소리에 깼다. 2am. 여전히 폭우가 쏟아진다. 버킷으로 퍼부을 듯이 쏟아지는 빗물. 물이 튀겨 목재 바닥이 젖으니 춥다. 자전거에 빗물이 튀긴다. 자전거를 여자 화장실 안으로 끌어 넣었다.

텐트 안에 버너를 들여와 물을 끓였다. 금새 훈훈해졌다. 따끈한 물을 마셔 속을 따뜻하게 데웠다. 캠핑 중에 추울 때는 물을 끓여 먹는 것이 최고다. 체온을 올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체내에 따뜻한 액체를 주입하는 것이다. 체온을 올리고 버너로 텐트 공기의 온도를 높이고 이미 한번 끓었던 물이 흡수한 잠열이 천천히 방사되는 동안 텐트는 따뜻하게 유지된다. 어렸을 적에 저런 아이디어를 냈을 때는 내가 참 꾀돌이구나 싶었는데, 산악인들 대개가 텐트 속에서 추위를 이기기 위해 물을 끓이고 커피, 차를 마셨다.

텐트 바깥에서 관리인이 뭐라고 웅웅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보니 어젯밤 관리인이 떠나기 전에 하치... 뭐뭐라고 그랬던 것 같다. 수첩에 일본어 숫자 발음을 적어둔 것을 어젯밤에 잠깐 읽었다. 하치는 8이었지. 잠결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지금은 아침 8시... 좀 더 자자.

9am에 깨었다. 텐트 바깥으로 고개를 내미니 찬 바람이 휙 분다. 텐트 속으로 머리를 들여놓고 어젯밤에 코펠에 담아놓은 물을 끓여 사제 스프를 듬뿍 퍼 넣고 라면을 끓였다. 금새 텐트 내부가 훈훈해진다. 뜨거운 라면을 먹으니 살 것 같다.

새벽 내내 내리던 비는 이슬비로 바뀌었다. 간단하게 헛둘헛둘 체조를 하고 텐트를 접었다. 텐트 등속의 캠핑 장비와 오늘 주행에 필요한 장비를 제외한 나머지 물건을 바리바리 싸서 샤워실 옷장 칸 너머에 올려두었다.

관리인 아저씨가 나타났다. 그에게 텐트 등속을 저 위에 올려놓을테니 저녁 때 사정 봐서 텐트를 바깥에 치겠다고 말했다. 알아 듣는다. 햐, 거참 희안하다. 한국어, 영어로 되는대로 말하면 대충 말이 통한다. 따로 일본어를 배우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접자. 관리인이 '키요츠케테' 라고 말했다. 하핫. 아는 문장이다. 일본 애니에서 들었던 문장이다. '몸 조심하쇼'. 댕큐~


아소베이 파크를 빠져나와(9.30am) 만제키시바(시바가 다리라는 뜻인 듯)까지 단숨에 갔다. 쓰시마는 원래 하나의 섬이었는데 일본군이 배를 통과시킬 목적으로 산 하나를 박살 내어 물길을 틀고 그 사이에 다리를 올렸다. 다리가 조그맣고 별볼일 없는데 여기가 쓰시마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하나로 소개되어 있다. 설마 고작 40여m 폭의 물길을 내고 일본인들이 파나마 운하를 만든 것 같은 흐뭇한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니겠지? 이 다리만 보더라도 쓰시마에 얼마나 볼꺼리가 없는지 알만하다.

다리 옆 휴게소에서 담배 한대 빨고 한가하게 짐을 다시 정리했다. 가랑비가 폭우로 바뀌었다. 일본 야후 기상정보를 뒤져 찾아낸 어떤 기상 캐스터는 20년 동안 기상예보만을 전문으로 하던 아저씨인데 후덕하게 생긴 미소띤 얼굴에는 프로페셔널의 자신감이 만면에 철철 넘쳐흘렀다. 그 양반의 예보에 따르면 올해 장마는 어이없을 정도로 일찌감치 끝났고 오키나와와 규슈에서 장마전선이 멀찌감치 이동했으며 쓰시마의 날씨는 한 동안 흐리겠지만 앞으로 3일 동안 비올 확률은 40%가 안된다고 했다.

분명히 그랬다. 첨단 전자기술과 훌륭한 기상과학에 세계에서 몇 대 안 되는 고성능 슈퍼 컴퓨터, 그리고 20년의 내력이면 아무리 비선형 동역학중 가장 어려운 체계라는 기상현상 예측이라지만 이제는 일기예보를 제대로 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하다못해 20년을 해 먹었으면 그동안 쌓인 '감'으로 찍기라도 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일본이 왜 한국하고 똑같은 거냐?

목구멍으로 욕설이 치밀었다. 참자. 나잇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좋지 않은 상황에 부닥치면 자동사처럼 튀어나오는 욕설을 자제해야지, 애도 있는데. 이제부터는 욕이 튀어나올 때마다 노래를 부르자.

폭우를 보자 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기분이 저조해졌다.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섬이라서 하늘에 고작 구름 한 조각 떠 있어도 비가 내리는 사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하루종일 비가 온다는 건 좀 심하지 않은가. 특이한 것은 이게 분명히 빗속에서 찍은 사진인데 빗자국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카메라를 비롯한 작은 장비들은 집에서 음식을 쌀 때 쓰는 요리용 포장 비닐로 하나하나 쌌다. 요리용 포장 비닐은 무게가 거의 없을 뿐더러 크기가 알맞아 가방 속의 짐을 싸기에 적합했다.

텐트를 넣은 큰 배낭은 천몇백원을 주고 산 75리터짜리 쓰레기 봉투로 쌌다. 예전에는 김장용 비닐을 문방구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몇 군데 집 근처 문구점을 들러도 비닐을 팔지 않아 궁리 끝에 쓰레기 봉투를 생각해 냈다. 쓰레기 봉투는 그 목적상 비닐의 두께가 두껍고 튼튼하게 박음질되어 있어 내용물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가방을 쓰레기 봉투로 싸 놓으니까 정말 그럴듯 했다. 여차해서 우렁차게 노래가 튀어나올 상황이면 쓰레기통에 짐째 던져 버리고 아베 총리를 모욕한 후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노래는 그만 부르고 가자. 잘 가다가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를 잡았는데... 어어... 브레이크가 잡히지 않는다. 어.. 이러면 안되는데... 어어... 흙길이나 빗물 아스팔트에서는 자전거로 드래프트가 가능하다. 고속으로 코너를 회전할 때 뒷 브레이크와 앞 브레이크를 적당히 밟아주면서 자전거 차체를 기울이면 자전거가 기운 채 움직이지 않는 타이어가 아스팔트에서 미끄러진다. 원하는 만큼 미끄러졌을 때 회전방향 반대편 패달을 강하게 반바퀴 밟으면서 브레이크를 풀어주면 코너에서 직각 회전이 가능하다. 어쩌다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죽지 않으려고) 다시는 써보고 싶지 않다. 얼마만한 속도에 얼마나 미끄러질지 가늠이 안된다. '진짜' 산악 자전거를 타고 비포장 다운힐을 60kmh로 내려가는 것을 신나해 하며 이니셜D처럼 자전거로 '공도최속이론'을 완성할 생각이 전혀 없다. 멀쩡하게 살아서 집에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관광이다.

그렇게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아내는 요 며칠전 내가 자전거 타다가 두 차례나 사고날 뻔 한 적이 있은 다음 날 왜 헬멧을 안 쓰고 다니냐고 바가지를 긁었다. 내가 죽으면 자기는 과부가 되는데 아이를 대체 어떻게 키워야 한단 말인가? 항상 감정이 앞서고 비논리적인 아내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조심하자. 아내가 여행가기 전 만원짜리 여행자 보험을 들어줬다. 보험 들기를 미룬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아내의 바가지 이후 안전 운행 하겠다고 마음 먹었고 그래서 60kmh 이상은 안 하련다.

헬멧을 썼더라면 빗속 주행이 힘들었을 것 같다. 자전거 주행할 땐 항상 캡을 썼다. 챙이 안경을 적당히 가려줘서 빗물이 안경에 덜 닿는다. 비올 때는 캡이 최고다.

폭우 속에서 내리막길을 53kmh로 미친듯이 내려가(다행히 헤어핀이 아니다) 패달링을 안한 채 오르막길 중턱에서 자전거를 자연 정지시켰다. 상황을 좀 더 살펴보려고 자전거에서 내렸다.

빗줄기 때문에 안경알에 빗물이 방울져 있다. 얼마전에 6만원 주고 산 초발수 코팅 렌즈란 건데 이런 비에는 거의 쓸모가 없다. 브레이크 패드가 거의 다 닳아 위어라인이 사라졌다. 브레이크 레버를 끝까지 당겨도 패드가 림에 얄팍하게 닿는 정도, 림은 패드의 합성 고무(alloy면 합금일텐데 재질이 왜 사각사각하는 단단한 합성고무처럼 느껴질까?) 가 남긴 검은 띠로 시꺼멓게 뒤덮여 있다. 흠... 문제군.

체인을 살펴 보았다. 체인은 기름, 물, 먼지가 떡진 채 붙어 있다. 손가락으로 문지르니 쫄깃쫄깃한 본드같은 것이 묻어나온다. 체인이 뻑뻑하다. 한 3일 비를 맞았더니 체인도 맛이 갔다. 거참... 문제야.

일단 자전거를 질질 끌고 언덕을 올라가서 T자 도로 교차로의 인도에 자전거를 세웠다. 자판기에서 청량음료를 뽑아 마셨다. 하도 비를 맞아서 이젠 머리가 다 아픈 지경인데 음료수를 마시니 목부터 위장까지 시원한게, 평안해진다. 어떻게 할까. 이즈하라에 자전거 가게가 있을꺼야. 어디 마트에 들르면 체인에 칠할 방청제나 기름 정도는 구할 수 있겠지. 382번 국도는 비교적 평탄해서 브레이크를 심하게 잡을 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비인데, 희망을 갖자.

자전거로 하는 첫 해외 여행이다. 앞으로 많은 여행이 내 인생 앞에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수업료를 치르지 않고 낼름 얍삽하게 집어먹겠다는 생각은 버리자. 자전거는 정직하다. 자전거는 몸의 일부같은 것이라 버리고 떠날 수 없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이란 책은 주제가 여행이고 자전거는 부자재 내지는 까메오에 불과했다. 자전거이기에 가능했다는 여행에 대한 격찬과 화려한 감상적 너즈레는 넘쳐나면서도 끊임없이 손을 봐야 하는 자전거 정비에 관해선 거의 말이 없다시피 했다. 인문학적 감수성의 너저분한 나열이 자전거 여행을 이끄는 동인이 될지는 모르나, 워낙 재미가 없고 혼자 치는 딸딸이 같아 무의미해서 집어던진 책이 되었다.

회의론자의 철학적 성찰이 넘치는 zen and the art of motorbike maintenance 같은 책이나 '나는 걷는다' 같은 책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 나는 걷는다의 주인공은 손수레를 끌면서 죽어라고 걷는다. 그의 손수레는 자주 고장이 나고 자주 손을 봐야 했고 손수레가 없으면 불가능한 여행이었고 그래서 손수레 때문에 여행을 멈추기도 한다. 그게 정상이다. 자전거 여행에 왜 자전거가 빠지냐?

우스개로, '자전거에서 가장 중요한 부속이 뭐냐'는 질문이 있다. 정답은 엔진이다. 자전거에 타고 있는 인간 엔진. 인간 엔진도 정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한다. 인간 마음의 정비는 건실하고 튼튼한 뚝심과 의지, 그리고 세계에 대한 건전한 회의를 갈고 닦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공학이 세계를 유지하고 개선하며 인류에게 새로운 비전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또한 믿는다. 그래서 쓰잘데기 없는 미사여구의 허튼소리 대신 생존에 필요한 자전거 정비 기술을 배웠다. 심지어 벽을 향해 치킨런을 하며 브레이크 감각을 익히기도 했다. 아스팔트에 납작하게 죽어있는 개구리같은 모양으로 벽에 아주 많이 박았다. no pain, no gain.

급경사의 다운힐 앞에서 자전거를 끌었다. 허허 웃음이 나왔다. 어떤 아저씨가 경험한 진부령의 그 눈물나는 사연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빙고. 커다란 VALUE 상점과 100엔 샵이 연달아 붙어 있다. 쓰시마 관광 안내지도에서는 100엔 샵도 쓰시마의 관광 포인트였다. 다이소와 뭐 다를 것도 없는 100엔샵이 관공지라니, 쓰시마, 너 정말 그렇게 볼 게 없는 곳이냐? 하여튼 100엔 샵에서 마땅한 물건을 구하지 못했다. 찾는 것은 방청/윤활제다. VALUE에도 없다.

그보다는 자전거에서 가장 중요한 부속인 엔진의 출력을 유지하기 위해 뭣 좀 먹어야겠다. 메가 밀크와 세일중인 빵을 사서 간단히 요기했다. 단시간에 에너지로 가장 잘 바뀌는 것은 탄수화물인데, 직접적인 경험이나 여러 문서를 살펴보더라도 바나나는 가장 극찬을 받는 음식이다. 포도, 감자, 고구마 따위도 마찬가지였다. 마땅한 대용물이 없을 땐 빵과 밥이 최고다. 운동이 끝난 다음에는 탄수화물보다 단백질을 섭취하는 것이 좋다. 격렬한 운동으로 파괴된 근육을 재생시키고 에너지를 축적해 둬야 하니까?

거리 상으로 얼마 안 남은 이즈하라에 가면 맛있는 거 많을테니 지금은 대충 때우자. 우유가 맛있다. 한국에서 지지리도 맛 없는 것으로 손꼽을만한 것이 우유와 오렌지 쥬스, 그리고 맥주다. 셋의 공통점은 물이라도 탄 것인지 맹숭맹숭해서 전혀 진한 맛이 안 나오고 특히 오렌지 쥬스는 단맛을 내려고 설탕 또는 아스파탐이라도 탄 것 같은 기분. 옆의 원예상가에 들러봐야 되는 거 아닌가 싶다가 이즈하라에 가면 자전거 상점이 있을테니 거기서 브레이크 패드를 교체하면서 기름칠도 하면 일석이조겠거니 싶다.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

교차로에 서 있다가 흘낏 뒤를 보니 건축용 자재를 판매하는 가게가 눈에 띄었다. 무작정 가게로 들어섰다. 히라카나, 가타카나 조차 읽을 줄 모르면서 선반에 놓인 스프레이 캔들을 살펴보았다. 옷! 우연찮은 발견. 용도를 그림으로 설명하는데 자전거 스프라켓이 그려져 있다. 방청제인지 자전거 오일인지는 모르겠다. 소레, 도조(이거 부탁합니다) 하니까 700엔이라면서 뭐라고 중얼중얼 거린다. 까막귀라 700엔을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냥 천엔 짜리 지폐를 건네니 300엔을 거슬러주면서 나나 하야쿠 라고 말했다. 하야쿠는 엊저녁 공부하기로 100이었다. 나나는 아마 7? 그러니까 700엔. 캬. 죽인다. 일본어를 하나하나 배워가는 이 맛.

가게 처마에 쭈그리고 앉아 작업 장갑을 껴고 체인 횡축을 앞뒤로 비틀어 보았다. 뿌지직 뿌지직 소리가 난다. 기름에 쩔은 모래 알갱이들이 강철 체인을 마찰하면서 나는 기분 나쁜 소리다. 불과 3일 전에 등유로 깨끗이 닦은 체인인데 이 모양이다. VALUE에서 슬쩍한 수건(가게의 포장대 앞에 비닐이나 박스로 포장하고 나면 손을 씻으라고 걸어둔 수건. 어쩔 수 없었다. 타월을 팔지 않는 것 같길래...)을 1/4 찢어 체인을 한번 죽 닦아주고 방청제 캔에 노즐을 꽂은 후 아낌없이 듬뿍 뿌렸다. 가스 압력이 높아 뿜어져 나오는 액체가 기름때를 밀어낼 땐 흡족했다. 스프라켓, 디레일러, 프리휠셋에 뿜어대니 기름때가 밀려나가면서 말끔해진다. 정말 기분이 째지게 좋다. 한참 작업하는데 가게 주인 아저씨가 나와 쳐다본다. 이것저것 묻길래 체인이 빡빡해서 기름을 치고 있다고 손짓발짓을 하니 자전거를 들어주며 기름칠을 도와준다. 아저씨에게 '자전거 가게'가 이즈하라에 있냐고 물었다. 어리둥절해 한다. '바이크 샵' 하니까 알아듣는다. 손가락으로 시내에 몇 개 있단다. 가서 물어보라는 것 같다. 댕큐 입니다.


드디어 이즈하라 시내 도착. 내 실수의 총합체인 이즈하라 항구에 들러 일단 눈도장을 찍었다. 오후 12.30pm.

문제 한 가지를 해결하고 나니 기분이 좋아져서 일단 가볍게 관광이나 하자고 마음먹었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 팜플렛에 다 적혀 있고 비문에도 적혀 있으니 기념물 설명은 생략. 꽃은 대체 누가 갖다 바치는 것일까? 이런 정성이라니. 결혼 축하 기념비 앞이 유적지라 한참 발굴공사가 진행중이다. 역사에 무지해 덕혜옹주는 듣도 보도 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비문 내용을 보니 정략결혼을 한 듯.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 앞에 있는 고려문. 야자수와의 묘한 조화. 조선의 통신사들이 쓰시마를 방문하면 이 문을 지나친 것 같다.



반쇼인 신사 입구


반쇼인: 쓰시마를 지배했던 여러 군주들의 위패가 세워진 사당. 쓰시마의 대표적인 관광지. 문이 닫혀 있어(휴관일?)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반쇼인


반쇼인


조선통신사비. 역시 관광사진은 재미가 없다. 조선통신사들이 오락가락 하던 시절에는 일본에 '햐쿠라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좋은 물건, 외래품을 뜻하고 어원을 살피면 백제에서 온 물건이란 뜻이란다.


1pm. 비가 잠시 그쳤다. '호카호카테' 라는 도시락 전문점에서 450엔 짜리 도시락을 사서 그 앞 공원에 앉아 먹었다. 역시 밥맛이 좋다. 일본인은 음식을 일종의 소우주라 생각하여 음식에 칸을 쳐두고(서로를 분명하게 구분짓는 선을 그어) 하나하나 서로 다른 맛을 즐긴다고 했던가? (개뻥 같은데) 오전 내내 비 맞다가 따뜻한 밥이 목구멍을 넘어가니 살 것 같다. 구분은 시장기 해소와 별 상관없다. 음식의 양과 질은 음식 모양과 상관 없는 한 단계 높은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이다! 나는 영양가를 잘근잘근 씹어 먹는다! 이게 기쁨이고 삶의 의미이고, 고생 끝에 맛있는 밥을 먹고 오이시 하면서 오열하는 남자의 인생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비웠다. 나무 젓가락(와르바시?)이 한국에서 쓰는 것과 달리 목재의 밀도가 높고 나무 젓가락을 포장한 종이 안쪽에 이쑤시개가 들어있는 점이 한국과 다른 듯.


빗속에서 노래를 멈추게 해 준 이름모를 방청제/오일 anyway. 여러 가지 공구와 자전거 스프라켓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영어로 설명되어 있으면 더 좋았을텐데.

일본에서 어설픈 일어를 쓰는 것보다 영어를 쓰면 더 대접받는다는 말이 있었다. 그 말을 철썩같이 믿지는 않았지만 일본의 개화 후 물밀듯이 들어온 서양문물 탓도 있고(일종의 화물숭배) 일본어에 상당한 비율로 편입된 외래어의 사용 밀도로 보건대 일본인들이 서양 것에 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한국과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어쨌거나 영 단어와 한자 사용비중이 높은 한국어를 섞어 쓰는 것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 비슷한 한자문화권인 중국 여행할 땐 성조 때문에 말이 안 통해 환장하는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면 일본과 한국이 참 가까운 나라인 것 같다.


하치만구 신사. 쓰시마를 주행하며 길가에서 무수한 신사를 접했지만 이 정도 규모는 처음. 일본의 신사는 애니미즘의 본거지. 모든 (움직이는, 또는 움직이지 않는? 정지도 애니메이션의 여러 동태 중 하나니까) 것에 정령이 깃들어 있단다.


그런데 신사가 둘로 나뉘어 있다. 둘이 하나인지 둘이 둘인지 모르겠다.


바로 옆나라지만 일본 문화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 탑의 형태로 보건대 지배자/지도자/계급자의 신분과 지위에 걸맞는 일종의 위령탑이 아닐까 싶다.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구분하는 것일까? 둘이 둘이라면 하나는 실존했던 인물의 기념비가 되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민간 정령신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무언가를 상징하는 상징물이 아닐까? 하치=8이니까 8신을 모시는??


뭐 일본의 정령신앙 체계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 신사 입구 양 편에 여우 상이 많고 여우가 재물을 상징한다는 얘기 정도를 알 뿐. 사진의 해태 같이 생긴 짐승은 고마이누라 라고 하는 것 같은데 그 뜻이 '용감한 고구려개'라고 들었다. 말 타고 달리는 고구려인을 쫓아다니는 사납고 충직한 그... 맛없어 보이는 강아지구나.


왼편에 말이 보인다. 사람이 안 타고 있다. 그럼 혹시 대마도에 전래된 우수한 외래말에 대한 숭배...?


아. 이건 안다. 물을 떠서 왼손을 씻고 다시 오른손을 씻고 그 다음에 손바닥에 물을 담아 살짝 맛을 보고, 저 타월에 물 묻은 손을 닦는 것이지? 한국의 절간에서처럼 지나가는 과객의 목을 축이는 우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사에서 예의를 차리기 위한... 인간의 방법과 신령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겠지. 손은 씻는데 발을 안 씻는 것은 신령이 하도 신령스러워서 신전에 범접하지 못하게 아예 사전에 차단한다는 뜻이겠지. 같은 만신을 섬기는데 인도는 내부신전까지 사람의 발길을 허용하는 반면 일본은 내부 신전에는 사람이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사제만 접근하게 되어 있는 듯. 일본인들이 만신숭배에 관해 인도에 친숙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렇게 알만했다.


돌로 만든 위패인듯. 돌은 영원하니까. 그런데 순 김씨네. 하하


솔직히 말해 예술적인 감각은 좀...


허걱. 신사에 왠 폭탄들이지? 일본산 극우 원숭이들이 불현듯 생각났다. 이 사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저기 어디야.. 교토의 몇몇 건물들 빼고는 일본건물이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다. 그런데 왠 새끼줄일까... 새끼줄의 보편적인 의미는 차단과 금지 였던 것 같은데(한국의 경우) 저건 무슨 의미일까. 일본인의 상징 체계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바로 옆나라인데 아는게 전혀 없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분위기가 을씨년스럽다. 하치만구 신사에 마리아를 섬기는 사당이 있다던데 혹시 저것 아닐까?


하여튼 쓰시마(시마는 아마도 섬이란 뜻일께다. 다께시마, 쓰시마 등등) 여행중 여러 신사를 보며 느낀 점은 을씨년스럽고 괘괘하여 인간 친화적이지 않다는 것. 머무르거나 쉴 공간이 없어 보인다는 것. 저 나무는 아마 녹나무인 것 같다.

관광은 적당히 접고 자전거 가게를 찾았다. 근처 어딘가에 쓰시마 관광물산협회(visitor center)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찾아가 봤지만 보이지 않고 공사중인 건물만 보인다. 옆에 향토민속관에 들어가 비지터 센터가 어딘지 물으니 공사중인 건물을 가르킨다.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는 동안 인부들이 제지하지 않는다. 나와서 조선통신사 비석 옆 건물로 가니 문이 닫혀 있다. 뒤돌아서자 향토민속관에서 관광물산협회를 물어보았던 아가씨가 서 있다. 서로 손짓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해보니 이즈하라 항에 관관안내소가 있다고 가르쳐 준다. 예쁜 아가씨다. 아리가또 하니 활짝 웃는다. 얼기설기한 이빨이 보인다. 이빨이 그래도 친절이 예쁜 아가씨다.

이즈하라 항에 가니 수많은 한국인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관광 안내소의 할머니에게 바이크 샵을 물으니 항구 앞의 가게를 가르쳐 준다. 빗속을 달려 항구 앞의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진열된 가게로 갔다. 브레이크 패드를 보여주며 부품이 있는지 물으니 없단다(이이에). 그러면서 다른 가게를 가르쳐 주었다. 그 가게에 가니 일본의 전형적인 생활 자전거를 수리하는 곳이다.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내 자전거에 맞는 브레이크 패드는 자기 가게에 없단다. 친절하게 지도를 보여주며 382 국도에 면한 한 가게를 짚어 주었다. 가게에 들르니 역시 부품이 없단다.

여기저기 자전거 가게를 돌아다니다가 시간을 다 보냈다. 오후나에나 가미자카공원 등에는 들르지 못했다. 시간이 꽤 되어서 유타리랜드 쓰시마나 쓰시마후루사토 전승관, 가네다성유적지도 방문하지 못할 것 같다. 이즈하라 시내만 바둑판 훑듯이 샅샅이 쏘다녔다. 시내 구경도 할만하다. 쓰시마에 지진이 있던가? 건물이 나즈막하니 2층 이상 가옥이 아주 드물었다. 쓰시마에 별장 한 채 있어도 나쁘지 않겠다.

무가저택(사무라이 저택; 부케이시키) 부근을 두리번 거리며 배회했다. 자전거 가게가 통 보이지 않는다. 이즈하라 시내는 생각보다 크기가 작다. 시내 중심부에는 모스 버거 매장이 있다. 배가 불러서 모스 버거를 맛보긴 좀 그렇고. 3.30pm.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가다가 마트에 들러 저녁꺼리도 준비해야 한다. 아쉽지만 쓰시마 특산물이라는 메밀소바(이리야키소바)를 못 먹어봤다.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실망한 채 가게 앞에서 브레이크 패드의 허브 암나사와 브레이크 와이어의 긴장 정도를 조절해(이미 브레이크 레버의 앞 나사를 돌려 패드의 압박 정도를 조절하는 범위는 지났다) 어느 정도 브레이크가 말이 듣게 손봤다.

브레이크가 이 모양인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382국도에서는 크게 문제가 없다. 또는 날씨가 개이기만 해도 문제가 안 된다. 내일 신화의 마을 까지는 아소베이 파크에서 30km 안팎의 거리다. 브레이크 때문에 상당히 위험한 상황인데 마음은 그지없이 평화로웠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패달을 밟아 이즈하라 시내를 빠져나왔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VALUE에 다시 들러 저녁꺼리를 흡족하게 장만했다. 대형마트의 카운터 앞에는 식수대가 있다. 식수대에서 빈 물병이 판매된다. 빈 물병에 물을 얼마든지 담을 수 있다. 물은 찬 물과 뜨거운 물이 모두 나온다. 그런데 물은 별로 마시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 대신 음료수만 마셨다.


돌아가는 길에 잠깐 들른 쓰시마 그린 파크. 저 멀리 미쓰시마마치 해수욕장이 보인다. 쓰시마 그린파크 자체가 훌륭한 캠핑장이다. 여기저기 엄폐물을 잘 이용하면 돈 안 들이고 캠핑이 가능할 것 같다.


인구중 대다수가 노인과 어린이들 뿐이고 청년이 드문 쓰시마의 복지시설은 정말 훌륭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길래 이렇게 훌륭한 공원을 갖추고 있는 것일까... 인구도 별로 없으면서.


이건 뭐지? 애들 놀이기구 같은데?


한국 같았으면 사람들도 거의 방문하지 않는 저 작은 폭포의 수도꼭지를 잠궈 놓았을 터인데... 아내한테 전화하려고 전화기를 찾았지만 domestic 전용. 공중전화에 ISDN 외부 연결 포트가 달려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일본도 작년인지 제작년인지 FTTH가 도입된 상태인데 ISDN을 쓰는 사람이 과연 있을지 의문이다.


쓰시마 그린 파크에서 아소베이 파크까지는 30분이 채 안 걸렸다. 관리사무소의 문은 걸려 있다. 관리 사무소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아소만 전경. 섬의 침강에 의해 리아스식 해변이 형성되었다. 제주도와 달리 섬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다. 날이 궂지 않으면 아소만에서 대여 카누를 타고 돌아다니고 싶었다. 두어 시간에 6900엔이나 하는 값비싼 투어지만 카누를 타본 적이 없어 한 번 쯤은 타 보고 싶었다.

십여분 관리인 아저씨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6시가 안 되었는데 벌써 퇴근한 모양이다. 캠핑장 화장실에 도착하니 어떤 중년 부인이 강아지 산책을 시키고 있다. 개가 날 보더니 반가운 나머지 미친듯이 짖는다. 중년부인이 던진 공을 줏어서 갔다주다가 중간에 꾀를 부린다 -- 공을 줏어 화장실 뒤편에 슬쩍 숨어 공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헉헉 숨을 몰아쉬다가 충분히 쉬고 나면 다시 공을 물고 부인에게 뛰어간다. 자식. 지능은 있어 가지고.

오늘도 아무도 캠핑하러 오지 않았다. 중년 부인은 캠프장이 문을 닫는 6시 무렵 강아지를 자동차에 태우고 떠났다. 어제, 오늘 가끔 공원에서 자전거를 세우면 거기에 차 한 대씩은 꼭 있는데 주로 남자나 여자 혼자 차 안에 앉아서 뭔가 멍하니 있다가 내가 나타나면 곧 차를 몰고 사라졌다. 일본에 혼자 노는 사람들이 많다던데 그것 때문일까? 왠지 외로워 보이는 사람들.

나야 뭐, 나를 따라 자신을 채찍질하는 마조히즘 투어를 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그렇지 혼자라서 외롭다는 등의 감정을 느낀 적이 없다. 되레 예전에 장기여행 때 사람들이 날파리떼처럼 꼬여 귀찮아 한 적이 많았다. 숙소나 술집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한 잔 하는 것에는 별로 거리낌이 없다. 하여튼 사람 만나는 것은 귀찮다. 세네카 말대로 아무리 여기저기 사방팔방 돌아다니고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봤자 끝끝내 맞부닥치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오늘은 쇼핑을 좀 과하게 했다. 라면 두 개, 어묵 한 봉지. 12가지 차 세트, 스프 4봉, 바나나 과자, 안주용 햄, 그리고 사뽀로 맥주 draft one.

'남자라면 입 닥치고 사뽀로 맥주를 마시자' 라는 옛날 광고문구 때문에 훗카이도에 가고 싶어졌다. 훗카이도에는 어쩐지 제대로 된 일본식 선술집이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재밌게 본 '마구로와 일본인'도 일본의 최북단 근처다. 눈 내리는 어느 추운 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 가기 전 얼핏 불을 밝힌 선술집에 들러 따뜻하게 데운 사케에 어묵 한 점 먹고 낯 모르는 사람들과 간빠이를 외치며 껄껄 웃어보는 것. 박여사는 예전에 말하길, 훗카이도에 가려면 꼭 겨울에 가란다. 눈이 30cm씩 올텐데 자전거는 어쩌라고?


500엔짜리 도시락. 이것만큼 가격대 성능비가 좋은 식사가 있을까? 한화로 3700원 가량. 먹으면 배부르다. 다만 나물 등의 야채 식단에 익숙한 만큼, 부실한 야채와 국이 없어 먹어도 뭔가 부족함이 느껴지는 식단. 끓는 물을 부으면 즉석으로 먹을 수 있는 미소된장국을 팔았지만 정작 수퍼에서 찾아 헤멨던 것은 어묵국이었다.


깨끗이 비웠다. 짜장면을 먹고 나면 다꾸앙으로 짜장면 소스를 긁어 깨끗이 먹어치웠다. 일부분은 절 음식 먹던 버릇 때문이고, 일부분은 음식을 남기면 안된다는 옛날 교육 때문이기도 하고, 일부는 그렇게 깨끗하게 비운 그릇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서 였다. 그런 습속을 다른 사람들은 다소 변태 취급해 주셨다.


7pm. 비가 멎어 소화도 시킬 겸 아무도 없는 캠핑장 주변을 배회했다. 앞 건물은 집회장.


호숫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바닷물. 아소베이 만의 복잡한 해안선 구조 때문에 바다임에도 파도가 거의 없다. 흡사 호숫가 같다. 바다인데 마치 호수처럼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이색적인 모습.


선착장. 물고기가 가끔 튈 뿐 적막하기 그지 없다.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뭍과 바다 사이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게들 중 하나.


밤에 출출할 때 라면에 넣어 끓여먹으면 어떨까. 아서라. 뒷발로 지긋이 밟아 게를 잡았지만 곧 놓아주었다.


Video: 아소베이파크 캠핑장 게


을씨년 스러운 화장실. 이층은 2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깔끔한 객사 또는 관리인 숙소.


7.20pm. 아소베이 파크 캠핑장 전경.


해가 졌다. 왠일인지 비가 안 온다. 버너에 불을 붙이고 햄을 볶아 맥주 안주로 먹었다. 일본 맥주들은 저녁 식사나 목욕 후 한 잔 가볍게 마시는 용도, 어느 음식에 곁들여도 그다지 튀어 보이지 않는 연한 깔끔함과 시원함이 특징인 것 같다. 한국 맥주의 몰개성함/특색없음에 질린 상태였고 그래서인지 한국 맥주가 베트남, 중국, 심지어 태국 맥주만도 못하게 느껴졌다. 브류어리 기술이 그렇게 형편없는 것일까? 왜 그렇게 '상대적으로' 맛이 없는 걸까.

일본 맥주 가격이 의외로 싸서(환율 때문이지만) 여행 기간 내내 마셔주기로 했다. 어제도 마시지 못한 것이 사뭇 안타깝기만 하다. 5% 500ml짜리니 대낮에 마셔도 부담이 없을 것이다. 중국 여행할 땐 하루에 서너잔씩 끼니때마다 7%짜리 500~1000ml의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시면 세상이 아름답고 정말 좋았다. 그래서 노래가 절로 나왔다. 윌 아이 비 핸섬? 윌 아 비 리치? 아 텔 뎀 텐덜리. 케쎄라쎄라, 왓에버 윌 비 윌 비. 더 퓨쳐스 낫 아우워스 투 씨, 케쎄라 쎄라~ 당시 중국 여행은 말이 전혀 통하질 않아 될대로 되라 여행이었다.


8.30pm. 텐트의 플라이를 벗겼다가 다시 덮었다. 밤에는 쌀쌀할 것이다. 날이 어두워져서 뭐 할 것도 없다. 슬슬 잘 시간이다.

mp3를 들으며 가져온 얇은 소설을 한두 페이지 읽어보았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김씨 아저씨한테 빌린 James Hogan의 1977년 작품인 Inherit the Stars인데 쌔근한 최신기술과는 거리가 먼 구리구리한 70년대 스타일의 SF다. 투과성이 좋은 뉴트리노를 이용한 스코프는 아직 개발되지도 않았고 또, 여전히 앞으로 등장할 최신기술에 속하는 것이긴 하나... 인류가 즐겨하던 취미생활인 전쟁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세계 정부 구성을 목전에 둔 채 우주로 막 진출할 무렵, 5만년전의 우주비행사 시체가 뜬금없이 발견되는 것으로 얘기가 시작된다.

부산에서 비록 50여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이 괘괘하고 적막한 캠핑장에 나 혼자 앉아 기분좋게 취해 있으니 한국과의 거리가 거진 안드로메다 성운과 지구만큼이나 떨어져 있는 듯하여, 분위기가 얼추 SF스러워 굳이 SF소설이 주는 실세계와의 주관적 거리감(소격화)의 확보가 필요없을 정도였다.

바르는 모기약을 팔 다리 여기저기 발랐음에도 집요하게 달라붙는 모기떼와 스르륵 스르륵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 그리고 강산의 적막감. 하루종일 비를 맞아 머리를 맑고 투명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내, 딸아이, 일 등은 굳이 생각해야지만 머리 속에 떠오른다.


디지탈 카메라에 PC로 옮기다 만 아이 사진이 남아 있었다. 이 아이가 자라면 제 부모처럼 여행을 다니게 될까? 말 타고, 옆에 맛 없어 보이는 강아지를 데리고. 여행은 재테크, 노후설계에 도움이 안된다.

아무 생각없는 머리로 텐트로 기어들어가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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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5일간 휴가를 냈다. 2년만에 휴가인 셈인데 그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곤했다. 뭔가 머리를 식힐 것이 필요했고 휴가계를 내라길래 6월초에 낼름 제출했다. 금요일 미팅은 장시간 이어졌다. 끝날 때쯤에야 오늘이 환전 가능한 마지막 날이란 것을 깨달았다. 은행 마감 직전에 도착해 간신히 돈을 환전했다.

씨티은행이 날이 갈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다. 환전 수수료 할인을 받으려고 전날 인터넷으로 환전 예약을 해놨더니 환전하려는 돈이 거의 쓰지도 않는 외환거래 통장으로 들어갔다. 어안이 벙벙. 시티은행의 홈페이지에는 그런 내용에 관해 일언반구 말이 없었고 아침에 찾으러 갔을 때 외환거래 통장이 없으면 인출이 안된다고 해서 되돌아왔다. 하루가 지나고 외환거래 통장을 들고가서 은행 마감 시간 전에 환전을 하려니 적지않은 환전 수수료를 내란다. 휴...

6/30 격주 휴일

여행 전 준비물: 여권, 여권 복사본, 캠프장 예약 복사본, 카메라, 미니삼각대, AA 충전지 4알, AAA 충전지 4알, 휴대폰, 작은 수첩, 볼펜, 테이프, 모포, 휴지, 얇고 큰 비닐 봉투, 읽을만한 작은 책 한 권, 사제스프.

의약품: 마데카솔 연고, 반창고 4장, 타이레놀 몇 알, 항생제 몇 알

구매한 물건: 1인용 텐트(35000원), 얇고 부피가 작은 은박 깔개(7000원), 튼튼한 실(1000원), 바르는 모기약(5000원), 선 블럭 크림(6800원), 여행용 세면 도구 세트(4200원), 미니 버너(17000원), 1인용 코펠(23000원), 가스 1통(?원), 쓰레기 봉투 75리터(?원), 100리터 (?원)

옷가지: 져지 상하의(28000원), 쿨맥스 반팔 상의, 수영복 하의, 비닐비옷, 양말 2켤레, 장갑, 모자(캡).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 케이블 타이, WD-40 조그만 것.

오전에는 자전거를 정비했다. 비 맞을 것에 대비해 양 바퀴 베어링에 그리스를 듬뿍 발라 주고, 주요 구동부에는 테프론 오일을 듬뿍듬뿍 쳐줬다. 야후 일본 사이트의 일기예보를 읽어보니 규슈 쓰시마의 날씨가 심상치 않다. 일요일 비, 월,화,수 흐림, 목 비. 첫날과 마지막 날에 비를 맞을 것 같다. 적어도 한국의 일기예보처럼 엉터리는 아니겠지? 아쉬운 것은 업무 때문에 시간에 쫓겨 구입하지 못했던 방청제(WD-40)와 테프론 오일.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경로 설정을 시간 내에 하지 못했다. 다음의 GPSGIS 동호회 자료실에 얼마 전에 대마도 DEM 지도가 올라왔다. 그것과 월초에 대마도 부산 사무소의 게시판에서 주문한 지도를 참조해서 간략한 경로 정보를 일단 구성했다. 구글맵과 GPS Trackmaker를 오가며 대강의 도로 윤곽을 만들었다.

아내는 휴가여행 간다고 오랫만에 고기 먹으로 가잔다. 준비할 것들이 아직 많은데... 아내가 먹고 싶어하는 눈치라 나가서 소불고기에 밥을 먹었다. 집에 돌아오니 오후 8시가 넘었다. 밤 10시 30분에는 출발해야 시간을 맞출텐데 뭐 준비해놓은 것이 있어야지. 일단 허겁지겁 전지를 충전기에 걸었는데 10시가 다 되어도 충전이 덜 되었다. 일단 빼내서 가방에 물건들을 우겨넣고 자전거에 실었다. 밤 10시 40분 무렵 황망히 출발.

강변 도로에 이르자 비가 살살 오기 시작한다. 뒷 잔차 두 대가 추월한다. 상대속도는 1~2kmh. 여행만 시작했다하면 다짜고짜 비를 맞는 것은 무슨 징크스일까? 라고 생각하며 한가하게 자전거를 몰고 가다가 능력도 안되면서 괜히 추월해가는 잔차를 보니 약이 올라 비 때문에 거의 인적이 없는 도로를 고속주행하기 시작했다.

두 친구는 쌔근하게 잘 빠진 값비싼 자전거와 자기 몸뚱이 뿐이지만 나는 15kg짜리 유사 MTB에 7kg짜리 짐을 얹어 상당히 중량감있게 움직인다. 하지만 시속 23kmh로 달리는 상대를 27kmh로 추월하는 것은 자전거 3년 탄 자존심과 관련이 있다. 쫓아오지 못한다. 하하하. 이런 부질없는 만족감이라니... 강남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비를 흠뻑 맞았다. 1시간 35분 걸렸다. 경부선 버스 타는 곳을 찾느라 좀 헤멨다.

가만, 비상식량과 커피믹스를 챙기지 못했군. 아참, 집 열쇠도! 서두르다 보니 실수 투성이다.

창구에서 이틀 전에 예약한 표를 찾으려고 씨티은행 카드를 내미니 은행 사정으로 서비스가 중단되었단다. 씨티은행이 한미은행과 합병된 후부터 뭐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어 3-4개월에 한 번은 민원을 냈다. 예를 들면 기차 시간 임박해서 예매한 기차표를 뽑으려니 은행 전산망이 다운되어 차시간을 놓치거나, 서비스가 지금처럼 일시 중지되거나, 외국에서 거래하려고 보니 불법거래로 의심되어 카드 사용을 중단시키거나, 심지어는 현금이체를 하려는데 은행 전산망이 세 차례나 다운되었다.

예전에 장기 여행을 할 때 씨티은행의 현금카드가 외국에서 현금인출할 때 꽤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듣고 만든 적이 있다. 도움은 커녕 국제 현금 카드로 돈을 뽑을 수 있는 ATM을 찾느라 일정을 변경하는 등 갖은 고생을 다 했다. 환율이 일반 VISA 신용카드보다 나쁘면서 수수료는 수수료 대로 빠져나가 실질적인 이익이 없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주거래은행으로써 내가 받은 이익이 아무 것도 없다. 심지어 작년에 아시아나 마일리지 카드를 발급 받으려고 할 때는 주거래은행임에도 카드 한 장 만들려고 생쑈를 다 했다.

오전 12시에 간신히 백업용으로 가지고 있던 현대카드 동양종금 CMA 카드로 현금 서비스를 받아 심야우등 표를 구매했다. 32300원. 이틀에 걸쳐 씨티은행으로부터 엿먹고 나니 월급 통장을 갈아버리자는 결심이 섰다. 우대고객은 무슨 얼어죽을 우대고객이냐.

7/1

자전거를 버스에 실었다. 출발했다. 새벽 3시 버스가 휴게소에 멈춘다. 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휴게소로 뛰는 동안 비를 흠뻑 맞았다. 오뎅 하나 사서 먹었다. 저녁이 부실해 배가 고프다. 다시 비를 흠뻑 맞으며 버스에 올랐다.

잠에서 깨니 오전 5시 30분. 부산에 도착. 비가 퍼붓고 있다. 도저히 자전거를 몰고 부산국제여객터미널까지 갈 엄두가 안 난다. 버스에서 내려 자전거를 빼내는 그 잠깐 동안 퍼붓는 비를 맞으니 몸이 으실으실 떨린다. 자판기에서 평생 거의 먹지 않던 따뜻한 커피 한 잔 뽑아 마시고 버스 터미널에 붙어 있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무거운 자전거를 들고 계단을 차곡차곡 내려갔다. 정말 무겁다.


자전거를 지하철에 싣는 것이 아직 법제화된 것 같지는 않지만, 검표기 앞에서 역무원이 제지하지 않는다. 자전거는 장애인석에 실으면 된다. 장애인석은 보통 지하철 마지막 차량 칸(주행 방향의 마지막 칸)에 설치되어 있다. 지하철역의 계단을 어떻게 내려가라는 것인지 몹시 의문이 생기지만 지하철 차량에는 잊지않고 장애인석이 설치되어 있다.

버스터미널과 인접한 노포동 지하철 역에서 부산국제페리터미널이 있는 중앙동 역까지 대략 40여분이 걸린다. 비 때문에 선로가 미끄러워 지하철이 서행한다는 메시지가 흘러 나왔다. 이왕이면 걸죽한 부산 사투리로 안내방송이 나왔으면 좋으련만.

차량 진동이 심해 자전거가 쓰러졌다. 콰당 하는 듬직한 소리가 차량내에 울려퍼지자 자다 깬 사람들이 놀라 흠칫한다. 히히 웃다가 바퀴 사이에 가방을 괘어놨다.

지하철 역 바깥에는 아직 비가 내리고 있다. 짐을 비닐로 싸고 우비를 입은 다음 역 바깥으로 나왔다. 국제 페리 터미널이 역에서 몇 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놈에 비.

대아고속해운(부산-대마도간 페리를 운행하는 회사) 에 며칠 전에 대마도행 편도 배편을 예약했다. 그들 홈페이지에는 부산->이즈하라 편도가 65000원으로 나와 있고 왕복이 13만원인데, 히타카쓰->부산 편도는 6900엔으로 적혀 있다. 최근 환율을 고려하면 왕복 배편을 끊지 말고 엔화로 계산해 돌아오는 배편을 히타카쓰에서 끊으면 훨씬 이익이 되리라 생각했는데, 무슨 착각을 했는지 창구 직원더러 왕복 배편을 달라고 했다.


3년 전에 자전거를 산 이유가 일본 여행 때문이다. 여러 나라 여행자들에게 듣기로는 뉴질랜드 다음으로 일본이 자전거 여행하기에 좋은 곳이란다. 몇 개월 자전거 사서 연습 좀 해보고 일본에 가려던 계획이 3년이나 미뤄진 셈이다.

첫번째 목표는 대마도, 두번째는 후쿠오카를 기점으로 한 규슈 원점 회귀 코스, 세번째는 후쿠오카에서 오사카/도쿄까지, 네번째는 훗카이도 일주 코스다. 나름 그렇게 계획을 세웠다. 맞은편에 후쿠오카 행 페리 창구가 보인다. 언제쯤 저 곳에 가볼 수 있으려나...

출입국 관리 직원이 자전거 타고 대마도 가냐고 묻는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히죽히죽 웃었다. 괜찮아요. (늘 있는 일인데요 뭐) 짐 엑스레이 검색 중 가방에서 가스통을 발견한 직원이 claim tag를 끊어준다. 가스통은 따로 선적하고 이 claim tag를 내리기 전에 배 승무원에게 보여주면 가스통을 돌려줄 꺼라고 한다.


출국 카운터를 거쳐 배에 올랐다. 십수 년 전에 전국일주를 한 적이 있다. 부산에서 돈이 떨어져 부산역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꿔 기차를 탔다. 하여간 그때는 돈 없이 잘 돌아다녔는데, 대학생 형들 흉내를 냈던 것이다. 그들에게 무전여행은 일종의 자랑스러운 무공훈장이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이후 여행씬은 완전히 달라졌다 -- 국내에서 하던 거지짓을 해외로 확장한 것이다. 나는 그 10년 후에야 간신히 거지(또는 구도자)여행 대열에 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부산 방문은 무척 오랫만이다. 부산에 관해 기억 나는 곳이라야 해운대와 광안리 해수욕장, 자갈치 시장, 그리고 항구 부근의 러시아 간판이 전부지만.

생각해 보니 해운대 해수욕장(?)에 김씨 아저씨와 단 둘이 내려온 적이 있다. 해수욕장에서 썬텐을 해보자는 계획이었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썬텐 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해변에 누워 비를 맞았다. 암울했다.

아무튼. 예전과 비교해 보면 부산이 엄청나게 큰 도시가 된 것 같다. 저렇게 많은 아파트가 있었나? 저 크레인은 독에서 배를 건조할 때 쓰는 것 아닌가? 아니면 컨테니어 하적용?


8.40am. 배가 출항한다. 빗물이 창가를 적신다. 바깥 풍경이 흐릿하다. 직원들 대화를 들어보니 손님은 모두 150명. 자리가 꽉 차지는 않았다. 그중 자전거를 끌고 온 사람은 나 혼자다. 직원이 좌석 뒷전의 물통을 쌓아둔 곳에 자전거를 거치하면서 원래 자전거는 못 싣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 빗 속에 어떻게 다닐꺼냐고 되레 걱정한다. 완전 무장한 아저씨 둘이 대마도로 낚시여행을 간단다. 나를 포함해 세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단체 관광객인듯 하다.

가이드가 단체관광객들에게 귀미테를 나눠준다. 내 뒷좌석의 아줌마는 배멀미로 혼쭐이 났다. 아이고, 윽, 아이고 하는 작은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배가 상하로 크게 흔들렸다. 뭐 나야 배멀미를 안 하니까 배가 크게 흔들릴 수록 재밌어 했다.

아침에 먹은 커피 때문에 정신이 말똥말똥 한 것이 영 안 좋다. 버스에서 잠을 좀 자두는건데.

멍하니 앉아 있었다. 1시간 40분이 지나 흐릿한 빗속에 섬의 윤곽이 드러났다. 왜 이렇게 빨리왔지? 2시간 40분 걸린다더만. 배가 정박하기 전에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카운터에 가서 클레임 태그를 보여주니 가스통을 돌려준다.

너무 일찍 도착해 약간 어리둥절한 가운데 이즈하라 항에 닿았다. 비가 내린다. 자전거가 걸리적거려 짐이 많은 낚시꾼 아저씨 둘과 함께 마지막으로 내렸다. 평소 입출국할 땐 다람쥐처럼 빨리빨리 움직였는데 이번에는 안하던 실수를 한 셈 -- 입국수속에만 40여분이 걸렸다.

입국장이 달랑 건물 한 동으로 두 명의 입국 심사관이 참 꼬치꼬치 살핀다. 건물이 허름하고 영어가 안 통해 흡사 제3세계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입국심사관이 어디서 묵을꺼냐고 묻는다. 프린트해 둔 '캠핑장 예약 신청서'를 꺼내 보여줬다. 손짓 발짓으로 미우다 캠핑장은 지금 문을 열지 않았단다. 이이에, 나이. 젠장. 일어 공부를 좀 해뒀어야 하는데. 뭔 소린지 알아먹을 수가 없잖아. 결국 고개를 끄떡인다.

입국장 바깥으로 여전히 비가 내린다. 짐을 비닐로 잘 싸고 우비를 챙겨 입었다. GPS를 켜니 아직 위성 신호를 잡지 못한다. 3-4분 빗속에서 기다렸지만 여전하다. 간신히 시그널이 잡혔다. 뭔가 좀 이상하다. 집에서 GPS Trackmaker로 입력한 waypoint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이즈하라 항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내 중심쯤에 위치한 화장실에서 져지로 갈아입고 우비를 걸친 후 짐을 다시 챙겼다. 지도를 살펴 이즈하라 항의 시내 윤곽을 그려보았다. 자전거로 시내를 서너바퀴 돌아봤지만 알만한 지명이 눈에 띄지 않는다. 뭔가 좀 이상한데?


다리에 올라 이즈하라 항을 쳐다 봤다. 시내가 지나치게 작다. 적어도 남북으로 1km 이상되고 시내를 관통하는 382번 도로와 몇몇 지방도가 겹쳐야 하는데...


이렇게 작은 항구가 이즈하라 항이란 말인가? gps에 aziro가 찍힌다. 아, 아는 지명이다. '아지로의 연흔'이구나. 일단 오늘은 아소베이 파크 캠핑장까지 갈 예정인데, 이즈하라 시내에서 30km 가량 떨어져 있고 자전거로 한두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니 이즈하라에서 관광 좀 하며 빈둥거리다가 천천히 가도 되겠지 싶어 일단 아지로의 연흔을 찾아갔다.


신선한 삼나무숲 한가운데 억수로 쏟아지는 비 때문에 범람한 작은 개울이 흙탕물을 튀기며 흐르고 있다. 사람의 흔적이 닿지 않은 원시 천연림에서 느껴지는 신선한 내음. 하늘을 가린 숲 속을 가로지르며 아기자기하게 이어진 구불구불한 도로가 꽤 재밌다. 재밌는 여행이 될 것 같다.


아지로의 연흔. 화강암에 새겨진 파도의 흔적. 멀리 항구를 떠나는 배(타고왔던 배)가 보인다.


파도가 약해 바닷가를 첨벙거리며 걸었다. 파도의 흔적이라고? 흠... 암석의 한층에 난입된 다른 층이 켜켜이 쌓이며 압축되다가 조산작용으로 일부분 바닷가에 노출되 약한 층이 파도에 깎인 것이 아닐까..


거대한 통짜 바위에 조가비 껍질이 다닥 다닥 달라붙어 있다. 물이 몹시 맑다.

이즈하라 항을 중심으로 지형지물을 파악하기 위해 시내 곳곳을 누비고 다녔지만 도무지 알만한 지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쯤에는 반쇼인이 있어야 하는데, 이쯤에는 하치만구 신사가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네? 혹시 내가 GPS Trackmaker로 작업하는 도중에 waypoint가 엉뚱한 곳으로 옮겨가 버린 것이 아닐까?


골목길 사이를 헤메다 빗 속에서 찍은 사진. 바다로 향하는 저 작은 개울에 물고기들이 오락가락한다.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어 흡사 유령도시 같다.

한 시가 좀 넘어 시장기가 돌았다. 어젯밤부터 먹은 것이 거의 없어 배가 고프다. 이즈하라에서 헤메는 것은 관두고 이제 슬슬 아소베이 파크로 향해야겠다. GPS가 쓸모가 없으니 일단 382번 도로를 따라가보자. 그래서 시내를 뺑뺑이도는 짓을 그만두고 북쪽을 향해 무작정 달렸다. 가다보면 뭔가 나오겠지.

가는 길에 'VALUE'라는 커다란 할인매장이 나타났다. 아직 환율이 익숙치 않아 계산이 잘 안되지만 100엔을 대략 760원으로 계산해서 매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한국의 물가와 비교했다. 의외로 한국의 물건 가격과 큰 차이가 없다. 파 한단에 140엔 즉 1000원 가량. 서울에서는 700원 정도. 인스탄트 라면 한 봉이 80엔 가량(600원). 도시락 500엔(3800원). 반찬이 대략 200-300엔. 밥 한 공기가 100엔 가량. 반찬 두어가지와 밥을 사느니 도시락 하나 사 먹는 것이 가격대 성능비가 좋아 보인다. 과일은 몹시 비싼 편이다.

음료와 도시락을 하나 사들고 카운터에 가니 계산해 주면서 예쁘게 포장 해주고 얼마얼마라고 큰 소리로 말한다. 계산대에 가격이 표시되니 굳이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상관없다. 사실 준비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내가 아는 일본어는 몇 개 되지 않았다. 딴지일보에 따르면, 일본어는 '도조' 한 마디만 알아도 여행이 가능하단다. 그보다 약간 더 많은 단어를 알았다.

스미마셍 (실례합니다)
이쿠라 데스까? (얼마에요?)
이치,니,산 (1,2,3, 그 다음은 모른다. 안 외웠다 -_-)
오하이오/곤니치와/곰방와(아침,점심,저녁 인사)
아리가또[고자이마스] (감사합니다)
혼또니 아리가또[고자이마스] (매우 감사합니다)

도조 (뭘요)
도조 (괜찮습니다)
라멘, 도조 (라면 주세요)
고레, 도조 (그거 부탁합니다 -- 뭔가 주문할 때)
이즈하라, 도조 (이즈하라가 어디에요?/이즈하라로 부탁합니다 -- 어딘가 가고 싶을 때)

사실 아는 일본어라고는 웃쓰, 야메떼, 이이에, 오네상, 이따이 정도였다.

근처 한적한 공터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일본에 대해 배운 상식 중 한가지는 콘비니(편의점)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어 있어서 뭘 사든 바깥에 나와 쭈그리고 앉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인도 다 그렇게 하니까 거지같아 보여도 기죽을 것 없다. 그런데 아무도 공터에서 음식을 까먹지 않았다. 왠지 거지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꿋꿋이 밥을 먹었다. 이게 바로 문화적 차이란 거야.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문화에 적응해야지.

이즈하라 시내를 배회하다보니 왼쪽 차도로 가는 것도 대충 익숙해진 것 같다. 2년 만에 해외여행이라 기분이 달뜨기도 했고 점심 먹는 내내 마치 축복이라도 해주듯이 비가 멎어 아, 이제는 날이 개이는구나 싶어 앞으로의 4박 5일 여행이 기대되었다. 도시락이 아주 맛있다. 일본인들은 쌀밥을 참 정성들여 지었다. 이런 싸구려 종합선물세트 도시락의 밥맛이 평소 한국의 왠간한 음식점에서 먹는 밥맛보다 좋다니 참 어이가 없다.

밥도 다먹고 기분도 좋아 이제 슬슬 출발하려고 주위를 둘러봤다.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에는 내가 빠져 나온 곳이 'Hitakatsu'라고 적혀 있다. 히타카쓰 라니? 말도 안되잖아? 하하하. 그러다가 등골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혹시...? 지갑에서 배표를 꺼내보았다. 배표에는,


Busan -> Hitakatsu


라고 크게 적혀 있다.

허걱. 그럼 여태까지 헤메던 저 곳이 이즈하라 항구의 완전 반대편인 히타카쓰란 말이냐? 가슴이 철렁했다. 때마침 극적으로, 먹구름이 몰려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다시 VALUE의 처마 밑으로 허겁지겁 자전거를 몰고가 벤치에 앉아 대체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인지 되집어 보았다.

나흘 전, 인터넷으로 대아해운고속 사이트에 접속해 이즈하라행 토요일(6월 30일) 배편을 예약하려고 했다. 대마도행 배편은 아직 인터넷으로 예약이 안된다. 그날은 만석이란다. 그럼 일요일은요? 일요일엔 배편이 있단다. 오케이 그럼 그걸로 예매해 주세요. 몇 시에 출발이죠? 오전 8:40분입니다. 이즈하라행 배편은 보통 오전 10:40에 떠나는데 홈페이지에 적힌 스케쥴이 틀린 거였군. 아마 성수기에 접어들면서 배가 증편된 것이리라. 그보다 급한 것은 닷새 전에 예약한 캠핑장 3곳의 도착 일자를 수정해 다시 국제 팩스를 넣어야 한다.

1주일 전 대마도 부산 사무소에 문의해 보니 캠핑장에서 숙박하려면 캠핑장에 예약이 필수란다. 속으로 그럴리가, 하다가 어떤 여행기에서 캠핑장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을 때 관리인이 퇴근하고 없어서 캠핑을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일본인은 집요하게 룰을 중시해 룰에 어긋나는 것은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라는 일본 문화 특유의 괴상한 풍속에 관한 글을 읽기도 했다. 문화적 차이니까 괴상하다고 말하지 말자.

사무실에 팩스가 없어 팩스를 보내려면 근처 문방구에서 한 장에 500원씩이나 하는 팩스를 보내야하는데(500원은 국내용 단가다. 해외는 단가가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 인터넷 여기저기 검색해 인터넷으로 국제 팩스를 보내는 사이트 몇 군데를 알아뒀다. http://fax.empas.com

그런데 그날 공교롭게도 국제팩스 보내는 사이트를 비롯한 다수의 사이트가 중국의 개떼같은 해킹 공격에 당해 사이트가 다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팩스를 보내는데 4시간이 걸렸고 그나마도 실패해서 그 다음날 다시 간신히 팩스를 보낼 수 있었는데(업무 시간에 이런 짓 하면 죄책감을 느낀다), 이제 그렇게 예약한 것을 취소하고 다시 팩스를 보내야 한다.

팩스를 보낸 후 confirm fax를 그쪽에서 보내주는데 팩스를 받을 형편이 안되니 대마도 부산 사무소로 컨펌 팩스를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대충 컨펌이 났는데, 어제 예약을 취소하고 예약 일자를 하루씩 미룬다는 것을 일본어로 어떻게 써야할 지 몰라 캠핑장 예약 신청서의 비고란에 영어와 일어를 뒤죽박죽 섞어 다시 작성한 것을 인터넷 국제 팩스 사이트를 통해 보냈다. 부가세 포함해 장당 220원이다. 그런 팩스질을 3차례에 걸쳐 3군데에 보내고 다시 컨펌받는 복잡한 절차를 거친 것이다. 이런 간단한 일거리인데도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팩스 보낼 걱정 때문에 배편이 이즈하라 도착인지 히타카쓰 도착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배표를 받아들었을 때도 확인하지 않았다. 어차피 도착하면 어떻게 되겠지, 뭐 준비한 것도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GPS에 입력한 좌표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을 때도 내가 좌표점들을 잘못 입력했거니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어젯밤부터 줄기차게 쏟아지는 재수없는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다. 기억이 맞다면 히타카쓰에서 아소베이 파크까지는 고저차를 고려하지 않고 대략 80km다. 하루에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다. 만약 여행일정을 변경해 히타카쓰에서 이즈하라로 역순으로 내려간다 해도 마지막 날에는 히타카쓰로 되돌아와야 한다. 차라리 그보다는 하루 일정 까질 각오로 아소베이 파크로 가서 히타카쓰로 올라오는 편이 낫다.

결심이 서자 자전거에 올랐다. 오후 2시다. 멍청하게 히타카쓰 시내를 한가하게 배회하지 않고 상황판단을 제대로 했어도 쓸데없이 낭비하는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저 여행 나와서 기분이 좋아 헤벌레 하고 있다보니 이런 이런...

어차피 gps보고 미리 설정해 둔 경로를 트랙백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지도를 보고 히타카쓰에서 아소베이 파크까지 가는 가장 편한 길로 보이는 39번 해안도로를 타기로 했다. 주욱 가다가 382번 국도와 만나는 지점에서 382번 국도를 타고 조금 진행하다보면 아소베이 파크가 나타난다. 출발했다.

비가 참 살벌하게 내린다. 쓰시마의 여름철 7,8월 평균 강수량이 350mm란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우 속에서 사실 걱정꺼리는 하나 밖에 없었다. 자전거의 체인과 구동부에 스며든 물이 녹을 만들어 체인을 뻑뻑하게 해서 주행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39번 해안도로는 그야말로 절경이다. 비가 이렇게 억수로 퍼붓는데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삼나무 숲과 도로에 연접한 개울이 졸졸 흐르는 1차선(한국에서의 1차선 개념이 아니라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가는 도로폭 정도의 1차선) 지방도는 제주도의 1100 도로, 516 도로를 연상시켰다. 아니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로는 처음 봤다. 해안선을 타고 가다가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해안으로 나오는 길이 계속 반복된다. 표고차가 40m 이내라 주행이 쉽다. 흡사 자전거 여행을 위해 만들어 놓은 도로같다. 10분에 한 대 꼴로 간간히 지나가는 차량들은 친절하게도 속도를 늦추거나 물을 안 튀기려고 크게 우회해서 자전거를 지나친다. 일본인들의 운전 매너가 훌륭하다.


Video: 쓰시마 39번 국도

이렇게 훌륭한 도로가 있는데 어째서 한국의 자전거 동호회에서 대마도 원정 자전거 여행이 드문 것일까? 쓰시마의 39번 도로에 비하면 제주도의 12번 해안도로나 한국의 동해안 해안 도로는 고개를 수그려야 할 판이다.

잠시 쉬면서 개울에 손과 발을 담궜다. 비가 하도 내려 우비 속까지 척척하게 젖었다.

아소베이 파크 캠핑장에 시간내에 도착하긴 글렀다. 벌써 6pm. GPS의 sunset 타임을 보니 7.30pm에 해가 진다. 비가 잠시 그쳤다. 1km만 달리면 항상 나타나는 자판기 앞에서 잔돈을 꺼내 음료수를 뽑아 먹었다. 500ml짜리 탄산음료 한병에 150엔. 한국돈으로 1200원 가량. 물은 120엔. 그렇다면 누가 미쳤다고 물을 사먹나? 30엔만 더내면 비타민씨가 듬뿍 든 기능성 음료를 마실 수 있는데.

배는 고픈데 먹은 건 없고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니, 그야말로 서바이벌 분위기가 물씬 난다. 작은 어촌 마을에 멈춰 어느 창고 처마 밑에서 오늘 예정은 가볍게 관광이나 하고 즐기다가 별빛이 총총한 밤하늘 아래 텐트치고 누워 mp3나 들으면서 스르르 잠드는 것이 일정 아니었나? 내 팔자에 그런 로또같은 하루가 있을리가 없지 신세한탄 하다가 흘낏 옆을 보니, 수퍼가 있다. 빙고. 이것이 바로 서민의 5천원짜리 로또 당첨이 아니고 뭐겠나. 알맞은 때에 먹이를 구할 수 있게 되다니. 하하. 수퍼에서 롯데 크런치 초콜렛 2개를 사서 하나를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빗물 때문에 쫄닥 젖어 이건 뭐...

자전거 앞에 트럭이 멈춘다. 트럭 짐칸에 아무 것도 실려 있지 않다. 운전수에게 부탁해 자전거를 싣고 아소베이 파크까지 직행하는 방법이 있다. 자동차로 가면 얼마 걸리지도 않고 돈을 받아봤자 몇푼깨나 하겠나? 어쩌면 불쌍한 나머지 공짜로 태워줄 지도 모르지. 태워 달라고 해, 말어? 천둥번개가 콰과광 울렸다. 트럭이 떠났다.

아무리 빈둥빈둥 관광을 부르짖어도 지난 십수년간 써바이벌 아닌 관광은 해본 적이 없다. 빌어먹을 빗물과 함께 운명을 받아들이자. 히치하이킹은 관두고 그냥 가자.


비가 잠시 멎은 틈에 전봇대에 매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쓰시마에 온 후로 온 사방에 매와 까마귀 투성이다. 평생 매 울음소리는 몇 번이나 들어보게 될까? 어린 시절에는 시골에 살아 병아리를 채가는 매를 자주 보았다. 그후로 주욱 못 보다가 안데스의 산악 지방에서 매와 흡사하게 움직이는 콘도르를 보았다. 천미터가 넘는 절벽의 틈새에서 활강하는 콘도르. 매, 콘도르 따위가 상승기류에 저항하며 공중에서 stance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날개를 살짝 살짝 틀어가며 제자리에 멈춰선 채 지상을 기어다니는 먹잇감을 뚜러지게 노려보다가 갑자기 날개를 비틀어 쏜살같이 땅으로 쳐박히듯이 빠른 속도로 활강한다.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떠오르면 어느새 발톱 사이로 꿈틀대는 무언가를 낚았다. 그러고서는 석양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 이건 내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보곤 하던 광경이다. 서울 도회 촌뜨기들은 그런 우아한 모습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매의 눈에는 내가 땅 위를 꿈틀꿈틀 기어가는 조금 큰 지렁이처럼 보이지 않을까?

이제 좀 날이 개려나? 기지개를 펴고 자전거에 올랐다. 왠걸. 다시 퍼부어 대기 시작한다. 10분 쉬고 50분 퍼붓는게 참, 학교수업마냥, 또는 군바리 훈련처럼 주기적이다. 해안에 인접한 39번 국도는 비록 고저차가 40m 내외지만 급격한 헤어핀 구간이 많다. 차가 거의 안 다니니 날이 맑으면 평속 40~50kmh로 다운힐에서 브레이크 감속 안하고 주행이 가능하지만 빗길이 미끄러워 여지없이 브레이크를 잡게 된다.

쓰시마에 오기 전에 브레이크 패드 걱정을 했다. 뒷 브레이크의 패드가 거의 다 닳아 wear line이 거의 사라진 상태인데 이렇게 계속 브레이크를 밟아대면 나중에 브레이크가 듣지 않을 것이다.

시험삼아 평지에서 앞/뒤 브레이크를 끝까지 당겨 보았다. 빗물 코팅이 된 아스팔트 도로에서 주아악 미끄러지며 30m 이상 나간다. 그러고도 완전히 정지하지 않는다. 허걱. 이거 좀 위험한데? 여분의 브레이크 패드를 챙겨오지 않았다. 진부령에서 브레이크가 듣지 않아 신나야 할 다운힐 구간에서 끌바(자전거 끌고가기)를 해야만 했던 눈물겨운 사연을 자전거 동호회에서 본 적이 있다. 비지땀을 흘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꼭대기 휴게소까지 올라가서 자전거를 끌고 내려와 봐라. 그저 허허 웃음 밖에 안 나오지.

382 국도로 들어섰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382 도로로 들어서자 길이 넓어졌다. 갓길도 제법 있고 차량 소통량이 늘었다. 하지만 길은 밋밋하고 재미가 없어졌다. 흐린 날이라 금방 어둑어둑 해 졌다.

아소베이 파크 캠핑장 입구에 다다랐다. 7pm. 대략 5시간쯤 달린 셈이다. 비가 안 왔더라면 더 일찍 도착했을 것이다. 이즈하라에서 히타카쓰까지 대략 100km 가량, 자전거로 하루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다. 물론 그렇게 달리면 정말 재미가 없을 것이다. 자전거 '여행'을 온거지 자전거 '주행'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관광이란 말이다!

아소베이 파크 캠핑장 입구는 쇠사슬로 막혀 있다. 통행 금지. 6pm에 캠핑장이 문을 닫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예약을 했고 예약을 했으니까 관리인이 기다려주거나, 캠핑장 안에 들어가 캠프를 하는 것이 워낙 당연하게 여겨져 자전거를 쇠사슬 너머로 넘겼다. 일단 캠핑 후, 저간 사정을 빌자. 옆 샛길에서 짐차가 나타나더니 백밀러로 흘낏 보고 올라간다. 아, 저 아저씨가 관리인이구나. 저 트럭을 쫓아가면 되겠구나! 고개를 한 두 개 넘어 헉헉 거리며 올라가니 캠핑장 관리 사무소가 나타난다.

아저씨가 반겨준다. 일본어로 인사했다. 곰방와! 굿 이브닝! 자랑스럽게 캠핑 예약 신청서를 내밀었다. 말은 안 통하지만(나는 영어로, 그 아저씨는 일어로 서로 유려하게 말했다) 팩스, 레저베이션, 예야꾸(예약), 캠핑, 투데이, 투모로우 정도는 서로 대화가 통해 내가 여기서 2박을 머무를 예정이라는 것을 아저씨가 알아 들었다. 그런데 컨펌까지 받았는데 예약된 것이 없다. 다시 신청서를 작성했다. 뭐 예약에 무슨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캠핑장 예약 신청서'는 떳떳한 부적의 역할만 하면 되는 것이다.

1박 캠핑이 1000엔이란다. 600엔으로 알고 있는데요? 600엔은 없고 차량용 캠핑 코너가 1000엔이란다. 떨떠름하지만 오케이. 2박 2000엔을 건넸다. 아저씨가 차를 몰고 캠핑장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러더니 화장실을 보여준다. 샤워 오케이. 토이레(toilet) 오케이. 레인?, 레인!, 뭐 이런 제3세계 스러운 대사를 주고받았다. 아저씨 말은 비가 오니까 지붕이 있는 화장실 구석에 텐트를 치란다. 그러면서 비가 그치면 내일은 저기 오토캠핑장으로 텐트를 옮기라는 것 같다. 오케이. 하이. 예스.

빌어먹을. 제대로 된 일어 공부 좀 하고 오는 건데... 도서관에서 기초 일어회화 책을 빌려왔는데 '와따시와 한코쿠진 데쓰', '와따시와 나마에 산돈데쓰' 같은 하등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대사 밖에 없다. 시계가 있는데 시간은 물어서 뭣하고 뻔히 아는 물건 더러 '고레와 난데스까?' 하는 바보스러운 말을 할 이유가 없다.

그 회화책, 하루 봤다. 하룻동안 외운 것은 아이우에오, 카키쿠케코의 히라카나 글자 모양이 어떻게 생겼나 하는 것 정도다. 비를 많이 맞으니까 이젠 기억이 안 난다. 그러니까 일본어 글자도 못 읽는다 -_- 그동안 업무에 시달리느라 바빴고 밀린 책들 읽느라 바빴다. 어떻게 되겠지 하고 왔는데 정말 어떻게 되긴 된다. 하지만 독도, 위안부, 일본의 최근 우경화 성향에 관한 현지인과의 진지한 토론은 못 하잖아?


노심초사 끝에 옥션에서 3만 5천원 주고 구입한 1인용 낚시 텐트. 15만원짜리 비박용 텐트가 있긴 하지만 누에고치처럼 안에 들어가면 꼼짝 달싹도 못하는 바보스러운 텐트에 눕고 싶은 생각은 없다. 결정적으로 그런 텐트는 1kg이 넘는데 비해 이 텐트의 무게는 750g 밖에 안 된다. 750g인데 내부는 한 사람이 충분히 눕고도 여러 짐들을 안에 넣을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다. 폴대만 밀어 넣어 교차시키면 모기장 텐트가 완성되고 그 위에 플라이를 씌우면 방수 커버가 된다. 텐트의 방수 성능을 순진하게 믿지는 않아서 넓고 얇은 비닐을 함께 들고 왔다. 여러 모로 흡족한 텐트다.


아소베이 파크 캠핑장. 기본적으로 오토캠핑장이다. 자동차 들여놓고 저 나무판 위에 텐트를 설치한다. 사이트 하나 마다 장작을 지필 수 있는 바베큐 그릴이 있고 그 옆에 110V 아웃렛이 달려 있다. 220V->110V 컨버터 플러그만 있으면 얼마든지 충전이 가능하다. 공동 취사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쓰시마가 그렇게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서 이용객이 많지 않을 것 같은데 관리 상태는 상당히 좋다.


무려 23000원이나 주고 구입한 1인용 산악 코펠. 달랑 냄비 하나, 플레이트가 전부인데 무게가 가볍고 길죽하게 생겨 짐을 챙길 때 용적을 덜 차지한다. 수저와 젓가락, 버너 등을 코펠 안에 넣을 수 있어 좋다. 군대에서 라면 끓여먹을 때 쓰는 짬빱통이 더 싸고 훌륭하지만 시장통 돌아다닐 시간이 없어 인터넷으로 값비싼 것을 구입했다. 물론 철밥통보다는 무게가 현저하게 가볍다.

그 위에 17000원 짜리 초소형 미니 버너가 있다. 이건 잘못 샀다. 히타카쓰에 도착해 여기저기 수퍼에서 가스통을 찾아 봤는데(없을꺼라 짐작하고 한국에서 가스통을 구입해 오긴 했지만) 한국에서 휴대용 렌지에 쓰는 가스통은 많이 있지만 버너를 돌려 나사로 결속하는 형태의 저런 둥근 가스통은 두 가게를 돌아보는 동안 보지 못했다. 낚시점은 안 가봐서 모르겠다. 차라리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형태의 가스통에 장착이 가능한 버너나, 일반 가스통을 장착할 수 있는 어댑터가 포함된 버너를 사는게 나았을 것 같다. 작은 크기임에도 화력이 꽤 좋아 성능에 불만은 없다.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곤 도시락이 전부라 라면을 끓였다. 예전에 일본의 인스탄트 라면을 여러 종류 먹어봤는데 도저히 맛있다고는 할 수 없는 희안한 맛의 라면들이라 라면 맛은 기대하지 않았다. 공동 취사장의 그릴에는 장작을 뗄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장작들이 젖어 있고, 보통 캠핑장에서 장작은 공짜가 아니니 그냥 가스 버너로 해먹는게 낫지 싶다. 밥을 해 먹을 때는 가스버너보다 장작 쪽이 훨씬 맛있게 밥이 된다. 거기다가 소세지, 옥수수, 감자, 통 돼지고기 따위를 구워 먹으면... 츄릅. 생각만 해도 침이 넘어오네... 여행 중에 주방을 빌려 밥을 해먹은 적은 많지만 캠핑을 해 본 지가 십 년이 넘어서 캠핑용 기어를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요즘 캠핑 장비는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좋아진 것 같은데...


워낙 가난한 캠핑만 해봐서(어린 시절에도 혼자 다녔다. 얘들을 몇번 데리고 태백산맥을 헤메고 나면 다시는 같이 안 가려 들었다. 늘 비를 몰고 다녔고 늘 여지없이 개고생을 한 탓도 있다) 당시에 들고 다닌 음식이라곤 쌀 한 주머니, 고추장 한 덩이 정도가 고작이다. 나중에 생활이 펴서 라면도 들고 다니고 인스턴트 카레 따위도 들고 다녔다. 다 어린 시절 얘기다. 이건 사제 스프다. 멀쩡한 라면 뜯어서 스프만 챙겨 들고갈 수는 없고, 예전에는 라면 스프만 따로 팔았는데 요즘은 안 보이는 것 같고... 그래서 라면 스프를 만들었다. 마늘가루 있으면 넣고, 다시다 가루, 멸치, 다시마, 새우 약간, 소금 왕창, 후추 약간, 고춧가루 왕창 넣고 블랜더에 함께 갈아낸다. 거기에 마른 오징어, 표고버섯, 다시마 따위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넣으면 완성이다. 일종의 천연 조미료인 셈이다.


일본 면발에 사제 스프로 끓인 라면. 삼양라면 맛이 난다. 신라면같은 칼칼한 맛을 내려면 청양고추를 냉동 건조시킨 다음 바짝 말려서 블랜더에 같이 갈아야 하는데 뭐 그럴 시간은 없고 적어도 일본의 인스탄트 라면 같이 느끼하고 한 입 먹으면 괜히 먹었다 이 닦고 그냥 잘 껄 하는 기분은 안 나는 그럭저럭 괜찮은 맛이 나는 라면이 완성되었다.

라면 끓여먹고 젖은 옷을 빨아서 짰다. 9pm.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한 이틀 제대로 잠을 못잤더니 피곤하다. 잠이나 자자 누웠지만 말똥말똥. 평소 새벽 2-3시에 자던 사람이 9pm에 자려니 잠이 오겠나.

아소베이 파크에 오기 전에 마땅한 수퍼가 보였으면 술이나 몇 병 사오는 건데. 너무 늦지 않으려고 정신없이 왔더니 달랑 라면 하나와 먹다 남은 크런치 초콜렛 밖에 먹을 것이 없다.


인터넷 어딘가에서 구한 지도. 요점 정리가 잘되어 있어 원작자에게 감사하다. 하타카쓰는 맨 위, 아소베이 파크는 중간 아래 '대산'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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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p.

잡기 2007. 6. 25. 11:46
Six Feet Under -- 훌륭한 드라마, '드라마'로써의 드라마. 이런 드라마를 모르고 있었다니... 이제는 시들어버린 수많은 고인들을 다루는 가운데, 싱싱 냉장고의 오이처럼 파릇파릇한 개개 인물의 성격 구현에 높은 점수를 주겠다. 수개월간의 지루한 미드질 끝에 하나 건졌다. Six feet under가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 라는 뜻인 것 같다. 땅밑 6피트가 아니라. (양키들은 죽어도 국제표준 미터법을 사용 안하네. 21세긴데 피트가 뭐야 피트가)

그곳은 지도에 나오지 않는다. 참된 곳은 지도에 나오지 않는 법이다. -- 백경, 허먼 멜빌

대뇌지도가 부실한 탓도 있지. 예전에 비하면 뇌과학은 많은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PET와 fMRI의 실시간 매핑이 가장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진단의학을 소재로 한 닥터 하우스에서는 fMRI를 사용하여 병력을 진단하는 모습이 나왔다. 망할 드라마들이 다 그렇듯 자세히는 안 나왔다.

학습에 간여하는 미러 뉴런의 존재로부터 유아기의 뇌 성장 방식(좌/우뇌가 교대로 성장), 뇌에 따른 성격 편향, 개성의 형성, 인격의 형성, 자아...의 형성. 그리고 지능의 발달. 아가의 iq와 제 양 부모의 iq 사이의 상관계수는 연구결과 0.72 정도 된다. 다시 말해 아이는 양 부모의 지능을 대략 51% 유전적으로 물려받는다. 그럼 나머지 49%가 환경과 성장배경? 그런 뜻은 아니고...


교사가 가진 능력은 인간을 변모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다. -- 에머슨 <-- '백만장자의 첫사랑'이란 재미없는 영화에서 본 다소 부질없는 대사. 교사가 인간을 감동시키고 그의 생에 질적인 변화나 계기가 되어줄 수 있다. 굳이 폄하하자면 에머슨의 확신은 희망일 뿐이다. nurture에 점수를 실어주는 수준급의 농담에 대응하자면; 프로그래머가 가진 능력은 세계를 보다 나은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다. 저렇게 앉아있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노년이 평탄하지 않을 것 같은 불확실하고 불길한 예감이 든다. 물론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지만, 소울이는 가끔 네 개뿐인 이를 으드득 으드득 갈았다.

뇌에 관심이 많았는데, 한 사람의 개성과 인격, 심지어 자아와 내적 가치관을 형성하는 요인을 나름대로 두 가지로 규정했다.

1.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2. 면역체계

사회적 경험은 유전적 소인의 발현 강도만을 조절한다. 고 본다. 언제고 터질 일은 터지게 마련. 세계는 빠르게 수렴되어 가고 있으며 과거보다 더 많은 수의 어린이들이 경험의 가상 공유를 비롯하여, 동조된 자극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미국과 한국의 아이들이 같은 가수를 좋아하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게임을 하는 것처럼). 즉 유전자의 영향이 과거 어느때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만 같다. 커즈와일의 주장을 각색하자면 폭발적인 기술적 발전은 경험과 감각의 세계를 극단적으로 확장하여 동조된 세계 자극은 부질없는 걱정이 된다. 물론 나는 그의 두꺼운 책에 그려진 싱귤라리티를 향해 치솟는 '발전속도' 그래프를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TV에서 인간시장을 보았다. 이외수의 감성마을이 소개되었다. 고생하는 사모님은 어느날, 어린 아들이 학교가기 싫다고 말하자 아이 손에 만원을 쥐어주고 인근 버스터미널에 가서 아무 차나 타고 놀러갔다가 저녁까지는 돌아오라고 일렀다. 공주처럼 자란 아내는 그걸 보더니 자기도 꼭 그래보고 싶단다. 좋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학교 가기 싫어서 할아버지 돈을 훔쳐서 동네 애들을 데리고 버스 타고 먼 곳으로 놀러갔다. 배가 고파서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니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혀 있었다. 눈물나는 가족상봉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영문도 모른 채 집에 끌려가 맞았다. 이외수의 사모님같은 분이 어머니였다면 나는 비뚤어져서 모범생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훌훌 털어버리고 아무 계획없이 여행을 가는 것을 낭만이라고 생각들한다. '아무 계획'없이 가다가 길에서 만난 사건과 우연을 즐기는 것이다. 10대가 가버린 후 대체 내 삶에 낭만이 있긴 했나 의심스럽다. 자전거 여행은 종종 주행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열댓시간 뙤약볕에서 무미건조한 풍경을 보며 땀을 질질 흘리며 달리다보면... 여행을 하자고 자전거를 타는건지, 자전거를 타자고 여행하는 건지 헷갈린다.

엔진을 갖추면 어디든 갈 수 있을꺼라는 순진한 믿음은 버렸다. 엔진 보다는 엔진의 의지가 더 중요했다. 엔진의 의지는, 그래도 가자, 날이 덥거나 추워도 가자. 의문은 접어두고. 뭐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해 엔진의 의지는 삽질의 의지일 따름이다. 삽질하고 싶은 것이 여행의 의미? 그렇다.

애당초 내게 있어서 여행은 휴양과는 거리가 멀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혹시 공허한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빈둥거리고 있으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빠삐용처럼 인생을 낭비한 죄를 짓는 것이 아닐까?

자전거 타고 출근하다가 자전거 도로에서 하수 시설 공사차 진행하던 용달차가 T자 도로에서 좌회전으로 빠져나와 급정거 하는 바람에 차량의 뒤를 박았다. 시속 25kmh. 브레이크를 잡았지만 완전 제동이 안되어서(완전 제동이 되면 뒷바퀴가 들려(잭나이프) 운이 좋으면 하늘을 훨훨 날던가 뒷바퀴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다가 슬립해서 차량 밑으로 기어 들어간다. 작년에 올림픽 공원에서 브레이크 잡는 연습을 좀 했는데(벽을 향해 치킨런, 급제동, 그리고 턴, 쾅!) 그게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어느 정도 제동이 된 상태에서 용달차 뒷 팔레트를 손바닥으로 짚었는데 가운데 손가락 손톱 밑에 팔레트 표면에 붙어있던 유리가 파고 들어 5mm쯤 찢어졌다. 키보드 두들길 때마다 손가락 끝이 따끔거린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새빨갛고 신선한 피가 핸들 사이로 뚝뚝 흘러내렸지만 출근길이라 귀찮아서 손가락을 쪽쪽 빨아 먹으면서 사무실까지 그냥 갔다.

저녁 퇴근길에 역시 하천에 작은 다리가 걸쳐져 있는 T형 자전거 도로에서 우회전 진입 중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직진하던 자전거가 나를 보지 못하고 고속 질주하다가 충돌할 뻔 했다. 사위가 어두웠다. 자전거 기척을 느끼고 순간 브레이크를 잡았다. 뒷브레이크 7, 앞브레이크 3, 교과서대로다. 핸들을 오른쪽으로 살짝 틀어 노면에 슬립해서 일부러 자빠링하여 충돌을 피했다. 자전거는 쓰러졌고 나는 한쪽 핸들을 잡은 채 도로에 멈춰섰다. 하아. 주행하던 그 자전거의 과실이지만 다친데도 없고 잘잘못 따져 친해져봐야 뭐하겠냐는 생각이 들어 암 말 않고 자전거를 보냈다.

하루에 두 건이라... 긴장이 많이 풀어진게다. 사고가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내 과실도 아니지만 속도가 전보다 약간 오른 후 위험도 그만큼 높아졌다. 재밌는 얘길 들었다. 타이어 펑크를 방지하기 위해 공기압을 대략 빵빵한 정도로 유지하고 다녔는데 더운날 내리막에서 브레이크를 과도하게 잡으면 림이 가열되면서 타이어 내 공기를 팽창시켜 펑크가 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운날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를 계속 잡다보면 림에 검게 녹아내린 브레이크 패드가 우중충하게 말라붙기도 한다. 그걸 볼 때마다 섬뜩했다. 패드가 다 녹아내리면 내리막에서 발바닥으로 브레이크 잡는 건 어림도 없고... 일부러 자빠링 해도 무사히 착지하리란 보장이 없다. 67kg+15kg, 60kmh. 인체의 대다수 뼈들은 저 정도 무게의 저 정도 속도에서는 그 경이로운 탄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부러진다. 내리막길에서 55-60kmh씩 밟는 짓은 안 하기로 했다. 물리학, 열역학적 사실 때문이라고 해두자.

초저속 주행시 스티어링과 사고 대비 자전거 탈출을 연습 좀 해야 할 것 같다. 알라딘에서 '혼자 배우는 산악자전거'라는 책을 주문했다. 설명은 단순하지만 그림이 많이 나와있어 흥미롭게 읽고 있다.

요 며칠은 '얼음과 불의 노래' 성검의 전설 편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흥미로운 점은 내가 이 책을 수 년 전에 etext로 읽었다는 것이고, 더더욱 흥미로운 점은 읽은 기억이 나고 내용도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밀린 책이 9권이나 있음에도 1940페이지나 하는 책을 하릴없이 다시금 읽고 있다는 점이다. 더더욱 흥미로운 것은 일전에 영화 '파프리카'를 보고 어디서 많이 본 듯 하다 싶어 기시감에 고개를 갸웃갸웃 했는데 일요일 오후 멍하니 서가를 바라보다가 서가에 꽂힌 '파프리카'라는 쓰쓰이 야스타카의 책을 발견했다. 1994년 8월 20일 초판 2쇄 발행. 당시에는 SF다 뭐다 해서 이래저래 책을 찾아서 읽었으므로 1995년이나 1996년 쯤에 구입해서 읽은 책일 것이다. 11~12년 전에 읽고 새까맣게 잊었다. 심지어는 얼마전에 잘난 척하며 최재천의 글은 안 읽을 꺼라고 떠들어댔는데 그가 1999년 번역한 책이 서가에 버젓이 꽂혀 있고, 무척 재밌게 읽은 기억까지 나서 소름이 돋았다. 읽은 책을 또 읽는 일이 잦은 내 자신이 징그럽고 경악스럽다. 가끔 1999년부터 보전되어 있는 PDA의 일정을 탐색해 보면 내가 정말 이랬나?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기억이 인간을 규정하는 주요 지표중 하나라면, 난 뭘까?
세계 정복의 파릇파릇한 꿈마저 잃어버린 광우병 환자?

오늘 하루는 '대한민국 30대, 재테크로 말한다'라는 책을 빌려 읽었다. 출간된지 두 달 만에 4쇄를 찍었다. 책 앞 장에 재태크 점수를 메기는 질문지가 있다. 내 점수는 75점. '기본기가 탄탄하므로 대한민국 평균 이하로 가난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알고 있는 지식을 실천할 수 있는 추진력만 겸비한다면 재테크에 관한 한 남부럽지 않은 고수가 될 수 있다' 평가가 후한걸? 집을 사고 싶은 생각이 없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아이에게는 한 푼도 물려줄 생각이 없다. 금융자산과 부동자산의 비율을 8:2로 맞추고 싶다. 노후는 네팔이나 태국 북부, 중국 후난/쓰촨성의 산간지방에서 글이나 쓰며 하릴없이 보내고 싶다. 반품 전문 쇼핑몰이란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www.jaego.co.kr, www.refurbshop.co.kr, www.uniz.co.kr

12억을 모아야 죽기 전까지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 책은 처음이라 신선했다. 내용 중에는 앞으로 대형 평형의 아파트가 대세가 될 터인데, 그 이유는 대형 평형의 아파트라야지 가사를 도울 수 있는 로봇이 활기차게 움직일 공간이 확보된단다. 골든싱글이 사는 광활한 45평 아파트에서 낮에는 정숙한 가사 도우미로 활약하고 밤에는 침대를 따뜻하게 데워주길 기대해 본다.

그런데,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란 말인가? 베스트셀러라곤 파울로 코엘료의 책 몇 권 읽은게 최근 전부라서...

21세기를 주도한 세 가지 기술은 흔히 Genetics, Nanotech, Robotics의 두문자를 따서 GNR로 불린다. 이미 한물간 것으로 짐작되는 3대 기술, NT, BT, IT 다음에 요즘 유행하는 것이랄까? 빌 게이츠가 공공연하게 말한 후 로보틱스가 화제가 된 것 같은데, 말하는 암소가 손님들 사이를 걸어다니면서 자기 소개를 하고 어느 부위를 먹을꺼냐고 물어본 후 제 발로 도살장으로 들어가 자살하는 genetics를 선호하는 편. 아님 material compiler로 원소물질로부터 암소 안심 스테이크를 직접생산할 수 있는 nanotech도...

日 여성 선택받지 못한 ‘중년동정’ 너무해 -- 기사가 좀 우스워서.


이런 느낌? 2ch의 저 농담이 한동안 유행한 듯. 사방에 온통 저 그림이군.

이외수의 사모님같은 분이 어머니였다면, 어쩌면 모범생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더 비뚤어져서 수도승으로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불가에 귀의한 후 25년 동안 로보틱스가 주는 육체적 쾌락과 마법의 세계를 탐닉하다가 절의 돈을 훔치고 절집에 불을 지른 후 인도로 떠나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헤멘다던지. 그러다가 신은 위대한 이원론속에 도사리고 있으며 수사학적 떠버리즘과 수학적 정교함의 애매한 어느 간극에 신이 스프링처럼 오락가락 진동한다는 것을 깨닫고 정보로서 존재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시공간이자 물질인 우주를 구성하는 비트의 진의를 이해하려고 프로그래머가 되어 '정진'하다가 해탈을 위한 고행의 길중 가장 어렵다는 결혼을 택하고 잃어버린 영혼의 대체재인 소울이를 낳은 후 재테크를 하며 고통스럽게 살았을 것이다.

지금과 다를게 하나도 없다. 그래서 데우스 마키나가 난무하는 이 세계에서 눈먼 테이레시아스의 뒤늦은 증언(저주?) 같은 운명(천성; nature)은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양육(nurture)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세대를 이어온 유전자 칵테일, 스크류 드라이버가 될지, 모히또가 될지, 마가리따가 될지, 폭탄주가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페이지를 앞으로 스크롤해서 애 얼굴을 다시 보면 모든 것이 명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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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desic eval.

잡기 2007. 6. 17. 22:00
35불 주고 정품 사지 않으면 RoboGEO는 좌표에 무작위 오차를 일부러 만들어낸다. GPicSync로 바꿨다. GPicSync를 사용하니 싱크가 제대로 맞긴 하는데... 파이썬으로 작성하고 외부 유틸리티를 사용한 것이라 프로그램 속도가 느린 편. 사무실까지 하루 날 잡아서 출퇴근 왕복 84km를 실제로 주행하면서 waypoint를 찍고 그 지점에서 사진을 찍어 오차를 비교해 보았다. 개활지에서 오차 폭이 6~20m 이내다. 대단히 훌륭하다. 사진과 주행경로를 입력으로 GPicSync로 생성한 구글어스 KMZ 파일 (1.3MB)

흠... 그런데 문제가 있다. 내 GPS 리시버는 active track log에만 timestamp를 찍어둔다. 만일 장거리/장시간 여행을 하게되면 active log를 pc로 백업해야 하는데 1초에 한번씩 로그가 기록된다고 보면 평균적으로 간신히 하루나 이틀 분량의 액티브 트랙로그를 남길 수 있게 된다. 트랙로그를 save하게되면 timestamp가 사라지므로 쓸모가 없다. 기록 메모리 용량이 적었던 예전 타잎의 gps 리시버에만 해당되는 얘기인지, 아니면 요즘 것들도 그런지 모르겠다. 요즘 것은 그렇지 않다면 새것을 장만할 이유가 된다.

구글어스의 위성사진 매핑에 오차가 있다. 예전엔 몰랐는데 네이버나 콩나물 지도를 오버레이 하고 GPS Maker로 좌표를 정밀하게 찍어보면서 알게 되었다. 심할 때는 30-40m까지 났다. 그동안은 정밀하지 않은 GPS 리시버 탓이라고 생각했다.

퍼펙트 블루를 만들었던 감독이 츠츠이 야스타카 원작 '파프리카'를 애니로 만들었다. 회사 직원이 어디선가 구해놨다. 1. 뿌린 대로 거둔다, 2.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이걸 완성하는 거야"

"하고 싶은 일에만 정신 팔려서 해야 할 일은 내팽개치고 자기가 무책임해서 희생자가 나왔는데 뭐 느끼는 게 없어? 그렇겠지. 지방이 두꺼워서 신경까지 안 갈테니까. 근데 뭐? '멋지지 않아요?' 과학 마인드? 웃기지 마. 사람 마음도 없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주제에. 자기 꿈만 삼키고서 자존심만 불어터진 오타쿠 임금님이라면 그렇게 기계에 둘러싸여 평생 마스터베이션이나 하다가 죽어버려!"



여자가 소리를 지르고 나간 다음 오타쿠 임금은 기계에 둘러쌓여 늘 하던 마스터베이션을 했다. 여자는 그를 사랑했다.

옛날옛날에 어떤 아가씨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개, 돼지만도 못한 놈을 사귀는 것보다는 개,돼지같은 놈을 사귀는게 낫지.' 정리하자면, 나는 개만도 못한 놈보다는 나은 개새끼였다.

사귀어줘서 고맙습니다.
성불하세요.

작화, 꿈 시퀀스는 어디서 베낀 듯한 기시감이 자꾸 들어 마음 한편이 불편했지만, 음악은 마음에 든다. 엔딩송. 아마도 Meditation Field? (4:44)

'두꺼운 지방' 때문에 생각났다. 나노미니 스커트의 유행을 자기기만적이고 역겨운 유행병/미의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깡마른 여성의 체지방비율은 14% 정도로 돼지(14%)와 비슷하다(같다). 두꺼운 체지방 탓에 시스템의 냉각 효율이 좋지 않아(개처럼 혓바닥을 내밀고 헉헉 대고 돌아다니면 체통이 구겨지니까) 샌들, 배꼽나시티, 그리고 나노미니 스커트를 입어야 하는 여자들은 그러니까 나름대로의 실용성과 합리성을 추구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체지방이 돼지같으니까. 노팬티도 그런 면에서 합리적이다. 합리적인 여자들은 여성에게 선택권이 별로 없었고 여성을 얻는 것이 투쟁이었던 시절에 만들어진 남성중심 사회에서 법, 질서를 이루었던 상호양해의 '전통'과 상충한다. 또한 합리적일 리가 없는 그들중 극히 적은 일부의 정신세계와도 상충한다. 그러니까 나노미니 스커트를 입는 여성 중 극히 적은 수는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거나 이중인격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굳이 나노미니 스커트가 아니더라도 전통과 근대를 조화시키고, 실용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면서 대뇌피질의 이상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 절충은 언제나 있어왔기 때문이다.

자유, 평등, 박애를 주장하는 프랑스에서 인권주의자들이 이민 온 아랍여성들에게 히잡과 부르카를 벗어던지라고 부르짖었을 때 그 갖잖은 '전통'과 '문화'를 들먹이며 히잡을 벗지 않은 여성들이 있다. 그들이 정말로 전통을 중시하고 이슬람의 원리주의 마초 또라이들의 문화를 찬미해서 그랬다고 여겨지나? 일부분 그렇긴 하지만, 히잡과 부르카는 익숙해지면 실용적인 옷차림이다. 그걸 뒤집어 쓰면 거리에서 자신을 숨긴 채 마음놓고 눈알을 굴리며 활보할 수 있다. 대다수는 가능하지만, 극히 적은 수의 여성은 소화할 수 없는 나노미니 스커트를 입고도, 땀으로 떡진 화장과 끈적끈적하고 못 생긴 얼굴은 어쩔 수 없지만, 히잡과 부르카라면 안심할 수 있다. 히잡과 부르카는 한국 여성의 변신술에 버금가는 실용적인 코스메틱스인 동시에, 적령기의 무슬림 남성이 제대로 짝짓기를 하려면 상대 여성의 펭귄복장으로 철저하게 방호된 신비스러운 외모보다는 좀 더 그녀의 언행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부수적인 효과다.

닥터 하우스 3시즌을 모두 봤다. 한동안 안 봐서 그런지 적응이 잘 안된다. 하우스가 저렇게 수다가 심했나? 세 바보 녀석들 뿐만 아니라 하우스 원맨쇼를 뒷받침해 주기 위해 동원된 갖가지 물건들, 그러니까 개성없는 조연들을 보니 물갈이할 때가 된 것 같다.

클로져 2기 시작. 처음 그 시리즈를 보았을 때 여주인공이 조지아 사투리로 간드러지게 '댕큐~'할 때는 우웁! 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댕큐~'가 심금을 울린다. 언젠가 실용적으로 써먹고 싶다.

이외수의 꿈은 주어가 없는 소설을 쓰는 것이다. 평단, 독자들로부터 쌍욕을 먹을 것 같으니 저 세상에 가기 전에 쓰겠단다. 잘 생각했다. 그가 '칼'을 출판했을 때는 작가로서 자신의 양심을 팔아먹는 것 같아 괴로웠다는 말을 했다. 작가는 본래 자신의 양심과 영혼을 마를 때까지 팔아먹어야 하는 존재다. 양심과 영혼을 덜 팔아서 덜 괴로워진 그의 글은 그래서 딱 그만큼 재미가 없어진 것이다.

슬픔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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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code

잡기 2007. 6. 11. 18:14
엊그제 모임에서 이씨 아저씨와 gps와 디지탈 카메라의 사진을 동기시키는 방법에 관한 얘기를 했다. gps의 tracklog를 디지탈 카메라 사진의 exif와 결합시키면 어디서 사진을 찍었는지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기본적인 아이디어다. 소니는 그런 용도의 장난감을 만들어 아이디어 상품으로 판매하는데 이씨 아저씨는 소니의 그 gps에 만족하지 않는 모양이다.

시간이 나면 exif와 garmin gps의 tracklog 데이터를 결합시키려는 프로그램을 짜려고 했으나, 이씨 아저씨 말대고 누군가가 그런 프로그램을 이미 만들었을 꺼라는데 동의하고 (실은 garmin의 인터페이스 프로토콜과 EXIF v2.0 규약을 보다가 만사가 귀찮아져서) 구글링을 해보니 바로 검색되었다.

검색 키워드 'google earth exif gps' 검색된 항목 중 Exif - Geocode photos for Google Earth or Maps. Geocode photos for ...로 들어가니 RoboGEO라는 프로그램이 바로 검색되었다.

1. EXIF 규약에는 GPS 좌표 정보, 이른바 geocode란 것을 삽입할 수 있도록 제안하고 있다.
2. 구글 어스의 KMZ 파일 포맷에는 웨이포인트, 트랙로그와 아울러 이미지를 임베딩할 수 있다.

저 두 가지를 만족시키면 내가 원하는 작업을 할 수 있다. 지오코드를 수동으로 작업한다는 것은 거의 미친 짓이니까 그것을 자동화하는 프로그램을 작성하거나 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RoboGEO는 그 두 조건을 만족시켰다. 더더군다나 별도의 작업없이 garmin gps로부터 트랙로그 및 waypoint 자료를 곧바로 다운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작업이 무진장 간단해 진다.

1. 자전거 탈 때 늘 gps를 켜 놓고 다니니 상관없고,
2. 돌아다니다가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고 집으로 돌아와
3. 디카의 사진을 PC로 다운로드 한 다음
4. GPS 리시버를 PC에 연결한 후
5. RoboGEO 프로그램을 실행하여 트랙로그를 가져온 다음
6. Google Earth 포맷인 KMZ 파일로 export하면 작업 끝이다.


시험삼아 1년전, 2006년 6월 10일 평창-영월간 자전거 여행을 예제로 roboGEO로 작업해 보았다. RoboGEO는 GPX(gps exchange format) 파일 import를 지원하기에 평창->영월 GPS Trackmaker file을 GPS TrackMaker에서 GPX 파일로 변환했다. 이게 작업 끝이다.


물론 Garmin GPS를 달면 메뉴에서 GPS 리시버로부터 곧바로 Tracklog를 다운로드할 수도 있다. 예전의 serial과 USB 인터페이스를 지원하는 최근 Garmin GPS를 모두 지원한다.


EXIF와 TrackLog의 동기에는 문제가 있다. 1. 카메라 시간과 GPS시간(원자시계)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으면 GPS 리시버의 고유 오차와 시간에 따른 이동 거리에 의해 누적된 오차로 인해 카메라를 찍은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2. 내 eTrex는 최적 조건에서 대략 15m의 오차가 나온다(이때 상공에서 잡힌 위성 갯수는 최소한 6개 이상). 만일 20kmh로 이동중이라면 20*1000/3600 = 5.5m의 오차가 더해지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두번째는 정지한 상태에서 사진을 찍으면 되니까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첫번째 문제를 해결하려면 카메라의 시각을 정확히 GPS와 일치시켜야 하는데, 매번 그러기는 어렵다. 반갑게도 RoboGEO는 카메라 시각을 gps와 동기시키는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KMZ 파일로 익스포트한 최종 산물 (753KB)(Google Earth가 설치되어 있으면 클릭하여 볼 수 있음). 푸른선은 주행경로. 노란 점은 waypoint. 유감스럽게도 GPS Trackmaker의 GPX 변환 버그인지 아니면 RoboGEO의 버그인지, Track이 엉망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GPS Trackmaker의 tracklog를 overlay한 화면. 카메라 시각과 일치시키지 않았으며, 정지상태에서 찍은 사진인데 오차가 15m에서 심하게는 600m까지 났다. 그래도 이 정도면 없는 것보다 낫지. (프로그램 안 짜도 되고)


RoboGEO에서 EXIF에 geocode를 삽입한 것. timezone을 지정하지 않았다. +9 하면 맞음.

앞으로 여행이 즐거워질 것 같다. 콩나물 지도 오버레이한 후 구글 어스에서 tracklog 만들기를 포함하여, 사실상 이것으로 GPS로 해볼 재밌는 일거리는 거의 해본 셈이 된다.

오랫만에 Garmin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eTrex H 시리즈가 2007년 3분기에 출시될 것 같다. 비록 SiRF III 칩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sensitivity가 상당히 향상될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H 시리즈는 미국 위성 뿐만 아니라 유럽의 갈릴레오 위성을 지원하는 것 같다. 그런데 갈릴레오 gps 위성 프로젝트는 예산 부족 문제도 있고 구심점이 없어 표류하고 있지 않던가?

아직은 새로운 GPS 리시버를 구입할 마음이 없다. 120$짜리 GPS로 벌써 5년은 울궈먹은 것 같다. 수신율이 떨어지는게 좀 안쓰럽지만, 업그레이드나 기변 욕구가 안 생기는 걸 보면 eTrex Basic은 명품이다.

* Wikipedia: Geocoded Photo
* 무료 Geocode S/W : GPicSy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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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quake

잡기 2007. 6. 10. 12:44

아버지는 사내다움을 입증하기 위해 총에 미치고 사냥꾼이 되셨다. 건축과 그림과 도예를 하는 예술가입네, 하는 분이. 강연이 있을 때면 나는 늘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다면, 그러면서도 호모가 될 용기는 없다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가장 못된 짓은 예술가가 되는 것입니다."

2001년의 조개구이 파티에서 나는 킬고어 트라우트에게 형과 누나가 사냥과 낚시를 부끄러운 일로 여기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세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했다. "배은망덕한 자식을 두는 것은 독사 이빨에 물리는 것보다 더 아프나니!"
트라우트는 독학한 사람으로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그런 그가 세익스피어를 인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좀 놀라웠다. 그 훌륭한 옛 작가의 말을 많이 암기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소, 동업자 선생. 인간의 삶을 단 한 줄로, 너무나 완벽하게 정의해서 그 이후로는 거기에 달리 덧붙일 필요가 없는 문장도 기억하고 있소."
"어떤 문장인데요, 트라우트 선생?" 내가 물었다.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사람은 배우일 뿐이다."


독무대 생쑈의 주연으로 살아가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현실의 생활에서 사람들은 변하지 않으며 자신의 과오로부터 배우는 것이 없고 잘못을 사과하지도 않는다. ... 하지만 내가 한 인물로 하여금 변하고, 뭔가를 배우고, 잘못에 대해 사과하게 하면 나머지 모든 출연자들은 할 일이 없어지고 만다. 그것은 결코 독자에게 쇼가 끝났음을 알리는 방법이 아니다. ... 나는 내 저작권 대리인에게 그 모든 인물들을 다 죽이지 않고 이야기를 끝내는 방법에 관한 조언을 구했다. 그는 주요 잡지의 소설 편집자였고, 어느 할리우드 스튜디오에 관여하는 스토리 컨설턴트이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야 손바닥 뒤집기죠. 주인공이 말에 올라 타고 석양을 향해 떠나는 거예요." 여러해 뒤, 그는 자신의 12구경 엽총으로 자살했다.


5년 전의 나는 이 세상에 볼 일이 더 없으므로 엽총이라도 구해서 시급히 저 세상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생이 다 그렇듯이 복잡한 사정으로 죽음을 맞지 못하게 되면 그것과 가장 흡사한 결혼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아팠지만 이제 나았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당신은 아팠지만 이제 나았고,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지금은 일곱 시이고, 바깥 기온은 화씨 32도, 섭씨로는 0도입니다"


드레스덴 폭격으로 영혼을 잃고 인간성에 대한 깊은 절망으로 인해 뒤틀린 우연의 세계를 묘사하게 된 보네것은 그의 글을 읽은 사람들 중 과연 몇 사람이나 시시한 기적과 시시한 사랑으로 이 세계를 영구적으로 변화시킬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지 않았을까? 또한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한없는 무능력에 절망하게 되었는지도.


가장 위대한 영화는 뇌가 반쪽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개같은 내 인생'이다. 두 번째로 위대한 영화는 '이브의 모든 것'이다. ... 나는 철학자다. 고로 나는 존재해야 한다. ... 이걸 기억해야 해요. 키스는 여전히 키스고, 한숨은 여전히 한숨입니다.


아팠지만 이제 나았고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래도 한숨은 여전히 한숨이다.


들어보라. 우리가 여기 지상에 온 것은 빈둥거리며 지내기 위해서다. 누구라도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말은 듣지 말라.


커트 보네것은 1997년 타임퀘이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소설을 쓰지 않았다. 2007년 봄에 죽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슬펐다. 만일 내가 회사를 차린다면 그의 모든 소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담아 회사 이름을 '딩동댕 테크널로지'로 지을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그는 자살한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이름을 딴 스위트룸에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여자는 과부였는데, 도망자는 그녀가 남편이 입던 옷을 가지러 간 사이 옷을 벗었소. 하지만 그가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경찰이 봉으로 현관문을 탕탕 두들겼지요. 그는 서까래 위로 숨었소. 그런데, 여자가 경찰에게 문을 열어 주었을 때는 지나치게 큰 그의 불알이 처진 채 공중에 훤히 드러나 있었소."
트라우트가 다시 말을 멈췄다.

"경찰은 여인에게 남자가 어디 있는지 물었소. 여인은 남자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소." 트라우트가 말했다. "경찰 하나가 서까래에서 처져 내린 불알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소. 여자는 불교 사찰의 종이라고 말했소. 경찰은 여자의 말을 곧이 들었소. 여자는 아버지가 늘 사찰의 종소리를 듣고 싶어 했노라고 말했던 거요. 경찰은 봉으로 불알을 쳤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소. 그러자 다시, 이번에는 훨씬 더 세게 쳤소. 서까래 위의 남자가 어떻게 비명을 질렀는지 아시오?" 트라우트가 내게 물었다.
나는 모르겠다고 했다.
"이렇게 째지는 소리를 질렀소. '딩동댕, 이 개새끼야!'"



딩동댕 테크널로지란다, 소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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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t of doom

잡기 2007. 5. 26. 22:54
paprikamovie.com 구하는 중.

스파이더맨 3 감상문: 집사가 정말 나빴다. 진작 말했더라면 멀쩡한 젊은이를 찌질이로 만드는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 나중에야 진실을 말하는 걸 보니 그 동안 급료 및 처우에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다.

젊은이는 팔자가 바뀌어 배트맨이 될 수도 있었다.

삼성 반도체에 예수 얼굴이 나타났다 -- 기사 밑에 달린 감동적인 리플: 에수 직업이 무슨 까메오냐? 그 밑에 달린 리플: 하이닉스 웨이퍼에서 사리 발견


저번 주에는 하늘공원에 애 데리고 놀러갔다. 해가 질 무렵까지 올림픽 공원을 빙글빙글 돌다가 올라갔다. 생각보다 석양이 얄팍하다. 일년에 한두 번쯤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석양을 구경했다. 그런데 매년 그런 석양을 같이 봤던 사람들이 기억나지 않았다.


석씨 말로는 내가 7년 전과 비교해 (외모가) 크게 변하지 않았단다. 환골탈태했다. 다섯 바다를 건너고 네 대륙을 지나면서 오덕함이 넘치던 고독한 책벌레 히키코마리에서 세월에 삭은 흰머리에 돛천 바지가 어울리는 개마초 사나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쟤는 왜 목이 없는거지? 카렌족의 목걸이를 구해서 달아 놓을까...


길고도 긴 길. 그래서 길은 길이로 말하는 길이 되었다. 길을 길이로 말하는 노래도 있다. 길에서 노래를 들었다. Sting, Shape of my heart (4:38) doesn't play for the money or respect, deals the cards to find a answer, sacred geometry of chance... spades are the swords of soldier, clubs are weapons of war, diamonds means money for this art, but that's not the shape of my heart. 길이 길이가 되는 것은 그 자의 영혼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club) 쇠꼬챙이에 찔리고(spade) 돈에 무너져 버릴 때다. 그 자와 달리 길을 본 후로 play, act, find answer를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유난히 비인간적이란 평을 듣던 내가 사람을 좋아하는 방법은 딱 한 가지 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가 읽는 글을 보고 그가 보는 것을 보고 그가 듣는 것을 듣고 그가 느끼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지금은 사정이 나아져서, 그의 상태가 좋아 보이면 좋아했다. 어쩌면 '내 딸애를 좋아하는 자식은 없애버리겠다'로 바뀔 지도 모르겠다. 석탄일에는 어린 시절의 철없던 나처럼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며 하늘을 손가락질했던 싯달타를 섬기는 절집에서 밥을 얻어 먹은 후 즐겨 피우는 담배 the one을 피워 물었다가 아내한테 욕을 먹었다. 한 가치 밖에 안 피웠다.


주말을 맞아 집에서 밥하고 아내를 먹이고 나니 할 일이 없다. 갈데가 없어 geocaching 사이트를 뒤져 네 개의 포인트를 gps에 저장해두고 자전거를 몰고 나갔다. 숲은 모두 다르다. 숲속의 공터(clearing)는 예로 부터 신성한 만남의 장소(bloody joint)였다. 짐승들은 공터를 두려워했고 사람은 숲을 두려워했고 호랑이는 근처에 숨어 잡아먹으려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좀 어설프게 흉내냈다(용들도 그랬다).


어린 시절 나는 많은 숲을 돌아다녔다. 오늘의 퀘스트에서 세 야산을 헤메다녔지만 보물은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급속한 문명화 탓에 숲길에서 흔적과 징후를 읽는 법을 제대로 몸에 익히지 못한 탓이다. 책은 감각을 둔하게 한다. 서생은 숲에서 길을 찾지 못한다. 별 일 없으면 숲에 들어간 서생은 죽는다.


흔적과 징후는 물론 보물을 찾지 못해 한심한 기분이 들어 자전거를 세워둔 곳에 쭈그리고 앉아 땀을 식히며 싯달타라면 아마 좋아했을 담배 the one을 피웠다. 숲속에서 마네킨을 보았다. 몸통은 강철 가시에 꿰여 있고 누더기가 된 옷가지가 찢어진 채 팔 다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여성 마네킨의 머리는 어디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전거 사진을 찍었다. 숲속에 정신병자가 왔다간 걸까? 마네킨이 난도질당한 숲을 향해 오줌을 누었다.


세번째 숲. 높은 나무들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진인사대천명 -- 제 할 일을 다하고 하늘에서 복이 떨어지길 기다려본다. <-- 이 기준에서 보자면 나는 필연적으로 복 받을 팔자다. 안 그런걸 보면 세상이 잘못된 것이다. 인연론으로 해석하면, 세상과 나는 안 맞는 것이다. 다른 세상은 맞을 지도 모른다. 특허 정리 좀 해달라길래 다섯 가지 항목을 만들어뒀다. 변리사를 만나 눈을 뜨고 나서 신청할 특허 갯수를 13개로 늘렸다. 모두 합하면 22개가 된다. 제 할 일 다했는데 하늘에서 복은 안 떨어지고 어쩌다가 이렇게 된거지? 신록이 이다지도 푸르른데, 앞으로 2주 동안은 망할 문서들로 정신이 없을 것 같다.


주행거리는 24km가 채 안되었지만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없는 수풀을 헤치면서 산길을 세 번이나 헤메고 나니 지친다. 이런 상황에서 하이데거라면 뭐라고 했을까. 신도 의지도 누구의 도구도 아닌 자유인의 오후 삽질 말이다. 힐튼 호텔 뒷편의 어느 산에서 외나무다리를 건너 길이 없는 덤불숲에 앉아 몹시 고독하게 담배 the lonely one을 피웠다. 네번째 망할 산이 남아있지만 벌써 오후 다섯시다. 집에 가서 마누라 밥해 먹일 시간이 되었다. 오늘은 골뱅이 소면을 만들었다. 마누라는 식사를 마치고 아이와 잠들었다.

오늘 대체 뭘 한거지?

매주 자전거를 탈 때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머릿 속에 도사린 채 전등빛을 좇아 나방처럼 펄럭이는 잡생각들을 길가에 흘리고 다녔을 뿐이다. 쓰시마 부산 사무소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에서 신청한 지도가 도착했다. 6월이 가기 전에 쓰시마 섬에서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캠핑을 하고 아무도 없는 해변에 누워 별 구경을 할 수 있을까?

부정적이다. 담배나 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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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0

잡기 2007. 5. 16. 15:36
2007/05/08 09:53:45am에 이 홈페이지의 블로그가 80000번째 카운트 되었다. 예상보다 10일 정도 빠르다. 8천번, 1만번, 2만번도 아니고 8만번에 호들갑을 떠는 이유는, 8자가 사람 인 자 모양을 닮았는데, 인간(사람과 사람 사이)은 공허하고, 공허하고, 공허하고, 공허하다 라고 해석한 것이 팔만이다. 이 블로그가 팔만 경구로 이루어진 팔만장경은 아니고, 이 홈페이지의 컨셉인 '인간관계 신경쓰지 않겠다'와 같다.

야... 웃긴다.
팔만번의 인간 관계가 이렇게 부질없다니.




실리콘 베어링 장착 후 주행테스트 목적으로 북악 스카이웨이를 관통하여 석계역을 거쳐 의정부로 가서, 송추계곡과 온릉을 거쳐 집으로 돌아오는 70km 짜리 주행을 해봤다. 대부분 오르막길이다. 그중 북악 스카이웨이 초입에서 팔각정까지 80m에서 280m까지 오르는 2km의 오르막 길이 압권이다.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어쩌면 베어링 탓일지도 모르겠다. 흡사 물살을 가르는 아웃트리거처럼 자전거가 부드럽게 진행한다. 평속이 1-2km쯤 늘어난 것도 같고.

의정부의 어느 뒷골목 중국집에서 2500원짜리 짜장면을 먹었다. 짜장면이 2500원 짜리가 있었던가?

주행 4시간 20분, 최속 48kmh, 평속 16kmh가 나왔다. 석계-의정부 자전거 도로 구간은 평속 28kmh를 유지했다. 뒷바퀴 베어링까지 갈면 아이스링크의 하키 퍽처럼 부드럽게 움직일 것만 같다.


지난 3년 동안 자전거로 돌아다닌 서울 근교의 대략적인 gps point. 서울 남동부를 제외하고 꽤 넓은 지역을 돌아다닌 셈이다.

Alastair Reynolds의 Century Rain을 대략 1주일 걸려 읽었다. 출퇴근 시간에 읽었으니 하루 3hrs씩 7d = 21hrs. 500p / 21hrs = 23 page/hr. 한글책은 대략 100 page/hr이니까 다섯배 느린 것 같은데, 1p당 글자 밀도는 영문소설이 한글에 비해 2.3배 정도 높은 편이니까, 실질적으로 영문소설 읽는 것은 한글소설에 비해 2~3배 정도 시간이 더 든다고 볼 수 있다.

센츄리 레인의 주인공은 Verity Auger, Floyd란 형사다. 레널즈가 쓰라는 하드SF는 안쓰고 탐정 소설 비슷한 걸 써 놨다. 그래서 Auger양은 유감스럽게도 A4 용지 두께 정도의 얄팍한 개성을 지니게 되었다 -- 종잇장처럼 평평한 개개 인물들의 개성 때문에 그들이 흡사 MMORPG의 MOB들 같아 보였다.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스타게이트, 그렉 이건의 쿼런틴 + 다이슨구, 해밀턴식 외계문명, 나노테크널로지, 싱귤라리티, 마이 마인드 이즈 유어 마인드, 레리 니븐의 링월드,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속에나 등장할 것 같은 고루한 탐정 등등 이것 저것 하도 많이 섞은 '존슨탕'으로 배경 설정에 100p가 들었고 전개와 진행에 300p 이상을 소비하다가 마지막 100p는 우주활극으로 마무리 지었다.

줄거리는 이렇다. 지구는 nanocaust로 쫄딱 망했다. 지구온난화 때문에 날씨가 엉망이 되자 나노테크로 날씨를 어떻게 좀 해보려다가 지구를 거대한 나노 슬러지 덩어리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인류의 대부분이 멸종했고 일찌감치 우주로 나간 사람들중 일부는 지구권 궤도면에 Tanglewood란 흡사 니븐의 링월드처럼 생긴 곳에 주로 거주한다. 우주인은 두 부류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러다이트처럼 나노테크를 거부한 Thresher와 나노테크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신체를 완전히 변화시킨 불사신에 가까운 Slasher가 있다. Slasher는 다시 두 부류로 나뉘어 쓰레셔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과 공생을 추구하는 moderator와 이왕 이렇게 된거(지구가 쫄딱 망한거) 갈데까지 가보자는 aggressor가 있다.

23세기 무렵 Thresher는 Slasher와의 화성 쟁탈전이 끝난 후 화성의 달에서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지구2(Earth 2)와 연결된 wormhole을 발견한다. 슬래셔는 이전부터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우주 여기저기 만들어놓은 웜홀에 관해 알고 있었지만 1949년 지구의 양자상태를 통째로 스냅샷으로 찍어놓은 지구2로 통하는 웜홀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몰랐던 것으로 추측된다(Thresher들 생각으로는). Thresher는 지구2를 탐사중이었는데 탐사원 white양이 지구2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발견하고 그것을 알리려다가 의문의 사고사를 당한다.

남편과 아이들을 팽개치고 전 세기의 지구 유물 탐사에 미쳐 지내던 고고학자 auger양은(사실 제대로만 묘사했다면 꽤 싸가지 없을 인간형이다) 탐사중 연구원이 사고로 죽은 후 별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지구2로 가서 학계에서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white양이 죽은 후 남긴 유품을 접수하러 간다.

레널즈는 첫 100p에서 이딴걸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슬래셔와 쓰래셔의 오래된 분쟁과 슬래셔의 기술적 진보를 현란하게 묘사했더라면 좀 더 높은 집중력을 가지고 볼 수도 있었지만, 별다른 역할 없이 그냥 이곳 저곳에 감초처럼 끼어 부댓자루처럼 끌려다니는 Floyd란 20세기 형사와 20세기 파리의 모습에 지나칠 정도의 애정(집착)을 보인다. 쓸데없는 대사와 불필요하게 장황하고 너저분한 얘기를 없애고 지구2의 정황을 사건과 끈적끈적하게 연결했더라면 꽤 재밌는 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아서 죽도 밥도 아닌 소설이 되었다. SF의 여러 가젯을 늘어놓다가 수습이 안되니까 그의 장기인 우주 추격전으로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렇게 해서 그다지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aggressor들이 지구2를 뽀작내려는 나름대로의 '철학'이 작가 스스로도 별볼일 없는 헛소리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key person인 나이아가라를 죽여버린다. 정말 성의 없다.

악평을 늘어 놓았지만 최근에 읽은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의 첫번째 번역작품과 비교해 보았을 때, 현저한 차이가 눈에 뜨인다. 심하게 말해 마일즈의 전쟁은 희박한 SF적 설정을 제거하면 무협지와 별반 차이가 없는 반면, 센츄리 레인은 설정 자체가 극을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자 진행의 핵심이 된다. SF같기도 하고 SF가 아닌 것 같기도 한 것과 SF와의 차이가 그럴 것이다. 아쉬운 것은 누군가 레널즈 옆에서 '그렇게 써서는 안된다'고 코치라도 한 것인지(서사가 중요하다고 우기는 인문학 닭대가리 편집자겠지) 하드SF가 나올만하면 툭툭 끊어지고 서둘러 묘사를 마감해 버린다. 레널즈의 가장 큰 장점이 그렇게 사라졌다. ALS의 물리적 속성이나 실버웨어(나노머신), 웜홀 물리학, 정말 끝내주는 슬래셔 우주선 그런 것 하나만 가지고도 소설 써서 밥벌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센츄리 레인에는 그런 가젯들이 무려 수십 개가 쏟아져 나오고 레널즈 나름의 독특한 해석도 있다. 레널즈가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우려먹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오덕함으로 극소수에 불과한 하드SF팬으로부터 격찬을 받기 보다는 남들 다 읽는 소설을 쓰려고 한 것이다.

국내에서 (희망적으로 보았을 때) 5명 미만의 사람들이나 읽을 부류의 소설이라 스포일러 경고는 무의미하다. 평면적 인간형과 단순한 서사구조 때문에 상받을 소설로서는 글렀고 하이테크 면에서도 기대보다 수위가 낫다.

2/3쯤 읽었을 때, 설마 이거... 믹스견이 똥먹는 얘기로 끝나는 거 아닌지 하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수확체감과 달리 예술적 고양감 또는 앱솔루션에 대한 감각은 어쩌면 드물게 나타나는 저주일지도 모르겠다.

하여 교훈은 이렇다:

1. 송충이가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 갈잎 먹으면 죽는다.

2. 황새가 뱁새 흉내 내면 다리가 꼬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널즈의 pushing ice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갈증 때문이다. 하드SF에 대한 심한 갈증. 로빈슨은 그의 대표작인 화성 씨리즈가 아닌 '쌀과 소금의 시대'가 번역되었다. 케이트 빌헬름, 이 작가 글 잘 쓴다. 그런데 내 취향은 아니다. 엘리자베스 문도 번역되었다. 마일즈 보르코시건, 이건 그냥 무협지 읽듯이 '평범한' SF설정에 스토리를 즐기는 페이지 터너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도 번역되었다. 한국 출판시장은 정말 도깨비 시장 같다. 어디로 튈지 예측이 안 된다. 아너 헤링턴, 보르코시건도 나왔는데 old man's war나 reality dysfunction같은 것이 못 나올 이유도 없다.

논의와 숙고가 끝났으니, 이제는 막가는 SF로 즐길 때가 아닌가!

SF들이 줄줄이 번역되고 있지만 하드SF는 없다. 앞으로도 없을 전망이다.

Q: 왜 여성 작가들은 제대로 된 하드보일드를 못 쓰는 것일까?
A: 그들 중엔 맛간 또라이가 없으니까

미드 Travllers는 이제야 나오는 건가? 졸업을 앞 둔 두 젊은이가 배낭여행을 시작하자 마자 괴상한 사건에 휘말리는 얘기다. 작년에 파일럿을 보고 살짝 땡겼다. 1월중 방영 계획이 밀려 5월이 되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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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ke maintenance

잡기 2007. 5. 12. 16:34
자전거 정비를 위해 무려 4만 8천원 어치의 부속을 구입하고 마누라의 핀잔을 견뎌냈다. 오랫동안 망설였지만 새 자전거를 사면 정비의 기쁨을 영영 누리지 못할 것 같아, 이 자전거가 썩어버릴 때까지 유지보수를 해가며 타자고 결심한 것이 요 몇주전이다. 그 보다는 구매시 사은품이 네 가지나 된다. 주저없이 구매했다.


일단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체인 청소를 하기 위해 자전거 체인 분리.


아침에 주유소에 가서 1000원어치 백등유를 사왔다. 체인을 PET 병에 넣고 열심히 흔들어주니까 체인에 낀 먼지,때,기름이 새까맣게 올라왔다. 그동안 이렇게 청소하지 않았던 것은 체인 링크가 없어서 였는데 이번에는 인터넷에서 체인 링크를 샀다.


체인을 녹이는 동안 공구를 늘어놓고 다음 작업 준비를 했다. 자전거 정비에는 적합하지 않은 너무나 단촐한 도구들. 제대로 된 공구를 사고 싶어도 공구들이 워낙 비싸다.


앞 바퀴 분리.


볼 베어링 분리. 저번주에 정비한 것인데도 하얗던 그리스가 회색이 되었다. 캡 틈새로 스며드는 먼지와 베어링이 마찰하면서 갈려나간 것 같다. 최근에 앞바퀴의 구동에 미세한 언밸런스가 느껴지곤 했다.


깨끗이 닦아낸 베어링 홀. 카트리지 방식이 아니라서 수분과 먼지의 침투에 취약하다.


진주처럼 반짝이는 저것은 이번에 인터넷으로 구입한 4.6mm 짜리 일제 실리콘(질화규소) 베어링. 22개에 무려 14000원이나 한다. 강철 베어링에 비해 열에 의한 변성에 강하고 충격, 내마모성등의 특성이 우수하다.


앞바퀴에서 분리해 잘 닦아놓은 원래의 강철 베어링. 베어링은 완전한 구체가 아니라서 약간의 마무리 흠집이 있는 것이 정상인데, 그래도 심하게 닳았다. 평평한 곳에서 손가락으로 베어링을 굴려보면 우둘두둘한 것이 느껴진다. 이래서 앞바퀴에서 요동이 느껴졌다.


그리스를 듬뿍 발라 실리콘 베어링을 박았다. 앞바퀴 조립을 끝내고 구름성을 테스트 해 보았다. 실제 주행이 아닌 무부하 상태에서 앞바퀴를 힘차게 돌리면 강철 베어링일 때 26회 회전한다. 실리콘 베어링은 30회 회전했다. 무부하 상태에서는 별로 대단한 의미가 없는 성능차다.

흠... 내충격, 내마모, 내부식성 등의 테스트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요즘 한번 자전거 탈 때 보통 60-80km 정도 타니까 비가 오나 황사가 부나 2-3개월쯤 타보고 앞바퀴를 뜯어보면 되겠지.


앞바퀴 조립을 끝내고 폴리와 뒷바퀴 프리휠을 깨끗이 닦은 후, PET 병에 넣었던 체인을 꺼냈다. 찌든 때가 말끔히 벗겨진 상태다. 그전에는 WD-30같은 디그리져로 30분 넘게 땀나게 닦아대도 깔끔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체인의 한쪽 핀을 빼놓은 상태. 뜯은 김에 체인 길이를 체크할까 하다가 말았다. 자전거를 계속 타면 체인이 조금씩 늘어난다. 어느 정도 늘어나면 체인을 통째로 갈아줘야 한다. 그런데 내가 무슨 산악 자전거를 타는 것도 아니고 고작 3년 탄 것으로 강철 체인이 늘어나봐야 얼마나 늘어났겠나 싶다.

추가: 나처럼 타고 다니면 많이 늘어난단다. 잴 필요도 없이 체인 갈라고 한다.


체인 분리 도구. 제작년에 2만5천원 주고 산 시그마 툴이란 핸디툴에 붙어있는 것으로 한번도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connex의 chain link. 독일제 부품으로 하나에 무려 6000원이나 한다.


조립전 체인 링크의 결속을 시도해 봤다. 체인링크는 체인 분리를 신속하게 해 주는 것이다. 체인을 닦고 정비할 때 아주 좋다. 결속된 체인링크를 직각으로 세워서 비틀어 밀면 체인이 분리된다. 체인이 분리되면 펑크난 바퀴의 수리도 편해진다.

체인 링크가 사랑의 하트 모양이다. 정비도 편해지고 여자애들도 좋아하지 않을까?


기어에 체인을 걸치고 체인 링크를 결속했다. 그런데 저 방향이 맞는지 궁금하다. 매뉴얼에 설명이 없는 걸로 보아 방향성은 없는 것 같은데, 어느 바이크 사이트에서 체인링크를 역방향으로 결속하면 체인이 튀는 현상이 있다던데... 뭐 분리가 쉬운 편이니 타다가 그런 현상이 나타나면 역방향으로 끼우면 되겠지.


폴리 역시 완전분해하여 정비했다. 너무 깨끗해서 눈이 부실 지경이다. 누가봐도 3년 막 굴러먹은 자전거 같지가 않다.


프리휠도 깨끗이 닦은 상태. 부엌데기 신데렐라나 팥쥐도 이렇게 깨끗하게 닦지는 못할 것이다. 체인에 녹이 잔뜩 묻어 있는 것은 작년인지 제작년인지 제주도 갔다가 바닷바람과 비를 맞아 녹이 슨 것이다. 그때 자전거 정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후회수럽다.

체인에 테프론 오일을 먹였다. 부품살 때 사은품으로 받은 벨을 달았다. 파우치도 하나 달았다. 각종 케이블의 떨어져나간 케이블 캡을 달았다. 패들의 헐거운 부분을 조였다. 케이블 와이어에 기름을 먹였다. 휠의 림을 조절했다. 변속 장치를 정비했다. 안장을 완전히 고정했다.

갑자기 비가 내려 허겁지겁 마무리지었다.

완전 조립 후 차체를 둘러봤다. 거의 5만원이나 들여서 부속을 갈고 공들여 손을 봤지만 꾀죄죄한 자전거의 모습은 변화가 없다. 그 누가 봐도 업그레이드한 티가 안 날 것이다 -_-

뒷바퀴의 베이링도 갈고 싶지만 베어링이 너무 비싸서 다음 기회로 미뤘다. 앞바퀴의 베어링 교체는 메이저 업그레이드에 해당한다. 성능향상은 미미하다. 엄청난 기름때를 묻혀가며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거의 세 시간을 공들여 정비를 하고 그다지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

돈 들이고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데 왜 했냐고? 그야, 비 내리는 한가한 토요일 휴일을 때우는데 자전거 정비만큼 좋은 것이 없을 뿐더러, 아무도 관심없는 가운데 마누라의 핀잔을 들어가며 돈, 시간, 열정을 쏟아 부어야 제대로 된 취미생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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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phalos

잡기 2007. 5. 6. 01:00
사람들에게 잘 못하는 것은 그들을 위로하고 기운을 북돋아주고 다독여주는 것이다. '어렵더라도 조금만 더 참고 기운내 홧팅' 보다는, '기운내 병신아' 쪽이 더 가깝지 싶다. 케세라세라다.

최근 읽은 어떤 신문기사에서 '행복학'의 권위자가 주장하길(행복학에 권위가 있다는 것이 다소 수상쩍지만 신문은 늘 오버하고 연구자는 겸손했다) 행복의 본질은 '행운' 그러니까 '운명'에 가깝단다. 그러면서 happyness의 원형이 'happens'라나? 거봐라, 졸라 연구해봐도 행복=로또같은 것이다 라는 내 지난 일 년간의 주장과 다른 점이 없지.

덕,진,지,의,명,화,애.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글자들이다. 이 글자들은 모두 하나의 글자로 수렴한다. 전. 돈이 있으면 베풀 수 있고, 거짓없이 살 수 있고, 사교육도 할 수 있고, 어려운 친구에게 보태줄 수도 있고, 찰스 시모니처럼 우주여행을 할 수 있고, 업수히여김을 당하지 않고 조잔한 것들로 고뇌하거나 싸우지 않게 된다. 사랑은 돈 주고 사면 된다. 물론 돈이 없을 때에도 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글자들이지만 황금빛이 반짝여야 비로서 진가가 발휘된다. 이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중국인들은 정말 대단하다. 이런 중국인들과 싸워서 이길 생각을 하지 말고 동반상생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중국은 정말 대단한 나라다. 동반상생은 중국인들에게 무례한 표현인 듯 하니, 어떻게 꼽사리라도 끼어서 개평이라도 받아먹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중국인들을 본받아, 계산과 이치에 밝아지자. 운명을 극복하는 또다른 행복의 갈랫길이다.

예전에 술자리에서 요즘 공학도들이 지구의 반지름이 6300km쯤 되는데 위도 30도에서 지구의 둘레가 어떻게 되는지 학교에서 12년씩이나 배운 간단한 계산도 못한다고 개탄하다가, 거기 앉아 있던 프로그래머들이 그걸 계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젠장 실수했군 했던 적이 있다. 비슷한 실수를 최근에 다시 한 번 했다. 아무 도구 없이 지동설을 입증해 보라고 했다. 정말 꼬질꼬질하게 입증해 보라는 얘기가 아니라 과학적 프로세스와 기본적인 개념을 알지 못하면 과학적으로 입증된 가설이나 이론들이 사실상 종교적 도그마나 이데올로기와 같다는 것을 반증하기 위해서였다. 과학 역시 맹신과 종교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놀라운 것은 지동설을 입증하기 위해 사실상 필요한 무척 다양한 지식과 방법론을 대개가 학교에서 이미 배웠으며 인문계나 이공계, 상경계 이런 전공선택은 그런 것과 무관하며, 70년대 이후 출생자 거의 전원이 교육을 받았는데(일부 불우한 청소년이나 비행 청소년은 빼자. 그런거 지적하는 양반들 귀찮다) 흡사 MIB에게 집단최면 시술이라도 당한 것처럼 아예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별 보면 아무 생각 안드는건가? 구닥다리 그리스, 그러니까 오랑캐 설화밖에 생각 안나나? 그저 좋아?

굳이 이런 얘기를 찌질스럽게 늘어놓는 까닭은, 생각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어, 얼마 전에 교보문고의 아동도서 코너에서 과학 관련 어린애들 교재를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서 였다; 이런걸 창의력, 사고훈련이라고 하는건가? 팩트 나열에 지능개발 수준인 이런 것들이 어떻게 창의력과 유연한 사고방식하고 연관이 되는거지? 특히 유연한 사고는 일정 정도의 지식의 폭발적 결합과 유추에 의존하는데, 훈련한다고, 익숙해진다고 습득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지금껏 함께 일한 프로그래머중 열에 아홉은 프로그래밍에 대한 감각을 타고난 사람들이 아니다. 그건 집단 최면이 아니라 대다수의 인간은 받아들일 수 없거나, 흥미가 없는 변태적이고 소수자적인 두뇌의 이상에 기여한 돌연변이 탓이 아닐까 싶다.

* 과학적 소양은 충분한 훈련과 학습에 의해 배양될 수 있다.
* 과학적 소양을 오랫동안 갈고 닦은 이런 재원은 시다바리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 아이디어는 자신의 비상식적이고 변태적인 재능을 감추고 기구하게 살아야 하는 소수자 찌질이들이나 내는 것이다. (드디어 내가 케세라세라 철학의 중심을 가닥 잡은 것 같다)

[MTBing] 서울 한복판 북악산 넘나들기 -- 서울시내에서 자전거를 몰고 가다가 길을 잃고 이 길을 지나간 적이 있다. 그때는 몰랐는데 기사를 참고삼아 시내 지도를 쫓다보니... 허걱. 나는 작년 9월쯤 그곳에서 야간 라이딩을 했다. 길을 잃고 헤메다보면 선구자가 된다.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의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 1권 '마일즈의 전쟁'이 최근에 출간. 어둠의 속도, 쌀과 소금의 시대 등 한동안 잠잠하다가 SF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마치 설사똥 싸듯이?


애를 업고 인근 산(인근 산이라봤자 북한산 밖에 없지만)의 공터에 올라가 1/3쯤 읽었다. 이렇게 쭈그리고 앉아서.

코믹 밀리물로 개마초 하드보일드하고는 거리가 좀 있었다. 아예 작정하고 개그물로 만들 생각이었던 듯, '마법사의 제자'를 차용한 듯한 구성으로, 문제아가 문제를 봉합하려다 문제를 눈덩이처럼 즐겁게 키워놓고 좌충우돌하다가 황당하게 해소하는 방식이다. 죽을 사람은 죽이고 불가항력은 적당히 방치한다. 비슷한 포맷의 소설을 여럿 읽어서인지(단지 SF라는 차이만 있을 뿐) 양식과 구성이 식상하지만, 서양 SF무협지같은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를 즐기는 다른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재밌게 완샷에 읽었다. 머리가 좋은 곱추 병신이 정상인 병신들 틈에서 삐대지 않고 정치적 완급을 배워가는 성장소설로 이 소설의 뼈대는 '적을 기습하기 위해 괴성을 지르며 돌격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면 넌 당혹한 표정으로 '아니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를 외치면서 죽어가겠지."
"아니,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이반이 분개한 어조로 말했다.


바보를 이렇게 바보같이 묘사하는 건 좀 마음에 안 드는데? 라고 생각하다가, 아! 바보는 바보같이 묘사하는게 맞구나. 하고 고개를 끄떡였다. 요즘은 정말 머리가 안 돌아간다.


자전거 타고 싶은데...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올림픽 공원까지 가려 했다. 오후 3시 30분이라 너무 늦어 집에 돌아와 얌전히 낄낄거리며 부졸드의 책을 마저 읽었다.

안 팔려서 재고 떨이로 내놓은 책같은 인상을 주는 레널즈의 century rain을 읽기 시작. 5$짜리 하드커버라니... '하드SF 취향'은 피골이 상접한 소아에 기형적인 성애를 보이는 것만큼이나 비일상적, 변태적, 소수자적 '취향'(말이 취향이지 범죄)인지라 그런 책을 읽거나 그런 책이 시장에서 팔리는 것은 심지어, 비윤리적이지 않을까?

비윤리적이라도 하드커버는 좋다,
큼직한 글씨와 손에 착 감기는 질좋은 그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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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per

잡기 2007. 4. 30. 20:40
나이트 빌드 시스템과 하루 단위 소스 백업, 소스 리포지타리, 버그 트래킹 시스템, 게시판과 공개 자료실, 다큐멘테이션 웹 등, 돌이켜보면 없는 게 없는 개발환경이고 대부분 자동화되어 있지만 정작 쓰는 사람들이 게으르니 효율이 올라가질 않는다. 대략 한 달 동안 코로 숨을 쉰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보냈다. 흥행에는 매 번 죽을 쑤면서도 여러 예쁜 여자 배우와 잠자리를 함께 하였다는 김기덕 감독의 주장에 따르면, 코로 숨을 들이 쉬면 반드시 내쉬어야 한다. 들이키고, 내쉬고, 들이키고, 내쉬고.


경고문이 심금을 울렸다.

그럼에도 시간은 벌레처럼 기어간다. 깡총깡총 뛰면서, 타키온을 입에 물고. 시간의 속성을 이해한다고 시간을 마스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간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간 벌레가 지나갈 때 제대로 작별인사를 못하고 지나간 벌레의 뒷모습과 n+1차원이 남긴 n차원의(보통은 왜곡된 3차원의) 스냅샷 또는 그림자를 멀거니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간을 아쉬워한 적이 없다. 멍청할 때라야 비로서 행복해진다는 것은 위대한 진리다. 두개골을 비우고 인식하는 자아를 버리면 시공간은 축퇘(collapse)된다. 방법을 알았으니까 언젠가 번쩍이는 시간을 잡아 맛있게 구워 한 입에 삼킬 것이다.

planet earth: 지구 온난화로 북극의 얼음은 해마다 녹아간다. 달리 말해 지각있는 북극곰이라면 털갈이도 하고 식생활 개선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북극 최강의 생물체임에도 멸종한다. 태어난 것부터 실수일 가능성이 높은, 평생 실수를 통해 시시콜콜하고 하찮은 것들을 '배워가는' 인간의 힘으로 지구온난화를 되돌릴 수 있을까?

글쎄...

2족 보행의 진화적 증거라고 하기엔 미심쩍은 아이의 행동양식: 아이에게는 자기를 업은 부모가 앉아있는지 서 있는지에 관한 확실한 감각이 있다고 믿어진다. 다섯시간 동안 7.5kg짜리 아이를 업고 서성이는 것이 쉽지 않다. 흡사 배낭여행하던 시절 버스표를 구하기 위해 7kg짜리 배낭을 매고 오전 한나절 시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아우토부세스 떼르미날을 찾아 파김치에 땀범벅이 되도록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조용한 배낭은 참아줄만 하지만 이 배낭은 다섯 시간 동안 50dB로 울어댄다는 점이 다르다.


그래서 누워있을 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지는 염세적인 표정을 짓는다. 팔을 벌리고 악을 쓰면서 '안아달라'를 자기만의 언어로 말한다. 우에에에-- 외계인이 따로 없다.


누가 봐도 남자애같은 이 아이를 업고 삼일을 인근 야산에 데려가거나 도심을 가로질렀다. 아줌마가 업고 있을 때는 자리를 내주지만 내가 업고 다닐 때는 선뜻 자리를 내주는 사람이 없다. 겉보기에는 똘똘해보이지만 뉴런들이 덜 연결된 상태. 말하자면 두뇌가 파충류 수준.


안녕 소울이 페스티발(Hi Seoul festival)이 서울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마누라는 3일 동안 교육 받으러 가고 나는 금요일 하루 사무실에 나가지 않고 애를 봤다. 애 보면서 프로그래밍하려니 거의 미칠 지경이다. 소울이 눈물로 뒤범벅된 '눈물의 코딩'이었다. 둘째날은 시궁창 버전 3.0인 청계천에서 일없이 오락가락했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상쾌한 개울이란 컨셉은 빌딩 스카이라인과 인간과 개울로 이루어진 3층밥처럼 마음이 소화시키지 못하는 부조리한 식사처럼 느껴진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그렇게 부자연스럽지 않은데 말이야... 비자연스럽다고 해야 하나?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데 꼬집어서 뭐라 말 못하겠다.

생각났다.

너절하다.


세째날에는 북촌에 갔다. '조선시대 재현'이라고 하더라. 흙먼지 날리는 애들 놀이터라서 사진을 안 찍었다. 조선시대 재현은 무슨 얼어죽을... 조선시대 주막, 기생집 재현 같은 것은 왜 안하는 거야?

이렇게 3일동안 애를 짊어지고 다니며 개고생을 한 덕택에 아내가 시험에 붙었다. 이것이 바로 내조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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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희는 수확체감의 법칙을 알고 있을까? 어린 시절에 별에별 걸 다하고 나면 성인이 되어서는 정작 할만한 게 없어 입맛을 다시며 좀 더 강한 것을 원하게 되는 것이 수확체감이다. 수확체감은 인간적이며 생물학적이다. 버지니아공대에서 어떤 아시아인이 33명을 쏘아 죽였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그럴만한 정신병력이 있는 인종이 누굴까, 평소 별 일 없으면 냉소와 결벽을 밥에 비벼 먹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눴는데, 일본인은 기가 약해서 안되고, 중국인은 체면과 계산 빼면 결단하고 행동하는 자아가 부실하고, 그래서 한국인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미친짓은 동아시아에서 한국인이 단연 으뜸이다. 그런데 중국인이란다. 그 다음날 범인은 한국인 영주권자(legal alien)로 밝혀졌다.

빙고.

우울하고 고독한 어린 시절과 맛간 눈동자, 평소 미친 행동 따위로는 33명을 죽인 연쇄살인마를 동정해서는 안된다.

드레스덴 파일, 레인즈, 킬러 본능. 최근 보는 미드. 모두 형사 드라마.

인생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지만 가끔 재밌는 영화를 보기도 한다. Children of Men은 몇 년 만에 보는 제대로 된 SF다. 형태는 오메가맨과 비슷하지만 좀 더 디센트하고 표현방식이 세련되었다 -- 양미간을 찡그리거나, 어깨에 힘을 주지 않았다. 디스토피아 분위기(망할 지구)가 수준있다. 심지어 킹 크림슨의 음악도 나온다. 얼마 후면 개봉할 '선샤인'을 기다리는 중. 5월에 스파이더맨 3을 imax로 보는 것은 어떨까? 직원들 데리고 가서.

미증유의 안개 속에 나타난 tommorow호와 쪽배에서 흔들리는 아이, 아이 엄마, 그리고 시체 한 구를 마지막으로 영화를 다 보고 라면을 끓여먹은 다음 우중충한 주말이지만 자전거를 탔다. 50km, 2h30m. 평속 20kmh. 내리막길에서 최고 속력 58kmh. 일반 도로 주행에서 대체로 양호한 결과. 3년째 자전거를 탄다. 총 주행거리가 2000km를 넘은 것 같다.

자전거를 최근에 정비해 보니 볼 베어링을 교체해야 할 것 같다. 베어링들의 한 면이 닳고 전체적으로 찌그러졌다. 이왕 교체하는 김에 세라믹 베어링으로 갈고 싶어 이리저리 알아보는 중. 일제밖에 없구나. 또, 체인링크도 필요하고. 브레이크 림도 교체해야 할 것 같고. 디스크 브레이크로 교환하는 건 돈이 너무 들겠지만 뒷 브레이크에 말굽은 달고 싶고, 오일과 그리스가 다 떨어져가고. 전조등은 수리가 필요하고. 자전거를 바꿀까? 적어도 80만원 가량 하는 full deore급 자전거 정도는 타줘야 하는 것 아닐까? '블러드 트레일'이란 시시한 자전거 공포 영화를 봤다. 쓰레기같은 영화지만 연쇄살인마와 주인공이 정말 좋은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닌다. 의정부 근처에서 자전거를 세워놓고 여기저기 살펴봤다. 때에 찌든 프레임, 먼지를 먹고 모래에 갈리고 늘어난 체인, 시꺼멓게 기름때가 먹은 흔적들... 수많은 상처들...

처음 구입했을 때보다 자전거가 현저하게 상태가 나빠졌음에도 주행성적은 점점 좋아진다. 이럴때 좋은 자전거를 타면 평속 25~30kmh가 무난히 나올 것 같다. 평지에서 28kmh를 1시간 정도 유지할 수 있다. 철제 MTB(MBT라고 한다)가 나를 추월하는 일은 없다.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강변에서 자전거를 타면 평균 1-150대 가량을 추월했다. 그다지 좋은 성적은 아니다. 자전거 도로에서 나를 추월하는 사람은 평속 30~35kmh 정도 된다. 언덕에서는 힘이 많이 든다. 그럴 때마다 좋은 자전거 생각이 났다. 좋은 자전거와 꾸준한 트레이닝이면 2시간 30분 동안 꾸준히 평속 30kmh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평속 상승폭이 대략 4-6kmh 차이지만 하루 8시간을 타는 자전거 여행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새 자전거를 구입하지 않고, 지금 자전거로 1시간 동안 평속 30kmh를 해 보기로 했다. 접속사가 이상하군.

정품 개마초는 기계 탓을 하지 않는다. 이 기계를 속속들이 이해할 때까지, 망가질 때까지 타자. 잘 안나가는 자전거를 타야 비로서 운동이 되는 것이다.

정선행 레포츠 기차여행이란 상품이 있다. MTB를 기차에 싣고 정선에 가서 서너시간 정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기차타고 돌아오는 4만원 가량의 패키지다. 한번 가볼까?

사유 역시 수확체감의 원리를 따른다. 자꾸 생각하다 보면 식상하고 재미 없어지는 것이다. 예전에 온라인 여기저기에 나돌던 프랑스 고졸 시험 문제라는 것. 대부분 간단한 O,X 문제같다. 수확체감을 경험한 순정 개마초는 이런 시시콜콜한 (생활 폐기물 같은) 문제에 구질구질하게 일일이 설명을 달지 않는다.

1장 인간(Human)

질문1-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x
질문2-꿈은 필요한가? x
질문3-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x
질문4-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인가? x
질문5-관용의 정신에도 비관용이 내포되어 있는가? o
질문6-사랑이 의무일 수 있는가? o
질문7-행복은 단지 한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인가? x. 희망이나 행복류의 자기만족, 자기기만이 지속되는 이유는 자아가 있기 때문
질문8-타인을 존경한다는 것은 일체의 열정을 배제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x 질문이 이해 안감
질문9-죽음은 인간에게서 일체의 존재 의미를 박탈해 가는가? x
질문10-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나? o
질문11-행복은 인간에게 도달 불가능한 것인가? x

2장 인문학(Humanities)

질문1-우리가 하고 있는 말에는 우리 자신이 의식하고있는 것만이 담기는가? x
질문2-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o
질문3-철학자는 과학자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입 다물고 있어주면 방해는 안될 것이다.
질문4-역사가는 객관적일 수 있는가? x
질문5-역사학자가 기억력만 의존해도 좋은가? o
질문6-역사는 인간에게 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 의해 오는 것인가? 후자
질문7-감각을 믿을 수 있는가? ox
질문8-재화만이 교환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x 서로 주고받는 증오는 그 값어치를 형언하기 어렵다.
질문9-인문학은 인간을 예견 가능한 존재로 파악하는가? x
질문10-인류가 한 가지 언어만을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o

3장 예술(Arts)

질문1-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운가? x
질문2-예술없이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가? o 부연: 이런 얘기를 늘어놓는 에고이스트들은 대개 대칭성과 패턴, 자연에 편재한 (수학적) 아름다움을 접해본 적이 없는 듯.
질문3-예술 작품의 복재는 그 작품에 해를 끼치는 일인가? x
질문4-예술 작품은 모두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가? x
질문5-예술이 인간과 현실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o

4장 과학(Sciences)

질문1-생물학적 지식은 일체의 유기체를 기계로만 여기기를 요구하는가? o
질문2=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x
질문3-계산, 그것은 사유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x
질문4-무의식에 대한 과학은 가능한가? o
질문5-오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선배들이 삽질을 정말 많이 했구나 하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질문6-이론의 가치는 실제적 효용가치에 따라 가늠되는가? x
질문7-과학의 용도는 어디에 있는가? 진화사상 우연히 주어진 지능의 활용
질문8-현실이 수학적 법칙에 따른다고 할 수 있는가? o 적어도 눈에 보이는 현실은.
질문9-기술이 인간조건을 바꿀 수 있는가? o
질문10-지식은 종교적인 것이든 비종교적인 것이든 일체의 믿음을 배제하는가? x
질문11-자연을 모델로 삼는 것이 어느 분야에서 가장 적합한가? 여러 사이비들

5장 정치와 권리(Politics&Rights)

질문1-권리를 수호한다는 것과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가? 뭔 소리지?
질문2-자유는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싸워서 획득해야 하는 것인가? 자유는 본질적으로 생득적이라는게 요새 트렌드이므로 '싸워서 지키는' 것임.
질문3-법에 복종하지 않는 행동도 이성적인 행동일 수 있을까? o
질문4-여론이 정권을 이끌 수 있는가? o
질문5-의무를 다하지 않고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가? o
질문6-노동은 욕구 충족의 수단에 불구한가? x
질문7- 정의의 요구와 자유의 요구는 구별될 수 있는가? o
질문8-노동은 도덕적 가치를 지니는가? xo
질문9-자유를 두려워해야 하나? 댁이 자유로운 개새끼라서 두렵다
질문10-유토피아는 한낱 꿈일 뿐인가? o
질문11-국가는 개인의 적인가? x
질문12-어디에서 정신의 자유를 알아차릴 수 있나? 착각
질문13-권력 남용은 불가피한 것인가? o
질문14-다름은 곧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인가? x
질문15-노동은 종속적일 따름인가? x
질문16-평화와 불의가 함께 갈 수 있나? o

6장 윤리(Ethics)

질문1-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욕망과 싸운다는 것을 뜻하는가? x
질문2-우리는 좋다고 하는 것만을 바라는가? x
질문3-의무를 다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o
질문4-무엇을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하는가? 그때그때 다르다.
질문5-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도 가치가 존재하는가? o 예: 환차, 선물, 옵션, 주가, 사랑.
질문6-무엇이 내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 지를 말해 주는가? 착각과 이데올로기
질문7-우리는 정념을 찬양할 수 있는가? 왜?
질문8-종교적 믿음을 가지는 것은 이성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x 창조과학 없이도 명랑한 기독교인들 많다.
질문9-정열은 우리의 의무 이행을 방해하는가? x
질문10-진실에 저항할 수 있는가? o 예: 주식시장, 지동설, 사랑.
질문11-진리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진리 대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환상을 좇아도 좋은가?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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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A

잡기 2007. 4. 15. 01:54
'지구에서 달까지'를 다시 봤다. 여전히 훌륭한 드라마다. '마녀 사냥은 그만하고 어서 달에 보내주쇼', '마누라는 빵을 구워. 난 달에 갔다 올테니' 과거의 나사는 꿈을 현실화시키려는 '의지'가 있던 곳이지 싶다. NASA는 Never Absolutly Sure Anything의 약어다. 누가 이름 지었는지 제대로 지었다.

오랫만에 인도 음식을 먹어본다. 이제는 동호인도 뭐도 아닌 사람들(겉은 멀쩡한데 사회생활에 실패한 오타쿠 분위기도 다소 풍긴다)과 이태원의 뉴델리 식당의 만 몇천원짜리 커리 부페식을 먹었다. 대여섯 종류의 커리, 밥과 난, 치킨 탄두리, 사모사, 짜이 등을 제공했다. 음식의 맛과 질은 평범한 수준. 커리에 사용한 향신료가 약하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접시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접시를 채 비우지 못한 듯. 밥먹고 자전거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왕복거리는 41.5km.


야밤의 한강 풍경은 여러 나라의 대도시에 비하면 한심스러운 편. 서울시청도 그걸 알아서 몇 년전 다리에 조명을 설치했다. 예전보다 덜 을씨년스러워 졌지만 그렇다고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도 아니다.


한강 고수부지 및 강변 산책로의 진미는, 세계적인 대도시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강변 풍경이 아니라 거친 콘크리트의 노출이 주는 도회적 부조화(피폐함?)와 난개발 이후 적당히 방치된 들쑥날쑥함이다. '괴물'을 찍은 박감독은 그걸 잘 포착했다. 영화는 강변산책로를 포장하지 않고 보여준다. 마음에 드는 점이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아마 나처럼 그 영화의 로케이션을 속속들이 이해할 것이다.


각도가 조금 바뀌면 서울 같지도 않아서 개발도상중인 어떤 국가의 강기슭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거짓말해도 사람들이 믿을 것 같다. 저 멀리 다국적 기업이 세운 고층빌딩 만이 을씨년스러운 도심의 스카이 라인을 장악하고 있다던지. 저 흐릿한 실루엣 만으로 짜오프라야와 한강을 구별할 수 있을까?


강변산책로의 음침한 구석구석에는 노숙자가 머물지 않는 것 같다. 돈 없고 갈 데 없는 중삐리, 고삐리들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채 소주 한잔씩 빨면서 회포를 푸는 듯. 한 녀석을 잡고 다구리중. (농담)


yes, yes, yes, yes, oh yes.
베로니카, 빅토리아, 베아트리체, 또는 007 제임스 본드.


괴낚사 회원인 듯. '한강에 괴물이 살지 않는다는 것은 현저한 공간의 낭비다' -- 강 태공.


밤의 강변로는 낮의 강변로와 다르다. 낮에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한강의 진행 방향이나 진행 반대 방향으로 바람이 분다. 그늘 한 점 없는 산책로로 햇빛이 작렬하고 온갖 종류의 장애물들이 돌아다닌다. 바글거리는 사람들, 뛰어다니는 아이들, 종잡을 수 없는 강아지들 때문에 자전거 속도를 마음대로 올리지 못한다. 밤이 되면, 아홉시가 넘으면 그것들이 거의 사라진다. 피부를 스치는 선선한 공기와 바람의 냄새, 그리고 도심의 불빛이 수면에 현란하게 반사된다. 도로는 텅 비어있다.


불광천과 홍제천 갈림길을 앞에 두고. 노출시간이 1/4초. 이런 사진을 삼각대 없이 부실한 똑딱이 카메라로 거침없이 찍어대는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수색역.


강변 산책로의 야경은 여러 모로 혐오스러운 서울에서 유일하게 좋아하게 된 것이다. 자전거나 인라인이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아마도 적절한 수단이지 싶다. 자전거를 타면서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들었다. Tchaikovsky, Swan Lake, Waltz 중 클라이막스 (2:20)

술을 잘 못 마시게 되었다. 술, 여자, 도박 중 두 가지가 인생에서 멀어졌다. 이제 도박을 할 차례가 된 셈인가? 도박은 할만큼 했다. 더 하고 싶지 않다. 인생에 마누라, 아이, 어둠의 핵심처럼 짙은 고독과 재테크 밖에 남지 않았다. 선배가 말했다; '너나 나나 인생이 관리가 안 되는 놈들이지. 그게 결혼생활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고' 가슴에 징하게 와닿는 말이다.


3월이 다 가기 전에 마누라를 데리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하는 마그리트 전시회에 갔다. 미술관에서 진중권을 보았다. 진중권이 예전에 마그리트에 관한 책을 썼던 것 같은데? 아내는 진중권이 누군지 잘 모른다. 유명인사임에도 저자대로에서 고개 뻣뻣이 세우고 다녀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썩 부러운 일이다. 더 좋은 것은 유명해지지 않는 것이다.


결혼한 친구들 중에 나처럼 집에서 애보고 밥하고 빨래 너는 남편은 없는 것 같다. 마누라의 친구, 후배들은 사사건건 트집잡고 간섭하면서 가사를 돕지 않는 남편 때문에 우울증에 걸렸다 풀렸다 하는 등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부류가 많은 것 같은데, 마누라는 감사해 할 줄을 모른다. 옛말이 그르지 않다. 마누라한테 잘해줘봤자 개김성만 늘어난다.


마누라의 사진 찍는 솜씨는 전보다 나아졌다. 노출 부족이 태반이지만 소발에 쥐잡기 격으로 가끔 건질만한 사진이 나왔다. 사진은 많이 찍어봐야 는다.


그러는 나도 아이 덕택에 꺼려하던 인물 사진을 다 찍어본다. 이랬던 얘였는데,


헤어스타일을 바꿔줬다. '아빠는 제가 미우신 거죠?' 라고 말하는 듯 하다. 여러 사람 입에서 좋은 소리 못 들었다. 멀쩡한 애 다 버려놨단다. 언제는 개성이 중요하다더니만. 루머에 따르면 다음 스타트랙 시리즈는 스팍의 어린 시절 얘기란다. 소울이는 영혼을 찾아 고뇌하는 스폭의 어린 시절 모습을 연기하기에 제격이다. 너는 이제부터 스팍이다.

스팍, 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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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osure culture

잡기 2007. 3. 20. 01:00
vs 8.0이 dual core에서는 devenv.exe로 여러 프로젝트를 한꺼번에 빌드할 때 버그가 있다. 그것 때문에 하루종일 삽질했다.

마르케스와 요사가 화해하려나?

블로그 포스팅 논쟁에서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사실 -- 소유권과 저작권 사이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저작권을 워낙 싫어해서 관심이 없었더니만 그동안 모르던 것이다. 저작권에 짜증이 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Creative Commons 뿐이다. 홈페이지에 그 마크를 달까 하다가, 내가 써 놓은 블로그를 보니 워낙 컨텐츠가 없어 그럴 필요가 없다. 그건 그렇고, 선택적 노출을 달성하기는 정말 어렵다. 의지를 표상함.

HappySF 무크지 2호: 고만고만한 수준의 창작과, SF치고는 한심한 편인 부졸드의 소설 등등에서 돋보이는 작가는 김보영 정도. 그리고 악착같이 무크지를 계속 내겠다는 행책 사장님의 본받을만한 자세.

'누군가를 만났어' 라는 단편집을 구경했다. (김씨의 호의에 감사) 무크지와 마찬가지로 김보영이 돋보였다. 다른 한 작가는 줄줄이 (관심 안 가는) 소수자 찌질이 병신들의 판타지를 썼고 다른 한 쪽은 그냥, 재미가 없다. 김보영을 빼면 SF같지도 않았다. 김보영의 미래로 가는 사람들은 3편에서 끝내는게 바람직해 보였다. 우주 끝까지 막나가는 패턴은 아이디어가 없으면 안 하느니만 못하지 않나? 질량 보전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재능 보전의 법칙이란 것도 있을 법하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이를테면 싹수가 티미하던 작가가 대기만성해 말년에 걸출한 작풍을 휘두르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건질만한 김보영이지만 단물을 쪽쪽 빨아먹으면 한 5-6년 후에는 바짝 말라버리지 않을까? 아니다 김보영 반숙을 좀 더 오랫동안 팔팔 끓여내면 하드보일드 에그가 나올 것 같다. 이 양반 책은 나오면 일단 사 보겠다. 기대된다.

어디선가 본 말;

어차피 대중은 동방신기를 원합니다.
모짜르트는 교과서의 인물일 뿐이죠.

북한에서는 디스토피아 소설류를 상당히 안 좋게 씹는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쓸데없이 미래를 부정적으로 그린다. 이제는 상당히 지긋지긋하게 들리는 지구온난화와 그의 단짝인 환경오염, 그리고 괴물 유전자:


고어 전 부통령은 이메일을 통해 자신의 작업이 기본적으로 정확하다면서 "모든 과학자들이 모든 면에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지구 온난화가 현실이고 그것이 인류에 의해 유발된다는 근본적인 문제에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신문은 전했다. -- 고어 '불편한 진실' 과장 여부 논란



글쎄다. 과학자들이 인정한 건 그 윗부분, '지구가 요즘 덥다' 뿐이다. 왜 그런지는 아직 모른다. '확실치 않다'가 아니라, 모른다 -- 인간활동 때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지구온난화는 날씨 얘기 같은 것이다. '오늘 비 온다고 그랬는데 안 오네? 젠장 우산 괜히 들고 왔잖아?' 하지만 지구 온난화를 사람들이 날씨 얘기처럼 늘어놓을 때 '무슨 근거로 지구 온난화가 인간의 방만한 활동 때문이라고 주장하십니까?' 라고 까칠하게 묻지 않았다. 안그래도 까칠하다는 평을 너무 많이 듣는데 말이야. 아무튼 고어의 '불편한 진실'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재밌는 SF영화였다. 그거면 된거다.

유전자 변형 식품의 해독성 -- 품종 개량이 유전자 조작이 아니라고 우기거나 검증되지 않은 것을 당연히 여겨지는 것이 의아하다. 실용주의나 합리주의를 역병처럼 여기는 유럽인은 미국인보다 약간 더 미개한데, 특히 프랑스인에게 이성이 있기는 한건가 의심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한국인은 의외로 합리적이지만 그만큼 합리적이고 곤조마저 있는 또라이가 많다). 내가 아는/기억하는 프랑스인들은 별일 없으면 늘 파업중인 것 같다. 야만스러운 프랑스인 중에 걸출한 인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보드리야르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얼마 전에 죽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보드리야르는 푸코, 벤야민과 더불어 인문학자가 살아서 공기만 축내고 죽어서 땅만 축내는 벌레같은 것들이란 흡사 수구꼴통의 머리 속에 틀어박힌 것처럼 단한한 고정관념을 다소나마 완화시켜 주었다. 그러고보니 살아서 공기만 축낸 대표적인 인물 중에는 볼테르, 라이프니츠, 발자크, 플로베르 등속의 괜찮은 양반들도 있다. 유전자 조작 유기체를 소화하지 못하는 특이한 유럽인의 소화체계를 비웃다보니 오버했다. 이렇게 즐겁게 욕을 늘어놓다보면 '유전자 변형 식품'의 해독성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쉽지 않다.

게시물의 댓글 중, '증거가 보고 싶다'가 내 심정과 일치한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뭘 들이밀든 사실 회의적이다. 인간은 우연히 살아남은 잡종 돌연변이다. 아프리카의 잡종 돌연변이들은 한국인 잡종 돌연변이 추장이 심어준 잡종 돌연변이 옥수수를 키워 나흘에 한끼 먹던 식사가 요즘은 이틀에 두끼로 늘어 행복하다. 유전자 변형 식품의 해독성 탓에 그들은 20살이 되기 전에 두개골과 배가 터져 죽을 운명이다. 그래도 그들은 20세까지는 대체로 행복할 것 같다.


아이는 소울이를 무척 귀여워 했다. 아빠보다 낫다.


얘들은 누구지? 마누라 친구의 딸들?


요즘은 닥치는 대로 입에 대본다. 시선과 손발의 조응이 아직 미숙하고 불완전. 앞으로 지능이 나타나기 까지 1년이나 남았음에도 카메라를 들이대면 무척 의식했다. 카메라 렌즈를 눈알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


아이는 아내 닮아서 팔딱팔딱 잘 웃었다. 표정이 풍부하고 더럽게 고집 세고 악에 받쳐 울어대고 요새는 눈치까지 본다. 햐... 그놈 참, 마누라를 쏙 빼닮았단 말이야...


마누라는 아이를 보고 실실 웃는 내게, '아이가 정말 사랑스럽고 귀엽지 않아?' 라고 물었다. 히죽히죽 웃으면서 '아니' 라고 대꾸했다. '거짓말하지 말어' 라고 말한다. 아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 지 모른다. 젖 달라고 우는건지 졸립다고 우는건지 모른다. 아이는 엄마가 없으면 물을 안 준 화분의 식물처럼 말라 죽을 것만 같다.

pursuit of happyness의 윌 스미스가 제 자식 손을 잡고 언덕을 걸어 내려가며 정감어린 대화를 주고 받는다 -- 그 모습을 내게 투영해 봤다. '아빠, 담배 피우면 환경이 오염되' '얘야, 환경오염은 페미니즘, 인종차별, 핵, 평화운동, 민주화운동이 약빨이 닳은 후 사회운동가들이 증거도 없이 떠들어대기 시작한 허튼 소리란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저주를 밥먹듯이 늘어놓고, 과학을 빌미로 편향된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결함이 널려 있는 자료와 통계로 감상주의를 거들먹거리거든... 배운 것들이 더 심해. 그런 과학을 가르치다니, 학교에 널 왜 보내야 하나 싶어. 그 시간에 사회체험도 할 겸 이렇게 땡땡이를 치면서 기분좋은 봄 햇살을 즐기거나, 인근 지하철에서 앵벌이를 하는게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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