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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12.31 반짝이 4
  2. 2005.12.29 작업중 CPU 사용율 2
  3. 2005.12.25 prison break
  4. 2005.12.22 컴퓨터 튜닝 1
  5. 2005.12.21 HDD 복구 작업 4
  6. 2005.12.20 컴퓨터 업그레이드 1
  7. 2005.12.18 국립중앙박물관
  8. 2005.12.15 찾았다
  9. 2005.12.10 만화책
  10. 2005.12.09 destine. 1
  11. 2005.12.04 합리적 악몽
  12. 2005.11.27 파티 1
  13. 2005.11.26 women was god's second mistake 1
  14. 2005.11.18 고민거리
  15. 2005.11.08 라면 스프 만들기 2
  16. 2005.11.07 아용우노맛
  17. 2005.10.30 안심하고 혼자 다니려면 1
  18. 2005.10.30 불꽃놀이 4
  19. 2005.10.27 건버스터2
  20. 2005.10.24 SF 영화, 소설, 드라마 1
  21. 2005.10.23 불꽃놀이 구경 3
  22. 2005.10.22 카메라 수리, 김치 냉장고 사기 1
  23. 2005.10.21 알맵 플러그인 인증 반려 1
  24. 2005.10.19 위즈멕 2
  25. 2005.10.14 즐텍스 전자전 2005 3
  26. 2005.10.14 미국 비자 2
  27. 2005.10.13 감기
  28. 2005.10.09 운이 좋은 줄 알아
  29. 2005.10.05 제주 자전거 여행 1
  30. 2005.10.05 꿈꾸기 2

반짝이

잡기 2005. 12. 31. 11:59
황교수 때문에 올해 가장 큰 볼꺼리인 한나라당의 '장외투쟁'은 이중으로 소외되었다. 장외투정 하는 사람들을 위해 날이 추워지길 진심으로 기대했다. 그간 무난했으니 고난이 좀 있어야 투쟁에 의미가 생기지 않겠나? 한나라당의 주장대로 학교에 전교조 빨갱이를 왕창 들여놓아 이 나라의 구국혼들을 비통하게 울부짖게 만드는 사학법 개정과... 여당 및 주변 떨거지들이 자기들 멋대로 진행한 예산안 통과를 바라보면서 한나라당이 없으면 나라가 잘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우려마저 들었다. 아무튼 오직 애국뿐인 박근혜 대표 홧팅!

엊그제 만든 그래프를 이틀 동안 주욱 생각했다. 저 그래프 뭔가 잘못되었다.

과학의 본질이라... 불쌍한 ([.]*)과정 학생들은 터미널로지와 에비던스로 배운다. 한 십년 개고생해서 정교한 '방법론'을 학습하는 것을 과학 이라고 말한다... 그 바닥의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지만 과학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베리타스를 탐색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 라고들 말한다.

그래서 교수하는 자가 교수받는 자에게 응당 하게 되는 강조와 훈련이 어쩔 수 없이 그 모양인데, 그건 齡셕㈄弱?필요함을 역설하자는 것이지 별 내용 없다. 그러니 누가 가르친 것을 총명하게 알아먹었다고 자랑하지 좀 말자. 내가 생각하는 과학의 본질은 패턴에 대한 센스와 당신의 진실과 무관한 정력적인 의심이다. (따라서 누가 진실하지 못하다고 해서 감상적일 이유가 없다) 그것 역시 터미널로지나 에비던스와 마찬가지로 장기간의 학습과 훈련 과정을 필요로 한다. 다 필요하다. 센스니 회의니 애티튜드니 모두 실험의 절차적 재연 가능성이나 명료함과는 무관한 '정서적'인 것들이다. 그런 정서가 발현되는 과정은 매우 길고 복잡하며 오류가 많다. 그래서 과학자 한 마리를 디시에서 배양하는 것이 날나리 인문계 언론인 백 마리 양생하는 것보다 힘들다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정신상태가 썩었으면(예를 들어 인간과 환경을 생각하지 않는다... 같은) 그런 과학 벌레 백날 키워봤자 소용없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을 보면 그래서 조금 으쓱한다. 윤리는 변화하는 인간사회의 잣대다.

죽어라고 공부만큼은 안 하는 인문계 닭대가리가 대다수인 기자들이 종종 말하는 알 권리나 '진실'에 별 관심없다. 거쳐온 과정이나 베이스가 많이 다르다. 그쪽 사람들은 잘 알거나 모르거나 말 못하거나 말 안 한다. 연말 언론의 호들갑에 꽤 정나미가 떨어졌다. 이젠 그 바닥 사람들까지 과학의 본질 운운해서 속이 쓰리다.

Q: 왜 나는 술자리에서 'A형은 소심해' 같은 해괴한 얘기에 혼자 갑갑해할까?
A: A type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할 말을 잃는다. 맞다. 당신 말이 옳다. 내가 그것을 반증할 '납득할만한' 근거를 댈 수 없으므로. 뭐 몰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생물학은 물리학이나 수학과 절차나 해석, 심지어 참여 정도가 많이 다르다. 나와 당신에 관한 얘기, 그러니까 여자애들이 환장하는 체질심리추리문학인 A형 얘기가 나오는 분야다.


오랫만이다. 한달 내내 프로그래밍 삽질을 하면서 먹던 포대 과자다. 과자 소비량이 엄청나서 뭐 좋은 방법 없을까 싶어 옥션에서 주문했는데, 한달 동안 먹어도 끝이 없다. -_- 링겔 병이라도 꽂고 일해야 할 정도로 과다한 포도당 섭취를 하고 거의 완전하게 소비한다. 초콜렛, 캔디, 과자, 그리고 담배를 피운다. 직업적 불운인 잔대가리질의 댓가다.

씨익양의 메일을 받고 더 늦기 전에 A급 소장품이 잔뜩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다시 갔다. 연말까지 그렇게 전시하고 일부분 돌려주거나 철수한다니 마지막 기회인 셈이다.




이촌역의 좁은 에스컬레이터에서부터 인파에 막혔다. 에스컬레이터는 고장났다. 줄은 구불구불 1킬로 미터 넘게 뻗어 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거지? PDA로 잡지 하나와 신문 다섯 개를 보는 동안 거진 한 시간을 길바닥에서 줄을 따라 개미처럼 움직였다.


김정호 글씨는 이번에도 못 찍었다. 고려 시대 기왓장에서 연꽃에 싸인 진음을 발견하고 재밌어 했다.


이건 무려 가루다님이시다.

인파 때문에 정신 사나워 제대로 구경할 여유가 없었다. 떠밀리다시피 전시실을 전전했다.

올해는 박씨 아저씨네 송년회 한 번 간 것 빼고는 집 밖으로 술 먹으러 나가본 적이 없다. 이번주 두 번 집 밖으로 나갔는데, 나가서 카드를 잃었다. 지갑이나 카드는 잃은 적이 없는데 꽤 한심했다. PDA를 뒤져보니 올해 잃어버린 것은 모바일폰 두어 번 뿐이다. 성적이 양호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뭘 잃어버리면 아내가 칠칠맞은 인간 쳐다보듯 해서 기분이 나빴던 탓이다. 내가 뭘 잃어버리는 까닭은 당시 아스트랄계에서 훨훨 날아다니느라 바빠서 그렇다. 박물관을 나와 인사동에서 아내 친구들, 직장동료들이 있는 송년회에 갔다. 오랫만에 소주를 마시니 살 것 같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아시아관에 대빵만하게 걸려있는 지도의 러시아, 몽골 북부, 그리고 카자흐스탄을 잇는 지역을 바라보면서... 언젠가 가보고 싶은 곳인데, 술자리에서 남들 다 아는 얘기를 굳이 늘어놓았다. 남한의 경상도 사람들은 북방 오랑캐와 유전적으로 많이 닮았고 역사적으로 가야 쪽 사람들이 북방에서 밀려온 피난민들에게 살 터전을 내 준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인은 중국인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 같고 일본 원숭이들과 친척지간이다. 한반도 인류는 몽골 계통보다 코사크 쪽과 친연 관계가 있다 등등. (남북으로 갈린 일본인들 중 남쪽 계통과 한반도 사람들이 훨씬 유사하기 때문에 한국인은 일본인만큼 사소한 거에 목숨 걸고 자기는 결코 남들 안 닮았다고 개기는 등, 비슷하게 얍삽하고 재수없는 종족이지 않을까나?)


12월 31일이구나. 종각 부근에 일본인과 정말 많이 닯은 한국인들이 버글거렸다.


아내가 묻길래 일루미나르 라고 말했는데, 뤼미나리에 란다. 그 말이 그 말이잖아? 일루미나르가 더 멋있긴 한데, 일루미나르하지는 않았다. 연말에 내외로 번쩍이는 소식을 각각 들어 싱글벙글했다. 나는 번쩍번쩍 럭키 가이다.


송년회에서 처음 만난 손 언니와 일레 아가씨가 남에 집 꽃을 따다 줬다. 경비원에게 걸렸지만 두 인간은 개의치 않았다. 나도 이런 징그런 사진 찍는 거 개의치 않는다. 사진의 메시지는 이렇다; 새해 복 받으시길. 아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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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중 CPU 사용율

잡기 2005. 12. 29. 13:50
서버에서나 하는 짓이지만, perfmon으로 12월 27일, 오후 12시부터 오전 0시까지 12시간 동안 일하면서 cpu 사용율을 로그로 남겼다. CSV 파일을 엑셀로 불러와 이동 평균을 취한 다음 히스토그램으로 그래프를 그렸다.


가로축이 부하율, 세로축이 빈도수인데 그래프를 보니 업그레이드 이전과 달라진게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내가 하는 일(프로그램 작성, 웹질)에는 cpu 성능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고, 50만원이나 들여 업그레이드 한 것으로 보람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엑셀로 이렇게 간단한 그래프를 그리는데 30분이나 걸렸다. 차라리 프로그램을 짜서 데이터 분석을 하는게 낫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프로그램을 짜느니 마우스질 몇 번으로 데이터 분석하고 그래프를 출력할 수 있는 엑셀을 제대로 배우는 것이 더 경제적이지 않을까? 내 경우 프로그래밍이 생활을 계량하는데 도움이 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예: 사전 긁어오기. 사전은 긁어왔으나 크기가 너무 커 kdic으로 변환해서 사용하지 못했음. 예: AVR 프로그래밍을 공부하여 적외선 송수신과 시리얼 통신, 모터 제어를 했으나 집에서 커튼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그만한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는지는 회의적. 예: 사이트 로그 통계를 만들었으나 블로그에 무슨 글을 올리건 항상 조회수가 잔잔하고 일정해서 이제는 쳐다보지도 않음. 예: rss 뉴스 보기를 만들었으나 rss 기사 제공하는 뉴스 업체는 극히 적고 bloglines에 등록해서 그냥 보면 됨. 그나마도 귀찮아서 요즘은 블로그 구경을 안 함.

그나마 성공적인 예: 자전거 지도 보기를 만들었다. 요즘은 추워서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

즉, 최근에 해왔던 대다수의 생활 프로그래밍이 닭질이었다는 것. 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프로그래밍은 놀이에 가까으므로 문화 예술 활동이 아닐까? 그럼 난 문희준처럼 아티스트고. 우울한 가운데 의외로 훌륭한 결론이 나와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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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on break

잡기 2005. 12. 25. 01:51
아내와 '태풍'을 보러 갔다. 보러 가는 길에 아내가 '태풍'의 평판이나... 작품성이 어떻다느니 남들 하는 얘기를 미주알 고주알 늘어놓길래(어젯밤에 일하다 말고 급히 예약할 수 있는 표는 그것 밖에 없었다) 블럭버스터물을 작품성으로 보는 얼간이가 어디 있냐고, 그런 걸 보려면 예술영화나 책(특히 심상에 떠오른 것은 고전)을 읽는게 낫다고 핀잔을 주며 떵떵거렸는데... 감독은 7천원 내고 시원하게 때려부수는 블럭버스터를 보러 온 사람을 실망시켜서는 안되는데... 재미가 없다. 영화가 산만하다. 특히 음악이 듣기 괴로웠다. 실은 표 두 장을 4500원 주고 본 영화지만 집에 얼른 돌아가서 프리즌 브레이크를 마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재밌다는 소문을 듣고 어젯밤에 프리즌 브레이크를 다운 받아 4편을 연달아 봤다. 반달곰처럼 잠자리로 기어갈 때 시계를 흘낏 보니 29시였다.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요 배역들이 다들 마음에 든다. 사회에서 왕따당한 녀석들이라 정서적 톱니가 맞물렸다.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그들의 죄목은 나열되지 않았다. 누명 쓰고 곧 처형당할 위기에 처한 제 형을 구출하려고 주인공은 온 몸에 문신을 새긴 채 감옥에 들어간다. 쿨한 인텔리 녀석이라(달리 말해 개싸가지) 감방 동료들에게 곧 맞아죽거나 갖은 고생을 할 줄 알았지만 발가락 두 개 잘렸을 뿐 감방생활에 적응 잘 하고 탈옥 준비도 착착 진행된다. 어젯밤부터 오늘까지 1기분 13편을 해치웠다. 2기가 기대된다. 허약한 인류를 이만큼 발전시킨 힘은 협동과 신뢰다. 흉악범 사이에서도 그건 예외가 아닌데, 오히려 범죄자이기 때문에 그것을 판별할 줄 아는 안목을 지니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어깨 위에 제대로 목이 붙어 있으려면.

어린 시절에는 감방에 들어가서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여러 방면의 인맥도 넓히고 누구나 꿈꾸는 탈옥을 계획 하는 등 다양한 활동으로 정신없이 바쁠꺼라는 희망을 품었다. 애들이라면 누구나 그런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자유? 자유는 내게 어떤 개념이나 존재론적 시비꺼리는 아닌 것 같다. 난 그냥 자유롭다. 아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내 가장 심각한 결점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역으로 말해 나는 굳이 탈출해야 할 감옥이 없다. 알아듣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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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튜닝

잡기 2005. 12. 22. 19:49
컴퓨터 조립은 일찍 끝났다. os 설치하고 드라이버 설치하고 프로그램 설치까지 마쳤다.

Standby To RAM (STR)이 먹지 않았다. STR 모드는 전원 사용을 최소화하여 램과 일부 칩들에만 내용이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전원을 공급한 채 셧다운 되는 기능이다. STR을 사용하면 윈도우즈를 새로 부팅할 필요없이 키 하나 눌러 이전 작업 상태로 바로 복귀(instant on)가 가능하다. 폐인모드로 프로그래밍 訪汰?할 때 꼭 필요한 기능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STR 모드로 진입한 다음 전원 스위치나 키보드에 의해 컴퓨터가 다시 원 상태로 복귀되지 않고 먹통이다. 윈도우즈 설치 잘못일까? 아니면 보드 문제일까? 케이스와 ODD만 빼고 다 갈아치운 상태라 본의 아니게 생활에 도움 안되는 상상의 나래를 활짝 폈다.

너무 많은 것들을 이미 설치해 놓은 상태라 시스템을 더 건드리긴 무리고... 다른 HDD를 준비해서 windows xp sp2 무인 설치판을 깔았다. windows xp sp2 판에 2005년 12월까지의 모든 패치를 적용하고 설치시 SATA raid를 지원하는 등 쓸만한 물건이라 냉큼 다운받았다. 이런 거 자기 시간 쪼개서 만드는 사람들한테는 항상 감사한 마음 뿐이다. 설치 화면에 문근영이 나타났다. 재빨리 눈을 돌려 어제 읽다만 김용옥의 글을 마저 읽었다.

30분 후 윈도우즈 화면이 나타났다. 비디오 카드 드라이버만 설치한 상태에서 테스트 해 봤다. 한 번 되더니 그후로 계속 안된다. 흠... 이상한 일이군. 아무 생각없이 ATI 사이트에 들어가 Catalyst 5.12를 다운 받아 설치했다. 스탠바이 모드 진입과 리바이브가 이번에는 잘 된다. 비디오 카드 드라이버 문제였군. 결론 냈다.

다시 조립하고 테스트 해보았다. 스탠바이는 되긴 된다. STR 모드에서 키보드에 의해 컴퓨터를 다시 켜려면 PS/2 키보드를 사용하고 BIOS에서 wake up by keyboard를 활성화한다. 이를 위해 파워 서플라이는 컴퓨터가 꺼져 있는 상태에서 메인 보드와 키보드를 간신히 구동시킬 수 있을 정도의 전류를 공급한다. PS/2 키보드의 경우 그렇고, USB 키보드를 사용하면 BIOS 셋업에서 USB legacy device support를 활성화해야 한다. 키보드 및 마우스가 USB legacy device다. 원래 USB는 HID(human interface device)와의 인터페이스를 위해 개발된 규격이다. 지금은 본의 아니게 고속 주변기기 연결 규격이 되어 버렸다.

문제는, 스탠바이 모드에서 파워 서플라이는 물론이고 CPU, HDD가 모두 작동상태다. 중단된 것은(disconnect) 비디오 카드와 LAN 카드 뿐이다. 이게 무슨 스탠바이 모드야? 혹시 레거시 디바이스가 있어 ACPI를 완전히 지원해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럴리가 없다. 새로단 것은 SATA-II HDD와 파워 서플라이, 보드, CPU 뿐이다. 의심이 가는 것은 파워 서플라이다. 혹시 파워 서플라이가 스탠바이 시그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예전에 만원 주고 산 300W 파워도 그 정도는 했는데. 아무래도 파워 서플라이는 국산이라 중국산 만큼이나 믿음이 안간다. 특히나 국산 중에 '황'씨나 주황색도 노란색도 아닌 파워는 믿음이 안가는 것이다...


3시간 후 추가: 파워 서플라이 문제가 아니라 하드웨어 전문업체인 마이크로소프트의 무선 키보드/마우스 때문이다. BIOS에서 USB legacy support를 disable하고 대기모드 전환을 해보니 전원이 완전히 꺼진다. 예전 보드에서도 같은 증상이었다. 난 바보가 아닐까? 위에 레거시 운운하면서 결론 다 내려놓고 엉뚱한 파워 서플라이를 의심하다니... 황씨들 때문에 요즘 분별있게 생각하기가 힘들어졌어. 투덜. 아무튼 키보드를 가볍게 눌러 컴퓨터를 켜면 안되고 발가락을 슬쩍 뻗어 컴퓨터의 전원 스위치를 눌러야 한다. '상당히' 불편하다.


이번에는 듀얼 모니터 설정에서 말썽을 부린다. DDC 정보에는 두 모니터가 모두 잡힌 걸로 나와 있다. DDC=Display Data Channel. 컴퓨터와 연결된 모니터에서 모니터가 디스플레이할 수 있는 해상도와 수직 동기 주파수 등을 컴퓨터 측에 알려주는 일종의 PnP 규격. 그런데 비디오 카드의 DVI 측에 연결된 모니터에는 화면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LCD와 CRT 모두 RGB 커넥터라 DVI 측에는 DVI-I to RGB 컨버터 플러그를 달아 놓았다. DVI-I 컨버터 탓일까?

영 답답해서 원래 가지고 있던 AGP 카드를 달려고 메인 보드 매뉴얼을 보니 1.5V AGP 카드만 달 수 있다고 나와 있다. 내 것은 3.3V짜리다. 좌절했다. 유니텍 홈페이지에 들어가 게시판에 문의했다.

할 일이 없어 오버클러킹을 시도했다. 메인 보드가 오버클러킹을 잘 지원해 준다. CPU 코어 주파수가 200Mhz이고 멀티플라이어(아마 PLL을 사용하겠지?)가 x9 그래서 200x9=1800Mhz가 나온다. 배수 조절은 안되었다. 코어 주파수를 230Mhz로 주고 PCIEx와 비동기로 설정했다. 2.07Ghz, 여러 벤치마크 프로그램을 돌려보니 성능이 113% 가량 향상되었다. 동영상을 플레이 하면서 네트웍을 경유해 서버에서 파일을 받아 4x 속도로 DVD를 on the fly로 굽는 작업과 바닥(mencoder)로 동영상 엔코딩 작업을 병행했다. CPU 사용율은 100%지만 그렇게 1시간 돌려도 다운되지 않았다. SpeedFan 프로그램으로 CPU 온도를 보니 45C 부근에서 오락가락한다. 안정적이다. 돈 굳었다.

보드가 PC3200 DDR SDRAM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수동으로 설정했다. DRAM clock은 200Mhz(DDR은 sync clock의 dual edge에서 작동하므로 실제로는 400Mhz가 된다)으로 설정하고 burst length를 8로 잡았다. 최근 나오는 대부분의 SDRAM은 burst length가 8인데 이것도 그런지는 칩 데이터시트를 안 봐 확실치 않다. burst length는 SDRAM에 read command 설정 후 각 클럭마다 별도의 리드 명령을 주지 않고 한꺼번에 읽어들일 수 있는 최대 길이를 말한다. 사실 버스트 길이가 RAM의 속도를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증가시키는 것은 아니다. 데이터시트 보고 제대로 설정을 해볼까? optimal(auto) 설정은 아무래도 임계작동 속도에서 마진을 30% 이상 둘 것이 분명하지만 임계 작동 실험을 하는 것이 아닌 이상 굳이 안 바꾸기로 했다. 램 성능은 134% 향상되었다.


3시간 후 추가: 이왕 오버클러킹하는 김에 제대로 해 봤다. 베니스 3000 cpu는 parkoz.com에 따르면 국민오버 cpu란다. 개나 소나 누구나 쉽게 오버클러킹이 가능해서인가? 내가 사용하는 Asrock 939Dual-SATA2 보드는 외국의 어떤 오버클러킹 사이트에서 올해 최고의 보드로 꼽혔다(당체 이해가 안 가지만 아마도 가격대 성능비를 평가한 것 같다). 싸구려를 즐기는 나로서는 '명망있는' 보드를 사용하게 된 것을 기뻐해야겠지. 외국과 달리 한국은... 고성능 명품 아니면... 좀 그런 동네다. 여러 세팅을 건드려봤지만 남들처럼 2.6GHz 오버는 되지 않는다. 특히 희안한 것은 RAM 설정을 auto로 해 놓으면 FSB 230Mhz 이상은 오버가 안되고 RAM clock이 166Mhz로 잡히는데, FSB를 250Mhz로 해 놓으면 RAM clock이 200Mhz로 제대로 잡힌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 보드에 cpu 꽂아놓고 오버 안 하면 옵티멀 퍼포먼스로 작동하지 않게된다는 뜻이다. 오버를 부추기는 보드 -_- 어쨌든 코어 전압을 1.35V로 선택하고 250Mhz x 9 로 해서 2.25Ghz까지 오버가 가능했다. 기존 대비 125% 성능향상이다. Stress Prime 2004 프로그램을 돌리는데 온도가 35도를 넘지 않았다.


벤치마크를 해보니 ATA가 대략 30MB/s인 반면 SATA-II 인터페이스가 달린 삼성 HDD는 60MB/s 정도의 속도가 나왔다. buffered read에서는 140MB/s까지 나온다. seek time은 대략 7ms 가량. 3Gb/s 짜리 SATA-II 인터페이스에 물린 HDD지만 실질 성능은 1.5Gb/s짜리 SATA와 같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만족한다. SATA-II는 SATA Raid보다 속도가 떨어진다. 로또에 당첨되는 일이 없는 한 SATA Raid를 구성할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3시간 후 추가: 위의 산드라 벤치 결과 후 HD Tack로 재테스트해 본 결과 동일.


더 할 일이 없어서 이번에는 예전에 성능이 떨어져서 할 수 없었던 것을 했다. CPU상태를 주욱 모니터링하면서 MMOPRG인 '영웅'을 다운받아 실행했다. 패닝할 때 화면이 팽팽 돌아간다. 야... 이게 말로만 듣던 3차원 삽질 게임이구나. 한 노인네가 농사를 망치는 멧돼지 때문에 울고 있어서 성 인근 숲에서 맨 주먹으로 멧돼지와 늑대를 열심히 때려잡았다. 0갑자 4성쯤 올라가서 이번에는 칼을 하나 잡고 늑대를 죽이러 돌아다녔다. 2 시간 동안 열심히 짐승들을 도살했지만 전혀 보람을 느낄 수 없었다. 짐승들은 죽었다가 흙에서 돈을 몸에 지니고 솟아났다. 그런데 노인장은 야저 때려잡아 달라고 부탁해 놓고 어디 간거지? 공치사라도 들어야 할텐데. 새벽 2시다. 정처없이 떠돌다가 시라소니같이 생긴 놈한테 물려 죽었다. 재미가 없어 관두고 잤다.

자다가 꿈 속에서 파티션 날아갔을 때 왜 하드 복구가 잘 안되어서 내가 삽질했는가?를 반성해 보았다. 이제는 오래되어서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도스 시절에는 hex editor로 파티션을 손수 복구했다. 굳이 하드 디스크 전체를 스캐닝하여 MFT를 재구성할 필요가 없다. 파티션만 달랑 날아간 것이므로 파티션 테이블과 MBR만 잘 설정해 주고(쉽다) 첫번째 파일 리스트 테이블 위치만 잡아준 다음 부팅해서 인식되면 chkdsk 한번 돌려주면 작업 끝이다. 어찌나 쉬운지 10분이면 작업이 끝나는 것이다. 그 작업이 귀찮은 나머지 Norton Utility에는 그런 기능마저 들어 있었다. 그런데 PC가 전보다 100배 이상 고성능이 되고 엄청나게 다양한 기능과 엄청나게 많은 소프트웨어를 구동할 수 있으면서도 고작 파티션 테이블이 날아간 문제 하나 해결 못하는 이상한 소프트웨어들 때문에 적어도 8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자다가 괜히 열받았다.

비디오 카드 듀얼 모니터 문제로 유니텍에 적은 질의에 대한 답변을 아침에 받았다. windows xp 문제란다. '정품'을 사용하시길 권고했다. 정수리에 느낌이 딱 와서 당장 비디오 카드와 컨버터 플러그를 챙겨들고 용산의 유니텍 A/S 센터로 달려갔다. xp 문제라고?

창구에서 대기표 하나 주고 폼 작성하라고 한다. 저 죄송하지만 이건 5분만 점검하면 되는 건데요.. 소용없다. 이름과 연락처만 적으란다. 이름과 연락처를 적고, 왜 A/S 받으러 왔는가 적으려 하자 종이를 빼앗는다. 창구 아가씨와 대화가 안되는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종이를 다시 빼앗아 왜 A/S 받으러 왔는지 두 줄로 간략해 적었다. '듀얼 모니터 구성했을 때 DVI 쪽 secondary display가 출력되지 않음. 비디오 카드나 DVI-I 컨버터 플러그 둘 중 하나에 문제가 있는 듯 함. DVI 컨버터 문제라면 구매하겠음'

대기실에 앉아 마이크로 소프트웨어를 읽으며 기다렸다. 한 시간쯤 지나 엔지니어가 내 이름을 부르며 자기 자리로 안내해 준다. 뭐가 문제에요? 대뜸 물었다. 비디오 카드 문제라고 보기도 어렵고 젠더 컨버터 문제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네요. 라고 말한다. (엔지니어는 '젠더 컨버터' 같은 야매스런 명칭을 사용해선 안된다. 젠더 컨버터는 말 그대로 암컷/수컷 커넥터의 궁합을 맞추기 위해 젠더(성)을 변환하는 것을 말한다) 널부러져 테스트 중인 것을 보고, 저 카드는 되는군요. 내 카드는 안되죠? DVI 컨버터는 거기 것이다. 네. 그럼 비디오 카드 문제가 맞네요. 아 그렇다고 보기가 좀... 답답해 하며 DVI가 RGB로 어떻게 변환되는지 설명해 주려고 한다. 그런 거 몰라서 찾아온 사람 아닌데... 집에 레퍼런스로 사용한 여분의 비디오 보드나 컨버터가 없어 부득이 들고온 것인데...

설명 듣다가 중간에 끊고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비디오 카드를 교체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비디오 카드 문제가 맞군요. 아니 그건 아닌데... 제가 가져온 DVI 컨버터는 테스트해 보셨어요? 아직요. 아 그래요? 저는 DVI 컨버터 문제면 돈 주고 구매하려고 왔는데 (5천원짜리 컨버터는 테스트 해 보지도 않고 횡설수설하다가 5만 7천원짜리 비디오 카드를) 그냥 다른 비디오 카드로 교체해 주시는군요.

비디오 카드 문제는 아니라니까 그렇게 믿기로 하자. 그러더니 DVI 컨버터 플러그도 끼워준다. 그러니까 나는 원인불명의 알쏭달쏭한 문제로 새 비디오 카드와 새 DVI 컨버터를 받은 것이다. 삼성에 버금가는 화끈한 '묻지마, 물으면 다쳐' A/S다.

물건을 챙겨 돌아가려다가 말고 뒤돌아서 말했다. 아참, 그 비디오 카드요, 어제 산 건데 카드와 함께 동봉된 드라이버 CD로 드라이버를 인스톨하면 파워 오프나 대기모드 전환시에 다운됩니다. 그래요? 그래서 어제 게시판에 글을 올렸더니 windows xp '정품'을 사용하지 않아서라지 뭡니까? ㅎㅎㅎ 우리는 함께 그 답변을 올린 사람을 비웃었다. 방금 비디오 카드를 교체해 준 그 친구는 그런 답변을 달지 않았을 테지만 유니텍의 누군가는 바보다.

유니텍의 삼위 일체 바보들 덕택에 오늘도 하루를 날렸다. 유니텍에 있는 그 누구도 나에게 (제품 결함 때문에) 소중한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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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D 복구 작업

잡기 2005. 12. 21. 12:51
HDD 복구 작업 하다가 새벽 2시쯤 졸았다. PDA로 김용옥의 '중용'을 읽고 있었다. 김용옥 인생의 소원은 똥을 시원하게 잘 싸는 것이다. 똥꼬를 닦을 필요 없이 매끈하게 똥이 떨어지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말하길, 평생 도 닦은 성철도, 서구 합리 이성을 열나 공부한 작자도 10년 이상 그렇게 매끈한 똥을 싸는 사람은 없으며 그런 사람이 있으면 존경하겠다고 한다. 마음에 와닿는 말이다. 화성 착륙하는 연락선은 만들 줄도 아는 7천년 역사의 엄청난 문명이지만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똥 잘 싸는 일만큼은 해결이 요원한 것이다.

HDD 복구는 오후 7시에 시작했다. 일단 인터넷을 뒤져 복구 프로그램을 검색했다. FinalData, LiveData 등의 프로그램으로는 제대로 복구가 되지 않았다. 파티션 정보만 날아갔을 뿐, MFT는 멀쩡하므로 데이터 복구가 안된다는 것이 희안하게 여겨진다. Hiren's Boot CD에 포함된 다양한 복구 프로그램을 한 차례 이상 사용해 봤지만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삽질 끝에 windows용 EasyRecovery Professional 6.10을 구했다. MFT를 제대로 찾는다. 진작 알았으면 어제 오후부터 삽질을 대폭 절감했을 것이다. 100% 복구가 가능하다. 대신 복구할 데이터를 저장할 다른 HDD가 있어야 한다. 그냥 MFT를 복구해주지... 불필요한 것들을 제외하니 복구하여 복사할 파일수는 11414개, 125GB 분량이다. 지금부터 2시간쯤 걸릴 예정이다.

새 컴퓨터 조립 후 부팅 속도는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빨라졌다. 로고 스크린에서 프로그레스 바의 래핑 어라운드 카운트가 (지렁이가 지나가는 횟수) 3회다. 예전 시스템에서는 11개 가량 나왔다. 그런데 asrock의 보드 문제인지 아니면 드라이버 탓인지 standby to ram(STR) 대기모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바빠 죽겠는데 이런 성가신 문제로 시간 낭비하는 것이 아깝다.

어쨌건, 순간의 실수로 하루를 고스란히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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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업그레이드

잡기 2005. 12. 20. 23:49
한 달 전만 해도 별 탈 없이 잘 쓰던 컴퓨터가 최근 들어 많이 느려진 느낌을 받았다. 최근에 vs.net 2005를 설치하고 부터 dev studio 6.0과 .net 2005를 함께 띄우니까 메모리를 최소한 300MB 가량 잡아 먹었다. 스와핑이 자주 일어나 작업 속도가 현저하게 느리다. .net을 사용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지만 이미 개발 플랫폼을 그리로 옮기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간단하게 램을 추가하면 되는데(4만원), 램만 추가하자니 왠지 미봉책처럼 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내 돈 들여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 거의 5년 만이다.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잡동사니에 가끔 하나 둘 씩 산 부품을 모아 조립한 탓에 컴퓨터가 좀 추레하다. 문제점을 정리했다.

* 지금 있는 메인보드는 usb1.1만 지원한다.
* 무선 키보드 사용후부터 STR to RAM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
* 이왕 속도 향상을 바란다면 RAM과 함께 SATA-II HDD로 가자.

그래서 쇼핑을 시작했다. 단품 구매할 때는 다나와를 뒤적이는게 효과적이었는데 1-2천원 차이로 여러 물품을 각기 다른 가게에서 사기도 뭣하고 해서 스프레드시트를 띄워놓고 몇몇 가게를 중심으로 견적을 잡았다. CPU AMD64 베니스 3000+, 메인보드 Asrock 939dual SATA-2, RAM은 삼성 512MB PC3200 2개, HDD 삼성 250GB 3GB/s SATA-2로 했다. 메인 보드가 듀얼채널 램을 지원하니 메모리도 2개로 하고 HDD도 sata2를 지원하는 것으로. 이전에 쓰던 파워로 용량이 딸릴 것 같아 powerstation 300nf4 를 함께 구입하고, PCI-Ex를 지원하는 가장 싸구려 비디오 보드를 더하고, 집안에 나돌아다니는 HDD를 백업 장치로 사용하기 위해 USB 케이스를 추가하여 견적가를 내보니 52만 8천원. 허걱

최근에 몇번 컴퓨터를 산 적이 있는데 저 가격이면 그럭저럭 쓸만한 컴퓨터 한 대 조립할 수 있다. 말이 업그레이드지 저 정도면 케이스와 DVD-RW만 빼고 새 시스템을 통째로 한 대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포기할까? 개기는 것도 시대 상황 봐가면서 하자.

비용을 아끼려고 컴퓨터를 뜯어 쓰던 부속들과 함께 창고에 쳐박아 놓고 썩히고 있는 부속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용산의 중고 매입 가게에 들이미니 8만 7천원 쳐 준다. 떼를 써봤지만 소용없다. 줘봤자 자기들한테도 짐이란다(업자야 당근 하는 소리지). 내가 들고간 부속은 구하는 사람도 없다나? 못해도 최소한 12만원 가량은 받을 수 있을 꺼라고 생각했다. 그냥 싸들고 가버릴까? 무겁게 들고 왔는데...

돈을 받아쥐고 매장을 나오며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갑자기 울컥한 심정이 들었다. 듀론 800이면 리눅스 서버쯤은 거뜬히 돌릴 수 있다. 괜히 팔았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속이 쓰리지만 집안에 놔둬봤자 쓰레기 되기는 매한가지고 팔 시기를 한참 놓친 것은 전적으로 내 게으름 탓이다.

부속을 미리 주문해 놨기 때문에 가게에 가서 물건을 찾았다. 용산에 온 김에 드라이버를 하나 사고(전에 화장실 공사하러 왔던 사람들에게 빌려줬는데 안 돌려준다. 뭐 굳이 그럴 의도가 있던 것은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그들이 가져온 공구 중 몽키 스패너가 집에 잘 굴러다니고 있다) 라이터 기름을 한 통 샀다. 그리고 다시 중고로 팔아먹은 기계가 아깝고 억울한 기분이 들어 인상을 구겼다.

먹자. 먹어서 배를 채우면 속이 덜 쓰릴꺼야. 버스를 기다리면서 떡볶이 한 접시 먹으니 한층 기분이 나아졌다. 집에 돌아와 조립 시작.



막강한 AMD Athlon64 3000+ CPU. 예전에 사용하던 것보다 8배 이상 빠르다. 뭐 체감속도는 2-3배 정도겠지만.



Dual Channel DDR 3200 RAM 512MB x 2ea. 1GB 하나 꽂는 것보다 빨라서 두개로 샀다.



매뉴얼을 보고 CPU와 램을 조립. Hyper Transport를 사용하여 노스 브릿지와 1G로 통신한다는데... 대체 지난 5년 사이에 컴퓨터가 얼마나 발전한거야? 이런 저런 정보는 계속 보고 들었지만 실물을 눈 앞에서 이렇게 보는 것은 처음. PCI Express 슬롯도 처음 보고, M2 CPU를 꽂는다는 future CPU slot도 생소하다.



ATI 유니텍 X300SE 5만 얼마짜리 비디오 카드. DVI를 함께 듀얼 포트를 지원. 메인 보드도 그렇고 이 비디오 카드도 팬이 안 달려서 구매했다. 팬 달린 것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CPU에 fan 장착. 중고 보드를 팔 때 알게된 사실인데 원래 CPU와 함께 있는 팬이 아니면 단가를 안 쳐준다고 한다. 내것이 딱 그 경우였는데, 업자 말로는 팬 위에 시리얼 넘버가 붙어 있어 만일 정품 쿨러를 떼어내면 A/S가 안 된다나. 그래서 CPU+보드 판매가가 만원 떨어졌다. -_-



유체 베어링을 사용하는 삼성의 SATA-II 250GB HDD. SATA-II는 1.5Gb/s의 SATA보다 2배 가량 빠른 3Gb/s의 속도지만 플래터 두 장에 seek time 8ms 짜리가 빨라봤자 얼마나 빠를 것이며 3Gb/s를 소화하기나 하겠나.


20GB, 40GB x 2, 160GB 이렇게 해서 집에 굴러다니는 HDD가 도합 4개. 중고로 판매할 경우 1-2만원 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매입가로 결정되기 때문에 팔기보다는 USB 2.0 하드 케이스에 넣어 백업 장치로 활용하자고 굳세게 마음먹었다. 이미 2개는 중요한 백업에 쓰는 것이다.


파워. 12V를 무려 32A나 지원하고 3.3V 역시 25A나 출력하는 괴물같은 파워 서플라이. 대체 요즘 PC 내부의 장치들이 얼마나 전기를 처먹길래 저런 파워들이 시장에 출시되는 것일까. 이 파워 서플라이를 구매한 유일한 이유는 '현실적인 가격'에 foward converting을 하여 파워 효율이 높고 SATA 파워 커넥터를 별도로 제공하고 케이블 실딩을 해 놨기 때문이다. 알록달록한 색깔로 시리즈를 만들어놔서 텔레토비 파워라고 불리는 모양.



결선 시작. 이전 컴퓨터 내부보다는 속이 시원해 졌는걸? 사타 케이블 때문일까? 좋군.



좋긴 뭐가 좋아. 배선 끝내고 나니 예전과 다를게 하나도 없잖아.

새로 산 250GB HDD와 예전에 데이터를 보관하던 160GB HDD를 물리고 셋업을 시작하다가 아뿔싸, 예전 HDD의 파티션을 날려버렸다. 속 쓰린데 이젠 다운받은 100GB 분량의 영화와 다큐멘터리까지 몽땅 날려 버리다니... 환장하겠군. 일단 떼어내고 windows xp를 설치한 다음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파티션만 살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았다. 프로그램 돌리면서 이걸 작성중.

새로 사서 기분 좋냐구? 별로.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을 만들어가며' 산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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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잡기 2005. 12. 18. 12:58
국립 중앙 박물관에 갔다. 올해까지 무료란다. 인터넷으로 사전 예약을 하지 않아 2:30pm까지 기다려 PDA를 빌렸다. 신분증을 내밀면 PDA와 MP3P를 빌려주는데 각각 3천원, 천원씩 받았다. 둘 다 전시물 앞에 다가가면 감지해서 그에 걸맞는 설명을 들려준다.

PDA는 Text To Speach 시스템을 사용, 영어로 듣다가 한국어로 전환했다. 약간 듣기 거북하다. 애들부터 노인네까지 청취대상을 평준화한 덕에 관람속도를 못 쫓아오고 몹시 허덕인다. 이 기기에 필요한 것은 1초 스킵 버튼과 음성 속도 조절, 타스크 전환 스위치, 동영상 플레이어, 문화재 게임 등등이다. UI가 구린 것이 몹시 한국적으로 대충 만든 티가 팍 났다.



박물관에서 세상 어디가나 똑같아 짜증나는 구석기 유물을 죽어라고 전시하는 이유가 뭘까? 그나마 특별하다는 것이 있긴 하다. 그런데 왜 원뿔형 토기에 빗살 무늬를 만들었을까? 한 동안 그 빗살무늬가 그립감을 좋게하려고 생선뼈로 긁었다고 여겼다. 주변에 물어봐도 쓸만한 대답을 들은 적은 없다. 빗살을 그리면 멋있어 보이지 않냐? 이런 대답이나 듣고. 잡는 느낌을 견고하게 만들려고.. 라는 대답도 시원찮긴 마찬가지다. 훗날에는 무늬 없는 토기가 나왔다. 패밀리, 밴드, 트라이브를 드러내는, 마치 개들이 오줌으로 영역구분하는 버릇인 걸까? 그럼 빗살의 미묘한 지역적 차이를 살펴보면 되겠군. 귀찮아서 지나쳤다.

세시간을 바삐 돌아다녔는데 1층의 1/4, 2층의 1/2, 3층의 1/2을 간신히 구경했다. 다섯시를 넘겨 어쩔 수 없이 나왔다. 칼바람이 몰아친다. 박물관 주변에 지오캐싱 박스를 남겨두려고 했는데 귀가 얼어 붙으니 만사가 귀찮아 지하철 역으로 달려갔다. 박물관을 꽤 고속으로 보는 편인데 세시간을 돌아도 채 1/3도 보지 못한 것이 의아하다. 다시 와야겠다.



어린 시절 종에 새겨진 이 무늬를 보고 감동 먹은 적이 있다. 아, 하늘거리는 저 멋진 각도. 옛날에 저 문양을 해석하는 얘기를 줏어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은... 지금은 종에 정기를 빨려 맛이 간 노인네처럼 보인다.



유라시아 대륙의 어디를 가나 문화 관람이랍시고 박물관을 돌아다니다 보면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붓다 쇼핑이다. 항상 크신 '큰 형님'을 중심으로 조직책, 행동책, 해외사업책, 자금책, 행동대원 및 그외 주변부 떨거지 등, 이 그림 한 장이면 조직 내 계보 파악이 가능하다. 몇몇이 빠진 것 같은데... 남도계열인가? 붓다의 손모양은 '양아들은 접수하고 사업은 확장한다'를 뜻하고 있다. 불상이나 탱화를 보면 웃음이 나오고 기분이 좋다. 특히 각국의 부처 머리 표정은 정말 재밌다.



언더그라운드 조직의 괴수 염라대왕. 한 눈에 봐도 위 조직과 확연히 구분되는 뒷골목 언더그라운드 양아치 집단 임을 알 수 있다.



잠시 쉬고.. 저런 창문으로 베란다를 꾸미면 멋질 것 같다.



간만에 보는 비로자나불. 세속인은 붓다와 같고 미혹과 깨달음은 하나다. 박씨 아저씨는 제스쳐를 사용하는 보안 시스템을 구상 중이다. 암호는 약사여래 것이 좋겠지? 형광등 불빛 아래서 손을 상하로 마구 흔들면 팔이 대여섯개로 보인다.



다 털려서 한가하게 화투판을 바라보는 관음보살. 노출과다 아니다. 의도적 연출이다. 아... 사진 얘기다. 젠장 성스런 관음보살인데 내가 왜 일없이 캥긴거지?



턱 괸 김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싯달타, 여러 '짝통' 반가사유상 중 하나. 반가사유상은 사진을 못 찍게 했다. 김정호 글씨 보고 뻑 맛이 가서 찍으려니 그것도 못 찍게 하더라.

한국의 반가사유상은 꽤 멋지다. 그냥 멋지다. 한참 쳐다봤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걸 위한 특별전시실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그런데 반가사유상 앞에 아줌마 화장하듯 덕지덕지 발라놓은 수사는 꽤 밥맛이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국민의 역사적, 문화적 자긍심을 한단계 높여보려고 만드는 박물관에서 하필이면 밀린 집세 걱정하는 듯한 표정의 근육질 머저리를 빗댈 것은 또 뭐람.



12세기 고려에는 제대로 된 청자매병 그러니까 비색 자기 술병을 만들 줄 아는 장인이 있었다. 이런 걸 보게 되면 프로그램을 제대로 짜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다. 여기저기 자기를 많이 본 셈인데 고려 청자는 멋있다. 중국, 대만, 유라시아 대륙을 걸치는 동안 들렀던 모든 박물관의 소장품을 감상한 감상평은 이렇다: 그 당시에도 중국은 개밥그릇에나 쓰일 것 같은 중국제 짝퉁 자기를 대량 생산했던 것 같다. 농담.



찰스 스노우의 책 제목에서 따 온 듯한 표제가 눈쌀을 찌푸리게 했다. '두 문화'는 상당히 암울한 주제를 다룬 책이었고 교육 또는 자발적 학습에 의한 두 문화의 상호 점근이라는 스노우의 희안한 '타협'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 작자들이 '디지탈이 예술 만났네'를 정말로 주제로 삼았다. 그것이 재기발랄한 농짓거리였다 해도 1+1에서 이도저도 못해 망설이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에, 워낙 '두 문화'란 주제가 암울해서...

망년회에 가서 최근 언론이 물찬 제비처럼 호들갑을 떨어대고 있는 황우석 얘기를 좀 했다. 가능한 황씨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 '두 문화'라는 비웃음 가득 머금은 듯한 포스터를 보니 머리가 확 돌아버릴 지경이다. 황교수는 실은 관심 밖이다. 내 관심사는 과학과 사회의 건설적 타협, 협조적 공생이라는 껍데기는 그럴듯 하지만 까보면 내용 없는 인문쪽 수사는 아니다.

망년회에서 오랫만에 오래전 사람들을 만났다. 예나는 예쁘게 자라고 있다. 아무리 봐도 엄마만 닮아서 남편의 유전자가 끼친 영향이 참으로 미미하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2주 동안 겨우 컨트롤 2개 만들었다. 2주 동안 3400줄 짰으니까 하루 평균 280줄로 극히 생산성이 낮다. 이래서 UI 프로그래밍이 싫다. 여름에 취직시키려던 후배가 들어왔더라면 내가 지금 하는 이걸 맡기려 했다. 나처럼 UI 프로그래밍에 버벅대는 사람이 짜도 핵심 컴포넌트 2개 만드는데 2주 걸렸으니 그 친구라면 더 잘 했을 것이다.

R사장이 며칠전에 날더러 그 친구 다시 끌어올 수 있겠냐고 물었다. C사장의 소프트웨어 쪽이 차도가 안 보이니 똥줄이 탄 모양이시다. 몇 가지 이유로 불가하다고 말씀드렸다. 최근에 손윗 선배가 그 후배에게 계약서 한 장 안 쓰고도 낼름 날로 먹을 수 있는 기가 막힌 틈새 일자리를 소개해 줬는데, '그릇이 안되서 못 하겠습니다' 라는...



개 뒷다리 긁는듯한 소리를 해서,
나는,



리얼하게 저런 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 딴에는 '선배에게 피해 주고 싶지 않고 사회라는 곳이 그리 만만치 않은 곳'이라는 나름의 고민과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여야갑을공노들이나 포지숑 차이로 서로 따지고 살벌하게 덤비는 1차원, 2차원적 사고방식을 넘어서 3차원, 4차원, 11차원 등 보다 고차원의 세계를 넘나들게 되면,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황야의 무법자 4탄, outsider, concerned, and babo

이해당사자라고 믿어지는 그 '아무'도 저렇게 엎어져서 코 깨지고 비웃음꺼리가 되는 사태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outsider) 닭 표정을 짓고 기시감을 느끼며 얼떨떨해 있는 동안, 선배(concerned)는 회사에서 완전히 새 되고 삼일 내내 밤낮으로 술 퍼먹으면서 후배(babo)를 갈궜다. 지금도 마시고 있을까? 저러다 홧병에 먼 길 떠나시는 건 아닐까?

후배는 그릇이 작은 관계로 술자리에서 5인5색으로 돌림빵으로(풍속화의 '지나가는 행인'처럼) 멸시 좌시 경시 천시 도외시 당하며 인터넷 익스플로러로 외설 팝업 윈도우 뜨듯 정신없이 사방에서 무시로 펑펑 튀어나오는 '바보' 소리를 들었다. '그릇이 작아서 못하겠다'는 말은, 온갖 양념을 하고 구워 삶아 여자애를 기껏 눕혀놓고 나서 '자지가 작아서 못하겠습니다' 하고 줄행랑을 놓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인데, 본인은 인식이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이 R사장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다. 일하다가 그릇이나 자지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기괴한 현상을 닭 표정으로 관람할 수도 없고, 그야 물론 본인이 먼저 거절할테니.

내가 비록 천박한 말투와 개싸가지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어도,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 거짓말 못하는 버릇은 좀 고쳐야 할 것 같다. 생활이 불편하다. 표정에 다 드러나니 면전에서는 더더욱 못하고. 그러지말고 그냥 개싸가지로 남은 여생을 보낼까?

오늘은 간만에 일찍 자련다.
엇 벌써 3am이네?

그나저나 저 닭 표정 요즘 내 정신상태하고 정말 똑 같어. 다시 보자.


사내 닭사모 공식 로고로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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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다

잡기 2005. 12. 15. 16:03
박씨가 중얼거렸다. 비판적 시각? 인생을 조지는 몇 안되는 관점이지. 연말이 다가오면 북반구에 겨울을 가져다 주는 23.5도의 자전축 때문에 비판적으로 마음 아팠다.

'사랑은 봄비처럼 내 마음 적시고... 지울 수 없는 추억을 내게 남기고...' 2년 전 어느날 길 가다가 들었다. 듣자마자 좋아졌고 꽤 오랫동안 흥얼거렸다. 오늘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듣다가 제목을 알았다. 임현정, Year out in the island,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 (4:42)

밥 먹었으니 영혼을 말리고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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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잡기 2005. 12. 10. 22:29
난독증이 찾아오면 위키페디아에서 하이퍼 링크를 클릭하던가 만화책을 읽었다. 제목이 눈에 띄어 다운받았는데, 간만에 센스 있고 쉽게 슬슬 읽히는 만화책을 발견한 것 같다. 30개 넘게 보고 간신히 하나 건지는 정도면 인터넷과 다를게 없지. 아내는 내가 일은 안 하고 만화책으로 소일하는 줄 알고 있다. 고등어 조림이나 해주면 좋겠다. 앞으로 2개월간 할 일이 많아 한 주에 한 번씩 두통을 앓을텐데, 고등어에는 DHA가 잔뜩 있고 뇌 혈관을 확장 시켜주는 EPA가 있다. 잔대가리 굴릴 때 유용한 영양성분이다.

"당신 스타일은 뭐죠?"
"스타일?"
"구미에서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평가의 대상이 되지 못하며, 그런 자의 의견에는 귀를 기울일 가치 조차 없다고 간주되고 있어요."
"글쎄, 내게 그런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럼 스포츠는 뭘 좋아하죠?"
"스포츠는 하지 않아."
"어머. 남자인데 스포츠도 안 하면 못써요. 인류 역사상 남자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는 '살육'이죠"

-- 발푸르기스의 밤, 오메가 트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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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tine.

잡기 2005. 12. 9. 22:01
작년에 공각기동대 SAC 2기를 보다 만 생각이 나 전편을 다시 다운 받아 보기 시작. 작년에 볼 때 졸면서 봤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별로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

Serenity dvd rip이 돌아다닌다. 재빨리 다운 받았다. firefly와 함께 dvd로 구워놓자. 영화나 드라마, 애니를 볼 때 자막 때문에 걱정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자막을 제작하는 사람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데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는 기이한 현상을 '사회복지'라고 우겼다.

하루 10여시간 프로그래밍 하는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UI 프로그래밍을 아주 오랫만에 해봐서 어떻게 짜는지 헤메고 있다.

모바일폰을 잃어버리고 집에 돌아왔다. 엊그제 생고기를 먹으며 '반성과 자각'의 술파티를 가진 후 머리가 아파서 하루종일 정신 못차렸다.

아침 일찍 전화가 왔다. 핸드폰을 주웠다고 돌려준단다. 이미 분실 신고하고 임대폰까지 신청해 놓은 상태다. 전날 들렀던 가게와 버스까지 모두 뒤져봤지만 발견하지 못했고 임대폰으로 3개월쯤 버티다가 내년 3월부터 실시하는 휴대전화 보조금 제도에 편승하려고 나름대로 계획을 짰던 것이다.

아줌마는 휴대폰을 돌려주고 휙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 사례해 드리려고 주머니 속에서 2만원을 꼼지락 거리고 있었는데 미처 건네거나 말 붙일 기회를 얻지 못했다. 고맙습니다.

visual studio dot net 2005 beta 3 dvd를 얻으려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세미나에 갔다. 하품 나는 강연을 3시간쯤 참고 들었다. 경품 추첨에서 저번처럼 무선 키보드+마우스 셋을 받았다. 이 김에 C#으로 프로그래밍 한 번 해볼까? 생각하고 있었더니 inside C# 책을 한 권씩 나눠준다. 심지어 모바일폰을 줄로 연결해 허리춤에 차고 다니게 분실방지 모바일폰 고리까지 나눠준다. 노리고 있던 것은 포도주 한 병과 엑스박스 360이지만, 어쨌든 올해 참석한 모든 세미나에서 경품을 챙겼고 이 운이 언제까지 갈 지 기대된다. 키보드셋이 무겁고 들고 다니기 귀찮아 봉당 아저씨네 사무실에 들러 주고 가려고 했는데, 밖에 나오니 몹시 추워서 총총 걸음으로 지하철 역으로 들어갔다. 집에 가져온 김에 포장 뜯고 설치했다. 키 감이 구리다. 마우스가 무겁다. 마우스가 무거우니 마음도 무겁다.

홈페이지를 백업하니 용량이 800mb 가량 된다. 다 지우고 새로 시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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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악몽

잡기 2005. 12. 4. 17:10
눈이 왔다. 백화수복 사다가 전자렌지에 덥혀 마셨다. 알딸딸하다.

'믿어. 희망이 있기에 기적이 일어나는 거야' -- 그래서 믿는 도끼도 다시 보는 내 인생에 기적이 한 번도 없는 거였군. 희망은 또 뭐야? 먹는거야?

좋다는 피카사 쓰다가 불편해서 지웠다. 그림외 정보를 편하게 직접 다룰 수 있는 인터페이스가 없고(JPEG는 그림 자체에 코멘트를 삽입할 수 있다. 사운드나 아예 장문을 기록할 수도 있다) 만화책 볼 일 없는 사람들이 추억과 앨범을 '뽀대나게' 관리하는 데나 쓰는 프로그램같다. 컴퓨터에 뭔가를 지시했을 때 즉각적인 반응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하루에 다루는 텍스트나 이미지 따위가 얼마인데 화장품을 쳐바른 '코스메틱 프로그램' 따위로 시간을 소비해야 하나? 피카사의 인터페이스 역시 그런 면에서 형편없다. 세간의 평은 좋은데, 내가 보기엔 구리다. 요즘 보는 만화책들:

강철의연금술사 11
더 파이팅 70
도시로올시다 5
따끈따끈 베이커리 17
아스피린 7
얼라이브 6
클레이모어 7
트윈스피카 6
홀리랜드 8
호문쿨루스 6
플루토 2
노다메 칸타빌레 13
갓핸드테루 24
간츠 217화
드라이브 10
식객 7
데스노트 11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아는 만화는 피안도, 간츠, 클레이모어, 데스노트 등이다. 몇몇 보고 싶은 SF 만화는 만화방에나 가야 볼 수 있을 것 같다. 통 구할 수가 없었다. 레어 폐인 동산이나 마이너 왕따 지옥에 있겠지. 피안도는 작화부터 스토리까지 회가 거듭될 수록 뱃대기에 기름 끼는 것이 눈에 보이는 만화라서 읽기를 중단했다. 왠만하면 만화 연재 중단하지. 헝그리 베타 테스트 정신이 부족해.

'지구 정복 결사' 모임에 갔다. 어떤 면에서는 케로로 중사와 정서적 연대를 공유하는 사람들인 것 같기도 하고, 개중 자기는 SF 팬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오리발을 선뜻 내미는 사람들의 모임인 것 같기도 했다. 유씨에 따르면 '맛대결 지구탐험대'일 가능성도 있다.

이씨 아저씨와 프로젝트 방법론에 관해 열을 올리며 얘기하다가 앞선 일행을 놓쳤다. 또 다른 이씨 아저씨는 게임 회사 이야기라는 만화책을 들고 나타났다. 딱히 애정을 둘 데가 없어서 '여전히 회사로 가야 하는 인간들'의 얘기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할 소재를 다룬다.

양서 '호에로 펜'을 빌려준 이씨 아저씨와 책임 설계'론'과 아이디어의 기술적 분석에 관한 얘기를 더 할까 했는데(안개 낀 사르갓소에서 등대를 찾는 꼴이다), 인생의 다방면에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길을 잃고 헤메는 처지라 그러지 못했다. 마침 테쓰 아저씨가 정량적 해석에 관한 얘기를 아스님과 하고 있었다. 불편한 일이지만 1+1이 2가 되지 못하는 세계와 그렇게 되어야 하는 세계(람다산법에 의해 λ f x. f (f x)) 알아먹기 쉽게 풀면 S is successor, a = b if and only if S(a) = S(b). 0 := {}, 1 := S(0) = {0}, 2 := { 0, { 0 } } 나머지는 알아서)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이 꽤 오래전 일이다. 예전에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며 내가 해석하는 '세계 현상'에 두루 쓰일 수 있는 정식을 구현했다. 1+1 = 2x10^n. 악몽은 가시지 않았다. 정식화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보통' 사람이 1+1을 얘기할 때는 연산자 과적을 의미한다. 뭐 어쨌거나, 그 '의미'를 알아도 의미가 '지시하는 바'에 언제나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수학자가 아닌 대개 누군가에게 정량화와 정식화를 얘기할 때 수치와 덧셈 연산자는 문맥을 통한 지시자가 되기 때문이다. 지시자는 그 자신의 합목적성을 충족시킬 때까지 간구되는 (또는 공명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1+1 에는 따라서 답이 없다. 이성적(인체), 사회적, 문화적 '문맥'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문맥은 그 시대가 공통 규범하는 *합리성*을 말하는 것이지 과학적 인식체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정량화는 그래서 과학적 사고방식의 기본적인 요소일 뿐 그것이 과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문맥에 상응하는 부당한 논거에 의한 추리지.

그럼 역으로 말해 문맥만 맞으면 뭐든지 허용될 수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 처세다. 나는 악령과 함께 댄스 스텝을 행복하게 밟는 사회 속에서 주거한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세계-내-자신을 증명할 일목요연하고 확고부동한 체계를 스스로 체연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그런 경우가 있으면 알려달라. 남은 인생 동안 꼭 보고 싶은 바다니까.

드래곤 사쿠라: '주입식 이외의 교육이 무얼 할 수 있겠나!' 제 5화의 제목은 이랬다; '울지마라. 네 인생이다'

불쌍한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고(또는 테스 아저씨 말에 따르면 '아수라 백작'이 되었다고) 울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뭐 행복하면 된거지.

연애의 목적: 사귀었던 여자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 뿐이다. '피타고라스의 바지'라는 책에서는 '도대체 70년대 성차별 금지법이 나오고 사반세기가 지났음에도 여성은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차별 받고 있다니 저엉말 한심하기 그지없다' 라고 말했다. 저자는 이성적(합리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가 좀... 다르다는 것을 구분하지 않았다.

존경하는 아인슈타인이 그래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인간으로서는 형편없는 작자였고 그의 가정사가 비극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자신의 마음도 무겁다고 말한다. <-- 보시다시피. (상대성 이론과 행복한 가정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상대적인 건가?) 그가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달달 외웠다면 30대 이후 수십년이 지나 그가 죽을 때까지 하라는 연구는 안하고(성과가 없었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심심할 때 깽깽이를 켜고 가족을 내팽개친 채 산발한 머리와 맨발로 돌아다니며 낼름 혓바닥 내미는 사진이나 찍었다는 것은 더더욱 마음을 무겁게 했을 것이다. 이런 거지같은 주장을 보는 내 마음도 무겁다.

마음이 무거웠던 저자는 신의 입자라 불리는 힉스 입자를 찾기 위해 초거대 입자 가속기를 만들어 입자 탐색(집나간 미아 찾기 범 입자물리학 운동)에 열을 올리며 과학을 제의로서 신성시하는 과학자들의 애티튜드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으며 차별 철폐의 개안적 사고는 그곳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여성 과학자들이 끼면 과학문화가 달라진다라... 뭐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희망'찬 미래를 보여줄 수는 없고? 일부분 공감하지만 지난 30여년 동안 눈에 띄는 성과 없이 11차원 줄넘기나 하면서 SF틱하게 막나가는 양자역학이 여성에게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 같다.

그가 미주알 고주알 억울한 사연이라고 늘어놓는 여류 과학자들의 얘기는 30년 전의 것이었다. 여자애들이 그렇게 거리낌 없이 찌질스러운 주장을 하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하지 싶다. 찌질스럽지 못해서가 아니라, 상황을 그 자신과 거리낌없이 고립시킬 수 있는 나이브한 천연덕스러움 말이야. 피치못할 사정으로 개마초가 되서 참 미안해지지. 오직,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울린 여자 수를 손 꼽아 봤다. 손가락이 모자라서 관뒀다.

연애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고, 1+1의 복잡성에는 미치지 못하나 여자가 슬쩍 낀 관계의 복잡성을 나타내는 내 나름의 수식이 있다; n(n-1)/2 approx. n^2 어...? 그런데 그런 식이 정말로 존재했다. 이더넷의 창시자가 만든 네트웍의 법칙이라나? 팔로 알토에서 이더넷 만든 작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한심한 네트웍을 만들어서 팔아먹었나... 궁금했다. 똥고집이었다. 그 똥고집이 에테르넷이라는 '물리'적인 미디엄을 통해 세계를 석권한 기술적 우점종이 된 과정은, 호모 사피엔스가 세계를 말아먹은 어이없는 상황과 지나치게 흡사하다.

아무튼 어린 여자애들이 놀다가 하는 심한 얘기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너랑 절교야' '미친년'이나 '개같은 년' '씨발년' 등속의 욕설은 그에 비하면 고작 감탄사 밖에 되지 않는다. 그걸 꽤 오랫동안 재미있어 했는데, 시대가 바뀌니 욕설은 감탄사 나열로 한심하게 바뀐 것 같다. 시대가 그렇게 바뀌었어도 우아함을 잃지 않은 나는 '피타고라스의 바지'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너랑 절교야!


제이양이 상 받은 기념으로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한 턱 쏘아서 즐겁게 마셨다. 고마운 김에 그의 출품작을 정성껏 읽었다. 그래픽 노블을 지향하는 것인가? 그림이 글에 떠밀려 질질 끌려다니는 인상이다. 작화의 공간적 상상력이 영 꽝이군.

주인공이 다리가 부러졌을 때 '그래 이제 지구상에서 중력을 지탱해 줄 다리가 없어졌으니 남은 두 팔을 열심히 퍼덕여 자력갱생으로 무중력의 우주를 헤엄쳐 나가야 하는 당위성을 스스로에게 납득할 결정적 계기가 되었군' 하고 무릅을 탁 쳤으나, 주인공은 한가할 때 바둑이나 두면서 3개국어 열나 공부해서 우주에 갔다 온다. 무시하자는 건 아니고, 아, 언어학습의 중요성은 이 만화를 참고. 그냥 갔다 왔다. 믿음과 희망으로 충만한 명랑 범생 성공기다.

... 그리고 우주에 자신이 위치할 거점을 찾는다는 탐색의 연대기다. 내 인생, 그러니까 정열의 초절정 패턴 연대기와 흡사하다. 궁금해서 우주류가 무엇인지 찾아봤다. 상상과 달랐다. 압도적인 외계 흰돌 군단이 개떼처럼 목성 외곽에서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면 목성을 내폭시켜 오르트 검은 돌 졸개들을 전개해 적을 물리친다거나 백돌 검돌이 난해하게 소용돌이치는 두 은하단이 맞짱을 뜨는 신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생각만 해도 골이 아파오는 3차원 바둑도 아니었다. 이렇게 멋진 가젯을 주인공의 소녀틱한 감상주의를 거들기 위한 목적으로만 사용한 것이 아깝다.

전반적인 인상은 습작 수준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인물의 몸뚱이와 정신세계를 난도질하여 뼈와 살점과 피가 튀긴 옷을 입고 수술실을 나와 히죽히죽 웃으면서 '수술이 끝났습니다' 라고 말하는 변태 외과의적인 각오는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각오 없어도 돈은 된다.


이런 느낌으로....


이런 정신으로...

도서관에 갈 때는 산을 넘어 갔다. 책을 낑낑 메고 산을 넘어 도서관에 가서 반납하고 새 책들을 빌려 다시 산을 넘어왔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책을 이렇게 쉽게 빌릴 수는 없는거야', 자신을 채찍질할 겸 부러 좋은 길 놔두고 이렇게 힘들게 왔다갔다 하는데, 회원님은 대출기한을 넘겨서 책을 대여해 갈 수 없다는 말을 하면 쓸쓸해진다. 요즘은 한 달에 3-4권 읽기 바쁘다. 시리즈 물을 네 개나 해치우고 만화책으로 폭식을 하다보니, 직사각형 안에 배열된 재미없는 글자 조합을 보면 졸음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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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

잡기 2005. 11. 27. 14:33
세미나에 갔다가 같이 간 회사 직원들과 경품을 싹쓸이 했다. 뭔가 양 손 가득 쥘 것이 남는 만족스러운 세미나였다. 세미나 중에는 msn을 설치해 놓고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는데 스물네살 먹은 중국 여자애가 나를 막무가내로 컨택 리스트에 추가하고는 한국 연애인들의 사진을 줄줄이 보내주면서 이들이 성형을 했는가, 안 했는가를 알고 싶단다. 특히 송혜교를 쳐 준다.

그에게 충분한 돈이 있으면 성형을 하겠는가? 물어보니 사고나 기타 이유로 피부가 얽히지만 않았으면 성형을 할 이유가 없다는 시시한 답변을 들었다. 중국 여자애들은 화장을 안 하지만 잘 빠지고 잘 생겼다. 하지만 한국 여자애들에게서 통 발견할 수 없었던 기품있는 자부심을 지녔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왠일인지 재산과 가문이 중요치 않게 된 자유연애 사회에서(특히 남자들이 여자를 보는 시각이 그렇게 순진하고 바보스러워졌다) 경쟁력으로 남을 만한 것이 고작 몸매와 얼굴 정도이고 그걸 일찌감치 깨달은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일종의 자기만족과 사회적 니즈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최선의 전략을 구사한 것이라고 말했다, 웃었다.

그럼 또다른 매력포인트인 지성은? Maureen Dowd의 글이 일으킨 얼마전 평지풍파에 관한 와이어드의 기사는 이랬다; 똑똑하면서도 결혼을 선택하는 여성들 -- 똑똑한 여성이 전략적으로 멍청함을 택하더라도 삶의 다양성을 영위한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모린 다우드의 글에 대한 심한 공격과 반론들과 달리 이 기사의 내용은 긍정적이고 재미있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마지막 문구에는 유머 감각마저 있었다. '그러나 남성들은 여전히 회사로 가야만 한다'

그게 아마도 저저번주 였던가? 지구가 실없는 공회전을 계속하는 바람에 날짜를 잊었다.

고기와 술이 있단다. 두말 없이 비단 아저씨네 파티에 갔다. 수익이 거의 안 나는 인력 노가다 서비스 업종에서 일 년째 고생하고 있는 그는 아직 자신이 가진 철학을 잊지 않았다. 참석한 새로운 면면 앞에서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자기강화, 그러니까 설교를 늘어놓고 있었다. 배 나왔다.

박씨 아줌마는 자나깨나 만나기만 하면 날더러 결혼 잘 했다느니 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는 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있고 그의 남편은 아마 집에서 설겆이를 하고 있을 것이다. 박씨 아줌마는 바라나시에서 봤다. 가트에서 타들어가는 시체를 보며 울었고 죽은 언니를 생각하며 훌쩍였다. 게스트 하우스 옥상에서 뛰노는 원숭이들을 구경하며 맥주를 홀짝이다가 자기가 덮칠 수 있게 내 숙소의 문을 열어두라고 협박했다. 문은 잘 잠궈놨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저씨와 얘기를 나눴다. 나는 사천성의 음식맛이 죽여준다고 얘기하던 참이었다(하지만 불의 숨소리가 배인 중국 요리를 맛보기 위해 맥도날드 화장실에서 먹은 음식을 게우고 다시 식당을 찾아 돌아다니며 하루 여섯끼식 먹어치우던 미치광이같은 맛따라 길따라 얘기는 하지 않았다). 옆 자리에는 요리사가 앉아 있었고 얼굴이 벌개진 그 친구는 소믈리에 자격을 최근에 얻었다. 자기 소개를 하면서 언젠가 와인 여행을 해 보잔다. 이름이 통 기억나지 않는 아저씨는 흔히 재수없는 타잎이라는 얘기를 듣고 있었지만 난 그와 중국 얘기를 했다. 어디가 좋았냐고 묻는다. 사천성, 운남성. 그의 눈빛이 흐려졌다. 사천성에서 중국 아가씨와 사귄 것 같다.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우리는 중국 아가씨들이 참 예쁘고 순진하고 수줍다는 등, 보기 드문 천혜의 서식환경에 아낌없는 찬사를 늘어놓았다. 이사님과 라사에서 카트만두까지 자전거 코스를 지도를 봐가며 검토했다. 비참한 얘기지만 내 체력에 아직 자신 없다. 하겠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임씨 아가씨는 라오스에서 만났다. 파타야를 안주삼아 독한 라오스 위스키를 마셨다. 나는 사귀던 여자친구 얘기를 횡설수설 늘어놓았던 것 같다. 비엔티앙의 허름한 시장 골목을 헤메며 그녀의 생리대를 사주기 위해 노력했다. 절간에 들어가 중들과 놀았다. 몇 년전 오랫동안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는데 일 년에 겨우 한 번 얼굴을 볼 때마다 내가 그 얘기를 꺼내 신경을 건드렸다.

인도 아저씨 둘이 파티에 있었다. 샴은 몇 번 얼굴을 봐서 낯설지 않다. 인도계 인텔리라는 그는 예쁘장한 아가씨와 결혼하여 한국에 정착했다. 다른 사람은 IT 업계에서 일하던 친구다. 인도인의 꼬들꼬들한 영국식 억양이 왠지 정겹다. 그들과 함께 일하는 한국인 아저씨와 교육과 인력수급에 관한 얘기를 했다. 일전에 만난 한사장님은 인도에서 인력을 수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단가문제였다. 사정을 들어보니 가장 큰 매릿이던 가격경쟁력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인도인들이 한국에서 일년쯤 일을 하다보면 한국인들의 연봉을 알게 되고 다음 연봉 협상은 보통 '현실적 수준의 타협'이라는 '난항'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IT 업종에 종사하는 인도인들은 길거리에서 만나는 릭샤왈라하고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다. 종교 문화적 자기정당화 내지는 사기를 안 치고 모던하고 깔끔하다.

홍기 아가씨는 이집트에서 봤다.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는 술탄 호텔에 커다란 짐을 들고 두 동생들과 도착했다. 머리를 싸매고 주방에서 뭘 해먹을까 고민하던 때였다. 유럽과 이집트를 구경하고 유럽으로 돌아가려 했지만(유학생이던가?) 마침 시리아에서 돌아와 그것을 기쁘게 추억하고 있던 처지라 시리아로 가라고 말했다. 내가 준 시리아 정보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잘 다려진 우롱차처럼 예전에 없던 색기가 그의 전신에서 우러나왔다. 남자들은 그걸 불편하게도, 감사하게도 받아들이는 것 같다. 난 그냥 재밌어 했다.

세바스 아저씨는 프로그래머다. 그는 업종을 바꾸고 나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아시죠? 프로그래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암 알고 말고. 골방에 틀어박혀 계절이 바뀌어도 하는 삽질은 바뀌지 않고 회사 외에서 사람들을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육체적으루나 영혼적으루나 바쁘고 피곤한 사람들. 나는 한국, 일본, 중국이 합작하여 새로 제작중인 신 실크로드 흉을 봤다. 이제 그들은 타클라마칸 사막 한 복판에서 gps를 들고 유적지를 찾아간다. 작년에 방문했던 유적지 대부분은 사막에 휩쓸려버렸다. 일본인 학자와 중국인 학자가 그나마 기둥만 남은 도굴된 폐허 앞에서 허탈해하며 몇 번씩 되뇌인다. '없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신 실크로드는 구 실크로드의 철지난 로맨티시즘을 울궈먹으려 했고 그 점이 맘에 안 든다고 말했다. 드라마 로마(rome)가 볼만하단다.

일레 아가씨는 얼굴 본 것이 몇 번 안 된다. 그는 대뜸 날더러 마누라 한테 음식투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직설적이고 알려진 바로 분위기 메이커다. 나긋나긋 춤 잘 추고 노래를 잘 했다. 입을 다물었다. 요즘은 줄기차게 야채만 복용해서 '채식주의자' 중에는 미식가가 있을 수 없다는 증오에 찬 거짓말을 서슴없이 내뱉고는 했다. 일레 아가씨 일동에게 나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 폭력을 서슴없이 구사하는 싸가지없는 남편 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점은 내 평판과 호응했다.

아내와 함께 터키를 여행했다는 친구는 파티에 모인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느꼈다. 그럴만도 했다. 장기여행자들의 진정한 존재감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데 있다. 삥 뜯기고 사기 당하고 실랑이를 벌이고 대자연의 위력에 경이와 공포를 느끼고 훈훈한 사람들의 정에 눈물 짓는 개개의 사연에 감화되지 않는 종류는 로보트 밖에 없으니까. 메인 생활과 자유로운 생활의 양립 가능성이라는 고전적인 딜레마에서 선택과 타협이 불가피하다는 류의 역시 고전적인 얘기를 나눴다. '욕망하는' 자유는 댓가를 치루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확고한 목적의식과 감각차단을 통해 세계를 가시화된 지평 이내로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 김선배의 의지는 탁월했다. 하긴, 그의 가장 불쌍한 점이기도 했다.

많은 남자들에게 사랑받을 것이 틀림없다고 내가 서슴없이 지껄이던 아가씨도 참석했다. 그의 남친은 오토바이를 몰고 종횡사해 대지에 먼지바람을 피우며 돌아다니던 캐나다인(?)이었는데 언젠가 그가 쓴 책을 받아서 읽다가 재미가 없어서 그만 두었다. 재미 없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여전히 생글생글 잘 웃는 반가사유상을 닮은 이목구비가 눈길을 끌었다.

기자 아가씨는 문 밖에서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 아가씨를 볼 때마다 캥기는 구석이 있다. 작년에 아내가 내 후배를 소개해 줬는데, 당일 나하고 함께 대낮부터 술 마시다가 얼큰하게 취해서 그 아가씨를 바람 맞췄다. 그 친구 잘못이라기보다는 내 잘못이 컸다. 그후에도 그 놈이 누나가 운영하는 술집에 들어가 깽판을 치는 등 좀 미안한 사정들이 생기고 말았다. 그런데 줄담배를 빨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도심의 보잘것없는 불빛 사이로 투영되는, 너른 바다처럼 시원한 비전없이 늙어가는 우아함? 아니면 위산이 역류하는 마감의 공포?

아내가 소매를 끌어 파티장을 빠져 나왔다. 평소 아름답고 편안한 자유인 신분이었던 도자기 굽는 잘 생긴 친구가 양복을 입고 땀 나는 상견례를 마친 후 갑자기 나타나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고(처녀들의 이해할 수 없는 탄식과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연극 한다는 림카 아저씨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지독한 터키 위스키를 계속 완샷 하다가 책상에 올라간 참이다.

배를 채워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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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en was god's second mistake. nietzsche가 한 말이란다. 그랬나? 니체 형님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심금을 울린다.

이 우주에서 사랑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우주가 남는다. -- terzeron.byus.net에서 보고 링크한 다음 '그렇고 말고!'라고 토를 달아 두려고 했더니, 사이트가 사라진 것 같다. 그러면서 그는, '그러나 남은 우주는 몹시도 쓸쓸하고 공허할 것이다.' 라고 부언했다. -- 아침에 본 바구니에 사과가 두 개 있었는데 저녁 때 다시보니 빈 바구니만 남아 있을 때 느끼는 공허함인 것 같다.

존재한다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 적은 없던가? 지금껏 본 미국 드라마에 절대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것이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와 need to know base다. 이거 빼면 드라마의 갈등 구조가 성립이 안되는 것 같다. 텔로미어가 많이 닳았지만 난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형이상학적인 갈등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타잎이라고 생각했다 -- 따라서, 누가 감히 평범한 정신질환과 언행으로 상처를 주겠다는 주제넘은 생각을 할 수 있겠나?

존재하는 것만으로 상처를 줄 수 있는 우주가 있고, 신의 두번째 실수도 있는데.
불편해.

로스트: 간만에 변태스러운 드라마를 봤다. 사회학자들이 달라붙어 시나리오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기대한 내가 바보지. 시즌 2기까지 왔지만 이들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알러지나 신경쓰며 살아온 문명인은 34만여종의 생물군이 살고 있다는 아마존 정글에 떨궈두건 수천종 새들의 낙원이라는 열대 무인도에 떨궈두건, 간단히 말해, 별 일 없으면 죽는다. 그래서 무인도에서 40여명이 웨스트윙 놀이나 하고 자빠질 개제가 아니다. 사실 보고 싶었던 것은 극단적인 환경에서 40여명이 이룬 원숭이 집단이 과연 얼마나 빠른 시간에 그들의 두뇌와 '협업'으로 안정적인 생존 환경을 구축할 수 있을까다. '사회학적으로' 흥미로운 소재다.

앨리어스: 몇 년 동안 왜 그것이 그렇게 인기지? 라고 물으면 녹음기 틀어놓은 듯 이구동성으로 말하길, 눈치빠른 말라깽이 여자애가 헬스 몇 개월 한 듯한 허접한 무술로 벌이는 소위 액션이란 것에 눈물 찔찔 짜는 가족, 친구, 사랑, 일 등의 부정합이 만든 신파를 뒤섞어 놓은 정말이지 시시한 시리즈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넷이다. 적어도 그들의 말 중 진실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최근 알리아스를 보기 시작했다. 인상: 눈치 빠른 말라깽이 여자애가 헬스 몇 개월 한 듯한 허접한 특공무술로 벌이는 소위 '액션'이란 것에, 쿵작쿵작쿵작 서양 뽕짝 리듬에 맞춰 매 화마다 코스프레를 되풀이 하는 가족 드라마. 엄마가 KGB 이중간첩이고 아빠는 CIA 이중 간첩이고 그들의 유일한 딸은 SD-6라는 사악한(?) 단체의 이중간첩이라는, 진정한 콩가루 집안을 사이에 두고 미국 드라마의 지나치게 특징적이고 짜증나는 주제인 family value를 어김없이 반복한다.

램발디라는 과학자가 500년전에 만든 천재적인 발명품을 정보기관들이 미친듯이 쫓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심지어 그는 500년전에 이진수로 편지를 썼고 다 빈치오 친분이 있었으며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불로장생의 엘릭시르와 영구기관(zpe) 따위를 척척 만들어냈다) 회가 진행될수록 '제대로 낚였다'는 기분이 든다.

드라마 삽입곡: 러시아 민속 음악을 블루그라스로 리컴파일하면 이렇게 된다: Bering Strait, Porushka Paranya (2:42) 예전에 즐겨듣던 후아네스의 수퍼 히트곡도 나왔다. Juanes, Adios le pido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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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거리

잡기 2005. 11. 18. 15:14
여자와 식사를 할 때 생길 수 있는 비극 -- 수긍이 간다.

정력 키우려다 파이프에 성기 박혀 고생 - 현지 언론은 이 청년이 어떤 이유로 파이프에 성기가 끼게 됐는지 말하지 않고 있으나 “정력을 강하게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소문을 듣고 이 같은 짓을 한 것이 틀림없다고 전했다.

민족, 국가는 운명공동체다 라는 말을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보고 의문을 품었다. 성기가 파이프에 박혀 철물점에서 쇠톱으로 열심히 파이프를 자르는 중인 한국인에게 다가가, 당신과 나와, 한국은 운명공동체입니다. 라고 말하면 뭐라고 할 지 궁금하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전쟁의 참화가 덮쳐도 우리는 운명공동체에요. 그건 그렇고 로또에 당첨되었을 때도 당신과 내가 운명 공동체일까?

감정은 이성과 마찬가지로 학습과 경험에 의해 다듬어지고 섬세해진다. 얼음칼처럼 차갑고 날카로울 수도 있고, 풍부한 색채와 시원함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400만년 전의 원시림 비슷한 사람도 있다. 날더러 감정이 없다느니 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인간 네트웍을 통해 거래되는 그런 종류의 감정에 관심 없는 것은 사실이다. 연꽃을 보다가 연못을 잊듯이.

직지 사이트를 수리하고, 생각난 김에 링크를 정리하다가... koreacon.org에 들어가봤다. 멋지게 바뀌어 있었다. junksf.net 역시 해킹 당했다. 생각난 김에 아스키 에니메이션 스타워즈을 다시 보았다. 루크의 인생? 예쁘다고 생각한 여자는 자기 누나였고, 죽어라고 싸웠던 상대는 아버지였다.

일주일을 정신없이 보냈다. 서점과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공부하고 밤에는 프로그래밍에 몰두했다. 그러나 개연성 없는 순전한 의지일 따름이다. 나와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는 사람들은 운명공동체일까? 너와 나의 소망과 의도와는 달리 운명이 그 스스로 움직이는 신적인(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 힘으로 우리를 배신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시련을 감당할 수 있을까? 운명적인 시련을 큰 노력 없이 극복하는 길이 있다. 사업 접고 놀거나 다른 일을 하면 된다.

촘스키가 예전에 분류한 타잎2 유한상태기계를 가르칠 방법을 궁리하다가 간단한 인터프리터와 컴파일러, 그리고 한글 입력 오토마타를 구현하는 프로그램들을 하루에 하나씩 짰다. 프로그래밍이란 혼란스러운 데이터열로부터 패턴을 찾는 과정이니까. FSM을 제대로 교육시킬 다른 방법은 없을까?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AGCT로 이루어진 핵산 염기 배열의 분지를 예측하여 그것을 압축하고 비교하는 예제를 구상했다. 구현하려고 보니 너무 복잡해서 인턴들에게 과제로 내주기는 부적합했다. 차라리 여러 알고리즘으로 NP 컴플릿 문제에 접근하는 다양한 시각을 경험하게 해 주는 것이 낫겠다 싶다.

예전에 봉당 아저씨는 내가 광범위한 분야를 학습했지만 정작 뭐 하나 잘하는 것이 없는 전문성의 결여가 눈에 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요점을 제대로 파악했다. 전문분야가 없다. 오직 교양선택만 즐비하게 널렸을 뿐이다. 프로그래밍의 여러 필드는 문제에 접근하는 각기 다른 양식과 규칙을 가지고 있고, general problem solver가 되려면 발할라에서 활동하는 '갓핸드' 테루처럼 성형외과도 보고 내과도 보고 뇌종양도 제거하고 맹장 수술도 해야 한다.

오히려 특수한 전문성을 가지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동안 자나깨나 꿈속에서 마저도 새로운 알고리즘을 개발하려고 애를 쓰다가 vhdl test bench를 이용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만들었다. 새로운 언어에 익숙해지는 부담없이 이전에 칩을 디자인한 자료를 가지고 그대로 테스트를 수행하는 것이다. 여러 분야의 '교양' 지식을 합종연횡하여 얻어지는 크로스오버나 뮤테이션 류다.

닥치고, 지금은 운명공동체에 몰두할 때다. 다들 약간씩 머리가 이상해져서 실실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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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스프 만들기

잡기 2005. 11. 8. 23:44
어제 포스팅 이후 구글 애드센스는 내 계정과 사이트 광고를 차단했다. 원인을 추측해 보건대,

1. 구글의 훌륭하고 멋진 광고 시스템이 클릭 노가다를 탁월하게 감지
2. 애드센스로 이틀만에 40불 벌었다고 떠벌리다가 제대로 걸렸음
3. 하루 평균 60명 들어오는 진정한 마이너 사이트마저 감시하는 xxx들의 고발
4. 파키스탄 난민을 돕기 위한 사이트 왕래자들의 뜨거운 클릭질의 부작용
5. 신자유주의자들의 박해

원인은 1항이다. 리퍼러 추적중 재밌는 것을 봤기에 미소와 함께 4항을 받아들였다. 애드센스 놀이는 그만 접으련다. 좋지 않다.

술 먹다 말고 아내에게 버섯, 다시마, 말린 황태, 가츠오부시 등등 온갖 '천연재료'에 함유된 글루타민산 나트륨을 화학적으로 정제한 미원과, 버섯을 잔뜩 넣어 감칠맛을 내는 것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전골에 버섯 백 개 넣는 것과 조미료 한 스푼 넣는 것이 같다고 말한 것이다. 물론 버섯은 미원 맛 외에도 여러 가지 복합적인 맛을 낸다.

천연 재료만으로 라면 스프를 완벽하게 재현한다는, 3년전 여행의 어떤 다짐을 비로서 실천에 옮겼다.라면 스프와 유사한 어떤 것이 있으면 파, 멸치 따위를 구할 수 없는 타지에서 고향맛 내기가 쉽다. 즐겨먹는 삼양라면의 스프 성분은 이렇다:

* 정제염
* L-글루타민산 나트륨
* 설탕
* 조미분에이(돼지고기)
* 씨제이-1(대두)
* 맛미락에스(우유)
* 난각칼슘(계란)
* 쇠고기 0.37%(국내산)

내가 만든 스프 재료는;

* 다시마 3cmx3cm
* 말린 표고버섯 1/4개
* 똥을 뺀 마른 멸치 2개
* 마른 새우 3개
* 고춧가루 많이
* 후추 약간
* 설탕 약간
* 소금 약간 많이

이것들을 블렌더로 곱게 갈았다. 재료는 라면 첨가 스프와 비슷하지만 자작 스프로 끓인 라면 맛이 훨씬 풍부하고 깊다. 국물의 발색은 똑같다. 소금 조절이 쉽고 부재료(마른 황태포, 말린 우거지, 마늘 가루, 마른 오징어, 청양 고추, 사골, 육포, 찻가루 따위)를 첨가하면 다양한 맛을 낼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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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용우노맛

잡기 2005. 11. 7. 22:33
일제시대 때부터 이어져 온 것 같은 포맷에, 쓸만한 정보라고는 거의 없는데다, '인자하신 아버님과 푸근한 어머님 사이에서 이남 일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는 류의 자질구레한 자기소개서가 포함된 고리타분한 이력서로는 그가 엔지니어로서 어떤 지랄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자기소개서가 도움이 안된다. 인자하신 아버님과 다정한 어머님 사이에서 살인범, 강간범, 또는, 또라이로 성장한 케이스도 꽤 된다. 내가 알기론.

저런 이력서를 요구하거나(관리차원에서 정형화된 형식이 필요하다는 인사담당자의 말씀) 저런 이력서로 사람을 선별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능력이지 싶다. 얼굴 근육과 눈빛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여자들의 탁월한 인지 능력(뭐 대부분의 젊은 여자들에게는 보기 드문, 사회적으로 쇠퇴하고 억제된 능력이지만)은 면접할 때 쓸모가 있을 것 같다 -- 아줌마 여덟 명으로 면접팀을 구성해서 신선한 먹이감을 눈 앞에 가지고 놀며 점수를 메기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Q채널에서 입이 거친 처녀 몇 명이 신부학교에 들어가 고생하는 넌픽션 드라마가 나왔다. 신부 수업 백날 해봤자 '레이디'가 되긴 글른 아가씨들은 아줌마 셋의 가혹한 판정에 의해 쫓겨났다. 내가 아무리 잔인하다지만 저 아줌마들에 비하면 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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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 김에 하는 말이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내 눈알은 표정이 '풍부'해서 거짓말을 하면 누구나 제깍 알아차린다. 거짓말을 하고 싶을 때는 그래서 소설을 썼다. 소설은 딴 세상 얘기라서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쳐 (정말 활짝 펼쳐)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도 티가 안 나는 장점이 있지만 구상과 구현 등, 쓸데없는 노력이 많이 든다.

정사장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대뜸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냐고 묻는다. 과거는 내 인생에서 가장 도움 안 되는 부분이다. 공들여서 설명하는 얘기를 한 시간쯤 듣다가, 여섯 대의 서로 별개인 서버가 경쟁하듯이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는 시스템에 참을성을 잃고, 개념적으로 별게 없는 유비쿼터스 시스템을 알기 쉽고 직관적으로 재구성해 주었다. 할 마음은 안 생겼다. 메추리와 몇 번 일해 본 적이 있는데 박봉에 시달리는 그 친구들은 공무원처럼 한가하게 일해서 뒷일을 감당키 어렵다. 물심 양면으로 황폐해진다. 무서운 똥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얼마 생각해요? 라고 묻길래 한 달에 700 주세요~ 네고는 안되요~ 라고 했더니 어 글쎄, 주겠단다. 어 그럼 안되는데. 어 시나리오대로 안 나가네? 하는 수 없이 소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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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황씨와 술 마시다가 미래가 어둡다는 류의 얘기를 했다. 그건 내가 4년 전 소설 쓴답시고 '작가적 입장'에서 -- 한동안 유행하던 디스토피아적 관점에서 -- 관찰하다가 자본가에게 쉽게 정보 수집과 돈벌이를 가능케 하고 소비자의 동의없이 지껄이는 냉장고나 엘리베이터나 옥외광고나 수퍼 진열대나 카운터나 하다못해 착착 돌아가는 교통 시스템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RFID나 적외선, 무선 등을 이용한 비접촉식 인지체계는 거리에서 벌거벗고 다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지금 하고 있는 비상식적인 일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본가의 돈을 살금살금 착취해서(이런 로맨틱한 측면도 있다) 파키스탄 난민 아이들이 한 겨울에 얼어죽지 않도록 보태주려고 했다. 결심이 흔들릴까봐, 담요 살 돈을 미리 보내놓고 그 액수를 노력과 근성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내 마음의 평화와는 상관없다. 거리에서 틈틈이 무선랜에 접속해 날뛴 결과 이틀 동안 40$을 벌었다. 액수가 아름답다.

그런데, 그저께 밤에 그 동안 번 돈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러 들어갔더니 이상한 동의서가 불쑥 튀어 나왔다. 아, 녀석들은 돌대가리가 아니구나. 기특하게도 사용자의 악의적인 조작으로 인한 수익 발생을 차단하는구나. 역시 사업 제대로 할 줄 아는 믿을만한 기업이야 라고 경탄하면서 아쉽지만 이제 나쁜 짓은 그만 해야지 생각했다. 으쓱, 아용우노맛.

인류를 휩쓸었던 세형돌날 구석기 혁명이 알류산 열도를 건넌 후 베링해 양쪽에는 오직 황인종만 사람같이 생긴 사람(잉우알렛)이라고 주장하는 이누잇이 살게 되었다. 그들은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백곰에게 한 방 맞아 머리가 평원 위를 호를 그리며 멋지게 날아갈 때 즈음이면 세상이 뭐 다 그런거지 라는 뜻의 '아용우노맛'이란 말을 중얼거렸다.

3천대로 구성한 클러스터는 페타 바이트 단위의 인덱스를 만든다. 그런 클러스터가 30개나 있고 일 년마다 용량이 두 배로 늘어난다는 그 회사의 멋지고 훌륭하고 인공지능적으로 섹시한 시스템에 순수한 감탄사를 탄식처럼 내뱉은 후 -- 폐속으로 유황가스가 들락거리는 느낌이지만 -- 새 마음으로 다시 로긴했다. 로긴했더니 엊그제 번 41$이 그대로 있다. 황금 주말에 노트북을 들고 다니면서 몇 번 더 작업하면 수표를 받을 수 있었을텐데, 최소한 파키스탄 아이들 30명을 강추위에서 구할 수 있었을텐데.

후회스러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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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외계인들이 납치해 가야 완치가 가능한 여러 알 수 없는 성인병들에 시달리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직장인 김씨 아저씨에게 들은, 애를 끊는 듯한 처절한 싯귀를 직장인 이씨 아저씨에게 해줬다: 日職 集愛 可高 拾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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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아저씨는 메신저로 간만에 연락했다. 그는 로또에 당첨되었다. 뭐라고 자괴감을 드러내건 그가 받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십수년 글 쓴답시고 살았고 그 만큼 쓸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까 -- 아인슈타인 마을 사람들은 모두 친척이야(relatives) 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러더니 댁은 안 쓰쇼? 라고 묻는다. 인생을 즐기다보니 소설 쓸 생각이 안 든다.

SF는 일종의 애티튜드가 없으면 쓰기가 불가능한 장르다. 내게도 그것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긴 했다. 고삐리 시절부터 SF 쓰려고 노력했다. 십여년 동안 글쓰기 연습을 죽어라고 했다. 문제가 좀 있어서 해결하려고 천 단어 미만으로 문장을 구사하는 -- 발가락이 가려워도 긁지 못하고 참아야 하는 종류의 --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을 했다. 꾸준히 삽질하여 몇 년을 더 연습한 결과 가능한 단계에 이르렀다. 흡족했고, 흡족했으니까 중단했다. 아용우노맛이지. 이거 열 번 더 중얼거리면 백 번은 말한 셈이다.

번외로, 서점에서 한국문학 코너에 들러 책을 들춰 보다가 늘 떠오르는 생각인데, 한국문학은 황무지에서 변사체로 썩어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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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이런 잡동사니'를 사서 집안에 쓰레기만 늘어난다고 불평했다. 그래서 저번 주엔 PDA를 워터 프루프 자켓에 넣어 목욕탕에 갔다. 냉탕 또는 온탕에 누워 소설을 읽었다.



방수팩은 쓰레기가 아니다. 해변의 새하얀 모래 속에 지갑과 숙소 열쇠를 파묻고 흘낏흘낏 뒤를 돌아보며 물가로 달리던 시절은 지난 것이다. 지난 여름에 방수팩을 두 개 샀는데 다른 하나는 카메라를 넣어두고 빵으로 유혹한 물고기떼를 찍을 것이다. 나는 바닷가에 혼자 가도 잘 놀았다.

꿈 속에서 계시를 받고 빵을 만들었으나 이스트를 넣지 않았고 빵을 부풀리지 않아 쿠키+찐빵 상태가 되었다. 먹다가 인상을 구겼다.

어젯밤에 10km쯤 걷고 나서 아줌마는 소파에 퍼진 채 자전거 타러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할일없이 케로로 중사를 보며 빈둥거리다가 스스로가 굉장히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어 뒷산에 올라갔다.



새로산 신발에 아직 적응이 안된다. 비봉 매표소로 나왔다.



이왕 올라온 김에 카메라 테스트를 했다. 계속 수동 모드로 찍는 건 좋은데 역시 기계가 안되려나... 카메라에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그저 내 눈이 보는 대로 찍어주면 고마울텐데.



백운대가 보인다. 북한산에 자주 올라오면서도 백운대 만큼은 가지 않았다. 사람이 많을 꺼라는 막연한 추측 때문에..



한 시간 좀 지나면 해가 진다. 단풍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해요 아저씨! 말풍선 예쁘게 달아 놓을께요.



그냥 가시네



아내를 불러 보리밥을 먹고 장 보러 갔다. 가끔은 내가 아줌마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찍은 사진은 대체로 눈이 보는 그대로 잡혔다. 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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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

잡기 2005. 10. 30. 13:07
여자와 언쟁할 때는 조심하는 편이다. system적으로 접근하면 그들의 verbal output center는 ridiculous speculation unit과 self reasoning processor에 probabilistic like/dislike decider가 함께 머리 속에서 주사위처럼 굴러다니며 병행처리 되는 것 같다. 하여튼 여러 다양성이 공존하는 이 세계에서 조중동이나 여성을 대할 때는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장애우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분닥 세인트(boondock saints) - veritas & aequitas 문신. 코메디 영화인가? 피식피식 웃으면서 봤다. 살인, 강간 하면 성부, 성자, 성신의 이름으로 죽여버리겠다고 말한다. 그건 그렇고 컬럼바인 총질(또는 볼링) 사건과 더불어; 아직 서부시대에 살고 있다고 뼈 속까지 믿고 있는 미국 시민 또는 '자경대원'들의 정신상태는 정말 무서운 똥처럼 여겨진다. 비록 무서운 똥이지만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그들을 대할 때 장애우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유지해야 할 것 같다.

청계천 사진을 보면 때깔이 참 그럴듯하지만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은 안 든다. 언론의 게거품 역시 마뜩찮고. 자전거 타면서 불광천을 자주 오락가락 하는데, 자전거 도로 어딘가에 이런 게시판이 붙어 있다; '우리는 제멋대로 자라 있는 노변의 잡초를 자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광천 노변은 '자연'스러운 개판이다. 심지어 강우가 쏟아져 길까지 개천이 흘러 넘칠 때는 각종 오물이 둥둥 떠다니고 쥐들이 물 속에서 버둥거린다. 불광천은 그래서 만족스럽다. 인간 오물과 비틀비틀 간신히 생존하는 '자연'이 적나라하게 공존하니까.

한미카드를 방콕에서 사용하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 한미은행 측의 결제거부. 돌아와서 한미카드의 CR 담당자와 전화를 주고 받았고 고객의 은행 잔고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무단 도용을 방지하기 위해) 의심스러운 장소에서 카드의 사용 제한을 풀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내것 만이라도 해 달라고 하자 전산 시스템을 고객님 한 분 때문에 변경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죄송하다고도 말한다. 죄송할 것 없습니다 카드를 사용하지 않을께요 라고 말했다. 몇 개월 동안 바빠서 카드를 없애는 것을 잊었다.

얼마 전에 한미 카드를 시티 카드로 변경해주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상담원 한테 위에 언급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카드를 없애겠다고 말했다. 안절부절한다. 담당자도 아니고, 앵무새처럼 정해진 말만 늘어놓는 (아마도 외주 용역업체) 상담원 아가씨와 백날 떠들어 봤자 입만 아플 뿐이다. 카드 교체를 거절했다. 생각난 김에 마지막으로 저간의 사정을 email로 설명한 후 카드와 주거래 통장을 바꾸겠다고 통지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뭐가 잘못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담당자의 굳은 머리에 약간의 활기를 불어넣었다; 방콕의 호텔을 예약해 놓고 밤 12시쯤 호텔에 찾아가서 카드로 결제하려니까 결제거부를 당했습니다. 쪽팔리겠지요? 쪽 팔리지만 어쩌겠어요. 훔친 카드로 사기 치고 있다는 듯한 그들의 싸늘한 눈길에 허허 웃어야지요. 그때 국민 카드가 곤궁에 빠진 나를 살렸어요. 그런 겁니다.

알 수 없지만 갑자기 문제가 해결되었다. 무슨 직함을 가진 사람이 전화를 걸어 정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전산 시스템에서 내 카드에 한해 해외 이용시 결제 거부가 나타나지 않도록 해 주겠단다. 아내 것도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윗대가리 불러놓고 지랄하지 않았는데 문제가 해결되었다. 매우 특이한 케이스다.

아내와 서울 세계불꽃축제 미국/한국편을 보러 갔다. 두 연인이 돗자리 펴놓고 마포대교 위에서 기다리고 있단다. 둘은 눈이 맞은 다음부터 풍부한 술과 맛있는 대화가 있는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늘공원의 억새밭에서 술레잡기를 하느라 바빴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성산대교에서 마포대교까지 걸었다. 사람들이 꾸역꾸역 좀비떼처럼 불꽃축제가 열리는 여의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얼마 전에 본 land of dead라는 프랑스 영화에서는 하늘에서 불꽃놀이가 벌어지면 좀비들이 정신 못 차리고 하던 일을 멈춘 채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았다.

돗대기 시장 같은 그곳에서 아내가 싸온 김밥을 나눠 먹으며 사진을 찍었다. 기술면에서는 미국팀이 조금 나았지만 한화는 스마일리나 장미꽃, 하트 모양 따위로 하늘을 수놓아 사람들의 탄성을 쥐어 짜냈다. 주변은 온통 연인들 투성이고 간간히 디씨 폐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혼자 와서 삼각대를 설치하고 꿋꿋이 셔터를 누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스냅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전보다는 양호했지만 160장 중 대부분을 버렸다. 안 되는 것은 안되는 거다. 들인 정성에 비해 망친 사진이 아까워 한 시간 내내 오리고 잘랐다. 이번에도 삼각대는 쓰지 않았다. 떨리는 손과 노출 부족 또는 노출 과다가 기괴한 효과를 만들어냈다. 아무튼 질보다 양이다.





방사성 대나무 숲



스트론튬 능수버들





가스 자이언트의 지적 생명체



기계 생명체의 번식 알고리즘 발현





타이탄의 메탄 바다에 서식하는 구더기들





강하장갑보병의 요격



외계 침공에 대항하는 발리스틱 미사일



역부족.



전 스펙트럼 복사선을 방출하는 디코이를 침투 벡터의 직교면에 방출하는 궤도 비행체들.



웜게이트가 열리자 마자 저속 중입자빔을 산란하여 포막 형성



mine field에 접근. 추진계 에너지 버스트에 민감한 지뢰에 피격당하는 2대의 셔틀



선충과 편모발광 기생체의 먹이사실



초고속 이동하는 비행체보다 느린 우주선에서 관측된 엔진 분출구의 적색편이



초고압 심해저 화산 부근에 기생하는 해파리



인히비터의 침투로부터 탈출하는 소형탈출정들.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한 랜덤 코스.



소행성에 설치된 네일건에서 발사 후 0.5c로 가속중인 고온 질량체





72억광년 떨어진 야자 성운





구상 바이러스를 공격하는 나노머신의 전개





관성 억제 엔진의 오버드라이브로 인한 폭발



다이슨 구 외피에 격돌한 소행성



중력파에 붕괴되는 혜성



산화철의 용융으로 발생한 유독 산소로부터 도망치는 심해저 혐기성 생명체들



중성자성의 폭발로 발생한 감마선 버스트에 피격당하는 궤도 비행체들



인류에게 내일은 없었다







비교적 정상적(?)인 사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하트가 뜨고...


아내 후배 연인은 카메라를 들이대자 디글디글 들끓는 인파에 아랑곳 않고 진지하게 작업에 임했다.

아내가 바가지를 긁었다. 우린 저런 적 없었잖아! 그게 내 탓인가? 이를테면, 석양이 아름답게 지고 있는 해변에서 한껏 감정에 도취된 채 멋있지 않아? 라고 신음하듯 말하며 옆을 돌아보면, 아내는 어느새 저만큼 다른 곳에 가서 뽕짝 리듬에 맞춰 원주민 아이들과 닐리리 맘보를 추는 꼴이다. 그럴 때면 장애우를 대하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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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버스터2

잡기 2005. 10. 27. 23:06
렉쳐는 온라인으로 3시간쯤 하고(가기 귀찮아서) 인턴들에게 xml database를 만들고 sql parser를 만들어 엑세스하는 과제를 내 줬다. 렉쳐 동안 CFG와 EBNF, 렉시칼 아날라이저나 시맨틱 아날라이저 간의 관계 같은 기본적인 지식을 가르쳤다. 한씨 아저씨는 타깃의 spec과 requirement를 보고(이런 걸 다 문서로 만들어 제공할 뿐더러 과제 결과 제출하면 어노테이션도 해주고 손수 짜는 시범도 보여준다. 얼마나 친절한가?) 저런 과제를 내주는 것이 잔인하다고 한다. 글쎄다. 한씨 말로는 4년제 대학 나와서 컴파일러 이론을 배우고 그걸 '간단하게, 가벼운 마음으로'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사람이면 '인재'라고 한다. 그럼 내 주변엔 인재가 널렸다. 웃기는 소리.

그의 말을 듣고 나서 생각한 바가 있어 인턴들에게, '간단하게', '가벼운 마음으로' 과제를 해 보라고 말했다. 예, 라고 대꾸한다. 흐뭇하다.

얼마나 어려울 지 시간을 내서 짜보니 두 시간 정도 걸렸다. 프로그래밍을 처음 시작하는 친구들이니 넉넉하게 50배 잡아서 100시간, 그러니까 5일 정도 시간을 줬다. 과제에 매달리다 보면 다이어트도 되고 한국의 정치경제적 현실도 잊고 도 닦는 기분이 들어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아무튼 좋을 것 같다. '나는 소울 푸드가 한국의 음식인 줄 알았어요. 한국의 수도가 소울이잖아요. 하나도 안 웃기나봐요?' 라는 대사가 생각난다.

한씨 아저씨에게 말했다; 그 친구들이 프로그래밍이 재밌대.
하하 웃는다. 비록 텍스트로 전해지는 웃음이지만 커다란 챔버에서 메아리치는 것처럼 공허하게 들렸다. 연습 게임 끝나고 현업에 투입되어 식은 땀이 줄줄 흐르는 상황이 되면 잘 견딜 수 있을까? 나처럼 한 십 년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신경세포가 무뎌져 절망이나 슬픔 같은 정서적 감응이 서서히 사라지는 일종의 환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슬픔은 쿨하게 냉동시켜 두기로 하고...

"굉장하군..."
"저것이 바로 토플레스의 힘!!"
"언니 굉장해요!"

가이낙스 20주년 기념으로 만들었다는 '톱을 노려라! 건버스터2'. 하는 짓을 보니 이 놈들은 아직 건버스터 정신을 잊지 않았다. 뻑간다.


노노상은 이렇게 노력과 곤조로 우주괴수를 쪼갠다. 우리 인턴들이 보고 배웠으면 싶다.

아내는 9만 9천원짜리 태국 항공권이 나왔다고 말했다. 치앙마이에 가서 아무 생각없이 gps만 들고 며칠 트래킹 하다보면 머리 속에서 똥물처럼 출렁이는 생각들이 사라질 것 같은데, 표가 매진되었다. 어떤 블로그에서 본 문구다; 어떤 시인이 말하길, 30대는 새장 문을 열어놓아도 날지 못하는 주금류라고 한다.

아까 소울 푸드 운운한 말은 dead like me라는 드라마에서 본 것 같다. 내가 아는 소울 푸드는 조상의 시체를 뜯어먹고 그의 육신과 영혼을 내 안에 두는 종류 하나 뿐이다. 앱솔루션 갭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돼지 스콜피오는 어깨의 전갈 문신을 지우고 새로 태어났다. 레몽트르는 그를 미스터 핑크라고 불렀다. 볼요바도 죽고 스케이드도 죽고 레몽뜨르도 죽고 앙뜨와네트도 죽었다. 아무튼 주인공 비슷한 것들은 모두 죽었다-죽였다. 레빌레이션 스페이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다들 멋있게 죽어갔다. 타르시스의 백정은 도살당했지만 그의 죽음은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한(그리고 인류를 구하기 위한) 숭고한 자기희생이었다. 마지막 남은 미스터 핑크 역시 숯불 바베큐나 돼지갈비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앱솔루션 갭의 플롯이 시시하다지만, 일을 마치고 지평선을 향해 돼지답게 아장아장 걷다가 픽 쓰러져 죽었다. 그가 생전에 즐겨 말하길, 돼지는 돼지가 해야 할 일을 한다. 그 말이 무척 마음에 와 닿는다. 나는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다.

내 몸무게는 현재 64.7kg, 생각을 많이 해서 체량을 상당히 잃었다. 돼지고기만이 몸과 영혼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다. 앱솔루션 갭을 본 이후로는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돼지고기가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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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영화, 소설, 드라마

잡기 2005. 10. 24. 01:23
Tmio Vuorensola의 Star Wreck: In the Pirkinning. Star Trek과 Babylon 5의 세계관을 패러디한 유쾌한 영화. 스타 트랙과 바빌론 파이브를 못 본 사람들에겐 거진 쓰레기같은 영화겠지만 클럽에서 SF 팬들과 함께 맥주 한 잔 기울이며 부담없이 웃고 즐기기 딱 좋을 영화다. 번역하지 말고 영문 자막이었더라면 훨씬 재밌을 법 싶다. 핀란드어에 한글 자막인데다 번역한 사람이 두 시리즈를 안 본 것 같아서... 영화 제작 중 대부분의 시간을 CG 랜더링으로 보냈다는 소문을 들었다. CG의 질은, 특히 바빌론5를 비롯한 지구 함대와 스타플릿의 우주선들 사이에 벌어지는 전투씬은 바빌론 5의 박진감을 능가한다. 아마추어들이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에 놀라웠고(물론 B급 영화다)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작정하고 만든 코메디다. 끝내주게 재밌었다.

레널즈의 Absolution Gap: 758p짜리 책에서 간신히 580p에 이르렀다. 라쉬미카의 정체가 곧 밝혀진다. 레빌레이션 스페이스 사가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장이라 기대를 많이 했는데 Rashimika와 Quiche(뀌세라고 읽어야 하나?)와 관련된 Hela system 얘기만 나오면 책을 확 덮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짜증난다. 펠카가 바다에 뛰어들고, 끌라방이 난도질 당한 채 바다에 버려진 후 뭔가 한 껀 할 것 같았던 패턴 저글러의 역할이 미미해서 다소 실망했고 데마키스트의 저항(?)은 아예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재수없는(아마 포스트 사이버펑크 부류 중 소위 소설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묘사된 재수없는 부류라고 해야겠지) 컨조이너와 울트라 정도만 간간히 나왔다. 얼마 전부터 등장한 새도우의 묘사가 재밌다. 그나마 inertia suppression engine과 hypometric weapon으로 늑대, 또는 inhibitor와 치르는 장대하고 살갗을 얼어붙게 만드는 우주전이 읽어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 레널즈의 우주전은 뿅뿅 스타일 스타워즈가 아니다. 그래서 소름끼치게 느리고, 아름답고, '사실적이다'. 지금까지 절반의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그걸로 본전은 뽑았다. -_-

내가 볼 땐 이 소설 번역해봤자 안 팔린다. 권당 두께가 장난이 아니고(네 권 다 합치면 깨알같은 글자로 꽉 찬 페이지가 2000을 넘긴다) 전개가 아주 느리고 설명적인데다 캐릭터가 지나치게 차가워 정 붙일 데가 없다. 소설에서 휴머니즘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휴머니즘이라... baseline human이라 불리는 마이너한 생물이 있긴 하다. 따라서, 하드 사이언스 픽션 '기크'와 상관없는 보편적 한국인의 정서에 안 맞을 것 같다.

최근 시작한 3개의 SF 드라마: 틈틈이 보고 있다.

threshold: 시작할 땐 잘 나가나 싶더니 장수 프로그램으로 만들고 싶은지 질질 끄는 기색이 보인다. 점점 심령물화 되가고 있다. 스토리: 지구 궤도 상에 4차원 테써렉트같은 물체가 떨어지면서 외계인의 침공이 시작되고 재난 상황에서 쓰레숄드 프로젝트가 가동된다. 인간은 이중나선의 유전자를 갖고 있으나 외계인에 동화되면 트리플 헬릭스가 발현된다. 스레숄드 프로젝트 팀은 비밀리에 외계인의 침공을 저지하는 동시에 그들의 의도와 목적을 파악하려 땀 흘린다. 지금은 온갖 것들에 3중 나선 프랙탈을 갖다 붙여 슬슬 짜증이 나려는 참.

surface: 여과학자가 괴물 몸에 gps를 달아 추적하는 씬부터 좀... 강한 전자기장을 발생시키는 그 엄청난 괴물에 붙은 gps가 어떻게 망가지지도 않고 전파를 송신할 수 있나. 줄거리: 무수한 운석군이 바다로 낙하하면서 바다에서 기괴한 생물이 출현, 전세계 연안에서 목격된다. 동생을 바다 괴물에게 잃은 남자와 직장을 잃은 과학자가 군의 방해를 뚫고 진실을 파헤치려 애쓴다. 바다 괴물의 알을 줏어와 키우는 십대 소년도 등장한다.

invasion: 최근 시작한, invasion을 포함한 위 세 SF 드라마 중 주인공이 이 보다 더 둔하고 멍청할 수 없다는 것을 1화부터 꾸준히, 잔잔하게 보여주는 '가족' 드라마. 가끔 각본 쓴 작자를 살해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줄거리: 군에서 허리케인 실험중 뭔가가 잘못되었다. 해수면 아래 빛을 발하는 생명체가 목격되고 군경이 해안을 차단한다. 해안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허리케인에 휩쓸려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살아나기 시작한다. 출연 인물들이 하는 짓들이 하도 바보스러워 때때로 보기가 서글프다. SF물이라기 보다는 외계인의 침공(?)을 빌미로 뿔뿔이 흩어지는 가족사의 가슴 아픈 드라마가 연출 의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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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 구경

잡기 2005. 10. 23. 11:35
양미옥의 양, 곱창이 꽤 맛있긴 한데 석쇠에 올려놓은 고기 한 점에 4천원씩 하는 꼴이라 올 때마다 먹기가 참 부담스럽다(1인분 25000원). 술 먹고 불꽃놀이 구경하러 갔다. 사람이 바글거린다. 차가 밀려 약간 늦게 도착했다. 22일은 중국, 이탈리아 팀의 쇼이고 29일은 미국과 한국이다. 한화가 일년간 장사한 돈으로 엄청나게 하늘에 퍼붓지 않을까 29일이 기대된다.

되는대로 셔터를 눌렀지만 사진이 참 구리다. 3배 줌, ISO 100, 매뉴얼 포커스 무한에 근접, 셔터 아퍼쳐 8.0, 노출 2초에서 4초, 손 삼각대. 삼각대 없이 야밤에 사진 찍는 것은 확실히 미친짓이다. 날이 추워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찍으려니 죽을 맛이었고, 아무리 수동 기능을 지원한다지만 2년 전 구닥다리 스냅샷 카메라로 찍는 것은 역부족이다. 좋은 카메라가 그립다.

여행 때 가볍게 사진을 남기는 것이 목적이지 사진을 찍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 아닌 이상 '좋은 카메라'와는 앞으로도 인연이 없을 것이다. 그럼 어쩌겠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튼튼한' 휴대용 스냅샷 카메라로 만족하며 살아야지.

불꽃 사진 찍는 요령을 알았으니 발전하는 과정을 만들어보자. 쪽팔림을 무릅쓰고 사진을 올려둔다.


















떨리는 손이 확실하게 나왔군.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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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째 쓰던 디지탈 카메라를 수리보냈다. 송료 포함 18000원의 수리비가 청구되었다. play와 shot 사이의 모드 전환에 관계된 2mmx2mm 짜리 SMT 스위치를 교체하는 것이다. 뜯어봤기 때문에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알고 있다. 부품값은 아주 비싸봤자 100원 정도 하겠지만 나머지 비용이 일종의 기술 및 시술료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전문가란 사람들은 그걸로 먹고 산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해야 나도 먹고 산다.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인정해야만 했다. 마치 왕년에 코볼로 프로그램 짜다가 부장된 사람이 자기 부하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며 자기가 짜면 하루에 20시간씩 일하면서 버그 하나 없이 끝내주게 잘 짤 수 있노라고 UML로 자기 할 바를 다하지 않으면서 떵떵거리는 것과 비슷하다.


이 카메라는 5년 전에 구매한 SANYO DSC-MZ1이다. 카메라의 메커니컬 파트를 무식하게 설계해서(미안하다 산요 기술자들, 하지만 너희들도 알다시피, 사실이잖아?) 전지를 엄청나게 잡아먹는다. 1년 동안 여행 다니면서 종종 고장이 났고 늘 이렇게 뜯어서 수리했다. 깡촌 오지에서 부품 입수는 커녕 인두조차 구할 길이 막막했지만 매 번 슬기롭게 극복했다. 이 카메라로 그때 찍은 사진들은 그래서 지금 봐도 고생한 기억이 난다. 저 사진을 찍기 전에 렌즈 드라이브 모터의 기어 박스에 모래가 끼어서 고생했지, 사막에서 셔터 스위치가 망가졌었지, 전지 홀더가 부러졌지, 우기의 지독한 습기 때문에 충전 컨덴서의 단자에 녹이 슬어 떨어져 나갔지, 잦은 충격으로 충전기의 배선이 끊겨 있었지, 기타 등등 온갖 고장들을 체험했다. 마치 다카르 랠리에서 간신히 삐걱삐걱 굴러다니는 자동차처럼 간신히 나와 산요 디지탈 카메라만 아는 여행을 끝냈다. 함께 들고갔던 리브레또30 역시 잦은 고장으로 거의 맛이 가기 일보 직전에 귀국했다. 귀국 후 사망했다. 유일하게 고장나지 않은 것은 신체와 Garmin GPS 뿐이다.

잘 고장나지 않는 튼튼한 마누라의 공식 요청으로(또는 불평으로) 김치 냉장고를 구입하기로 했다. 일단 김치 냉장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무엇인지 조사했다. 수납공간의 온도를 0C~-1C로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제어계통의 일을 해 본 사람이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것이다. 그리고 스펙 조사를 시작했다. 스펙 조사를 하면서 놀랐던 것은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는 기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전거처럼 제대로 된 스펙을 제시하는 제품이 아예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온도 편차 라던가 수납공간의 온도 전이 특성이나 벤치 마크 자료, 평균 전력 소모 그래프 따위 간단한 것들 마저. 생각해보니 거의 모든 소비자 가전 제품의 제품 스펙이 부실하다. 할아버지가 지포스 그래픽 카드의 3D 마크 점수를 달달 외우고 있는 대한민국의 실정에서 재밌는 일이다.

자사의 무의미한 선전 문구만 나부꼈다. 아내는 자신의 사설 통신망을 이용해 어떤 김치 냉장고가 좋은지 여기저기 사람들에게 물었다. 딤채가 좋단다. 딤채가 왜? 무의미한 질문이다. 아줌마들이 왜 좋은지 설명하길 기대한다는 것은. UI, 디자인, 브랜드 파워, AS 서비스, 전통 따위 주관적이고 경우에 따라 편차가 심하며 정형적인 데이터와는 무관한 것들.

내 마이너적인 취향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가격대 성능비가 우수한 제품을 선택하다 보니 대우의 김치 냉장고 FR-K193EM을 골랐다. 주변 기능이 충실하고 아내가 여러 사람에게 질의한 스펙(200리터, 3도어)을 거의 충족시켰다(192리터, 3도어, 개별 냉장/냉동, 전력소비등급 1등급). 가격이 싸다는 점이 가장 큰 매릿이다. 아줌마들이 선호하는 딤채와 비교해 거의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63만원 주고 샀는데 어느새 59만원으로 가격이 떨어졌다.

제품이 도착해서 설치하고 보니 어이가 없다. 버튼 몇 개 조작하다 보니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어떻게 6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인 기계가 이렇게 간단할 수 있을까. 60만원이면 그 사양 복잡한 PC가 두 대다. 누군가는 UI의 승리라고 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김치냉장고의 주 사용대상이 아줌마들이다 보니 아줌마들의 '수준에 맞춰' 인터페이스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것이다. 커스텀 설정이 없고 사용자의 매니아적인 취향을 전혀 무시한 이 단순한 인터페이스는(심지어 콤보 키도 먹지 않았다) 새 기계를 들여놓으면서 응당 즐겨야 할 조작의 기쁨을 앗아갔다 -- 5분이 채 되기도 전에 싫증이 났다. 소비자 가전의 70% 이상이 여성을 주요 마케팅 대상으로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저 수치는 틀렸다는 단정적인 부정도 들었다. 90% 이상이란다. 여성, 또는 아줌마들이 얼마나 생각하기를 즐기지 않는지 가전 제품 대다수의 기능이 한심할 정도로 천편일률적이고 단순한 것일까. 인류의 장래가 어두워 보인다.

기차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던 젊은 처자가 자기 차례가 되자 창구에 묻는다 '11쯤에 부산 가려는데 한 장이요. 얼마에요? 몇 시간 걸려요?' 창구 직원이 대꾸하자 지갑을 열고 돈을 차근차근 꺼내 건넨 후 표를 받아 지갑의 한쪽 편에 넣고 잔돈을 차례대로 지갑에 채워 넣고 창구 앞을 떠난다. 다음 사람이 창구 앞에 선다. 별 문제 없어 보이는 일상적인 풍경이다.

* 창구 앞에 커다란 판데기는 폼으로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기차 출발 시각, 도착 시각, 요금표가 붙어 있다. 한글로 적혀 있다. 아랍어가 아니라.
* 따라서 창구 앞에 다다르기 전에 미리 돈을 꺼내놓을 수 있다. 또는, 창구에서 카드 받는다. 카드 건네고 긁고 비밀번호 입력하면 끝이다.
* 시간은 왜 묻나? 머리 위에 다 써 있는데.
* 돈은 쓸어서 옆으로 옮겨 챙기고 뒷 사람이 주문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할 수도 있다. 창구는 보통 그러라고 동선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지하철에서 어정쩡하게 서서 두리번 거리고 헤메는 사람들의 십중 팔구는 여자다. 뒤에 사람이 밀려 있건 말건. 길에서도 마찬가지고 자전거 탈 때도 그렇다. 뒤에서 벨을 울리건 말건 앞뒤옆 안 보고 당당하게 도로의 모든 면을 활용해 갈짓자를 그리며 제 갈 길을 '즐기며' 간다. 여중생 2+n명은 항상 도로 진행면에 수직해서 일직선을 이루고 걸으며 재잘거린다. 볼 때마다 특이한, '동물의 세계'다.

공중도덕이나 예절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의 어떤 특성이 저런 행동을 하게 만드는지 희안하게 여길 따름이다(그런데 암사자들도 저럴까?). 아내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내가 성격이 모가 나서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을 일일이, 꼬치꼬치 따지며 욕한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가이드'에는 지구인을 일일이 방문해 모욕을 주는 외계인이 등장한다.

성질 더러운 건 널리 공인된 사실이라치고(이런 남자와 결혼하시다니,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마님), 기차표 사러 줄 서 있다가 단 1-2분 차이로 몇 번 표를 못 산 경험이 있다. 앞에 선 여성을 욕하진 않는다. 그저, 왜? 다.

왜?에 대한 적당한 답변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요령은 그렇다: 각 줄에서 여자가 있는 갯수를 세어보고 여자가 가장 적은 창구로 간다. 그리고 앞에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여자를 인도의 흰 암소나 그들이 싼 소똥으로 생각하면 마음이 즐겁다. 거리에 소똥이 잔뜩 널려 있다고 생각하면 심지어 인도에 온 것처럼 마음이 포근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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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nda July의 Me and You and Everyone We Know 를 보았다. 간만에 보는 인디 무비가 되겠다. 좋아하지는 않지만 보기 편했다. 낄낄 웃었다. 옛날 모더니즘 소설 읽는 기분이랄까. 영화 조금쯤 진행되었을 무렵 저 여배우가 감독일 꺼라고 단정했다. imdb를 뒤져보니 줄리가 각본, 감독하고 배역도 맡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여자애들도 딸딸이 치는구나. 수고가 많다.

이스트소프트에 알맵 무료 플러그인 인증 요청을 했는데 2주(3주?) 만에 답신이 왔다: 검토 결과 악의적인 사용자에 의해 고의적으로 데이터를 추출할 가능성이 높아 반려되었다. 내가 만든 플러그인이 유용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인증해 줄 수 없단다.

* 에러가 난다 -> 인증해 줄 수 없다 -> 이해한다.
* 호환되지 않는다 -> 인증해 줄 수 없다 -> 이해한다.
* 쓸모없다 -> 인증해 줄 수 없다 -> 이해한다.
* 유용하다 -> 악용할 수 있다 -> 인증해 줄 수 없다 -> 이해하자.

플러그인은 그 회사에 등록을 하거나 안 하거나 '악의적인 목적'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쉽다. 알맵에 개발자 등록하고 SDK 다운 받아 설치한 다음, 내가 관리 부실로 유실하게 될 플러그인을 구해 설치하면 된다.

가민GPS 연동 플러그인을 알맵 플러그인 사이트에서 50만원에 판매하고 있다. 그들이 개발자에게 제공하는 SDK를 사용하면 그것과 같은 기능을 하는 프로그램을 쉽게 만들 수 있다. 만들어도 장사에 방해되니 인증해주지 않겠지?

그나저나, '고객상담실'과 대화를 주고 받을 일이 있으면 늘 4차원적으로 괴상하고, 우주적으로 멍청한 얘기를 듣는다. 정녕 내가 평생 짊어져야 할 숙명이란 말인가? 저명한 운명상담소에 가서 '고객상담실'과 궁합이라도 한 번 봐야 할 것 같다. 겉궁합, 속궁합 이렇게 두 파트로 나눠서.

자전거 타고 강변에 나갔다. 시체가 떠내려 왔다. 그쪽 체계가 얼마나 날렵한지 왠만한 시체는 금방 건지는 것 같다. 지금껏 한강변에서 본 사람 중 팅팅 불어난 시체는 본 적이 없다. 나름 생각하기에 한강은 자살하기에 최적지가 아닐까 쉽다. 강남, 강북 등 어디서나 교통이 편리하고 경제적이고 경치 좋고 분위기 있는 데다가 말끔한 시체로 제깍제깍 건져내니까. 떨어지면 곧바로 목뼈가 부러지거나 의식을 잃어 익사할 것이다. 가는 길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도 장점이다.

무버블 타입을 3.2로 업그레이드 했다. 레프레젠테이션은 달라진 것 없다. 페이지 레이아웃과 색깔이 안 질린다. 타이틀 메시지를 바꿀까? humanity is the plausible insanity, certainly. 촌스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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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멕

잡기 2005. 10. 19. 23:00
멕시코에서 새로운 맥주가 수입되었다. 시음회에서 한 잔 했다. 맛이 괜찮다. 사각 올리브 기름병처럼 생긴 1200ml짜리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겨 있다. 케이스 가운데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WIZMEK이라고 써 있고 가격은 1500원이다. 분명 히트칠 꺼라고 생각했다. 꿈이었고 수상쩍다 싶어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위즈멕으로 검색되는 페이지가 거의 없다 -- 꿈 속에서 조어까지 지어내는구나. 가을 중반쯤 되면 잠이 길어져 더 많은 꿈을 꾸곤 했다. 깨기 전에 인터넷으로 반드시 검색해 보겠다고 마음 먹고 이름을 외워 두었다. 위즈멕은 아나사지가 추천했다. 왜 꿈 속에 쟤들이 나타나는 거지? 자빠져 잠이나 잘 것이지.

아내가 자전거를 배우겠단다. 그전에 몇 번 배워보려고 했는데 잘 안된 모양이다. 주말에 근처 학교 운동장에 가서 자전거 끌고 다니는 법을 가르쳐주고 안장에 다리를 걸치고 운동장 경주 트랙을 질질 끌고 다니게 했다. 한 시간쯤 지나 스스로 타게 되었다. 종종 쓰러진다. 그 상태로는 도로에 나갈 수 없지만 시작은 한 셈이다. 안 쓰던 근육을 썼던지라 이틀 동안 여기저기 쑤신다고 끙끙댄다. '자전거를 배워야 타는 사람도 있군. 세상은 참 넓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진도가 빨리 나간다며 만족스러워 한다.

인턴 사원들에게 내준 빡센 과제 결과물을 엊그제 받았다. 평가하길 현업에 투입하려면 6개월 정도 걸리겠다. 현장에 투입하기에는 미흡하지만 프로그래밍이 재미있다니 아주 다행이다. 그러나 수습 기간인 두 달이 지나면 그들이 과연 남아있을 지 의문이다. 어제, 오늘은 과제를 두 개 내 주었고 시간은 마찬가지로 일주일을 주었다. 소스를 보면 소스를 만드는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글하고 비슷하다.

오래 전에 김씨 아저씨와 얘기한 적이 있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는 글에는 개인의 성향과 버릇 따위가 반영되어 일정한 양상의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그가 말했거나 내가 말했거나 아무튼 우리는 비슷한 지점에서 동감했다. 사실은 놀랐다. 아니, 이 양반은 정말로 게시물을 분석 했단 말인가? 나처럼 그렇게나 할 일이 없단 말인가? 하고. 그는 나처럼 주민등록번호부터 자신의 이름과 아이덴티티를 속이고 특정 사이트를 경유해 ip마저 속인 채 여기 저기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모닥불에 장작을 쑤셔넣는 등 장난을 즐긴 것 같다. 요즘은 인터넷에 더 이상 뭔가를 끄적이지 않았다. 때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위험한 것은... 작품이 작가의 인격에 반영된다! 는 점이다' -- 시마모토 카즈히코, 호에로펜

만든 아이덴티티는 나름대로 생장한다. 만든 아이덴티티 역시 그 나름의 열정과 임프레션을 가지고 있다. 개개의 꿈 속에서 내가 각각의 역할을 가지 듯, 아이덴티티가 여러 개로 나뉘어지는 것이나 현실 경계가 불투명해지는 것은 그야말로 사소한 것들이다. 시뮬레이팅된 환경이 실재에 투영될 때 기시감을 느끼면 열이 받거나 짜증나는 것이 문제다 -- 여러 번씩 반복 경험하는 실패와 실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옆 사람은 그럼 내가 또 이유없이 갑자기 지랄하는 줄 안다. 갑자기가 아니다. 각 지랄마다 설명하기 애매한 사연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나사지같은 것들이 눈앞에서 오락가락 하면 확 열이 뻗치는 것이다.

운동화를 사면 평균 4년 정도 신는 것 같다. 운동화 말고 등산화를 샀다. 정가 14만원짜리를 세일해서 7만원에 팔고 있는 고어텍스 등산화다. 설명서를 읽어보니 이 신발을 신을 때는 쿨맥스 류의, 땀을 바깥으로 배출해주는 양말을 신을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이런 문구도 적혀 있다: 고어텍스 멤브레인에 손상을 줄 우려가 있으므로 발톱을 잘 깎고 신으세요. 비싼 신발은 이 모양인가? 아무렇게나 막 신고 다니던 1만원짜리 동대문표 운동화들이 그리워졌다.

씨없는 수박을 개발해 영웅 대접을 받았던 우장춘 박사는 씻거나 먹을 때 가장 걸리적거리는 과일인 포도에서 씨를 빼는 연구 업적은 정작 남기지 않아 어린 시절 나는 그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옛날 흥미진진한 책에서는 줄기에 토마토가 달리고 뿌리에 감자가 열리는 유전자 조작 식품과 태양광 발전으로 쌩쌩 하늘의 궤도를 달리는 미끈한 은색 자동차가 미래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는데 요새 분위기는 그 반대다.

황소개구리를 먹어치우는 파리지옥, 왁스 코팅이 된 소나무, 고에너지 우주선을 포획하면 발광하는 꽃들, 수력 발전 시설을 대체하며 플랑크톤만 먹여도 전기를 생산하는 붕장어, 삼계탕 나무(그러니까 가지에 닭과 대추, 뿌리엔 인삼) 등을 내심 기대했던 처지에서 작금의 실태는 어린 시절 나름대로 품었던 꿈과 희망을 심하게 훼손하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어떤 쳐죽일 놈들이 순진한 어린아이의 꿈을 빼앗아 간 것일까.

현실적인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궤도 엘리베이터, 다이슨 구, zero point inertia engine까지는 그나마 괜찮은데 좀 더 추락해서 세속적이 되면 마이크로 엔진, 맴브레인 센서, OLED 스크린, LED 조명, 페이퍼 디스플레이, P-RAM, 와이어리스 유비쿼터스 프리센스, 자기조직하는 시멘틱 웹, 내추럴 랭귀지 프로세싱 따위... 어린 시절 품었던 밝고 찬란한 미래세계에서 비하면 참, 한심하다.

아시아 태평양 이론물리센터 웹 저널의 기사, '끈이론은 우주만물의 원리가 될 수 있는가?''수만 명을 먹여 살리는 한 명의 영재'를 읽다가; 잡담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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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텍스 전자전 2005

잡기 2005. 10. 14. 23:50
한국-이란 축구 관전평: 당구냐?

KINTEX에서 열리는 한국전자전을 보러갔다. 그걸 보러 자전거 타고 온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 같다. 수영복 입고 전시장에 들어간 사람도 나 밖에 없는 것 같다. 오늘은 많이 추웠다. 도우미 중 미녀가 많다고 하던데, 가보니 왠 걸. 낚였다.


남문의 횅한 자전거 보관대 앞에서.


중소업체 부스를 주로 돌아다녔다. 잡지 셋 무료구독권을 얻은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부스 대여로 행사 기관 및 참여 업체를 심하게 등쳐 먹는 COEX를 벗어난 때문인지 올해는 중소업체들이 많이 참가했다. 전자전이 제자리를 찾은 것 같다. 중국 부스는 별로 눈에 띄는 것이 없다. LG 2층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얻어먹은 것 빼고 주요 3사 사이트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둘러보는데 3시간이 넘게 걸렸다. 늦으면 집에 돌아가기가 어려워 하는 수 없이 서둘러 나왔다.

이런 것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봤어야 한다. 소비자 가전 말고, 여러 부품상들. 그나저나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조직적으로 일하는 방식에 익숙하지 않다. 보고서 싫어하는 거야 기술자들의 일반적인 성향이니까 그렇다치고 프로젝트 매니징과 다큐멘테이션, 일정 관리, 버그 트래킹, 버전 관리 시스템, 매우 타이트한 시큐리티 등등을 꾸준히 갖추어 놓았지만 쓰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나 혼자 들어가서 작업한다. 나도 매니징을 하는 것이 아니므로 강요하지 않았다. 몇 번 세미나를 하긴 했다. 한국의 회사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원들에게 경영 교육을 시키지 않는 것 같다. 나이 마흔살 먹고도 고집 센 바보 기술자처럼 구는 것도 일부분 그 탓이라고 본다. 연구 프로젝트 경영의 주 요소는 자금, 인력, 시간, 정보, 그리고 끝 없는 삽질이다. 삽질만 하면 편식이다.

사내 세미나만 열었다 하면 다들 지겨워 해서 이번에는 포맷을 상큼하게 바꿔 보았다. 120인치 프로젝터로 세미나 시작 30분 전부터 '연애의 목적'을 틀어줬다. 회의실이 어두우니까 다들 책상에 다리 올리고 드러눕다시피 앉아 멍하니 영화를 쳐다보았다. 파워 포인트 화면을 띄우자 당장 사방에서 야유가 들렸다. 세미나 집어치우고 영화나 봅시다~ 닥쳐 세미나 해야 돼!

그러고는 '프로젝트의 목적' 따위를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당신들을 자원 취급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생산성 평가해서 단물만 빨아먹고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려는 것이 아니다, 주간 레포트 쓰라고도 안 한다. 단지 자기가 무슨 일을 얼마나 시간을 들여 하는지 스스로 정리하고 조작 해 봐라, 심지어 윗대가리들은 이런 사이트가 있는지조차 모른다 라고 말했다. 이런 걸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한다.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도박-사기극이다.

그들은 세미나에 좀 심하게 감탄한 나머지, 사장한테 꼬발라서 나한테 인턴 사원 교육 전부를 맡겼다. 그게 저번 주의 일이다. 그런다고 나 혼자 고스란히 당하냐? 콧방귀를 뀌고 꼬바른 직원들에게 2개월 분량의 일정을 골고루 분배해서 나눠줬다. 새파란 스머프 같은 애들 가르치는 일인데 처음 해보는 일이라서 몹시 재밌지 않겠냐? 꼬셨다. 낚였다. 인턴교육을 위해 내게 할당된 시간은 그래서 주당 6시간이다. 주당 6시간 하고 빡센 과제 줄줄이 내주면 일주일이 참 허겁지겁 갈 것이다.

사장은 사장 나름대로 나를 자기네 회사에 있는 사람도 아닌데 -장 취급하려 들었다. 한국의 제조업이나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과장이란 직함은 개근상 같은 것이다. 삽질 열심히 하면 오랜 기간 경험하고 학습해야 하는 경영 자질에 상관없이 개나 소나 붙여주는 의미없는 직함이다. 삽질하기 바빠서 뭘 학습할 시간도 없이 그냥 과장된다. 30먹은 유부남을 일하게 만드는 힘은 간단히 말해 '돈'이다. 지금 연봉의 두 배를 주면 사장 아저씨네 회사 관리자를 하겠다고 말했다. 간단히 나가 떨어졌다. 농담하는 줄 아는가 보다. 돈을 주면 비전을 보여 주겠다는데... 저렴한 가격에 모시겠다는데... 요즘은 진심이 안 통해.

연구개발은 제품 라이프사이클에서 미소한 부분이다. 똘똘한(또는 띨띨한) 기술자 몇 명이서 2년 정도 하면 성과는 어떻게든 나온다. 문제는 연구개발 이후다. 다음 세대까지 항상성을 유지하며 밀어 붙일 수 있는 튼튼한 구조와 조직을 만들어 내는 것이 관건이다. 어떤 원숭이가 다른 원숭이에게 바나나를 주면 춤을 추던 시절부터 인간세계에 존재했던 그것을 매니징, 경영이라고 한다. 지금 있는 인력은 아마도 언젠가는 매니저가 될 것이다. 훌륭한 중간 관리자가 많이 나왔으면 한다. 우연찮게 한 시대를 풍미하는 밥맛 떨어지는 어떤 경영자의 싸이콜로지가 의심스러운 '카리스마'에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의지하는 류 말고.

오늘 다운받는 영화들:

* David Cronenberg의 A History of Violence (크로넨버그는 영 맛이 갔을까?)
* Jean-Christophe Grange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L'Empire des Loups
* Firefly의 극장판, Serenity
* The Prophecy Uprising, 그저 크리스토퍼 월큰이 나온다는 이유로...

기대작은 단연 Serenity. 기다렸다.



이 포스터는 독일 개봉때 쓴 것인가? 특이한 놈들이야. 그다지 비중 없는 여자애를 전면에 내세우다니. 저 아이는 그냥 은하계 전쟁의 핵심 키를 쥐고 있을 뿐인데. 즐기자고 보는 영화에 안 예쁜 건 죄악이지. 저 쾡한 대두 좀 봐!

아내 여행 보내줘야 하므로 돈 벌어야 하니까 이 사이트 들어오는 사람들은 아래 광고도 좀 클릭하고 그랬으면 좋겠다. 이씨 아저씨가 구글 광고로 백달라 벌었다고 자랑해서 배가 아프다. 백달라 벌면 이런 잡담 말고 컨텐트풀한 글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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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비자

잡기 2005. 10. 14. 00:24
리마나 멕시코시티로 가려면 두 가지 길이 있다.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뉴욕등의 미국을 경유하는 방법과 벤쿠버를 경유해 들어가는 방법. 후자는 전자에 비해 항공권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고 심하면 50만원 이상 차이가 난다. 그러나 미국을 경유하려면 미국 비자가 있어야 한다. TWOV(transit without visa)가 없어진지 오래되어서 제3국을 향하기 위한 경유지로 미국의 한 도시를 선택하더라도, 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궁리 끝에 아내가 미국 비자를 만들기로 했다. 비자피 100달러면 적어도 50만원을 절약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아내는 대략 5년 동안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느라 장기간 무직 상태고 본의 아니게 이 집안의 '기둥'인 나 역시(아내더러 호주하라니까 귀찮단다. 그래서 귀찮은 것은 내가 다 하고 자기는 재밌는 것만 하고 다닌다) 제대로 된 직장 없이 4년이 흘렀다. 사업자 등록을 하지 않았고 별다른 직장도 없는 셈이니 비자 받기가 어려울 꺼라고 주변에서 말들 한다.

안 어려워. 라고 생각했다.

안 어려우니까 아내 비자 서류는 대부분 내가 준비했다. 소득금액 증명원이나 각종 세금 납부 증명, 통장 사본 따위들, 인터넷을 여기저기 뒤적이고, 그리고 있지도 않은 프리랜서 계약서까지 만들어줬다. 계약서는 하나도 빼먹지 않고 꼼꼼하게 작성했다. '계약은 2년 단위로 갱신되며 특별히 명시하지 않는 한 계약은 자동 연장된다. '을'(나)은 2개월 이상 댓가를 지급받지 못하면 갑(회사)과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있다. 을은 일주일에 1회 이상 갑의 회사를 방문하여야 하나 강제사항은 아니다. 을은 갑에게 보고할 의무가 없다. 을은 갑과의 계약과는 별개로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을은 놀고 싶으면 놀아도 된다. 기타 등등...'

그 계약서는 내가 작성했다. 저런걸 막힘없이 줄줄 써 내다니... 가끔은 내가 프리랜서만 하기엔 아까운 인재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계약서가 없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싶어서 갑과 을이 각각 한 통 씩 가지고 있어야 하는 계약서는 없애 버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분통이 터졌다. 말이 프리랜서지 어디 마음대로 놀러다닐 수가 없잖아?

아내는 며칠 전 인터뷰를 받았는데, 그 양키 영사는 내가 정성 들여 준비한 서류는 쳐다보지도 않고 깡그리 무시한 채, 몇 가지 시시한 질문만 던지고 10년 짜리 비자를 닭모이 던지듯이 그냥 내줬다. 갑근세 내는 제대로 된 직장조차 다니지 않는 남편을 두었고, 그야말로 생날날이인 아내 또는 짝퉁 하우스와이프 또는 불량주부가 미국 비자를 거저 먹었다는 소식은 아마도 아내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줬을 것이다. 미국에 가고 싶어서 그러는게 아니고, 남미갈 때 경비 절약 차원에서.

영사가 물었다: 왜 남편하고 같이 가지 않아요?
아내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남편은 돈 벌어야죠.

암...

자전거를 몰고 야경 보러 강변에 나갔다. 인라인을 타던 어떤 아줌마가 다가와 자전거가 비싸 보인다고 말하며 이것저것 물어본다. 싸구려에요. 그저 티벳 하늘을 품고 있는 내 마음마저 싸구려가 아니길 바랄 뿐. 연습 삼아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바람이 많이 불어서 볼만한 풍경이 없다. t mode 0.33초, f4.8, 노출보정 +1, iso 200, 화이트밸런스 자동, 3배줌, 그리고 손삼각대. 10/22, 10/29 한강고수부지에서 벌어지는 세계불꽃축제에서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있을까? 돈이나 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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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잡기 2005. 10. 13. 00:14
맨날 자전거 얘기만 쓰니까 흡사 '자전거를 통해 갱생의 길을 모색하는 어느 장애인의 일기'처럼 보여.

'장애라는 산맥은 히말라야보다 높았다' -- 백 번 공감하는 어떤 CF

감기가 찾아오길 기다렸다. 하루는 일부러 무리해서 자전거를 타고 그 다음날 산에 올랐다. 산에 오를 때 사용하는 근육과 자전거 탈 때 사용하는 근육이 많이 겹치지 않을까 싶었다. 쉬지 않고 3시간 동안 불광동-평창동 코스를 주파했다. 하행길에 개울에 발을 담그니 계절의 변화가 느껴진다. 찬 바람 쐬면서 돌아다녔더니 저녁부터 목이 근질거렸다.

감기는 항상 그렇게 시작되었다. 목이 근질거리고, 목이 부어 오르다가 하룻밤 자고 나면 코로 전이되면서 콧물과 기침이 나고 슬슬 머리에 열이 난다. 목의 붓기는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상태가 심해지면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찾아줘서 반갑다.

이번에 감기에 걸리면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만일 감기가 면역체계의 일시적 장애나 교란으로 생기는 것이라면, 과민 반응을 억제하면 쉽게 치료가 가능한가?

콧물이 줄줄 나왔지만 심지어 하루종일 줄담배를 피우고 점심에는 고깃국을 먹고 저녁에는 회식에 가서 삼겹살에 소주 한 병 분량을 마셨다.

술, 담배, 고기는 이전의 실험 결과를 종합해 볼 때 (어디까지나 내 경우) 감기의 치료와 그리 상관 없어 보이고, 항생제 복용 여부도 상관없는 것 같다. 이틀 동안 한두 알의 항히스타민제와 진통제를 먹고 몸을 따뜻하게 했다.

하루 하고 반나절이 지난 후 감기가 나았고, 그래서 저녁에 다시 찬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 타러 나갔다. 제주 성산-성판악 코스를 기어올라가다시피 한 후 근육에 실질적인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졌는가를 체크했다. 두 달 전 앞뒤 기어를 1:2로 놓고 간신히 힐톱에 다다랐던 송추계곡 코스를 2:5로 지나갔다. 긴 악몽 같았던 2km짜리 업힐이 이제는 약간 구릉이 낀 평지처럼 느껴졌고 평상시 2시간 정도 걸리던 코스를 1시간 10분으로 단축했다.

최근에 내 다리가 28kmh 짜리 다리가 된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Q: 이렇게 '후진' 자전거로 28kmh가 나오면 비싼 자전거를 타면 34kmh가 나올까? A: 안 나온다. 30kmh를 전후해서 흡사 음속의 벽처럼 전혀 새로운 세계가 열리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내 목적은 스피드나 험로주행, 업힐의 정복이 아니다.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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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은 줄 알아

잡기 2005. 10. 9. 20:42
최근 몇 년 동안 차츰 운이 붙는다. 길에서 우연히 지폐를 줍는다던지, 생각지도 못했던 추첨에 당첨되거나 하는 일이 생긴다. 무선 키보드는 글 쓴다는 김씨 아저씨에게 주고 오렌지 셋과 브로마이드, 볼펜 등속은 다른 사람들에게 각각 나눠줬다.

네가 아무리 여러 번 말해도 이해 못하면 내 얼굴을 쳐야 한다. 네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내 잘못이니까. 그러나 나를 계속 이해시키지 못하면 네 잘못도 있으므로 너도 맞아야 한다. 그렇게 계속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거나 이해가 안 가면 죽을 때까지 서로를 두들겨 패자. 건담 시드 데스티니의 희안하게 감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은 공감이 안 간다. 대체 이 시리즈를 왜 만든거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나쁜 책이나 나쁜 애니를 보면 마음에 먹구름이 끼는 것 같다.

새로 시작한 sf 드라마, threshold의 파일럿을 보고 볼만하다 싶어 틈틈이 5화까지 다운받아 보았다. 아직 초반이라 관망 중이다. 크레딧을 보니 브래넌 브라가가 스타트랙 엔터프라이즈 시리즈 말아먹고 이리 온 것 같다.

저번주 자전거 여행 후 며칠 비가 와서 방청제를 뿌려두고 방치했다. 엊그제 자전거를 분해해서 구석구석 닦아주고 조여 놓았는데 오늘 시험 주행을 해보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잘 나간다. 소리가 전혀 안 나고. 이게 정비의 힘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자전거 천국에 가보니 저 아저씨는 내가 여행하던 시기에 쓰시마를 다녀왔다. 가보고 싶다.

사야할 것들: 자전거 펌프, 체인, 그리고 12-10 짐받이 가방 이게 과연 쓸모가 있을까... 타이어도 도로주행용으로 갈고 싶다. 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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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이다. 5년 만에 제주 자전거 일주를 다시 한다.

여자 또는 인간의 어리석은 습성 중 하나는 학습 수준의 고저, 지성의 개발 과정에 상관없이 시시한 것에 쉽게 매료된다는 것이다. 잘나지 않아도 되고 잘 생기지 않아도 되고 가난해도 상관없다. 굳이 멋있어 보이지 않아도, 뭔가 설명하는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 미쳤다고 봐야지. 이런 관점은 천박하고 한심해서 씨알이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굳이 말할까. 심지어 모험조차 하지 않는 여자(인간)를 비웃고 싶어서다. 인간에게는 호기심도, 상상력도, 모험에 대한 열정도 거의 없다.

이틀 전, 황씨더러 자전거를 우리 집에 놔두고 가라고 했다. 아니면 그의 집에서 가까운 강변 터미널까지 잔차를 몰고간 후 버스를 타고 인천에서 내려 인천항까지 가라고. 후자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구기, 북악 터널을 넘어 힘겹게 자전거를 끌고 왔다. 언젠가는 그 혼자서 강변 터미널에 자전거를 싣고 가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를 통과해 해남 땅끝 마을까지 투어를 기획했으나, 강화도 여행에서 익히 드러난, 나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 달 정도 부족한 황씨의 적은 연습량으로 감당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내가 제주 할인 배편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해 아무래도 죽어라고 달리기만 하는 서해안보다는 제주도가 나을 것 같다. 일단은 황씨를 강하게 키워야 갖은 악조건 속에서 벌어지는 내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마조히즘 투어가 가능하니까.

그래도 수요일에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프리랜서 생활을 하고 있지만 무늬만 그렇지 직장인과 다를 것이 없어 지난 2년 동안 적어도 동업하는 직장인들과 만나고 연락할 수 있는 시간대에 일하는 생활이 되었다. 적당한 핑계를 궁리하다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오면 작년에 돌아가신 처가집 큰할아버지의 장례에 다녀온다고 말할 것이다. 아내에게는 늘 감사한 마음 뿐이다.

계획은 이틀 전에 짰다. 마침 GPS Trackmaker에서 불러다 쓸 수 있는 비트맵 지도를 자동으로 캡쳐해 GDI+ API로 이어 붙이고 좌표를 제시하는 알맵의 플러그인을 완성했다. 기반 지식이 없어(없다기 보단 업무도 아닌데 귀찮아서) GDI+로 팔레트를 만드는데 애먹었는데 vs.net 2005 베타버전의 preliminary help를 보면 GDI+ API에서 이미지를 다루는 함수들이 대폭 추가될 전망이고 그것들을 활용하면 프로그램을 더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알맵 사이트에 무료 플러그인 등록을 했지만 감감 무소식 -- palm의 Pathaway나 GPS trackmaker에서 쉽게 활용할 수 있는데 아쉽다. 망할 정부는 세금을 그렇게 뜯어가면서도 '제대로 된' 국어사전을 세납자에게 공개한 적이 없듯이(그건 학자들 책임도 크다. 왜 목숨을 걸고, 평생의 과업으로 만들 생각을 안 하는가? 그러고도 인문의 위기 어쩌구를 말한단 말인가?) 아직도 '제대로 된(말하자면 공짜)' 국가 표준 좌표 지도가 없다.

gps trackmaker에서 지도를 불러와 좌표와 비트맵 지도를 맵 매칭하고 네 개의 트랙과 하나의 루트를 짰다. eTrex 시리즈는 루트를 하나만 지정할 수 있어 아쉽다. 황씨는 제주의 관광지 좌표를 별도로 제작해 메신저로 내게 파일을 건네주었다.

황씨가 제주도에 가면 한라산에 반드시 오르겠다고 해서 나흘 일정 중 하루를 할애하고 남은 3일 동안 자전거로 해변도로를 완주해야 하는데, 소위 '마의 중문 코스'를 포함한 120km를 첫날 달리게 되었다. 계획대로 라면 둘째날은 63km, 세째날은 56km.

이번에 웨이 포인트를 입력하는 방식을 바꿨다. 대분류는 일자, 소분류는 위치순열, 마지막 postfix는 교차로에서 방향지시다. 예를 들어 D1-20R은 제주 투어 첫날 20번째 포인트, 진행로의 500m 후방 교차로에서 우회전을 의미한다. V,E,S등의 문자도 부여했다. D1-V1은 뷰포인트#1(관광지), D1-E1은 eat place#1, D1-S1은 sleep(lodging)을 의미.

작성된 트랙에 주요 관광지 좌표를 병합하고 코스를 그에 맞춰 좀 더 수정해 루트 포인트 61개, 트랙포인트 541개, 웨이포인트 75개 짜리 거의 완전한 제주도 자전거 여행용 트랙로그 (3.2MB)를 완성했다. 그러나 알맵의 지방도는 갱신이 늦어 신뢰할 수 없다. 12시쯤 황씨가 집에 왔다. eTrex에 트랙로그와 루트 정보를 입력했다.

아내가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챙겨갈 것들 중 몇 가지를 빼놓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응암역 자전거도로를 지나 성산대교를 건너 강변남로 자전거 도로를 타고 가다가 안양천으로 들어서서 1호선 구일역 앞 다리에서 일반 도로를 타서 온수 - 부천 - 부개 - 부평 - 간석 - 주안 - 도화 - 제물포 - 도원 - 주안 사거리 - 인천항 사거리 - 인천항 연안 여객 터미널에 이르는 코스다. 성산대교 기점으로 트랙의 총 길이는 34km, 집에서부터 거리는 45km이다.

짐은 간단하다. 옷가지는 상의 한 벌, 반바지 하나, 팬티 하나, 입고 있는 수영복 하나(항상 피에르 가르뎅의 수영복처럼 생기지 않은 수영복에 감사한다), 스포츠타월, 작은 등산 손수건 한 장. 음식: 점심 주먹밥, 사과 하나, 진통제, 먹다 남은 견과류 봉투. 전자기기: GPS, PDA, PDA 충전용 어댑터, 충전지 4개, 디지탈 카메라. -끝- 영원한 여행의 벗인 칫솔과 때수건, 스카치 테잎을 챙기지 못했다.


성산대교 앞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다가와 말을 건다. 자기는 누군가 안장을 훔쳐가는 바람에 안장 없는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한다. 세상에는 희안한 사람들이 참 많다. 황씨가 좌판에서 장갑을 하나 샀는데 썩 괜찮아 보여 5천원 주고 내 것도 샀다.


안양천 자전거 도로. 일반도로로 진입하기 전에 잠시 쉬다.

한산한 안양천 자전거 도로에서부터 평속 25-30kmh로 힘차게 밟았다. 부평역 부근에서 싸온 도시락을 까먹고 잠시 쉬며 땀을 식혔다. 이어폰을 안 챙겨와서 pda에 기껏 챙겨놓은 음악을 들을 수 없어 섭섭하다.

인천시내에서 한두 번 헤메고 속도차 때문에 각기 다른 길로 가다가 바람과 먼지 회오리를 일으키는 거대한 컨테이너 트럭과 나란히 달려 인천항에 도착했다. 자전거는 물론 온 몸에 먼지가 자욱하다. 오후 5시. GPS가 없었으면 예전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의 길 찾기다. GPS가 없다면 아무 준비도 안한 황씨는 내 뒤를 쫓아오지 못하고 길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GPS 만세다.

줄곳 일반도로를 달린 탓에 얼굴이 시꺼매지고 자전거에도 먼지가 내려 앉았다. 전날 예매한 표를 찾으로 창구로 갔다. 아무도 없다. 5:40pm쯤 예매한 표를 찾았다. 금액은 안 나와 있고 30% 할인된 표라고 표시되어 있다. 30% 할인이라니, 몹시 기쁘다. 여행사를 통하면 이렇게 된다. 히죽.

인천 연안 여객 터미널 앞에서 빈둥거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제대로 된 유니폼을 갖춘 사람들이 최소한 수십에서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호화스러운 자전거를 몰고 속속 도착한다. 십만원대 싸구려 자전거를 몰고 온 우리는 구석에 찌그러져 담배나 빨며 앉아 있는데 명찰을 단 어떤 아저씨가 다가왔다.

제주도 자전거 투어 하세요? 네. 저분들도 제주도에 투어하러 가나 보죠? 예스. 그러더니 내 자전거와 황씨 자전거를 대충 훌터보고 나서 자기들은 청해진 해운의 초청으로 아주 저렴한 가격에 제주 자전거 투어를 하게 되었단다. 일인당 3만원씩 받고 오늘 저녁 출발해 내일 아침 도착해서 516 도로나 1100 도로를 타고 제주도를 횡단(종단?)한 후 저녁때 돌아와 다시 배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청해진 해운은 일종의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그 행사를 기획했고 앞으로도 몇 가지 제주 자전거 여행 상품을 만들 계획이란다. 4박 5일 일정의 자전거 투어는 대략 13만원 가량 하는데, 인천-제주 왕복 배편과 3박 펜션 숙박비, 아침 저녁 식사 제공 등 매력적인 조건이다. 30퍼센트라는 파격적인 할인율에도 불과하고 우리는 두 사람의 왕복 배편만으로도 13만원을 썼다.

그 아저씨는 자전거로 유럽을 여행한 적이 있다. 프랑스에서 독일까지 25박 26일 코스로 돌아다녔는데 독일에는 산마다 성이 있단다. 그랬던가? 속초까지 14시간 만에 완주하고 내가 해남마을까지 갈 생각이라고 말하자 자기는 25시간만에 거기 다녀 왔단다. 보통 그런 빡센 주행에서는 식사를 하지 않고 죽을 싸가지고 간단다. 산에서 다운힐 할 때 보통 60kmh, 최대 80kmh의 속도로 내려온다는 가공할 실력의 소유자다. 내가 사정이 훨씬 좋은 일반도로에서 무서워서 60kmh를 넘기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가 브레이크 잡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뒷 브레이크:앞 브레이크 비율은 7:4 정도가 좋단다. 내 자전거의 타이어로는 오프로드 등의 험로주행에서 애 많이 먹을 꺼라고 말한다.

자기가 맡은 투어 맴버 중에는 산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과 일반 도로 주행 목적으로 MTB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후자는 그렇게 비싼 자전거를 왜 타고 다니는지 자기도 이해하지 못한단다. 자기는 동네에서 돌아다닐 때는 중국산 싸구려를 타고 다닌다며, 산에 가는 것이 아닌 이상 굳이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값 비싼 자전거를 탈 이유가 없단다. 그러더니 당신들이야말로 여행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나는 (음식 빼고는) 갖은 궁상을 떠는 여행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하루만에 제주시에서 서귀포라? 가능하다고 위로해준다. 사실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이다. 나는 제주도에서 자전거를 탄 경험이 있고 120km 정도의 도로면 7시간 안에 주파가 가능하지만 황씨가 걱정이다. 여차하면 중간에 멈출 작정이다.

개찰시간이다. 자전거는 배에 공짜로 실을 수 있다. 화물칸에 자전거를 내려놓고 3등실로 올라갔다. 벌써 사람들이 들어차 남은 자리가 별로 안 좋다.


오하마나호. 일본에서 제작한 배같다. 선실의 플러그가 110V용이다.

배는 6:30pm에 인천항을 출발했다. 황씨는 여객선을 둘러 보더니 풀장이 없어 후졌다고 말한다. 나는 배가 기대 이상으로 참 럭셔리하다고 생각했다. 이번이 내 네번째 제주 여행이다. 남들 신혼여행 때 간신히 한 번 가는 제주도를 무려 네 번이나 다녀가는 것이다.


출발에 앞서 짐칸의 내리문을 올리는 중.


인천연안항.


곧 어두워졌다. 식당 옆 갑판에 앉아 컵라면을 사다가 점심 때 먹다 남은 밥을 말아 먹었다. 아까 그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캬~ 자네들은 정말 여행을 할 줄 알아, 하면서 웃으며 지나간다. 그저 궁상이다. 사과를 깎아먹고 있는데 그 아저씨가 또 지나가면서, 이젠 후식까지? 껄껄 웃는다. 그저 궁상이다. 누구나 우리를 세상근심을 잊어버린 순진한 30대처럼 안 보고 학생처럼 봐준다. 장점 많다.

매점에서 캔 맥주를 하나 사다 마시면서 식당에서 벌어지는 무료 공연을 잠깐 관람했다. 필리핀 아가씨가 노래를 부르고 있길래 환하게 웃어주고 손을 흔들었더니 흘낏 쳐다보면서 살짝 눈웃음을 짓는다. 동향 사람인 줄 알았나 보다. 귀여운 아가씨라 웃음이 나온다.

상갑판에 올라갔다. 문근영이 '댄서의 순정'을 찍은 자리라며 커다란 포스터가 걸려 있다. 선두로 가는 길은 막아 놓았다. 선두에는 컨테이너들이 쌓여있다. 측풍이 심해 파도가 갑판을 적신다. 휘청거렸다. 춥다.


9/29

생일이랍시고 핸드폰에 문자가 찍힌다. 내 생일은 국가에게도 알려줄 수 없는 극비사항이다. 다른 많은 카리스마 철철 넘치는 '주인공'들처럼 내게도 출생의 비밀과 드라마틱한 성장 과정이 있다. 농담.

들락거리는 사람들 때문에(문 앞 자리다) 잠자리가 불편해 일찍 깼다. 파도가 높아서 예정보다 30분 늦게 제주항에 도착했다. 날이 흐리다. 시계(기압계)가 없어 비가 올지 안 올지 모르겠다. 강화도에 갔을 때 화장실에 남겨둔 시계를 부쳐달라고 민박 주인장에게 부탁했는데 투어 전날 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동막 해수욕장이 시골이라 택배가 늦게 온단다. 나는 어린 시절 걸어서 두 시간이나 걸리고 모내기 때문에 늦는 학생들이 있는 학교에 다녔다.


해가 뜬다. 날이 흐리다.

내리려는 사람들로 로비가 북적인다. 자전거 투어로 왔다는 할아버지와 잠깐 얘기했다.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그들은 오늘 산길을 타고 갔다가 저녁때 돌아와 인천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배 이름이 오하마나(Ohamana)인데 한 등산객 아저씨가 '오나마나'호라고 낄낄거린다. 승객은 등산객 절반, 자전거 투어 맴버 절반, 그리고 뻘쭘한 떨거지 우리 둘 정도.

내리자마자 짐칸에서 자전거를 꺼내 재빨리 나왔다. 여행 오래하다보니 이럴 때 요령이 붙어 늘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나온다.

담배 한 대 빨고 GPS를 조정했다. 서쪽으로 깃발이 펄럭인다. 바람을 굽어보는 하늘이 우리를 돕는다. 9am 출발.

칼 호텔을 지나 항구에 인접한 해안도로를 따라갔다. 잠깐 방파제에 멈춰 낚시 구경 했다. 용두암에 도착. 황씨 왈: 사진하고 똑 같군. 용두암에 무슨 슬픈 사연이 있는데 잊어버렸다. 승천하려고 끙끙거리는 형상이다. 해변에 인접한 까페 거리를 지나쳤다. 영화, 드라마 촬영 장소라고 선전문구들인 간간이 보인다. 그림같은 집들이다. 그러나 카페보다는 담배연기 자욱한 선술집 취향이다. 느와르의 주인공처럼 벽에 등을 기대고 슬며시 술집에 들어선 사람들을 훌터보며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며 혼자 홀짝이는... 음... 이상한 놈 같군.

패달을 밟았다. 지나가는 바이크 라이더가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애월항 부근 식당에서 멎었다. 아침을 먹으려고 해안도로를 따라 마땅한 식당을 찾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다. 나는 갈비탕을 주문하고 황씨더러 해물뚝배기 먹으라고 하니 해물을 별로 안 좋아 한단다. 그러더니 갈비탕을 주문한다. 제주도에서 갈비탕이라? 나야 몇번 방문했으니 상관없지만. 어쨌든 배불리 먹었다.


해안 도로

협제 해수욕장에서 멈췄다. 10:40분. 바람이 등을 밀어 진행이 아주 쉽다. 황씨는 아직 바람의 영향을 실감하지 못하는 눈치다. 샤워장이 문을 닫았지만 웃도리를 벗었다. 아래는 어제부터 줄곳 수영복을 입고 있다.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일렁이는 파도가 몸을 휩쓸고 지나간다. 에메랄드빛 바다는 수심이 얕아 한참 나아가도 물이 가슴 언저리에 미치지 않는다. 협제 해수욕장은 내가 알기로 제주도에서 가장 가볼만한 해변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기회가 되는 대로 '해수욕'을 즐겨야 한다. 해수욕장이 문을 닫아 공짜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 가을이 지닌 천 가지 매력 중 하나다.

적당히 해수욕을 즐기고 근처에서 샤워할 만한 곳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좀 난감하지만 바닷물에 젖은 채로 자전거를 타면 피부가 쓸리기 때문에 화장실에 들어가 세면대 앞에서 벌거벗고 손바닥에 물을 떠 몸을 씼었다. 마침 대변을 보러 온 사람이 외면한 채 조용히 칸 너머로 들어간다. 한쪽에서 똥을 싸고 한쪽에서 몸을 씼고 수영복과 샌들을 빨고 있는 아스트랄한 상황 되겠다.

야영장에 한 친구가 앉아 빵과 우유를 먹고 있다. 우리처럼 자전거 여행을 하는 친구인데 그 친구 모습을 보니 몇 년 전 자전거 여행을 할 때가 생각난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궁상스러웠다.


해녀상. 제주 해안 도로 곳곳에서 해녀들이 출장 전후에 들락거리는 건물로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다.

협제 해수욕장에 슬픈 추억이 남아 있다. 두번째 제주 여행 때 비행기를 늦게 타서 저녁 무렵 협제 해수욕장에 도착했는데 옆 야영장에 텐트를 치려고 보니 비바람이 송림 사이를 거세게 불어와 도저히 텐트를 칠 형편이 안 되었다. 악전고투 끝에 포기하고 근처 민박집으로 '대피'했던 기억이 난다. 어두컴컴한 동네 어딘가 다 쓰러져가는 '수퍼'에서 라면을 사다가 끓여먹고 있는데 주인 아줌마가 찬밥을 줬다. 참 맛있게 먹었다.

아내는 제주도 가면 유카리 아가씨를 만나라고 했다. 만나서 선물을 건네주라고. 한림에 산다는데 마침 근처이고 전화가 왔다. 술자리 한두 번 같이 한 것 빼고 잘 모르는 아가씨라 좀 뻘쭘한데 제주도 왔다고 대접한다고 하면 내가 좀 민망할 것 같다. 유카리는 유칼립투스의 일본어식 발음일까?


절리가 될뻔한 흔적. 섭씨 800도 부근에서 해안에 내려온 마그마가 급속히 냉각되면서 거북등처럼 갈라진다.


풍력발전 시범설비.

사실상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서해안을 모두 지났다.

수월봉을 지날 무렵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자전거 타는 사람이 보여 옆으로 가면서 말을 걸었다. 어제 저녁에 도착해서 한가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부산 친구다. 황씨는 뒤쳐졌다.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오지 않아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수월봉 앞에서 기다렸다. 자전거 타는 젊은 아가씨가 지나간다. 혼자 이런데 돌아다니다니 대견하다. 샌들을 벗고 핸들에 아까 빨아놓은 수영복을 말리며 황씨가 오길 기다렸다. 한참 후에 나타났다. gps 배터리가 다 되어 길을 잃고 잠시 헤멨단다.

바람이 거세 진행이 더디다. 그제서야 황씨는 제주 바람의 엄청난 파괴력을 실감하게 된 것 같다. 해변도로로 계속 내달렸다. GPS가 있기에 제주도의 해변도로를 샅샅이 훌터갈 수 있게 되었다. 대정에 도착한 것은 4시 무렵. 교차로에서 황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나쳐 가면서 나를 못 본 것 같다. 한참 기다리다가 전화로 좌표를 알려주고 그 앞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바람은 사진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견과류를 씹어 먹으며 황씨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대정 시내에서 식당을 찾아 돌아다녔다. 내장이 등짝에 붙은 것처럼 허기가 졌다. 간신히 식당을 찾아 들어가 고등어 조림과 갈치 조림을 먹었다. 밥을 두 공기씩 먹었다. 황씨는 바람 때문에 많이 지친 것 같다. 대정에서 하룻밤을 보내던가 아니면 중문에서 숙소를 잡자고 꼬셨지만 가는데까지 가보겠단다.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출발할 때 시계를 보니 5:30pm. 관광이라고는 용두암에 한 번 들르고 협제 해수욕장에서 잠시 파도를 즐긴 것 밖에 없지만 진행이 더디다. 해 지기 전에 중문에 닿을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여차하면 민박을 잡자.

본격적인 맞바람이다. 황씨는 말 그대로 끙끙대고 있다. 내 뒤에 바짝 붙으라고 말했다. 내가 바람막이가 되는 동안 진행이 수월할테니. 해안도로를 타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 산방산을 앞에 두고 오른쪽 도로를 따라갔다.

산방산으로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맞바람까지 가세한다. 왠만하면 버티겠지만 확 끼치는 바람에 자전거가 갑자기 멈춘다. 앞뒤 기어는 2:1, 내렸다. 내려서 걸었다. 여기서 힘을 빼면 중문 앞의 연달은 고개에서 헐떡일 것이 뻔하다. 산방산 앞자락의 커다란 절 앞에 멈춰 쉬었다. 기억으로는 동양에서 몇째 가는 규모의 절이다. 이름이 보문사 였던가? 바람에 지치고 시간이 많이 늦어 황씨더러 들어가 보라고 말하기가 뭣하다. 보문사 맞은편 용머리 해안 쪽에 하멜이 제주에 표류해 왔을 당시의 배를 재현해 놓았다.


하멜 휴게소. 나는 어린 시절 왜 외국인이 한국에 떠내려와서 살다간 여행기를 읽었을까.

산방산을 에둘러 제주 조각공원 앞에 도착. 별로 볼 것도 없는 곳이니 지나가자. 12번 국도와 만나는 화순 삼거리를 향해 진행했다. 업힐 구간. 힐탑에서 황씨가 오기를 기다렸다. 많이 지쳤는지 언덕 시작부터 자전거를 끌고 온다. 괜찮겠어? 괜찮아요, 보기에 내가 맛이 간 것 같으면 세워줘요. 나는 네 엄마나 의사가 아니다. 하지만 안색이 변하지 않은 걸로 보아 아직은 괜찮은 것 같다. 담배 한 대 빨면서 잠시 쉬었다. 이제부터 업, 다운, 업, 다운이 연속되는 마의 중문 코스가 시작이다. 사실 산방산을 빙 둘러가는 코스는 관광도 되고 대정에서 중문에 이르는 그 소름 끼친다는 연속 업,다운힐을 반 정도 돌아갈 수 있다고 판단했는데 내 판단이 옳은지 긴가민가하다.

중문 앞 삼거리까지 대략 5km 구간.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플래시를 켜고 후미 깜빡이등을 켰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플래시는 이번에도 변함없이 쓸모가 없다. 자동차 불빛에 의지해 나아갔다. 3km쯤 진행하고 황씨가 오기를 기다렸다. 우리는 매번 쉴 때마다 담배를 피워 물었다. 황씨는 쉴 때면 담배를 두 가치씩 물었다. 나는 혼자 자전거 타고 다닐 때는 담배를 거의 피우지 않지만 황씨와 다닐 때는 담배를 피운다. 나는 아직 견딜만하다. 되레 맞바람 코스를 통과하고 저녁을 먹은 이후 부터는 원래 체력의 8할을 회복했다. 수 년 전 이 고개에서 헉헉 거릴 때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월하게 진행하고 있다.

중문 앞에서 대기. 황씨가 오면 중문에서 하룻밤 보내자고 말할 생각. 황씨가 나를 지나쳐 중문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소리질러 불렀다. 괜찮아? 오늘만 벌써 몇번째 묻는 질문. 괜찮아요. 서귀포까지 갈 수 있겠어? 예스. 좋아, 가자. 7:30pm.

아름답다는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을 지나기 전에 들른 휴게소에서 핸드폰을 충전하며 시원한 얼음과자를 먹었다. 앞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가 말을 건넨다. 왜 그 고생을 하며 자전거를 타고 다니냐고. 차라리 오토바이를 빌려서 돌아 다니라고. 사실 별 고생을 안 했기 때문에 그냥 웃었다. 옆의 젊은 아저씨가 대화에 끼어 든다. 어디서 묵어요? 찜질방이요. 제주시에 가면 탑동에 3천원짜리 찜질방이 있어요. 아줌마들한테 물으면 다 알 겁니다. 오 그래요. 몽산포인지 모슬포인지 근처에 가면 자리물회를 파는 곳이 있다고 할아버지가 말해준다. 어 그거 6월에 먹는 거 아녜요? 냉동 자리가 있단다.

황씨가 지나가길래 불러 세웠다. 하드 하나 사먹고 가라고. 잘 가고 있는데 세운다고 투덜거린다. 서귀포시를 4km 남겨두고 끔찍한 업힐이 두 개 등장. 자전거에서 안 내리고 개기며 끝까지 올라갔다. 더럽게 힘들군. 이럴 줄 알았으면 중문을 통과해 서귀포시에 이르는 길로 가자고 하는 건데. 황씨에게 미안하다.

쉬엄쉬엄 서귀포시 도착. 8:30pm. 아내가 알려준 쌍둥이횟집을 찾아갔다. GPS 덕을 톡톡이 본다. 먼저 횟집에 앉아 황씨에게 횟집의 좌표를 알려줬다. 황돔과 광어가 싱싱하다길래 그걸 주문. 앞 자리에 앉은 아줌마가 머리에 꽃을 꽂더니 자기가 어때 보이냐고 묻는다. 미친년 같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어렴풋이 동막골이 생각난다고 대꾸했다. 좋아한다. 사소한 것에 기뻐하는 여자들에게 늘 경이감을 느낀다. 서로서로에게 꽃을 꽂아주는데 참 재밌게들 보인다.

에피타이저가 도착했다. 소라, 고둥, 갈치회, 한치, 문어, 오분자기, 그외 이름을 알 수 없는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심지어 스끼다시로 한치물회와 초밥까지 등장하셨다. 아내에게 들은 바가 있어 초밥을 제외하고 스끼다시는 가급적 손대지 않았다. 그거 먹다가 배가 불러오면 다른 것들은 먹지 못할 테니까.

9:10pm. 황씨가 도착했다. 건강하고 씩씩해 보인다. 우리는 '한라산 맑은 소주'를 기울이며 서귀포 시 진입할 때 갑자기 나타난 그 빌어먹을 업힐 둘로 얘기꽃을 피웠다. 전채를 다 먹을 때쯤 황돔과 광어가 나왔다. 두껍고 싱싱하다. 어이없을 정도로 푸짐하다. 배불리 먹고도 남았지만 우리는 끝까지 먹어보기로 했다. 매운탕과 밥이 등장하셨다. 매운탕을 다 먹고 나자 이번엔 팥빙수가 나타나셨다. 그야말로 배터지게 먹었다. 7만원이다. 분량으로 4인분 이상이다. 뭍에서는 먹어볼 수 없는 종류의 만찬이다. 진정한 회를 먹어본 것이다. 이 횟집에서 회 한 접시 먹기 위해 비행기 타고 서귀포에 오는 것도 고려해볼만 하다.

11:30pm, 배불리 먹었으니 이제 숙소를 찾으러. GPS에는 300m 전방에 있다고 한다. 서귀포 시내에 하나밖에 없는 찜질방인 '옥찜질방'을 간신히 찾았다. 여성전용이다. 간단히 엿됐다.

허전한 맘에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찜질방 없냐고 물었다. 중문에 있다고 한다. 아니면 여기서 자전거로 30분 정도 서귀포 북쪽으로 올라가야 한단다. 시간이 많이 늦어 시가지 중심에 있는 모텔로 갔다. 4만원 달란다. 협상했다. 3만 5천원. 3만원까지 떨궜다.


모텔 시설은 그럭저럭 괜찮다. 맥주 한 병 사서 마시다가 스르르 눈이 감겼다. 피곤했나 보다.

9/30

7시쯤 깨었다. 날이 흐리다. 중문에 널려있는 관광지를 하나도 보지못한 것, 그리고 숙소를 중문에 잡지 못한 것 때문에 후회스럽다. 중문에 찜질방이 있다는 정보를 얻지 못했다. 나야 벌써 한 번 씩은 다 본 것들이라 괜찮지만 황씨는 뭐 하나 제대로 본 것 없이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야 하는 피치못할 불상사가 되니까. 이대로 성산에 갈 수는 없다. 황씨한테는 오늘 코스가 아주 쉽고 바람도 우리를 도울 꺼라고 말했다. 황씨는 바람에 환멸을 느끼는 표정이다.

외돌개로 향했다. 비가 간간히 내린다. 황씨한테 전화해서 낚시점에 들러 비옷을 하나 사두라고 말했다. 외돌개에서 황씨가 올 때까지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스님 한 분이 눈 앞에서 왔다갔다 정신 사납게 하더니 are you chinese?라고 영어로 묻는다. 주변에 중국인 떼관광객이 엄청나게 많지만 자전거 타고 온 중국인은 처음 본다는 말투였다. 얼떨 결에 no라고 영어로 댓구했다. 장난끼가 돌아 no, i'm malaysian이라고 덧붙였다. 마누라는 중들을 많이 알아 중들한테 공손하게 대하는 편인데 난 안 그런 편이다. 말레이지아에서 한국 회사의 협력사에서 업무 배우러 왔는데 코리아가 원더풀하고 물가가 '의외로 싸다'고 말했다. 영어가 딸리는지 슬그머니 사라진다. 말레이지아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 나라 하나도 안 우습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이 관광지에서도 낚시질에 여념이 없는 아저씨는 어떻게 절벽을 내려가 저기서 낚시를 하게 되었을까. 멀어서 사람이 잘 안 보인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제는 비까지. 황씨가 푸념한다. 말했다; 나하고 여행 다니면 늘 비를 보게 되거든. 일관성있게도. 그래서 나는 비옷을 들고 온 것이다. 천지연 폭포로 향했다. 황씨더러 천지연 폭포에서 표 끊을 때 학생이라고 말하라고 했다. 일반 2천원, 학생 천원이다. 우린 늘 배우는 관계로, 학생이 맞다.


천지연 폭포


관광 온 중국 학생

아침으로 럭셔리해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전복죽을 시켰다. 벌써 11:30am이다. 유명인사들이 자주 방문해 주시는 유명 식당이다. 한 대접 가득히 나오는 전복죽은 색깔이 그럴듯하고 전복 쪼가리도 꽤 많이 들어있지만 생각보다 전복향이 안 나고 맛이 없다. 참기름을 너무 많이 넣었다. 이게 무슨 전복죽이냐, 참기름죽이지. 그래도 시장이 반찬이라고 깔끔하게 비웠다.


전복죽 먹은 식당


무슨 나방이 전투기처럼 생겼을까. 혹시... 제비는 전투기처럼 생긴 나방을 두려워 했을 지도 모른다.

오늘부터 무슨 축제를 한다. 축제는 관심없다. 비 맞으며 정방폭포를 구경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샌달이 없어 물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샌달을 신고 왔다. 물을 첨벙이면서 폭포 가까이 가려고 노력했다. 수심이 깊다. 황씨를 비웃었다. 갯벌 밖에 없는 강화도에 가서는 수영복을 입고 돌아다니더니 맨 바다 투성이인 이곳에 와서는 운동화를 신고 온다고.


정방폭포


정방폭포에 놀러온 중국 학생

서귀포 KAL 호텔을 지나 계속 나아갔다. 비가 많이 온다. 비옷을 입고 짐칸 묶는 줄로 허리를 동여맸다. 그래놓으니 타지에서 놀러온 각설이들처럼 보인다. 폭포처럼 비가 쏟아진다. 앞이 안 보일 지경이다. 비옷의 후드가 자꾸 벗겨졌다. 모자를 쓰고 후드를 덮은 후 그것을 고정하려고 손수건을 동여맸다.

감귤밭을 지나간다. 침을 꿀떡 삼켰다. 초록색 감귤은 덜 익은 것인지 아니면 제주에서 재배하는 여러 감귤 품종 중에 하나인지 알 수가 없다. 노변을 따라 주욱 늘어선 감귤 농장에서 하나 따 먹고 싶은 애처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면 마음 좋은 주인이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하나 따서 갖다주는 뭐 그런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천천히 자전거를 몰아갔지만, 아무도 없다. 비만 억수같이 쏟아지고...

감귤밭을 다 지나고 나니 비가 그쳤다.

신례리를 지날 때쯤 자전거 뒷부분이 푹 하고 꺼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주행이 안된다. 뒤를 흘낏 쳐다보니 타이어가 축 늘어졌다. 펑크다. 빌어먹을.

황씨가 다가왔다. QR레버를 제끼고 브레이크를 끌러 뒷바퀴를 완전히 떼어내고 타이어를 들어 올렸다. 빵구 때우는 것은 어렸을 때 몇 번 해 본 것 빼고 익숙치 않지만 어떻게든 해볼 참이다.

그럴 필요는 없지만 처음 하는 거니 타이어를 다 빼내고 타이어 속에 말려 들어간 튜브를 펴냈다. 펌프로 튜브에 바람을 흘려 넣으면서 세숫대야에 물을 담고 튜브를 돌려 넣으며 기포가 올라오는 부분을 찾는 '표준 수리방법'을 따를 주변 여건이 아니기에 밸브 조임 나사를 풀러 입으로 바람을 넣어 황씨더러 어디 구멍이 났는지 찾아보라고 했다. 쉽게 찾았다. 구멍이 길쭉하다.

사포가 없는 관계로 콘크리트 바닥에 구멍난 부분을 비벼 꺼칠한 면을 만들고 본드를 바른 후 살짝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 펑크 패치를 붙였다. 잠시 대기. 타이어 한쪽을 림에 끼우고 튜브를 밸브쪽부터 끼워 맞춘 후 살살 밀어넣었다. 자전거 여행 중인 사람들이 흘낏 쳐다보고 지나간다.

타이어를 다 말아넣고 펌프로 바람을 넣었다. 잘 안들어간다. 십여분 해봤지만 바람은 1/3 밖에 차지 않았다. 이 망할 놈에 펌프는 그 허접함 때문에 믿음이 안 가더니 이제사 본격적으로 속을 썩이는구나. 애당초 장난감 같은 펌프를 산 내 잘못이지. 헉헉 숨을 몰아쉬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바람 넣을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황씨가 정찰을 나가 주변 마을에서 수소문을 한다. 나 역시 근처 철공소에 물었다. 위미 사거리 왼편 주유소 뒤에 농기계 수리점이 있단다. 고맙습니다. 황씨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그러더니 먼저 가 있겠다고 하면서 자전거를 몰더니 주유소 쪽에서 멎지 않고 마을로 들어가버렸다.

어 거기가 아닌데... 펑크 때우느라 거의 30분을 소비하고 농기계 수리소까지 가는데 다시 30분을 보냈다. 수리소 아저씨들은 오리지날 제주도 방언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뭔 소린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내가 서울 말씨로 말하면 즉각 서울 말씨로 댓구한다. 바람 좀 넣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바람을 너무 많이 넣어주셨다. 하지만 바람 넣어준 것만도 고맙다.

펑크는 왜 나나? 왜 나는지는 모르겠고 타이어에 바람이 덜 들어가 있을 때 접지면적이 늘어 자주 난다.

위미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황씨를 찾았다. 그는 주유소에서 제 자전거 바람을 넣으려 했다가 주유소 직원이 황당하게 쳐다봐 민망해서 나왔단다. 달리자.


해안도로를 따라 신영영화박물관까지 밟았다. 비맞은 강아지 꼴로 데스크에 물었다. 사설 박물관인데 입장료가 6천원이란다. 건물 내외 규모로 봐서는 그다지 볼만한 꺼리가 없을 것 같다. 펑크 수리하느라 기름때가 낀 손톱과 숯검댕이라도 씻으려고 화장실을 찾았다. 화장실은 박물관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야 이용할 수 있단다. 에잇. 그냥 가고 만다.


12번 국도를 따라 이동했다. 국도 중간쯤에서 해안도로 진입로를 찾았다. 더 볼 것도 없어 12번 국도로 계속 이동하는 것이 편하지만 그래도 이왕 제주도에 온 김에 해안도로란 도로는 다 찾아가자. 초소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에게 인사했다. 얼떨결에 인사를 받는다.


제주민속촌박물관에 도착. 입장료 6천원. 황씨와 타협했다. 입장료 쓸 돈을 모아 저녁때 배터지게 먹자. 오늘은 제주 똥돼지로 하자고. 아침에 아내에게 전화해서 성산에서 제주 똥돼지 아니 흑돼지로 유명한 집을 알아 놓았다. 아내는 사무실 직원들과 제주 자전거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열댓 명의 사람들이 조리 도구를 들고 가서 제주도에서 자전거와 차량을 빌려 재밌게 놀다 갔다. 황씨와 나 둘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쓸쓸히 여행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사람이 모이면 그 규모 탓에 다양하고 풍요로운 체험을 할 수 있으니까.


5:30pm, 황씨가 올 때까지 횅한 탐라수산 직판장 앞에서 기다렸다. 황씨는 보통 나보다 뒤쳐지고 그럴 때면 짬짬이 바닷가 갯바위에 나가 게를 잡던가(잡으려 노력했다) 파도를 타고 흘러온 온갖 이상한 물건들을 건져 올리는 등 혼자 시간을 보냈다. 비 맞고 펑크나고 하늘은 구름으로 어둑어둑하고. 멀리 어슴프레하게 섭지코지가 보인다. 이제 다 온 셈이다.


황씨가 도착했다. 핸드폰 배터리가 거의 다 닳았다. 황씨더러 먼저 가서 숙소를 알아볼테니 천천히 오라고 말했다. 날이 어두워졌다. 평소에는 물론, 어제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음을 입증한 헤드라이트를 켜고 후미 깜빡이도 켰다. 섭지코지를 지났다. 오늘은 너무 늦어 섭지코지는 내일 갈 것이다. 내일은 아주 시간이 많으니까.

일출봉 도착. 민박집 몇 군데를 전전하며 가격을 알아보았다. 2만원 균일. 아내는 펜션에 묵으라고 하지만 펜션은 비수기에도 5-6만원씩 한다. 몇 군데 들르면서 따뜻한 물은 나오는지 방은 깨끗하고 넓은 지, 전망이 괜찮은지를 점검했다. 그리고 짐이 거의 다 젖은 상태라 말려야 한다. 황씨가 올 때까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흑돼지 집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농협 앞이라고 하는데 농협 앞에는 해산물 식당 밖에 없다.

민박에 짐을 풀고 자전거는 비 맞지 않게 현관 안으로 끌어놓았다. 민박 주인 아줌마에게 물어 흑돼지 잘하는 집을 찾아갔다. King mart 앞이다. 정육점과 식당을 겸업한다. 직접 돼지를 잡는단다. 아내 때부터 이구동성으로 그 집이 맛있다고 하는 걸 보니 괜찮은 집인 것 같다.


생각보다 별반 맛이 없다. 육질이 좀 다르고 오겹살이란 것 뿐 돼지고기는 역시 돼지고기인 것이다. 수입하는 고기는 껍데기를 벗기기 때문에 삼겹살은 수입인지 국산인지 알 수 없으나 오겹살은 확실히 국산이라는 정도. 어제 처럼 간단히 소주 두 병 마시고 생고기 2인분과 갈비 2인분을 시켜 먹었다. 그제서야 왜 고기가 별반 맛없게 느껴지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고기는 확실히 괜찮다. 그런데 그걸 가스불 철판에 구우니 영 맛이 없는 것이다. 여름에 돌판과 숯불로 돼지고기를 구워먹어봐서 안다. 가스불에 고기를 굽는 집은 일단 피하는게 상책이다. 하여튼 배불리 먹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어제처럼 맥주를 한병 더 사다 마시고 라면도 좀 사뒀다.

숙소 앞에서 젊은 친구가 자전거에 바람을 넣으려고 용을 쓰고 있다. 밸브가 희안하게 생겨서 바람이 안 들어간단다. 할머니 셋이 말 그대로 왈가왈부 하면서 입으로 침을 튀기며 각자의 견해를 밝히지만 해결 기미가 안 보인다. 여자들이란... 황씨와 둘이 바람 넣는 것을 도와줬다.


민박에 돌아와보니 모포가 적어 빈 옆 방에서 몇 개 슬쩍 했다. 배개하고 비누도 가져왔다.

10/1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4am. 다시 잠을 청했다.

밤새도록 선풍기를 켜 놓았지만, 어제 비에 젖은 옷가지 빨래가 다 마르지 않았다. 웃도리를 걸치니 시원하다.

6am, 황씨를 깨웠다. 비록 비가 내리고 있지만 일찌감치 일출봉에 올라갈 참이다. 전에 왔을 때 경험으로는 아침 나절이 좀 지나면 관광객들로 바글거리기 때문이다. 비옷을 챙겨 입고 한기가 스며드는 어둑어둑한 숙소 앞에 나왔다. 숙소 바로 옆에 편의점이 있고 그 옆에 일출봉 입장로가 있다. 숙소 하나는 잘 잡았다. 용궁 민박이다. 숙소 뒷편으로 돌아가면 개구멍이 있을 법 싶다. 여기서는 확인이 잘 안된다.


말 옆에서도 변함없는 포즈를 취하는 중국 텔레토비 학생. 비는 내리고 어두워서 포커스가 안 맞는다.


특이한 포즈로 말 옆으로 접근한다.

자전거를 타서인지 다리가 뻣뻣하다. 오르는 길은 별 문제 없지만 내려올 때 슬며시 근육에 통증이 느껴진다. 알이 배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약간의 근육통뿐.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길가에 설치해둔 스피커에서 성산포 낭송가사가 흘러나온다. '성산포에서는 바람이 심한 날 제비처럼 사투리로 말한다. 그러다가도 해가 뜨는 아침이면 말보다 더 쉬운 감탄사를 쓴다. 손을 대면 화끈 달아오르는 감탄사를 쓴다' 언제 들어도 귀신 씨나락 까먹는 듯한 가사다. 일출봉 전망대에서 성산을 바라보던 황씨가 신음했다; 여긴 한국이 아니야. 그는 도착한 날부터 종종 '한국이 아니야'라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다. 성산은 제주에서 가장 척박한 땅에 속한다.



플래시를 터뜨리면 이렇게 빗방울이 보인다.



일출봉 정상 전망대

배를 타던 날 만났던 아저씨는 성산포-제주 구간이 제주 자전거 투어에서 가장 재미없는 코스라고 말했다. 동감이다. 어젯밤 황씨와 저녁을 먹으면서 나는 성산포에서 516 도로까지 가는 코스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지도를 보았다. 꾸준한 업힐이다. 도로가 몇번의 교차로를 만나 복잡하다. 그 길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는 짐작할 수 없다. 그쪽 코스로 간 사람 얘기를 아직 못 들어 봤으니까.


일출봉에서 바라본 어슴프레한 서쪽은 끝없는 산과 고개의 연속이다. 가장 먼쪽에는 안개 속에 푹 파묻힌 한라산이 있다. 한라산은 보이지 않는다. 한라산이 거기 있을 뿐이다. 제주시에서 시작하여 한라산의 산 중턱을 따라 1100 도로와 516도로가 서귀포까지 이어진다. 어젯밤에는 다리 상태가 괜찮다면 그리 가겠노라고 황씨에게 말했다.


일출봉 산책로에는 쥐며느리들이 우글거린다.


비가 그치고 날이 밝았다.

생각이 바뀌었다. 다리 상태와 상관없이 가자. 하지만 황씨를 12번 국도로 혼자 가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일단 GPS가 있으니 길을 따라가는 것은 쉬울 것이다. 56km, 업힐이 거의 없고 성산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12번 국도를 만나면 그저 주욱 진행하면 쉽게 제주시에 닿을 수 있다. 별다른 관광거리는 없고 용담과 만장굴, 흑모래가 깔린 삼양 해수욕장 정도? 아무리 늦어도 4시 이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생각했다. 내가 과연 저 길을 갈 수 있을까. 해발 600여미터까지 차츰차츰 고도가 높아간다. 얼마나 많은 고개가 있을지 알 수 없다. 고생을 부러 사서 할 필요가 있나.

라면을 끓여 밥 말아 먹고 제주 뉴스를 보았다. 오늘은 제발 비가 안 왔으면 좋겠다. 비가 오지 않는단다. 그리고 제주시에서 벌어지는 공청회 중계가 나온다. 주제는 제주 날씨 예보가 하도 잘 틀려 대책을 마련해 보자는 것이다. 제주도 날씨는 잘 맞았을 것이다. 그저 내가 와서 비가 온 것 뿐이다. 나는 레인맨이니까.


설법을 위해 산을 오른다.


길에서 찢어진 비옷을 줍다.


한 말씀 하신다.


비 맞고 바람 맞다 보면 이렇게 된다.


용궁민박


숙소에서 바라본 일출봉

9.30am, 숙소를 나왔다. 스니커즈 넷, 물 따위를 샀다. 제주에서는 수돗물을 그냥 마셔도 되지만 어제 물병을 재털이로 활용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물을 샀다. 스니커즈 둘을 황씨에게 주었다. 점심은 궁하게, 저녁은 거나하게 먹자고 말했다.

자전거 상태가 말이 아니다. 체인에서 삐꺽이는 소리가 나고 페달질이 뻑뻑하다. 이틀 동안 바닷바람을 맞고 비를 맞으며 달렸더니 체인이 벌겋게 녹이 슬었다. 이틀 전 집을 나서기 전에 기름을 듬뿍 먹여 두었어야 하는건데... 교훈이다.


카메라를 노려보는 사마귀


섭지코지 진입로 앞에서 황씨와 헤어졌다. 황씨는 잘 갈 것이다. 황씨보다는 내가 걱정이다. 이번에는 GPS에 의존하지 않고 지도와 표지판을 확인하면서 가야 한다. 쓸쓸하다.

농기계 수리점이나 오토바이 수리점을 찾았다. 부탁해서 체인에 녹 제거제를 흠뻑 먹여야 할 것이다. 눈에 띄지 않는다. 지표가 되는 미니미니랜드를 표지판에서 찾았다. 우회전. 26km 가량. 수산리 방면으로 길을 잡았다. 길가다가 대형마트가 보이길래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왔다. 마트에서 녹 제거제를 팔고 있다. 하나 사서 녹이 슨 부위에 듬뿍 도포했다. 땟국물이 흘러 내린다. 브레이크를 조였다. 아저씨들 몇몇이 내가 자전거를 이리저리 손 보는 모습을 지켜본다.

성산에서 수산리로 향하기 직전. 아직은 완만.

10.30am. 쭉 뻗은 도로를 따라 고개를 몇 넘어 왔다. 금세 고도가 78m까지 올랐다. 속도는 별 의미가 없어 GPS의 디스플레이를 고도계로 맞춰 놓았다. 바람이 거의 안 불고 구름 사이로 햇살이 살짝 비친다. 오늘은 정녕 하늘이 나를 밀어 주려는가.


그림같은 길. 한국이 아니야...


자기 최면: 이건 업힐이 아니야...

꾸준히 업힐이 계속되었다. 내리막이 없다. 전혀 없다. 고도는 120m까지 올라갔다. 주위 풍경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제주 주변에 널려 있는 오름(새끼 화산)들이 하나둘씩 사방에서 나타난다. 마을이 끝났다.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다. 허벅다리가 묵직하다.


마을을 벗어나자 금새 먹구름이 몰려왔다.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서둘러 비옷을 챙겨 입었다. 강 약약 중간 약약, 빗줄기는 굵어졌다 얇아졌다를 반복한다. 코끝에 빗방울이 맺혔다. 눈썹을 따라 옆 볼기를 타고 빗물이 흐른다. 빗줄기가 거세지자 눈물처럼 뚝뚝 떨어진다. 시야가 흐릿하다. 손가락으로 대충 안경의 물기를 닦았다. 업힐은 여전하다. 비옷 속은 훈훈하다. 비옷 속은 땀으로 절은 셔츠의 물기로 척척하다.


잠시 쉬며. 화면을 빼곡히 채운 제주도 일주 도로 웨이포인트. 직선은 성산에서 제주까지의 직선 경로.

차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가끔 한 두 대씩 차가 지나간다. 그들은 힘겹게 고갯마루를 향해가는 나를 위해 중앙선을 넘어 건너 차선으로 비켜간다. 제주도에서는 차량이 크랙션을 울리는 경우가 서울과 다르다. 서울에서는 '저리 비켜 이 자식아' 라는 뜻인데, 제주에서는 '제가 뒤에 있습니다 이제 지나갈께요' 라는 뜻이다. 고맙습니다.


저건 메밀 아닌가?


해안도로에서는 절대 구경할 수 없는 종류의 풍경


지긋지긋한 업힐

비바람이 후드가 자꾸 벗겨져 손수건으로 묶었다. 업힐은 여전하다. 340m까지 올라왔다. 길섶에 자전거를 세우고 스니커즈를 하나 씹었다. 물은 벌써 2/3를 마셨다. 이렇게 비를 맞는데도 땀이 많이 나나 보다. 다리를 눌러보았다. 괜찮다. 어쩌면 아침에 타이레놀을 삼켜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4km만 더 가면 산굼부리다. 산굼부리에서 남은 스니커즈를 먹고 좀 쉬자.

비가 억수로 퍼붓는다. 목장에는 말들이 비를 맞으며 몇몇씩 떼를 지어 우두커니 서 있다. 말 등 위로 파닥파닥 부딪혀 튀는 빗줄기가 보인다. 꼬리와 갈기가 젖어 축 쳐졌다. 콧구멍으로 푸드득하는 수증기가 뿜어 나온다. 그들이 내딛고 있는 땅은 물이 고여 진창을 이루었다. 저것들이 서러브레드 종일까? 하여튼 조랑말처럼 작은 토착종이 아닌 늘씬하게 잘 빠진 경주마다.


호기심 많은 녀석. 슬슬 다가온다.


그리고 옆눈으로 쪼개본다.

산굼부리가 나타났다. 비가 그쳤다. 비옷 소매에서 물이 후드득 떨어진다. 자전거 보관소를 찾았지만 안 보여서 매표소에 부탁해 매표소 뒷켠에 자전거를 세웠다. 쫄딱 젖었다. 가방을 열어 뒤집으니 물이 쏟아진다. 일부분 방수가 되는 가방이나 지퍼 틈새로 물방울이 스며들어가 바닥에 고인 것이다. 다행히 출발 전에 짐을 모두 비닐봉투에 싸 놓아서 젖은 것은 별로 없다.

길게 숨을 들이키면서 잠시 쉬었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 가지고 들어가며 남은 스니커즈를 우걱우걱 씹었다. 산굼부리의 전체 조망은 거의 불가능하다. 북쪽의 햇빛이 비치는 아열대성 식물군과 남쪽의 온대성 식물군의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내심 기대하고 왔지만 빙 에두른 울타리는 특이한 화산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산굼부리 내부로의 진입을 막고 있다. 중앙에서 모락모락 김이 솟아 오른다. 대체... 아무리 보호해야할 관광지라지만 왜 이따위로 만들어 놓았을까 라고 생각했다.


특이한 화산 형태, 산굼부리.


억세밭을 터덜터덜 걸어갔다. 길을 막아 놓았다. 숲속의 공지를 돌아다녔다. 생태 체험장이라던지 자연수목림이라던지 따위로 불리는 것들에 가면 이런 곳에서 산림욕을 한다는 말을 한다. 내가 강원도 촌뜨기라서 그런지 영 정이 안가는 서구화된 도시민들의 가엾은 한숨처럼 들린다. 오죽이나 '숲'이란 걸 경험해보지 못했으면 그럴까 싶다.


'모든 숲속의 공터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어떤 신화학자(고고학자던가?)가 말했다. 누군지 기억 안난다. 공감하지만 이 공터에 이름 붙이기가 좀 민망하지 않을까.

음료수를 하나 사서 마셨다. 거의 수재민 꼴이다. 짐을 땅바닥에 풀어 헤치고 다시 정리했다. 비에 젖은 체인에서 물기를 닦아내고 녹 제거제를 듬뿍 뿌렸다. 녹이 벗겨지면서 금속이 삭아버리든 이제는 개의치 않는다. 짐을 싸고 비옷을 개어 짐받이에 묶고 짤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짰다. 사람들이 많아 땀에 절은 웃옷을 벗어 짜기가 좀 뭣하다.


다시 출발. 길이 아름답다. 숨막히게 아름답다.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고 이마에 땀방울이 벙글벙글 맺힐 지경이다. 430m에 이르렀다. 미니미니랜드를 지나쳤다. 힘들더라도 차라리 이 리듬 그대로 계속 올라가다 보면 끝이 보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페달에 힘을 주었다. 500m, '제주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정말 숨막히게 아름다운 숲길이었고, 이제 고생은 끝난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또 오르막이다. 대체 이놈에 오르막은 끝이 있긴 한건가 싶을 정도다. 이제 기어는 1:1, 거의 걷는 수준에 이르렀다. 560m, 516 도로와 교차점에 이르렀다. 아 살았다. 드디어,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내리막길이 뻗어있다.

어.. 내리막길을 다 내려가니 또 오르막이다. 대체 어디까지 오르막인가. GPS의 고도계가 640m까지 올라가고서야 겨우 오르막이 끝났다. 이제 제주시까지는 14km가 남았다. 1pm이다.

쉬지 않았다. 귓가를 무섭게 가르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60kmh로 미친듯이 내려간다.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업힐 지옥에서 구원받았다.


제주마 방목지 앞에서 자전거를 세웠다. 아직 땀이 덜 말랐다. 벤치에 드러누워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흐르는 듯한 햇살을 바라보았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깨보니 1:20pm.


햇살에 당하고 젖어 불은 발


젖어서 축 늘어진 가방

황씨는 제주시에 도착했을까? 나는 그에게 3pm에 전화할 꺼라고 불안하게 말했다. 아침에 헤어질 때에는 내가 3pm까지 제주시에 도착할 수 있을지 자신 없었다.

다운힐에서 60kmh는 내가 낼 수 있는 최대 속도다. 그 이상은 무섭다. 돌 하나 튕길 때마다 마구 틀어지려는 핸들을 통제할 자신도, 연속된 굽이에서 제때 핸들을 꺾어 맞은 편 차량이나 이쪽 난간에 박지 않고 나아갈 자신은 아직 없다. 그러나 60kmh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보다 더한 긴장과 스릴을 맛보게 한다. 20분이 채 안되어 제주시, 시청 앞에 도착했다.

다시 자전거의 짐들을 꺼내 벤치에 펼쳐놓고 말렸다. 황씨에게 전화했다. 전화기가 꺼져있다. 배터리가 부족해 꺼놓은 것 같다. 어떻게 할까... 일단 시청에는 지나는 사람들이 많아 짐을 펼쳐놓고 말리거나 자전거를 정비하기가 뭣하다. 삼성혈로 향했다. 삼성혈 앞 수퍼에서 작업용 장갑 한벌과 하얀 목장갑 한벌을 구입했다. 그리고 삼성혈 옆 주차장에 쭈그리고 앉아 공구를 꺼내 자전거를 분해하여 온갖 종류의 얼룩이 진 프레임과 디레일러, 체인 등속의 때를 목장갑을 찢어 깨끗이 닦고 다시 조립하여 녹 방지제를 뿌렸다.

다운힐에서 하도 브레이크를 잡아 림에 녹아내린 고무 흔적이 남아 있다.

황씨와 3pm 쯤 통화하고 GPS 포인트를 알려주었다. 3:30pm쯤 제주민속박물관 앞에서 랑데부하고 잠시 쉰 후 시청 뒷편의 오분자기 뚝배기로 유명한 식당에 갔다. 오분자기는 전복하고 비슷하게 생긴 놈인데 된장과 함께 뚝배기에 끓여 먹으면 민물 달팽이(다슬기?) 토장국처럼 얼큰하고 시원한 맛이 난다.

배를 대충 채우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 시청 앞에서 빈둥거렸다. 축제 행진을 하려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얼굴이 벌건 아저씨가 악수를 하며 돌아다닌다. 황씨는 재빨리 비켰는데, 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가 악수를 청해 얼떨결에 손을 잡았다. 그가 악수를 안 받으려는 나를 툭툭 치면서 한 말은 이랬다; 나는 제주 시장이요. 사람을 공손하게 대해야 하는데 잘 안되는 편이다.


갈옷을 입고. 두레기를 들고 춤추는 아줌마 아저씨들. 갈옷: 때가 안 타는 제주 전통 작업복이라니, 몹시 흥미가 생기는 옷이다.


저 멀리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축제에 참가해 주셨다. 이들이 축제에 참가해 활짝 웃고 있는 동안 발리에서는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축제가 악화일로로 치닫기 전에, 그러니까 행진한답시고 인파가 거리를 메우기 전에 제주 신시가지의, 우리가 숙소로 정한 찜질방 근처 음식점으로 향했다. 고등어 구이와 한치물회를 시키고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마셨다. 청해원의 한치 물회의 양은 감동적이다. 고등어 구이도 맛있고 밑반찬도 풍성하다. 듣자하니, 황씨가 오는 길에 별다른 고생을 하지 않아 다행이다. 밥 먹고 술 마시는 내내 오늘 올랐던 성산-성판악 코스가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름답고 땀나는 도로다. 왜 이런 도로가 자전거 하이킹 코스로 소개되지 않았을까 의문이다.

술 마시면서 말했다. 내 생각에 제주도 자전거 하이킹 코스로 가장 이상적인 것은, 배나 비행기를 타고 도착하여,

첫날: 자전거를 빌리고 자전거 빌린 김에 11번 국도와 1112번 지방도가 만나는 지점(교래 입구)에 데려달라고 해서 그 지점에서 출발하여 성산->서귀포까지 (시원하고 아름다운 숲과 대관령 필의 끝없는 내리막 길, 해안 도로에서 오징어에 소주 한 잔)
둘쨋날: 서귀포->중문->대정 (중문에 집중된 관광단지 관람)
세쨋날: 대정->제주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도로)
네쨋날: 한라산 등반 (또는 여러 박물관들, 용담, 만장굴을 포함한 제주 시내 관광)

이다. 하지만 성산포에서 죽어도 해뜨는 걸 봐야 한다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해 뜨는게 신기한가? 해 뜨는 걸 지긋지긋하게 봐서 별로 흥미가 없다.

노곤한 몸을 이끌고 찜질방을 찾아갔다. 자전거를 주차장에 거치하고 욕탕에 들어가 비바람에 젖은 몸을 덥히고 근육을 풀어주자 살 것 같다. 휴일이라 사람들이 바글거려 시끄럽지만 그래도 편히 잠들었다.

10/2

황씨는 오늘 한라산에 올라간다고 한다. 난 안 간다고 어젯밤 말했다. 한라산은 재미 없다. 황씨에게 한라산 가봤자 별 거 없다고 몇 차례 얘기했지만 그의 제주 여행에서 한라산 등반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더 말리지 않았다. 만일 한라산을 포기했더라면 그는 제주 해안가에 퍼져있는 거의 모든 관광지를 다 둘러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알다시피 여행과, 사랑의 황금율은, 미련과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후회할 일을 꼭 해야 한다. 어떠한 댓가를 치르고라도.

제주식 한정식이 과연 어떤 것인지 맛보려면 오후 3시까지는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오후 3시에 돌아오려면 오전 6시에는 출발해야 한다. 산에 올라가는 것은 별 문제 없지만 내려올 때는 다리가 후들거려 고생이 심할 것이다. 진달래 대피소까지는 길이 평탄해서 쉽다고 말해줬다. 가기 전에 황씨는 내 핸드폰과 그의 핸드폰을 찜질방 프런트에 맡기고 충전을 부탁했다. 내일은 전화로 연락이 되어야 하니까.

정말 6am에 나갔다. 난 7am까지 잤다. 황씨라면 백록담에 살고 있다는 전설적인 흰 사슴을 안개 속에서 힐끔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애들 게임기 앞에서 잔 탓인지 밤새도록 게임 하려고 왔다갔다 하는 애들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잔 것 같다. 한라산에 가는 대신 나는 제주 시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음식을 먹고 박물관 구경을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너무 일러 어제 미뤄두었던 빨래를 마저 하고 말리면서 '맛있는 관계'라는 만화책을 봤다. 꽤 재밌을 것 같은 만화였지만 역시 기본 포맷은 이리저리 얽혀있는 애정 관계다. 하품이 나올 때쯤 만화책을 덮었다.

9am, 충분히 쉬었으니 나갈 시간이다. GPS는 켜지 않았다. 해안도로를 도는 트랙로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어제 출발전에 모두 지웠고 GPS에 성산-제주 까지의 산림로의 트랙로그를 길이길이 보전해서 집에서 한번 훌터볼 작정이다.

유리네 식당에 갔다. 똥돼지, 아니 흑돼지를 넣어 만든 김치찌게를 주문했다. 97년 유리네 식당을 방문한, 대통령이 되기 전 노무현 대통령의 수기 밑에서 식사했다.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0년 전 고향맛을 여기서 경험하게 되는군요.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노무현은 뭘 먹었을까? 갈칫국? 성게미역국? 이 집은 맛이 별로고 가격이 비싼데도 불구하고 인기가 넘쳐 아침부터 손님들이 바글거린다. 가까이 갈 데가 없어서 여기 왔지만 희안한 경우라고 생각했다. 김치찌게의 양은 꽤 되는데 맛은 별로다. 두 번 먹어서 두 번 실패한 케이스다.

그런데 왜 자꾸만 흑돼지라고 하는거지? 똥돼지를 똥돼지라고 부르면 안되는 이유가 뭘까. 환경연대 같은 곳에서는 사람 똥을 리사이클링해 먹고 튼실하게 살이 찐 그 맛있는 똥돼지를 친근한 이름 그대로 널리 보급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한다. 흑돼지는 토종 돼지라서 근수가 수입돼지에 비해 모자라는 편이지만 제주도를 비롯한 몇몇 산간 지방에서 아직도 키우고 있다. 사람 똥은 소화가 되다만 영양의 보고다. -이상-

식사를 마치고 제주 종합 운동장에 들러 자전거를 다시 손 봤다. 기어가 뻑뻑해서 조이고 조정을 새로 하고 브레이크 이격도 제대로 손 봤다. 브레이크 패드가 많이 닳아 있다. 마음에 들 때까지 조정했다. 옆에서는 RC 카를 조정하는 아저씨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히히 웃고 있다.

느적느적 돌하르방이 쓴 모자처럼 생긴 제주국립 박물관으로 향했다. 돌하르방도 여러 종류가 있는 걸로 아는데 제주 전역에서 본 것들은 모양이 하나 같다. 모두 짝퉁 카피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으로는 제주 전역에 널려있는 용암-구멍이 뒤숭숭 뚫린 현무암 돌하르방이 동자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아는데... 확실치 않다. 황씨가 전화했다. 정상에 다다르면 전화하라고 말한 바 있다. 11:30am 그는 정상에 올랐다. 다음 전화는 성판악에서 제주시행 버스를 탈 시점에 하라고 말했다.

매월 첫번째 일요일은 박물관의 입장료가 없단다. 전시물의 수준은 그저 그랬다. 한라산이 120만년 전에 생성되었고 산방산이 70만년 전에 생성되었다는 것 정도를 배웠다. 신석기, 구석기 유물은 들르는 박물관에서 볼 때 마다 짜증이 난다. 전세계 거의 모든 박물관에서 항상 전시하는 그 흔해빠지고 심하게 말해 파렴치한 돌덩이들에는 아무 특색도, 신비감도, 심지어 재미 마저 없다. 어떻게 전 세계의 원시 인류는 하나같이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똑같은 방식으로 석기를 제작했을까? 어떤 교수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호기심이 많고 창조적이라는 것은 대체로 헛소리에 가깝단다. 공감한다. 신석기 아인슈타인 한둘 빼고 나머지는 모두 클론 같은 놈들이다. 21세기에도 사정이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면 신석기는 그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고고학자들이 자기들이 발견하고 싶은 것만 발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시물이나 전시관의 규모가 작아서인지 국립박물관임에도 한산하다. 어쨌거나 모든 여행의 출발점은 박물관이 되어야 옳겠지만 제주도에 하이킹하러 온 사람들에게 유물이 눈에 띌 지는 의문이다. 박물관에서 나름대로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박물관 바깥의 야외 전시장을 하릴없이 빈둥거리며 돌아다녔다.

12시가 좀 넘어 배가 출출해서 그 유명한 도라지 식당에 찾아갔다. 이번에는 갈치국이다. 갈치국을 끝으로 나는 제주도에서 먹어볼 수 있는 특색있는 식사 코스를 하나도 남김없이 경험한 셈이 된다. 지금 이 시간에 한라산에서 삽질하고 있을 황씨를 생각하다보니 목이 메어 맛있는 갈치호박국을 조금 남기고 말았다.

민속자연사박물관에 갔다. 오, 이거 예상 밖인걸. 전시물 수준이 훌륭. 비싼 값을 하는군. 전시물을 눈 높이에 맞춰 하향 배열한 디스플레이 방식은 수긍이 가지만 그래도 시점과 전시물 사이가 많이 벌어져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없는 것이 흠일 뿐, 전시물과 설명이 썩 괜찮은 박물관이다.


민속 자연사 박물관 외부 전시장


전시용 제주 똥돼지. 통시라 불린다. 제주도에서는 망자의 음식으로 돼지고기를 관에 올려놓기도 한다.


할매당이라고 하는데, 물색(나무에 걸어놓은 갖가지 천 쪼가리)이 별로 안 달려 있다.


박물관 야외를 돌아다니는 중에 바깥에 장터가 벌어졌는지 시끄럽다. 박물관 옆이 제주 민속 관광 타운인데 아마도 축제 때문에 장터를 벌여놓은 것 같다. 딱히 할 일도 없어 장터에 가서 놀았다. 이것 저것 공짜루 주는 음식들을 집어먹고 떡메도 두들기고 도자기 만드는 것 따위를 구경했다. 술도 몇 잔 얻어 먹었다. 그저 갈옷이 탐이 났는데 파는 곳이 보이지 않는다. 황씨한테 전화가 와서 약주는 그만 마셔대고 만나기로 한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황씨 몰골이 말이 아니다. 내려오는 길에 죽죽 미끄러져서 여기저기 생채기가 보이고 팔 다리 할 것없이 온통 흙 투성이다. 내가 '맛따라 길따라'를 하며 한가하게 시내를 배회하는 동안 그는 온통 자갈밭 투성이인 한라산을 샌달을 신고 등반하며 어리버리 올라온 많은 사람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주었다고 한다. 안개와 심한 바람으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한라산 정상 부근에서 앞 사람의 발 뒤꿈치만 쳐다보며 올라갔다가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정상에서 멍하니 20분을 보내고 다리가 풀린 상태로 악전고투 끝에 산을 내려왔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그가 먹은 것이라고는 아침에 먹은 컵라면 하나, 초코바, 아침에 사간 물은 일찌감치 떨어졌다.

여행과 사랑의 황금율은 미련과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후회할 일을 꼭 해야 한다. 어떠한 댓가를 치르고라도. 다시는 한라산에 안 간다고 말한다. 그가 한라산을 내려오면서 품은 실낫같은 희망은, 그래도 내려가면 맛있는 저녁식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담배 한 대 빨고 잠시 쉰 다음 꽤 유명하다는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서귀포에서 먹었던 회를 기억하며 이번에는 스끼다시는 콧방귀를 뀌며 쳐다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제주도 한정식은 뭐가 다를까, 기대하며 밥상이 나오길 기다렸다.

나왔다. 해물뚝배기 각자 한 그릇, 한치회, 오징어조림, 한치와 새우를 넣은 해산물 샐러드, 고등어 조림, 그외 언급하고 싶지도 않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정식 상차림의 시시한 반찬류. 어떻게 된 일인지 제주 밥상의 감초격으로 빠지지 않는 생선젖이 없다. 이건... 전국 어디서나 흔하게 먹을 수 있는 그런 한정식이다. 이건 제주도 음식도 아니다. 그냥 20세기 이후 한국에 정착한 정체불명의 빌어먹을 '정식', 웃기는 '관광정식' 바로 그것이다. 때마침 창 밖으로 관광버스가 들이 닥치는 것이 보인다. 그럼에도 이런 걸 먹으려고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들어차 있다. 놀랍다. 어쩌겠나. 먹어야지. 나는 아침, 점심, 간식까지 먹어 배가 불렀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먹었다. 황씨가 불쌍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건너편의 물항식당으로 가는건데. 아내는 물항식당이 제주항 부근에 있다고 말했지만 이번에 내가 두 번째 확인한 바로는 제주항에서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 같다. 물항식당에 가면 회라도 실컷 먹었을텐데!

그래도 황씨한테 미안한 것은 없다. 그는 제주도에 아무 생각없이 왔다. 만일 내가 빵과 우유만 먹고 돌아다녔더라면 그 역시 빵과 우유만 꾸역꾸역 먹고 돌아다녔을 것이다. 맛따라 길따라에 괜히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은 오히려 내 쪽이다. 먹는데 돈을 많이 썼다.

자, 배를 채우고 자전거 정비할 겸 식당에서 물수건을 몇 장 얻었다. 제주항으로 출발했다. 제주공항과 평행한 좁은 도로를 질주했다. 비행기가 때마침 활주로를 지나가고 있다. 미친듯이 패달을 밟았다. 제주항에 도착하니 5:50pm. 간단히 컵라면 둘을 사들고 들어갔다. 수속이 바로 이루어져 자전거를 끌고 탑승구를 지나쳤다.


자전거를 타고 항구를 가로질러 배의 화물칸으로 그대로 들어갔다.

올 때보다 사람이 많다. 엄청나게 많다. 분위기도 좋다. 온 사방에서 술판이 벌어지고 고스돕 판이 벌어졌다. 우리는 컵라면에 물을 부어 갑판에서 궁상스럽게 먹었다. 맥주 대신 백세주를 마셨다. pda로 책을 읽다가 열한시쯤 스르르 눈이 감겼다.

10/3


날이 밝아온다.

당산 화력 발전소를 지나간다. 저번 주에 우럭 낚시를 하던 곳이다. 배의 속도는 19노트 가량. 조류가 거세 예정보다 한 시간 늦게 도착한단다. 배가 많이 흔들린다.

샤워를 마치고 책 좀 읽다가 배에서 내렸다. 역시 가장 빨리 내렸다.


인천연안항 청사 앞에서 자전거를 정비했다. 깨끗이 닦고 녹 제거제를 뿌리니 자전거가 훨씬 잘 나간다. 녹 방지제는 황씨에게 줬다.

원래는 제물포역부터 차례로 훌트면서 자전거를 끌고 지하철에 타려고 했는데 김씨 아저씨가 점심 한 끼 사준다길래 송내역으로 자전거를 몰고 가기로 했다. 빵과 우유로 아침을 때웠다. 길을 몇 번 헤메고 황씨와 한 번 헤어졌다. 간신히 다시 만나 송내역 근방까지 왔다. 인천 도로는 오고 갈 때마다 개판이라는 생각. 황씨는 지갑을 두 번 떨구고 사고도 한 번 났다. 긴장이 풀린 탓일께다.

송내에서 김씨 아저씨와 형수님을 만나 소주에 삼겹살을 먹었다. 다 먹고 나니 우리가 9인분을 먹었단다. 엄청나게 먹어댔군. 김씨 아저씨와 헤어져서 김포공항 역으로 향했다. 평균 25~30kmh로 나갔다. 자전거 진입이 금지된 도로지만 무시했다. 그럼 자전거 도로를 만들어 달란 말이다. 한강시민공원을 통해 강변 자전거 도로로 진입했다.


성산대교 앞에서 황씨와 헤어졌다. 나는 성산-성판악 주행을 통해 이전보다 근육이 업그레이드 되었다. 더 이상 근육이 아프지 않다. 황씨도 그렇다. 다음 여행은 지금보다 수월할 것이다. 다음 여행에서도 맛따라 길따라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 사람 더 꼬시면 텐트와 코펠을 들고 야영하면서 다닐 수 있다. 황씨는 김씨 아저씨를 꼬셔보려고 열심이다. 글쎄? 안 먹힐텐데... 나나 황씨나 자전거 얘기만 늘어놓으니까 만나기를 꺼리는 것 같다.

사람들로 버글거리는 자전거 도로를 갑갑할 정도로 느린 속도로 지나가고 집에 도착했다. 4pm을 넘겼다. 집에 쌀이 떨어져서 피자를 시켜 먹었다. 영화 몇 편 다운 받아 차례대로 구경했다. 성산-성판악 코스의 트랙로그를 다운받아 살펴보고 낄낄 웃었다. 내가 미쳤지.


이렇게 해서 언제나 변함없이 비땀으로 얼룩진, 비비린내 나는 여행을 마쳤다.

꽃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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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기

잡기 2005. 10. 5. 00:33
자전거 여행 로그의 갯수가 늘어날 전망이라 On Load로 옮겼다. 9월 28일부터 10월 3일까지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돌았다. 로그를 썼다. 온 로드에 기록하는 로그를 일일이 여기서 어나운스 할 필요 없겠다. 당신을 위한 글이 아니니까, 집에서 떡을 지어 남은 떡을 옆집에 나눠주는 셈이니까. 5년 전 제주 자전거 여행기가 더 재밌다. 목적과 매릿, 그리고 엉뚱하고 즐거운 사건사고를 두루 갖춘 재밌는 여행은 언제쯤 하게 될까? 기대된다.

여명에 눈을 뜬다. 눈꺼풀이 눈을 덮은 채 날파리처럼 왱왱거리는 뮤즈의 속삭임 또는 전조를 보고 듣는다. 커다란 스테인드 글라스가 산산조각 나는 것처럼 사방으로 튀어나온 색깔 있는 이미지와 음향의 편린이 휘몰아치면 두 시간과 물질을 잇는 수퍼스트링처럼 조각들은 스스로 뭉치고 떨어지길 반복하면서 일련의 합목적성을 띤다. 이야기가 된다. 즐겼다. 잠에서 깨면 그 잊는다. 4년 전부터 꾸던 꿈이 끝나면서 요즘 허전하다.

어린 시절에 나는 내가 작가가 될, 그것도 괜찮은 작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글쓰기를 잘 가다듬기만 하면, 간밤의 꿈을 엮기만 해도 이야기가 되니까. 꿈속에서 말하는 화자는 눈부시게 빠르고, 정교하고, 화려하고, 유머러스하게 과장된 수사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드라마틱하다. 현실에서는 천 개 미만의 단어로 무미건조하게 말하고 쓴다. 어쩌면 그렇게 대조적일 수 있을까.

다음 몇 년 동안 어떤 새로운 꿈을 꾸게 될 지 기대한다. 하암. 졸립다. 그만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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