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다, 에피소드와 함께 디지탈 기기를 들고다니면서 여행하는 얘기를 써 달라고 하던데 나하고는 영 거리가 먼, 사진 찍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 것이 쉽지 않다. 어제 먹은 술로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이번 주까지라니 급한대로 기사를 써서 보냈다. 왠지 횡설수설한 것 같고, 기사라는 것이 체질에 안 맞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면서도... 마누라, 보고 손 볼 것 있으면 알려줘. 내가 여행담 끄적이면 그게 다 '범죄의 재구성'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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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아그라의 한 식당에서 한국 음식을 흉내낸 수제비의 형편없는 맛 때문에 나름대로 실존적인 고민을 하던 차에 만났던 한 프랑스인 여행자의 사진이 색달랐습니다. 타즈마할의 정면이나 측면, 또는 아그라 포트에서 찍은 사진은 워낙 흔해 빠졌지만 타즈마할의 뒷면을 찍은 사진은 처음 보았지요. 어째서 뒤를 찍었을까, 타즈마할의 뒤는 강인데 보트 위에서 찍어도 그런 각도는 안 나올텐데, 의아해서 어떻게 찍었는지 물어봤지요. 강에서 배를 타고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배에서 펄쩍 뛰어내려 놀라서 경악하는 인도인 뱃사공을 뒤로 한 채 건너편까지 헤엄쳐 갔다고 말하더이다. 새벽에 사람들 눈을 피해 몰래 배를 몰고 나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엄청난 똥물에 뛰어들어 기슭까지 기어 올라가 사진을 찍는 그의 열정은 사뭇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샤워는 꼼꼼하게 했는지 의심스러웠지요. 필자가 만난 배낭 여행자들 중에서 가장 지저분한 사람들이 프랑스 여행자입니다. 세수를 안 하고 다니는 것은 같은 여행자로서 이해가 가지만 마지막 샤워를 언제 했는지 날짜를 손가락으로 꼽는 친구들이 몇 있었지요.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여행이지요. '고향에서 죽는 자는 행복하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행 중에 만난 한국인 여행자들이 여행을 시작한 이유가 십인십색(every man has his humor)이었습니다.
* 세상 구경이나 할까 해서 잠깐 바람 쐬러 나왔어요. 일년이 지났군요.
* 원래는 유럽이나 돌아보려고 했는데 자다 깨보니 아프리카네요.
* 친구 따라 나왔는데요? 친구는 돌아갔고요. 돈 떨어질 때까지 돌아다니려고요.
* 저는 비행장년이거든요. 갈 데가 없어요.
장기여행자 중 절반 이상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카메라를 가지고 다녀봤자 몇 컷 찍지도 않지요. 짐 된다고, 여행에 방해가 된다고요. 인도의 깐야꾸마리 부근에는 수많은 풍력 발전기가 언덕을 뒤덮고 있는데 버스를 타고 가다가 석양 속에서 본 그 광경이 너무나 멋있어 사진을 들이대고 찍으려 했지만 속절없는 버스는 필자를 위해 차를 세워주지 않았습니다. 아쉬웠지요. 그래서 석양 속의 풍력 발전기는 내 마음속에서만 천천히 돌아가게 되었지요. 지금은, 사진으로 안 찍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이제부터 여행에 관한 이런 저런 짤막한 정보와 여행과 디지탈 장비가 궁합이 맞는지, 필자의 경험을 빌려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행 계획 준비와 비용은 기간에 반비례 합니다. 만일 일주일 여정으로 여행을 계획했다면, 그리고 그곳이 처음 가는 곳이라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충분한 사전 준비와 일이 틀어질 경우에 따른 대안을 마련 하지 않으면 길 위에 돈을 뿌리고 다니기 십상입니다. 반대로 여행 기간이 늘어날수록 점점 더 자유도가 늘고 여행 비용이 줄어듭니다. 보통 2-3주가 지나면 다른 사람이나 가이드북의 도움 없이도 이동과 숙식 등의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여행에 집중하게 되지요. 필자의 경우, 태국 1주일 여행 경비는 100만원 가량, 인도 한 달 여행은 120만원, 세계 1년 여행이 1000만원 가량 들었습니다. 천만원 중 400만원이 항공료였는데 보시다시피 여행 기간이 늘어날수록 비용이 점점 저렴해지지요? 몇몇 국가에서는 극단적으로 말해, 하루에 7불 이내로 여행이 가능합니다.
필자는 장기여행자 주제에 온갖 장비들을 들고 다녔습니다. PDA는 금전 관리, 특히 환전할 때 계산기로 쓸모가 있지요. 국경에서 환전을 하다보면 어떤 특이한 기술을 사용한 것인지 환전상의 계산기에서는 0.1 곱하기 10을 두들기면 9가 나옵디다. 사기를 치는 녀석에게 화를 내는 것도 잊고 그저 기발하고 신기했지요. 그것 외에 무료하고 심심한 이동 중에 책을 읽는다던지 하는 용도로 사용했고 인터넷에서 수집한 여행 정보를 넣어 두었습니다. 과테말라에서 짐받이 차의 요란한 뒷자석에서 충격을 받아 메모리가 포맷되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까지 아주 요긴한 기기였습니다.
디지탈 카메라와 64MB, 128MB 메모리를 가지고 다녔고 찍은 사진은 노트북에 넣어두고 다니면서 여행자들을 만나 사진을 보여줄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비디오 테잎 크기만한 조그만 노트북으로 신통하게도 여러 가지 작업을 한다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던데, 덩치 좋은 외국인들은 보통 거대한 노트북과 엄청난 장비를 이고 지고 들고 다니면서 여행을 하러 온 것인지 장비에 치여 다니려고 하는 것인지, 가엾어 보였습니다.
장비 때문에 여행을 망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그리고 장비들과 함께 쉽게 하려고 결심한(피치못하게 방어적인) 여행과 관광을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경계도 없습니다. 유럽이나 미국 등지의 비교적 편안한 여행지에서도 고생스럽게 록키 산맥을 트래킹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자동차를 몰고 대륙을 횡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국의 해변에 누워 불어오는 따뜻한 무역풍에 읽던 책을 모래사장에 떨구고 느긋하게 낮잠을 자는 여행자도 있지요. 그 반면 몽골의 푸른 초원까지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날아가 한족이 만들어놓은 몽골 전통 관광 타운에서 말젖으로 만든 술을 마시고 30분에 10달러를 주고 말 한 번 타보는 것으로 썩 괜찮은 경험을 했다고 만족하는 사람도 있고, 거의 아무도 안 가는 몽골 북서부 산악, 러시아 국경 부근의 길가에서 히치하이킹 안 해주는 똥차에 대고 욕설을 퍼부으며 인상을 쓰는 여행자나, 자그마한 카약에 하루 종일 앉은 채 수백 년 전 에스키모와 러시아 모피 상인들 외에는 발이 닿지 않는 처녀지를 천연덕스럽게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디지탈 장비와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여행은 문화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행자들의 철칙 중에는 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짐의 무게와 부피는 행동을 제약하는데, 8kg짜리 배낭 하나만 들고 다니는 여행자와 20kg 짜리 큰 배낭을 들고 다니는 여행자가 막 떠나는 버스를 향해 품위 없이 달음박질을 해야 할 상황이라면 버스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8kg 짜리 배낭을 맨 사람입니다. 여행이 점차 쉬워지고 있는 최근 상황에 비추어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만 30-40도를 오르내리는 뙤약볕 아래에서 버스 터미널로부터 숙소까지 3km를 짐을 지고 걸어가야 할 처지라면 심사숙고해 볼 가치가 있지요.
특히 여행을 처음 하는 많은 여행자들이 미리 걱정하는 것은, 한국보다 사정이 안 좋은 나라에서는 좋은 물품을 구할 수 없고, 반대로 경제 사정이 좋은 나라에서는 물건 가격이 비싸므로 한국에서 미리 짐을 준비해가는 것이, 미리 준비하지 않은 것보다 낫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의 물건 중에서 외국에서는 동일한 품질의 공산품을 싯가로 구하기 어려운 것이 (극단적으로 말해) 신발 뿐입니다. :)
짐은 자신이 평소 입고 있는 옷과 평소 신고 다니는 신발과, 약간의 세면 도구 정도면 어떤 종류의 여행에서도 충분합니다. 그럼 자기 키만한 짐을 지고 다니는 서양 여행자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짐의 크기는 종종 그 여행자의 두려움의 크기만합니다. 여행자들의 속어로, 짐의 크기는 업보의 무게와 같다고도 합니다.
필자의 경우 일년 가량의 장기 여행을 준비하면서 옷가지 등의 부피가 나가는 짐을 줄이는 대신 중고로 구매한 작은 서브 노트북과 사용하던 PDA, 디지탈 카메라 등을 챙겼습니다. 노트북이 890g, PDA가 175g, 카메라가 250g, 여분의 전지 6개, 충전기, 몇 가지 케이블, 유니버셜 플러그 컨버터 등 대략 4kg 정도의 전자기기와 가이드북 1kg 가량, 기타 잡동사니들(2kg), 배낭 45리터(5kg) 등 짐의 무게가 15kg 내외였습니다. 서브 노트북이므로 공간이나 용적을 차지하지 않았고 PDA는 책 수백권 분량을 대체했습니다. 카메라, PDA 등속은 모두 일반 건전지를 사용할 수 있는 타입이었지요. 장기 여행을 준비하는 처지에서 일단은 값이 싸고 망가져도 굳이 미련을 남기지 않을 장비를 가져가는 것에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이중에서 가장 효용가치가 높았던 것은 노트북과 PDA였습니다.
대다수의 물건은 현지에서 직접 조달하는 것이 백 번 낫습니다. 그 핑계로 시장도 구경하고 하다못해 실랑이질을 벌이며 현지인과 대화 비슷한 것도 할 수 있지요. 플러그 컨버터는 시장에서 1 달러 미만에 살 수 있습니다. 케이블도 그렇고 건전지도 거의 싯가 그대로 구매가 가능하지요.
그런데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해도 숙소에 전력 아웃렛이 존재하지 않는 당황스러운 상황이라면? 물론 여행용품점이나 공항의 면세점에서 유니버셜 플러그 컨버터(각국의 사정에 맞게 전력 플러그를 교환할 수 있는 장치)를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애당초 숙소에 아웃렛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쓸모가 없습니다.
게다가 충전할 기기는 세 개인데 아웃렛이 단 하나 뿐이라면? 멕시코의 남부 지방을 여행하는 도중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멕시코의 남부와 북부는 경제수준이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데 남부에는 인디헤나라는 토착민들이 많이 살고 있고 멕시코의 오래 전 생활양식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지요(개발이 되지 않았지요). 멕시코 남부는 침략자들이 관심을 둘만한 황금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부의 대다수 저렴한 숙소에는 아예 아웃렛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장 노트북을 충전하고 꽉 찬 디지탈 카메라의 메모리를 옮겨야 할 판인데 주인장에게 애걸해도 방법이 없었습니다.
거리로 무작정 나가 시장에 있는 작고 허름한 전파상에 들러 안되는 에스빠뇰로 몸짓 발짓을 하며 나중에는 사다리를 놓고 천정에 걸려 있던 백열전구용 리셉터클을 뽑아 지불하고 숙소의 천정에 매달려 있는 하나 뿐인 전등에 연결하고 220v -> 110v 플러그 컨버터를 리셉터클의 소켓에 연결한 후 충전기의 플러그를 다시 꽂았습니다. 이후로 남미에서 어떤 숙소에 묵더라도 전력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지요. 어쨌거나 전등은 어느 숙소에도 달려 있으니까요. 도난 등의 이유로 숙소의 프론트에 노트북이나 충전세트 등의 값 비싸고 잃어버리면 속 쓰린 장비를 맡겨 충전시켜 달라고 하는 것은 캥기고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소금평원으로 유명한 볼리비아의 유우니에 이르러서는 사정이 더 나빠졌습니다. 랜드 크루저에 물과 연료, 식량을 싣고 평균 고도 3500m의 고원 호수 지대를 나흘간 돌아다니는 동안 세수할 물은 커녕 어디에서도 전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지요. 이동 차량의 시가 잭에서 충전용 전기를 끌어쓸 수 있다고 별 걱정없이 장비를 챙겨온 여행자들을 더더욱 처량스럽게 만든 것은 차량이 워낙 노후해서 시가 잭으로부터 전기를 끌어 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이드 겸 운전수 겸 요리사(다재다능하지요?) 말로는 일 년에 한 두번은 차량 고장으로 오도가도 못한 채 다른 팀이 도착해서 구조해 줄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경우도 있답니다. 하여튼 그래서 카메라를 가지고 갔던 여러 여행자들은 이틀이 지나자 사실상 단 한 장의 사진도 찍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일반 건전지를 사용하는 카메라였기 때문에 전날밤 6개의 충전지를 모두 충전해 두고 별도로 건전지가 있었기 때문에 마음놓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지요.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에서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려고 숙소에 묵고 있던 한 한국인 여행자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에게는 유니버셜 플러그 컨버터 보다 더 훌륭한 아이디어가 있었습니다. 한쪽은 220V용 3구 멀티 컨센트이고 다른 쪽은 보통 1구 컨센트에 꽂는 220V 플러그가 달려있는, 한국의 수퍼마켓 어디서나 몇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연장 케이블을 구매해 플러그 부분을 떼어내고 나전선 그대로 방치해 둔 것입니다. 약간 위험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어느 나라, 어떤 종류의 컨센트에도 꽂을 수가 있었지요.
unreal하고 unusual한 끝내주는 경치를 보려면 문명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장소로 가야 하는데, 하다못해 여행자들이 많이 다녀 가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네팔의 안나푸르나 서킷 일주의 경우에도 보통 일주일에서 21일까지 장기간 트래킹을 해야 합니다. 꾸스코에서 시작하여 마추피추에 이르는 길도 나흘 이상 걸리고 가깝게는 중국의 사천성 북서부나, 우르무치 이후부터는 황량한 사막이 펼쳐지는 실크로드, 몽골의 북서부에서 러시아의 바이칼 호수에 이르는 경로도 사정이 마찬가지입니다. 별 방법이 없습니다. 충전지를 여벌로 준비하고 하루의 전력 사용을 면밀히 계획에 맞춰 하는 수 밖에요.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열대의 섬들은 늦은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발전기를 끄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일부 국가에서는 단전과 전력 불균형이 일상적입니다. 인도의 경우 하루에 수차례 전기가 나가는 것은 예사이고(지금은 사정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전압이 80V에서 240V까지 치솟는 일이 잦아 정전압 정전류 충전기가 아닌 값싼 충전기를 사용하면 기계를 망가뜨릴 수도 있지요. 노트북의 충전기는 세간의 상식과는 달리 전압 불균형에도 노트북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습니다. 믿겨지지 않지요? 필자는 일년여 노트북을 들고다니면서도 수십개국의 온갖 종류의 전력 사정을 경험했지만 열악한 전력 사정 때문에 노트북이 망가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사정이 저렇다보니 필자의 경우 숙소를 고를 때 제일 먼저 눈이 가는 것이 숙소에 전력 아웃렛이 있는가를 무엇보다도 먼저 살펴보게 되었지요. 배게 위로 바퀴벌레가 한가하게 기어 다니거나 햇볕 한 줌 들어오지 않는 감방 같은 숙소라도 전력 아웃렛만 있으면 오케이였습니다. 숙소를 고를 때 그 다음에 체크하는 것이 안전한가 여부입니다. 숙소를 잡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창가에 기기들을 놓아두지 않는 것입니다. 창문을 통해 훔쳐갈 수 있지요. 창문 곁에 놓아둔 짐을 몇 가지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냄새 나는 양말과 팬티 따위는 왜들 훔쳐가는지 모르겠군요.
숙소 내부라고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충전 중이라도 기기를 침대나 책상 위에 올려놓는 것보다는 충전 케이블을 배낭 속으로 끌어들이고 배낭을 잠궈두는 것이 좋습니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숙소의 종업원이 슬쩍하고 입을 닦는 경우도 있는데, 숙소의 자물쇠 보다는 자신이 들고 간 자물쇠를 달아두는 것이 좋지요. 특히 인도에서는 눈에 보이는 모든 값비싼 것들은 잠시 눈을 떼면 뜬금없이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기기의 전력 사정 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충격과 모래, 먼지입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불어닥치는 모래 바람, 고작 200km를 이동했을 뿐인데 영하 30도에서 영상 40도까지 오르내리는 기가 막힌 날씨, 습도가 80%를 넘어 잠깐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열대의 대기, 저 먼 지평선은 물론 지근 거리의 모든 것이 갑자기 하얗게 변하는 끔찍한 눈보라, 롱테일 보트의 갑판으로 쉴새 없이 밀어닥치는 바닷물 등등. 비포장 도로를 질주하는 버스는 종종 20-30cm 떠올랐다가 콰당하는 소리와 함께 흙바닥에 내려 앉는데, 살과 지방으로 적절한 완충 작용을 하는 인체와는 달리 버스의 바닥이나 천정에 동여매 놓은 짐은 고스란히 그 충격량을 감내해야 합니다. 노트북 등의 기기는 그래서 티셔츠, 속옷, 양말 등 갖은 옷가지로 몇 번 싼 다음 짐의 중심부에 놓아 충격을 줄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필자는 몇 번의 여행으로 생긴 경험 덕택에 빅토리녹스 만능칼과 작은 드라이버를 챙겨 가고는 합니다. 기기를 분해해서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면봉으로 모터 구동부에 쌓인 모래 먼지를 닦아내고 그리스 대용으로 콜드 크림을 바르는 일이 숙소에서 할 일 없이 앉아 있을 때 주로 하던 일이었습니다. 기기 정비가 끝나면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는 베란다에 앉아 벼룩을 잡거나 빨래를 했지요.
꾸준히 유지보수를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여기 저기 발생하는 잔 고장을 다 막을 수는 없지요. 필자의 경우, PDA의 액정에 줄이 가고 전지가 닿는 접점 부분이 떨어져 나갔고, 충전기의 충전 회로에서 기판이 뜯어지고 노트북의 하드 디스크에서는 비행기가 활주로를 이륙할 때 나는 괴이한 소음이 들렸습니다. 카메라는 진작부터 전지 홀더가 깨져 테잎으로 붙여 놓았지요.
기기가 고장나면 전기적인 문제의 경우 전파상에서 납땜질을 튼튼히 하는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노트북이나 카메라, PDA를 가져가면 십중팔구 신기한듯이 쳐다보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자기 녹슨 시계를 불쏙 꺼내 들고 이것과 교환 하자거나, 얼마면 구입할 수 있냐고 묻기 일쑤입니다. 새로운 기기에 보이는 그들의 호기심과 무작정 수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도전 정신은 높이 살만 하지만 수리를 맡겼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장담할 수 없어요. 기기의 소형화 덕택에 SMD(surface mounting device)를 다량 사용하는 것이 최근 기기들의 공통적인 특징인데 그들이 가진 납땜 인두를 잘못 들이댔다가는 수리는 커녕 기기를 날려먹기 십상이니까요.
험한 여행을 하고 난 뒤 대다수의 장비는 회복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지요. 특히나 노트북은 고생을 하도 많이 한 탓인지 도착하자 마자 액정이 나가고 더 이상 부팅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놈에게 고맙고 해서, 바다가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싶었지요.
여행이 장기화될수록 카메라의 메모리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에, 보조 기억 장치를 챙기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여행 기간이 2주를 넘어가고, 디지탈 카메라의 비좁은 액정 화면으로 사진의 디테일을 충분히 알아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지우지 않은 채 남겨두는 사진을 고려하고, 또한 무엇보다도, 평생 단 한 번 밖에 방문하지 못할 여행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일단 눈에 잡히는 대로 사진을 찍게 되는데, 하루 중에 메모리를 다 써버리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인도의 카쥬라호(Kajuraho)에서 필자가 이틀 동안 정신없이 찍은 사진은 대략 400장이었습니다. 메모리나 저장 공간의 한계로 그중 320장을 눈물을 머금고 버렸습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서는 1천장 이상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12개월 여행 기간 동안 찍은 사진은 대략 2만장이 넘는데 그중 2000여장만 남았습니다. 여행이 장기화될 수록 이들 사진을 메모리로 보전하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고 분실의 위험도 적지 않지요. 여행 중 특히 자주 일어나는 사고가 카메라 도난 사고인데(바깥에 나와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충분히 그 값어치를 판단할 수 있으니까요), 어떤 때는 경로가 같아 함께 여행하던 외국인 친구들이 숙소에서 슬쩍 기기를 훔쳐 달아나기도 하지요. 정작 카메라보다는 갖은 고생을 해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있는 메모리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여행자들을 심심치 않게 보았습니다. 심지어 실수로 메모리 카드를 포맷하고 술과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유명한 여행지에는 메모리에 담긴 사진을 CDROM으로 구워주는 가게들이 있는데 그 나라의 수도에서 여행자들의 숙소가 밀집한 장소, 특히 PC방에서 CD-R 서비스를 해주고는 합니다. 베이징, 방콕, 호치민 시티, 마닐라, 방갈로르, 카트만두, 델리, 꼴까타, 쉬라즈, 에스파한, 이스탄불, 다합, 과달라하라, 안띠구아, 리마, 꾸스꼬, 라 빠스 등등 여행자들이 자주 오가는 장소에는 어김없이 CD-R을 구워주는 가게가 있는데,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가격에(20불 미만) 600MB 정도의 CD를 구울 수 있습니다.
인터넷은 거의 모든 국가에서 사용 가능합니다. 여행자들이 자주 오가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PC방을 찾아볼 수 있는데 현지인들에게 물으면 잘 가르쳐 줍니다. 심지어 한국인 여행자들이 다녀간 곳이라면 한글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곳도 적지 않습니다. 아직은 USB 포트가 달린 컴퓨터나 windows xp를 운영체계로 사용하는 컴퓨터들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습니다. 대개는 windows 98을 사용한다고 보면 됩니다.
인터넷으로 사진을 전송할 수 있을까? 충분한 시간이 있으면 전송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300만 화소가 넘어가는, 프레임당 못해도 2MB 이상이 되는 사진을 인터넷으로 전송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IT 강국 답게 한국'만' 인터넷 사정이 좋지요. 미국에서 조차도 한국의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파일을 전송하는 속도가 최대 100kb/sec을 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1달러 짜리 지폐를 사용하는 internet access point에는 USB 포트가 바깥으로 나와 있지도 않고 한글 사용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달리 말해 2Mbytes 짜리 jpeg 파일을 하나 전송하는데 적어도 20초 이상 걸립니다. 미국, 일본, 중국등은 희망적인 경우이고 그외의 국가에서는 속도가 그보다 현저하게 떨어지는데, 필리핀의 마닐라 같은 경우 평균 속도가 30kbps를 넘지 않습니다. 서남 아시아, 중동, 중남미 대부분의 국가도 사정이 대동소이합니다.
인터넷 비용은 보통 한 시간에 0.5불에서 아주 비싸봤자 5불 안쪽인데, 속도를 30kbps로 가정하고, 시간당 인터넷 사용료를 1불로 가정해서, 만약 2Mbytes 짜리 사진 100장을 전송한다면 19불 정도로 그렇게 부담스러운 가격은 아니지만 19불은 19시간 동안 아무 사고없이 전송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더욱 상황을 끔찍스러워 보이게 하는 것은 56kbps 모뎀으로 접속하여 20대의 컴퓨터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한 PC방에 열댓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상황에, 시도 때도 없이 접속이 종료되는 열악한 환경입니다. 그쯤 되면 인터넷으로 사진을 전송하겠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지요.
사진을 보전하는 방법은 그래서 별도의 저장장치를 들고가던가, CDROM을 굽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필자의 경우는 장기간의 여행인데다 그렇게 구운 CDROM을 들고다니는 것도 부담스러워 사진의 크기를 640x480으로 줄여 찍은 대로 인터넷의 홈페이지로 바로바로 전송하고 노트북에도 남겨 두었지요. 잘 발달한 문명권에 등을 돌린 채 저개발국가를 중심으로 여행할 생각이라, 애당초 사진을 인화한다거나 특별히 고해상도로 보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담을 줄였고, 심지어는 한 시간 전에 돌아다니며 찍은 이국의 사진을 홈페이지에 올려두어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들에게 방송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필자는 한국의 웹 호스팅 업체에서 1-2만원을 주고 구매한 계정에 홈페이지를 꾸미고 여행 정보와 여행기와 여행 사진 등을 올려 두었습니다. 한국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잘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동시에 한국에서 열심히 일 하시라고 염장 지르기에 참 효과적인 방법이더군요. 특히 블로그(blog)가 여행기를 올리기에 적합합니다.
인터넷을 통해 친지에게 사진을 보내거나, 홈페이지에 전송하는 일에 흥미가 있으시다면 고려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개괄적인 내용이므로, 하향평준화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 사진의 용량. 위의 예에서 보셨듯이 사진의 용량을 줄이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PC방에 포토 리터칭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는 경우는 아예 없다고 보면 됩니다. 사진을 찍을 때 애당초 저해상도로 찍던가, 노트북 등의 수단을 사용하여 전송할 파일의 사이즈를 임의로 줄여놓는 방법이 있지요. 만일 노트북을 들고 다닐 사정이 안된다면 cd-rom에 프로그램을 구워놓고 pc방에서 설치하여 사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 접속 방법. USB 포트가 달려 있고 windows xp가 설치된 컴퓨터라면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USB 포트는 있는데 windows 98이라면 카메라 별로 별도의 드라이버가 필요합니다. 드라이버를 다운받을 수 있는 위치를 잘 기억해 두던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드라이버를 복사해 놓고 다운받아서 사용하는 방법이 있지요. USB 포트가 없다면? 그때는 노트북이 있어야 합니다. PC방에서 랜 케이블(RJ-45)을 뽑아 자신의 노트북에 연결하고 자신의 노트북으로 직접 인터넷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비용은 그대로 지불해야 하고, PC방에 따라 거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 전송방식. 웹을 통해 사진을 전송하는 것은 사진 사이즈의 20% 이상이 더 전송됩니다. 웹 페이지로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를 전송할 때는 base64라는 encoding 방식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원본보다 항상 20% 이상 사이즈가 큽니다. 게다가 사진을 한 장, 한 장 전송해야 하므로 눈을 뗄 수가 없고, 전송 시간이 만만치 않게 들지요. 그래서 ftp로 다수의 사진을 한꺼번에 전송하는 편이 낫습니다. 별로 권할만한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은 경우 필자가 써먹는 방법이 있습니다. PC방의 컴퓨터에 사진을 모두 옮겨놓고 ftp 프로그램으로 전송을 걸어 놓은 채 한 시간 분량의 사용료만 지불하고 슬쩍 PC방을 나오는 것입니다. 프로그램은 내가 나간 후에도 계속 돌아가는 것인데 얌체스러운 방법이지요. :)
- 한글 문제. 외국에서 한글을 사용하려면 한글입력기를 설치해야 합니다. 여행감상을 홈페이지에 올리거나 친지와 잠시라도 대화하려면, 또는 email을 보내려면 한글 사용이 필요하지요. 무수한 여행 사이트에서 이에 대한 방법을 찾을 수 있는데 한글 입력기 파일을 인터넷을 통해 다운받아 설치하는 것은 인터넷 사정이 좋을 때나 가능하므로 CDROM에 해당 프로그램들을 구워 가는 것이 좋습니다. MSN Messenger는 보통 PC방의 컴퓨터 마다 설치되어 있으므로 따로 가지고 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 PC방의 대다수 PC에 CDROM이 달려 있지 않을 경우에는 관리용 컴퓨터에 CD를 넣어두고 다른 PC에서 CDROM 드라이브를 공유해 설치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PC방에 따라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주인장에게 여기에 korean을 설치하면(korean font라고 해야 통합니다) 보다 많은 한국인이 찾아오게 되어 매출 신장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해보세요. 점원하고는 얘기가 잘 안 통하니 한국에서처럼 윗 사람(사장)과 직접 얘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습니다. USB 포트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럴 때는 카메라와 USB 케이블을 꺼내 보여주고 연결할 컴퓨터를 찾아봐야 합니다. 이런 절차가 굳이 영어나, 그 나라의 언어를 몰라도 손짓발짓으로 어떻게든 됩니다.
ftp 프로그램, 포토 리터칭 프로그램, 한글 프로그램 등을 CDROM에 담아 구워 다니는 것이 좋고요. 필자는 거기에 덧붙여 사진기의 메모리에도 여러 종류의 프로그램을 담아 가지고 다녔습니다. 128MB 메모리에서 대략 20MB 정도를 차지했는데 CDROM 드라이버가 없는 컴퓨터에서 USB 포트에 카메라를 연결해 카메라의 메모리에 들어있는 프로그램들을 PC에 옮겨놓고 설치 했습니다.
windows xp의 경우에는 한글 프로그램 설치가 특수한데 windows xp cd를 가지고 다녀야 하지요. 필요한 경우 컴퓨터 가게에 들러 보통 3-5불 가량을 주고 windows xp cd를 복사할 수도 있습니다.
노트북이나 PDA 말고도 이란의 테헤란에서 미제 GPS 리시버를 구매해서 들고 다녔습니다. 이틀 동안 건설 측량 장비를 파는 가게를 들락거리며 한푼이라도 깍아보려고 가격 협상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머나먼 한국에서 온 우리의 형제에게 사장님을 비롯한 우리 점원 일동은 지금까지 가게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스페샬 디스카운트'를 단행 하기로 결심했답니다. 여행자에게 융숭한 대접을 하는 훌륭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중동 국가들은 언제라도 다시 가보고 싶게 만드는 구석이 있습니다. 중동 사람들은 여행자를 형제라고 부르고 중남미 사람들은 친구라고 부르지요.
GPS 리시버가 있으니까 좋아진 점이 하나 있었지요. 숙소에서 나올 때 현재 위치를 찍어두고, 원없이 거리를 마구 헤메 다녀도 걱정없이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지요. 그 후로는 고대 유적지가 있는 빨렝게의 울창한 밀림에서 길을 잃어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안띠구아의 화산에서 오도가도 못한 채 화산재와 거센 비바람을 만났어도, 다마스커스의 거미줄처럼 뻗은 뒷골목 미로에서도 길을 잃어본 적이 없었지요.
여행 중 만난 한 한국인 디자이너는 사진을 잘 찍을 뿐더러 여행 경험이 많았는데 카메라 두 개 뿐만 아니라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별도로 들고 다니더군요. 친절하게 대해주는 현지인 사진을 찍어주고 건네주면서 친구를 만듭니다. 다음에 여행할 때 한 번쯤은 써먹어 보고 싶은 훌륭한 방법이에요. 하지만 그가 그렇게 훌륭한 방법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친구가 된 식당 주인에게 애써 가르쳐 준 코리안 누들 수프(라면) 맛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요.
돈 몇푼 건네주면 '토속적인' 생활을 하는 현지 원주민들의 사진을 찍는 것은 수월합니다. 그렇게 해서 경제 개념에 갑자기 눈을 뜬 원주민들이 더이상 원주민이기를 거부하고 점점 양아치가 되가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여러 감정이 생기는 일이에요. 그네들은 아침 일찌감치 일어나 전통 복식을 하고 몫 좋은 곳에 앉아 여행자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사진기를 들이대면 바로 손바닥을 내밀어 돈을 요구하지요. 여행지에서 찍은 소수민족의 전통 복식 사진과 그네들이 파는 기념품은 구분이 되지 않아요. 필자는 이런 저런 매체에 실린 소수민족의 사진을 보게 되면 몇 푼 주고 찍어서 사진을 얼마에 팔아먹었을까, 남는 장사였겠지? 뭐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전 지구적으로 어디 가나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사진을 찍겠다는 욕심이나 점점 사라져만 가는 소수민족의 문화를 망쳐놓은 여행자의 본의 아니게 몰지각한 행동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는 한번 쯤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필자는 소수민족의 사진을 찍는 것보다는 사진기를 치워두고 동네 노인네가 권해주는 술잔을 받아들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을 더 즐기는 편이고 또, 코닥 모멘트는 잠시 잊은 채 그러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소수민족들이 그네들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보전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그들에게서 TV를 빼앗고 너희들이 전통을 제대로 보전하지 않아 섭섭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전통생활로 밥벌이를 하는 것보다 더 위선적인 것이지요. 베트남을 여행할 때 하노이에서 만난 한 젊은이는 여행자를 싸잡아 제국주의자라고 하더군요. 필자는 그의 친구였기에 안 제국주의자였지요. 이집트의 룩소르에서 만난 미국인 여행객은 식당의 여러 여행자들 앞에서 시건방을 떨고, 바깥에 나가 아랍인들 앞에서 건방 떨다가 그의 목에 칼을 겨누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부랴부랴 짐을 챙겨서 고국으로 달아나더군요.
혹시 이란으로 여행하는 사람이 있으시면 에스파한의 이맘 마스지드(Masjid; mosque) 사진을 찍어 필자에게 살짝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에스파한에서 만난 독일 사진 작가들은 며칠 동안 모스크의 사진을 찍느라 추위에 벌벌 떨며 고생하고 있었는데 찍은 사진이 신통치 않아 난감해 하고 있더군요. 모스크의 푸른 빛깔을 띤 외장 타일(페르시안 블루라고 하는데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청자기 기술이 원천입니다)의 굴곡이 일정치 않아 빛의 각도에 따라 난반사가 심해서 사진이 제대로 나온 것이 없답니다. 상당한 장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진의 품질은 의외였지요.
필자의 경우, 여행담이란 것이 내가 당신보다 더 고생한 얘기를 늘어놓는 것 뿐이라면 상당히 재미가 없는 것이고, 쩍어놓은 사진을 구경하며 대리 만족을 얻는 것은 두 번 째로 재미가 없는 것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괜찮은 동료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현지에서 사람의 살냄새를 경험했다는 것은 세 번째로 시시한 것이지만, 일생을 통해 희박한 기회를 잡아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하나 뿐인 시공간 속에 거치된 '나'를 드라마틱하게 경험하는 것이라면 눈빛을 반짝이며 경청할만하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런 색다른 경험을 하려고 여행을 하고, 심지어, 속칭 '선천성 여행중독증'이라는 치료불능의 질병을 안고 떠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 처녀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새로운 경험을 아직 해보지 않은 자신의 마음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처녀지입니다. '나'와 디지탈 장비와 함께 즐거운 여행 되세요.